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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아내와 함께

 


 

  16-17세기 작가들과 극작가들이 가장 즐겨 취한 주제들 중 하나는 정신 멀쩡한 사람을 미쳤다고 공표하고 갖가지 모욕과 조롱을 안기는 것. 예를 들어, 말볼리오[각주:1]가 그렇고, 혹은 그림멜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각주:2]에 나오는 비참한 희생자를 떠올릴 수 있다. 한데 실생활에서 벌어진 사실들은 픽션에서 다룬 것보다 한층 더 불쾌한 것이었다. 

 

  루이즈 트롱셰가 파리에 있는 살페트리에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회고록을 남겼다.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소리치고 혼자 깔깔대고 다니다가 1674년 병원에 수용됐다. 한데, 그렇게 돌아다닐 때 왜 그런지 떠돌이 고양이들이 그녀를 엄청나게 따라 다니는 바람에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마녀가 분명하다는 의심을 샀다. 

 

  병원에서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철창에 갇혀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구경꾼들이 쇠창살 사이로 지팡이를 집어넣어 쿡쿡 찌르고,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며 놀리고, 마녀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지껄였다. 더러운 짚단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이 미치광이가 처형될 때 불길이 얼마나 멋지게 타오르겠어! 두어 주일에 한 번씩 새 짚단이 제공되고 더러운 것은 마당에서 불태웠다. 루이즈는 마당에 끌려나와 그 불길을 보면서 사람들이 신나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마녀를 불길에 처넣어라! 처넣어!” 

 

  어느 주일날 억지로 설교를 듣게 됐는데, 그녀 자신이 설교 주제였다. 성직자가 그녀를 가리키면서 회중에게 말했다. 

  보시오, 하나님은 죄를 이런 식으로 무섭게 벌하신다오! 이 세상에서는 죄인이 살페트리에 철창에 갇혀 있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그리고 비참한 제물이 어깨 들썩이며 흐느끼는 동안에도 설교자는 불구덩이 고통이며 유황 냄새며 펄펄 끓는 기름, 벌겋게 달군 쇠줄로 매질하기 따위를 흥미진진하게 소상히 얘기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여건에서 루이즈의 상태가 갈수록 더 나빠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한 사람의 평범한 호의 덕분이었다. 그녀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기도 방법을 가르친 방문 성직자

 

  수렝한테도 그 비슷한 일이 생겼다. 사실, 그는 공중 정신병원에 갇혀 정신과 육체의 고문을 당하는 일은 면했다. 그러나 예수회 칼리지 진료소에 있다 해도, 교육 수준 높은 학자이며 헌신적 기독교인인 동료들 가운데 있다 해도, 거기에도 공포는 차고 넘쳤다.

  예를 들어, 그를 돌보라고 붙인 수련수사는 무지막지하게 폭행을 가했다. 어린 학생들은 미친 수도사가 눈에 띄기만 하면 휘파람 불며 야유했다. 그런 젊은이들의 그런 행위는 예상됐던 것일 뿐. 한데 그의 형제요 동료인 엄숙한 신부들과 수도사들이 하는 짓은 의외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참으로 무신경한데다가 측은지심 따위가 눈곱만치도 없었다

 

  개중에는 허세 부리고 활달한 사람들, 이른바 ‘근육적 기독교인'들[각주:3]도 있어서, 그들은 수렝에게 장담했다. 당신한테 잘못된 것은 하나 없으니까 주눅들 필요 없소. 그리고 그가 해내기에 불가능한 일들을 시킨 뒤 그가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면 좋아라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 그 통증은 당신 상상일 뿐이오. 

  거기엔 악의적인 모럴리스트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를 찾아와 곁에 앉아서 장황한 설교를 흐뭇하게 늘어놓았다. 형제여, 당신 시련은 스스로 벌어들인 것이라오. 거기엔 호기심 채우려고 찾아온 성직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를 어린애나 백치처럼 여기며 갖은 허튼소리를 다 늘어놓았다. 또 그가 말을 할 수 없으니 이해할 수도 없다고 지레짐작하여 조롱하거나 뻔뻔하게 굴면서 싸구려 유머감각과 위트를 과시한 자들도 있었다. 

