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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사진

 


 

  일본 임제선 창시의 주요 인물인 남포소명은 이렇게 설파한다. 

  「눈먼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에서 부처가 자신의 황금 입술에서 단어들을 농담조로 흘렸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뒤얽힌 말 덤불로 가득 찼다.」 

  이 덤불들이 극동에서만 자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지고’ 왔다면, 그건 그분과 그분 후계자들이 그들 통찰력을 말로써 구체화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말들처럼, 기독교적 언급들은 때론 너무 공격적이고 때론 너무 개괄적이고 불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늘 구구한 해석의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이런 가르침이 작업가설로 활용될 때… 즉, 인간이 존재의 고통을 수습하도록 돕는 지혜의 원천으로 활용될 때, 기독교적 명제들은 거대한 가치를 지녀 왔다. 한데, 그 명제들이 교리요 우상으로 바뀌면서, 그것들은 신학적 증오나 종교전쟁, 교회 제국주의 같은 거대한 악을 낳았다. 이 악에는 루덩에서 벌어진 광란의 향연과 수렝의 자기암시로 인한 광기 같은 부차적인 참사들도 포함된다. 

 

  모럴리스트들은 정욕을 통제해야 한다고 자주 읊어댄다. 물론 옳은 말씀이다. 한데 불행히도 그들 중 대다수는 그에 못지않게 본질적 의무인 말과 말에 근거하는 사유 형태를 통제하지 못한다

  정욕의 범죄는 뜨거운 피에서만 자행되고, 피는 가끔 뜨거워질 뿐이다. 그러나 말은 늘 우리와 함께 있고, 말은 주문과 마법 공식 같은 것도 황당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 정도로 암시적인 힘을 지닌다.  

 

  정욕의 범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이상주의의 범죄. 이는 바로 신성시 된 말로 쏘삭거리고 조장하고 설교하여 생기는 범죄. 이런 범죄는 맥박이 정상일 때 계획되고 피가 차가운 상태에서 다년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실행된다. 

  과거에는 이상주의 범죄를 강요한 말들이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 그런 말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다. 도그마들은 이제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됐다

 

  유일하게 변치 않은 것은 각종 도그마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맹신이요 조직적 광기요 악마 같은 흉포함이며, 그들은 그런 흉포함을 가지고 저희 믿음을 행한다. 

  실험실과 서재에서 쓰는 작업가설 개념을 이제 교회와 의사당, 정부에서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인류는 집단 광기에서 벗어나고 대량 학살과 대량 자살이라는 고질적 충동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인류의 주된 문제는 바로 환경. 사람들은 물질 수준부터 영적 수준까지 모든 수준에서 우주와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를 배워야 한다. 생물학적 종으로서 우리는 제한된 규모와 자원을 소유한 행성 위에서 거대하고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가 만족스럽게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 자원 중 많은 것은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소모적 자산이 아닌가.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무한한 정신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datum과 donum (받지만 말고 주기도 하는) 원칙에 입각함으로써 서로 만족스럽게 지내는 방법을 키우게 될 것이다.[각주:1] 

 

  이런 말이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찾으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저절로 따라붙을 것이다.”[각주:2]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행동한다. 먼저 ‘나머지 다’를 찾으려고 기를 쓴다. 즉, 이기적인 돌진과 말의 힘에 대한 맹신에서 생긴,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든다. 그 결과 우리네 기본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정치 유희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조직화된 사회가 지구와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게 된다

 

  맹신적으로 숭배된 언어 체계에 지나치게 쏠리다 보면, 존재의 ‘원초적 사실’과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어진다. 먼저 이차적인 ‘나머지 다’를 찾아다니다가 우리는 그것을 잃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마저 잃으며, 또 그 왕국이 도래할 수 있는 유일한 지구도 잃는다

 

  수렝의 경우, 어떤 명제들을 부동의 도그마로 믿게끔 배운 바람에 공포와 절망에 억눌려서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명제들이, 똑같이 독단적이지만 더 용기를 북돋운 명제들이 있었다

 

  1655년 10월 12일 (이맘때 수렝이 복귀한) 보르도 칼리지에서 한 수도사가 그의 고해를 듣고 영성체를 준비시키기 위해 방으로 찾아왔다. 병자가 자책할 수 있는 유일한 중죄는 아주 사악하게 처신하지 못했다는 점뿐이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이미 저주를 내린 이상 모든 악에서 뒹굶으로써 그 저주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텐데, 실제로는 늘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썼으니 말이다.  

