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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됐습니다. 그리고 방학도 시작되어 꼬맹이가 시골 할머니 집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출발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치러야 했어요. 뭐냐면, 꼬맹이가 여덟 살이 된 거랍니다. 

    아아, 꼬맹이가 자기 생일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든지! 일곱 살이 되던 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두 생일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어요. 그건 한 크리스마스에서 다음 크리스마스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의 같았습니다


꼬맹이가 생일 전날 저녁 카를손과 대화하다.



    전날 저녁 꼬맹이가 카를손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내일이 내 생일이야.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오고 내 방에서 생일 파티를 열 거야… - 꼬맹이가 문득 말끝을 흐렸어요. 표정도 흐려졌습니다. - 난 정말이지 너도 초대하고 싶었어, 하지만…

    엄마가 카를손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는 통에 초대 허락을 받기는 영 글렀던 거지요.

    카를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너하고 상대하지 않을 거다! 나도 신나게 놀고 싶어.

    그러자 꼬맹이가 허겁지겁 말했습니다.

    - 좋아, 좋아, 내일 너도 와라.

    꼬맹이는 엄마한테 말씀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카를손 없이는 생일이 즐거울 수가 없어.’ 


    카를손이 부은 볼을 가라앉히면서 물었어요.

    - 우리한테 뭘 대접할 거냐?

    - 아, 물론 달콤한 케이크지. 촛불 여덟 개로 장식한 생일 케이크가 나올 거야.

    - 거 참 좋다! - 카를손이 기뻐서 소리쳤습니다. - 근데 이런 제안을 해도 되겠냐?

    - 뭔데?

    - 촛불 여덟 개 꽂힌 케이크 하나 대신에 촛불 하나 꽂힌 케이크 여덟 개를 준비해 달라고 엄마한테 부탁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꼬맹이는 그런 부탁을 엄마가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카를손이 또 물었습니다.

    - 넌 분명히 좋은 선물들을 받겠지?

    - 글쎄, 잘 모르겠는걸. 


    꼬맹이가 대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아무래도 받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 내 평생에 강아지를 선물로 받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다른 선물들이야 당연히 많이 받겠지. 그걸로 만족하고 강아지는 잊은 채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기로 했어.

    - 그뿐 아니라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내가 강아지보다 훨씬 더 좋지. - 그렇게 말하고는 카를손이 고개를 숙여서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 네가 어떤 선물을 받을지 궁금한걸. 만약 캔디를 받는다면, 내 생각에 넌 그걸 즉각 자선사업에 기부해야 할 거야. 

    - 좋아, 캔디 상자를 받으면, 너한테 줄게.

    카를손을 위해서라면 꼬맹이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특히 이제 작별을 눈앞에 두고서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 저기 말이야, 카를손, 나는 모레 할머니 집으로 떠나서 여름내 거기 있을 거야.

    카를손이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곧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 나도 할머니한테 간다. 우리 할머니가 네 할머니보다 진짜 할머니답다.

    - 네 할머니는 어디 사시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집에 살지, 어디 살겠어! 너는 내 할머니가 거리에 살면서 밤새 헤매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카를손의 할머니에 대해서도, 꼬맹이 생일에 대해서도, 다른 무엇에 관해서도 둘은 더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벌써 바깥에 어둠이 진하게 깔렸고, 생일 아침에 늦잠 자지 않으려면 꼬맹이가 여느 때보다 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니까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꼬맹이가 침대에 누운 채 기다렸습니다. 

    ‘이제 식구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생일 케이크와 선물들을 건넬 거야.’ 

    몇 분이 그렇게 긴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선물들을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든지, 기다림에 지쳐서 배가 아프기까지 하지 뭡니까. 


    하지만 마침내 복도에서 식구들 발소리가 울리고 “꼬맹이가 벌써 일어났을 거야” 하는 말소리도 들려 왔어요. 그리고 곧 방문이 활짝 열리고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들어섰습니다.

    꼬맹이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는데, 두 눈이 반짝거렸어요. 


꼬맹이가 아침에 침대에 누운 채 식구들의 축하인사와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다.


    - 생일 축하한다, 소중한 꼬맹이야! - 엄마가 말했습니다. 

    아빠와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축하해!” 하고 말했지요. 그리고 촛불이 여덟 개 꽂힌 케이크와 선물들이 담긴 큰 쟁반을 꼬맹이 앞에 내놓았습니다. 

    선물은 많았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받은 것보다는 좀 적은 듯싶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꼬맹이가 재빨리 세어 보니 쟁반에 꾸러미가 네 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그러시는 거예요.

    - 선물을 아침에 다 받는 건 아니란다. 낮에도 또 뭔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 


    꼬맹이가 꾸러미 네 개에 아주 기뻐했어요. 거기에는 물감 상자와 장난감 피스톨, 예쁜 책, 파란색 새 반바지가 있지 뭐에요. 그건 다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정말 다정한 이들이야! 이렇게 다정한 부모와 형과 누나가 세상 누구한테 또 있을까.’ 

    꼬맹이가 피스톨을 몇 번 쏘았습니다. 격발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습니다. 식구들이 다 침대 곁에 앉아서 꼬맹이가 쏘는 피스톨 소리를 들었지요. 아아, 식구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 여덟 해 전에 네가 요렇게 작은 아이로 세상에 나온 걸 생각해 보렴. 

    아빠가 한 손을 오므려 보이면서 말하자, 엄마가 말을 받았습니다.

    - 그래요,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가요! 그날 스톡홀름에 비가 얼마나 퍼부었는지 기억해요? 

    - 엄마, 내가 여기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어요?

    꼬맹이 물음에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 물론이란다.

    - 근데 보쎄 형하고 베탄 누나는 말메에서 태어났고? 

    - 응, 그래.  

    - 아빠는 게테보르게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 그렇단다, 나는 게테보르게 출신이야. 

    - 그러면 엄마는 어디서 태어났어?

    - 에스킬스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꼬맹이가 엄마를 뜨겁게 포옹하면서 외쳤어요. 

    - 그렇게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우리가 다 이렇게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불러주는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꼬맹이가 장난감 총을 쏘았어요.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오전 내내 꼬맹이는 연신 피스톨을 쏘면서 손님들을 기다리며 낮에도 또 무슨 선물을 받을지 모른다고 한 아빠 말만 생각했습니다. 

    ‘어떤 순간에 기적이 이뤄질지도 몰라. 강아지를 선물한다면…’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문득 깨닫고, 그렇게 어리석은 꿈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오늘은 강아지 생각은 버리고 그저 기쁜 마음만 갖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꼬맹이는 실제로 모든 것에 기뻐했습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엄마가 꼬맹이 방에 생일상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커다란 화병에 꽃을 한 아름 꽂고 가장 예쁜 장밋빛 찻잔을 세 개 내왔습니다. 

    그걸 보고 꼬맹이가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 엄마, 찻잔은 네 개가 필요해요.

    - 왜 그렇지? - 엄마가 놀랐습니다. 

    꼬맹이가 우물쭈물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못마땅하게 여길 줄 빤히 알면서도, 카를손을 생일에 초대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습니다.

    -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도 이제 올 거야. - 꼬맹이가 용기를 내어 말하면서 엄마 눈을 용감하게 마주봤습니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어요.

    - 오, 이런! 그래, 오라고 하렴. 오늘은 네 생일이잖니. -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꼬맹이의 블론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어요. - 너는 아직도 젖먹이 같은 상상에 사로잡혀 있구나. 여덟 살이 됐다는 게 믿기 어렵네. 몇 살이지, 꼬맹이?

    - 나는 가장 원기 왕성한 때의 대장부야. 카를손하고 아주 똑같아. - 꼬맹이가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날은 느릿느릿 지나갔어요. 아빠가 말한 바로 그 ‘한낮’이 된지 벌써 오래건만, 그 누구도 그 어떤 선물도 더 이상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새 선물을 하나 더 받았습니다.


    보쎄와 베탄은 아직 여름방학을 맞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둘 다 보쎄의 방에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둘은 꼬맹이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어요. 복도에 서서 꼬맹이는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누나의 키득키득 웃음소리와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몸이 달아올랐지요. 


    얼마 뒤 둘이 나오더니, 베탄 누나가 웃으면서 종이꾸러미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기뻐서 당장 풀어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보쎄 형이 말렸습니다.

    - 아니야, 여기 붙어 있는 시를 먼저 읽어 봐라.


    시는 꼬맹이도 알아볼 수 있도록 굵은 인쇄체 글자들로 적혀 있어서, 꼬맹이가 직접 읽었습니다. 



형과 누나가 너한테 강아지를 선물하는 거야.

이 강아지는 다른 개들하고 싸우지 않아,

짖지 않고 뛰지 않고 물지 않아,

그 누구한테 절대 달려들지도 않아.

꼬리도 앞발도 얼굴도 귀도

이 강아지는 검은 비로드로 된 거야.


 

꼬맹이가 헝겊 인형 강아지를 받고 슬퍼하다.

  꼬맹이가 입을 꾹 다물었어요. 돌처럼 굳은 듯싶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보쎄 형이 말했어요.

    - 자, 이제 꾸러미를 풀어도 된다.

    그러나 꼬맹이는 상자를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근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우박처럼 흘러내리지 뭐에요. 

    - 왜 그래, 꼬맹이, 왜 그러니? - 베탄 누나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 그, 그러지 마, 울지 마, 울지 마라, 꼬맹이! - 보쎄 형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어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베탄 누나가 꼬맹이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 미안해, 용서해라! 우린 그냥 웃자고 한 거야. 알겠니?

    꼬맹이가 베탄의 포옹을 홱 뿌리쳤어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돌리고 흐느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 형하고 누나는 알잖아. 내가 진짜 강아지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알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날 놀리다니…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보쎄와 베탄이 그 뒤를 쫓아 달려왔어요. 엄마도 뛰어왔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온몸을 들썩이면서 울기만 했습니다.


    이제 생일이 다 망쳤군요. 꼬맹이는 살아있는 강아지를 선물로 받지 못하더라도 오늘만큼은 종일 즐겁게 보내기로 결심했었지요. ‘하지만 비로드로 만든 장난감 강아지를 선물하다니, 누굴 놀리는 거야? 정말 심했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울음이 진짜 신음으로 바뀌었고 머리는 베개에 더 깊이 파묻혔습니다. 


꼬맹이가 형과 누나의 장난에 확가 나서 침대에 엎드려 울다.


    엄마와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어쩔 줄 몰라 침대 곁에 그냥 서 있기만 했습니다. 다들 역시 아주 우울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 이제 아빠한테 전화해서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 들어오시라고 부탁할게. 


    그래도 꼬맹이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아빠가 집에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꼬맹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울적하게만 보였어요. 생일은 망가졌고,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엄마가 전화하러 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꼬맹이는 계속 훌쩍훌쩍 울기만 했습니다. 


    아빠가 현관에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눈물만 쏟았어요. 

    이제 꼬맹이는 절대 명랑해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는 게 더 낫겠어. 그러면 보쎄하고 베탄이 장난감 강아지를 볼 때마다 어린 동생이 아직 살아 있던 생일에 동생을 고약하게 놀린 일을 기억하면서 두고두고 괴로워하겠지…’

    꼬맹이는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가 침대 주변에 서 있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베개에 더 깊숙이 파묻기만 했습니다.


    (- 얘야, 꼬맹이, 현관에서 누가 널 기다리는구나. - 아빠 말씀에도 대꾸하지 않았어요. <계속>) 


관련 포스트: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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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계속) 


    카를손의 수다에 꼬맹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린 강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카를손이 잠시 재미나게 노는 것도 싫지는 않다고 말할 때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카를손이 입술을 삐죽이며 밝혔습니다. 


    - 싫으면 관둬라! 넌 이 개하고만 줄곧 장난치는데, 나도 뭔가 하고 싶다.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편들고 나서자, 카를손이 부은 볼을 가라앉히면서 말했습니다.

    - 얘들아, ‘기적의 밤’ 무대를 만들자. 알아맞혀 봐,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누구지?

    - 물론 카를손이지! - 꼬맹이와 크리스터, 구닐라가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 그렇다면, ‘기적의 밤’이라는 공연을 벌이기로 결정이 된 거냐?

    카를손이 묻자 아이들이 또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 그래, 그래!  

    - 공연 입장료는 캔디 하나로 정하는 거야?

    - 맞아. - 아이들이 동의했어요. 

    - 입장료로 받은 캔디는 자선 목적으로 쓴다는 것도 결정한 거지?

    - 어떻게? - 아이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 진짜 자선이라는 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카를손을 돕는 거야. 

    아이들이 어리둥절하여 서로 멀거니 쳐다봤습니다. 


    - 아, 어쩌면… 

    크리스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카를손이 바로 말을 가로막았어요.

    - 아니, 우리는 이미 결정 내렸다! 그게 아니라면 난 안 놀 거야.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모은 캔디를 전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에게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료로 캔디를 지불하다.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거리로 달려 나가서 아이들에게 이제 저 위 꼬맹이 방에서 ‘기적의 밤’이라는 큰 공연이 시작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백 원짜리 하나만 있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다들 상점으로 달려가서 저마다 ‘입장료 캔디’를 샀습니다.

    꼬맹이 방문 앞에 구닐라가 서서 구경꾼들한테 캔디를 받아 ‘자선을 위해’라고 적힌 상자에 넣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크리스터가 손님용 의자들을 쭉 늘어놓았습니다. 방 한 구석에 걸려 있는 홑이불 뒤에서 나직하게 어르는 말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키레라는 이름의 사내애가 물었습니다.

    - 우리한테 뭘 보여줄 건데? 만약 시시한 거면 캔디를 돌려달라고 할 거야.

    꼬맹이와 구닐라, 크리스터는 이 키레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는 늘 불평만 늘어놓는 편이었거든요


    그때 홑이불 뒤에서 꼬맹이가 작은 강아지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렸습니다. 

    -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술사와 학식이 있는 개 알베르트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자마자 홑이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 네, 지금 공표한 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술사가 등장합니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카를손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차림새가 요란했습니다.  


    머리에는 꼬맹이 아빠의 실크해트를 쓰고 어깨에는 엄마의 격자무늬 앞치마를 걸쳤는데, 앞치마를 턱 밑에서 화려한 나비댕기로 묶은 겁니다. 이 앞치마가 카를손에게는 마술사들이 흔히 걸치고 나타나는 검은 망토를 대신했어요. 다들 기대가 커서 따스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키레만 빼고 말이지요.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무대로 나와 카를손을 소개하다.



    카를손이 허리 굽혀 인사했습니다. 아주 흡족한 모습이었어요. 인사를 끝내자 실크해트를 벗고는 모자 안이 텅 비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였습니다. 그건 마술사들이 흔히 하는 행동과 아주 똑같았어요.


    -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모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확인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완전히 텅 비었습니다. 

