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덩의 악마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3-2편

Chimin303 2019. 7. 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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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표지

 


 

3-2  

 

  과거와 현재 사람들의 삶과 행위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곰곰이 생각한다면, 자아확인 충동 못지않게 자기초월 충동도 아주 강하게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의 아들들은 늘 자아를 더 날카롭게 느껴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보기도 갈망했다. 그것도, 아주 종종 거역할 수 없이 맹렬한 기세로! 한마디로, 자기 껍질을 뚫고 나와서 우리 개개인을 다 가둬 놓고 있는 그 작은 섬 우주의 경계를 넘어 보고 싶어 한다. 

 

  자기초월이라는 이 갈망은 육체나 정신의 고통에서 벗어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아픔이 자기초월 갈망을 자극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게 아니라면 (정신의학 용어로) ‘생활에 뛰어나게 잘 적응된’ 건강하고 성공한 개개인들은 이런 충동을 결코 못 느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가! 자연과 운명의 여신한테서 재능과 재산을 상당히 많이 부여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른바 ‘뛰어난 적응’의 선고로써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역겨운 자신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려는 열망과 자아에 대해 두려움 품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이 선고에서 벗어나려면 최고 심판에 청원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비참한 사람들 못지않게 (이 세상 기준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도 누구든 <무지의 구름>[각주:1] 작자가 ‘자기 존재를 낱낱이 알고 느낌’이라 정의한 상태에 갑작스럽거나 점차적으로 이를 수 있다. 이 번뜩이는 자아 인식은 단절된 에고를 넘어서려고 몸부림치는 소망을 낳는다

 

  이에 대해 홉킨스는 이렇게 적는다. 

 

나는 쓰라림이요, 나는 가슴앓이. 

하나님 크신 뜻은 내게 더 쓴 것을 맛보게 하실 터. 

내 경험은 내 것이었어. 

내 안에 뼈가 서고 살이 차고 

저주받은 자들을 채우는 피가 있구나. 

가장 이기적인 영은 둔한 반죽덩어리를 산패케 하노니. 

보라, 길 잃은 자들은 이와 같으며 

그들 천벌은 나와 같은 꼴이 되는 것, 

그들 역시 자신을 준엄하게 심판하누나. 

단지, 좀 더 가혹하게.[각주:2]

 

  제 행위를 두고 자신을 심판하는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선고받은 사람들. 홉킨스 식으로 산다는 것 역시 아주 엄중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을 심판한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일상생활은 바로 부분적 저주인 것. 우리네 지각과 의식은 대체로 둔하지만 때론 날카로워질 때도 있어서, 그때 사람은 자신의 육적 존재가 볼품없다는 것을 낱낱이 인식하게 된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슬픔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알고 느끼는 사람한테 슬픔은 더 강하다. 이에 비해 다른 슬픔이란 죄다 진실함의 문제일 뿐.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인지만이 아니라 누구인지도 알고 느끼는 사람은 진정 슬퍼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 아직 전혀 모르기에, 동정을 살 만하다. 진정한 슬픔은 죄업뿐 아니라 그 후과인 고통에서도 영혼을 정화한다. 이 슬픔 덕분에 영혼은 자신의 존재를 다 알고 느끼는 사람한테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Gerard Manley Hopkins 제라드 홉킨스 1844-1889

 

  우리가 자기초월 충동을 겪는 까닭은 우리 의식이 무시함에도 불구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개별적 지식의 바탕은 모든 지식과 존재의 근간과 동일하다는 점을 우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뭔가가) 알고 있다. 또 (한시적 관점을 얻는 마음인) 아트만이 (영원한 본질에 있는 마음인) 브라만과 불가분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범아일여

  그래,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근원적 사실을 묘사하는 여러 교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해도, 혹은 어쩌다 듣긴 하지만 허튼소리라 간주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만큼은 알고 있다.

