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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루덩의 악마들의 내막, 3권, 구텐베르크 출판

 


 

  그때 파리에서는 그랑디에가 고등법원에 소를 제기하고 (다르마냑의 주선으로) 국왕을 직접 알현하게 됐다. 루이 13세가 주임신부의 권리 침해에 대한 상세한 하소에 마음이 흔들려서 정의를 낱낱이 바로잡으라고 명령했다. 

  그 며칠 뒤 티보가 파리 고등법원에 소환됐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길을 나설 수 있던 것은 그랑디에를 체포하라는 주교 명령서를 지참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이 사건을 심리했다. 모든 정황이 주임신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티보가 과장된 제스처로 주교의 체포 영장을 꺼내 재판관들에게 건넸다. 그들이 문건을 읽더니 사건 심리를 즉각 연기했다. 

  주임신부가 교회 상급자와 해명한 뒤에 다시 심리하겠소. 

  그건 주임신부 적수들의 승리였다. 

 

  그러는 동안 루덩에서는 그랑디에의 행적에 대한 공식 조사가 시작됐다. 처음엔 편견 없는 민사 담당 경찰 수뇌 루이 쇼베가 조사를 맡았다가 사건이 깨끗하지 못함을 알고 사퇴하자 바로 그, 탁월하게 편파적인 검찰관이 맡게 됐다. 그러자 그랑디에를 겨냥한 비난과 고발이 사방에서 봇물 터지듯 했다. 

 

 성 베드로 교회에서 그랑디에의 부제들 중 하나인 메샹은 주임신부가 (그런 쾌락을 위한 것치고는 분명히 차갑기만 한) 교회 바닥에서 여인들과 뒹구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고 확언했다. 또 다른 성직자 마르탱 부요 신부는 제 동료가 교회 가족 지정석에서 세리제 씨의 숙모인, 죽은 마담 드뢰와 얘기하는 것을 기둥 뒤에서 훔쳐보았다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트렌캉이 부요의 진술을 조금 고쳤다. 주임신부가 ‘앞에 언급된 귀부인과 무슨 얘기를 나눴다’고 한 처음 진술이 ‘앞에 언급된 귀부인과 대화하면서 그녀 팔꿈치를 잡았다’로 바뀌었다. 

  한데 가장 신빙성 있는 증언을 할 만한 사람들은 주임신부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즉, 느긋한 하녀들이며 부도덕한 아내들, 명랑한 과부들 그리고 필리프 트렌캉과 마들렌 드브루 등… 

 

  그랑디에가 자기 대신 라로슈포제와 ‘품위 감독관’에게 서신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다르마냑의 조언을 듣고 주교 재판에 자진 출두하기로 결심했다. 파리에서 은밀히 돌아와 사제관에서 하룻밤 보내고 이튿날 동틀 무렵 다시 말안장에 앉았다. 

  조반 먹을 때쯤 약제사가 전모를 알게 됐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는 이틀 전 루덩으로 돌아온 티보가 푸아티에로 뻗은 대로를 따라 전 속력으로 달렸다. 그는 곧장 주교 궁으로 들어가서 관계 당국자들에게 알렸다. 

  그랑디에가 지금 시내에 있는데, 자수한답시고 쇼를 벌여서 치욕적인 체포를 모면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런 계략은 어떡하든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품위 감독관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랑디에가 주교 궁으로 가려고 숙소를 나서다가 칙선변호사 입회하에 체포되어 주교 관구 감옥으로 연행됐다. 약간의 항변이 있었지만 별다른 충돌 없이.

 

  푸아티에의 주교 관구 감옥은 예하 궁전의 한 탑에 있었다. 주임신부가 여기서 간수에게 넘겨져 습기 많고 볕이 거의 들지 않는 독방에 갇혔다. 1629년 11월 15일 티보와 몸싸움 벌이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독하게 춥지만 죄수한테 따스한 옷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며칠 지나 그의 모친이 면회를 요청했지만 그마저 거부됐다. 두 주일을 끔찍이 고생하다가 라로슈포제에게 탄원서를 썼다. 

