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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13 루덩의 악마들 3-3편 3
  2. 2019.05.15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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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라퐁텐은 드문 예외일 뿐이다. 라퐁텐의 동시대인들은 글에서 인간 외적 본질인 자연 세계에 눈길을 전혀 돌리지 않았다. 코르네유의 비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면밀하게 조직된 계층적 집단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옥타브 나달이 ‘코르네유의 세계는 바로 도시’라고 쓴다. 

  라신의 여주인공들과 그들을 고민케 하고 특색 없는 남자들의 더 엄격히 제한된 세계는 코르네유의 도시처럼 창문이 없다. 이 세네카 풍 비극의 극치는 숨 막히고 좁아서 공기도 없고 편히 움직일 공간도 없고 배경도 없는 파토스이다. 그것들이 <리어 왕>, <당신 좋을 대로>, <한여름 밤의 꿈>, <맥베스> 등과 얼마나 다른가 말이냐.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비극은 어떤 것이라도 읽다 보면 어릿광대며 악인, 영웅, 고급 매춘부, 눈물 흘리는 왕비들 같은 인간 세상 뒤편에 지구와 우주가 늘 존재하며 생물과 무생물의 세상이, 이성이 없는 것과 의식이 또렷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들이 거의 스무 줄마다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느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1889-1973

 

  우리 시대의 저명한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쓴다.[각주:1]

  “내 가장 깊고 가장 확고한 소신은, 만약 그것이 이단적이라면 정통 교리에는 더 나쁜데, 모든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뭐라 해도 신의 뜻은 우리가 만물을 도외시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만물을 통하고 우리 출발점으로서의 만물과 함께 그분을 찬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신앙 서적을 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17세기에 가장 덜 불쾌한 신앙 서적들 중 하나는 토마스 트러헌[각주:2]의 <명상의 시대>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시인이요 신학자인 그는 하나님이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의 표현에 따르면, 사욕 없는 관상을 통해 ‘세상을 얻는’ 사람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얻으며 나머지는 전부 저절로 추가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든 갈망과 야망을 채우고 의심과 배신을 물리치고 용기와 기쁨으로 굳건해지는 것이 정녕 달콤한 일 아니런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세상을 얻기만 하면 다 달성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와 힘과 선함과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니까.” 

 

  이상적인 삶에서 랄망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자연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의 혼합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이란 자연 전체가 아니라 그저 발췌한 일부일 뿐이다. 

  트러헌도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뒤섞음을 옹호하지만, 그는 자연을 가장 작은 디테일까지 포함해 통째로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자연물에 내재한 이 신성함을 수렝도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무나 지나치는 동물한테서 하나님의 충만한 위대함을 실제로 감지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몇몇 짧은 기록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갖가지 작은 것들 속에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어디서도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많은 영적 서신의 수신자들한테도 백합에 관한 그리스도의 권고를 따르면 암중모색하는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도 조언하지 않았다. 

  타락한 자연은 모두 부패한 것이라고 주입된 믿음이 직접 체험에서 얻은 것보다 그의 마음에서 더 강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겠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독단적인 말과 가르침이 확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선종의 3대 조사는 “제 앞에 있는 이것을 보고 싶다면, 이것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관념을 갖지 말라”고 쓴다.[각주:3]

   그러나 관념 고정은 신학자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고, 수렝과 그의 스승은 깨달음을 추구한 사람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다. 

 

  랄망의 고행에서 가슴의 정화는 성령의 인도에 늘 온유하게 따름으로써 완성됐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각주:4] 중 하나는 이해력인데, 이 이해력에 맞서는 악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난폭함’이다. 이런 난폭함은 갱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흔한 상태이며, 그런 사람은 대체로 내면의 빛에 완전히 눈이 어둡고 감화의 목소리에 완전히 귀가 어둡다.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제 생각을 추적하는 증인을 두고, ‘마음 움직임을 감시하는 작은 파수꾼’을 세움으로써… 사람은 마음 그 어느 깊은 곳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직관적 지식과 직접적 명령과 상징적 꿈이며 판타지 형태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되는 점까지 직관을 키울 수 있다. 

