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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8. 일시의 작동 원리 (메커니즘)  

 

동일시의 메커니즘과 여러 유형를 살펴보자
앞장에서 규명했듯이, 동일시는 우리에게 엄청난 역할을 한다. 

동일시는 우리의 감정 상태와 신체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면, 동일시가 뭔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동일시의 메커니즘과 유형

 

우리는 자신과 자기 존재에 대한 어떤 느낌이나 촉(?)이 있음을 알아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미하면서 ‘나, 나, 나…’라고 말할 때 그걸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 생기는 느낌을 우리는 자아감이나 자아의식, 자기인식, 자기 감각 등으로 불렀다. 

 

자아감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뭔가를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때, 우리는 그걸 다 우리가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난 먹고 싶어”, “난 내일 뭘 할까 생각해”, “난 기분이 안 좋아” 등등을 말할 때, 이 언급에서 우리가 뜻하는 ‘나’를 우리는 자아감이라 부르는 것이다. 

자아감은 우리 몸 어디에 있나? 흔히들 말하기를…

“나는 내 눈 뒤 머릿속이나 가슴 어딘가에 있어. 거기서 모든 것을 지켜봐.” 

 

‘나’라는 느낌이 내 눈 뒤쪽 어딘가에 있다고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수야. 나는 엄마야. 난 한국인이야 등등. 그리고 ‘교수라는 것’은 일이나 직업이지 ‘나’라는 느낌이, 자아감이, 절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내가 정말로 교수라면 난… “교수는 먹고 싶어 해”, “교수가 숲을 거닐고 있어”, “교수가 자녀들을 키워” 같은 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이건 정말 우스꽝스러운 발상이요 말법이 아니겠는가. 자녀 양육은 교수가 아니라 아버지가 한다. 즉, 교수란 일이나 직업일 뿐이다. 

 

따라서 “난 교수로 일하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고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서는 많은 사람이 “난 교수야” 하고 말하는데, 이건 모든 걸 뿌리째 바꾼다. 왜냐면 ‘나’라는 느낌이 ‘교수’라는 이미지와 동일시되니까

 

여기서 ‘교수’ 대신에 다른 여느 직업을 넣어도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에 다 해당한다. <직업과 동일시>라는 현상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 동일시를 예를 들어 “나는 목수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 목수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목수이고 어떤 순간 그 일을 한다면, 그 순간에는 자신을 바로 목수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직무상 다른 사람들을 접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행동하는 투를 관찰하면 완벽하게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트의 계산원이나 판매원은 당신을 대할 때 바로 계산원이나 판매원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그들은 자기 직업과 자신을 확실하게 동일시하니까 그렇다. 

만약 계산원이 업무 현장에서 갑자기 당신에게 자기네 살림살이가 요즘 힘들다거나 어제 시장에서 아는 누구를 보았다거나 최근에 아이들이 엄마인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는 둥 늘어놓는다면, 이건 계산원 역할과 분리되고 거기서 벗어나 당신의 친구 같은 역할로 들어선 것이다. 다행히 실제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테면 직업과 같이 자기 역할들 가운데 하나와 동일시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는 순수한 ‘나’ 느낌으로서의 자신을 잊고 액면 그대로 자기 역할이 되어 버린다.

이건 자기 망각이요, 자아 상실이다.

혹은, 자기 역할에 지나치게 빠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어떤 역할이나 일에 그렇게 몰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요리에 하도 몰두하는 바람에 자신을 시야에서 놓친 것처럼 감지하기를 잊는다. 그리고 몰아(沒我) 상태에서 이 시간에 우리가 의식한 것은 요리 과정뿐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요리 과정이 되고 만 것이다.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의식적으로 ‘나’ 느낌에 주의를 일부 기울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역할을 진행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면, 자기 역할을 바깥에서 보듯이 지켜보게 된다. 그때 당신이 곧 그 역할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목수 김 씨가 일터에서 작업하면서 그 일을 하는 자신을 의식한다면, 그는 이미 목수 역할과 동일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 일을 계속 수행하면서도 바깥에서 보듯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자아감과 작업 과정을 별개로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을 목수라는 직업과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상태가 바로 분리(disidentification)라고 불린다. 실제에서 분리는 역할 수행뿐 아니라 몸이며 젠더, 추상적 이미지 등 모든 형태와 자아감이 동일시되는 것과도 연관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어떤 역할과 분리 상태를 알려면,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지금 순간에 현존하기만 하면 된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치자.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을 승객 역할과 동일시한다. 이 역할에는 어떤 행동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승차권 구입,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내밀한 영역에 들어서도 반발하지 않기 등. 

버스에 올라타는 즉시, 승객의 역할이 시작된다. 이때 의식을 계속 가동한 상태로, 버스에서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 보라. 그러면서 자아감을 일부나마 시야에 두고 있으라. 이 과정과 자신의 행동이며 생각이며 감정을 관찰하는 동안, 당신은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승객이라는 역할과 분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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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당신이 동일시될 수 있는 다른 여느 형태하고도 그렇게 하면 분리가 가능하다. 자신의 젠더와 동일시되지 않으려면, 당신이 남자나 여자로서 행동할 때 당신의 젠더와 상관없이 자신을 그냥 관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여자라면, 남자들이나 다른 여자 친구들과 대화하는 동안 당신의 행동과 생각, 감정에 당신의 여성 이미지나 여성관이 들어섬을 알아차리라. 당신은 남자들에게 애교를 피우거나 화장을 하고 다른 여자들과 수다를 떨 수 있다. 당신의 행동에 나타나는 요소가 전부 대개는 당신이 여자라는 이미지에 포함된다. 

당신이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동안, 당신은 그 역할과 분리된다. 하지만 관찰을 멈추는 즉시, 당신은 자신을 그 역할과 자동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유형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당신은 자신을 그 형태와 자동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즉, 엄마로 행동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엄마이며 그 역할과 동일시될 것이다. 승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승객일 것이다. 당신이 자기 몸과 동일시됐음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당신 몸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나 승객이나 몸 등 동일시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즉시, 이것은 내가 동일시하는 또 다른 형태일 뿐이며, 진짜 ‘나’는 여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는 ‘나’라는 느낌이요, 자아감이다. 
이때 ‘나’가 있고, 또 역할이나 몸이나 생각 등의 동일시 형태가 따로 있다. 
이것이 동일시에서 벗어난 상태, 분리된 상태이다. 

 

그런데, 많은 생각과 분리되기 위해서, 즉, 잡념을 떨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가 필요하다. 여러 생각을 당신 마인드에 있는 이미지처럼 관찰만 하라.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나?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난 글을 읽고 있어” 하고 말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사실이야. 그리고 이건 당신 생각이며 이 생각이 당신한테서 나온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렇게 해 보라. “난 글을 읽고 있어” 하고 다시 말하되, 이번엔 이것이 그냥 말이며 당신 마인드에 있는 생각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라. 이 생각이 있고, 그걸 인식하는 당신이 있다. 이 경우, 같은 생각이 이번엔 당신한테서 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생각과 분리된 것이다

 

자기 생각과의 분리가 언제 어디서 유익할 수 있는지 아나? 사람들과 대화에서, 특히 논쟁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태백산 밑에 ‘미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는지를 두고 당신이 친구와 갑론을박한다고 치자. 당신은 태백산에 갔다가 그 카페에 들렀기 때문에 그게 있다고 말한다. 한데 친구는 자기가 그 지역에 있는 카페를 다 다녀 봤지만 그런 간판은 못 봤기 때문에 그런 카페는 없다고 말한다. 

당신이 그 카페가 거기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자기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이 생각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당신이 틀렸으며 당신은 그 지역을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 당신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당신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당신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당신이 그 생각과 동일시됐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하지만 그건 당신 마인드에 있는 하나의 생각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그 생각과 분리된다.

더욱이, 생각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것과 분리된다.

 

당신의 어떤 생각이 있고, 또 자아감으로서의 당신이 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하는 친구의 말이 이젠 당신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 건드릴 것이다. 그러면 당신도 친구 말에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이건 누군가가 당신 코트를 칼로 찢은 것과 비슷하다. 이때 당신이 상처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칼이 당신 피부를 자른다면, 아프겠지.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걸친 외투 같은 것이라고 상상하라.

당신 자체는 아니다.

그렇게 여기면, 아픔도 없을 것이다

 

당신의 어떤 생각이 검증된 게 아니며 불쾌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궁리한 것일 때, 그런 생각과 분리는 아주 유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 여자 친구가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 어디선가 놀고 있다고 치자. 게다가 그녀가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누군가 알려줬다. 당신 상상은 그녀가 배신하는 장면을 금방 그려낸다. 그래서 “지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고 있는 게 분명해!” 하고 혼자 말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믿으면서 그 생각과 동일시된다면, 강한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불쾌해짐을 인식한다면, 당신은 이것이 한낱 생각일 뿐이며 여자 친구가 배신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분리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믿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리라. 전화를 걸어 어떤 일인지 알아내리라. 알고 보니, 당신 여자 친구와 함께 있던 젊은 남자는 그녀의 오빠였더라. 