 

  또 우리는 그런 교리들의 필연적인 결과도 알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네 존재의 최종 목적과 도달점이 우리 안에 하나님 자리를 만드는 것이요, 그 근간이 우리 의식 표면으로 나올 수 있게끔 비켜서는 것이며,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 하지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있다” 하고 말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죽는’ 것이다. 

  이 놀라운 에고가 그 자체를 초월할 때, 진정한 자아는 자유롭게 되어 유한한 의식에서도 그 자체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우리네 경험 세계에서 갖가지 자잘한 것들이 그 자체에 영원하고 무한한 성질을 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이요 깨달음이요 지복직관이며, 이 덕분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진정한 빛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납득되는 것이다. 탐욕과 추잡함으로 치장된 에고에 의해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온갖 피조물의 일부라는 근원적 사실 동시에 개별적으로 인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유한한 것과 분리된 절대적 신성을 받아 외면화되고 객관화되기를 종교는 요구한다

  이와 함께 절대적 근간이 우리네 의식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게끔 비켜서야 하는 근원적 책무가 믿음의 틀 안에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의무로 변한다. 

 

  바로 이 두 가지 독자적인 명령으로부터 각 종교는 교리와 묵상 이론과 상징, 의식, 종규와 가르침 등을 이끌어낸다. 종규에 순응하고 매개자인 성직자를 존경하고 의식을 거행하고 교리를 믿고 유한한 것 저편에 있는 ‘외부의’ 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뜻에 힘입어 구원 얻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한데 그들이 근원적 사실을 알게 되는 깨달음을 얻을지는… 그것은 그저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뭔가에 좌우된다. 

  개개인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버리도록 돕는다면 종교는 응당 깨달음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깨달음의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공포와 협량, 의분, 기업애국주의, 십자군 식의 증오 같은 감정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며, 또 어떤 신학적 개념들과 어떤 신성한 단어들만 중언부언할 때, 그렇다. 

 

  근원적 사실과 근원적 책무는 모든 주요 종교의 근본적 고백에서 대체로 비슷한 표현법을 지닌다. 깨달음을 우리는 기독신학 용어로 영혼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합일함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동시에 합일하는 것. 즉,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근간과 합일이요, 인간 의식에서 그 근간의 명료함과 합일이요, 미지의 것을 기지의 것과 이어주는 영과의 합일인 것이다

 

  삼위 가운데 다른 두 위격을 배제한 채 어떤 한 위격하고만 합일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오로지 성부하고만 합일됨은 무아지경에서 그 근간의 영원한 본질을 알도록 해 주지만, 현세에서 그 근간의 명료함을 알게 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해방되고 깨닫는 경험은... 유한한 시간 안에서 영원성을 겪는 것이요 다양성에서 비이원적인 것을 체험함이다. 

 

  대승불교 전통에 의하면 현세를 잊게 하는, 소승불교 스라바카[각주:3]의 무아지경이 보살한테는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의 장애물이다. 서구에서는 교회가 숙고 끝에 정적주의를 비판하게 되고 탄압과 박해가 이어졌다. 동양에서 스라바카는 탄압받지 않았다. 그저 옳지 않은 길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마조도일 선사[각주:4]는 이렇게 말한다. 

 

  “스라바카는 이치를 알지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도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인드 자체는 단계며 인과관계며 상상을 모른다는 점을 스라바카는 이해하지 못한다. 엄한 규율을 통해 그는 설정된 결과를 달성하고 아주 많은 영겁 동안 공삼매[각주:5]에 든다. 자신의 길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했을지라도 스라바카는 옳은 궤도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공삼매에 드는 것이 보리살타의 관점에서는 지옥 고통을 겪는 것과 비슷하다. 스라바카는 자신을 공에 파묻으며, 그 어리석은 묵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에겐 부처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직관이 없으니까.” 

