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도웰 교수의 머리 15,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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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벨랴예프, 도웰 교수의 머리




15. 파리로 가다! 


점심을 후닥닥 먹고 아르망이 테니스 코트로 달려갔다. 

조금 늦게 온 브리케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좋아했다. 이 사람이 자기에게 심어준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브리케는 여전히 그를 아주 흥미로운 남자로 보았다.

빈손으로 온 아르망을 보고 실망하여 물었다. 

“라켓은 어디 있어요? 오늘은 가르쳐 주지 않을 건가요?”


아르망은 벌써 며칠 동안 브리케에게 테니스를 가르쳤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아주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아르망은 이 재능의 비밀을 브리케 본인보다 더 많이 알았다. 즉, 브리케는 테니스에 능숙한 안젤리카의 훈련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직접 아르망에게 스트로크를 몇 가지 가르쳐 준 적도 있었다. 

이제 아르망은 이미 훈련된 안젤리카의 몸이 아직 훈련되지 않은 브리케의 뇌에 일치하도록 이끌기만 하면 됐다. 즉, 신체의 익숙한 움직임을 그녀의 뇌에 각인시키는 것. 브리케의 몸놀림은 가끔 자신 없고 딱딱했지만, 비범하게 노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건 그녀 자신에게도 뜻밖이었다. 예를 들어, 배운 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슬라이스를 기막히게 쳐서 아르망을 몹시 놀라게 했다. 이 노련하고 어려운 기술은 안젤리카의 자부심 중 하나였었다


브리케의 움직임을 보면서 아르망은 이따금 안젤리카가 아닌 사람과 경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바로 테니스를 치면서 아르망은 가끔 자기가 부른 대로 ‘소생한 안젤리카’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을 느꼈다. 사실 이 감정은 그가 안젤리카에게 품었던 흠모며 애틋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브리케가 석양을 라켓으로 가리고서 아르망 곁에 섰다. 그건 안젤리카의 제스처들 중 하나였다.

“오늘은 게임을 하지 않을 거요.”

“어머나, 섭섭해라! 비록 발이 여느 때보다 더 아프지만, 그래도 칠 수 있는데.”

“나랑 같이 갑시다. 우린 파리로 떠날 거요.”

“지금이요?”

“당장.”

“하지만 옷도 갈아입고 짐도 좀 챙겨야 하는데.” 

“좋아요. 딱 사십 분을 줄 테니 준비해요. 우리가 자동차로 당신을 데리러 가겠소. 얼른 가서 가방을 싸요.”

‘정말 다리를 저는군.’

멀어지는 브리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르망이 생각했다.


파리로 가는 길에 브리케의 발이 장난이 몹시 아팠다. 그녀가 좌석에 누워서 나직이 신음을 토했다. 아르망이 최대한 위로하고 달랬다. 이 여행을 통해 그들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사실 그는 브리케가 아니라 안젤리카를 대하듯이 아주 정성 들여 돌봤다. 그러나 브리케는 아르망의 배려를 그저 자기 자신에게만 돌렸다. 

그 배려에 크게 감동하여 그녀가 감상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요트에서는 나를 아주 무섭게 했는데, 이젠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그러고는 웃음을 짓는데 그게 어찌나 매력적이든지 아르망이 답례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답변의 웃음은 이미 전적으로 머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 웃음을 브리케의 머리가 웃은 것이니까. 머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파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건 브리케를 한층 더 기쁘게 하고 그 사건의 당사자를 놀라게 한 것이었다. 

통증이 극도로 심해졌을 때 브리케가 손을 내뻗어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신이 알아준다면…”

그 뻗은 손을 아르망이 자기도 모르게 쥐고 입을 맞추었다. 브리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아르망이 당황했다. 

‘젠장, 그녀에게 입맞춤한 꼴이 아닌가. 그러나 이건 그저 손이야, 안젤리카의 손이란 말이야. 하지만 통증을 머리가 느끼지 않는가, 즉, 손에 입을 맞추면서 난 머리를 가엾게 여겼어. 그러나 머리는 안젤리카의 발이 아프기 때문에 통증을 느낀다, 그러나 안젤리카의 통증을 브리케의 머리가 느껴…’ 

아르망의 머릿속이 완전히 뒤엉켰고, 그래서 더 당황했다. 