  끊임없이 돌아보고 경계하는 가슴은 모든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결국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로 가는 길에서 아주 다른 종류의 점유와 지배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영감과 계시가 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중 어떤 것이 성령의 목소리이며 어떤 것이 미치광이 목소리고 사악한 범죄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식별해야 하나? 

 

  피에르 베일[각주:5]이 한 독실한 재세례파 젊은이의 경우를 인용한다. 이 젊은이는 어느 날 아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서를 많이 읽은 그 아우는 이런 일이 이전에도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계시의 신성함을 인정했다. 같은 신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제 2의 이삭처럼 자발적으로 죽음으로 달려가 참수를 당했다. 

  그런 경우를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성의 목적론적 유보’라고 우아하게 칭한다.[각주:6] 창세기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광기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랄망은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한테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신자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게끔 여러 모로 경고했다. 성령에 순종하라는 그의 교리가 내재적 영혼이라는 칼뱅파 교리 같은 것이 아니냐며 의심쩍게 이의를 제기한 동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계시 형태로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행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종교의 신조이고, 둘째, 종교적 계시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 전통과 교회 권위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만약 계시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에 역행하게 한다면, 그건 거룩한 계시일 수 없으리니. 

 

  이는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광기를 조심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퀘이커교도들이 활용하듯이, 다른 방법도 있다. 특이하거나 위험스러운 뭔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올 때 그 사람은 ‘존중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계시의 본질에 관해 그들 의견을 따라야 했다. 

  랄망도 같은 절차를 옹호한다. 그는 성령이 실제로는 ‘우리한테 판단력 있는 이들과 상의하고 우리 행위를 가까운 이들 의견에 맞추도록 촉구한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좋은 행위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랄망은 이것이 가톨릭신앙의 신조라고 단언한다. ‘난 그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투덜거린’ 동료들한테 이렇게 답했다. 

  참 신자들에겐 그런 계시가 늘 따라다녀요, 본인이 못 느끼는 중에도. 그대들이 온당하게 살기만 한다면 종교적 계시를 필히 인식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제 자신 바깥에 살기를 택하면서 제 영혼을 들여다보러 집으로 잘 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 양심 점검을 아주 피상적으로 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빤한 잘못들만 참작한다. 제 욕구와 습관의 내적 뿌리를 찾으려 애쓰지는 않고, 마음의 상태와 경향이며 가슴의 작열을 돌아보지는 않고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들 놀랄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어찌 들을 수 있겠나? 그들은 저희 행동으로 인한 은밀한 마음속 죄마저도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그런 걸 알기에 적절한 조건을 내면에서 만들기만 하면, 성령이 인도하심을 틀림없이 알게 되리라.」 

 

  이런 점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른바 선행이요 자선이라 하는 것들 대부분이 왜 비효율적이며 나아가서 많은 경우 왜 유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속담처럼 만약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각주:7] 한다면,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내면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못 보기에, 순수한 선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행동하기 이전에 늘 관상(심사숙고)이 선행돼야 한다고 랄망이 말하는 것.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우리는 내면에 더 침잠할수록 바깥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내면의 자신을 덜 들여다볼수록 선을 행하려 애쓰기를 더 삼가야 한다.」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선 활동에 들이덤비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열의와 자선의 동기가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일에서 자기애를 충족하기 때문에, 기도나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 방에서 호젓하게 명상에 잠기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어떤 성직자가 헌신적인 신도들을 많이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자의 말씀과 선행은 ‘그가 얼마나 사리사욕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지에 비례해서만’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언뜻 선을 행하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거룩한 이들이지 사업에 능한 자들이 아니다.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하는 데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 외려 우리를 그분한테 더 큰 사랑으로 더 바짝 묶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과하면 육체의 죽음을 야기하는 어떤 체액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에서도 지나치게 활발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절제되지 않은 활동 필히 영적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결실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칭찬받을 만하고 눈부시고 건설적인 일을 하는데도 말이다! 