  「기독교인이 선을 행하는 문제에서 자책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면, 즉 자신의 죄가 충분치 못해 괴롭다 한다면, 독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다. 이제 내 보기에도 그렇다.」 

 

   이 대목을 1663년도에 썼다. 1655년에도 수렝은 자신을 ‘길 잃은 영혼’이라 여기면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자살보다 훨씬 더 중한 죄를 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바로 이 죄를 그가 ‘아직 희망을 갖고 지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 중 하나로서’ 고해사제에게 고백했다. 고해사제는 필경 어질고 지혜로운 이로서 수렝의 과대망상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참회하는 죄인에게 보증했다. 

  난 이런 일을 잘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게 잘 되리라는 인상을 종종 강하게 느꼈다오. 그걸 계시라 불러도 좋아요. “당신은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고, 평화롭게 숨을 거둘 것이외다.” 

 

  이 말이 수렝의 마음에 엄청난 인상을 불러일으켰고, 그 순간부터 공포와 비참함으로 숨 막히게 하던 구름이 걷히게 됐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돌아서지 않았다. 아직 희망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질병이 회복된다는 희망,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희망이

  희망과 더불어 건강도 조금씩 회복됐다. 신체 활동 억제와 마비 증세가 차례로 사라졌다. 글을 쓸 수 없던 상태가 먼저 사라졌다. 십팔 년 동안 강요된 병리적 문맹 상태 끝에 1657년 어느 날 그가 펜을 쥐고 영적 생활에 대한 숙고를 세 페이지 끼적일 수 있었다. 철자들이 ‘거의 읽기 힘들 만큼 볼품없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손이 마침내 말을 듣기 시작한 점, 비록 마음먹은 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해도.  

 

  세 해가 지나 보행 능력이 회복됐다. 이건 시골 친구 집에 묵을 때였다. 처음에는 일꾼 둘이 그를 들어 침실에서 식당으로 옮겨 다녔다. 「왜냐면 지독한 통증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으니까. 이건 마비 환자들이 겪는 통증 같은 게 아니었다. 위가 수축되고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통증이었으며, 그때마다 난 창자가 뒤집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1660년 10월 27일 한 친척이 그를 보러 왔다. 떠날 시간이 됐을 때 수렝이 배웅하려고 문까지 고통스럽게 발을 질질 끌고 갔다. 거기 서서 손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갑자기 「모든 사물을 아주 또렷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건 극도의 신경쇠약 때문에 지난 십오 년 동안 전혀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익숙한 통증 대신 ‘어떤 생기’를 느끼면서 계단을 대여섯 개 내려가 정원에 들어서서 제법 오랜 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이끼며 녹색으로 반짝이는 회양목 울타리를 보고, 풀밭과 갯개미취들과 가지가 뒤엉킨 서어나무 오솔길을 보았다. 더 멀리 창백한 창공 엷은 은색 햇빛 속에 부드러운 갈색 가을 나무들이 서 있는 낮은 구릉들을 보았다. 

 

  바람 한 점 없고 거대한 수정 같은 적막이 깔렸는데, 떠오르는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과 무수한 선들이 기적 같은 광경을 펼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영원의 존재를 느꼈으니까.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이 나타나는 자연에서 영원의 존재를 느끼다

 

  다음날 그 동안 거의 망각하고 있던 세상으로 다시 외출을 감행했다. 날이 갈수록 탐사가 과감해져서 한번은 우물 있는 데까지 갔다. 우물을 보고도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지 않았다. 정원을 벗어나서 수도원 너머 작은 숲으로 들어가 발목까지 차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장 조셉 수렝이… 치유됐다. 

 

  그는 ‘극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바깥세계를 인식하지 못했노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쇠약 때문에 신학적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이 일으킨 환상에 집중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연계에서 그렇게나 비참하게 단절된 것은, 사실은 그가 그런 이미지들이며 추상 관념에 병적으로 몰입한 탓이었다. 그를 삶에서 떼어놓은 질병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그는 말과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사물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세계에서,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떨어져 살게끔 자신을 몰아쳤던 것이다

 

  랄망은 믿음의 경계를 모르는 사람의 숭고한 무모함을 가지고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성체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보거나 거기에 경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경탄할 수 있다면, 그분은 이 신비와 부활에만 경탄했을 것이다. 신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이후 우리는 그 무엇에도 놀랄 일이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그 무엇을 보지도 않고 경탄하지도 않는다는 면에서 수렝은 그저 스승의 금지 명령을 따르기만 했다. 그저 주기(donum)만 꿈꾸면서 아무 것도 받기(datum)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신께서 주시는 최고 선물은 주어진 것으로 이뤄진다. 하나님 왕국은 이 세상에 임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기적인 갈망과 증오로써 일그러진 의지며 도그마들로써 왜곡된 지성에 나타나는 세상을 지각할 게 아니라

 

  수렝은 타락한 세상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확신한 엄격주의 신학자였기에 랄망을 좇아 자연에는 바라보거나 경탄할 만한 게 전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가 직접 겪은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다. <영적 교리 문답>에서 이렇게 쓴다. 