 

  「예하시여, 나는 심신의 고뇌가 천국에 이르는 참된 길이라고 언제나 믿으며 다른 이들한테 그렇게 강조하기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하의 선하심이 내 지옥행을 염려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구제하고자 갈망하여 나를 이곳에 내던지시기 전까지 나는 그 진리의 옳음을 시험해 볼 길이 전혀 없었나이다. 이곳에서 견디기 힘든 고뇌의 보름 동안 나는 이전 평안했던 사십 년 기간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습니다.」 

  이 서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자부심과 성서의 암시들로 가득하고 화려한 문장이 정성스럽게 이어졌다. 이런 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을 사자의 얼굴과 기꺼이 합쳐 놓았습니다. 달리 말해, 예하께서 보이신 온화함은 내 적수들의 가혹함과 함께 나를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했습니다. 그 적수들이야 저희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또 다른 요셉처럼 나를 파멸시키려 드는 겁니다.」

 

  이 때문에 이 죄인을 괴롭힌 증오와 적의가 기독교의 사랑으로 바뀌고 불타는 복수심은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더 맹렬한 갈망으로 대체됐고… 그리고 나사로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징벌 목적이 삶의 교정이고 두 주간 감옥 생활 끝에 그의 삶이 교정된 만큼 지체 없이 풀려나야 한다는 호소로 결론을 맺는다. 

 

  화려하고 과장된 스타일이라는 장치에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 감정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글월은 인생과 같지 않다. 기법과 행위를 관장하는 규칙이 서로 다르다. 

  우리한테는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르나 그랑디에의 서한체가 17세기 초에는 아주 자연스럽고 신실한 감정으로 보였다. 시련이 그를 신에게 더 다가들게 했다는 믿음이 진정한 것임을 의심할 근거가 우리에겐 없다. 단지, 그렇게 다시 얻은 평안도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시련의 결실을 원상태로 돌리고야 만다는 것을, 그것도 15일이 아니라 단 15분 만에 그렇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불행히도 그가 제 본성을 너무 몰랐다. 

 

  이 탄원서에 주교가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이제 주교가 다르마냑과 그의 친구인 보르도 대주교의 서신을 또 받았는데… 이 지독히 꺼림칙한 하급 사제가 그런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불쾌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점은… 

  흠, 그 친구라는 자들이 나한테, 라로슈포제 가문의 대표자한테, 학식 높은 인사한테, 학식 면에서 대주교는 내 마구간의 말보다도 못한데, 그런 그들이 나더러 교회의 어떤 법규를 따라야 한다고 감히 요구하고 나서다니! 이야말로 도저히 참을 수 없지! 그들이 주제넘게 나서지 않아도 순종하지 않는 젊은 신부를 내 다 알아서 처리할 게야! 

  주교가 죄수를 이전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다루라고 지시했다.

 

  이 힘겨운 나날에 주임신부를 찾아온 이들은 예수회 수사들뿐이었다. 그는 한때 그들의 제자였고 그들은 이제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선량한 수도사들은 영적인 위로뿐 아니라 따뜻한 양말 등속과 바깥세상의 편지들도 들고 왔다. 

  편지를 읽고 그랑디에가 알게 된 사실은… 다르마냑이 법무대신을 포섭했고, 법무대신은 티보와 관련된 사건을 루덩의 검찰관으로서 트렌캉이 다시 수사하라 지시했고, 그 뒤 티보가 다르마냑을 찾아와 화해를 제시했지만 ‘교회 대장부들’이 그건 그들 불법행위를 묵과하는 꼴이 될 터이니 어떤 합의에도 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것. 

 

  주임신부가 다시 힘을 얻어 주교에게 서한을 한 통 더 보냈다. 회답이 없었다. 세 번째 탄원서를 써 보낸 뒤 티보가 감옥으로 찾아와 법정 밖에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거부했다. 