 

  계시의 조건인, 욕심 없는 자기성찰 없이는 재능도 결실 맺지 못하고 열의와 근면도 영적 가치를 전혀 일궈내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평생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 한 해에 해낼 수 있다.」 

  그래, 외적인 작업은 외부 상황을 바꾸는 데는 효율적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에도 파괴적이고 자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데, 상황에 대해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바꾸고자 하는 일꾼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영혼이 계시를 접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저 외부 지향적인 사람은 트라야누스[각주:8] 황제처럼 일하고 데모스테네스[각주:9]처럼 웅변을 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을 지향하는 사람은 한마디 말로도, 다른 사람이 총명과 학식을 다 동원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상을, 많은 가슴과 마음에 안길 수 있다. 그 한마디에 성령이 깃들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느끼나? 지속적인 계시 상태를 수렝보다 나이 적은 동시대 여성 아멜 니콜이 아주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녀를 고향 브르타뉴 전역에서는 애정을 담아 la bonne Armelle (착한 아멜)이라 불렀다. 

  하녀로서 음식 만들고 걸레질하고 아이들 돌보면서도 관상하는 성자의 삶을 산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해 제 사연을 적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재주 있고 글을 잘 아는 수녀가 있어서, 그녀의 은밀한 얘기와 고백을 거의 놓치지 않고 기록하게 됐다. 

 

  「아멜은 자신이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그저 고생하며 하나님 역사에 순종하는 데에만 적합하다고 여겼다. 고백하기를,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 이 육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인도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녀 영혼에게, 내가 들어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라, 명령하고 거기 들어서셨다. 아멜은 제 육신이나 마음에 관해 말할 때 ‘내 몸’이나 ‘내 마음’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했다.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인이 되었을 때 그 동안 나를 가로막은 것들을 (나쁜 습관과 이기적 충동 따위를) 모두 내버렸어요. 그렇게 되자, 그녀 마음은 주님이 그녀 영혼의 심연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깨닫지 못했고, 그 역사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녀 마음은 하나님만이 자유로이 들어설 수 있는 이 심연의 문 밖에서 주인 명령을 공손하게 기다리는 하인과 같았다. 간간이 아멜은 전능자께서 계신 은밀한 문 앞에 많은 천사들이 입구를 지키듯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됐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그녀의 의식적인 자아를 영혼의 심연으로 들여놓으셨다. 들여놓을 뿐 아니라, 거기 가득 채워진 신성한 완성을 실제로 보게 하셨다. 그건 사실 늘 차 있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가 알지 못했던 것일 뿐.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은 그녀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강해서 한동안 육신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점차 견디게 되면서 그리 큰 고통 없이도 계속 그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아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놀라운데, 다른 비슷한 증언들과 대조해 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즉, 만물의 신성한 근간과 같은 본질인 순수한 자아 혹은 아트만이 이 놀랄 만한 자아에 내재돼 있다는 점. 영혼 안에는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은밀한 심연이 있다.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까닭은… 신성한 근간과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비인격화된 실체, 곧 우리네 무의식의 지대가 깔려 있는데, 거기에는 범죄적 본능과 원죄가 둥지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광기와도 가깝고 하나님과도 가깝다. 

 

  우리는 원래의 죄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원래의 덕도 (원덕도) 있다. 이를 서구 신학에서는 ‘은혜를 감당할 능력’ 혹은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다. 이건 최초의 순수와 결백을 간직한 의식의 파편. 이 타락하지 않은 의식의 파편을 ‘신테레시스[각주:10]라 부른다. 