    꼬맹이는 언젠가 서커스에서 본 마술사의 공연을 떠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저 모자에서 잿빛 토끼를 꺼내겠지. 카를손이 실크해트에서 토끼를 꺼낸다면 진짜 재미날 거야!‘ 

    -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카를손이 우울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에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면, 여기엔 절대 그 무엇도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보니까, 저 앞에 앉은 어린 대식가들이 캔디를 먹고 있군요. 이제 우리가 이 실크해트를 한 바퀴 돌리면, 여러분은 여기에 캔디를 하나씩 던지게 될 거예요. 자선을 베풀기 위해 여러분이 기부를 하는 거지요.


    꼬맹이가 모자를 들고 한 바퀴 돌았습니다. 사탕이 가득 채워졌어요. 그 모자를 카를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카를손이 건네받은 모자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봐요, 이 모자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네요! 만약 모자가 꽉 채워졌다면, 이렇게 소리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카를손이 캔디를 하나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습니다. 

    - 그래요, 이게 바로 자선이라는 겁니다! - 그렇게 외치고는 턱을 더 부지런히 놀렸습니다. 

    키레 하나만이 손에 두툼한 봉지를 들고 있으면서도 모자에 캔디를 한 개도 넣지 않았습니다. 

    - 자, 소중한 친구들이여, 그리고 키레 너도, 다들 보세요.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여러분 앞에 학식 있는 개 알베르트가 있습니다. 이 개는 뭐든지 할 수 있답니다. 전화도 걸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빵을 굽기도 하고 말도 하고 다리를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 순간 강아지가 정말로 작은 발을 들었어요. 그것도 키레가 앉아 있는 의자 곁에서. 그리고 금방 마룻바닥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습니다. 


    - 이제 여러분은 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 개는 정말 공부를 많이 했답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키레가 쏘아붙이고는 자기 의자를 물웅덩이에서 떼어놓았습니다. - 강아지들이 이런 마술이야 다 하지. 알베르트한테 말을 몇 마디 하게 해 봐. 그게 좀 더 힘들 걸, 헤헤헤!

    그러자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 알베르트, 정말 너한테는 말하는 게 힘드니?

    - 아니. - 강아지가 뱃속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 담배 피울 때만 말하기가 힘들어.

    아이들이 깜짝 놀라 다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강아지가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꼬맹이는 강아지 뒤에서 카를손이 말하는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기까지 했어요. 왜냐면 말하는 강아지보다 평범한 강아지를 갖고 싶었으니까요.



카를손이 푸들을 데리고 무대에 나와 공연을 벌이다.



    - 사랑스러운 알베르트야, 너는 우리 친구들과 키레에게 개의 생활에 관해 무엇이든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카를손이 부탁하자 알베르트가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저께는 영화관에 갔었어. - 그렇게 말하면서 카를손 주변을 즐겁게 겅중겅중 뛰었어요. 

    - 물론, 그랬겠지. - 카를손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 아, 그래! 내 옆 의자에 빈대 두 마리가 앉아 있더군. - 알베르트가 계속 입을 놀렸습니다. 

    - 어, 그게 무슨 말이냐! - 카를손이 놀랐습니다. 

    - 아, 그래! 나중에 거리로 나와서 얘기 들으니까 한 벼룩이 다른 벼룩에게 그러는 거야. “어떡할래, 집에 걸어서 갈까 아니면 개를 타고 갈까?"


    아이들은 모두 이것이 설령 ‘기적의 밤’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좋은 공연이라고 여겼습니다. 키레 하나만 여전히 얼굴을 찌푸렸어요.

    - 이 개가 빵을 구울 줄도 안다고? 

    키레가 비웃듯이 말하자,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물었습니다.

    - 알베르트, 넌 빵을 굽니?  

    알베르트가 하품을 하고 바닥에 엎드려서 대답했습니다. 

    - 아니, 할 줄 모르는데…

    - 헤헤헤! 내 그럴 줄 알았지! - 키레가 소리쳤어요. 

    - …왜냐면 지금 누룩이 없으니까. - 알베르트가 말을 마쳤습니다. 


    아이들이 다 알베르트를 아주 좋아했지만, 키레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요구했어요.

    - 그렇다면 한 번 날아 보라고 해. 나는 데는 누룩이 필요 없으니까.

    - 알베르트, 한번 날아 볼래? -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물었습니다. 

    강아지는 잠이 든 듯했지만, 그래도 카를손의 물음에 대답은 했어요. 

    - 암, 기꺼이 하지. 그러나 네가 나랑 같이 난다면 나도 날겠어. 왜냐면 나는 어른들 없이 혼자 날지는 않겠다고 엄마한테 약속했으니까.

    - 그렇다면 이리 와라, 귀여운 알베르트야.

    카를손이 강아지를 마룻바닥에서 들어 올렸습니다. 

카를손이 강아지를 안고 창밖으로 날다.

    눈 깜짝할 새에 카를손과 알베르트가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엔 천장으로 날아올라 샹들리에 주변을 몇 바퀴 돌더니 곧장 창밖으로 나갔습니다. 키레가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어요.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서 카를손과 알베르트가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한데 꼬맹이는 겁이 나서 소리쳤어요. 

    - 카를손, 카를손, 내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와!

    카를손이 순순히 말을 들었습니다. 금방 돌아와서 알베르트를 바닥에 내려놓았어요. 강아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아주 놀란 표정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날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 오늘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더 보여줄 게 없어요. - 카를손이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키레에게 다가가서 통통한 손으로 툭 치며 거칠게 말했습니다. - 그리고 넌 앞으로 교육 좀 받아야겠다!

    키레는 카를손이 뭘 원하는지 금방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캔디를 내놔야지! - 카를손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어요. 

    키레가 봉지를 꺼내 카를손에게 넘겼어요. 사실은 캔디 한 개를 더 자기 입에 넣은 뒤 그렇게 한 겁니다.

    - 인색한 꼬마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카를손이 그렇게 말하고는 눈길로 뭔가를 서둘러 찾으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 근데 자선기금 상자는 어디에 있는 거야? 

    구닐라가 자기가 모은 ‘입장료 캔디’ 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구닐라는 캔디를 잔뜩 얻은 카를손이 이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를손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상자를 낚아채더니 캔디를 열심히 세기 시작했습니다.

    - 전부 열다섯 개로군. 저녁식사로 충분해… 잘들 있어라! 난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가겠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아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구닐라와 크리스터도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어요. 알베르트와 둘만 남게 되자, 꼬맹이는 아주 좋았습니다. 강아지를 무릎에 앉히고 뭔가를 속삭였습니다. 강아지가 꼬맹이 얼굴을 몇 번 핥다가 코를 골면서 달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세탁소에서 돌아온 뒤 모든 게 금방 달라졌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시무룩해졌어요. 엄마는 알베르트가 집 없는 강아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알베르트 목걸이에 새겨진 번호로 전화를 해서 자기 아들이 작고 검은 푸들 강아지를 발견했다고 알렸지 뭡니까.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전화기 곁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안달했어요. 

    - 제발 그 사람들이 주인이 아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아아, 전화 받은 사람이 강아지 주인인 것으로 드러났어요!

    엄마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 아들아, 보비의 주인이 누군지 알겠니? 스테판 알베르트라는 이름의 소년이란다.

    - 보비라고? - 꼬맹이가 되물었어요. 

    - 그래, 이 강아지 이름이란다. 스테판은 여태껏 울고 있었다는구나. 일곱 시에 찾으러 올 거야.

    꼬맹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습니다. 강아지를 더 꼭 끌어안고는 엄마한테 들리지 않게끔 강아지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어요. 

    - 귀여운 알베르트, 네가 내 강아지가 되기를 얼마나 원했는데!

    일곱 시가 되자 스테판 알베르트가 와서 강아지를 데려갔습니다.


    꼬맹이가 침대에 엎어져서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슬픈지 듣는 사람마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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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 부스스한 꼬마가 세로줄이 있는 파란 파자마 차림으로 주방에 있는 엄마한테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아빠는 벌써 일터로 나가셨고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학교에 갔네요. 

늦잠을 자고 일어난 꼬맹이가 잠옷 차림으로 엄마한테 가서 안기다.

    꼬맹이 학교 수업은 좀 늦게 시작됐는데, 그건 정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왜냐면 비록 오랜 시간은 아니라도 엄마랑 둘이 있는 걸 아주 좋아했으니까요. 그런 시간에는 이야기 나누고 함께 노래 부르거나 서로 동화를 들려주기에 딱 좋지요. 꼬맹이가 이미 세 살짜리 어린애는 아니지만 아직은 엄마 무릎 위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아무도 안 볼 때만 그렇게 하지요


    꼬맹이가 주방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식탁 곁에 앉아서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꼬맹이가 아무 말도 않고 엄마 무릎 위에 앉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포옹하고 다정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꼬맹이는 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엄마 품에서 그렇게 앉아 있곤 합니다


    엄마와 아빠는 어제 산보 나갔다가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셨어요. 그때 꼬맹이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지요. 자면서 아이는 이리저리 뒹굴었어요. 막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다가 엄마는 홑이불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홑이불이 마치 누가 일부러 검정을 묻힌 것처럼 지저분했습니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꼬맹이가 노느라고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구나.’ 


    하지만 이제 이 장난꾸러기가 무릎 위에 있을 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어요. 

    - 얘, 꼬맹이야, 엄마는 네 홑이불에 누가 구멍을 냈는지 알고 싶구나. 단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그랬다고 말할 생각일랑 제발 그만두렴. 

    꼬맹이가 입을 다물고 긴장했습니다. ‘어떡하지? 구멍들은 바로 카를손이 낸 것인데, 엄마는 그 사람 얘기는 아예 하지 말라고 그러네.’ 꼬맹이는 도둑들 얘기도 일절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말해 보았자 엄마가 믿을 턱이 없으니까요.

    - 그래,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니? - 꼬맹이가 우물우물하자 엄마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 구닐라한테 물어보면 안 되겠어, 엄마? - 꼬맹이가 꾀를 내어 말하고는 잠깐 생각했어요. ‘구닐라가 말하는 게 더 낫지. 엄마는 나보다 그 애 말을 더 믿을 테니까.’ 

    엄마는 생각했어요. ‘아! 구닐라가 홑이불에 구멍을 낸 모양이군.’ 그러고는 또 자기 꼬맹이가 착한 아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고자질하지 않고, 구닐라가 직접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니까요

    엄마가 꼬맹이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꼬맹이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캐묻지 않고, 기회가 닿으면 구닐라와 얘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 넌 구닐라가 그렇게 좋으니? 

    엄마가 말을 돌려 묻자 꼬맹이가 대답했어요. 

    - 응, 아주 좋아해.

    엄마가 다시 신문에 눈길을 돌리자 꼬맹이는 말없이 무릎에 앉은 채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는 정말 누구를 사랑하는 거지? 무엇보다도 엄마를… 그리고 아빠도… 또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아주 좋아해… 맞아, 나를 잘 상대해주지 않는다 해도 아주 좋아할 때가 많아. 특히 보쎄 형을. 하지만 때로는 모든 사랑이 날아간 듯이 식구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걸.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도 사랑하고, 구닐라도 역시 사랑해. 그래, 어른이 되면 그 애하고 혼인할지도 몰라.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아내는 있어야 되잖아. 물론 난 그 누구보다도 엄마하고 혼인하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갑자기 걱정스러운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 대답해 줘, 엄마. 보쎄 형이 어른이 되고 죽으면, 내가 형 아내하고 혼인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커피 잔을 끌어당기면서 놀란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봤어요. 그러다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물었습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바보 같은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놀라서 꼬맹이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가만두지를 않는군요. 

    - 말해 보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 보쎄 형이 컸을 때 내가 형의 낡은 자전거와 낡은 스키를 물려받았잖아… 그리고 나만할 때 형이 타고 놀던 나무말도 물려받았고… 형의 낡은 파자마며 구두 같은 걸 다 내가 헤지도록 입고 신는데…

    - 알았다, 형의 낡은 아내는 너한테 돌아가지 않도록 하마. 약속할게. -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서 꼬맹이가 물었어요. 

    - 엄마한테 장가가면 안 되나?

    - 그건 아마도 불가능할 거야. 나는 벌써 아빠한테 시집갔잖니.

    - 맞아, 그건 그래. -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못마땅한 투로 덧붙였습니다. - 나하고 아빠가 둘 다 엄마를 사랑하다니, 정말 좋지 못한 일치야.

    그러자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습니다. 

    - 두 사람 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좋은 여자라는 뜻이 아니겠니? 


    꼬맹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 그러면 난 구닐라한테 장가갈래. 누구하고든 혼인은 해야 되잖아!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어요. 구닐라하고는 그다지 오순도순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 애하고 가끔씩 다투기도 하니까요. 그래요, 누가 되든 아내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하고 그냥 쭉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 난 아내보다는 강아지를 훨씬 더 갖고 싶어. 엄마, 나한테 강아지를 선사할 수는 없어?

    엄마가 가볍게 한숨을 지었습니다. 아, 꼬맹이가 또 강아지 타령을 하는군! 그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얘기 못지않게 듣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돌렸습니다

    - 꼬맹이야, 이제 옷 입을 시간이다. 안 그러면 학교에 지각할 거야.

    엄마 말에 꼬맹이가 서운함을 드러냈습니다.

    - 그래, 알겠어. 내가 강아지 얘기만 꺼내면 엄마는 학교 얘기로 넘어가네!


    …그날 꼬맹이는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크리스터며 구닐라하고 의논할 게 많았으니까요.

    수업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셋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크리스터와 구닐라도 카를손을 안다는 사실에 꼬맹이는 여느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 그 사람은 정말 명랑하지 않니? 네가 보기에 그 사람이 오늘 또 올 것 같아? - 구닐라의 물음에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 모르겠다. 그 사람은 ‘대충’ 오겠다고 약속했어. 그건 곧 생각나면 온다는 뜻이야.

    - 그 사람이 ‘대충’ 오늘 날아오면 좋겠다. 구닐라하고 네 방에 가도 돼? - 이번에는 크리스터가 물었습니다.

    - 당연히 와도 된다. 

    그때 다른 존재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역시 아이들과 함께 걷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 작고 검은 푸들이 꼬맹이에게 달려온 겁니다. 푸들은 꼬맹이 무릎을 핥으면서 친근하게 왈왈 짖었어요. 


꼬맹이와 동무들이 거리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만나다


    꼬맹이가 환성을 질렀습니다.

    - 얘들아, 여기 좀 봐, 얼마나 근사한 강아지니! 복잡한 거리에 놀라서 나한테 저편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이야.

    네거리가 나올 때마다 강아지를 다정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가면 꼬맹이는 행복할 겁니다. 강아지도 그걸 느낀 게 분명해요. 꼬맹이 곁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인도를 펄쩍펄쩍 뛰어가니까 말이지요.

    - 어머나, 정말 예쁘다. 이리 오렴, 강아지야! - 구닐라가 작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가 강아지 목줄을 쥐면서 말했습니다.

    - 아니야, 나랑 나란히 가고 싶어 한다. 이애는 나를 좋아해.

    - 그 강아지는 나도 좋아했어. - 구닐라가 쏘아붙였어요. 