  돈에 팔려 그를 고발한 증인 둘이 12월 초 푸아티에 법정에 나왔다. 한데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던 판사들조차 진술을 듣고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 베드로 교회 대리 신부인 메샹에 이어 드뢰 부인과 교회 가족석에 있는 그랑디에를 훔쳐봤다는 다른 성직자가 나섰다. 그들의 증언도 부그로와 세르본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거의 설득력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진술들로는 그 누구한테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라로슈포제 주교는 형평법이나 법적 절차 같이 사소한 것들 때문에 제 길을 못 갈 사람이 아니었다. 1630년 1월 3일 최종 판결이 떨어졌다. 

  그랑디에는 석 달 동안 금요일마다 빵과 물만 먹고 푸아티에 주교 관구와 루덩 시 전역에서 5년 동안 사목 활동을 금지한다. 

  이 판결은 주임신부에게 재정적 몰락과 출세의 좌절을 의미했다. 그 대신 자유로운 몸이 됐다. 이제 다시 난롯불을 쬐고 (금요일 이외엔) 맛난 음식을 목구멍에 집어넣고, 친척이며 친구들과 얘기 나누고, 자신을 그의 아내라 믿고 (극도로 조심스레!) 찾아오는 여인과 밀회하는 자유를 얻었다. 또 라로슈포제의 상급자인 보르도 대주교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랑디에가 사건을 대주교 관구로 가져가겠다는 결심을 가장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투로 밝힌 서신을 푸아티에로 보냈다. 

 

  라로슈포제가 자부심이 상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 용인할 수 없는 무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교회법 같은 추잡한 것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이냐?!  교회법은 아무리 직급 낮은 성직자에게도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랑디에가 대주교에게 호소할 것이라는 소식이 트렌캉과 다른 음모자들에게 마뜩할 리 만무했다. 대주교는 다르마냑과 우의가 두텁고 라로슈포제를 싫어했다. 호소가 먹혀들 수 있다고 겁낼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루덩 시가 영원히 주임신부 수중에 들어간다는 뜻이리라. 그 호소가 먹혀들지 못하게 하려고 그랑디에의 적수들도 항소했다. 더 상급 교회법정이 아니라 파리 고등법원에. 

 

  푸아티에 주교와 그의 품위 감독관은 교회재판관들로서 금식이나 (극단적인 경우) 파문 같은 영적 징벌만 부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 법정은 교수형도, 사지절단형도, 낙형도, 강제노동도 선고할 수 없었다. 이런 형벌은 다 세속 법정의 사법권에 속했다. 하지만 그랑디에가 교회재판에서 유죄로 선고된 만큼 지상 권력 앞에서도 유죄가 되기에 충분해! 어쨌든 상소가 제출됐고, 재판이 돌아오는 8월 말로 잡혔다. 

 

  이번에는 주임신부가 노심초사하게 됐다. 불과 6년 전 ‘영적 인세스트[각주:1]와 신성 모독적인 방탕’ 때문에 산 채로 화형당한 시골 주임신부 르네 소피에 사건이 검찰관만큼이나 그의 기억에도 아주 생생했다. 그랑디에가 그해 봄과 여름을 다르마냑의 교외 저택에서 보냈는데 다르마냑이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소피에 사건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 그는 범죄 현장에서 체포된 데다가 법정에 친구들도 없었잖소. 반면에 이 경우에는 증거가 전혀 없고 법무대신이 도움을 주거나 최소한 호의적인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오. 그러니 다 잘 될 게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사건을 심리하게 됐을 때 판사들은 그랑디에의 적수들이 가장 우려하던 결정을 내렸다. 

  심리를 푸아티에의 형사 담당 경찰 수뇌가 맡아 재개하라. 

  그건 거기 판사들이 편견 없으며, 증인들은 가장 면밀한 반대심문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망이 하도 우려스럽다 보니까 증인 중 하나는 조용히 사라지는 쪽을 택했고... <2편 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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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우울한 침묵이 오래 이어지다가 참사회 위원 미뇽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희망이 있어, 그럴 듯한 스캔들을 만드는 거지. 그자를 현장에서 붙잡을 수 있게끔 어떡하든 상황을 조장하는 게요. 그 죽은 양조업자의 과부하고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약제사가 우울한 표정으로 알렸다. 