 

이 정보와 새로운 생각이 당신 감정 상태를 순식간에 바꿔 놓음에 주목하라.

그 이전에는 화가 잔뜩 났었는데, 그다음에 화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것이 생각의 진정한 힘이다! 특히 당신이 동일시된 생각의 힘이 그러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당신에게 가능한 상태가 두 가지 있다. 

동일시와 분리. 

 

전자의 경우, 당신은 어떤 생각이나 역할, 물질적 형태와 동일시됐음을 깨닫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고 인식한다. 혹은, 당신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고 안다. 혹은, 자신의 다른 어떤 발현을 인식한다. 이때 자신의 현존 의식과 자아감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또 동일시 상태에서는 자신의 발현을 통제할 수 없으며 분리 상태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따라서 많은 영적 멘토들은 의식 상태에 현존하는 것이…
즉, 자신의 어떤 발현을 관찰하고 그것과 별개의 현상으로 자아감을 관찰하면서 분리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만 제대로 해도 숱한 불필요한 불쾌한 일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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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7. 동일시(Identification)의 영향 (1)  

 

실제로 우리가 아닌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본 유형을 앞에서 몇 가지 살펴봤다

“나는 걷고 있어”, “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난 생각해” 하고 말할 때,

<나>라는 느낌이 (자아감이) 추상적인 이미지나 느낌, 역할, 생각, 감정 등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다. 

 

the influence of identification

 

이 자아감이 어떤 유형과 동일시되지 않을 때, 그건 <나>라는 순수한 자아감으로 남는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유형과 동일시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이름과 동일시는 아마도 자기 이름이나 가문을 자랑스레 여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동일시의 영향은 잠시 놔두자. 다른 더 중요한 유형과의 동일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직업과 동일시를 먼저 본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경찰서장으로 일한다면, 자신의 비교적 높은 지위와 그 위치가 주는 측면을 크게 평가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경찰서장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경찰서장으로 일해” 하고 말하는 것과 
“나는 이 지역의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하는 것은 
차이가 상당히 크다.

 

전자의 경우 당신은 경찰서장이 단지 당신의 직업일 뿐이며 당신이 수행하는 일로 간주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의 직위와 동일시한다. 

전자의 경우, 어떤 사유로든 직위에서 물러나거나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대한다 해도, 당신은 크게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직업이 주는 지위와 권력과 경제적 이점 등과 동일시했다면, 그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사람들이 썩 존중하지 않는다 싶을 때 당신은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와 동일시된다면, 이 ‘무엇’에 해를 끼치거나 위협이 되는 것에 강한 두려움을 품고 저항한다는 점이다.

이건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타고난 반사 작용이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시 살펴보자.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나는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한다. 이제 당신이 경찰서장 직위에서 밀려난다. 이건 본질적으로 당신 직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요 나아가 수십 년 경찰 생활의 파멸을 뜻할 수도 있다. 

한데 당신이 그 직무와 또 거기서 나오는 지위며 권력이며 보수 등과 동일시된 만큼, 이 위협을 당신은 자신을 겨냥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당신이 자신과 동일시한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당신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당신의 마인드와 몸은 바로 그렇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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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 당신은 한 지역의 경찰서장이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을 중요하고 존중받고 물질적으로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젠 그걸 다 잃었다. 당연히 자신이 파멸된다고 느낄 것이다. 한데 사람이 파멸될 때, 그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고 거기에 최대한 저항한다. 자신의 직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그걸 잃은 사람은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경찰서장이 아니라 단지 그 직무를 맡고 있는 것임을 아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런 사람은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한 게 없으며 이 직무가 단지 한시적이라는 것도 잘 이해한다. 
이런 경우, 앞에서 말했듯이,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으며,
직위 해제나 면직 따위를 좀 곤혹스럽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사실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신의 제법 높은 지위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상당히 깊게 발달해야 하며, 동일시가 무엇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자기 몸과 동일시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자. 

 

자기 몸과의 동일시. 거울 들여다보면서 뚱뚱하다고 여기는 여인

 

당신이 자기 몸을 자신이라고 간주할 때, 몸과 관련돼 일어나는 일이며 변화가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화, 부상, 아름다움의 상실, 비만이나 비쩍 마름, 신체의 불균형 등이 전부 아주 부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 아름다운 외모와 균형 있는 신체, 매끈한 몸매, 젊음 등이 우리의 자부심이 되며, 그런 것과 동일시되기가 아주 쉽다.

 

당신이 자신의 미모나 젊음과 동일시된다면,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사라질 때 당신에겐 극도의 불쾌한 상태가 야기되며 심한 경우 우울증까지 나타날 것이다. 그 이유는 똑같다. 신체 노화를 당신 마인드가 당신 자체의 점진적인 파괴와 같은 것으로 보겠기에 그렇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자기 몸이라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직시하자. 

당신의 자아감이나 자기인식이 당신 몸의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든 달라졌나?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자기인식은 자기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느낌을 뜻한다. 

당신의 <나> 느낌은 당신 몸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다.
질병 상태조차도 그 느낌을 건드리지 못한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느끼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유년기에도 노년기에도 우리는 우리 본연의 자신 그대로이다.
이 때문에 노인들이 젊었을 때와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지, 몸이 이젠 닳고 노화됐을 뿐이지. 

 

성별과 (gender와) 동일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당신이 자신을 진짜 사나이라고 여기는 데 익숙하다면, 당신한테서 그런 이미지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전부 강한 두려움과 분노를 야기할 것이다. 남자라고 여기는 기준에는 성적인 특징뿐 아니라 일정한 행동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남자들 무리에서 당신이 사나이라면 술 마실 줄 알고 싸움질도 사양하지 않고 여자도 자빠뜨릴 줄 알아야 한다는 관념이 있다. 그런 면을 다 갖추고 있다면, 비로소 사나이가 된다. 

하지만 어쩌다가 위궤양이 생겨서 예전처럼 호탕하게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이제 남자라는 이미지가 좀 흔들린다. 당신은 아직 남자이긴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이미지의 사나이는 못 된다. 그러고 나서 결혼하게 됐다. 이제 당신이 무슨 남자란 말인가? 아내 엉덩이에 깔린 신세가 됐는데! 그건 이미 사나이가 아니다. 이제 자신이 남자라는 느낌이 크게 공격을 받는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 진짜 남자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있고 그것과 동일시됐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 이미지와의 동일시뿐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 존중받음이나 의리나 젊은 여성한테 사랑받음 것처럼 동일시에서 얻는 이점과도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자라는 이미지에 그렇게 집착한다면, 당신을 조종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이제 당신에게 뭔가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 넌 남자잖아. 사나이가 뭐 그래.” 

혹은 여성은 당신을 이렇게 조종할 수 있다. 

“당신이 진짜 남자라면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줄 텐데.” 

그리고 당신은 남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들 말대로 끌리게 된다. 

이건 다 당신이 자신을 남자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여성들 경우에도 비슷하다.

젊은 여자가 ‘여자다운’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이미지가 공격받을 때 괴로움이 클 것이다. 

“아직도 사귀는 남자가 없어?!”, 

“넌 이 원피스를 사흘째 입고 다니는구나!”, 

“얘, 넌 뚱뚱해졌어!” 등등 여자 친구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에 심하게 상처받기 쉽다. 

그건 다 자신을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이는 반응, 진짜 남자나 진짜 여자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당신 본연의 모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당신을 계속 칭찬하거나, 혹은 그들 보기에 당신이 그리 남자답지 못하거나 여자답지 못하다면 계속 흠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대한 당신 반응은 남자나 여자에 대한 이미지에 당신이 얼마나 동일시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전혀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당신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남녀 이미지에 당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데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 자기 생각이나 감정과 동일시하면 어떻게 되나?  <계속> )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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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6.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3)  

 

(계속)

우리가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몸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몇 가지 실험에서 보고 알 수 있다. 

 

첫 번째 실험은 한 사람에게 세 번째 손이 있다는 환상이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피험자를 탁자 앞에 앉혔다. 이때 그의 두 손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오른손 곁에 그 손과 빛깔이며 형태, 크기가 아주 흡사한 모형 손을 놓았다. 그다음에 실험자가 이 사람 손의 한 부위와 모형 손의 같은 부위를 동시에 브러시로 건드렸다. 몇 번을 그렇게 했다. 

 

사람에게 세 번째 손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실험

(연구자들은 이 환상을 아주 실제처럼 만들었다. 

실험에 참여한 남자와 여자들 모두 그들의 모형 손에 브러시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 대자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걸 지켜보면서 피험자에게서는 자기 오른손을 점점 더 잘못 인식하게 됐다.