  「간혹 성령은 영혼을 꾸준히 점차적으로 일깨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동물이며 나무, 꽃, 기타 모든 피조물 등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죄다 활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넌지시 이르며 위대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 

  같은 맥락의 구절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갖고 계신 지혜와 선의를 모두 꽃송이에서, 미물에서, 영혼들에게 환히 드러내신다. 영혼에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기 위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자신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많은 경우에 내 영혼은 이런 찬미의 상태로 덮였고, 그러면 햇빛이 평소보다 말할 수 없이 더 밝아지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아주 부드럽고 견딜 만한 것이, 자연광이 아니라 마치 더 드높은 시원에서 나오는 듯싶은 것이다. 한번은 그런 상태에 잠겨서 보르도에 있는 우리 칼리지 정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빛이 어찌나 기적 같은지, 내가 마치 낙원에서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색채가 평상시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형상이 더 우아하고 눈부시게 보였다. 우연한 축복 덕분에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의 문으로 자연스레 들어섰다. 그 세계는 만약 블레이크의 말대로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우리가 매 시간 거주할 곳이다.[각주:3]

  그러나 찬미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고, 병고를 겪는 여러 해 내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웅장함이라는 면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주 강렬한 기억 외에 내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일순간이나마 지상에서 하나님 왕국을 접한 이 사람이 그럼에도 엄격주의자이기에 이 징표를 지각하지 않고 창조의 결실을 다 거부해야 했던 까닭은 단순한 말과 추상적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나 트러헌이 <명상의 시대>에서 한 것처럼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성들여 활용하는 대신, 그는 신이 창조한 그 무엇도 보거나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예전 비정상적 정신 상태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러고는 자기 신조에서 더 암울한 명제들과, 그 명제들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과 상상에, 온 생각을 쏟아 부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내던지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길도 없었으리라. 

 

  안타이오스[각주:4]는 땅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위력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이 거인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교살해야 했다. 

  거인이자 동시에 영웅인 수렝은 자연과 접촉하여 치유되는 경험도 했고 의지력 하나로 자신을 지상에서 들어 올려 제 목을 죄기도 했다. 그는 해방을 열망했다. 그러나 성자와 합일을 잘못 해석했다. 그에게는 이 합일이 자연에 깃든 신성을 부정하는 뜻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세상과 떨어져서 영혼이 성부와 합일하는, 또 갖가지 심리적 체험에서 성령과 합일하는 부분적 깨달음만 얻었다

 

  (초기 단계에서 수렝의 치유는 암흑으로부터 ‘행복하고 건강한 의식’으로 이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 건강한 의식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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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틴어 datum은 '주다'라는 동사 dare의 과거분사로서 '주어진'이란 뜻. 즉, 받은 것. donum은 '선물, 기증, 인간에게 강림한 하느님 은총' 등의 뜻. 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다툼과 도눔은 1) datum이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덜 고유한 성질인 반면에 2) donum은 대범함과 규모에서 datum을 훨씬 더 능가한다고. [본문으로]
  2.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and all the rest shall be added." "다만 그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다른 것은 다 더해지리니." (누가복음 12:31) [본문으로]
  3.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 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만물이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드러날 것이야." 영국의 시인, 판화 제작자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0-1793년 어간에 완성한 책 <천국과 지옥의 혼인>에 실려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을 이 구절에서 차용해 <지각의 문>(1954)이라 했다. [본문으로]</지각의></천국과>
  4. Antaios - 그리스와 베르베르 신화에서, 힘이 센 거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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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삽화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해도 화합될 수 없는, 그의 스피릿 안에서 벌어졌다

 