  그쪽에는 여러분이 좋아할 만한 정보가 없어요. 여편네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 그 집 하녀는 매수가 안 되고… 그렇잖아도 내가 간밤에 덧창 틈으로 동정을 살피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누군가가 이층 창문에서 철철 넘치는 요강을 쏟아 붓지 뭐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주임신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평소처럼 제 비즈니스와 쾌락을 즐기며 나다녔다. 곧 아주 이상한 소문이 약제사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임신부가 마드무아젤 드브루와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진다는군. 

  아, 그 고상하고 독실한 체하기로 유명한 마들렌하고? 

 

  마들렌은 르네 드브루의 세 딸 가운데 둘째이고, 르네 드브루는 재산이 넉넉한데다가 귀족이며 지역 최고 가문들과 혈연관계가 두터웠다. 마들렌의 두 자매는 이미 시집을 갔다. 하나는 내과의한테, 또 하나는 지방 대지주한테. 그러나 서른이 다 된 마들렌은 미혼으로 자유로이 살았다. 구혼자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 퇴짜를 놓았다. 집에 남아서 늙은 부모를 보살피며 자신만의 관심사를 생각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그녀는 신중하고 초연한 태도 아래 강한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하고 수수께끼 같은 젊은 여인 축에 들었다. 나이 든 세대는 그녀를 칭찬하지만 동갑나기와 후배 중에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까칠하고 젠체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또 자기네 요란한 놀이에서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흥을 깨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나치게 독실했다. 

  종교야 아주 좋지, 하지만 사생활의 신성함을 침범당해서야 되겠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툭하면 성찬례를 받고 하루걸러 고해를 하고 성모 상 앞에서 몇 시간씩이나 무릎 꿇다니 말이야. 

  아냐,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건 너무 심해. 

  그들이 그녀를 멀리했다. 그건 마들렌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녀 부친이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암에 걸렸다. 노부인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병치레하는 동안 그랑디에가 자주 찾아왔다. 배부른 줄 모르는 과부와 검찰관 딸의 일만으로도 정신없지만, 가엾은 여인에게 종교적 위안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죽음의 침상에서 드부르 부인은 딸한테 그의 조언을 잘 따르라고 당부했다. 주임신부가 마들렌의 물질적, 영적 문제들을 제 일처럼 잘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다. 나중에 약속을 지켰다. 비록 자신의 특유한 방식으로 했지만.

 

  모친이 죽고 한동안 마들렌은 세속 인연을 다 끊고 수녀원에 들어가려 했다. 그런 생각을 영적 조언자한테 밝히면서 상담했을 때, 그가 그 계획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랑디에가 강력히 주장했다. 

  수녀원 안보다 바깥에서 당신은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오. 우르술라회나 카르멜회의 수녀가 되면 자기 재능을 감추는 꼴이 될 게요. 당신 자리는 여기, 루덩에 있소. 당신 소명은 썩기 쉬운 허영심만을 생각하는 멍청한 처녀들한테 반짝이는 지혜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오. 

 

  그가 청산유수로 말했고, 그 말에는 신성한 영력이 있었다. 두 눈에서 불길이 일고, 내면의 열기와 영감으로 얼굴이 환히 빛나는 듯했다. 마들렌이 생각했다. 이분은 사도처럼 보여, 천사처럼 보여. 이 말이 다 옳아,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녀가 양친 모시고 살던 집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이 아주 어둡고 쓸쓸해 보였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친구인 (거의 유일한 친구인) 프랑수아즈 그랑디에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사제관에서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둘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옷을 깁거나 성모나 성인들을 위해 화려한 수를 놓으며 앉아 있는 자리에 때때로 그랑디에가 끼어들었다.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 세상이 갑자기 더 환해지고 신성한 의미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으며, 마들렌 얼굴이 행복에 겨워 장밋빛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랑디에가 제 그물에 걸려들었다. 그의 전략은, 그건 바로 노련한 유혹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인데, 겉으로는 냉담한 척하면서 상대 마음에 불을 지피고, 그걸 정점까지 끌어올린 뒤 결국 제 교활함의 결실을 따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캠페인이 진척되면서 또 뭔가가 잘못 되고 있었다. 혹은, 뭔가가 잘 되고 있었다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저 관능적 만족이나 또 하나의 순진한 제물에게서 거두는 헛된 승리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진실한 감정이 그를 끌어당긴 것이다. 