 

  성부 하나만 아는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즉 비이원적 무한성을 명시하는 다양성과 영원 속에 있는 한시적 질서를, 알게 하지 못한다. 만약 세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됐다면, 이는 영혼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며 성령과도 합일됐다는 뜻이다. 

 

  성자와 합일은 사심 없는 사랑에 충실함을 뜻한다. 성령과 합일은 사심 없는 사랑을 위해 개인이 자신을 초월하는, 즉 자신의 ‘나’를 거부하는, 수단이자 그 결실이다. 이 두 가지 합일 덕분에 우리는 매 순간 저도 모르게 기뻐함을, 즉 성부와 합일됐음을, 인식할 수 있다. 

 

  만약 혹자가 성자하고만 합일하고자 안달한다면, 달리 말해, 역사적 중재자의 인성에만 집중한다면, 믿음이... 외적으로는 이른바 ‘선행’을 좇으며 내적으로는 병적인 환영과 환상, 히스테릭한 감정에 매달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기억이나 상상에 있는 인물 하나를 향한, 선행과 이미지화와 느낌은 그 무엇도 그 자체로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해방과 깨달음에 관한 한 그것들의 가치는 순전히 방편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 그것들은 무욕으로 가는 방편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방편일지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하거나 환영을 보거나 느낌을 맛보는 개인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늘 제 영혼에 깃들인, 신성한 근간을 인식하게끔 돕는다. 

 

  선행과 이미지화와 느낌 믿음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한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교리 일습을 믿는다는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공덕으로써 분명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만물의 확고한 질서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 인성과 신성에 대한 가르침으로서의 믿음, 또 인지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조만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하는 작업가설로서의 믿음을 말한다

 

  불가지란 우리 존재의 신성한 근간에 고유한 것일 뿐 아니라, 이 근간과 우리네 일상 인식 사이에 있는 많은 현상에도 정상적인 속성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각주:6] 예를 들어, ESP[각주:7]나 예지력을 시험하는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남의 생각을 짐작하는 과정은 그 짐작이 옳을지 아닐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저 몇 퍼센트나 옳게 알아맞혔고 틀렸는지 통계로 결정된다. 

  초감각적 지각을 실험실에서 시험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진지한 상황에서는 늘 그렇지 않다. 많은 인증된 기록을 보면 텔레파시와 미래 투시가 동시에 벌어지고, 이때 당사자는 그 추이를 알고 있으며 자신이 얻은 정보가 정확하다고 확신하는 게 분명하다. 

 

  영적 분야에서도 종교적 번뜩임 같은 현상의 기록을 심심찮게 본다. 예기치 않은 직관의 은혜 덕분에 미지의 것이 예지자 앞에 나타난다. 그 계시의 진실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고도의 무욕 상태에 들어선 이들은 이런 직관에 친숙해진다. 

 

  선행을 통해 성자와 합일하고 계시에 온유함으로써 성령과 합일하면, 성부와도 의식적이고 변모되는 합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합일 상태에서 사물과 현상은... 들뜨고 과장된 자아의 프리즘을 통해 감지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달리 말해, 최종 정체성에서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지각)된다

 

  성령하고만 합일함은… 세상을 다 잊는 무아지경에서 성부하고만 합일함이나 외적 선행이며 내적 이미지화와 느낌을 통해 성자하고만 합일함 못지않게, 깨달음과 해방을 얻기에는 불충분하다. 

  다른 합일을 배제하고 성령과 합일에만 몰두하는 곳에서는 밀교나 비술 같은 사고방식과 영매며 과민증 소지자의 행동양식이 보인다. 

  영적 과민증 소지자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인식하는 비결을 타고났거나 획득한 사람이다. 한데 그 무의식 수준에서 육화된 정신은 개체성을 상실하고 영매와 결합되어 깊은 심리 안에 있게 된다. 이 깊숙한 심리 안에서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현상과 과정이 많이 벌어지는데, 그것들의 경계는 흐릿하고 지워져서 영역들이 종종 교차하거나 하나로 뒤섞인다. 이 구체화된 것들 중에는 다른 육화된 정신들의 아우라가 있고, 신체기관의 물리적 죽음보다 더 영원한 ‘심령 현상 요소들’이 있다. 또 고통과 기쁨과 둘도 없는 개체성이 만들어낸 형상들도 있다. 