결국엔 두 개의 손 가운데 어떤 것이 자기 것인지 더이상 분간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자기한테 오른손이 두 개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즉, 자기한테 손이 3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 

이런 느낌은 뇌가 보는 정보를 느끼는 정보와 어떻게든 일치시키기 위해 뇌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실험은 인체 크기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느낌의 유발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피험자 머리에 3차원 가상현실 헬멧을 씌워서, 마네킹 맞은편에 둔 카메라가 잡은 것을 피험자가 3차원 형태로 보게 했다. 카메라는 고개 숙여 자기 몸을 볼 때 보이는 마네킹 몸체를 보여주게끔 설치했다. 처음엔 피험자 몸 크기의 마네킹을 취하고 다음엔 더 작은 것, 그다음엔 더 큰 마네킹을 이용했다.

 

여러 크기의 마네킹을 이용하여 사람의 환상을 실험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이 실험 성공에 아주 중요하다. 

피험자의 눈으로 본 상황은 아래 제시했다) 

 

이때 실험자가 피험자와 마네킹의 발에서 같은 부위를 두 개의 막대기로 동시에 건드렸다.

피험자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 몸을 보는 듯한 상태에서 카메라가 보여준 것을 관찰했다.

카메라에 나타난 장면은 이것이었다.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중요해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이 실험 성공에 아주 중요해.

 

그 결과 그의 몸이 다른 몸이 된 듯한 느낌이 생겼다.

피험자는 마네킹을 자기 몸처럼 느꼈다.

이 효과는, 위의 그림에서 보인 대로, 실험자가 인체와 마네킹의 같은 부위를 막대기로 건드림으로써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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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의 크기가 피험자의 몸 크기와 같을 때, 그 사람에겐 자기가 새로운 몸으로, 마네킹의 몸으로, 옮겨 간 듯한 느낌이 생겼다. 즉, 그는 점차 자신을 이 마네킹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것은 몸이 대체된 환상이 커졌을 때 마네킹에 칼을 찌름으로써 확인됐다. 즉, 피험자가 이제 마네킹을 자기 몸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는 마네킹에 칼이 닿을 때 몸을 떨었다

 

마네킹에 칼자국을 내다

 

인체의 크기보다 더 크거나 작은 마네킹을 이용했을 때, 피험자는 자신을 실제 몸보다 더 크거나 작게 느꼈다.

엄밀히 말해, 어떤 크기의 마네킹을 실험에 이용했느냐에 따라 피험자에겐 실내와 사물들이 평소보다 더 크거나 작게 보였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겪은 것처럼 자기 몸이 커지거나 작아진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여러 크기의 마네킹 4개를 실험에 이용했다.

(실험에 마네킹 4개를 이용했다.) 

 

사람이 자기 몸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 (유체 이탈을 경험한 듯한) 실험도 진행됐다. (자세한 것은 따로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뇌의 작업 결과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뇌는 우리가 자기 몸 안에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보다시피, 뇌는 우리가 다른 몸 안에 있다는 느낌뿐 아니라 아예 몸에서 벗어난다는 환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몸 안에서 자신을 느낌은 (자아감은) 그런 환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의 실재라는 환상에 관한 장에서, 당신 뇌를 다른 몸이 느끼는 것에 연결한 결과 당신이 그 다른 몸으로 옮겨 갔다는 느낌이 생긴 사례를 우리가 살펴봤다. 이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이 사례 또한 우리가 몸에 애착하는 것이 뇌가 만든 습관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이 물질적인 몸체로 느끼는 것은 뇌가 만드는 동일시이다. 
그리고… 이 동일시가 환상이나 착각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이 몸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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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나는 누구인가?  > ...)

 

  16.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1)  

 

 

이제 우리가 자신을 흔히 ‘누구’ 혹은 ‘무엇’으로 여기는지 살펴본다. 

차례로 보자. 

 

나는 누구인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기

 

1

 

당신 이름이 ‘철수’라고 한다면, “난 철수야” 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부모가 처음에 다른 이름을, 예를 들어 영호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당신은 철수가 아닐 것이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 쓰는 단어일 뿐이다.

당신을 영호라 부른다 해서 당신의 자기인식이나 자아감이 과연 바뀔까?

아니다.

혹시 당신을 ‘항아리’라 부른다 해도 당신의 자아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있던 그대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음미해 보면, 당신 이름이 곧 당신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당신 이름을 부르면, 당신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느낀다. 누군가가 당신을 향하면서 실수로 다른 이름으로 당신을 불렀다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겠지’ 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면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자아감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린 자신을 종종 이 단어와 혼동한다.

자신을 다른 무엇과 혼동하는 것을 동일시(identification)라 부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름과 동일시된 것이다. 

 

2

 

본연의 자신을 잃는 다음 방법은 살면서 자신을 어떤 역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난 엄마야”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행하는 엄마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출산 전까지는 엄마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자아감이 출산을 전후하여 달라진 게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자아감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드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저 출산 후 엄마라는 새 역할이 생겼을 뿐인데, 그녀가 자신을 그 역할과 동일시한 것이다. 

 

전형적인 (사회적) 역할로는 우리네 각자의 직업을 꼽을 수 있다.

만약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난 의사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도 엄마의 역할 경우와 같은 도식이 작용한다. 즉, 그는 그저 의사 역할을 해왔을 뿐이며, 어린 시절엔 의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나 유년기에나 그의 자아감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직업에 크게 회의를 느끼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거나 ‘나에겐 의사 노릇이 어울리지 않나 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자기 직업과의 동일시가 잘못된 것임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패배자야” 혹은 “나는 쿨해” 같은 형태의 동일시도 있다.

자신이 패배자라는 느낌은 사람이 해 온 역할의 하나이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과 합쳐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그것이 그의 거짓된 자아감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 패배자야” 혹은 “난 쿨해”, 둘 다 역할이다. 이건 다 실제 자아감에 해당하지 않는다. 

 

역할의 예를 더 들어보자.

“나는 사업가야”, “난 2급 정비사야”, “난 사장이야”, “난 아들이야”, “난 노숙자야”, “난 제주도민이야” 등이 다 역할의 일종이다. 

한데, 이런 생각이나 진술 역시 본연의 자신을 어떤 역할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동일시에서 사람을 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예를 들어, ‘쿨한’ 사람에게

“넌 전혀 쿨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약점을 숨기기 위한 마스크일 뿐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려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일시에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가 쿨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를 멋지게 보고 존중한다. 근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럼 그는 누구인가? 시시껄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어?

 

3

 

다음에, 사람들은 의식의 어떤 발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이야” 등이 그렇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게 마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요, 이 생각은 내 생각인 것 같다. 머릿속 목소리와 강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걸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즉, 대화하면서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말하는 생각과 단어들이 있고 또 그걸 다 알아차리는 당신이 있음을 당신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간단한 실험 하나. 

“난 초밥을 좋아해” 하고 속으로 말하거나 중얼거려 보라.

어떤가, 당신한테 생각이 나타나서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때 생각이 있고, 또 그 생각을 보고 듣는 당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초밥을 정말 좋아하며 친구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이걸 바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유의하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전자의 경우 당신은 자기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았고, 후자에서는 동일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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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화난 상태에 있을 때, 이건 우리가 화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과 합쳐져서 자기 자신을 분노처럼 드러낸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안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곧 분노는 (분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을 (분노를) 당신은 당신의 여러 발현 가운데 하나로서 관찰하기만 할 뿐이다. 

 

실제로, 자각 상태를 가동할 때, 당신의 동일시가 그 자각 상태로 옮겨가고,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멀어진다.

‘자각 상태를 켠다/가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각이란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서 지금 당신과 당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상태, 감각 등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냥 망각 (혹은, 무자각) 상태에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감정에 압도될 때 이런 일이 특히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귀한 그릇을 떨어뜨려 깨졌을 때, 당신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이한테 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퍼뜩 깨닫고 정신이 들어서, 당신이 지금 화를 내고 아이한테 소리치고 있으며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당신을 금방 식게 한다. 

당신 자신의 분노와 (동일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다. 

 

4

 

그다음에 자주 나타나는 동일시하기는 자신을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 영혼이야”, “난 우주정신이야”, “난 사람이야”, “난 호모사피엔스야” 등이 그것이다. 

영혼을 보거나 느낀 사람이 있나?

영혼은 무엇인가?

다들 나름대로 해석한다. 어떻든 영혼은 추상적인 이미지다. 혹자가 “나는 영혼이야” 하고 말할 때, 그건 필경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영혼 soul’이란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우리한테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 개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지구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영혼이란 개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결국, 영혼이 무엇인지 알든 모르든 당신의 자아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혹자가 자기는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자기가 이 용어에 집어넣은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주정신이나 호모사피엔스하고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할 때의 동일시를 규명하기가 좀 어렵다.