어색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아르망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출발을 친구한테는 어떻게 설명했어요?”

“설명이랄 것도 없어요.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익숙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녀도 남편과 함께 곧 파리에 도착할 거예요… 난 그녀가 보고 싶어요… 당신이 그녀를 나 있는 곳으로 불러 주세요.”


브리케가 빨강머리 마르타의 주소를 건넸다.아르망과 아르투아 도웰이 브리케를 작은 건물에 묵도록 결정했다. 드멩 거리 끝에 위치한, 아르망 아버지의 건물이 마침 비어 있었다. 

“공동묘지 옆이군요!” 

자동차가 몽파르나스 공원묘지 곁을 지날 때, 미신을 신봉하는 브리케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당신이 오래 살게 된다는 뜻이지요.” 

아르망이 위로하자, 미신을 잘 믿는 브리케가 물었다. 

“그런 징크스가 있단 말이에요?”

“아주 믿을 만한 겁니다.”

그 대답에 브리케가 안도했다. 


제법 아늑한 방에 놓인 아주 크고 고풍스러운 침대의 천개(天蓋) 아래 환자를 눕혔다.

브리케가 쿠션 위로 몸을 던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와 간병인을 불러야겠어요.”

아르망이 말했지만 브리케가 한사코 거절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신고할까 겁을 낸 것이다.

아르망이 자기 친구인 젊은 의사에게 발을 보이고 수위장의 딸을 간병인으로 부르자고 어렵사리 브리케를 설득했다.

“이 수위장은 우리 집에서 이십 년을 일하고 있어요. 그와 그 사람 딸을 전적으로 믿어도 좋아요.”


부름을 받은 의사가 아주 벌겋게 부어 오른 발을 살핀 뒤, 찜질을 처방하고 브리케를 위로하고 아르망과 다른 방으로 나갔다. 

“그래, 어떤가?”

아르망이 걱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일단 심각하지는 않지만 주시해야 하겠네. 이틀에 한 번씩 내가 와 보겠어.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네.”


아르망이 아침마다 브리케를 찾아봤다. 한번은 방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간병인이 자리를 비우고 브리케 혼자 졸고 있었다. 아니면 그저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녀 얼굴이 갈수록 더 젊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스무 살도 안 돼 보였다. 어찌 된 셈인지 얼굴 윤곽이 곱상해지고 더 부드럽게 변했다. 

아르망이 까치발을 하고 침대로 다가가 허리를 꺾고 오랫동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안젤리카의 ‘유해’에, 혹은 브리케의 머리나 브리케 전체에 입을 맞추는 것인지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브리케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고 아르망을 보았다. 창백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기분이 어때요? 내가 깨운 건 아닌가요?”

“아니요, 잠을 자는 게 아니었어요.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요. 이 통증만 없다면...”

“의사 말로는 심각한 게 전혀 없답니다. 편안히 누워 있어요, 곧 나아질 거예요...”


간병인이 들어왔다. 아르망이 고개를 까닥이고 밖으로 나갔다. 브리케가 다정한 눈길로 그를 배웅했다. 

그녀의 인생에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섰다.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되기를 바랐다. 카바레와 댄스, 샹송, ‘샤누아르’의 흥겹게 취한 술꾼들 따위는 다 의미와 가치를 잃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행복에 대한 새로운 꿈이 그녀 가슴에 생겨났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아르망도 의심하지 않는, ‘부활’의 가장 큰 기적일지도 몰랐다! 안젤리카의 깨끗하고 순수한 몸이 브리케의 머리를 젊게 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생각 자체를 바꾸었다. 카바레의 선머슴 같던 여 가수가 수줍은 아가씨로 바뀐 것이다.