 

  끝으로 이 구체화된 것들 중 또 다른 일부는 비인간적인 실체로서, 선을 행하거나 악의가 있거나 아니면 우리 본성에 낯선 것일 수 있다. 영혼을 성령하고만 합일하려 드는 사람들은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이 선행을 통해 성자와 합일하라는 외침을 무시한다면... 만약 인간 삶의 궁극적 끝은 우리 존재가 들어 있는 성부를 앎으로써 자유를 얻고 변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그들은 원하는 일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성령과 합일함이 없으며 그저 심령 세계의 다른 유령들하고 뒤섞임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령 세계의 대다수 거주자들은 우리보다 깨달음에 더 가깝지 않다. 또 몇몇은 가장 불투명한 인간 존재들보다도 정신적 광명에 사실상 더 다가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영혼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되고자 원하는 사람이 아닌 듯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영혼이 슬퍼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를 가두는 이 에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갈망이 불같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자기초월은… 무욕과 또 계시에 대한 온유함을 (달리 말해, 성자며 성령과 합일을) 거쳐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늘 우리네 진정한 안식처가 있는 성부와 합일함이라는 인식으로 들어서는 데 있다. 

 

  그러나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자기초월을 달성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올라가는 길이 힘들다 하여 단념한 이들한테는 다른 덜 힘든 대안들이 있다. 자기초월이 꼭 위로만 향한 것은 절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 경우 그것은 개인의 수준보다 낮은 상태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수평으로 폭을 넓히는 것인데, 이때 에고는 고양되지는 않고 그저 본질을 바꿀 뿐이다

  우리는 파멸적인 에고이즘으로 집단 추락하는 충격을 완화하려고 늘 발버둥치고 있다. 어떻게? 짐승 상태며 광기에 개인적으로 빠짐으로써. 혹은 예술이나 학문, 정치에 관심 돌리고 일이나 취미에 몰두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미덥게 자신을 분산함으로써. 

 

  이런 것이 다 상향적 자기초월의 미흡한 대안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신의 은총 대신 인간적이거나 인간 수준 이하의 대용물을 찾으려는 시도이며, 이런 시도는 아무리 좋아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 재앙에 가깝다.[각주:8] 

(3-3편 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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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 1375년경 익명의 수도사가 중부 잉글랜드 언어로 쓴 영적 생활의 지침. 관상과 기도를 신께 이르는 길로 묘사. 20세기에 와서 지식인들을 비롯해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본문으로]
  2. 홉킨스의 시 I wake and feel the fell of dark, not day의 후반부. 홉킨스 (Hopkins Gerard Manley, 1844-1889) - 잉글랜드의 시인, 예수회 성직자. 20세기 영문학에서 최고의 시인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성직과 작시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본문으로]
  3. Sravaka - 부처의 목소리를 듣고 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 소승불교에서 첫 단계의 구도자. [본문으로]
  4. 馬祖道一 (Ma-tsu Tao-i, 709-788) - 중국 당나라 선종 대사. [본문으로]
  5. 空三昧 - 삼삼매의 하나. 만유(萬有)가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므로 나와 대상, 실체가 없음을 분별하여 그 진리를 관찰하는 삼매. [본문으로]
  6. 불가지론 (agnosticism) -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사람의 경험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이론.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인 토마스 헉슬리가 처음 주창했다. 다윈, 러셀, 뒤르켕, 에디슨,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등의 지식인과 과학자들은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했다. [본문으로]
  7. extrasensory perception 초감각적 지각.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 [본문으로]
  8.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에 관해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 말미의 부록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파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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