  프로이트 유파 심리학자들은 원덕보다는 원죄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한다. 그들은 쥐와 바퀴벌레들을 차분히 연구하지만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를 꺼린다. 융과 그의 후계자들이 좀 더 현실적이다. 그들은 개인적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섰고, 마음이 점점 더 비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심령매체와 뒤섞이는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융의 심리학은 내재하는 망상증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내재하는 신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반복컨대, 원죄의 밑바탕이 되는 원덕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아멜의 경우가 독특한 건 아니었다. 영혼의 심연이 있어서, 거기서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 내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 왔다. 

  그것을 수렝 신부도 인식했는데, 단지 저 뒤에서 기록되듯이, 그와 함께 심령매체에 두려움이 있고 개인적 잠재의식에 해로운 쓰레기가 있음을 강하게 인식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탄을 같은 순간에 인식했고 자신이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영원히 결합됐음을 아주 확실히 알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저주받았다는 것도 굳게 믿었다. 

  결국, 우리가 저 뒤에서 보게 되듯이, 그것은 하나님을 두루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고통 받는 마음에서, 원죄는 시간과 상관이 없는 까닭에 훨씬 더 크고 많은 원덕 속으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신비 체험, 현신, 이른바 ‘우주 의식’의 번쩍임 등은 간청한다고 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실험실에서 일률적으로 마음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얻은 체험이 명령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 그 심연으로 다가들고 그 영역 안에 존재하며 천사들 속에서 (아멜의 말대로) 문가에 서는 체험은 반복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최면상태를 실험한 사람들은 이런 점을 발견한다. 즉, 어떤 트랜스 깊이에서 피험자들이 홀로 있고 주의가 산만하지 않다면 내재된 평정과 좋은 상태를 심심찮게 알게 된다는 것. 이때 이 좋은 상태는 광대하지만 고립되지 않은 공간들이나 빛의 인지와 자주 연관된다. 

 

  랄망과 그 제자들은 신비 체험의 근거를 굳이 입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신비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 알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에서부터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각주:11]의 얼마 전 증언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을 만한 문헌들로 확인도 했다. 

  가슴 정화와 성령에 온유함으로써 달성되는 그 목표의 신성한 본질과 가능성을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하나님의 미더운 종들이 이 길을 거치고 서면 증거를 남겼으며, 그 증언들의 정통성을 로마교회 박사들이 담보했다. 이제 그들은 감각과 의지가 몸부림치는 어두운 밤들을 스스로 이겨낸 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평정 상태를 체득하게 됐다

(3편 끝. 4편 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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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1. Gabriel Marcel (1889-1973) - 프랑스의 철학자, 극작가, 비평가.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나이 마흔에 가톨릭에 귀의. <형이상학적 일기>, <구체적 철학 경험> 등. [본문으로]</구체적></형이상학적>
  2. Thomas Traherne (1637-1674) -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자, 시인, 사상가, 지복 철학을 다룬 산문 Centuries of Meditations이 20세기 초에 발간돼 널리 읽힌다. [본문으로]
  3. 欲得現前 莫存順逆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신심명> [본문으로]</신심명>
  4. 1지혜 2이해력 3지식 4권고 5인내 6경건함 7신의 외경. 이 일곱 가지 선물의 원천으로 흔히 이사야서 11장 1-2절을 꼽는다 [본문으로]
  5. Pierre Bayle (1647-1706) - 프랑스 계몽시대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요 신학 비평가.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 가톨릭에 귀의. ‘계몽철학의 화약고’라 불리는 <역사와 비평 사전>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과 개혁교회한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의 적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본문으로]</역사와>
  6.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 -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신학자, 저술가,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편적인 윤리를 유보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공포와 전율>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조명한다. 이 저술의 장르를 그 스스로 ‘변증법적 비가’라 정의했다. [본문으로]</공포와>
  7.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 유럽 속담. 좋은 일을 하려고 의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 혹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의도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 [본문으로]
  8. Caesar Nerva Trajanus (53-117) - 고대 로마 황제.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 실시. 도로와 교량, 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본문으로]
  9. Demosthenes (B.C. 384-322) -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본문으로]
  10. Synteresis - 가톨릭 교부요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342-420)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B.C. 525-456)의 작품을 풀이하면서 양심(conscientia)을 뜻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이것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우리 안에서 마지막까지 선을 알게 한다. 세네카 등 스토아학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심에 대한 태도를 여러 모로 정의하면서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철학자들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 등 신비주의자들도 사용했다. [본문으로]
  11. Dionysius the areopagite (460경-520경) - 침묵과 비움을 설파한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영성가. St. John of the Cross (1542-1591) - 성 환 델라 크루스. 에스파냐 영성가, 반종교개혁의 주요 인물, 테레사 성녀와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 창립, 로마가톨릭 성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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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4)