  분방한 기질의 소유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로 바뀌었다. 이건 도덕적 성장에서 중요한 행보. 하지만 가톨릭교회 성직자에게 혼인이란 윤리와 신학과 교회와 사회라는 측면에서 숱한 곤경을 거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가 성직자의 독신주의에 관한 소론을 쓴 이유는 바로 그런 곤경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나기 위함이었다. 자신을 부도덕한 이단자라 여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서도 강력한 욕망으로 생긴 행동 방침을 단념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 충동이 본질적으로 좋으며 더 높고 더 풍성한 삶을 향한 것이라 인식될 때면 특히 더 그렇다

  바로 이런 면에서, 특정 시대와 지역에서 유행하는 철학 용어들을 동원하여 비정통적 행위를 당대 세태에 맞추면서 충동이나 본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흥미진진한 문학 작품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의 소논문은 이런 감동적인 옹호 장르에서 상당히 특이한 모델이었다. 그는 마들렌 드브루를 사랑하며 이 감정에 추한 게 전혀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의 규율로 보자면, 가장 행복한 육적 사랑마저도 악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그런 규율이 축자적으로 해석돼서는 안 되며, 자신이 불혼 서약을 하면서도 그걸 꼭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거를 찾아내야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확신시키는 논거를 찾기란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한텐 식은 죽 먹기. 그에게는 제가 쓴 소논문의 논리가 참으로 그럴듯해 보였다. 

 

  더욱 놀랍게도, 그런 논리가 마들렌이 보기에도 전혀 흠이 없었다. 종교적 성향에 지나치게 기울고 신념이 아니라 습관과 기질에서 정조를 지키는 그녀는 교회 법규를 지상명령으로 간주했기에 순결 깨는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면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본성에 어울리는 열정으로. 가슴에 그런 이유가 있는 마당에 그랑디에가 불혼 서약이 절대적인 게 아니며 성직자도 혼인할 수 있다고 입증하자 그 말을 믿었다. 

  만약 간통이 아니라 교회가 축복하는 혼인으로 사랑하는 이와 맺어졌다면 그녀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것이 그녀의 의무였을 터이다. 사랑의 논리가 완벽했다. 연인이 쓴 소논문의 윤리적, 신학적 논거가 마들렌에게는 아주 미덥게 보였다.

 

  그랑디에는 드브루 부인한테 한 약속도 지켰다. 즉, 언젠가 밤에 어둠침침하고 메아리만 울리는 교회당에서 자신이 후견을 맡은 처녀와 혼례를 치른 것.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는가? 

  성직자로서 그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이제 신랑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그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성직자 역할로 돌아온 그가 축사를 읊조리고 다시 신랑으로 돌아가서 그 축사를 무릎 꺾고 받았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의식이었다. 법과 관습과 교회와 국가에 개의치 않고, 그들은 예식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그러니 하나님 눈에도 그 혼인이 적법한 것이라 확신했다.[각주:1]

 

그랑디에 신부와 마들렌의 혼인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사람들 눈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루덩의 선량한 주민들 관점에서 마들렌은 주임신부의 또 다른 내연녀일 뿐이었다. 

  순진하고 얌전한 듯싶지만 사실은 sainte nitouche[각주:2] 였던 거야. 

  숙녀인 체했지만 매춘부라는 게 금방 드러났어. 

  법의 걸친 저 프리아포스[각주:3]에게, 비레타 쓴 숫염소에게, 가장 몰염치한 방식으로 제 몸뚱이를 내준 거지! 

