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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01 Point Counter Point (3)
  2. 2019.05.15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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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 팜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어떤 이탈리아 운전사의 애정 무용담에 관해 아버지가 입에 올리곤 하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노인에게는 사람들이 얘기를 늘어놓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어. 하인이며 일꾼들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든. 월터는 그런 재주를 부러워했다). 

 

그 운전사 말대로라면, 어떤 여인들은 옷장과 비슷하단다. Sono come cassettone. 그 일화를 노인이 얼마나 맛깔나게 들려주곤 했던가! 옷장들이 아주 예쁠 수 있지만, 예쁜 옷장을 포옹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한데, 월터 생각에 마저리는 썩 예쁘지도 않았다). 그 운전사가 그랬다고 하지. “아니요, 좀 못생겼다 해도 다른 부류의 여인들이 더 낫습죠. 내 여자가 바로 그런 부류에요. 그녀는 거품 내는 도구, 진짜 달걀 거품기랍니다.”

그리고 노인은 쾌활하며 심술 궂고 늙은 사티로스처럼 모노클 뒤편에서 눈을 반짝였다. 뻣뻣한 옷장, 아니면 기민한 거품기, 어떤 게 더 낫겠어?

 

월터는 자신의 취향도 그 운전사와 같은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진정한’ 사랑이 무책임하고 부적절한 성생활로 무뎌질 때마다) 예쁜 옷장 같은 여인들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이론적으로 멀리서 보면, 순수성과 선함, 정제된 영성은 우러를 만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접할 때, 그런 것은 매력이 덜했다. 그리고 매력적이지 못한 누군가한테서 나오는 것은, 그게 헌신이든 듣기 좋은 찬사이든 견딜 수 없었다. 그 참을성 있고 순교자 같은 차가움 때문에 마저리를 그가 혼란스럽게 증오했으며, 동시에 돼지 같은 호색 때문에 자신을 비난했다.

 

그가 루시를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이고 수치스럽지만, 마저리가 핏기 없고 절반 죽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달리 변명도 필요 없이 즉시 합리화가 됐다. 그래도 결국엔 질책을 더 많이 했다. 그의 관능적 갈망은 저급하고 비열했다. 달걀 거품기와 서랍장이라니, 그런 분류보다 더 불쾌하고 저열한 것이 또 뭐가 있겠나? 아버지의 축축하고 육욕에 찬 웃음소리가 흉중에서 들렸다.

 

끔찍해!

 

월터의 의식적 삶은 전부 아버지와 반대로, 아버지의 흥겹고 경솔한 호색과 반대쪽을 지향해 왔다. 의식적으로 그는 늘 어머니 편에, 순수함과 정제됨과 영혼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최소한 절반이 아버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저리와 이태 동안 살면서 그는 차가운 미덕을 의식적으로 싫어하게 됐다. 그걸 의식적으로 미워했다. 그와 동시에 그런 반감이며 자기의 짐승 같은 관능적 욕망이며 루시에 대한 사랑을 수치로 여기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오오, 마저리가 그를 좀 편안하게 놔두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한사코 그에게 강요하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응답을 그만 요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그렇게 겁나게 헌신적이기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에게 우정을 줄 수 있었다. 그녀의 선함과 친절함, 충실함과 헌신 때문에 그녀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녀도 우정으로 갚아 준다면 그는 기쁠 것이야. 그러나 이 사랑은 숨 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다른 여인과 싸운다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도덕적인 차가움을 깨고 열렬한 애무로 그의 사랑을 되돌리려 했을 때, 오오, 그건 끔찍했어, 정말 끔찍했어.

 

월터의 생각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 무겁고 둔감한 성실함 때문에 그녀는 정말 따분해. 교양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것 때문에, 마저리는 좀 어리석어. 물론 그 교양은 정말 괜찮았어. 그녀는 책을 많이 읽고, 읽은 것을 다 기억했어. 그러나 읽은 것을 이해는 했을까?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온종일 말수가 없다가 가끔 꺼내는 소견, 문화적이고 진지한 소견들이란 얼마나 무거우며 유머나 이해가 얼마나 적은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외려 현명했다. 다듬지 않은 대리석에 위대한 조각상이 들어 있듯이 침묵에는 지혜와 기지가 가득 잠재해 있었다. 침묵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다.