 

 

7

 

 

   「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있지요. 한 수녀원 수녀들이 모두 악마에 들씌웠는데, 이건 협잡과 히스테리, 음모로 시작되어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오. 이 사건에는 또 당대 가장 경건한 성직자에 속하는 수렝 수사가 등장하여 원장수녀 잔느한테서 퇴마 작업을 합니다. 사실, 마귀 들렸다는 점 때문에 명성을 누린 이 원장수녀가 모든 재앙의 주범입니다. 

루덩 수녀원의 잔느 수녀원장과 자매들


  이 여인에게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려고 고군분투하던 중에 수렝 수사가 외려 심리적 질환에 감염됐어요. 즉,
악마들에 사로잡혀 거의 광인 같은 세월을 이십 년 넘게 보냈는데, 그런 광기 속에서도 고결한 성품과 영적 투쟁 덕분에 결국 제 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면서 총체적 인식(지각)과 더불어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해 당대 가장 의미 있는 저술을 몇 편 내놓았어요. 

 

  잔느의 경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이모저모로 과시하고 관상 경지에 이른 성녀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찬탄과 사랑과 경배까지 받으며 살다가 종내에는 명성과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귀신들림과 엑소시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 마법사로 낙인찍힌 신부를 화형으로 몰아간 사법 살인,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미치광이 취급받는 수도사의 면면 등이 죄다 아주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원장수녀와 수렝 수사의 성격이 흥미진진하답니다.」 

 

  이건 헉슬리가 1942년 7월 런던에 있는 발행인에게 보낸 편지.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마귀 들린 여인들,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권력과 엑소시스트들, 그들 편에 선 재판관들, 마법사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한 성직자. 

 

  작가가 역사의 특별한 사건을 대하면서 (오늘날에도 응당 통용되는) 다양한 질문을 상정하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한 각종 문헌의 방대함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 결과, 교리며 신앙, 신비주의, 영성, 초자연적 현상, 심리학, 정신의학,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시대, 휴머니티 등이 담긴 역사 탐방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된다. 

 

엑소시즘을 시행하는 수사들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성 바깥에 있다. 하지만 헉슬리 같은 문필가가 구상한 세계를 그저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 어떤 사건이나 관점을 읽는 이가 수긍하게끔 보이고자 하는 경우… 예술적 실제의 과학적 이면은 미학적 구상의 토대가 된다.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학적 구성은 1930년대 이후 명료한 예술적 투영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영국에 거주하던 때 발표한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정연한데 비해 미국 체류 시기 작품들이 문학적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후기에 나온 픽션이며 에세이들이 더 독특한 맛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과잉 정보’와 ‘교훈적 요소’ 같은 것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섭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의 혈관에 과학과 문학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존재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겪는 공포에서, 미래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평생 숙고했으며, 그 숙고의 결과를 카프카나 조이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을 무엇보다도 지성인으로 내보였다.

  그런 측면 때문인가, 자신은 줄거리를 쉽게 궁리하고 살아 있는 형상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처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했다. 그것도,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심리학, 초심리학, 의학, 정신병학, 정신약리학 등의 전문적 심포지엄과 학술 대회들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전문가들 못지않게 연구하고 중시한 심리학, 의학, 생물학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귀신들림과 ‘마녀 사냥’이라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상존한다 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분석한 <루덩의 악마들> 같은 독창적 논픽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과 과학의 공존을 추구했다. 