  하나님이라 명명된 무한함은 본성이라 불리는 유한함을 포함해야 하며, 이 무한함은 공간의 모든 점들과 시간의 매 순간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결말을 회피하고 그 현실적인 결과를 모면하기 위해 구학파의 엄격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창의력을 소비하고 준엄한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설득과 강요를 다 허비했다. 그 사상가들은 선포하기를, 이는 타락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철저히 썩었다고 했다. 그 모럴리스트들은 말하기를, 그런 고로 모든 전선에서 본성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안에서는 억누르고 밖에서는 무시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라는 선물을 얻고자 희망함은 오로지 본성의 경험 소여(所與)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우리는 신의 선물도 받을 자격을 갖출 터이다. 우리가 원초적 사실에 다가든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자잘한 사실을 거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선종의 한 선사가 이르기를,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말라, 그저 고정 관념에 붙들려 있지만 않으면 되느니”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대략 같은 말을 하긴 하되,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얘기가 교리와 신앙 조문, 경건한 전통 등에 관한 것일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정 관념’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기껏해야 이정표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하다. 존재라는 원초적 사실에는 일상의 사실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말로써는, 혹은 말로써 고무된 판타지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 왕국을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네 상상이나 종작없는 추론으로는 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리성이라는 주장이나 갈망과 혐오, 보상의 판타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기성 전제들 따위가 가득한 영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시늉을 하는 한, 하나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기란 기대난망. 

  먼저 인간의 왕국이 와야 하고, 그런 뒤에야 하나님 왕국도 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죽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억누르고 내치는, 우리네 숙명적 성향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편견을 떨치고, 현실을 개조한다고 뿜어대는 언어의 덫을 제거하고, 현실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숨어드는 몽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보인 ‘거룩한 무심함’이요, 코사드[각주:1]의 ‘내맡김’이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두 매 순간 자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완전한 길의 징표인 ‘선호하기를 거부함’이다.

 

  교회 권위자들과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수렝은 영혼이 세상 존재의 거룩한 근간과 합일돼 변모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네 최초 조상의 죄 때문에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결과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겼다는 견해도 소중히 여겼다. 

  신과 우주에 대해 그런 관념을 견지하면서 수렝은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즉, 자살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인 요소를 죄다 몸과 마음에서 근절할 필요가 있다고. 한데,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노년에 인정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말해둬야 하겠다. 루덩으로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신에게 다가들리라 기대하면서 육욕을 죽이느라고 고행에 너무 몰두했다. 이 노력에 가상한 열의가 있었을지언정 거기엔 또 속박과 편협한 이성도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편협한 도그마에 빠졌고, 그 도그마는 온건할지 몰라도 적잖이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구별하며 신이 당신의 피조물과 반대편에 있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수렝은 본성에 대한 이기적 태도며 본성 자리에 설정된 몽상과 허황한 생각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이 특별한 행성에서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행으로 억누르고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본성을 증오하라. 그 본성이 신께서 예비하신 모든 굴욕을 감내하게 하라.」 본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선고는 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라는 것을 수렝은 가장 쓰라린 경험으로 알았다. 

 

  본성은 터무니없고 무분별하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는 노이로제가 종종 수반되는 지적 피로를 인간적 추잡함에 대한 증오와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혐오로 바꾸었다. 이 증오와 혐오가 특히 더 강한 것은, 그가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으며 사람이라 불리는 역겨운 존재들이 야기한 갖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벌써 며칠째 처리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이 입맛에 맞았으며, 그의 병든 본성에 어떤 안도감마저 안겼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상태가 좀 나아진 것은 ‘크리스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었군. 다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 상태는 죄책감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는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그를 행동케 하는 가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동할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니까. 

  그래서 ‘자기 죄를 물처럼 삼키고 빵처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의 의지와 행동 능력은 마비됐지만 감수성은 아직 살아 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전처럼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사람은 더 많이 벗겨질수록, 가격을 더 아프게 느끼는 법.’ 

 

  그는 ‘죽음의 공허’에 있다. 그러나 이 공허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니다. 그건 격심하고 완전한 공허요, ‘끔찍하고 참담한 나락이며, 거기에는 도움이나 구원 받을 기대가 없고’ 거기서는 조물주가 영혼을 괴롭히며 그 조물주에게 제물은 증오만 품을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홀로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종의 삶을 고난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본성은 궁지로 내몰려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없으며 그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수렝은 더 이상 생각이나 연구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랑과 감사를 지니고 조물주에게 가슴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은 아직 살아서 ‘죄악과 꺼림칙한 일에 빠졌다.’ 뭔가 무관한 작업을 하면서 옆으로 빠지려는 번다하고 경망한 갈망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그건 자만심과 자기본위와 공명심 못지않은 죄이니까. 