 

  아담의 약제용 악어 아래 저녁마다 모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노가 가장 크고 원한이... <2편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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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1560년 푸아티에 지방의 위그노 교회 회의록을 보면, 성직자들이 내연녀와 몰래 혼인하는 일이 아주 잦았다. 이때 여자가 칼뱅파 신자이면, 교회의 중대한 문제가 됐다. - 저자 주. [본문으로]
  2. ‘성녀 니뚜슈’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관용적 표현을 의인화한 것. 직역하면, ‘남자를 멀리하는 성녀’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마치 성녀라도 되는 듯이 굴며 남자와 손가락만 스쳐도 큰 봉변당한 양 호들갑 떠는 여자를 놀리는 데 쓰는 표현. [본문으로]
  3. priapus - 그리스, 로마 전설에서 남근으로 표시되는 풍요의 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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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4)

 

 

7

 

 

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있지요. 한 수녀원 수녀들이 모두 악마에 들씌웠는데, 이건 협잡과 히스테리, 음모로 시작되어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오. 이 사건에는 또 당대 가장 경건한 성직자에 속하는 수렝 수사가 등장하여 원장수녀 잔느한테서 퇴마 작업을 합니다. 사실, 마귀 들렸다는 점 때문에 명성을 누린 이 원장수녀가 모든 재앙의 주범입니다. 

루덩 수녀원의 잔느 수녀원장과 자매들


이 여인에게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려고 고군분투하던 중에 수렝 수사가 외려 심리적 질환에 감염됐어요. 즉,
악마들에 사로잡혀 거의 광인 같은 세월을 이십 년 넘게 보냈는데, 그런 광기 속에서도 고결한 성품과 영적 투쟁 덕분에 결국 제 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면서 총체적 인식(지각)과 더불어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해 당대 가장 의미 있는 저술을 몇 편 내놓았어요. 

 

잔느의 경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이모저모로 과시하고 관상 경지에 이른 성녀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찬탄과 사랑과 경배까지 받으며 살다가 종내에는 명성과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귀신들림과 엑소시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 마법사로 낙인찍힌 신부를 화형으로 몰아간 사법 살인,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미치광이 취급받는 수도사의 면면 등이 죄다 아주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원장수녀와 수렝 수사의 성격이 흥미진진하답니다.」 

 

이건 헉슬리가 1942년 7월 런던에 있는 발행인에게 보낸 편지.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마귀 들린 여인들,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권력과 엑소시스트들, 그들 편에 선 재판관들, 마법사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한 성직자. 

 

작가가 역사의 특별한 사건을 대하면서 (오늘날에도 응당 통용되는) 다양한 질문을 상정하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한 각종 문헌의 방대함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 결과, 교리며 신앙, 신비주의, 영성, 초자연적 현상, 심리학, 정신의학,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시대, 휴머니티 등이 담긴 역사 탐방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된다. 

 

엑소시즘을 시행하는 수사들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성 바깥에 있다. 하지만 헉슬리 같은 문필가가 구상한 세계를 그저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 어떤 사건이나 관점을 읽는 이가 수긍하게끔 보이고자 하는 경우… 예술적 실제의 과학적 이면은 미학적 구상의 토대가 된다.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학적 구성은 1930년대 이후 명료한 예술적 투영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영국에 거주하던 때 발표한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정연한데 비해 미국 체류 시기 작품들이 문학적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후기에 나온 픽션이며 에세이들이 더 독특한 맛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과잉 정보’와 ‘교훈적 요소’ 같은 것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섭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의 혈관에 과학과 문학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존재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겪는 공포에서, 미래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평생 숙고했으며, 그 숙고의 결과를 카프카나 조이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을 무엇보다도 지성인으로 내보였다.