우리가 사람인 건 당연해 보여. 왜냐면 당신과 나를 포함해 우리는 다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가 우리한테 가르친 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그러면, 사회는 ‘사람’이란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나?

대략 다음과 같이 보이고 옷을 입고 어떤 언어로 서로 얘기하는 생물을 사람이라 부른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그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들었다. 똑똑한 어른들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나. 생각도 않고 믿어 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우리 몸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고 우리가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여러 징조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 벌거벗은 모습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자아감으로 되돌아가자.

이 느낌에 인간과 관련된 뭔가가 과연 있나?

이 자아감은 ‘사람’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야. 이건 구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이다. 내 몸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감으로서의 ‘나’가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내 몸이 있으니까. 

 

‘사람’이 추상적이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임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옛날 옛적에 ‘사람’이란 단어를 궁리해 내고, 앞의 그림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전부 이 단어로 불렀다. 

한데 이 단어를 통용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던가. ‘여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고, ‘남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면 여성과 남성의 유기체와 심리 구조는 상당히 다르니까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람’이라 불렀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사람’이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종으로서 남자가 있고 또 별개로 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는 사람이야” 대신에 “나는 남자야, 여자야” 하고 말할 수 있었겠지. 

 

이건 다 ‘사람’이란 개념이 인위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상적 이미지이며,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일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데 ‘사람’이란 단어를 쓸 것이다. 편의상 그렇다. 우리 언어에서 이 단어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으니까. 

 

(이제 “나는 남자야”, “나는 여자야”라는 동일시를 분석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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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나는 누구인가?

 

우리네 인식의 특성이며 마인드의 작업과 관련된 자료를 아주 많이 알아봤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기능하기 위해 마인드가 만들어 내는 주된 환상들을 살펴봤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 다루지 않았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우리 뇌는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다 하나? 

누가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인식하나? 

모든 환상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나?

그 모든 환상을 인식하는 것은 누구인가? 

 

뇌 모델을 들여다보는 여자

 

우리 대화의 주요 주제에 이르렀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알아보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분명히 인식한다.

“내가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러나 당신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영혼인가? 

왜 굳이 이런 질문들을 던지나? 우리가 누구인지는 이미 명확하지 않은가? 

만약 명확하지 않다면,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서 좋은 게 무엇인가? 

이건 다 자연스러운 질문이고, 우리는 거기에 차례로 대답할 것이다. 

 


 

  15. 당신은 당신 세계 안에 있다  

 

자,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이 왜 나오나? 

우리네 행동이 다 어떻게든 우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영위하는 삶은 바로 우리의 삶이니까, 이웃의 삶이 아니라. 

왜냐하면, 당신은 자기 삶을 잘 관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니까.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잘 모르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함부로 대한다면, 거기에 당신은 거의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설령 반응한다 해도 잠깐 살짝 화가 나겠지. 한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렇게 한다면, 당신 반응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지키려 들 것이다. 

즉, 대응하여 욕을 퍼붓거나, 아니면 말조심하라고 점잖게 주의 주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상황을 피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그것은 당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당신은 분노나 두려움을 맛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과 당신을 모욕하는 것에 대해 당신 반응이 왜 그리 다른가?

왜냐하면,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누군가가 모욕하는 것은 당신을 거의 건드리지 않겠지만, 당신을 모욕한다면 그건 당신에 대한 직접 공격이며, 따라서 당신은 자연스레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를 옹호하나? 자신을? 그렇다면, 이 ‘자신’은 또 누구인가? 

 

내가 만약 내 주머니에서 5만 원 지폐를 꺼내 당신 앞에서 찢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당신의 5만 원 지폐를 잠깐 보여 달라고 한 뒤 그걸 찢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의 행동은 똑같지만, 내 돈인 경우와 당신 돈인 경우에 당신 반응은 분명 다를 것이다. 당신 돈을 찢으면 화를 내겠지만, 내 돈을 찢으면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건 또 왜 그런가?

왜냐하면, 내 돈은 당신 것이 아니지만 당신 지폐는 당신 것이니까. 당연한 소린가? 이 지폐가 당신 것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런 반응을 일으켰다.  

5만 원 지폐. 나의 것과 남의 것.

돈을 포함해 뭔가를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자아감이 연루돼 있음을 암시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누가 5만 원 권을 소유하나? 당신이?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지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직장 상사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직원을 칭찬했다면, 당신 기분이 어떨까? 부러움이나 질투? 혹은, 아무렇지도 않다? 상사가 직원들 다 모인 자리에서 당신을 칭찬하며 당신 같은 직원이 필요하고 당신은 정말 소중한 인재라고 말한다면, 그때 당신 느낌은 어떨까? 자기 자신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자랑스레 여기고 당신의 자존감이 커지겠지. 

만약 그 상사가 다음 날 당신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나무란다면, 당신은 당혹스럽고 화가 나겠지.

칭찬과 비난이 왜 당신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나?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과 관련되고 당신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당신은 잘하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칭찬과 비난이 누구와 관련되나? 당신과?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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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에게 얼마 전에 획기적인 비듬 치료제가 개발됐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제법 흥미를 보일 것이다. 당신 숙부가 당신에게 10억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한데 이 유산을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모르는 다른 친척이 받았다면, 당신에겐 어떤 느낌이 들까? 설마 기쁨 같은 것을 느낄 리는 거의 없다.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서 울릉도 출신의 아무개 여성이 우승했다면, 당신에겐 어떤가? 별다른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 대회에서 당신 딸이 우승했다면, 딸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과 관계되는 정보는 전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헤드폰 쓰고 앉아 있는 젊은이 주변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보라!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만에 하나, 당신이 당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가족이나 사업, 조국이나 자녀를 당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곧바로 이런 질문을 건네겠다.

“그건 누구의 가족이고 누구의 사업이고 누구의 조국이고 누구의 자녀들인가?”

바로 당신 아닌가!

남의 나라, 남의 가족, 남의 자녀들을 두고 당신이 크게 염려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동정심에서 그럴 뿐이다.

당신이 무엇이나 누군가를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둔다면, 그건 단지 당신이 거기에 강하게 애착을 갖고 자신의 행복을 그의 안녕에 좌우되게 만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다시 말하건대,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 

 

당신이다! 이 삶을 사는 사람은 당신이다.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이 고통받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해.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기뻐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당신이다. 꿈도 당신이 꾼다. 삶이 당신 것이다. 

당신 삶에서 당신이 없는 순간을 하나라도 꼽아 보라.

어찌어찌 궁리하여 그런 순간을 보여준다면, 마지막으로

“그것은 누구의 의식에서 일어나나?”

하는 질문을 던진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를 다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의식은 당신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인가?

누구의 의식인가? 

 

당신이 보고 느끼는 세계는 전부 당신 세계이다. 당신이 의식하고, 당신이 보고 듣고 알고 기억하는 것은 전부 당신의 주관적인 세계임을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주관적 세계가 있고, 거기에 당신은 접근할 수 없다.

이해가 되나? 언젠가 인식하고 알았던 것이 죄다 당신의 주관적 세계 안에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당신의 개인적인 주관적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게 당신에게 달려 있고 당신이 당신 삶의 중심이라면, 당신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러니, 당신은 누구인가?

아마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철수야”, “나는 사람이야”, “난 엄마야”, “난 여자야”, “나는 영혼이야”, “난 몸이야”, “난 목수야”, “난 과학자야”, “난 사업가야”, “나는 인격이야”, “나는 내 생각이야”, “나는 내 느낌이야”, “난 딸이야”, “난 호모사피엔스야”, 등등. 

 

물론 이것이 다 당신에게 해당하고 적용될 수 있지만, 우린 다른 뭔가를 찾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난 널 사랑해” 하고 말하는데, 이때의 <나>는 누구인가? 

“난 뭘 좀 먹고 싶어” 하고 말할 때, 먹기 원하는 ‘나’에 대한 느낌 같은 것이 있다. 

“난 앞에 놓인 이 텍스트를 보고 있어” 하고 말할 때,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누가 보는 건가? 

“나에겐 친구들이 있어” 하고 말할 때, 당신이 의미하는 <나>는 누구인가? 

 

저런 말들을 할 때, 우리에겐 ‘나’라는 어떤 느낌이, 자아감이, 있다.

더 이해되게끔, 자신을 염두에 두면서 ‘나, 나, 나, …’를 그냥 말해 보라.

무슨 느낌이 드나? 

뭔가를 느끼고 원하고 실행하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이, 당신 자신에 대한 어떤 느낌이 있다.

자신에 대한 이런 느낌을 우리는 자아감 혹은 ‘나’ 느낌이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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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3부. 마인드의 환상, 미혹 > ... )

  14-2. 세계를 실재라 여기는 환상  

 

좀 더 연습해 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착상이나 계획이 있나?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나?