 

 

마저리는 상대방 얘기를 공감하여 경청할 줄 알았다. 한데 그녀가 침묵을 깰 때, 대화에 꺼내는 말들은 절반이 인용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심오한 사유와 화려한 문구들을 버릇처럼 외웠기 때문이다. 침묵과 인용들 이면에 무겁고 가엾을 정도로 이해력 떨어지는 어리석음이 숨어 있음을 월터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걸 알아보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가 칼링을 떠올렸다. 술주정뱅이에다 자칭 신앙인. 미사 예복이며 성인들이며 원죄 없는 수태를 허구한 날 늘어놓지만, 정작 본인은 술병이나 끼고 사는 역겨운 변태. 그자가 그렇게 혐오스럽지 않았다면, 마저리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럼, 어떻게 됐을까? 월터가 자유로운 자신을 상상했다. 그는 동정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았을 것. 칼링이 저지른, 한 역겨운 장면 이후 마저리의 붉게 부어오른 두 눈을 월터가 떠올렸다. 더러운 짐승 같으니!

 

한데 나는 어떻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문 뒤에서 마저리가 울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칼링은 위스키 핑계라도 댔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5) 술주정뱅이 칼링과 달리 그 자신은 늘 정신 멀쩡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마저리가 울고 있다.

 

난 돌아가야 해.”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발길을 재촉해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건 자기 양심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욕망을 향한 달음질이었다.

난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해.” 그가 그녀를 너무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증오하면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담뱃가게 곁을 지나칠 때 진열장 곁에 선 사람이 갑자기 뒷걸음질 치다가 월터와 세게 부딪쳤다.

미안합니다.” 그가 기계적으로 말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둘렀다.

왜 밀고 그러쇼?” 그자가 등 뒤에서 사납게 소리쳤다. “눈은 뒀다 뭐해. 더비 경마에서 우승이라도 한 거야?”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사내애 둘이 야유하는 웃음을 사납게 터뜨렸다.

실크해트나 쓰고 다니면 다야!” 남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얄미운 마음에 계속 쫓아왔다.

제대로 대응하자면 돌아서서 그자가 준 것보다 더 후하게 되돌려줬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라면 그런 자를 말 한마디로 박살 냈을 텐데. 그러나 월터는 재빨리 벗어날 줄만 알았다. 그런 충돌을 꺼렸고 바닥 인생들을 겁냈. 사내의 욕설이 희미해졌다.

 

정말 역겨워! 그가 몸서리를 쳤다. 생각이 마저리에게 돌아갔다.

왜 합리적으로 처신하지 못할까?” 그가 중얼거렸다. “그냥 합리적으로 말이야. 뭔가 하는 일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았고, 그게 문제였다.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사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잘못이 있었다. 그녀한테서 직장 일을 빼앗고 오로지 그에게만 열중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녀는 실내장식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건 켄싱턴에 있는 기품 있고 예술적인 아마추어 실내장식 업체 가운데 하나였다. 램프 갓과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젊은 여인들의 친근한 어울림, 또 무엇보다도 사장인 콜 부인에게 쏟는 헌신 따위가 비참한 혼인 생활에 처한 마저리에게 보상이 됐다. 그녀는 칼링과 동떨어져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그건 여학생 기숙사와 비슷한 여자들 세계인데, 거기서는 의상이며 상점들에 관해 얘기하고 가십도 듣고 여학생들 표현대로 사감 선생을 열렬히 사랑하고’, 휴식 시간에는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며 예술이라는 명분에 공조한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걸 다 내팽개치라고 속삭인 사람이 바로 월터였다.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콜 부인에게 헌신하고 그녀를 감상적으로 열애하며 얻는 행복감이 마저리에게는 칼링과 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한 보상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나 칼링이 더 나빠지면서, 그와의 혼인 생활을 콜 부인도 더 이상 보완해 줄 수 없게 됐다. 월터는 그 부인이 제공할 수 없고 또 제공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을 제안했다. , 피난처와 보호와 금전적 지원.

 

게다가 월터는 사내였고, 사내란 전통적으로 사랑하게 돼 있었다. 심지어, 월터가 마저리를 두고 최종 결정 내린 것처럼, 그녀가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여자들 모임에만 자연스레 어울리는 때도 그랬다. (이것도 문학의 영향이야! 그가 예술이 인생에 행사할 수 있는 파괴적 영향에 대한 필립 퀄즈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줄기차게 말했듯이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남자였다. 다르다는 규정을 그가 그때는 듣기 좋은 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가 의아하게 여겼다. 어쨌든, 그녀는 당시 그가 여느 남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으며,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 아직 남자가 아닌 남자를 얻을 수 있었다. 월터의 설득에 넘어가고 칼링의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작업실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건 월터가 혐오하던 콜 부인을 떠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월터가 보기에, 그 부인은 여성을 괴롭히고 노예처럼 부리고 피를 빨아먹는 귀신이었다.