    작은 강아지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사랑할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꼬맹이도 이 강아지를 사랑했어요. 아아, 정말 사랑했어요! 허리를 굽혀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톡톡 건드리면서 나직하게 휘파람도 불고 쭈쭈 소리도 냈어요. 그 부드러운 소리들은 이 검은 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가고 가장 매혹적인 강아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자기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좋다고 겅중겅중 뛰고 반갑게 짖으면서, 아이들이 동네 거리로 들어설 때도 계속 뒤따라왔습니다.  


    - 혹시, 집이 없나? - 꼬맹이가 강아지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한 가닥 기대를 담아 덧붙였습니다. - 주인이 없는지도 몰라.

    - 그래, 그런 것 같은데. - 크리스터가 맞장구를 쳤지만, 꼬맹이는 가볍게 화를 내면서 말을 잘랐어요.

    - 넌 입 다물고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예파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터가 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 이리 오렴, 귀여운 강아지야! - 집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더 확신하면서 꼬맹이가 강아지를 불렀습니다.

    - 아니, 그 강아지는 너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을걸. 

    크리스터가 경고하는 말에 꼬맹이가 얼른 대꾸했습니다. 

    - 그냥 가도 괜찮아. 하지만 나를 따라오면 좋겠다. 


    강아지가 꼬맹이 뒤를 따라왔어요. 그러다 보니 꼬맹이가 사는 집까지 오게 됐네요.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지 엄마한테 물어봐야겠어.’ 

    그러나 엄마는 집에 안 계셨어요. 식탁 위에 남긴 메모를 보니까, 엄마는 세탁소에 가니까 필요하면 거기로 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강아지가 꼬맹이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었습니다. 강아지를 쫓아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 봐라. 이 강아지는 나하고 살고 싶어 하는 거야! - 꼬맹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소리 질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창문으로 날아들었습니다. 

    - 안녕! 너희들, 뭐야, 개를 세탁이라도 한 거냐? 털이 떡이 졌네!

    - 이건 예파가 아니야, 모르겠어? 이건 내 강아지야!

    하지만 꼬맹이 말을 크리스터가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 아니, 네 강아지가 아니야.

    - 그래, 너한테는 강아지가 없잖아. - 구닐라가 거들고 나섰어요. 

    그러자 카를손도 한마디 했습니다.

    - 나한테는 저기, 저 위에, 개가 천 마리는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개 농장은 바로…

    - 너희 집에서 난 개를 한 마리도 못 봤는데! - 꼬맹이가 카를손의 말을 잘랐습니다. 

    - 그때는 개들이 집에 없었을 뿐이야. 다들 사방으로 날아간 거야. 내 개들은 전부 날아다닌다.


    하지만 카를손의 수다가 꼬맹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요. 날아다니는 개 천 마리가 지금 꼬맹이에게는 이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하나에 댈 게 아니었거든요.

    꼬맹이가 새삼스럽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 아니야, 난 이 강아지의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구닐라가 강아지 목덜미를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 어쨌든 목줄에는 알베르트라고 적혀 있는 걸.

    - 그건 주인 이름이 틀림없어. - 크리스터가 말을 받았어요.

    - 이 알베르트는 벌써 죽었을 거야! - 꼬맹이가 반대하여 말하고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알베르트라는 사람이 설령 있다 해도, 이 강아지를 사랑하지는 않아.’ 


    그러다가 퍼뜩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라서 크리스터와 구닐라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보면서 물었습니다.

    - 혹시, 강아지 이름이 알베르트가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은 대답 대신 놀리듯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카를손이 대신 나섰습니다. 

    - 나한테는 알베르트라는 이름의 개들이 몇 마리 있다. 안녕, 알베르트!

    강아지가 카를손에게 달려가면서 반갑게 짖었어요. 

    꼬맹이가 소리쳤습니다.

    - 봐라, 얘들아. 강아지가 자기 이름을 아는 거야!.. 알베르트, 알베르트, 이리 와.

    구닐라가 강아지를 붙잡아 살펴보더니 쌀쌀맞게 말했습니다.

    - 여기 목걸이에 전화번호가 있는 걸.

    그 말에 카를손이 설명하고 나섰습니다. 


    - 개들한테는 자기 전화번호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 강아지한테 말해라. 자기 주인한테 전화해서 조금 늦게 돌아가겠다고 알리라고 해. 내 개들은 어디서 머물게 되면 늘 전화를 하지. - 통통한 손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카를손이 계속 입을 놀렸습니다. - 내 개들 중 한 마리는, 아, 그 애도 이름이 알베르트인데, 며칠 전에 어쩌다가 어디서 오래 머물게 되어 나한테 알리려고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전화번호를 헷갈려서 다른 지역에 사는 늙은 퇴역 소령 집으로 걸게 됐다. 알베르트가 “당신은 카를손의 개들 중 하나인가요?” 하고 묻자, 소령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쳤어. “이 돼지 같은 녀석아! 나는 개가 아니라 소령이야!” 그러자 알베르트가 정중하게 말했어.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짖어대는 겁니까?” 하하하, 봐라, 얼마나 똑똑하냐!


    (카를손의 수다에 꼬맹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린 강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답니다.  <계속>) 


관련 포스트: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자신감 강화 (2)

5. 카를손의 장난 (2-1)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2)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1)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달과 아빠

돌아가신 할아버지

자장가 (a lullaby)

엄마 말 안 듣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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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계속) 

    카를손이 선반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구닐라에게 다가가서 뺨을 살짝 꼬집었습니다. 

    - 어때, 네 앞에 있는 내가 작은 허깨비라고?

    - 우린… - 크리스터가 우물거렸습니다. 

    - 흠, 네 이름이 어거스트냐? - 카를손이 크리스터에게 물었습니다. 

    - 그렇지는 않아. - 크리스터가 고개를 저었어요. 

    - 좋아. 더 계속해 보자!.. - 카를손이 말했어요.

    - 이 애들은 구닐라와 크리스터야. - 꼬맹이가 소개했습니다. 


    카를손이 뭔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서둘러 설명했습니다. 

    - 이제 좀 재미나게 노는 데 난 반대하지 않겠다. 작은 의자들을 창문으로 내던져 볼까? 아니면 그 비슷한 놀이를 한번 궁리해 볼까?

    꼬맹이는 그게 아주 재미난 놀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가 그런 장난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지요.

    - 흠, 너희들은 겁쟁이로구나. 그렇게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면 뭘 할 수 있겠냐.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다른 뭔가를 궁리들 해라. 안 그러면 너희들과 안 놀겠어. 난 뭔가 재미난 짓을 해야 돼. - 카를손이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잠깐 기다려, 우리가 이제 뭔가를 생각해낼 거야! - 꼬맹이가 애원하듯이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은 단단히 삐치기로 작정했는지 투덜거렸습니다. 

구닐라가 카를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다.

  - 지금 당장 여기서 날아갈래… 

    세 아이는 카를손이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임을 알거나 느꼈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입을 모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를손이 볼이 부어서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안 갈 수도 있을 거야. 만약 저 애가… - 카를손이 통통한 손가락으로 구닐라를 가리켰어요. -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의 다정한 카를손” 하고 말해 준다면 말이야.

    구닐라가 기꺼이 카를손을 쓰다듬으며 정겹게 부탁했어요. 

    - 다정한 카를손, 우리랑 같이 있어 줘! 우리가 재미난 일을 꼭 생각해낼게.

    - 좋아. 그렇다면 안 가겠어. 

    아이들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꼬맹이의 엄마와 아빠는 저녁마다 산보를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엄마가 현관에서 큰 소리로 알리는군요.

    - 꼬맹이야! 크리스터하고 구닐라가 네 방에서 여덟 시까지 놀아도 좋아. 그 다음에 넌 얼른 잠자리에 드는 거다. 아빠랑 산보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너한테 들러서 좋은 꿈을 꾸라고 기도해주마.

    그리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네 엄마는 왜 내가 몇 시까지 있어도 좋은지는 말하지 않는 거지? - 카를손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다들 나를 정 그렇게 홀하게 대한다면, 난 너희들과 안 놀겠어.

    - 넌 있고 싶은 대로 있어도 돼. - 꼬맹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카를손이 입술을 더 삐죽 내밀었어요. 

    - 나는 왜 다른 애들처럼 정각 여덟 시에 가라고 하지 않는 거냐? - 목소리에 서운함이 잔뜩 담겼어요. - 싫어, 난 그렇게는 못 놀아!

    - 좋아, 엄마한테 부탁해서 너도 여덟 시에 집에 가라고 이르도록 할게. - 꼬맹이가 약속했습니다. - 그래, 뭐하고 놀면 좋을지는 생각했어?

    카를손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습니다. 


    - 유령 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놀래주자. 내가 작은 홑이불 하나로 뭘 할 수 있는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할걸. 나 때문에 얼이 쏙 빠지도록 놀란 사람들이 백 원씩 준다면, 난 초콜릿을 산더미처럼 살 수 있을 텐데.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이잖아! -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명랑하게 반짝였습니다. 

    꼬맹이와 크리스터, 구닐라가 유령 놀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꼬맹이가 토를 달았어요. 

    - 사람들을 꼭 무섭게 놀랠 필요는 없는데.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대꾸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너한테 알려주지는 않겠다. 난 모든 이들을 얼이 빠질 정도로 놀라게 할 거지만, 그래도 내가 그랬는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야. - 카를손이 꼬맹이 침대로 가서 홑이불을 벗겨냈습니다. - 적당한 물건이야. 유령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들 수 있겠다.


    카를손이 책상 서랍에서 색연필들을 꺼내 홑이불에 무시무시한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러고는 가위를 들더니 꼬맹이가 말릴 새도 없이 재빨리 눈구멍 두 개를 오렸어요. 

    - 홑이불 따위야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유령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봐야 해. 안 그러면 여기저기 부딪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그러고는 홑이불을 머리부터 푹 덮어쓰고 나니, 작고 통통한 두 손만 보이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그게 홑이불을 덮어쓴 카를손인지 알면서도 좀 놀랐어요. 예파가 미친 듯이 짖어댔습니다. 카를손이 작은 모터를 켜고 샹들리에 주변을 날기 시작하자 (홑이불이 펄럭이면서) 훨씬 더 무섭게 보였습니다. 그건 정말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어요. 


카를손이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 흉내를 내니 아이들이 놀라다.


    - 난 모터가 달린 작은 유령이다! - 카를손이 외쳤습니다. - 좀 거칠기는 해도 호감 가는 유령이야!

    아이들이 날아다니는 유령을 아무 말 없이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예파는 연신 짖어대다가 그만 지치고 말았어요. 

    카를손이 말을 이었습니다. 

    - 대체로 난 비행 중에 윙윙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아주 좋아하지만, 지금은 유령이니까 소음기를 켜겠다. 바로 이렇게!

    그러고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몇 바퀴를 돌았는데, 그러니까 진짜 유령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제 놀래줄 사람을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


    - 출입문으로 갈까? 누군가가 건물로 들어서다가 혼비백산하겠지!

    바로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나가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 올 사람은 없는데, 뭐!

    그러는 사이에 카를손이 숨을 헐떡이면서 여러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간단히 설명까지 했습니다.

    - 으스스한 숨소리와 신음소리를 낼 줄 모르는 유령은 가치가 없다. 이건 유령 학교에서 어린 유령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준비하느라고 시간이 적잖이 흘렀습니다. 


    유령을 앞세우고 아이들 셋이 현관문 앞에서 행인들을 놀래려고 계단참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발걸음 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렸어요. 꼬맹이가 처음엔 엄마와 아빠가 산책 나갔다가 돌아오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관문에 달린 우편함 틈새로 누군가가 철사를 쑤셔 넣는 게 아니겠어요? 꼬맹이는 그게 도둑들 짓임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며칠 전 아빠가 엄마한테 신문을 읽어준 것이 떠올랐거든요. 시내에 아파트 도둑들이 아주 많이 나타났다는 기사였어요. 도둑들은 먼저 초인종을 누르고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귀중품을 훔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자 꼬맹이가 상당히 놀랐습니다. 크리스터와 구닐라도 꼬맹이만큼이나 놀랐어요. 크리스터는 예파를 꼬맹이 방에 두고 온 것을 무척 아쉽게 여겼어요. 예파가 짖어서 유령 놀이를 망칠까 봐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카를손 하나만이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이런 경우에 유령이 정말 쓸모가 있다. 조용히 식당으로 가자꾸나. 네 아빠는 금붙이와 보석들을 거기에 보관할 테니 말이야. 


    카를손과 꼬맹이, 크리스터, 구닐라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식당으로 들어가서 각자 가구 뒤에 숨었습니다. 카를손은 오랜 된 예쁜 찬장으로 기어든 뒤 (엄마는 거기에 식탁보와 냅킨을 두었지요) 어찌어찌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도둑들이 식당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오는 바람에 찬장 문을 꼭 닫지는 못했습니다. 꼬맹이가 벽난로 곁에 놓인 소파 밑으로 들어가서 조심스레 코를 내밀고 내다봤습니다. 식당 한가운데 아주 추잡하게 생긴 사람 둘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아, 이게 누군가요, 바로 필레와 룰레 아닌가요! 


꼬맹이와 동무들이 소파 밑으로 숨다.


    - 돈을 어디 두는지 알아야 돼. - 필레가 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거야 빤하지, 여기야. - 룰레가 서랍이 많이 달린, 오래 된 장식장을 가리키면서 대꾸했습니다. 

    꼬맹이는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그 서랍들 중 하나에 생활비를 넣어두고 다른 서랍에는 할머니가 선사한, 예쁘고 값비싼 반지와 브로치들 또 아빠가 사격대회에서 받은 금메달들을 보관했거든요. 

    ‘그 물건들을 훔쳐 가면 안 되는데.‘ 꼬맹이가 생각했어요.

    - 넌 여기서 찾아봐라. - 필레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 난 주방으로 가서 은제 스푼과 포크들이 있는지 보겠어.

    필레가 사라지고 룰레가 장식장 서랍들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돈을 발견한 모양이야.’ 꼬맹이가 생각했습니다. 

    룰레가 다른 서랍을 빼들고는 또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반지와 브로치들을 본 겁니다. 


    그러나 휘파람 소리가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 순간 찬장 문이 활짝 열리고 소름 끼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유령이 튀어나왔으니까요. 룰레가 고개를 돌려 유령을 보자마자 기겁하여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돈이며 반지, 브로치 등속을 죄다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유령으로 변장한 카를손이 도둑 둘을 놀래 쫓아내다.


    유령이 도둑 주변을 뱅뱅 돌면서 신음소리도 내고 탄식하는 소리도 내더니, 갑자기 주방으로 쏜살같이 날았습니다.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필레가 뛰쳐나왔어요.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 울레, 류령이 있어, 저기! - 필레가 울부짖었어요. 

    사실은 “룰레, 유령이 있어, 저기!” 하고 말하려 했지만, 공포에 질려서 혀가 꼬이다 보니 철자가 바뀌어 나온 겁니다.