 

  한번은 「제법 지위 있는 성직자가 나 혼자 있는 병실로 왔다. 내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내가 그에게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내 뺨에 불이 나도록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는 일어나 나갔다.」 

 

  수렝은 이 모든 잔혹 행위를 제 영혼에 좋게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신께서 바라시는 일이야, 내가 미치광이가 되어 굴욕을 겪고 사회에서 추방된 자처럼 취급받기를 원하시는 게야, 나한테는 다른 이들의 존중은커녕 동정심마저 살 권리가 없어. 그가 돌아가는 상황에 순종했다. 나아가 자신의 비하를 적극적으로 갈구했다. 그러나 운명에 자신을 맞추려는 이 의식적인 노력은 그 자체로는 치유를 얻기에 충분치 못했다. 루이즈 트롱셰의 경우처럼 치유 동인은 다른 사람의 친절이었다

 

  1648년 바스티드 수사가 생트 칼리지 학장에 임명됐다. 동료 수도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렝이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 그가 병자를 데리고 있게 해 달라 요청했고, 승인이 났다. 

  생트에서 십년 만에 처음으로 수렝이 연민과 배려를 받게 됐다. 하나님 손에서 징벌을 겪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 손에서 더 많은 벌을 받아 마땅한 무슨 죄인이 아니라 영적 시련을 겪는 병자로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제 감옥인 쪽방을 떠나서 바깥세계와 소통하기는 아직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그에게 훨씬 더 큰 호의를 보이며 다가들고 그와 소통하느라 애썼다. 

 

  이 새로운 대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을 병자는 육신에서 드러냈다. 여러 해 동안 만성적 불안감이 호흡을 얕게 만드는 바람에 그는 거의 늘 질식 상태 직전에 있는 사람 같았었다. 한데 이제 거의 갑작스레 횡격막이 자유로이 움직이게 됐다. 생명 불어넣는 공기를 심호흡하여 폐에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내 근육은 전부 죔쇠들로 조인 듯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한데 이제 죔쇠가 하나씩 풀렸다. 난 믿기 힘든 안도감을 느꼈다.」 

 

  영적 해방 같은 것을 육신이 경험하고 있었다. 천식이나 건초열로 고생해 본 사람들은 우주 환경에서 물리적으로 단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며, 회복되어 그것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큰 환희인지 알고 있다. 

  영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천식 같은 것 때문에 시달리지만, ‘산소’ 결핍으로 만성적 질식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극히 적다. 하지만 그런 결핍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공기를 필사적으로 갈망한다. 그러다가 어떡하든 폐를 채우게 되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본다. 

 

  기이한 삶을 이어가는 동안 수렝은 억눌리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고, 또 숨 막히는 어둠에 갇히기도 하고 햇빛 아래 산꼭대기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폐가 그의 영혼 상태를 반영했으니, 영혼이 억눌릴 때면 폐가 경련을 일으켜 딱딱해지고 영혼이 숨을 쉬면 폐도 부드럽게 늘어났다

  그의 글들에서는 ‘구속된, 억눌린, 얽매인’ 같은 단어만이 아니라 그 안티테제인 ‘해방된, 팽창된, 되살아난’ 같은 단어도 수없이 마주친다. 그 단어들은 그의 경험의 주된 사실을 표현한다. 바로, 긴장과 이완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진동, 자신보다 더 작아짐과 더 충만한 삶으로 들어섬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진동

 

  수렝의 경우 심리적으로 해방되면서 흉곽도 상당히 커졌다. 무아지경으로 자신을 내어맡기는 묵상 시기 중에 한번은 구두처럼 앞에서 끈으로 묶는 가죽조끼가 오륙 인치나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성 필립 네리[각주:4]는 젊은 시절 무아지경에서 흉곽이 어찌나 격하게 확장됐든지 가슴이 영구적으로 늘어나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일하면서 팔순까지 살았다.) 