16. 코른의 제물 


아르망이 정성 다해 브리케를 돌보는 동안 아르투아 도웰은 코른의 자택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둘은 필요하다면 아무 때고 브리케와 상의했다. 그녀는 저택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아르투아 도웰은 행동에 더 조심을 기하기로 했다. 브리케가 사라진 뒤 코른이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할 것이 분명했다. 그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을 상대로 이미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코른이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하지 않게끔 일을 꾸며야 했다.

도웰이 아르망에게 말했다. 

“우리는 더 교묘하게 움직여야 하네. 마드무아젤 로랑의 거처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야. 그녀가 코른과 함께 있지 않다면 여러 모로 브리케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거야.”


로랑의 주소를 크게 힘 들이지 않고 알아냈다. 그러나 아파트를 찾아가서는 도웰이 실망했다. 로랑은 없고 그녀의 어머니만 있었기 때문이다. 점잖게 보이는 노부인은 옷차림이 단정했지만, 눈물을 달고 사는 까닭에 눈이 퉁퉁 붓고 사람을 잘 믿지 못했으며 비탄에 잠겨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마드무아젤 로랑을 볼 수 있습니까?” 

도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노부인이 의아하다는 눈길을 꽂았다. 

“내 딸을? 당신이 그 아이를 아나요?.. 당신은 누구시며, 내 딸을 왜 찾는 거지요?” 


아르투아 도웰이 로랑 부인을 만나 얘기 듣다.


“괜찮으시다면...”

“들어오구려.”

로랑의 어머니가 방문객을 작은 객실로 들였다. 부드러운 소파에는 레이스 달린 흰색 커버가 덮이고, 벽에는 젊은 여인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흥미로운 아가씨로군.’ 하고 생각하면서 아르투아가 자기를 소개했다.  

“내 성씨는 라디에입니다. 시골 의사인데, 어제 툴롱에서 왔습니다. 언젠가 마드무아젤 로랑의 대학 동기들 중 한 아가씨와 알게 됐습니다. 한데 그녀를 여기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 마드무아젤 로랑이 코른 교수 곁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내 딸의 대학 동기는 이름이 뭐랍니까?” 

“리시라고 하지요!”

“리시, 리시라고!.. 그런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 로랑 부인이 생각을 더듬고는 믿기 어렵다는 눈빛을 띄면서 물었다. “댁은 혹시 코른이 보낸 사람 아니우?”

“아니에요. 코른이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아르투아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분과 알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그분은 내가 아주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일련의 실험을, 그것도 가장 흥미로운 실험들을 그분이 자택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람이어서 자신의 성소에 아무도 들이려고 하지 않아요.“


노부인이 아는 바로 그 말은 사실과 흡사했다. 코른 교수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살며 아무도 집안에 들여놓지 않는다는 말을 딸한테서 몇 차례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 거냐?’”하고 물었으나 딸은 막연한 대답만 했었다. “갖가지 과학 실험을 해요.”


“그래서...” 도웰이 말을 이었다. “먼저 마드무아젤 로랑과 인사를 나눈 뒤 어떻게 하면 내 소망을 이룰 수 있겠는지 도움말을 듣기로 한 겁니다. 따님이 분위기를 잡고 코른 교수와 미리 애기를 나누고 나를 소개해 집안으로 들일 수 있을 거예요.”

젊은이의 외모에는 믿음이 갔지만, 코른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불안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로랑 부인은 대화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몰랐다. 노부인이 무거운 탄식을 내뱉고,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누르면서 말했다. 

“딸은 집에 없다우. 병원에 있지요.”

“병원이라구요? 어느 병원입니까?”


로랑 부인이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슬퍼해온 탓에, 이제는 조심성과 경계심을 내던지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낯선 손님에게 다 털어놓았다. 어느 날 딸이 귀가하는 대신 난데없이 편지를 보내 중환자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한동안 코른의 자택에 머물 것이라고 알렸다, 딸이 보고 싶어 코른의 집을 찾아갔지만 헛수고만 했을 뿐이다, 그 뒤로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조마조하여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코른의 전갈을 받았는데, 딸이 신경쇠약에 걸려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고...