그 착상이나 계획이 당신에겐 존재하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없다. 

당신한테 치통이 있나? (이가 아프다고 상상하자).

대답은 마찬가지야. 치통이 있긴 하지만, 당신한테만 있다.

그런데 의사들이 ‘환상통’이란 용어를 쓴다. 통증의 생리적 원인은 없는데 사람이 통증을 느끼는 것. 그런 통증을 의사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치를 통한 검사와 분석만 믿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느낌을 인정하지만, 진단에 보충 정보로만 인정한다. 

 

우주가 존재하나?

이건 트릭이 있는 질문이다. 

첫째, 우주란 당신이 어떤 의미를 집어넣는 단어이다.

1) 누군가는 우주를 삼라만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2) 누군가는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돼 계속 팽창하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3) 혹자에게 우주는 신이 이레 동안 창조한 피조물이고, 

4) 다른 혹자에게 우주는 그저 시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이렇게 ‘우주’는 당신 마인드에서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오로지 당신에게만 존재한다. 당신이 나한테 우주가 신의 피조물이라고 오랜 시간 설득하고 증명할 수 있지만, 나에게 우주에 대한 다른 관념이 있다면 당신은 자기 이미지를 나에게 강요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주된 오류로 다시 돌아왔다. 즉,

1) 세상에 대한 자기 생각이 절대적 의미에서 참이라고 믿음과

2)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란

우리네 인간이 범하는 주된 잘못이다. 

 

이제 보충 질문을 하나 다뤄본다. 

당신이 안 보는 물건이나 대상이 있나?

예를 들어, 시내를 걸으면서 저 앞에 건물과 자동차, 사람들이 보인다.

등 뒤에는 무엇이 있나? 

 

시내 거리를 걷는 사람의 뒷모습

이런 경우 사람은 흔히 기억을 얼른 작동하여 자기 뒤에 있는 것을 떠올린다.
우리는 등 뒤에 있는 물체의 그림을 마인드에서 생생하게 그리는데, 이것이
단지 마인드에 있는 그림이요 내면세계의 이미지일 뿐임을 잊는다.
이 내면 이미지들을 우리는 별생각 없이 실재와 (현실과) 혼동한다

 

세상 그림을 기억의 정보로 자동 보충하는 것은 사실 우리 마인드의 놀라운 능력이다. 이 경우, 세상을 우리가 사는 거대한 공간으로 여기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도시에 살며 어떤 거리가 있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 우리는 주변 세계를 눈앞에 보는 것보다 더 큰 뭔가로 본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기 방에 앉아 있다. 이 방은 당신 아파트 안에 있고, 아파트는 어떤 거리나 구역에 있고, 이 거리는 도시에 있고, 이 도시는 나라 안에 있고, 이 모든 것이 지구상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존재하나?
그렇다,
하지만 객관적 실재가 (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인드의 이미지로만, 당신의 주관적 세계로만 존재한다. 

 

당신이 뒤를 돌아보지 않을 때 “등 뒤에 뭔가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로서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뭔가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있다’ 없다‘ ’존재하다‘라는 단어를 현명하게 쓸 줄 알기에, 저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 

 

우리는 외부세계의 특정 물체를 우리 마인드가 만드는 외부 이미지로 보는 데 익숙해졌다.

예를 들어 자기 손을 본다면, 그건 당신이 보는 특정 물체의 형태로 당신 의식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 손에는 나름의 형태와 색깔이 있다. 이것은 당신의 주관적 세계에 있는 손의 외부 이미지이다. 

만약 손을 등 뒤로 감추면 직접 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외부세계의 특정 물체의 외부 이미지로서 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는 것뿐인데, 기억에서 복원한 손 이미지는 이미 당신 의식의 내부 화면에서 마인드가 만든 내부 이미지일 것이다. 당신이 익숙하게 보던 손 자체는 사라질 것이다. 

 

사실, 이건 ‘사람 없는 숲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있을까’ 하는 물음과 비슷하다.

우린 이 물음을 앞에서 이미 살펴보고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뭔가를 누군가가 관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없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있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세계의 실재에 대한 이 모든 환상은 이미 여러 철학자와 공상과학소설 작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묘사된 것이다.

예를 들어, 호평을 받은 영화 <매트릭스>가 바로 그렇다. 주인공 네오는 자기가 살고 있으며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익숙한 세계가 사실은 현실 세계에서 만들어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임을 알게 된다. 현대의 많은 영성 대가들이 깨달음의 아주 좋은 비유로 영화 <매트릭스>를 권한다. 

이 비유는 훌륭한데, 정확하진 않다.

주인공이 그의 세계가 환상임을 발견하고서 그와 비슷한 다른 세계로 들어서지 않고 ‘무’에 있게 됐다면, 깨달음의 더 정확한 은유였을 것이다.

 

깨달음의 대가들이 이에 관해 그렇게 말들 한다.

우리 세계는 단지 환상이고 꿈일 뿐이다. 이건 다 꿈과 비슷하다고 말들 한다.

꿈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잠을 깰 때, 이것이 단지 관념이었을 뿐임을 발견한다. 우린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아무도 잠을 깨고 나서는 꿈에서 일어난 것이 전부 진짜였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꿈속에 있는 동안에는 그게 현실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깨달음 얻은 이들은 깨달음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입을 모은다.

깨어난 뒤,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진짜라고 여기는 것이 전부 환상임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걸 마야라고 부른다.

환상의 세계를 만드는 힘이요 환상의 산물인 마야(maya)는 우리 각자의 주관적인 세계이다. 이건 비현실적임을 우리가 알아봤다. 우리 의식과 우리 마인드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리를 위해 현실의 모델을 만드는 마인드의 작업이 전부 마야이다. 마야는 진짜 실재를 우리한테 숨긴다. 오로지 깨어난 이들과 마야의 최면에서 빠져나온 이들만이 진짜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보통 사람들은 이걸 알 수 없어, 왜냐하면 마야의 경계를 넘어선 상태를 아무리 상상해도, 이건 또 다른 내면 이미지일 뿐일 테니까, 즉 마야의 연속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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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 익숙한 세계의 환상적 속성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은유는 아바타이다.

아바타는 힌두교 전통에서 지상에 나타난 신의 화신이다. 영화 <아바타>를 보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캡슐에 집어넣는데, 이 캡슐이 그의 인식을 ‘아바타’라 불리는 어떤 생명체의 인식과 연결한다. 이 ‘아바타’ 생명체는 행성에 서식하는 나비(na’vi)라는 생명체들을 인공적으로 키운 몸체이다. 

주인공이 아바타에 연결되면, 그는 이 아바타라는 생명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그가 아바타 속으로 들어서는 것 같다. 인간의 의식이 이 생명체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아바타 몸체 안에 있는 동안 주인공은 그것이 모조품에 불과하며 자신은 그것에 센서가 연결돼 지금 캡슐에 누워 있는 인간임을 점차 잊는다

 

(32) 미(美)는 현존의 고요 속에서 생겨나

 

(32) 미(美)는 현존의 고요 속에서 생겨나

아름다움은 당신 현존의 고요 속에서 생겨나   - 금방 당신이 설명한 것을 난 자연에 둘러싸여 혼자 있을 때 가끔 순간적으로나마 경험한다. = 바로 그거야. (일본 선의 영향을 받은 서구에서) 선

mirchimin.tistory.com

 

고대 힌두교 전통에서는 인간이 다 하나님이라고, 인간의 몸체를 통해 이 세상에서 놀기로 작정한 하나님이라고 여겼다. 이 놀이를 전통 힌두교에서는 <릴라>라고 부른다.

우리 몸은… 유일한 의식(consciousness)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는 데 거치는 것이다.

우리 몸은… 하나님에게, 유일한 의식에게, 아바타 같은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서 한 토막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은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하기를 거의 그만두고, 자기가 들어앉은 몸체인 나비라는 존재로 자신을 더 많이 보게 됐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도 우리의 몸이요 아바타에 들어앉은 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잊었다.
우리가 바로 유일한 의식이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이 인체는 주변 세계에 대해 아주 강하고 진짜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이 아바타 몸이 없는 게 어떤 것인지를 우린 잊어 왔다. 

깨달음이란…
‘나는 실제로, 정말로, 진짜로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건 자신의 ‘아바타’와 잠시 떨어져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 세상에 환상적 속성이 강함에 대한 마지막 은유는… 3D 안경, 터치의 환상을 만드는 특수 장갑과 슈트, 컴퓨터가 만든 가상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다른 수단 등 특수 기기의 도움으로 현대 컴퓨터 기술이 만든 가상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이 세상에서, 그 안에서 오랫동안 놀면서 우리가 그저 놀고 있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놀이에 완전히 빠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저 게이머라는 점을 잊는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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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3부. 마인드의 환상/착각 > ... )

  12. 단일한 원인이라는 환상  

 

 우리는 세상사를 인과관계로 보는 데 익숙하다

내가 어떤 물건을 밀치면, 그건 넘어질 것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태양이 비치기 때문에 덥다. 