  내면에서 노이로제와 엄격주의에 시달린 그가 외면에서 고행으로 본성을 더 빨리 파괴하기를 꿈꾼다. 이전처럼 안도감을 주는 작업이 아직 몇몇 있지만 그 작은 기쁨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공허를 내향적 공허와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도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본성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신의 자비에 노출될 테니까. 의사들은 고기를 더 많이 먹으라 하지만 그 권고를 따를 수 없다. 신께서 이 질병을 정화의 수단으로 주셨다. 너무 일찍 좋아지려고 애쓴다면 그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터

 

  그렇게 건강을 거부하고 비즈니스와 휴식도 거부했다. 그러나 재능과 학식을 눈부시게 발휘한 활동 분야가 그래도 남아 있었다. 강론, 신학 저술, 설교집, 경건한 장시들. 거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 왔고, 그것들을 여전히 일면 뿌듯하게 여긴다. 

  길고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그 동안 써온 것을 모조리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몇 권 책의 원고와 다른 많은 글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이제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됐다.」 그는 이제 「내 본성이 거부하는 험로를 걸으라고 하는 그분의 작업을 밀고나가는 숙련공」 같이 됐다

 

  몇 달 지나니 그 길이 어찌나 힘든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39년부터 1657년까지 그 누구한테도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병리적 문맹이라는 괴이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었다. 말하기조차 힘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홀로 유폐 상태에 있고 바깥세계와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 스스로 하나님한테서 도피하기로 내린 결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시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자신이 이미 현생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확신에 (여러 해 동안 지탱돼 온 확신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 그 다음엔 지상의 지옥에서 한층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고해사제와 수도회 상급자들이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생명이 있는 한 확고부동한 저주란 있을 수 없다오. 이 점을 한 신학자는 장 조셉에게 삼단논법을 동원해 입증하고, 또 다른 이는 2절판 묵직한 서적을 들고 진료소로 찾아와서 교회 박사들의 권위를 들먹이며 입증했다. 

 

  하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수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았다. 한때 자기가 물리쳤던 악마들이 영원한 화염 속에 그의 자리를 환호하며 준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다른 수도사들도 저희 내키는 대로 다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들과 고통 받는 이의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모든 사건,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절망을 굳히기만 했다. 벽난로 곁에 앉았다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회에 들어섰다면, 그 순간 신의 심판에 대한 어구나 사악한 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늘 들리고 울렸는데,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설교를 들었다면, 회중에 길 잃은 영혼이 있다고 설교자가 단언하는 것을 꼭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의 영혼이었다. 

 

자만심의 악마 레비아탄

 

  언젠가 그가 죽어가는 형제의 침상 곁에서 기도할 때, 갑자기 자신이 그랑디에처럼 마법사가 되어 악마들에게 무고한 사람 육신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힘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문을 걸고, 자만심의 악마인 레비아탄에게 이 육신으로 들어가라 명령하고, 정욕의 악마인 이사카론못된 장난의 스피릿인 발람신성 모독의 왕인 베게모트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게, 영겁의 목전에서 마지막 중대한 행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덤벼들라 권하고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에 영혼이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수렝이 실제로 유황 냄새를 맡고 울부짖음과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한데 이게 뭐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혹은 자발적이었나?) 그가 악마들을 계속 부르면서 악마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돌연 침대에서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했다. 한데 그건 이전처럼 하나님 뜻에 복종이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며 거룩한 자비와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는 둥 공격적인 의심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횡설수설이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수렝이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내 느낌이 옳았어, 난 마법사가 된 거야!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이 외적 증거에 어떤 낯설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고무된 내적인 확신이 추가됐다.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엄격함과 (또 감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지가 마비되고 허탈 상태가 갈마들며 근육이 경련돼 침대에 붙박여 있는 오랜 시간에 그는 ‘이와 비교할 통증은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신의 분노가 거세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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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n Pierre de Caussade (1675-1751) - 프랑스의 예수회 성직자, 종교 저술가. <신의 섭리에 내맡김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그는 현재 순간은 신께서 주신 성찬이요 그것에 내맡김과 그것을 필요로 함은 신성한 상태라고 믿었다. 얼핏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듯 보이기에 그의 책은 1861년까지 출간 금지. 저자 본래 뜻에 더 합당한 버전은 1966년도에야 출간됐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서 어떤 작가들은 대승불교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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