   “그 코른이란 작자를 난 증오해요.” 노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바로 그자가 내 딸을 미치게 만든 게라오. 딸이 그 집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 난 몰라요. 딸이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리가 그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안다우. 내 딸 같지가 않았다우.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집에 돌아오고 입맛도 잃고 잠도 이루지 못했어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잠결에, 어떤 도웰 교수라는 사람의 머리와 코른이 자기를 쫓아온다고 하질 않나… 

코른이 딸의 급료라면서 상당히 많은 돈을 우편으로 보내왔고, 지금까지도 보내오고 있다우. 하지만 난 그 돈에 손도 안 댔지. 건강은 그 어떤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건데… 난 딸을 잃었다우...” 


노부인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면서 아르투아 도웰이 판단했다.

‘그래, 이 집안에는 코른의 공모자가 있을 수 없어.’ 

그래서 진짜 방문 목적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부인,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나도 적잖은 근거를 가지고 코른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부인의 딸이 필요합니다. 코른과 어떤 일을 정산하고… 그의 범죄를 파헤치기 위해서 말이지요.”

로랑 부인이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아, 걱정 마십시오. 따님이 이 범죄에 연루된 건 아니니까요.”

“내 딸은 범죄 따위를 저지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겁니다.” 

노부인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나는 마드무아젤 로랑의 도움을 좀 받고자 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따님은 미치지 않았으며, 코른 교수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됐을 겁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왜냐면, 부인 말씀대로, 따님은 범죄를 저지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필경 코른은 따님을 위험한 존재로 보았을 겁니다.”

“한데, 자꾸 범죄, 범죄 하는데, 도대체 무슨 범죄란 것이우?”

아르투아가 로랑 부인을 아직 잘 모르고, 그래서 혹시라도 노인이 주책없이 입방정을 떨까 우려하여 자세한 언급은 삼가기로 했다.

“코른은 불법 수술을 해 왔습니다. 그자가 따님을 어느 병원에 보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로랑 부인은 조리 있게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간간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코른은 오랫동안 나한테 알리지 않았다우. 내가 찾아갔을 때 집으로 들이지도 않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우. 그는 공손한 답신을 보내서, 딸이 머잖아 회복돼 집으로 돌아갈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려고 들었어요.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 딸이 어디 있는지 당장 알려주지 않으면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병원 주소를 알려왔어요. 병원은 파리 외곽 스코에 있어요. 라위노라는 의사의 사설 병원입디다. 

아아, 거기로 한걸음에 달려갔다우! 근데 마당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지 뭐유. 그건 병원이 아니라 돌담으로 둘러싸인 진짜 감옥이라우... 문지기가 그럽디다. ‘병원 규정상 가족을 일절 들이지 않아요. 친엄마라 해도 안 돼요.’ 그래서 당직 의사를 불렀는데, 그 사람도 같은 말만 합디다. ‘부인, 가족이 방문하면 환자들의 안정이 깨지고 정신 상태가 더 악화됩니다. 따님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것만 말씀 드리지요.’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았다우.”

“그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 해도 내가 따님을 한 번 만나겠어요. 그녀를 아예 데리고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르투아가 주소를 꼼꼼하게 적은 뒤 작별을 고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할 겁니다. 마드무아젤 로랑을 친누이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믿어 주십시오.” 

그러고는 또 갖가지 조언과 감사의 말을 한바탕 듣고 나서 방을 나왔다. 


아르투아 도웰이 당장 아르망을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며칠 동안 내내 브리케와 보내고 있었다. 도웰이 뒤멩 거리로 향했다. 작은 건물 곁에 아르망의 자동차가 서 있었다. 

아르투아가 단숨에 이층으로 올라가 객실로 들어섰다. 

“오, 아르투아, 큰일 났어.”

아르망이 사색이 되어 방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검은 곱슬머리를 쭈뼛 세웠다.

“무슨 일인데?”

“아!..” 친구가 신음했다. “그녀가 달아났어…”

“누가?”

“누구긴, 마드무아젤 브리케지!”