    그래요, 놀랄 만도 했지요! 유령이 바짝 뒤쫓아 날아오면서 무시무시한 신음소리와 한숨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야말로 숨이 멈출 정도였으니까요. 

    룰레와 필레가 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유령이 도둑들 주변을 감돌며 따라붙었습니다. 둘은 어찌나 무서웠든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현관을 거쳐 계단참으로 도망쳤습니다. 유령이 그 뒤를 바짝 쫓아 계단 아래로 내몰면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몇 번 외쳤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이제 내 손에 붙잡히면 너희는 더 재미날 거다!

    그러나 잠시 뒤 유령도 힘이 빠져서 식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꼬맹이가 마룻바닥에 흩어진 돈과 반지, 브로치 등속을 주워서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았습니다. 구닐라와 크리스터는 필레가 주방과 식당 사이에서 쩔쩔매다가 떨어뜨린 포크와 스푼을 다 주워 모았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다. - 유령이 외치면서 홑이불을 벗었습니다. 

    아이들이 웃었어요. 행복했지요. 그리고 카를손이 한마디 더 했어요.

    - 도둑을 겁줘야 할 때는 유령이 최고다. 그런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작고 고약한 유령을 시내에 있는 현금 출납구마다 당장 배치할 거야.

    꼬맹이는 위기를 잘 넘긴 것이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보탰어요. 

    - 사람들이 참 어리석어, 유령을 믿다니 말이야. 웃기는 거지! 아빠 말로는, 초자연적이란 것은 있지도 않대. - 그러면서 그 말을 확인하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저 도둑들은 정말 멍청해. 찬장에서 유령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다니! 사실, 그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었는데, 하하하. 초자연적인 것이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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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계속) 

    둘이 숨을 좀 돌리고 난 뒤 카를손이 물었습니다. 

    - 좀도둑들을 보고 싶냐? 여기 우리 건물 다락방에 일급 좀도둑 두 명이 살고 있다.

    카를손은 그 좀도둑들이 자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어요. 꼬맹이가 그 말을 썩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카를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락방 창문에서 말소리와 웃음소리, 고함 따위가 요란하게 뒤엉켜 새나왔습니다.

    - 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군! - 카를손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저들이 뭣 때문에 저렇게 즐거운 건지 가서 알아보자. 

    카를손과 꼬맹이가 다시 처마를 따라 기었습니다. 다락방까지 이르자 카를손이 고개를 빼들고 창을 들여다봤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지만 그 틈새로 방안이 훤히 보였습니다. 


    - 좀도둑들한테 손님이 왔군.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꼬맹이도 커튼 틈새로 들여다봤습니다. 방안에는 정말 좀도둑처럼 보이는 사람 둘과 순진하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청년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청년 같은 사람들을 꼬맹이는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낼 때 많이 봤지요. 

    -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냐?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저 좀도둑들이 뭔가 못된 짓을 꾸미려는 것 같아. 하지만 우리가 가만 내버려두지는 않지… - 그러고는 다시 커튼 틈을 들여다봤습니다. - 난 너하고 내기할 준비가 돼 있다. 저들은 저 빨간 넥타이를 맨 가엾은 청년을 알겨먹을 게 틀림없어!


    좀도둑 둘과 넥타이 맨 청년은 창가에 놓인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먹고 마시는 참이었습니다.

    좀도둑들은 자기네 손님 어깨를 간간이 툭툭 건드리면서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 자네를 만나니 우린 참 좋네, 다정한 오스카!

    - 나도 당신들과 알게 돼서 아주 기뻐요. - 오스카가 대답했습니다. - 도시에 처음 올라오게 되면 선량한 친구들이 정말 필요해요. 미덥고 확실한 친구들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협잡꾼 따위나 만나게 되면 한순간에 다 털리고 말 거예요.

    그 말에 좀도둑들이 그럴싸하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 암, 그렇고말고. 협잡꾼들 제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야. 젊은이, 자네가 필레와 나를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구.

    - 자네가 룰레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곤란하게 됐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지. 자, 한 잔 더 마시게.

    필레라고 불린 자가 한마디 거들고는 오스카 어깨를 또 툭 쳤어요.


    그러면서 필레는 꼬맹이가 아주 놀랄 만한 짓을 했습니다. 즉, 오스카의 바지 뒷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서 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지 뭔가요. 오스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룰레가 그를 끌어안았으니까요. 룰레가 포옹을 풀었을 때 그의 손아귀에는 오스카의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어요. 룰레도 그걸 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어요. 오스카는 그것도 역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통통한 손을 커튼 밑으로 조심스레 뻗어 필레의 주머니에서 오스카의 지갑을 꺼냈어요. 필레도 그건 전혀 몰랐어요. 카를손이 다시 커튼 밑으로 통통한 손을 뻗더니 룰레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빼냈지요. 룰레도 역시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룰레와 필레, 오스카가 다시 술잔을 비우고 안주를 집어먹을 때, 필레가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고는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습니다. 그러자 룰레를 사납게 쏘아보면서 말했습니다. 

    - 이봐, 룰레, 잠깐 현관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뭔가 해명해야겠어. 

    그때 룰레도 자기 주머니를 뒤지고는 시계가 없어진 걸 알았어요. 그리고 역시 사납게 필레를 쳐다보고는 쏘아붙였습니다. 

    - 그래, 나가자! 나도 너하고 얘기 좀 해야겠어.


    필레와 룰레가 현관으로 나가자 가엾은 오스카만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혼자 있는 게 심심해서 새 친구들이 무얼 하는지 보러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카를손이 창턱을 가볍게 뛰어넘어서 지갑을 수프 대접 위에 놓았습니다. 필레와 룰레, 오스카가 이미 수프를 박박 긁어 먹은 뒤였기에 지갑은 젖지 않았어요. 그리고 회중시계는 벽 램프에 걸어 놓았습니다

    걸린 시계가 가볍게 흔들리는 바람에 필레와 룰레, 오스카가 방으로 들어서면서 금방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카를손은 못 봤어요. 그들이 들어서기 직전에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식탁보 밑으로 기어들어갔거든요. 식탁 밑으로는 꼬맹이도 기어들었습니다. 무섭긴 하지만 카를손을 그런 위험한 상태에 혼자 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꼬맹이와 카를손이 좀도둑들 탁자 밑에 숨다


    - 어, 저것 좀 봐. 내 시계가 램프 위에 걸려 있네! - 오스카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 어떻게 저기 있게 됐지? - 그러면서 램프로 다가가 시계를 집어서 저고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 근데 내 지갑은 또 여기 있어! - 수프 접시를 보고는 오스카가 더욱 놀랐어요. - 거 참, 이상한 일이군!

    룰레와 필레가 꼼짝도 않고 오스카를 쳐다보다가,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 자네네 시골 젊은이들도 빈틈이 없는 것 같네!

    그러고 나서 오스카와 룰레, 필레가 다시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 이보게, 오스카. - 필레가 말했어요. - 자, 실컷 마시게, 더, 더!

    그리고 셋은 다시 먹고 마시며 서로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이 지나 필레가 식탁보를 살짝 들추고 오스카의 지갑을 식탁 밑으로 던졌어요. 아마도 필레는 자기 주머니보다 식탁 밑이 지갑을 두기에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지갑을 들어서 룰레 손에 쥐어준 겁니다. 그러자 룰레가 입을 놀렸습니다. 

    - 필레, 내가 자네를 잘못 생각했어. 자넨 아주 좋은 사람이네.

    또 얼마 지나서 룰레가 식탁보 밑으로 손을 내리더니 시계를 바닥에 던졌습니다. 카를손이 그걸 집어 들고 필레의 발을 툭 건드리더니 그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필레가 입을 놀렸어요.

    - 룰레, 자네보다 더 믿음직한 동료는 세상에 다시없어!

    그러나 이때 오스카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내 지갑이 어디 갔지? 또 시계는 어디 갔어?!

    그 순간 지갑과 시계가 다시 식탁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필레도 룰레도 현행범으로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한데 오스카는 이미 정신이 나가서 자기 물건들을 내놓으라고 계속 으르렁댔습니다. 

    그러자 필레가 소리쳤습니다. 

    - 그따위 냄새 나는 지갑을 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룰레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어요. 

    - 우린 자네의 낡아빠진 회중시계를 보지도 못했어! 자기 물건은 자기가 잘 간수해야지.


    이때 카를손이 마루에서 지갑과 시계를 집어 들어 오스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오스카가 자기 물건들을 움켜쥐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고마워, 다정한 필레, 고마워, 다정한 룰레. 그러나 다음에는 나한테 이런 장난을 치지 마!

    이때 카를손이 있는 힘을 다해서 필레의 발을 걷어찼습니다.

    - 룰레, 너도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 필레가 고함을 질렀어요.

    그러는 사이에 카를손이 룰레의 발을 때렸는데, 어찌나 아픈지 금방 죽는 소리가 터졌습니다. 

    - 너, 미쳤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룰레가 비명을 질렀어요.

    룰레와 필레가 식탁에서 펄떡 일어나 주먹다짐을 벌이는데, 어찌나 사납게 싸우는지 접시들이 다 바닥에 떨어져 깨졌습니다. 그 바람에 오스카가 질겁하여 지갑과 시계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자기 집으로 사라졌습니다. 


    오스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꼬맹이 역시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아주 놀랐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식탁 밑에서 그냥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필레가 룰레보다 힘이 더 셌어요. 룰레의 멱살을 잡아 현관까지 몰아붙이면서 제 딴에는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때 카를손과 꼬맹이가 재빨리 식탁 밑에서 나왔어요. 카를손이 마루에 흩어진 접시 조각들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 접시들이 다 깨지고 수프 대접만 멀쩡하네. 이 가엾은 수프 대접은 얼마나 외로울까!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 해서 수프 대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 그리고 둘은 창문으로 달려가서 잽싸게 지붕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곧이어 필레와 룰레가 방으로 돌아왔는데, 필레가 묻는 말이 꼬맹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 이런 멍청한 자식, 지갑과 시계를 도대체 왜 돌려준 거야?

    - 너, 정신 나갔냐? 네놈이 그런 거잖아!

    룰레가 맞서면서 서로 주고받는 욕설을 들으며 카를손이 배가 출렁일 정도로 깔깔댔습니다.

    - 오늘 재미는 이걸로 충분하다!

    꼬맹이도 오늘 장난으로 목구멍까지 배가 불렀습니다


    둘이 손을 잡고 꼬맹이 집 지붕 위에 있는 굴뚝 뒤 작은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캄캄해졌습니다. 둘이 거의 다 왔을 때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울리면서 소방차가 거리를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어디서 불이 난 게 분명해. -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소방차가 지나갔잖아, 들었지?

    - 네 집일 수도 있다. - 은근히 그렇기를 바란다는 투로 카를손이 대꾸했습니다. - 네가 나한테 말만 하면, 내가 소방관들을 기꺼이 도울 거야. 왜냐면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소방관이니까.

    소방차가 건물 현관 앞에서 멈추는 것을 둘이 지붕에서 내려다봤습니다. 소방차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어요. 그러나 불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방차에서 지붕까지 아주 기다란 사다리가 재빨리 놓였습니다.


   - 나 때문에 그런 건가?

    꼬맹이가 자기 방에 남겨둔 쪽지를 떠올리고 불안하게 물었습니다. 정말이지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 왜 저렇게들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꼬맹이, 네가 잠시 지붕 위에서 돌아다닌다고 해서 마음 졸일 사람이 과연 있을까? - 카를손이 가볍게 짜증을 냈습니다. 

    - 그래, 엄마가. 엄마는 신경이 예민해서…

    꼬맹이가 문득 엄마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 소방관들하고 좀 장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카를손이 뭔가 일을 또 꾸미려 들었지만, 꼬맹이는 더 이상 기분을 전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다리에 올라탄 소방관이 지붕에 올라올 때까지 잠자코 서서 기다렸습니다. 

    - 그래, 나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 것 같다. - 카를손이 말했어요. - 물론 우리는 아주 차분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모범적으로 처신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한테 고열이, 30도에서 40도 되는 열이 있었던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작은집을 가리킨 뒤 “잘 가, 꼬맹이!” 하고 외쳤습니다.  

    - 잘 있어, 카를손!

    꼬맹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방관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습니다. 

    - 어이, 꼬맹이. - 카를손이 굴뚝 뒤로 모습을 감추기 전에 소리쳤습니다. - 내가 여기 산다고 소방관한테 말하지 마라!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소방관이잖아. 어디선가 화재가 날 때 그들이 날 부르러 올까봐 겁난다.


    소방관이 벌써 지붕 가까이 올라왔습니다. 

    -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라! 내 말 들었니.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이제 올라가서 널 구해줄게.

    꼬맹이는 소방관 아저씨의 경고가 친절하기는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녁 내내 지붕 위에서 돌아다녔는데, 뭐. 지금도 사다리 쪽으로 몇 발짝을 뗄 수 있어.

    - 아저씨를 우리 엄마가 보냈어요? - 소방관이 손을 잡고 내려갈 때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그래, 물론 네 엄마가 보내셨지. 한데… 내 보기엔 지붕 위에 사내애가 둘이 있는 것 같았는데…

    꼬맹이가 카를손의 부탁을 떠올리고 천연스레 말했습니다.

    - 아니요. 여기에 다른 사내애는 없었어요.


    엄마에겐 정말로 ‘신경증세’가 발동했습니다.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 또 많은 낯선 사람들이 거리에서 꼬맹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달려와서 꼬맹이를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빠가 꼬맹이 손을 꼭 쥐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 보쎄 형이 말했습니다. 

    베탄 누나도 눈물을 흘리면서 당부했어요. 

    - 앞으로 다신 그런 짓 하지 마. 기억해, 꼬맹이, 절대 하지 마라!

    꼬맹이를 바로 침대에 누이고 식구들이 다 주변에 모였어요. 마치 꼬맹이 생일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아빠가 하시는 말씀은 아주 심각했습니다.

    - 우리가 걱정할지 정말 몰랐단 말이니? 엄마가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쏟을지 몰랐단 말이야?

    꼬맹이가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면서 웅얼거렸어요. 

    -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있어?

    엄마가 꼬맹이를 꼭 끌어안고 말했어요. 

    - 생각 좀 해 보렴! 그러다가 지붕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너를 잃게 되면 어떡하니?

    - 그러면 식구들이 슬퍼하기나 할 거야?

    -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니? 세상 그 어떤 보물을 준다 해도 우리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단다. 너도 알고 있잖니. - 엄마가 대답했어요.

    - 백만 원을 준다고 해도?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너를 잃을 수는 없지!

    -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값 비싸단 말이야? - 꼬맹이가 놀랐습니다. 

    - 물론이란다. - 엄마가 대답하고 다시 끌어안았습니다! 


    꼬맹이가 곰곰이 생각했어요. 