 

당신은 아마추어 실내용품 제작자로 일하기엔 정말 아까워요.” 그가 마저리에게 찬사를 늘어놓곤 했다. 당시에는 그녀의 지적 능력을 정말 믿었다.

그녀는 그의 문학 작업을 어떤 식으로든 돕고, 또 자신도 글을 써야 했다. 그리고 그의 영향 아래 에세이와 단편을 쓰게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썩 좋지 못했다. 처음엔 그가 격려하다가 그녀의 글들에 좀 뜨악하게 대했으며, 나중엔 아예 언급도 안 했다. 그 부자연스럽고 무익한 작업을 마저리가 곧 내팽개쳤다.

그러고 나서 그녀에겐 월터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의 존재 이유가 됐고, 그녀의 인생 전부가 기대는 초석이 됐다. 그 주춧돌이 이제 그녀 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를 좀 평온하게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월터가 생각했다.

 

그가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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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2) 

 

 

악마들&#44; 올리버 리드&#44; 켄 러셀&#44;

 

 

3

 

 

대학 졸업하던 해부터 네 해에 걸쳐 시집을 네 권 냈다. 그 배경에 깔린 비탄이며 신랄함, 냉소주의,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역설적 품위는 나중에 그가 몰입하게 되는 신비주의며 영적 삶에 대한 전조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청소년기에 겪은 세 가지 사건의 정신적 외상은 (모친이 암으로 사망, 자신의 실명 상태, 작은형의 자살 같은 육체적 고통에 노출된 경험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종종 인간 정신과 육신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단편집 <림보>도 발표했지만,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1921년 첫 번째 장편 <크롬 옐로우>. 이건 바로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저택과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눈부신 대화와 기지 넘치는 세태 비평과 냉소주의가 결합된 문체로 인해 그는 10년 어간에 가장 인기 있는 문학 활동가 축에 든다는 평판을 얻었다. 

 

20년대는 그에게 가장 생산적인 기간일 뿐 아니라 평생 창작과 사상의 정초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력 때문에 1차 대전 전선에 나가지 못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전쟁이 야기한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위기의 주된 정서는 일정하게 흐르던 시간이 단절된 느낌,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확고하고 영원한 듯 보이던 가치며 토대가 붕괴된 느낌. 전쟁은 경제와 정치, 학문, 문화 등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시대와 지나간 시대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게 설정되고, 인간과 문명에 대해 지난 시대에 다듬어진 관념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음을 많은 이들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결과, 다른 세계의 장면을 만들고, 철학이며 미학의 측면에서 새로운 현실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나온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 문화에서 1920년대는 실험 시대가 된 것. 

M. 프루스트J. 조이스의 소설, T. S. 엘리엇과 마야코프스키의 시, 피카소와 K. 말레비치의 그림, 이젠슈테인의 필름 등이 저마다 가장 중요한 존재 특성이라 본 것을 새로운 예술 언어로 이야기했다. 

 

당대 많은 영국인들처럼 헉슬리에게 새로운 역사 시대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산업 발달과 물질적 번영,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과 연관됐다. 

 

그렇다면 새 시대는 어떤 것이며, 새 시대의 가능성과 전망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의 작품들. 헉슬리는 세태 묘사와 풍자라는 전통에서 머물지 않고, 사회 근간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함께 내보였다. 

그것은 그가 20년대 사상과 관념의 미학적 전투에서 상당히 빨리 제 자리를 찾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문필은 사회생활의 일부여야 하고, 예술가의 과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능한 한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는 어떤 정치적이나 미학적 운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가 평생 접한 동아리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었다. 예를 들어, 문인 친구들 중에는 앙리 바르뷔스가 세운 <클라르테 그룹>의 멤버들, T. 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같은 모더니즘의 기둥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니타 루스 등이 있고, 또 런던 인근 블룸스버리 지역에 살던 당대 지성인, 작가, 화가들의 엘리트 그룹에도 들었다. 여기서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역사가요 전기 작가인 스트레이치 리튼,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교류했다. 