“달아났다고? 아니, 왜? 좀 알아듣게 얘기하게!”


그러나 아르망은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방안을 바장이며 탄식하고 신음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십 분을 넘기고서야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어제 마드무아젤 브리케가 아침부터 발의 통증이 심해졌다고 호소했어. 발이 상당히 붓고 퍼렇게 됐네. 의사를 불렀지. 그가 발을 살피더니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하더군. 괴저가 시작되어서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거야. 의사는 집에서 수술하기가 힘드니까 병자를 즉각 병원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네. 그러나 마드무아젤 브리케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어. 병원에서 자기 목에 난 상처가 눈에 띌까봐 겁을 낸 거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코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더군. 코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자기 집에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이제 가혹하게 벌을 받았다는 거야. 그녀는 코른을 외과의로서 신뢰하고 있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살려내고 새 몸통을 준 바에야, 내 발도 당연히 치료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에게 이건 식은 죽 먹기에요.’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네. 난 그녀를 코른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꾀를 쓰기로 했지. 내가 직접 코른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한 거야. 그러나 브리케의 ‘부활’ 비밀이 알려지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야 했네. 즉, 아르투아, 자네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아는 의사들과 상의하려고 한 시간쯤 나가 있었어. 그런데 돌아와 보니 벌써 없어진 거야. 내가 속이려고 했는데, 그녀가 나와 간병인을 멋지게 따돌린 셈이지. 침대 옆 탁자에 쪽지 하나만 달랑 남기고 떠났네. 바로 이거야, 보게나." 

  아르망이 아르투아에게 건넨 종이쪽에는 연필로 서둘러 쓴 단어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아르망, 용서해 줘요. 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코른에게 돌아가요. 나를 찾지 말아요. 코른이 이전에 한 것처럼 

        나한테 다리를 붙여줄 거예요. 곧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시 

        본다는 생각에 그나마 마음이 놓여요.」


“흠, 서명이 없네.”

“잘 보게, 필체를.” 아르망이 말했다. “좀 달라지긴 했지만, 이건 안젤리카의 필체야. 땅거미가 내릴 때나 손이 아플 때 안젤리카는 이런 식으로 더 굵게 휘갈겨 쓰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달아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아, 그녀가 코른한테서 도망해 나한테 왔지만, 결국은 코른에게 돌아간 거야. 여기로 돌아와서 새장이 텅 빈 걸 보고는 간병인을 죽이고 싶었어. 알고 보니 간병인도 헷갈리게 됐더군. 브리케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전화기로 다가가서 나하고 통화를 했다는 거야. 한데 그건 속임수였지. 나한테 전화한 게 아니었어. 브리케가 통화를 끝내고 간병인에게 설명하기를,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다 마련했으며 브리케가 신속히 병원으로 오라고 부탁했다는 거지. 그리고 간병인에게 자동차를 부르게 한 뒤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자동차에 올라타고는, ‘여기서 멀지 않아요.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나를 내려 줄 거예요.’ 하면서 혼자 떠난 것이네. 간병인은 그런 일이 다 내 지시에 따른 것이고 내가 훤히 알고 있다고 믿은 거야, 아르투아!”

아르망이 다시 심하게 동요하면서 소리 질렀다. 

“당장 코른한테 가겠네. 그녀를 거기에 있게 할 수 없어. 벌써 전화로 자동차를 불렀네. 함께 가세, 아르투아!”


아르투아가 방안을 바장였다.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브리케가 코른의 저택에 관한 정보를 이미 다 알려주었다고 해도, 그녀 자체가 코른을 파멸시키는 확실한 증거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향후 행보에서 그녀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얼빠진 아르망은 이제 나쁜 조력자이다.

아르투아가 화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보게, 친구. 지금은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결속을 다지고 경솔한 행위를 삼가야 하네. 브리케는 이미 코른의 집에 있어. 엎질러진 물이지. 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를 우리가 미리 경계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을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브리케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코른에게 속속들이 고할까? 그녀가 탈주한 뒤 우리와 친해지고, 우리가 코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따위를...”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네.” 아르망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트에서도 그렇고, 그 뒤에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한 걸. 그녀는 이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동기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걸세.” 