    음, 억만금이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야! 내가 과연 그렇게 비쌀 수 있을까? 강아지를, 진짜 귀여운 강아지를 20만 원만 주면 살 수 있는데…

    - 내 말 좀 들어봐요, 아빠. - 꼬맹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 내가 정말 억만금 값이 나간다면, 지금 현금으로 20만 원을 받을 수는 없을까? 귀여운 강아지를 사려고 그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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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카를손의 장난


    - 아, 이제 난 기분 좀 전환하고 싶다. - 잠시 뒤에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지붕을 뛰어다니면서 뭘 할지 생각하자꾸나.

    꼬맹이가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둘은 손을 잡고 지붕으로 나왔어요.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주변은 온통 아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늘은 봄에나 볼 수 있는 것처럼 파랗고, 어둠 속에 잠긴 집들은 늘 그렇듯이 뭔가 신비하게 보인 겁니다. 저 아래 꼬맹이가 자주 놀던 공원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고, 마당에서 크는 키 큰 버드나무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놀랍도록 자극적인 냄새를 풍겼어요.


꼬맹이와 카를손이 손을 잡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다.


    그날 저녁은 지붕 위에서 산책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주변에 열린 창문들에서는 별의별 냄새와 소리가 다 흘러나왔어요. 어떤 사람들의 나직한 대화, 아이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누군가가 주방에서 딸그락거리며 접시 닦는 소리, 개들이 짖는 소리, 피아노 소리…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쏜살같이 지나갔고, 말발굽 소리와 마차 덜컹거리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꼬맹이가 기분이 좋아져서 한마디 했어요.

    - 만약 지붕으로 다니는 게 얼마나 상쾌한지 알았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다니는 걸 진작 그만뒀을 거야. 여긴 정말 좋아!

    카를손이 꼬맹이 손을 잡으면서 말을 받았습니다. 

    - 그래, 그러면서도 또 아주 위험하다. 떨어지기가 쉬우니까 말이야.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무서운 곳을 몇 군데 보여주지.


    집들이 서로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지붕에서 지붕으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었습니다. 툭 튀어나온 다락방이며 굴뚝, 모서리 때문에 지붕들이 저마다 아주 기묘한 모양을 띠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산책한다는 건 숨이 멎을 정도로 위험했어요. 집들 사이 어떤 데는 널따란 틈이 있어서 하마터면 꼬맹이가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꼬맹이 발이 처마에서 미끄러지려는 순간 카를손이 손을 잡아주었지요.

    - 재미있냐? - 카를손이 꼬맹이를 지붕으로 끌어올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어요. - 내가 말한 데가 바로 이런 곳이야. 어때, 더 가 볼래?

    그러나 꼬맹이는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심장이 너무 세게 두근거리지 뭡니까. 둘은 가파르고 미끄러운 곳들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주변 물체를 붙잡고 발을 질질 끌어야 했어요. 근데 카를손은 꼬맹이를 재미나게 하려고 일부러 더 힘든 길을 골랐습니다.


지붕에서 떨어질 뻔한 꼬맹이를 카를손이 붙잡아 올리다.


    - 우리가 좀 명랑해질 시간이 된 것 같다.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난 저녁마다 자주 지붕 위로 산책 다니면서 이 다락방에 사는 사람들을 잘 골려주거든. 

    - 어떻게 골리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여러 사람을 여러 방법으로 골리는 거다. 난 똑같은 장난을 두 번 하는 법이 없어. 생각해 봐라,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난꾼이 누구겠니?


    갑자기 어디선가 갓난애가 빽빽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 전에도 아기 우는 소리를 꼬맹이가 듣긴 했지만 그 소리는 곧 잦아들었었지요. 갓난애를 누군가가 잠시 얼렀던 모양인데, 이제 다시 울음을 터뜨린 겁니다. 울음소리는 아주 가까운 다락방에서 들려왔고, 왠지 외롭고 측은하게 들렸어요. 


    - 가엾은 아기! - 꼬맹이가 말했어요. - 배가 고파서 그런지도 몰라.

    - 이제 우리가 알아보면 된다. - 카를손이 대꾸했어요. 

    둘은 지붕 가장자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서 다락방 창문까지 이르렀습니다. 카를손이 고개를 살짝 빼들고 방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봤습니다.

    - 완전히 버림받은 아기야. 엄마와 아빠가 저들끼리 바깥에서 나돌아 다니는 게 분명해. - 꼬맹이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아기는 울다가 지쳤어요.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창턱 위로 올라서서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나가신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다락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기


    꼬맹이는 지붕 위에 혼자 남아 있는 게 싫어서 카를손 뒤를 따라 창문을 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만일 아기 부모가 나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겁이 났습니다. 

    한데 카를손은 아주 느긋했어요. 아기가 누워 있는 작은 침대로 다가가더니 통통한 집게손가락으로 아기 턱을 간질였습니다.  

 

카를손이 아기 턱을 간질이며 어르다.

  - 까꿍, 까꿍, 까꿍! -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꼬맹이한테 몸을 돌려 설명했습니다. - 젖먹이들이 울 때는 다들 늘 이렇게 어른다.

    아기가 놀라서 한순간 울음을 그쳤다가 금방 더 크게 울부짖었어요.

    - 까꿍, 까꿍, 까꿍! - 카를손이 한 번 달래고는 덧붙였어요. - 또 이런 식으로도 다들 갓난애를 달래지…

    그러고는 아기를 안고 몇 번 옆으로 힘차게 흔들었습니다. 

    아기는 그게 좋은 모양이에요. 왜냐면 이가 하나도 없는 입을 벌리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으니까요. 카를손이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 갓난애를 달래는 건 참 쉽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는 바로…

    그러나 아기가 다시 우는 바람에 말을 채 맺지 못했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 - 카를손이 초조하게 어르면서 여자 아기를 더 세게 흔들기 시작했어요. -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니? 까꿍, 까꿍, 까꿍!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나 아기는 계속 목이 터져라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가 아기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 나한테 넘겨 봐. 

    꼬맹이는 갓난애들을 아주 좋아해서 엄마와 아빠한테 여자 동생을 선사해 달라고 몇 번이나 조른 적이 있답니다. 강아지를 사 주지 않겠다면 말이지요.

    꼬맹이가 우는 아기를 받아 포근하게 끌어안았습니다. 

    - 울지 마, 아가야! 넌 착한 사람이잖아…

    아기가 울음을 그치고 눈빛을 반짝이며 꼬맹이를 한참이나 쳐다봤어요. 그러더니 다시 미소를 짓고는 뭔가 나직이 옹알거렸어요.

    - 허어, 나의 “까꿍, 까꿍, 까꿍”이 먹혀든 거다. - 카를손이 우쭐댔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은 늘 어김없이 효과를 보거든. 천 번이나 확인해 봤지.

    - 그거 흥미로운 걸. 한데 아기 이름이 뭐지? 


    꼬맹이가 물어보면서 집게손가락 끝으로 아기의 작은 볼을 가볍게 토닥였습니다. 카를손이 잠깐 멈칫하더니 금방 대답했습니다. 

    - 귤피야. 여자 아기들 이름은 대개 그렇다. 

    꼬맹이는 여자애 이름이 귤피야라는 걸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 귤피야 아기야, 뭐가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 자기 집게손가락을 아기가 빨려고 하는 걸 보면서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귤피야가 배고프다면, 여기 소시지와 감자가 있다. - 카를손이 찬장을 들여다보고서 말했어요. - 카를손한테 소시지와 감자가 떨어지지 않는 한, 세상 그 어떤 아기도 굶어 죽는 일은 없다. 

    그러나 꼬맹이는 귤피야가 소시지와 감자를 먹을까 의심스러웠어요. 

 

꼬맹이가 아기를 안고 어르다.

  - 이렇게 어린 아기들은 우유를 먹일 걸. - 꼬맹이가 반대하여 주장했습니다.

    - 그러니까, 넌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아기들에게 뭘 먹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냐? - 카를손이 발끈했어요. - 하지만 네가 정 우긴다면, 내가 젖소를 구하러 날아갔다 올 수도 있어…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길로 창문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더 했습니다. 

    - 이렇게 작은 창문으로는 젖소를 끌어들이기 어렵겠는데.

    귤피야가 꼬맹이 손가락을 꼭 잡고는 애처롭게 흐느꼈어요. 아기는 정말 배가 고픈 모양입니다. 

    꼬맹이가 찬장을 뒤졌지만 우유는 찾지 못했어요. 소시지 세 조각이 담긴 접시만 나왔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어디서 우유를 구할 수 있는지 떠올랐다… 어디론가 좀 날아갔다 와야겠어… 금방 돌아올게!


    카를손이 배에 달린 단추를 누르더니 꼬맹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쏜살같이 창밖으로 날아갔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놀랐어요. 만약에 카를손이 여느 때처럼 몇 시간 동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기 부모가 돌아와서 꼬맹이 품에 있는 귤피야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번에는 카를손이 오래 기다리도록 하지 않았거든요. 수탉처럼 우쭐거리면서 창문으로 날아들었는데, 흔히 아기들에게 물리는 작은 젖병을 가져온 겁니다. 

    - 이걸 어디서 났지?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내가 늘 우유를 얻는 곳에서.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 그렇다면, 이걸 그냥 집어온 거야? - 꼬맹이가 소리쳤어요.

    - 그걸… 잠깐 빌린 거지.

    - 빌렸다고? 언제 돌려줄 건데?

    -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지!

    그 말에 꼬맹이가 카를손을 사나운 눈길로 쏘아봤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은 그저 손만 홰홰 내둘렀어요.

    -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야… 그래봤자 허접한 우윳병 하난데 뭐. 거기엔 세쌍둥이를 낳은 가족이 있고, 그 집 발코니 양동이에는 이런 우윳병들이 얼음에 가득 채워져 있단 말이다. 내가 귤피야를 위해 우유를 조금 가져갔다는 걸 알면 그 사람들이 되레 기뻐할 거야.


    귤피야가 앙증맞은 손을 병으로 뻗치고 허둥지둥 빠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 우유를 얼른 데울게. - 꼬맹이가 아기를 카를손에게 넘겼습니다. 

    카를손이 다시 “까꿍, 까꿍, 까꿍” 하면서 아기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꼬맹이가 가스레인지를 켜고 병을 데우기 시작했어요. 


    몇 분 지나서 아기는 요람에 누워 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배가 차서 흡족했으니까요. 꼬맹이가 아기 주변에서 괜스레 부산을 떨었습니다. 

    카를손이 요람을 열심히 흔들면서 큰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그러나 그렇게 소란을 피워도 아기는 잠을 깨지 않았어요. 많이 먹고 피곤했으니까요. 

    - 이제 여기서 나가기 전에 장난을 좀 치자. - 카를손이 한쪽 눈을 찡긋했습니다.

    그러고는 찬장으로 다가가서 썰어놓은 소시지가 담긴 접시를 꺼냈습니다. 꼬맹이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카를손이 접시에서 한 조각을 집었어요. 


    - 무슨 장난인지 곧 알게 될 거다. - 그러면서 소시지 한 조각을 문손잡이에 걸어 놓았습니다. - 이건 1번이야. - 그렇게 말하면서 흡족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카를손이 도자기 비둘기 부리에 소시지 조각을 꽂다.

    그 다음에는 서랍장으로 뛰어갔어요. 그 위에는 예쁜 흰 도자기 비둘기가 놓여 있는데, 꼬맹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부리에 소시지 조각이 꽂혔습니다. 

    - 2번이야. - 카를손이 입을 놀렸어요. - 그리고 3번은 귤피야가 받을 거다.

    접시에서 마지막 소시지 조각을 집더니 자고 있는 아기 손에 쥐어 준 겁니다. 그건 사실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어요. 아기가 일어나서 치즈 조각을 집어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재미는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꼬맹이가 말렸습니다. 

    - 그건 하지 마, 제발.

    그러나 카를손은 꼬맹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우리는 아기를 놔두고 부모가 저녁마다 외출하는 버릇을 고치는 거야. 

    - 어떻게?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벌써 걸음마를 떼고 소시지를 집는 아기를 그 사람들이 앞으로 혼자 놔둘 생각을 하겠냐? 다음에는 아기가 무엇을 집을지 누가 알겠어? 아빠가 교회 갈 때 매는 넥타이가 될 수도 있지.

    그러면서 카를손은 소시지 조각이 아기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살펴봤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내가 뭘 하는지 난 알고 있다.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 아니냐.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꼬맹이가 놀라서 몸을 움츠리며 속삭였어요.

    - 부모가 온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꼬맹이를 창문 쪽으로 끌었습니다. 


    자물쇠 구멍에 벌써 열쇠가 꽂혔어요. 꼬맹이는 이제 다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둘은 어찌어찌 지붕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어요. 바로 그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고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우리 사랑스러운 수잔나가 혼자 잠이 들었네! - 여자가 말했어요. 

    - 그래, 우리 공주님이 자고 있군. - 남편이 맞장구를 쳤어요. 

    그러나 갑자기 비명이 쌍으로 터졌습니다. 아기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소시지 조각을 본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저지른 장난을 두고 아기 부모가 뭐라고 하는지 더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모는 부모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벌써 굴뚝 뒤로 숨어 버렸습니다. 


    (둘이 숨을 좀 돌리고 난 뒤 카를손이 물었습니다. 

    - 좀도둑들을 보고 싶냐? 여기 우리 건물 다락방에 일급 좀도둑 두 명이 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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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7. 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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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손의 작은집은 아주 아늑했습니다. 그걸 꼬맹이는 금방 알아차렸어요. 나무 장의자 외에 방안에는 식탁으로 사용하는 작업대와 옷장, 의자 두 개, 철창과 삼발이 달린 난로가 보였습니다. 그 난로에서 카를손은 음식을 준비하곤 했어요. 그러나 정작 기관차들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꼬맹이가 한참이나 방안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 근데, 기관차들은 어디 있어?

    - 음… - 카를손이 입속말로 웅얼거렸습니다. - 내 기관차들은… 전부 갑자기 폭발해 버렸다. 안전판에 문제가 있었어.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건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다. 슬퍼할 거 없어.

    꼬맹이가 다시 사방을 휘둘러보았습니다. 

    - 그러면 수탉 그림들은 어디 있어? 그것들도 폭발했나? - 꼬맹이가 가볍게 이죽거렸습니다

    - 아니, 그림들은 폭발하지 않았다. 저기를 봐라. - 그러면서 옷장 옆으로 벽에 걸어둔 두꺼운 마분지를 가리켰어요. 

    아주 깨끗하고 커다란 종이 아래 귀퉁이에 아주 작고 예쁜 수탉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 그림 제목은 <아주 외로운 수탉>이야. - 카를손이 설명했어요.


    꼬맹이가 그 앙증맞은 수탉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사실 카를손은 별의별 수탉들을 그린 그림이 천여 점이나 있다고 떠벌였는데, 알고 보니 그건 수탉처럼 생긴 불그레한 딱정벌레였던 겁니다!

    - 이 <아주 외로운 수탉>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화가가 그린 거야. - 카를손이 계속 입을 놀리긴 하는데, 목소리가 좀 얼어붙었습니다. - 아아, 이 그림은 얼마나 매혹적이고 슬프단 말이냐!.. 하지만 아니, 아니야, 난 지금 울지 않을 거야, 눈물을 흘리면 체온이 올라가니까… - 카를손이 베개로 파고들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어요. - 넌 내 친엄마가 되겠다고 했지? 그렇게 해라.