 

  호흡과 스피릿 간에는 단순한 어원학적 관계뿐 아니라 실질적 관계도 있다는 점을 수렝은 늘 인식했다. 그는 네 가지 호흡 타입을 열거한다. 악마의 호흡, 본성의 호흡, 은혜의 호흡, 찬미의 호흡. 그리고 그 각각의 호흡을 다 겪어 봤다고 우리한테 단언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얘기를 상세히 하지 않는 바람에, 그가 프라나야나[각주:5] 분야에서 실제로 무엇을 습득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바스티드 수사가 베푼 친절 덕분에 수렝이 다시 인류의 한 멤버라는 감각을 회복하게 됐다. 그러나 바스티드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말할 수 있었지만 신을 위해서는, 최소한 수렝이 믿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어제의 병자가 다시 호흡하게 됐지만, 글을 읽고 쓰거나 미사 집전할 능력은 복구되지 않았다. 걷거나 음식 먹고 옷을 입고 벗는 게 불편하고 때론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런 무기력과 장애로 인해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게 됐다. 

  그것은 공포와 절망의 시원이었고, 거기서 잠시나마 마음을 돌리는 방법은 오직 통증과 날카로운 불쾌감을 겪는 것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더 좋게 느끼려면 육체적으로 더 나쁘게 느껴야 했다.[각주:6

 

  수렝을 괴롭힌 질환의 아주 이상한 특징은 정신 상태 일부가 결코 병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읽고 쓰는 능력을 잃고, 기력을 앗아가는 지독한 통증 없이는 간단한 동작조차 할 수 없으며, 제 영혼의 파멸적 숙명을 확신하고, 자살과 신성 모독과 불순한 행위와 이단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히면서도 (어떤 순간에 그는 확신에 찬 칼뱅파였고 또 어떤 순간에는 믿고 실행하는 마니교도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오랜 고난과 시련 중에도 상하지 않은 문학 창작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처음 십년은 주로 운문을 지었다. 세간에 널리 퍼진 가락들에 새 노랫말을 붙이면서 수많은 발라드와 향연의 노래를 기독교 찬송가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의 운문은 빈약한 편인데, 그것은 건강 때문이 아니라 재능 부족 때문이었다. 수렝의 시가는 정신이 나갔을 때나 멀쩡할 때나 똑같이 빈약했다. 

 

  그의 재능은 (그것도 상당히 큰 재능은) 작시가 아니라 산문에 있었다. 주제를 명료하고 철저하게 드러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병으로 고생하던 시기 후반부에 실제로 행한 게 바로 산문 작업. 머릿속에서 구성하고 매일 저녁 필사생에게 구술하면서 1651년부터 1655년 어간에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저술 <영적 교리 문답 Le Catechisme Spirituel>을 만들어냈다. 

 

  이 저술은 심오함과 본질적 가치 면에서 수렝과 동시대를 산 영국인 어거스틴 베이커[각주:7]의 <거룩한 지혜>에 비견될 수 있다. 사륙판으로 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교리 문답>은 아주 읽을 만한 책으로 남아 있다. 사실 텍스트 질감은 다소 흥미를 떨어뜨리는 면도 있지만, 이는 수렝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유쾌한 구식 문체는 이후 거듭된 출판에서 수정됐다. 

  이미 19세기 한 편집자는 수렝의 원고를 ‘우정 어린 손으로 다듬었다’고 무의식적으로 놀린다. 다행히도 이 ‘우정 어린 손’은 저자가 가장 미묘하고 숭고한 자료들을 다루면서 동원한 소박함과 명료함을 망가뜨리지 않았다. 

 

  <교리 문답>을 쓸 때 수렝은 참고 서적들이나 예전에 써둔 원고마저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저자들에 대한 참조와 인용이 대단히 풍부하고 적절하며 저작의 구성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단단하다. 그는 똑같은 주제들로 계속 돌아가면서도 그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며 공들여 다듬는다. 그런 핸디캡 아래서 그런 저술을 지으려면 엄청난 기억력과 놀라운 집중력을 지녀야 했다. 이 책을 쓰던 때 최악의 광기 상태는 지나갔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다.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명석한 정신과 지적 기능을 고스란히 지닌 채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가장 악몽 같은 경험이리라. 손상되지 않은 이성은 무기력하게 보인 반면에, 상상과 감성과 자율신경계는 범죄적 미치광이 패거리처럼 행동하며 그를 파멸로 몰아갔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적극적인 사람과 자기암시의 희생자 사이에서 벌어진 고투, 실질적 사실들에만 의거하는 리얼리스트 수렝과 단어들을 괴물 같은 유사 리얼리티로 바꾸는 미문가 수렝 간의 고투였고, 그런 고투에서는 응당 공포와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 조셉 수렝의 고투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부닥치는 곤경의 극단적인 경우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이 언명은 인류 역사에 관한 한 딱 맞는 말이다. 언어란 인간이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도구