 

<루덩의 악마들>이 아이디어 면에서 1961년 미셸 푸코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의 개념을 앞섰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이들에겐 헉슬리의 이 텍스트가 술술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갈구한다면, 웬만큼 고생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말랑말랑하여 접하기는 쉽지만 남는 게 별로 없는 글이 있는 반면에, 뭔가 묵직한 게 있어 보이는데 파고들기 쉽지 않은 글도 있다. 헉슬리가 인생 후반에 픽션보다는 에세이와 논픽션에 더 치중한 까닭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그에게 기존의 문학 장르 개념과 원칙은 외려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 하나, 독자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깊숙이 탐구하게끔 단초를 제공하자는 것

 

  마지막 장편 <섬>에서 픽션이 철학적 에세이며 사회적 비평과 상당히 혼재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루덩의 악마들>에서 그가 동원한 문장들은 거의 시적 수준이다. 압축적이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 간명함이라는 미덕은 그 본연의 목적 달성 이외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선사하지 않는가. (번역문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것이 또 언어 차이에서 비롯되는 번역 한계이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 그 생각의 논거로 각종 고전의 든든한 인용, 거기서 나오는 설득력, 우아한 문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적 스타일, 무엇보다도, 달변이나 수사적 효과와는 상관없이 진솔하고 정직한 토로…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적 일화에 대한 논픽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일방의 입장과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아니, 상호 대립적인 해석을 전부 끄집어내고 소개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역사가요 스토리텔러, 철학자, 사회비평가, 조사 연구자로서 번쩍이는 재능이 여기 다 녹아 있다. 그것도, 우아하고 알기 쉽게.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이며 사물의 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지적, 물리적 유기체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면밀하게 탐구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헉슬리의 박식과 기지와 혜안이 (우리 한국에서도) 공공 자산이 될지 여부는 독자들한테 달린 게 아닌가. 진정한 재능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법. 

 

8

 

   삼백 년이 훨씬 지나 케케묵은 사건에 작가는 왜 주목했던가? 

  사실, 헉슬리 이전에도 ‘수녀들의 집단 광란’과 이를 빙자한 마녀 재판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눈길 돌리고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The History of the Devils of Loudun, Volumes 1-3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작가들이며 줄 미슐레를 비롯한 역사가들, 샤르코 같은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연구자들이 말이다. (‘이야기 역사’라는 틀에서 볼 때, 뒤마가 전통적 이야기체로 썼다면 헉슬리는 이 책에서 현대적 이야기체를 동원했다 하겠다.) 

  게다가 1980년 <루덩의 마귀 들림>이라는 책을 내놓은 프랑스 역사가요 문화학자 미셸 세르토처럼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왜?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쓰고 내던 때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잔학무도 이후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세계주의와 투쟁’이라 불린 부끄러운 캠페인이 펼쳐졌다. 즉, 강력한 징벌 기계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권력은 대중의 의식을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로 감염시키고자 기를 썼다. 

  또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매카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해 정점에 이르면서 모든 것이 알 만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전됐다. 즉, 불온사상 소유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특위에 소환되고 체포되고 숙청되고…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작가로 하여금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를, 또 그 광기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유도한 엑소시즘과 잔인한 고문과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만행을… 한데, 알고 보니, 그 본질에 악마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성적 억압과 종교적 과대망상을 이용해 다중을 조종한 정치적 술책과 박해였던 것일 뿐. 

 

  대화와 관용과 공존 대신 음모와 조작과 선동과 탄압이 난무하는 사회는 집단 순응적 사고에 물들고 집단 광기에 빠지기 쉽다. 