    그러면서 연신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카를손이 열이 난다는 이유로 장의자에 벌러덩 눕다.


    꼬맹이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자신 없는 투로 물었어요. 

    - 여기, 약 같은 것이 있나?

    - 응. 하지만 약은 먹고 싶지 않고… 백 원짜리 동전, 가지고 있니?

    꼬맹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습니다. 

    - 이리 줘 봐.

    꼬맹이가 동전을 내밀자 카를손이 재빨리 낚아채더니 손아귀에 꽉 움켜쥐었어요. 자기 꾀가 통해서 흡족한 표정이었습니다. 


    - 지금 무슨 약을 먹을 건지 너한테 말할까?

    - 무슨 약인데? - 꼬맹이가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처방한 <달달한 가루약>이다. 초콜릿 약간, 사탕 약간에다 과자도 같은 분량으로 넣고 바짝 찧은 뒤 잘 섞어라. 네가 약을 다 준비하면 내가 먹을게. 그건 열 내리는 데 효과가 아주 좋다.

    - 설마. - 꼬맹이가 미심쩍게 여겼습니다. 

    - 그렇다면 내기를 하자. 내 말이 맞는다는 데 난 초콜릿을 걸겠어. 

    꼬맹이가 잠시 생각했습니다. 다툼거리를 주먹질이 아니라 말로써 해결하는 게 좋다고 엄마가 말한 것이 어쩌면 바로 지금 같은 경우에 필요하지 않나 싶었어요

    - 자, 이제 내기를 하잔 말이다! 

    카를손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꼬맹이도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 그래, 좋아. 


    무엇을 두고 내기를 하는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 꼬맹이가 초콜릿을 한 개 작업대 위에 놓고 카를손이 처방한 대로 약을 만들었습니다. 컵에 알사탕 몇 개와 설탕에 절인 호두를 약간 넣고 초콜릿 몇 조각을 보탠 뒤 그걸 다 잘게 찧어 뒤섞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편도과자 몇 개를 부수어서 역시 컵에 넣었습니다. 꼬맹이는 그런 약을 여태껏 본 적이 없는데, 어찌나 맛나게 보이든지 자기도 슬쩍 병이 나서 이 약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카를손이 벌써 장의자에서 일어나 앉아서 새끼 새처럼 입을 쫙 벌렸습니다. 꼬맹이는 <달달한 가루약>을 한 숟가락이라도 자기 입에 넣으면 양심에 찔릴 것 같았습니다. 


    - 더 많이 떠줘. - 카를손이 요구했어요.

    꼬맹이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카를손의 열이 가라앉기를 말없이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삼십 초가 지나서 카를손이 입을 열었습니다. 

    - 네 말대로 이 약은 열을 내리지 못하는구나. 이제 나에게 초콜릿을 줘라.

    - 너한테?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내가 내기에 이겼잖아!

    - 그래, 네가 이겼지. 그러니까 나는 위로 삼아 초콜릿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이 세상에 공정함이란 건 없어! 한데 너는 흉악하게도 내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초콜릿을 먹으려고 드는구나.


   꼬맹이가 마지못해 초콜릿을 내밀자 카를손은 순식간에 반쪽을 깨물어 씹으면서 말했습니다. 

    - 떨떠름한 표정 지을 것 없다. 요 다음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네가 초콜릿을 먹어라.

    카를손이 턱을 부지런히 놀렸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조각을 삼키더니 베개에 몸을 던지고는 무겁게 탄식하는 것이었어요.

    - 앓는 이들은 다 참으로 불쌍해! 난 얼마나 불행하냐! <달달한 가루약>을 2인분은 먹어야 하나? 그 약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확실히 알지만. 

    - 무슨 소리야? 2인분을 먹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난 믿어. 내기를 해 보자! - 꼬맹이가 제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꼬맹이가 꾀를 좀 부린다고 해도 죄가 될 것은 없었어요. <달달한 가루약>을 2인분이 아니라 3인분을 먹어봤자 카를손의 열이 떨어지리라고 꼬맹이가 믿은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기를 무척 하고 싶었습니다! 초콜릿이 아직 한 개 남아 있고, 카를손이 내기에서 이기면, 당연히 그럴 텐데, 그러면 꼬맹이가 초콜릿을 먹게 되니까요.


    - 그래, 내기해 보자! <달달한 가루약> 2인분을 얼른 나한테 만들어 줘. 열을 내릴 필요가 있을 때는 자잘한 것 하나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 써 보고 결과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꼬맹이가 가루약 2인분을 만들어서 크게 벌린 카를손 입에 부었어요. 

    그리고 둘은 다시 말없이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꼬맹이가 열 떨어지는 약을 카를손에게 먹이다.


    30초가 지나서 카를손이 환한 얼굴로 의자에서 펄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외쳤습니다.

    - 기적이 벌어졌다! 열이 떨어졌어! 네가 또 이겼다. 이제 초콜릿을 나한테 줘라.

    꼬맹이가 한숨을 내쉬고서 마지막 초콜릿을 카를손에게 건넸습니다. 

    카를손이 못마땅한 얼굴로 꼬맹이를 쳐다봤습니다.

    - 너 같은 고집쟁이들은 내기를 하면 안 돼. 나 같은 사람들이라야 내기도 할 수 있는 거다. 

    내기에서 지든 이기든 언제나 카를손 얼굴은 잘 닦아 놓은 금화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침묵이 길어졌습니다. 


    그 동안 카를손이 초콜릿을 다 씹어 먹고 또 입을 놀렸습니다. 

    - 하지만 네가 미식가이고 대식가인 이상, 나머지 것들을 다정하게 나누는 게 가장 좋겠다. 너한테 당과가 아직 남았니?

    꼬맹이가 주머니를 뒤져 보고는 세 개가 남은 것을 알았습니다.  

    설탕에 절인 호두 두 개와 알사탕 한 개를 꺼냈습니다.

    - 세 개는 절반으로 나뉘지 않는다. - 카를손이 진지하게 말했어요. - 이건 코흘리개들도 다 아는 사실이지. - 그러면서 꼬맹이 손에서 알사탕을 잽싸게 낚아채 입에 넣고 우물거렸습니다. 

    - 이제는 반으로 나눌 수 있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남은 호두 두 개를 게걸스레 쳐다봤어요. 한 개가 다른 것보다 더 컸습니다. 


    - 난 아주 다정하고 겸손한 사람이니까 네가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겠어. 그러나 기억해라. 먼저 집는 사람은 늘 더 작은 걸 집어야 하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꼬맹이를 엄한 눈빛으로 쏘아봤습니다. 

    꼬맹이가 잠깐 생각한 뒤 꾀를 냈어요. 

    - 먼저 집을 권리를 너한테 양보할래.

    - 좋아, 정 그렇게 고집한다면! - 카를손이 큰 소리로 말하고는 큰 호두를 집더니 눈 깜빡할 새에 자기 입에 넣었습니다.

    꼬맹이가 자기 손바닥에 하나 남은 작은 호두를 쳐다봤어요.

    - 이게 뭐야? 먼저 집는 사람이 더 작은 걸 집어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 어이, 꼬마 미식가야, 만일 네가 먼저 집었다면 어떤 호두를 집었겠냐?

    - 분명히 더 작은 걸 집었을 거야. - 꼬맹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 그렇다면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을 할 필요가 뭐 있냐? 네 뜻대로 더 작은 게 네 손에 남았는데!


    꼬맹이가 또 잠깐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엄마가 말한 것처럼, 주먹질이 아니라 말로써 다툼을 해결하는 걸 거야.’


    꼬맹이가 오랫동안 뾰로통한 상태로 있지는 못했어요. 게다가 카를손의 열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기뻤어요. 

    카를손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 난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어떤 약이 열 내리는 데 좋은지 알리겠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처방한 대로 만든 <달짝지근한 가루약>을 복용하세요.」 또, 세상에서 제일가는 해열제라고 쓰기도 할 거야.

    꼬맹이가 제 몫의 호두를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그건 여전히 꼬맹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지요. 하도 근사하고 맛있어 보여서 우선 조금만 맛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꺼번에 입에 넣기가 무척 아까웠거든요.

    카를손도 꼬맹이 손에 있는 호두를 쳐다봤습니다. 오랫동안 호두에서 눈을 떼지 않더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어요.


카를손과 꼬맹이가 사탕과 호두를 두고 내기를 하다.


    - 이 호두를 네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내가 집을 수 있는지 내기해 보자.

    - 아니, 내가 쥐고 있는 한 넌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 그럼, 내기를 하잔 말이다. - 카를손이 우겼습니다. 

    - 싫어. 내가 이긴다는 걸 난 알아. 그러면 네가 또 먹겠지.

    그런 내기 방법은 옳지 못하다고 꼬맹이는 굳게 믿었습니다. 사실 보쎄 형이나 베탄 누나와 내기를 할 때면, 이긴 사람이 상을 받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 좋아, 정 그렇다면 내기해도 돼. 하지만 예전의 올바른 방법대로 이긴 사람이 호두를 먹도록 하자.

    - 좋으실 대로 해라, 먹보야. 그러니까, 내가 이 호두를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집을 수 있는지 내기를 하는 거다.

    - 좋아! - 꼬맹이가 동의했습니다.

    - 수리수리 마하수리! - 카를손이 소리치면서 설탕에 절인 호두를 집었어요. 그리고 “수수리 사바하” 하고 외치면서 호두를 자기 입에 쏙 집어넣었습니다.  

    - 스톱! - 꼬맹이가 소리쳤습니다. - 네가 집는 걸 난 다 봤어.

    - 무슨 소리냐! - 카를손이 허겁지겁 호두를 삼켰어요. - 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이겼구나. 내기를 이렇게 잘 하는 꼬마를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그래… 하지만 호두는… - 꼬맹이가 어쩔 줄 몰라 중얼거렸어요. - 그건 이긴 사람이 가져야 하는 거잖아.

    - 맞아. - 카를손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그러나 그건 이미 없어졌어. 그리고 난 그걸 되찾을 수 없다는 걸 두고 내기할 수 있다.


    꼬맹이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말이란 누가 옳고 그른지 가리기에 좋은 수단이 전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를 보면 당장 그런 생각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어라, 이게 웬 일인가요, 미처 몰랐던 호두가 하나 아직 남아 있지 뭔가요. 크고 잘 절여지고 보기 좋은 호두가 말이지요. 

    꼬맹이가 속으로 씩 웃으면서 약 올리는 투로 말했습니다.

    - 나한테 설탕에 절인 호두가 있다는 걸 두고 내기를 하자! 그걸 지금 내가 먹는다는 걸 두고 내기하자! 

    그러고는 호두를 잽싸게 입에 넣었습니다. 


    카를손이 의자에 앉았어요. 시무룩한 모습이었습니다.

    - 넌 내 친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하고서는 단것들을 제 입에 집어넣기만 하는구나. 이런 먹보 꼬마를 난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카를손이 슬픈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앉아 있는데, 더 슬픈 얼굴이 됐습니다.

    - 첫째, 난 목도리 두르는 대가로 백 원짜리 동전을 못 받았다.

    - 그건 그래. 하지만 목도리를 두르지도 않았잖아. - 꼬맹이가 말을 받았습니다.

    - 너한테 목도리가 없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만일 목도리가 있었다면 난 그걸 둘렀을 거고, 목도리가 따가웠을 것이며, 그래서 백 원짜리 동전을 받았을 텐데…

    카를손이 애절한 눈빛으로 꼬맹이를 쳐다봤어요. 그 두 눈에 눈물까지 고였습니다. 

    - 너한테 목도리가 없다는 것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나? 넌 이게 온당하다고 생각하니?

    아니요, 꼬맹이는 그게 옳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 남은 백 원짜리 동전을 카를손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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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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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한번은 꼬맹이가 학교에서 씩씩거리며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마에 혹을 달고 있군요. 엄마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다가, 잠시 뒤 꼬맹이 이마를 보고 예상한 대로 속상한 얼굴을 했습니다.

오늘은 꼬맹이가 씩씩대며 학교에서 돌아왔어요.

    - 가엾은 꼬맹이, 이마가 왜 그렇게 됐니? - 엄마가 물으면서 안아 주었어요.

    - 크리스터가 나한테 돌멩이를 던졌어. - 꼬맹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 돌멩이를? 그런 못된 애가 있나! - 엄마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 왜 엄마한테 곧바로 말하지 않았니?

    꼬맹이가 어깨를 한번 추썩였습니다. 

    - 그래봤자 무슨 소용 있어? 엄마는 돌멩이 던질 줄 모르잖아. 창고 벽도 못 맞히는데.

    - 이런, 얘 좀 봐! 넌 내가 크리스터에게 돌멩이를 던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 아니면, 그 애한테 뭘 던지고 싶은데? 다른 건 찾지 못할 거고, 어떤 경우라도 돌멩이가 가장 만만하잖아.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필요하다면 크리스터만 돌멩이를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했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도 더 나은 게 하나 없는 겁니다. 이렇게 착하고 파란 눈을 가진 작은 사내애가 싸움꾼이라니, 어찌 이럴 수가?

    - 말해 보렴,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는 없는 거니? 무엇이든 사이좋게 뜻을 맞출 수가 있단다. 꼬맹이야, 사실 제대로 상의한다면 합의하지 못할 일은 세상에 없어.

    - 아니, 그런 것들도 있어, 엄마. 예를 들어, 나도 바로 어제 크리스터와 싸웠는데…

    -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니. 너희들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말로써 싸움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을 거야. 

    꼬맹이가 주방 의자에 걸터앉아서 혹이 난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 그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 그렇게 묻고는 찬성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엄마를 응시했습니다. - 크리스터가 “난 너를 두드려 팰 수 있어” 하고 말했단 말이야. 그렇게 말했다니까. 그래서 내가 “아니, 넌 그렇게 못해” 하고 대꾸했거든. 그런데도 우리가 엄마 말대로 주먹이 아니라 말로 싸움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만 우물쭈물하고 말았습니다. 싸움꾼 아들은 아주 시무룩하게 앉아 있고, 엄마는 얼른 아들 앞에 핫 초콜릿 잔과 신선한 빵을 내놓으려고 서둘렀습니다. 


    그런 걸 꼬맹이는 아주 좋아했어요. 이미 계단에 올라설 때 막 구운 빵의 달콤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엄마가 계피를 넣고 만든 빵 때문에 사는 게 훨씬 더 견딜 만했지요. 

    아주 감사하는 마음으로 꼬맹이가 빵을 한 입 깨물었습니다. 

    빵을 먹는 동안 엄마는 아들 이마에 난 혹에 고약을 붙여 주었어요. 아픈 상처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물었습니다. 

 

꼬맹이가 식탁에 앉아 계피빵을 맛나게 먹다.

  - 근데, 오늘 크리스터하고는 무엇 때문에 싸웠니?