  그러나 언어는 인간이 동물적 순수함과 만물의 본성에 일치함에서 벗어나 광기와 마성으로 접어들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말이란 소통에 불가결한 것이면서 그 자체에 숙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작업가설로 취급되는, 세상에 관한 명제들은 우리가 세상을 점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 교리들이며 숭배해야 하는 우상 같이 절대 진리로 취급되는, 세상에 관한 명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갖가지 오류와 범죄로 몰아간다.  

 

  (일본 임제선 창시의 주요 인물인 남포소명은 이렇게 설파한다. 

  「눈먼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에서 부처가 자신의 황금 입술에서 단어들을 농담조로 흘렸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뒤얽힌 말 덤불로 가득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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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자유의지라는 환상

 

 

  1. Mavolio - 셰익스피어의 코미디 <십이야>(1602)에서 올리비아 집안의 집사. [본문으로]</십이야>
  2. Hans Grimmelshausen (1625-1676) - 게르마니아의 작가. 농민의 아들로 삼십년전쟁에 병사로 참전. 1648 전쟁 끝나자 유럽을 편력. 파멸적인 30년 전쟁 시기 게르마니아의 삶을 묘사한 장편소설 <짐플리치시무스의 모험>(1668)이 널리 인기를 끌었다. [본문으로]</짐플리치시무스의>
  3. Muscular Christianity - 근육적 기독교. 리버럴한 크리스트교의 한 형태로서 격심한 활동과 건강한 생활을 강조,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널리 퍼졌다. YMCA가 스포츠와 체조 프로그램들을 채택하는 것도 그 일환. 이 운동의 근거는 빌립보서 3:14,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느님께 받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니.” [본문으로]
  4. St. Philip Neri (1515-1595) - 이탈리아의 성직자, 오라토리오 수도회라 불린 세속 성직자 모임을 설립. ‘로마의 사도’.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시신을 해부했을 때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1545년경 카타콤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흉곽이 확장되면서 일어난 사건. 그의 시성을 승인한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가슴 확장이 동맥벽이 약해진 탓에 동맥이 확장돼 발생한 것으로 결정했다. [본문으로]
  5. pranayana - ‘프라나 혹은 호흡의 확장’ 혹은 ‘생명력 확장’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Prāṇāyāma에서. 요가에서 말하는 이 호흡법의 기원은 힌두이즘에 있다. [본문으로]
  6. 수렝과 같은 상태를 의사 Leon Vannier가 (Paris, 1950)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블랙 코호시에 약한 사람은 제 머리를 두터운 구름이 감싸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보고 듣는 게 신통치 못하고, 그의 주변과 내면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병자는 미치는 게 아닐까 겁을 낸다. 아주 묘하게도, 신체 어떤 부위에든 통증이 나타나면, 기분은 더 좋아진다. 병자가 통증을 느낄 때, 정신 상태가 향상된다.” - 저자 주. [본문으로]
  7. Augustine Baker (1575–1641) - 베네딕트회 수사,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등 주로 영적 문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1657), 익명의 작자가 쓴 <무지의 구름>의 주석서인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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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삽화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해도 화합될 수 없는, 그의 스피릿 안에서 벌어졌다

 