이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카르마 - 인과적 사건들의 사슬. 행동, 시간, 결과

세상에 대한 그런 시각에 우린 익숙하다.

하지만 또 우리는 어떤 사건에 한 가지 원인만 있다는, 하나의 제한되고 환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이유는 거기에 새가 앉았기 때문이다. 혹은 이런 예도 보자. 전깃줄이 끊어진 것은 태풍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인과관계를 그렇게 보는 건 다소 좁은 안목이다. 그런 시각에 국한돼 있다 보면, 우리네 삶의 흐름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세상 모든 과정이 서로 작용하여 이뤄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 문제를 다뤄보자. 

 

내가 책상에 놓인 연필을 쥐어 바닥에 던진다고 치자. 연필은 당연히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질문 – 이 연필은 왜 바닥에 떨어졌나? 첫 번째 자연스러운 대답은 내가 그걸 놓았으니까 떨어졌다는 것이겠다. 그렇다. 하지만, 중력이 없다면 연필이 떨어졌을까? 

알고 보니, 연필이 떨어진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

1) 손에 쥔 것을 놓아주고

2) 연필에 중력이 작용했다. 

 

하지만, 난 왜 연필을 놓았을까? 왜냐하면, ‘단일한 원인이라는 환상’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물건을 쥐었다가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단일한 원인의 환상’이라는 원칙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원하나?

왜냐하면, 당신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지식을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건을 쥐었다가 놓는 능력은 어떻게 나한테 생겼나?

어린 시절 부모가 나에게 가르쳐 주어서,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에겐 여느 동물처럼 반사적으로 쥐는 행동이 (*grasp reflex)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물체나 대상을 본능적으로 꽉 움켜쥐다.
Grasp Reflex (움켜쥐는 반사,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행동/본능) - 갓난애가 두 손으로 엄마를 잡을 때 나타나며, 그 쥐는 강도는 아기를 그대로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이런 현상은 생후 3-4개월까지 나타났다가 점차 약해진다. 그 이후, 나이가 더 들어서도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신경성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제 보라.

물건을 쥐고 놓는 법을 부모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연필로 시연할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면 이 연필이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당신이 여기에 없다면, 연필 시연을 보여줄 동기도 없고, 그러면 연필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열거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연필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연필이 떨어진 데에는 저렇게 여러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또 다른 원인이 많이 있음을 당신은 이제 짐작했을 텐데, 지루해질까 봐 여기서 생략한다. 

 

또 나는 여러 원인을 계속 규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준에서 멈췄다.

예를 들어, (움켜쥐기 반사, grasp reflex) 반사적으로 쥐는 행동이 왜 나한테 있는 것일까?

나의 유전적 조상들이 생존하기 위해 주변 공간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또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그때는 포식자들로 득실거리는, 공격적인 자연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때는 왜 포식자들이 있었나?

왜냐하면, 자연도태가 그렇게 작동하여 가장 강한 것만이 살아남았으니까. 

 

곧, 연필이 바닥에 떨어진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랜 옛날에 사람들이 포식자들이 있는 야생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행동은 (grasp reflex는)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연필을 쥐었다가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필을 손으로 쥐고 시연해 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필이 바닥에 떨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우리가 열거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자.

대략적인 도표는 이런 식이다.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는 여러 요인의 관계가 어떤 계층적 도식으로 드러났다. 이 시스템의 각 수준에서 한 가지 요인이 여기 다이어그램에서는 또 다른 한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표시돼 있지만, 실상은 훨씬 더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내가 물체를 손으로 쥐었다가 놓을 수 있는 것은…

1)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본능을 물려받고

2) 부모의 가르침도 있는 데다가

3) 나한테 손가락들이 있으며

4) 손과 물체 사이에 마찰력이 있고

5) 손을 제어하는 근육이 있다는 사실 외에도

6) 훨씬 더 많은 것에 영향을 받는다.

각 수준의 다른 요인들에 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각 수준에서 요인의 수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점에 주목하라. 수준의 수효 역시 (‘신에 의한 세상 창조’나 ‘빅뱅의 결과 세상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각자 편한 대로) 잠재적으로는 무한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알고 보니… 이 연필이 지금 바닥에 떨어지기 위해서는 사실상 우주 전체가 이 일이 일어나게끔 항상 작동한 것이더라. 이 무한한 계층 구조에서 한 요인이라도 없었다면, 어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점에 다시금 주목하자. 

 

이 계층 구조를 더 발전시키면 이론적으로는 태양광 같은 요인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햇빛이 다른 어떤 요인에 영향을 미치고, 이 다른 요인이 또 다른 요인에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연필이 떨어지는’ 사건에 우리가 계층적으로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연필이 떨어진 원인은 태양광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말을 비슷하게 적용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금방 여기서 내린 결론 몇 가지를 요약해 보자. 
1. 어떤 사건이든 그 원인 요소는 얼핏 보듯이 한 가지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2. 수많은 원인 요소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3. 요인들은 계층 구조로 배열돼 있어서, 어떤 요인들이 다른 요인들의 존재에 필요조건이 된다. 

 

이제 어떤 특정한 사건이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자.

내가 바닥에 떨어뜨린 연필을 계속 예로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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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당신은 보고 듣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보고, 이 사건은 당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낙하의 결과 바닥에 부딪히면서 연필 몸통에 금이 갔다. 연필 떨어지는 것을 당신이 보았기 때문에, 또 내가 연필 낙하의 원인을 얘기했기 때문에, 당신은 이걸 기억하고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목격자 중 한 사람인 영희가 친구 철수에게 연필 낙하에 관해 얘기해 주자, 전공이 경제지만 철학적 단상을 좋아하는 철수는 세상 구조와 그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관해 숙고하게 됐다. 이 때문에 철수가 1년 뒤 직업을 바꾸고 편력하는 데르비시(dervish)가 되어 존재의 우연함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다. 이제 해원이란 여성이 철수의 책을 읽고 선원(禪院)에 들어가 2020년도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이 연필이 지금 바닥에 떨어진 결과가 2020년도 해원의 깨달음이다.

지금 이 사건이 없다면, 영희는 이것을 못 보고 친구 철수에게 얘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철수는 직업을 바꾸지 않고 데르비시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책을 쓰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해원이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을 테고. 

 

연필이 떨어지면서 금이 갔기 때문에, 이틀 뒤 연필심이 부러졌다. 이때 나는 비전(秘傳)을 논하는 밀교 회의에 참석했는데, 유일한 필기도구가 이 연필이었다. 그게 부러진 줄 몰랐기에, 의식(意識)의 본질에 관해 중요한 생각을 기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볼펜을 빌려 달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참선의 대가였다. 이 인연으로 나는 그한테서 참선을 배우게 됐고, 아예 일본으로 이주했다.

곧, 연필이 떨어진 또 다른 결과는 내가 2년 뒤 일본에 정착한 것이다. 

 

연필을 떨어뜨린 결과가 물론 지금 예시한 저 둘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편의상 두 가지만 들었을 뿐이다. 연필심이 부러져서 연필을 쓸 수 없게 된 것도 직접적인 결과로 꼽을 수 있다. 

 

여기 제시한 여러 결과는 예를 들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세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건들도 있다. 그런 사건의 결과는 점차 제로가 된다.

예를 들어, 새의 지저귐이 창밖에서 들려온다. 물론, 이 지저귐이 세상에 거의 영향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지나가던 시인이 이 지저귐을 듣고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모든 사람 입에 오르게 되고, 이것이 3차 대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지 누가 알겠나.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물론 있다. 예를 들면, LSD 발견, 일본 후쿠시마 원폭 투하,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결론을 내리자.

세상 모든 사건은 무한히 많은 결과를 낳는다.

왜 무한하다고 하냐면, 이 사건의 결과인 여느 사건이 그 자체로 사건이며, 거기에도 또 결과들의 사슬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는데, 이것도 결과들의 계층 구조로 그릴 수 있다. 

두 계층 구조를, 즉, 어떤 사건을 촉발하는 요인들의 계층 구조와 그 사건의 결과들의 계층 구조를 비교한다면,

모든 사건에는 그것을 촉발하는 숱한 요인과 (즉, 원인과) 무수히 많은 결과가 (혹은, 파장이) 있음이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사건들이 서로 영향 미치는 도식을 대략 이렇게 얻을 수 있다. 

 

이 도표는 그저 도표이며, 세상 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모델일 뿐이다. 다른 여느 모델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반영하지 않으며 실재의 어떤 측면을 가리킬 뿐이다. 이 모델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공통 공간으로서) 객관적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 모델을 보면 여기 담긴 근본 생각이 저절로 이해될 것이다.