그런 측면 때문인가, 자신은 줄거리를 쉽게 궁리하고 살아 있는 형상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처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했다. 그것도,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심리학, 초심리학, 의학, 정신병학, 정신약리학 등의 전문적 심포지엄과 학술 대회들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전문가들 못지않게 연구하고 중시한 심리학, 의학, 생물학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귀신들림과 ‘마녀 사냥’이라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상존한다 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분석한 <루덩의 악마들> 같은 독창적 논픽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과 과학의 공존을 추구했다. 

 

<루덩의 악마들>이 아이디어 면에서 1961년 미셸 푸코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의 개념을 앞섰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이들에겐 헉슬리의 이 텍스트가 술술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갈구한다면, 웬만큼 고생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말랑말랑하여 접하기는 쉽지만 남는 게 별로 없는 글이 있는 반면에, 뭔가 묵직한 게 있어 보이는데 파고들기 쉽지 않은 글도 있다. 헉슬리가 인생 후반에 픽션보다는 에세이와 논픽션에 더 치중한 까닭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그에게 기존의 문학 장르 개념과 원칙은 외려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 하나, 독자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깊숙이 탐구하게끔 단초를 제공하자는 것

 

마지막 장편 <섬>에서 픽션이 철학적 에세이며 사회적 비평과 상당히 혼재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루덩의 악마들>에서 그가 동원한 문장들은 거의 시적 수준이다. 압축적이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 간명함이라는 미덕은 그 본연의 목적 달성 이외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선사하지 않는가. (번역문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것이 또 언어 차이에서 비롯되는 번역 한계이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 그 생각의 논거로 각종 고전의 든든한 인용, 거기서 나오는 설득력, 우아한 문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적 스타일, 무엇보다도, 달변이나 수사적 효과와는 상관없이 진솔하고 정직한 토로…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적 일화에 대한 논픽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일방의 입장과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아니, 상호 대립적인 해석을 전부 끄집어내고 소개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역사가요 스토리텔러, 철학자, 사회비평가, 조사 연구자로서 번쩍이는 재능이 여기 다 녹아 있다. 그것도, 우아하고 알기 쉽게.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이며 사물의 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지적, 물리적 유기체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면밀하게 탐구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헉슬리의 박식과 기지와 혜안이 (우리 한국에서도) 공공 자산이 될지 여부는 독자들한테 달린 게 아닌가. 진정한 재능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법. 

 

8

 

삼백 년이 훨씬 지나 케케묵은 사건에 작가는 왜 주목했던가? 

사실, 헉슬리 이전에도 ‘수녀들의 집단 광란’과 이를 빙자한 마녀 재판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눈길 돌리고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The History of the Devils of Loudun&#44; Volumes 1-3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작가들이며 줄 미슐레를 비롯한 역사가들, 샤르코 같은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연구자들이 말이다. (‘이야기 역사’라는 틀에서 볼 때, 뒤마가 전통적 이야기체로 썼다면 헉슬리는 이 책에서 현대적 이야기체를 동원했다 하겠다.) 

게다가 1980년 <루덩의 마귀 들림>이라는 책을 내놓은 프랑스 역사가요 문화학자 미셸 세르토처럼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왜?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쓰고 내던 때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잔학무도 이후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세계주의와 투쟁’이라 불린 부끄러운 캠페인이 펼쳐졌다. 즉, 강력한 징벌 기계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권력은 대중의 의식을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로 감염시키고자 기를 썼다. 

또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매카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해 정점에 이르면서 모든 것이 알 만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전됐다. 즉, 불온사상 소유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특위에 소환되고 체포되고 숙청되고…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작가로 하여금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를, 또 그 광기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유도한 엑소시즘과 잔인한 고문과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만행을… 한데, 알고 보니, 그 본질에 악마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성적 억압과 종교적 과대망상을 이용해 다중을 조종한 정치적 술책과 박해였던 것일 뿐. 

 

대화와 관용과 공존 대신 음모와 조작과 선동과 탄압이 난무하는 사회는

집단 순응적 사고에 물들고 집단 광기에 빠지기 쉽다. 