그 동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르투아는 이해했다. 아르망이 브리케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을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알아차렸다.

‘가엾은 낭만주의자. 비극적인 사랑만 하는군. 이번에는 안젤리카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사랑도 잃겠어. 하지만 아직 다 잃은 것은 아니지.‘


“인내심을 가지게, 아르망. 우리 목표는 같아. 힘을 모으고 주도면밀하게 게임을 하는 거야. 우리에겐 두 가지 길이 있네. 코른에게 신속한 타격을 가하든지, 아니면 먼저 우회적인 방법으로 내 부친의 머리와 브리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내는 거야. 

브리케가 달아난 뒤 코른은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하고 있지 않겠나? 만약 그가 내 부친의 머리를 아직 없애지 않았다면, 단단히 숨겨 두고 있을 거야. 머리는 몇 분이면 처리할 수 있어. 경찰이 문을 두드린다 해도, 그는 문을 열어주기 전에 범죄 흔적을 말끔히 없앨 거야.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 찾네. 브리케도 ‘범죄의 흔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게, 아르망. 

코른은 불법 수술을 자행해 왔어. 어디 그뿐인가? 안젤리카의 시신을 불법적으로 빼돌렸네. 코른은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작자야. 내 부친의 머리도 아무도 모르게 되살리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나. 부친이 사후에 시신을 해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당신 머리를 소생시키는 실험에 동의했다는 얘긴 들을 적이 없어. 

코른은 머리의 존재를 왜 모든 이들한테,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감추는 건가?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거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브리케가 그에게 필요한 거지? 그자가 사람들을 상대로 생체 해부를 하는 건 아닐까, 브리케를 실험용 토끼처럼 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러니까, 그녀를 더 빨리 구해야 하잖아!” 

아르망이 뜨겁게 반박했다. 

“물론 구해야지, 하지만 그러다가 죽음을 재촉해서는 안 되네. 우리가 찾아가면 코른은 그런 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더 느긋한 길로 가는 거야. 이 방법을 더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도록 하세. 마리 로랑이 브리케보다도 훨씬 더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다네. 로랑은 저택 구조를 알고, 머리들을 돌보았네. 어쩌면 내 부친과... 그러니까, 머리와 얘기를 나눴을지도 몰라.”

“그러면 로랑을 빨리 만나세.” 

“오호, 그녀도 먼저 탈출시켜야 하네.”

“코른의 집에 있나?”

“병원에 있어. 우리 같은 정상인들을 필경 돈을 먹고 환자라고 가둬 두는 병원들 중 하나일 거야. 작업을 제법 많이 해야 할 걸세, 아르망.” 

도웰이 로랑 부인과 만났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저주받을 코른! 그자는 주변에 불행과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어. 나한테 걸리기만 하면…”

“그가 걸려들도록 하자구. 그러려면 가장 먼저 로랑과 만나야 하네.”

“당장이라도 거기로 가겠어.”

“그건 경솔한 짓일 수 있네.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에만 우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도록 할 필요가 있네. 일단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이용하세나. 우리 자신은 적에게 드러내지 않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내새워야 하네. 확실한 사람을 찾아서 그가 스코로 가서 간호사들이며 간병인, 요리사, 경비들과 안면을 트게 하는 거야. 그들 중 하나라도 구워삶게 된다면, 일은 절반 성공한 셈이지.”


아르망이 조급하게 굴었다. 본인이 직접 행동에 나서고 싶어 했다. 그러나 더 이성적인 아르투아의 말을 받아들이고 결국 조심스러운 작전에 동의했다.


“근데 누구를 부르지? 아, 그래, 샤우브가 있어! 젊은 화가, 얼마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왔지. 나랑 잘 알아, 좋은 사람이고 뛰어난 스포츠맨이야. 그에게는 이 일이 스포츠 같을 거야. 젠장, 내가 직접 나설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

“이 일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나?” 

아르투아 도웰이 웃음기를 띠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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