즉, 모든 사건은 서로 연관되고 얽혀 있다는…

 

모든 사건은, 하다못해 하찮게 보이는 것도, 이 세상에서 상호 의존 네트워크의 필수 요소이다. 세상 모든 사건은, 온 세상은, 단일한 하나처럼 작동한다. 이것을 사건들의 단일 캔버스라 부를 수 있다.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게끔 이끌어왔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은) 사건들 사슬에서 필수 연결 고리이며, 이 고리가 일어나야 할 결과들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런저런 사건의 결과가 무엇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평범한 인간 마인드가 단번에 커버하기에는 모든 게 상당히 복잡하다.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

스스로 판단해 보라. 사건들의 발전과 상호관계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여 이 생각을 확실히 알아보자. 이 시나리오는 허구지만 실제로도 아주 가능다. 

 

젊은이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는 우연히 티브이에서 껌 광고를 보았다.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왜냐면 좋아하는 여배우가 등장한 데다가 광고가 선명해서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이가 거리를 간다, 얼마 전 세워진 가판대를 지나치다가 그 껌을 보았다. 그 껌이 눈길에 들어온 것은, 광고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한번 맛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판대 주인도 이 껌 광고를 보고 이 껌이 잘 팔리리라 여겼다, 왜냐면 광고 모델로 나온 여배우를 그도 좋아하고 광고도 잘 만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구매 수요가 제법 있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제 껌을 주문하여 가판대에 내놓았다. 
지나가던 젊은이가 호기심 가는 껌을 사려고 가판대로 다가갔다. 그때 판매인의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껌을 금방 내줄 수 없었다. 젊은이가 잠깐 기다리는 차에 친한 친구가 지나갔다. 오랫동안 못 본 얼굴이기에 껌 사는 건 잊고 친구를 따라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이 이야기에서 모든 사건이 서로 얽히고 연관된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라도 없다면 이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흘렀을 것이다. 

이제, 다른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야기하고 유발하는 사건들이 세상에서 동시에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세상 사건들의 이 거대한 캔버스는 우주 전체와 같다.
이 삶의 캔버스에 우리 각자는 자신의 몫을 조금씩 집어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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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마인드의 작업. 객관적 실재의 지각 수준 <계속>) 

 

  단어와 명칭의 수준  

 

 

이것은 추상적 실재의 첫 번째 수준이다. 

이 수준 이전에는 당면한 실재 수준들이 있었다. (감각 정보의 수준, 구체적인 대상의 수준).

목전에 당면한 실재는 바로 지금 순간에 지각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다면,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그 무엇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것을 우린 바로 앞장에서 이미 살펴봤다. 

 

앞에 소개한 도표를 참고 삼아 다시 제시한다. 

주관적 실재, 객관적 실재, 추상적, 당면한 실재, 추론 수준, 단어와 명칭 수준, 구체적 대상 수준, 감각 정보 수준, 객관적 실재의 수준

추상적 실재는... 단어와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추상적 실재는 세상 그 자체보다는 세상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더 가깝다. 

 

마인드가 모든 감각 정보에서 마인드에 친근한 대상을 자동으로 구별한다는 점을 우린 바로 앞장에서 살펴봤다. 그런 대상을 마인드가 구별하는 까닭은 바깥 환경에서 그것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어린애들이 세상을 그렇게 지각한다

 

하지만 어린애들은 외부세계뿐 아니라 어른들 사회에서도 살고 자란다. 그리고 성인들은 사물과 대상을 어떤 이름으로 부른다. 이건 ‘사과’이고 저건 ‘촛불’이고 또 저건 ‘나무’야. 언어의 이용자로서 부모는 늘 자기 아이와 얘기 나눈다. 어린애에게 장난감을 보여주고 그것을 ‘공’이나 ‘인형’, ‘바람개비’라고 부른다. 부모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엄마’나 ‘아빠’라고 부른다. 또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이름도 들려준다.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 들려주는 일을 부모는 아주 자주 한다. 몇 가지 색깔을 띤 둥근 물체를 여러 번 보여주면서 ‘공’, ‘공’, ‘공’이라고 말한다. 물론, 어린애한테 이것은 아직은 공허한 소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알아봤듯이, 어린애의 뇌는 대상이 바깥 환경에서 자주 나타나면 그 대상을 청각 정보 속에서 저절로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부모가 말하는 단어가 늘 반복되기 때문에 어린애 마인드에서 별개의 대상으로 식별돼 서서히 자리 잡는다. 

그런 식으로, 둥글고 여러 색깔의 물체를 보면서 동시에 ‘공’이라는 같은 단어를 자꾸 듣는 환경이 어린애 의식에서 늘 반복된다. 어린애의 뇌가 이 두 가지 대상을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이제 어른이 ‘공’이란 단어를 말하면, 어린애 마인드에서 공의 이미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성인들에게는 물체나 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 이름을 백 번 반복할 필요가 없다. 한두 번으로 어떤 대상이 어떻게 불리는지 성인은 기억한다. 즉, 세상의 물체와 단어와 연관시키는 작동 원리가 성인기에도 작동한다. 언어 학습이 멈추지 않는다. 

 

단어들은 인간 세계에서 특별한 대상이다. 어린애는 처음에 단어들을 듣기만 한다. 그러다가 말문이 트이면 그 단어들을 입 밖에 내게 된다. 다음에는 책 읽기를 배우는데, 이때 아이는 자기가 이전에 말하던 단어들이 또 어떻게 보이는지 알게 된다. 결국, 아이가 글을 배우면서 단어를 적기 시작한다. 즉, 단어들이 어떻게 소리 나고 어떻게 보이는지를 안다. 단어들이 청각과 시각 채널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단어들이 무엇에 왜 필요한지가 가장 중요한데, 이건 단어들에 녹아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건 또 사람의 마인드에서 단어들이 어떤 이미지나 형상들과 연결됨에 따라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여러 시기에 여러 종류의 인형을 보여주면서 매번 같은 ‘인형’이란 단어로 부른다면, 어린애 마인드에는 ‘인형’이란 단어와 그 모든 물건의 관념 연합이 생긴다. 이때 이 모든 인형이 서로 좀 비슷하다면, 마인드는 그것들 간의 공통 특징을 자동으로 식별하고 ‘인형’이란 단어를 아이가 본 인형을 전부 일반화하는 추상적 이미지와 자동으로 연결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더 다양한 물건을 ‘인형’이란 단어로 부를수록, 이 단어의 의미가 아이에겐 더 다양해질 것이다. 

 

여러 종류의 인형

다양한 대상들이 더 많이 같은 단어로 불릴수록... 이 단어는 더 추상적이 되고, 이 단어의 의미는 이 세상 특정한 대상들의 관념에서 더 멀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탁자’라는 단어에는 어떤 사람이 보아 온 모든 형태의 탁자 이미지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 단어와 연결된 모든 이미지를 스캔하려면 마인드에는 노력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마인드는 더 경제적으로 작동한다. 즉, ‘탁자’라는 단어가 들릴 때 마인드는 어떤 한 가지 이미지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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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에게 ‘차량’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당신 마인드에는 이런 이미지가 생길 수 있다. 

 

세단 승용차

혹은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 

 

초기 자동차

 

모든 것은 그 단어를 듣는 사람의 개인 경험에 달렸다. 

한번 시험해 보라. 

이를테면 ‘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당신 마인드에는 무엇이 나타나나? 

마인드에 어떤 집 그림이 생겼을 것이다. 

당신에겐 어떤 그림인가? 

이 단어를 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같은 그림이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알고 보니, 단어란 사람 기억에 있는 이미지들을 가리키는 표시기 같은 것이다. 한데 어떤 단어와 연관된 이미지들의 총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이 단어를 말할 때 자동으로 생기는 이미지 역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우리는 그 단어와 연관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언급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에서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할 가치가 있다. 당신의 당면한 실재에서 당신 앞에 지금 여기 있는 특정한 탁자와 일반적으로 ‘탁자’라는 단어 간의 차이는 크다. 

 

나무 탁자 위에 노트북과 안경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특정한 대상은 아직 탁자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 속에서 우리 마인드가 인식한 어떤 대상일 뿐이다. 한데 ‘탁자’라고 불리는 것은 (단어는) 추상적 대상이며, 이 대상은 어떤 사람 내면의 형상과 소리, 느낌의 형태로 암호화된 개인 경험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추상적 대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는 이 구체적인 대상을 ‘탁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대상의 형태와 우리 기억에 저장된 단어 이미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것도 탁자라고 부를 텐가?   

 

동그란 나무 탁자

 

이런 탁자를 당신은 못 봤을 것이다. 지금 보라. 그러면 다음에 이런 대상이 당신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 그것이 탁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야. 그리고 당신의 ‘탁자’라는 단어의 의미는 지금 막 또 하나의 방식으로 확장됐다. 