루덩에서 벌어진 맹신과 증오와 폭압의 장면들 이후 삼백여 년이 지났건만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헉슬리는 절감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과 자기기만에 굴하기를 거부한 그가 볼 때… 20세기의 독재자와 독재 권력과 선동가들은 교회의 수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외상을 입는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세와 근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마법사와 그 고객을 20세기 ‘공공의 적’처럼 대했다. 즉,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스탈린 시대에 자본주의자들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코뮤니스트와 그 동조자들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외국 열강의 앞잡이 취급을 당했으니, 아무리 좋게 봐도 반애국주의자요 최악의 경우엔 매국노, 이단자, 인민의 적이었다. 

지난 시대 이 극히 추상적인 퀴슬링 부류에게 부과된 형벌이 죽음이었듯이, 현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세속적 악마 숭배자들을 기다리는 형벌도 죽음인데… 이들을 어떤 나라들에서는 코뮤니스트(빨갱이)라 부르고 또 어떤 나라들에서는 반동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뒤돌아보면, 종교의 모든 폐해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아도 무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 확신에 찬 유물론자들이 값싸게 날림으로 내놓은 이상을 절대자라도 되는 양 숭배할 태세가 돼 있으며, 열렬한 휴머니스트들이 사탄 신봉자들을 몰살하는 종교재판관의 열정으로 자기네 적들을 박해할 수 있음도 우리는 본다. 

그런 행동 패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인간의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오래 됐다. 우리 시대에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은 선조들처럼 행동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네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이론들을 도그마로 바꾸고, 자기네 내규를 제 1원리로 격상시키고, 자기네 정치 보스들을 신으로 추앙하고, 자기네한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악의 화신이라 몰아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맹신적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은 가장 추악한 작업에 탐닉할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도 맑은 양심을 간직하며 지고지순하게 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다가 작금의 믿음과 신조가 낡아져 다시 터무니없어 보이게 되면 새로운 추세가 만들어질 터이고, 그리하여 태고의 광기가 적법성이네 이상주의네 진짜 종교네 하는 상습적인 가면을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루덩의 집단 광란 사건 이후 사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헉슬리 시대 이후 육십여 년 지난 지금, 사람들과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앞에 언급한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들이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이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폭압과 광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이나 매카시즘 따위 철 지나고 위험한 유행에서,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것도, 모든 근거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누가 귀신들린 수녀들이며, 누가 그랑디에 신부이며, 누가 리슐리외 같은 절대 권력이고 누가 그 권력의 앞잡이이고 엑소시스트들이며, 누가 몇 푼에 팔려 양심을 속이며 위증하는 자들이고, 누가 고용된 판사들이며 누가 사법살인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며, 누가 엑소시즘과 화형에 희희낙락하거나 내심 분개하는 군중인지… 

우리 사회 적지 않은 현상과 사건에도 거의 에누리 없이 대입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메아리요 교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심하거나 게을러서 잘 모르거나 둔감할 뿐이지.)

「우리한테, 근본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악이나 경제적 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증주의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악’이라 부르기 좋아하니까) 그 근본악이 오늘날에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라 어떤 증오에 빠진 계급이나 민족한테서 추종자들을 찾는다. 사회적 증오의 인과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렇다 하여 증오와 불공정이 더 줄어들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헉슬리의 이 이야기를 그저 오래 전 사건들의 파노라마로 치부하고 만다면, 그건 더 큰 메시지를 놓치는 꼴이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헉슬리의 이 스토리를 영국 극작가 존 화이트닝이 1961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영국 영화감독 켄 러셀이 1971년 <악마들>이라는 충격적인 필름으로 선보인 것도,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1972년 <루덩의 악마들>이라는 오페라로 구성했으며 유럽 극장들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다 그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오페라는 동영상으로 다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라든가 바탕에서 헉슬리가 호소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르마즈드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다른 동료들을 악의 원리인 아리만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시대의 악마주의에, 극악무도한 행위에 승리를 안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악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악이 세상에 더 횡행하게끔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문에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죄보다는 원덕(신테레시스)에 더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 

 

(끝)

(루덩의 악마들 1편 1)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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