    - 아, 그게 말이야, 크리스터하고 구닐라가 내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얘기를 지어냈다고 하잖아. 꾸며낸 얘기라는 거야.

    - 그게, 맞는 말 아니니? -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꼬맹이가 초콜릿 잔에서 눈을 떼고 엄마를 쏘아봤습니다.

    - 흠, 엄마까지 내 말을 못 믿네! 내가 카를손한테 넌 허깨비가 아니냐고 물었는데…

    -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디? - 엄마가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 자기가 허깨비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허깨비일 거라고 하더군.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사람은 허깨비가 아니라는 거야. - 꼬맹이가 빵을 또 집었습니다. - 카를손은 오히려 크리스터와 구닐라를 허깨비라고 여기는 걸. 보기 드물게 멍청한 허깨비라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꼬맹이 상상을 깨려고 드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안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 네가 구닐라나 크리스터와 더 자주 놀고, 카를손 생각은 덜하면 좋을 텐데.

    - 카를손은 나한테 적어도 돌멩이를 던지지는 않아.

    꼬맹이가 웅얼거리면서 이마에 난 혹을 어루만졌어요.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기억하고는 엄마한테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 맞아, 오늘 마침내 카를손의 작은집 보러 간다는 걸 잊을 뻔했네!

    그러나 그렇게 말한 걸 금방 후회했어요.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하다니,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야!’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을 평소 꼬맹이가 카를손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특히 더 위험하고 걱정스러운 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태평하게 대꾸했어요. 

    - 아, 그거 정말 재미있겠구나.

    만약에 꼬맹이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엄마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카를손이 어디 살고 있는지 조금만 더 생각했어도!

    꼬맹이가 배를 채워서 기분이 좋아지고 사는 것에 아주 흡족하여 식탁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마에 난 혹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입에는 맛난 계피 빵을 물고 있고, 주방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격자무늬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아주 다정해 보였습니다.

    엄마한테 다가가서 통통한 손에 입을 맞추고 말했습니다. 

    - 엄마, 많이많이 사랑해요!

    - 그 말을 들으니 아주 기쁘구나.

    - 그래요… 엄마가 아주 다정하기 때문에 사랑해.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가서 카를손을 기다렸습니다. 둘은 오늘 함께 지붕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만약 크리스터가 주장하는 대로 카를손이 허깨비라면, 꼬맹이가 어떻게 거기로 갈 수 있을까요.


    “세 시나 네 시쯤, 아니면 다섯 시쯤, 적어도 여섯 시 전에는 너를 데리러 올게.” - 카를손은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꼬맹이는 카를손이 도대체 언제 오겠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서 재차 물었어요.

    “늦어도 일곱 시를 넘기지는 않겠지만, 여덟 시 전은 아닐 거야… 대충 아홉 시쯤 나를 기다려라, 시계 종이 울린 뒤에.”


    꼬맹이가 거의 저녁 내내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다 보니, 어쩌면 카를손이 실제로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카를손은 그저 꾸며낸 사람일 뿐이라고 믿으려는 순간, 아, 글쎄, 윙윙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면서 명랑하고 활기 찬 카를손이 방안으로 날아들지 뭡니까!

    - 널 기다리느라고 목이 빠졌어. - 꼬맹이가 말했어요. - 몇 시에 온다고 약속했었지?

    - 난 대충 말했던 거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됐잖아. 대충 왔으니까 말이야.

    카를손이 그렇게 대꾸하고는 울긋불긋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어항으로 가더니, 얼굴을 푹 담그고 어항 물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으로 날아든 카를손이 어항에 있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다.


    - 조심해! 내 물고기들! 

    꼬맹이가 소리쳤어요. 카를손이 자칫 물고기를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놀란 겁니다. 

    - 사람에게 열이 있을 때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그러다가 실수로 물고기를 두서너 마리 삼킨다고 해도, 그건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 너한테 열이 있다고?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그렇다니까! 만져 봐라. - 그러면서 꼬맹이 손을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습니다. 

    그러나 꼬맹이 느낌에는 이마가 뜨겁지 않았어요.

    - 네 체온은 얼만데?

    - 30도에서 40도야, 그것보다 더 떨어지지는 않아!


    꼬맹이는 얼마 전에 홍역을 앓았기 때문에 고열이 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심쩍다는 투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어요.

    -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넌 아프지 않아.

    - 오호, 넌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 카를손이 소리치면서 발을 굴렀어요. - 뭐야, 난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날 수도 없단 말이냐?

카를손이 꼬맹이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다.

    - 그렇다면, 아프고 싶다는 거야?! - 꼬맹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 물론이다. 사람들은 다 그걸 원해! 난 열이 펄펄 끓어서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네가 병문안을 오고, 난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말할 거다.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네가 물으면, 난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대답할 거야. 커다란 케이크하고 과자 몇 상자, 산더미 같은 초콜릿, 아주 큰 사탕 봉지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대답할 거다! 


    그렇게 말을 마친 뒤 잔뜩 기대 어린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꼬맹이는 카를손이 원하는 걸 다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어요.

    - 너는 내 친엄마가 되어야 해. - 카를손이 계속 입을 놀렸어요. - 나를 달래서 쓴 약을 먹게 하고, 그러면 백 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겠지. 넌 내 목을 따스한 목도리로 감싸 줄 거야. 난 목도리가 따갑다고 투덜대면서 백 원을 받고서야 목도리를 두르고 눕기로 할 거야.


    꼬맹이는 정말 카를손의 친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한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저금통을 다 비워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저금통은 책장에 놓여 있는데, 예쁘고 묵직해요. 

    꼬맹이가 주방으로 달려가 칼을 가져와서 돼지저금통 배를 가르고 백 원짜리 동전들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카를손이 열심히 거들면서 탁자에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어요. 오백 원짜리 동전들도 떨어졌지만, 카를손은 백 원짜리 동전들에 가장 기뻐했습니다.

    꼬맹이가 이웃 상점으로 달려가서 동전을 다 털어 알사탕과 설탕에 절인 호두와 초콜릿을 샀어요. 있는 돈을 다 점원에게 내줄 때, 그게 강아지를 사려고 모은 돈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생각을 바꿨습니다. ‘카를손의 친엄마가 되기로 한 사람은 강아지를 갖는 사치를 부릴 수 없는 거야.’ 


    단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모두 식당에서 점심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러나 꼬맹이에게는 식구들과 함께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래, 식구들을 내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카를손을 소개하는 거야.’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한 뒤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카를손과 지붕으로 가려는 걸 식구들이 가로막을지도 모르니까요.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꼬맹이가 식탁에 놓인 유리 항아리에서 조개처럼 생긴 편도과자를 몇 개 집었어요. 카를손은 과자도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갔습니다.


    - 정말 오래 기다리게 하는구나! 이렇게 병들고 불쌍한 사람을. - 카를손이 나무라듯이 말했어요.

    - 최대한 서두른 거야. - 꼬맹이가 변명했습니다. - 그리고 얼마나 많이 샀냐면…

    - 그렇다면 동전이 한 닢도 남지 않았단 말이냐? 난 목도리를 두르는 대가로 백 원을 받아야 하는데! - 카를손이 놀라서 말을 가로챘어요

    꼬맹이가 동전 몇 개는 남겼다고 말하면서 달랬습니다. 카를손이 눈빛을 반짝이며 좋아서 펄쩍 뛰었습니다. 

    - 오오,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병자야! 나를 얼른 침대에 눕혀라.

    그때 꼬맹이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난 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지붕으로 가지?’

    그런 생각을 읽었나요? 카를손이 힘차게 말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내가 너를 등에 태울 거다. 그리고 “하나, 두울, 셋!” 하면 우리는 날아서 내 집으로 가는 거야. 그러나 조심해라. 손가락이 프로펠러에 끼지 않도록 해야 돼.

    - 나를 지붕까지 실어 나를 힘은 충분한 거야?

    - 보면 알 거야. 이렇게 아프고 가엾은 내가 너를 등에 태우고 절반이나 날아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 거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 그리고 가다가 기진맥진했다고 느끼면 널 버릴 거야…


    꼬맹이는 자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표정을 짓자, 카를손이 위로했어요.

    - 하지만 다 잘 될 거야. 모터가 고장만 나지 않으면.

    - 갑자기 고장 나면? 그러면 우리는 떨어지잖아!

    - 당연히 떨어지지. - 카를손이 느긋하게 말하고는, 곧바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덧붙였습니다. - 그러나 그건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꼬맹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래, 그건 하찮은 것이며 일상적인 일이야” 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보도록 쪽지를 적어서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집에 가 있어요.

  

    부모님이 이 쪽지를 보기 전에 돌아오는 게 물론 가장 좋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 어쩌다가 그 이전에 찾게 된다면, 꼬맹이가 어디 있는지 부모님이 아시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 않으면 또 예전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즉, 꼬맹이가 시외에 있는 할머니 댁에 있다가 갑자기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울면서 말했어요. 

    “꼬맹이야, 정 그렇게 기차가 타고 싶었다면 왜 엄마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니?”

    그때 꼬맹이는 “혼자 가고 싶어서” 하고 대답했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꼬맹이는 카를손과 함께 지붕에 가고 싶은데, 어느 부모가 그걸 허락하겠어요?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고 가는 게 더 낫고, 만에 하나 자기가 집에 없는 게 드러난다면 쪽지를 써 놓았다는 것으로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카를손이 비행 준비를 마쳤습니다. 배에 붙은 단추를 누르자 모터가 윙윙 소리를 냈습니다.

    - 얼른 내 어깨 위로 올라가라. - 카를손이 외쳤어요. - 이제 우리는 날아갈 거야!

    그리고 정말로 둘은 창문을 나와서 위로 올라갔습니다. 

    카를손은 먼저 모터를 시험하려고 가장 가까운 지붕 위에서 작은 원을 그렸어요. 모터는 고르게 잘 돌아가서 꼬맹이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카를손이 꼬맹이를 등에 태우고 지붕 위로 날아오르다


    마침내 카를손이 지붕 위에 착륙했습니다.

    - 이제 네가 내 집을 찾을 수 있는지 보자. 어떤 굴뚝 뒤에 있는지 말하지 않을 테니까, 직접 찾아 봐라.

    꼬맹이는 지붕 위에 올라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어떤 어른이 굴뚝에 맨 밧줄에 몸을 묶고 지붕에서 눈을 쓸어내리는 걸 몇 번 보기는 했습니다. 그 아저씨를 늘 부러워했는데, 이제 자신이 그 행운아가 된 겁니다. 물론 밧줄로 몸을 묶지는 않았고, 이 굴뚝에서 저 굴뚝으로 이동할 때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굴뚝 뒤편에서 정말로 작은집을 보았어요. 녹색 덧문들과 지붕이 달린 작은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서 빨리 저 작은집으로 들어가서 기관차들이며 수탉 그림들은 물론이고 거기 있는 것들을 다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작은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다들 알게끔 문패가 붙어 있었어요. 

    꼬맹이가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카를손이 문을 활짝 열고는 “환영해, 귀한 카를손, 그리고 꼬맹이도!” 하고 외치면서 먼저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 난 당장 침대에 누워야 해. 세상에서 가장 아픈 병자니까! 

    그렇게 소리치고는 벽에 붙인 빨간 나무 장의자로 뛰어올랐습니다. 

    꼬맹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어요.


    (카를손의 작은집은 아주 아늑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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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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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루덩의 악마들 11편 3

수다쟁이 어린 딸

말더듬 치유 실습 (3)

자장가 (a lullaby)

엄마 말 안 듣는 아이

8과. 자녀와 갈등 해소 방법 (27)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과잉 보호 (11)

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2-1)

공연 '기적의 밤' (7장 계속)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달과 아빠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이들의 스피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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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식구들은 늘 식당 벽난로 곁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오늘 저녁도 그랬어요. 바깥에는 화창한 봄기운이 따스하고 보리수나무들이 벌써 작고 끈끈한 녹색 나뭇잎들을 달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꼬맹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 대신 난로에서 이글대는 불꽃을 앞에 두고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와 함께 앉아 있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 엄마, 잠깐만 돌아서 볼래요? 

    엄마가 벽난로 앞 작은 탁자에 차관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을 때 꼬맹이가 부탁했습니다. 

    - 왜 그러니?

    - 엄마가 안 보는 새에 각설탕을 한 개 갉아먹으려고 그래.

    엄마가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어떡하든 꼬맹이를 달래 주어야 했거든요. 아이는 카를손이 급히 사라진 것 때문에 아주 울적했어요. 

    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블록으로 만든 탑만 덜렁 남겨놓고, 그것도 고기완자를 꼭대기에 얹어놓고 갑자기 사라지다니 말이에요. 


    꼬맹이가 벽난로 곁 좋아하는 자리에, 불꽃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온 가족이 커피와 차를 마시는 순간이 아마도 하루 중 가장 유쾌한 시간일 겁니다. 이때는 엄마와 아빠하고 평온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꼬맹이가 하는 얘기를 차근차근 다 들어주곤 했어요. 다른 시간에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서로 약 올리면서 ‘무턱대고 통째로 암기하는 방법’에 대해 수다 떠는 걸 듣는 것도 재미났어요. ‘통째로 암기하기’란 1학년인 꼬맹이한테 가장 어려운 수업 준비 방법이었습니다. 

    꼬맹이도 학교생활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엄마와 아빠 외에는 꼬맹이 얘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꼬맹이 얘기에 빙긋빙긋 웃기만 할 뿐이고, 그럴 때면 꼬맹이는 입을 꾹 다물곤 했어요. 형과 누나가 그렇게 깔보듯이 픽픽 웃는데 왜 굳이 입을 놀려야 하나 싶은 거지요. 

    그런 면이 있기는 해도, 보쎄 형과 베탄 누나 역시 꼬맹이를 놀리거나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꼬맹이 역시 형과 누나를 보면서 약 올리듯이 웃음을 짓곤 했으니까요. 꼬맹이는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보쎄 같은 형과 베탄 같은 누나가 있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그래, 꼬맹이, 숙제는 다 끝냈니? - 엄마가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꼬맹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각설탕을 한 개 갉아먹도록 해준 것이 고마워서 꼬맹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씩씩하게 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물론, 다 했어. - 꼬맹이가 얼굴을 찌푸린 채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카를손 생각뿐이었어요. 

    ‘카를손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공부 얘기를 꺼내다니, 이 사람들은 어찌 이리 답답할까!’ 

    - 어떤 숙제를 내주었는데? - 이번에는 아빠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는 마침내 화가 났습니다. 공부 얘기가 오늘 저녁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이 사람들은 공부 얘기만 하려고 지금 벽난로 곁에 이렇게 편안히 앉아 있는 건가!

    - 알파벳 쓰기야. - 꼬맹이가 후루룩 대답했습니다. - 아주 긴 알파벳인데, 난 그걸 알아. 먼저 А가 나온 뒤 다른 철자들이 쭉 이어져.

    꼬맹이가 다시 각설탕을 한 개 쥐고 또 카를손을 생각했습니다. 

    ‘식구들은 내키는 대로 떠들라고 해, 난 카를손만 생각할 거야.’