 

1928년 출간된 <연애 대위법>은 헉슬리의 가장 복잡한 소설들 중 하나. 전형적 관념 소설인 이 작품으로 헉슬리는 독일식 철학소설과는 또 다르며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지성 소설’이라는 장르의 개척자가 됐다. 

 

2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 살면서 친구 같은 선배 D. H. 로렌스와 자주 만났다. 삶에 대한 로렌스의 관점을 아주 높이 샀고, <연애 대위법>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램피언의 모델이 로렌스였다. 1930년 로렌스가 죽자 그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 나중에 전기를 쓰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기계문명이 판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로렌스가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헉슬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비판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의 본능보다는 지성으로 접근했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19세기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맹신으로 퇴행한다거나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섣부른 낙관주의로 전락하지만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 주었다. 

  

4

 

30년대 초 지중해 연안 툴롱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서 쓰고 1932년에 출간돼 헉슬리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굳혔으며 20세기 최고의 미래 소설이 된 <멋진 신세계>는 그의 다섯 번째 장편이요 첫 번째 디스토피아 소설. H. G. 웰스가 <현대 유토피아>, <사람들은 신들을 좋아해> 같은 유토피아 소설에서 과학적 낙관론을 희망차게 제시함에 대한 패러디… 

당시 널리 인기 끄는 낙관적 유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헉슬리는 소름끼치는 미래상을 제시하려 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개인 청년의 원형은 마거릿 미드의 <사아의 성>서 힌트를 얻었다. 

 

과학과 의학과 기술을 현대인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 발전에 의존하다 보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이고자 했다. 

인공 수정으로 동일한 인간을 시험관에서 대량 생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림으로써 현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향하는 관리 사회, 통제국가의 무시무시한 비극적 종말을 예언했는데… 

시험관 아기나 유전자 복제를 비롯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공학의 경이적인 성취를 우리가 목격할 때, 그의 예언이 결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연 예언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십년 전 타계한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요 문화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내놓은, 우리 시대 미디어 생태 환경에 관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 중 하나인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보게 된다.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44; 닐 포스트먼

 

「우리는 1984에 주목해 왔다. 그 해가 닥쳤지만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생각 있는 미국인들은 나직이 흥얼대며 안도했다. 
봐,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네! 테러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오웰의 악몽이 찾아들지는 않았어! 

그러나 오웰의 어두운 예언과 더불어 또 다른 예언이, 똑같이 으스스한 전망이,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바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교양인들도 자칫 간과하기 쉬운데, 헉슬리와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은 같은 게 아니었다. 오웰은 우리가 외부 폭압에 억눌릴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헉슬리가 예견하기에는… 독재자 때문에 사람들이 자율과 성숙과 역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가 내다본 것처럼… 사람들은 외려 통제받기 좋아하고 테크놀로지를 떠받들며, 그 결과 사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오웰과 헉슬리의 예언을 포스트먼이 조목조목 비교하여 결론을 낸다.

 

「오웰은 서적을 금지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서적을 금할 까닭이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왜? 왜냐하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테니. 

오웰은 우리한테서 정보를 박탈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아예 무감각하게 허투루 대할 만큼 정보가 차고 넘칠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독재자가) 진실을 우리한테 숨길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무의미한 정보의 바다에 진실이 파묻힐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우리 문화가 선택의 자유를 빼앗을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 문화가 허접한 필름과 난잡한 파티, 관능적 유희 따위로 채워져 지질해질 것을 우려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지적하듯이,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과 합리주의자들은 늘 긴장하여 독재와 폭정에 맞서면서도... “인간에게 재미와 오락에 거의 죽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지 못했다.” 

헉슬리가 또 말하길, 사람들이 <1984>에서는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통제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제공되는 즐거움에 지배된다. 
간단히 말해… 오웰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탐닉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우려했다.」   

 

닐 포스트먼은 티브이가 자잘한 즐거움인 연예오락을 주지만 교육이나 주요 이슈에 관해 의미 있는 토론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가 미국 사회의 미래라는 토론의 틀을 잡기 위해 오웰과 헉슬리의 소설을 동원한 까닭은... 현대 사회가 헉슬리의 끔찍한 예언대로 얼마나 충실하게 좇아가고 있는지에 사람들 눈길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티브이는 1906년 이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사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어.

 

(계속)  

 

관련 포스트: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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