  하나님이라 명명된 무한함은 본성이라 불리는 유한함을 포함해야 하며, 이 무한함은 공간의 모든 점들과 시간의 매 순간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결말을 회피하고 그 현실적인 결과를 모면하기 위해 구학파의 엄격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창의력을 소비하고 준엄한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설득과 강요를 다 허비했다. 그 사상가들은 선포하기를, 이는 타락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철저히 썩었다고 했다. 그 모럴리스트들은 말하기를, 그런 고로 모든 전선에서 본성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안에서는 억누르고 밖에서는 무시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라는 선물을 얻고자 희망함은 오로지 본성의 경험 소여(所與)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우리는 신의 선물도 받을 자격을 갖출 터이다. 우리가 원초적 사실에 다가든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자잘한 사실을 거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선종의 한 선사가 이르기를,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말라, 그저 고정 관념에 붙들려 있지만 않으면 되느니”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대략 같은 말을 하긴 하되,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얘기가 교리와 신앙 조문, 경건한 전통 등에 관한 것일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정 관념’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기껏해야 이정표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하다. 존재라는 원초적 사실에는 일상의 사실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말로써는, 혹은 말로써 고무된 판타지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 왕국을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네 상상이나 종작없는 추론으로는 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리성이라는 주장이나 갈망과 혐오, 보상의 판타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기성 전제들 따위가 가득한 영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시늉을 하는 한, 하나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기란 기대난망. 

  먼저 인간의 왕국이 와야 하고, 그런 뒤에야 하나님 왕국도 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죽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억누르고 내치는, 우리네 숙명적 성향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편견을 떨치고, 현실을 개조한다고 뿜어대는 언어의 덫을 제거하고, 현실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숨어드는 몽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보인 ‘거룩한 무심함’이요, 코사드[각주:1]의 ‘내맡김’이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두 매 순간 자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완전한 길의 징표인 ‘선호하기를 거부함’이다.

 

  교회 권위자들과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수렝은 영혼이 세상 존재의 거룩한 근간과 합일돼 변모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네 최초 조상의 죄 때문에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결과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겼다는 견해도 소중히 여겼다. 

  신과 우주에 대해 그런 관념을 견지하면서 수렝은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즉, 자살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인 요소를 죄다 몸과 마음에서 근절할 필요가 있다고. 한데,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노년에 인정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말해둬야 하겠다. 루덩으로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신에게 다가들리라 기대하면서 육욕을 죽이느라고 고행에 너무 몰두했다. 이 노력에 가상한 열의가 있었을지언정 거기엔 또 속박과 편협한 이성도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편협한 도그마에 빠졌고, 그 도그마는 온건할지 몰라도 적잖이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구별하며 신이 당신의 피조물과 반대편에 있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수렝은 본성에 대한 이기적 태도며 본성 자리에 설정된 몽상과 허황한 생각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이 특별한 행성에서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행으로 억누르고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본성을 증오하라. 그 본성이 신께서 예비하신 모든 굴욕을 감내하게 하라.」 본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선고는 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라는 것을 수렝은 가장 쓰라린 경험으로 알았다. 

 

  본성은 터무니없고 무분별하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는 노이로제가 종종 수반되는 지적 피로를 인간적 추잡함에 대한 증오와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혐오로 바꾸었다. 이 증오와 혐오가 특히 더 강한 것은, 그가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으며 사람이라 불리는 역겨운 존재들이 야기한 갖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벌써 며칠째 처리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이 입맛에 맞았으며, 그의 병든 본성에 어떤 안도감마저 안겼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상태가 좀 나아진 것은 ‘크리스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었군. 다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 상태는 죄책감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는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그를 행동케 하는 가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동할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니까. 

  그래서 ‘자기 죄를 물처럼 삼키고 빵처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의 의지와 행동 능력은 마비됐지만 감수성은 아직 살아 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전처럼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사람은 더 많이 벗겨질수록, 가격을 더 아프게 느끼는 법.’ 

 

  그는 ‘죽음의 공허’에 있다. 그러나 이 공허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니다. 그건 격심하고 완전한 공허요, ‘끔찍하고 참담한 나락이며, 거기에는 도움이나 구원 받을 기대가 없고’ 거기서는 조물주가 영혼을 괴롭히며 그 조물주에게 제물은 증오만 품을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홀로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종의 삶을 고난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본성은 궁지로 내몰려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없으며 그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수렝은 더 이상 생각이나 연구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랑과 감사를 지니고 조물주에게 가슴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은 아직 살아서 ‘죄악과 꺼림칙한 일에 빠졌다.’ 뭔가 무관한 작업을 하면서 옆으로 빠지려는 번다하고 경망한 갈망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그건 자만심과 자기본위와 공명심 못지않은 죄이니까. 