정리하자면, (말의 최소 단위인) 단어란 개별적인 추상적 실재이다. 
단어란 우리가 경험한 내용을 가리키기 위한 표식이나 꼬리표와 같은 특별한 대상이다. 
다시 말하건대, <구체적인 탁자>와 <‘탁자’라는 단어>를 혼동하면 안 된다. 
탁자처럼 보일 수 있는 특정한 대상은 지금 당신 앞에 있고 아주 잘 감지되는 크기와 형태, 색상을 지니고 있다. ‘탁자’라는 단어는 특별한 청각적이거나 시각적인 대상이며, 이 대상은 당신이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탁자를 지각한 경험에 의거한다.

 

* 객관적 실재의 지각 가운데 <추론의 수준>이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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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마인드의 작업

7장. 실재를 지각하는 여러 수준 <계속>)

 

  구체적인 대상들의 수준  

 

 

갓난애와 달리 우리는 성숙하고 경험 있는 사람으로서 시각과 청각 채널에서 어수선함이나 잡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과 물체를 보고 듣는다. 

대체로 모든 채널에서 그렇다. 

우리의 감각 정보는 체계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어떤 표상으로 본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보자. 

 

사람이 태어난 직후 처음 접하는 대상은 (산파를 제외하고) 엄마이다. 엄마는 갓난애가 처음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 이 대상은 아기의 모든 지각 채널에 나타난다. 이 대상을 아기가 처음에는 자기의식에 들어오는 다른 감각 신호들과 당연히 구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대상이 (엄마가) 아기의 시야와 모든 채널에 아주 자주 들어온다. 아기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엄마 체온을 느끼고 엄마한테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다. 다른 신호들 속에서 엄마를 별개의 대상으로 서서히 식별하기 시작한다. 

 

이후 더 자라고 외부세계와 더 많이 접촉하면서 아기 의식에 다양한 정보가 더 많이 들어간다. 또 외부세계는 여전히 정돈된 공간이며 어떤 대상들로 이뤄져 있는 까닭에, 예를 들어 장난감이나 주변 다른 사람들, 자기 울음소리 같은 대상들이 아기의 의식에서 점차 개개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대상들을 아기의 마인드가 다양하게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구별하게 된다. 

이것은… 아기가 주변 사람들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고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뒤척이고 장난감을 갖고 놀기 시작하는 것 등을 보면 분명해진다. 

 

모든 감각 정보의 흐름에서 어떤 안정되거나 고정적인 대상을 구별하는 능력은 아마도 뇌 기능에 내재돼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세계 자체도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고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세계에 있는 여러 대상과 그것들의 형태와 움직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마음속에서 그려 보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자. 그런데 바깥세상에서 대상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알고리듬은 누구한테든 끊임없이 작동한다. 이런 점을 이제 분명히 알아보자. 

 

이런 그림이 있다. 

색깔 있는 얼룩점들의 집합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세계를 감각 수준에서 지각할 때 나타나는 감각적 어수선함과 비슷하다. 여기에 어떤 시각 정보와 어떤 점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대상을 식별해 내기는 상당히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얼룩이나 점 이외에 다른 것을 왜 못 보느냐 하면, 이 점들이 우리가 살면서 익숙하게 관찰해 온 형상을 이루지 않거나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 그림들에서는 어떤 대상을 분별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

색깔 있는 점들이 배열되어 여러 꽃 모양을 이룬다.
흰 구름이 끼어 있는 푸른 하늘
산비탈에 튀어나온 나무 그루터기

 

이 그림이나 사진도 본질에서는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일정하게 배열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뇌가 이 점들에서 익숙한 이미지를 자동으로 찾아낸다. 꽃, 구름, 하늘, 그루터기

한데, 우리가 꽃과 구름, 그루터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저 그림과 사진에서 그런 대상과 물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 안 그럴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바다, 갈매기, 나무, 파도, 구름, 하늘, 바위 위에 여인 형상

 

여기에도 역시 색깔 띤 점들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지만 살면서 우리가 여러 얼굴을 자주 접한 덕분에 이 그림에서 사람 얼굴을 쉽게 구별한다. 원한다면, 얼굴로 사람의 성별을 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저 그림에 실제로는 얼굴이 없다. 새들과 나무, 물 위의 파도, 서 있는 여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얼굴을 보고, 우리에겐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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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질문: 그렇다면, 이 그림에 얼굴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대답: 이 그림에 있는 것이라곤 색깔 띤 점들뿐이다. 그림에서 우리가 찾아내는 형상은 모두 우리 뇌가 (혹은, 마인드가) 만든 것이다. (실제로는 얼굴이 없다!) 바로 우리 뇌가 외부세계에서 그런 형상을 종종 관찰해 온 까닭에 이제 그것을 어떤 그림에서든 어떤 순간에든 식별할 수 있다. 

 

시각 채널에서 여러 대상이나 물체를 순간적으로 식별하는, 마인드의 이 능력을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방향 잡고 적응하는 데 이용한다. 만약 (아래 그림 같은) 형태가 시야에 들어올 때 마인드가 침대를 금방 식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몇 발짝 안 가서 거기에 부딪칠 것이다. 

침대와 소파 등이 놓인 침실

 

우리는 시각 채널을 살펴봤다.

청각 채널에서는 구체적인 대상들 수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다룬 사례가 있다. 

 

여기 어떤 외국어로 하는 얘기가 있다. 

 

우리 한국인에게 이건 (시각 채널에서 색깔 띤 점들의 집합처럼) 단지 소리의 집합일 뿐이다.

이건 우리한테 왜 한낱 잡소리 모음에 불과할까? 왜냐하면, 이 소리에서 우리가 청각 채널에 익숙한 대상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여기서 아는 단어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이 언어에 어려서부터 익숙한 러시아인은 이 잡음(?)에서 특정한 단어들을 찾을 뿐 아니라 거기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청각 신호가 우리 한국인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한국인들에게 소음이나 잡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단어들이다. 앞의 동영상에 있는 (한국어를 모르는) 러시아인이 이 동영상을 어떻게 인식할지 상상해 보라. 

 

그런 식이다. 모든 것이 바로 그렇게 작동한다. 우리 주변에는 감각적인 소음과 혼란과 어수선함의 연속이요 일색이다. 그러나 그 소음과 어수선함 속에서 우리 뇌가 (마인드가) 아는 대상들을 즉각 식별해 낸다. 

구체적인 대상들 수준에서 주관적인 실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목소리 훈련 안내

지금 살펴본 수준은 구체적인 대상들의 수준이라 불린다. 왜냐고? 왜냐하면, 이 대상을, 혹은 물체를, 우리가 바로 지금 보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이다. 예를 들어, 이 사과가 그렇다. 

사과

 

이것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과이지 그냥 일반적인 ‘사과’가 아니다. 게다가 이 구체적인 대상에는 이 지각 수준에서 아직 이름이 없다. 이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은… 특정 순간에 나머지 모든 정보 속에서 특정 대상을 식별하는 것뿐이다.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자. 태어난 뒤 다른 여러 정보 속에서 엄마를 구별하는 갓난애는 이게 자기 엄마인지 아직 모른다. 갓난애 마인드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없다. 아기는 세상을 어떤 특정 순간에 어떤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지각 수준에서 (세계를 구체적인 대상들로 지각하는 수준에서) 세상이 어떻게 지각되는지 우리는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냥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 

이 순간에 당신은 무엇을 보나? 

당신이 눈길 돌리는 곳에서 무엇을 보나? 

포착하지 못한 세계의 디테일을 마인드에서 끝까지 그리지 말라. 

그냥 앞에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라.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쓸 때, 나는 내 손과 자판, 모니터, 마우스를 본다. 내 등 뒤에 의자 등받이가 있지만, 지금 내 눈으로 그걸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억에 따라 세계의 그림을 마저 그린 것은 내 마인드이다. 

 

만약 마인드의 이 작업 순간을 인식하며 마인드가 마저 그리는 것을 죄다 내던진 채, 지금 벌어지는 것에 이름 붙이지 않고 관찰만 한다면, 실재를 지각하는 이 수준에서 - 구체적인 대상들의 수준에서 - 세계가 어떻게 반영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아이들이 이 수준에서 실재를 지각한다. 
어린애들은 특정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지각한다. 
선()의 대가들이 ‘지금 여기’의 삶에 관해 설파할 때 바로 이걸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보라, 얼마나 간단한가. 
아이들도 이걸 할 줄 안다. 한데 성인들은 다 잊은 것 같다. 

 

이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실재를 지각하는 다음 수준을 살펴볼 때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수준으로 넘어가자. 

(실재를 지각하는 여러 수준 가운데 <단어와 명칭의 수준>으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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