    꼬맹이 생각을 베탄 누나가 깼습니다. 


    - 왜 그래, 꼬맹이,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오백 원을 벌고 싶지 않니??

    꼬맹이는 처음에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오백 원을 벌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걸 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 오백 원은 푼돈이야. - 꼬맹이가 똑 부러지게 대꾸했습니다. - 지금은 물가가 비싸잖아…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예를 들어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값이 얼마 하지?

    - 천 원 한다고 생각해. - 베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 바로 그거야. 누나도 잘 알다시피, 오백 원은 너무 적어.

    - 근데 넌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가 뭔지도 모르잖니. - 베탄이 말을 이었습니다. - 꼬맹이, 네가 해야 할 일은 없어. 그냥 뭔가를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 내가 뭘 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야?

    - 저녁 내내 식당 문턱을 넘어오지 않는 것.

    - 베탄의 새 남자친구 펠레가 온단 말이야. - 보쎄 형이 끼어들었습니다.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 알겠어, 식구들이 다 교묘하게 계산한 거야. 엄마와 아빠는 영화관에 가고, 보쎄 형은 축구경기 보러 가고, 베탄 누나는 펠레와 식당에서 저녁 내내 비둘기처럼 사랑을 속삭이겠단 말이로군. 그리고 나만 내 방으로 쫓겨나는 거야, 그것도 오백 원이라는 하찮은 보상을 받고… 바로 이게 식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야!


    - 누나 새 남자친구 귀는 어떻게 생겼지? 이전 남자친구처럼 그렇게 축 늘어졌어?

    이건 베탄을 골려 주려고 일부러 흘린 말이었습니다.

    - 들었어요, 엄마? - 베탄이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 내가 왜 꼬맹이를 식당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는지 엄마도 이해할 거야. 나를 만나러 오는 친구들이 저 꼬맹이 때문에 다 뒷걸음친단 말이에요!

    - 꼬맹이가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다. 

    엄마가 썩 자신 없는 투로 말했어요. 엄마는 아이들이 다투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 아니, 그럴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 베탄이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저 애가 클라스를 어떻게 내쫓았는지 기억 못해요? 저 애는 클라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안 돼, 베탄 누나, 귀가 저렇게 생겨먹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하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런 말을 듣고 클라스가 또 우리 집에 오겠어요?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꼬맹이가 카를손 말투를 흉내 냈습니다. - 난 내 방에서 조용히 있겠어, 그것도 돈 한 푼 안 받고 말이야. 식구들이 나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돈까지 들일 필요도 없어.

    - 아, 좋은 생각이다. - 베탄이 다짐을 받으려 들었어요. - 그렇다면 저녁 내내 여기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 맹세하지! - 꼬맹이가 대꾸했습니다. - 나한테는 펠레 같은 누나 남자친구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만 알아 둬. 그 사람들을 안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내가 누나한테 오백 원을 줄 수도 있어.


    다들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마무리한 뒤 곧 엄마는 아빠와 극장에 갔고, 보쎄 형은 스타디움으로 달려갔습니다.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왔습니다. 그것도 돈 한 푼 안 받고 말이지요. 

자기 방에 돌아온 꼬맹이가 잠시 뒤 방문을 열어 보다.

    얼마 뒤에 방문을 열자 식당 쪽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베탄 누나가 남자친구라고 하는 펠레와 수다를 떨고 있는 겁니다. 꼬맹이가 식당 쪽으로 귀를 기울여봤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창문으로 다가가서 어둠이 덮인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놀고 있지는 않나 싶어 거리를 내려다봤어요. 건물 현관 부근에서 사내애들이 떠들며 장난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 외에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뒤엉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걸 꼬맹이가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싸움은 곧 끝났고, 꼬맹이는 다시 심심하게 됐습니다.


    바로 그때 기묘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윙윙 작은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리고 일 분 지나서 카를손이 창문으로 날아들어 왔습니다. 

    - 안녕, 꼬맹이! - 카를손이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 안녕, 카를손!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 넌 내가 엄마, 아빠한테 소개하려고 한 순간에 사라졌잖아. 왜 말도 없이 달아난 거지?

    그 말에 카를손은 화가 난 듯했어요. 허리에 양손을 척 걸치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 내 평생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그렇다면, 뭐야, 나는 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피지도 못한다는 거냐? 주인은 자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거야. 내가 집안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네 부모님이 나하고 인사 나누기로 한 것이 내 잘못이야? - 그러면서 방안을 둘러봤습니다. - 근데 내 탑은 어디 갔냐? 누가 내 멋진 탑을 부순 거야? 내 고기 완자는 어디 있어? 


    꼬맹이가 당황하여 쩔쩔맸습니다.

    - 난… 난, 네가 돌아올 줄 몰랐어.

    - 오호, 그렇군! - 카를손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건축가가 탑을 세우는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둘레에 담장은 누가 세울 거야? 탑이 영원히 서 있도록 누가 지켜볼 건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군!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됐다. 탑을 부수고 깨고, 게다가 고기 완자를 먹어 치우고 말이야! 


고기완자가 사라졌다고 삐친 카를손


    - 하찮은 거야. - 꼬맹이가 대범하게 말했습니다. - 일상적인 일이야! - 그러고는 카를손이 하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어요. - 때로는 낙심할 경우도 있게 마련이야!..    카를손이 한 옆으로 물러나서 낮은 의자에 앉았어요. 볼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 허, 말 하나는 그럴싸하게 하는구나! - 카를손이 화난 목소리로 투덜댔습니다. - 부수는 거야 아주 쉽지. 부수고 나서 “일상적인 일이야, 낙담할 필요 없어” 하고 말하다니! 이 가엾은 작은 손으로 탑을 세운 내 심정은 어떨 것 같으냐!

    그러면서 통통한 손을 꼬맹이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의자에 앉았는데, 볼이 더 부어올라서 웅얼거렸습니다. 

    - 난 너무 화가 나. 그냥 미칠 것만 같아!

    꼬맹이가 몹시 당황했어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 체 서 있기만 했어요. 침묵이 오래 갔습니다.


    마침내 카를손이 우울한 목소리로 내뱉었습니다. 

    - 만약 뭔가 작은 선물이라도 받게 되면 난 다시 명랑해질 거야. 사실,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무슨 선물을 한다면 좀 명랑해질 수 있을 텐데…

    꼬맹이가 자기 책상으로 달려가서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아둔 우표, 여러 빛깔의 조약돌들, 색연필, 주석 병정들… 

    거기에는 작은 손전등도 있었어요. 그건 꼬맹이가 아주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 너한테 이걸 선사하면 될까?

    카를손이 손전등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금방 활기를 띠었습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내 기분을 바꾸려면 그런 게 필요하다. 물론 내 탑이 훨씬 더 좋지만, 그 손전등을 준다면 좀 명랑해지도록 노력해 보겠다.

    - 그렇다면, 자, 가져.

    - 불은 들어오는 거냐? - 카를손이 손전등 단추를 누르면서 의심쩍게 물었어요. 

    그러고는 “만세! 켜지는구나!” 좋아서 소리를 지르는데, 두 눈에도 불이 반짝 켜졌습니다. 

    - 어두운 가을 저녁 내 작은집으로 돌아갈 때 이 손전등을 켜야겠다. 깜깜한데 가스 배관 같은 것들 사이에서 이제 더 이상 헤매지 않을 거다. - 카를손이 손전등을 쓰다듬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꼬맹이는 아주 기뻤어요. 꼬맹이가 꿈꾸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한 번만이라도 카를손과 함께 지붕 위를 산책하고 이 손전등이 어둠 속에서 길 밝히는 걸 보는 겁니다.


    - 됐어, 꼬맹이, 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와 아빠를 불러라, 인사 나누게.

    - 영화관에 가셨어.

    - 나를 만나는 대신 영화관에 갔다고? - 카를손이 놀랐어요. 

    - 그래, 다들 외출했어. 집에는 베탄 누나하고 새 남자친구만 있어. 둘은 지금 식당에 있는데, 난 거기로 가면 안 돼.

    - 무슨 소리냐! - 카를손이 펄쩍 뛰었습니다. - 네가 원하는 곳에 갈 수가 없다고? 흠, 우린 그런 걸 못 참지. 가자!..

    - 하지만 난 맹세까지 했는데…

    - 허어, 맹세 따위야 나도 했다. - 카를손이 말을 가로챘습니다. - 뭔가 옳지 못한 일을 보면 즉시 독수리처럼 달려들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지금도 달려들 거다. - 그러면서 꼬맹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습니다. - 근데, 뭘 약속한 거지?

    - 저녁 내내 식당에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했어.

    - 들어간다고 해도 너를 아무도 못 볼 거야. 말해 봐, 너도 베탄의 새 남자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

    -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보고 싶어! - 꼬맹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 예전에 누나는 귀가 축 늘어진 남자애하고 사귀었는데, 새 남자친구 귀는 어떤지 정말 보고 싶어.

    - 나도 그 애 귀를 한 번 봐야겠다. - 카를손이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 잠깐! 뭔가 장난을 꾸며야겠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난꾸러기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아니냐. 

    그러고는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다가 욧닛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면서 소리쳤습니다. 


    - 그래, 이거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바로 욧닛이야. 뭔가 궁리하기 시작하면 내 머리에서는 쓸 만한 게 꼭 떠오르거든…

    - 뭘 궁리했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넌 저녁 내내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맞아? 하지만 욧닛을 덮어쓰면 네 모습을 아무도 못 볼 거야.

    - 그래… 하지만… - 꼬맹이가 반대하려고 했습니다. 

    - ‘하지만’이라는 말은 하지 마라! - 카를손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습니다. - 욧닛을 둘러쓰면 네 모습이 아니라 욧닛만 보이는 거야. 나도 저걸 둘러쓸 거다. 그러면 나도 안 보이는 거지. 물론 베탄한테야 더없이 큰 징벌이겠지만, 거야 자업자득이야. 멍청하니까… 가엾기 짝이 없는 베탄, 날 못 볼 거야!

    카를손이 침대에서 욧닛을 끌어당겨 머리에 덮어쓰고 꼬맹이를 불렀습니다.

    - 이리 와, 얼른 나한테로 와라. 내 천막 안으로 들어와.

    꼬맹이가 카를손이 둘러쓴 욧닛 밑으로 들어갔어요. 둘은 마주보고 좋아서 낄낄댔습니다. 

    - 베탄이 식당에서 천막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사실 사람들은 천막을 보면 기뻐한다. 그것도 불빛이 어른거리는 천막을 보면 더 그렇지! 


    카를손이 손전등을 켰습니다. 

    꼬맹이는 베탄 누나가 천막을 보고 아주 기뻐할 것이라고는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깜깜한 욧닛 속에서 카를손과 나란히 서서 손전등을 비춘다는 것은 숨 막힐 정도로 멋있고 흥미롭게 보였습니다.

    꼬맹이가 한순간 베탄 누나를 괴롭히지 말고 자기 방에서 천막 놀이를 해도 아주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이 그 생각에 크게 반대했습니다.

    - 난 공정하지 못한 것을 가만둘 수 없다. 식당으로 가자,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꼬맹이와 카를손이 욧닛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고 주방으로 접근하다


    천막이 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꼬맹이는 카를손 뒤를 따랐어요. 이불 밑에서 작고 통통한 손이 나와서 방문을 조용히 열었습니다. 두툼한 커튼으로 식당과 구분된 현관방으로 천막이 이동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속삭였습니다.


    천막이 현관방을 소리 없이 지나쳐서 커튼 곁에 멈췄습니다. 베탄과 펠레가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좀 더 잘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듣기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램프는 꺼져 있었어요. 베탄과 펠레는 어슴푸레한 분위기를 좋아했습니다. 거리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도 충분한 모양입니다. 

    - 더 잘 됐지, 뭐.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내 손전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는 더 환하게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손전등을 일단 껐습니다. 

    - 우리는 불쑥 나타나는 거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깜짝 선물처럼… - 그러면서 카를손이 욧닛 밑에서 킥킥 웃었습니다. 

    천막이 조용히, 아주 조용히 커튼을 젖히고 식당으로 들어섰습니다. 베탄과 펠레는 맞은편 벽 앞에 놓인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그들 쪽으로 천막이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 베탄, 너한테 입맞춤할래. - 사내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꼬맹이 귀에 들렸습니다.  

    ‘저 펠레라는 남자애는 정말 이상해!’

    - 좋아. - 베탄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천막이 시커먼 얼룩처럼 소리 없이 마룻바닥을 미끄러졌습니다. 천천히 조금씩 소파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소파까지 이제 몇 발짝밖에 남지 않았지만, 베탄과 펠레는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 베탄, 이제 네가 나한테 키스해.

    펠레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손전등이 번쩍이면서 잿빛 어둠을 몰아내고 펠레 얼굴을 비췄으니까요. 

    펠레가 벌떡 일어났어요. 베탄이 외마디소리를 내질렀어요. 그와 동시에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현관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환한 빛에 잠시 눈이 부신 베탄과 펠레는 아무 것도 못 봤지만 웃음소리는 들었습니다. 거침없고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커튼 뒤에서 들려온 겁니다. 

    - 이건 내 못된 남동생 짓이야. - 베탄이 화를 내며 설명했습니다. - 이제 내가 쫓아가서 혼내 주겠어!


    꼬맹이는 어찌나 웃었는지 아랫배가 다 아플 정도였습니다.

    - 물론, 베탄이 너한테 키스할 거야! - 아랫배를 움켜쥐며 소리쳤어요. - 왜 너한테 키스하지 않겠어? 베탄은 누구한테나 키스하는걸. 그건 확실해!

    그리고 다시 웃음소리와 더불어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둘이 부딪쳐서 바닥에 쓰러졌을 때, 카를손이 속삭였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꼬맹이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느긋하게 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카를손이 바로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쓰러져 자기 발과 카를손의 발을 구분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또 웃음이 막 터지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베탄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둘은 네 발로 조용히 기었습니다. 그러다가 베탄한테 막 잡힐 뻔한 순간 허겁지겁 꼬맹이 방으로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이불 밑에서 속삭였습니다. 

    그러면서 짧고 작은 두 발로 북채처럼 마루를 두드리고는, 숨을 돌리자마자 한마디 더 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잘 달리는 사람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지!


욧닛을 덮어쓴 꼬맹이와 카를손을 베탄이 잡으려고 쫓아가다


    꼬맹이도 아주 빨리 달릴 줄 알았어요. 사실 지금은 그게 정말 필요했습니다. 베탄한테 막 잡히려는 찰나에 문을 쾅 닫고 겨우 몸을 피한 것이니까요. 베탄이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는 동안 카를손이 재빨리 열쇠를 돌리고 명랑하게 웃어댔습니다. 

    - 기다려, 꼬맹이, 널 붙잡고 말 테야! - 베탄이 단단히 화가 났어요. 

    - 어쨌든 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잖아! - 문 뒤에서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웃음소리도 들려왔어요.

    베탄이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다면, 방안에서 둘이 계속 손뼉 치며 크게 웃어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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