  루덩에서 벌어진 맹신과 증오와 폭압의 장면들 이후 삼백여 년이 지났건만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헉슬리는 절감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과 자기기만에 굴하기를 거부한 그가 볼 때… 20세기의 독재자와 독재 권력과 선동가들은 교회의 수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외상을 입는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세와 근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마법사와 그 고객을 20세기 ‘공공의 적’처럼 대했다. 즉,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스탈린 시대에 자본주의자들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코뮤니스트와 그 동조자들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외국 열강의 앞잡이 취급을 당했으니, 아무리 좋게 봐도 반애국주의자요 최악의 경우엔 매국노, 이단자, 인민의 적이었다. 

  지난 시대 이 극히 추상적인 퀴슬링 부류에게 부과된 형벌이 죽음이었듯이, 현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세속적 악마 숭배자들을 기다리는 형벌도 죽음인데… 이들을 어떤 나라들에서는 코뮤니스트(빨갱이)라 부르고 또 어떤 나라들에서는 반동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뒤돌아보면, 종교의 모든 폐해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아도 무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 확신에 찬 유물론자들이 값싸게 날림으로 내놓은 이상을 절대자라도 되는 양 숭배할 태세가 돼 있으며, 열렬한 휴머니스트들이 사탄 신봉자들을 몰살하는 종교재판관의 열정으로 자기네 적들을 박해할 수 있음도 우리는 본다. 

  그런 행동 패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인간의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오래 됐다. 우리 시대에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은 선조들처럼 행동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네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이론들을 도그마로 바꾸고, 자기네 내규를 제 1원리로 격상시키고, 자기네 정치 보스들을 신으로 추앙하고, 자기네한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악의 화신이라 몰아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맹신적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은 가장 추악한 작업에 탐닉할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도 맑은 양심을 간직하며 지고지순하게 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다가 작금의 믿음과 신조가 낡아져 다시 터무니없어 보이게 되면 새로운 추세가 만들어질 터이고, 그리하여 태고의 광기가 적법성이네 이상주의네 진짜 종교네 하는 상습적인 가면을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루덩의 집단 광란 사건 이후 사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헉슬리 시대 이후 육십여 년 지난 지금, 사람들과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앞에 언급한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들이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이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폭압과 광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이나 매카시즘 따위 철 지나고 위험한 유행에서,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것도, 모든 근거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누가 귀신들린 수녀들이며, 누가 그랑디에 신부이며, 누가 리슐리외 같은 절대 권력이고 누가 그 권력의 앞잡이이고 엑소시스트들이며, 누가 몇 푼에 팔려 양심을 속이며 위증하는 자들이고, 누가 고용된 판사들이며 누가 사법살인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며, 누가 엑소시즘과 화형에 희희낙락하거나 내심 분개하는 군중인지… 

  우리 사회 적지 않은 현상과 사건에도 거의 에누리 없이 대입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메아리요 교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심하거나 게을러서 잘 모르거나 둔감할 뿐이지.)

  「우리한테, 근본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악이나 경제적 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증주의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악’이라 부르기 좋아하니까) 그 근본악이 오늘날에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라 어떤 증오에 빠진 계급이나 민족한테서 추종자들을 찾는다. 사회적 증오의 인과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렇다 하여 증오와 불공정이 더 줄어들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헉슬리의 이 이야기를 그저 오래 전 사건들의 파노라마로 치부하고 만다면, 그건 더 큰 메시지를 놓치는 꼴이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헉슬리의 이 스토리를 영국 극작가 존 화이트닝이 1961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영국 영화감독 켄 러셀이 1971년 <악마들>이라는 충격적인 필름으로 선보인 것도,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1972년 <루덩의 악마들>이라는 오페라로 구성했으며 유럽 극장들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다 그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오페라는 동영상으로 다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라든가 바탕에서 헉슬리가 호소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르마즈드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다른 동료들을 악의 원리인 아리만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시대의 악마주의에, 극악무도한 행위에 승리를 안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악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악이 세상에 더 횡행하게끔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문에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죄보다는 원덕(신테레시스)에 더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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