  내면에서 노이로제와 엄격주의에 시달린 그가 외면에서 고행으로 본성을 더 빨리 파괴하기를 꿈꾼다. 이전처럼 안도감을 주는 작업이 아직 몇몇 있지만 그 작은 기쁨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공허를 내향적 공허와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도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본성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신의 자비에 노출될 테니까. 의사들은 고기를 더 많이 먹으라 하지만 그 권고를 따를 수 없다. 신께서 이 질병을 정화의 수단으로 주셨다. 너무 일찍 좋아지려고 애쓴다면 그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터

 

  그렇게 건강을 거부하고 비즈니스와 휴식도 거부했다. 그러나 재능과 학식을 눈부시게 발휘한 활동 분야가 그래도 남아 있었다. 강론, 신학 저술, 설교집, 경건한 장시들. 거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 왔고, 그것들을 여전히 일면 뿌듯하게 여긴다. 

  길고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그 동안 써온 것을 모조리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몇 권 책의 원고와 다른 많은 글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이제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됐다.」 그는 이제 「내 본성이 거부하는 험로를 걸으라고 하는 그분의 작업을 밀고나가는 숙련공」 같이 됐다

 

  몇 달 지나니 그 길이 어찌나 힘든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39년부터 1657년까지 그 누구한테도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병리적 문맹이라는 괴이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었다. 말하기조차 힘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홀로 유폐 상태에 있고 바깥세계와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 스스로 하나님한테서 도피하기로 내린 결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시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자신이 이미 현생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확신에 (여러 해 동안 지탱돼 온 확신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 그 다음엔 지상의 지옥에서 한층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고해사제와 수도회 상급자들이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생명이 있는 한 확고부동한 저주란 있을 수 없다오. 이 점을 한 신학자는 장 조셉에게 삼단논법을 동원해 입증하고, 또 다른 이는 2절판 묵직한 서적을 들고 진료소로 찾아와서 교회 박사들의 권위를 들먹이며 입증했다. 

 

  하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수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았다. 한때 자기가 물리쳤던 악마들이 영원한 화염 속에 그의 자리를 환호하며 준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다른 수도사들도 저희 내키는 대로 다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들과 고통 받는 이의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모든 사건,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절망을 굳히기만 했다. 벽난로 곁에 앉았다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회에 들어섰다면, 그 순간 신의 심판에 대한 어구나 사악한 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늘 들리고 울렸는데,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설교를 들었다면, 회중에 길 잃은 영혼이 있다고 설교자가 단언하는 것을 꼭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의 영혼이었다. 

 

자만심의 악마 레비아탄

 

  언젠가 그가 죽어가는 형제의 침상 곁에서 기도할 때, 갑자기 자신이 그랑디에처럼 마법사가 되어 악마들에게 무고한 사람 육신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힘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문을 걸고, 자만심의 악마인 레비아탄에게 이 육신으로 들어가라 명령하고, 정욕의 악마인 이사카론못된 장난의 스피릿인 발람신성 모독의 왕인 베게모트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게, 영겁의 목전에서 마지막 중대한 행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덤벼들라 권하고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에 영혼이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수렝이 실제로 유황 냄새를 맡고 울부짖음과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한데 이게 뭐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혹은 자발적이었나?) 그가 악마들을 계속 부르면서 악마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돌연 침대에서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했다. 한데 그건 이전처럼 하나님 뜻에 복종이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며 거룩한 자비와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는 둥 공격적인 의심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횡설수설이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수렝이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내 느낌이 옳았어, 난 마법사가 된 거야!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이 외적 증거에 어떤 낯설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고무된 내적인 확신이 추가됐다.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엄격함과 (또 감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지가 마비되고 허탈 상태가 갈마들며 근육이 경련돼 침대에 붙박여 있는 오랜 시간에 그는 ‘이와 비교할 통증은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신의 분노가 거세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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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n Pierre de Caussade (1675-1751) - 프랑스의 예수회 성직자, 종교 저술가. <신의 섭리에 내맡김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그는 현재 순간은 신께서 주신 성찬이요 그것에 내맡김과 그것을 필요로 함은 신성한 상태라고 믿었다. 얼핏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듯 보이기에 그의 책은 1861년까지 출간 금지. 저자 본래 뜻에 더 합당한 버전은 1966년도에야 출간됐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서 어떤 작가들은 대승불교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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