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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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4)

 

 

7

 

 

   「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있지요. 한 수녀원 수녀들이 모두 악마에 들씌웠는데, 이건 협잡과 히스테리, 음모로 시작되어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오. 이 사건에는 또 당대 가장 경건한 성직자에 속하는 수렝 수사가 등장하여 원장수녀 잔느한테서 퇴마 작업을 합니다. 사실, 마귀 들렸다는 점 때문에 명성을 누린 이 원장수녀가 모든 재앙의 주범입니다. 

루덩 수녀원의 잔느 수녀원장과 자매들


  이 여인에게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려고 고군분투하던 중에 수렝 수사가 외려 심리적 질환에 감염됐어요. 즉,
악마들에 사로잡혀 거의 광인 같은 세월을 이십 년 넘게 보냈는데, 그런 광기 속에서도 고결한 성품과 영적 투쟁 덕분에 결국 제 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면서 총체적 인식(지각)과 더불어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해 당대 가장 의미 있는 저술을 몇 편 내놓았어요. 

 

  잔느의 경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이모저모로 과시하고 관상 경지에 이른 성녀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찬탄과 사랑과 경배까지 받으며 살다가 종내에는 명성과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귀신들림과 엑소시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 마법사로 낙인찍힌 신부를 화형으로 몰아간 사법 살인,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미치광이 취급받는 수도사의 면면 등이 죄다 아주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원장수녀와 수렝 수사의 성격이 흥미진진하답니다.」 

 

  이건 헉슬리가 1942년 7월 런던에 있는 발행인에게 보낸 편지.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마귀 들린 여인들,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권력과 엑소시스트들, 그들 편에 선 재판관들, 마법사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한 성직자. 

 

  작가가 역사의 특별한 사건을 대하면서 (오늘날에도 응당 통용되는) 다양한 질문을 상정하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한 각종 문헌의 방대함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 결과, 교리며 신앙, 신비주의, 영성, 초자연적 현상, 심리학, 정신의학,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시대, 휴머니티 등이 담긴 역사 탐방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된다. 

 

엑소시즘을 시행하는 수사들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성 바깥에 있다. 하지만 헉슬리 같은 문필가가 구상한 세계를 그저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 어떤 사건이나 관점을 읽는 이가 수긍하게끔 보이고자 하는 경우… 예술적 실제의 과학적 이면은 미학적 구상의 토대가 된다.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학적 구성은 1930년대 이후 명료한 예술적 투영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영국에 거주하던 때 발표한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정연한데 비해 미국 체류 시기 작품들이 문학적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후기에 나온 픽션이며 에세이들이 더 독특한 맛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과잉 정보’와 ‘교훈적 요소’ 같은 것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섭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의 혈관에 과학과 문학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존재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겪는 공포에서, 미래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평생 숙고했으며, 그 숙고의 결과를 카프카나 조이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을 무엇보다도 지성인으로 내보였다.

  그런 측면 때문인가, 자신은 줄거리를 쉽게 궁리하고 살아 있는 형상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처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했다. 그것도,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심리학, 초심리학, 의학, 정신병학, 정신약리학 등의 전문적 심포지엄과 학술 대회들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전문가들 못지않게 연구하고 중시한 심리학, 의학, 생물학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귀신들림과 ‘마녀 사냥’이라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상존한다 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분석한 <루덩의 악마들> 같은 독창적 논픽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과 과학의 공존을 추구했다. 

 

<루덩의 악마들>이 아이디어 면에서 1961년 미셸 푸코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의 개념을 앞섰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이들에겐 헉슬리의 이 텍스트가 술술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갈구한다면, 웬만큼 고생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말랑말랑하여 접하기는 쉽지만 남는 게 별로 없는 글이 있는 반면에, 뭔가 묵직한 게 있어 보이는데 파고들기 쉽지 않은 글도 있다. 헉슬리가 인생 후반에 픽션보다는 에세이와 논픽션에 더 치중한 까닭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그에게 기존의 문학 장르 개념과 원칙은 외려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 하나, 독자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깊숙이 탐구하게끔 단초를 제공하자는 것

 

  마지막 장편 <섬>에서 픽션이 철학적 에세이며 사회적 비평과 상당히 혼재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루덩의 악마들>에서 그가 동원한 문장들은 거의 시적 수준이다. 압축적이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 간명함이라는 미덕은 그 본연의 목적 달성 이외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선사하지 않는가. (번역문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것이 또 언어 차이에서 비롯되는 번역 한계이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 그 생각의 논거로 각종 고전의 든든한 인용, 거기서 나오는 설득력, 우아한 문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적 스타일, 무엇보다도, 달변이나 수사적 효과와는 상관없이 진솔하고 정직한 토로…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적 일화에 대한 논픽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일방의 입장과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아니, 상호 대립적인 해석을 전부 끄집어내고 소개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역사가요 스토리텔러, 철학자, 사회비평가, 조사 연구자로서 번쩍이는 재능이 여기 다 녹아 있다. 그것도, 우아하고 알기 쉽게.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이며 사물의 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지적, 물리적 유기체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면밀하게 탐구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헉슬리의 박식과 기지와 혜안이 (우리 한국에서도) 공공 자산이 될지 여부는 독자들한테 달린 게 아닌가. 진정한 재능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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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백 년이 훨씬 지나 케케묵은 사건에 작가는 왜 주목했던가? 

  사실, 헉슬리 이전에도 ‘수녀들의 집단 광란’과 이를 빙자한 마녀 재판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눈길 돌리고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The History of the Devils of Loudun, Volumes 1-3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작가들이며 줄 미슐레를 비롯한 역사가들, 샤르코 같은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연구자들이 말이다. (‘이야기 역사’라는 틀에서 볼 때, 뒤마가 전통적 이야기체로 썼다면 헉슬리는 이 책에서 현대적 이야기체를 동원했다 하겠다.) 

  게다가 1980년 <루덩의 마귀 들림>이라는 책을 내놓은 프랑스 역사가요 문화학자 미셸 세르토처럼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왜?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쓰고 내던 때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잔학무도 이후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세계주의와 투쟁’이라 불린 부끄러운 캠페인이 펼쳐졌다. 즉, 강력한 징벌 기계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권력은 대중의 의식을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로 감염시키고자 기를 썼다. 

  또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매카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해 정점에 이르면서 모든 것이 알 만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전됐다. 즉, 불온사상 소유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특위에 소환되고 체포되고 숙청되고…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작가로 하여금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를, 또 그 광기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유도한 엑소시즘과 잔인한 고문과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만행을… 한데, 알고 보니, 그 본질에 악마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성적 억압과 종교적 과대망상을 이용해 다중을 조종한 정치적 술책과 박해였던 것일 뿐. 

 

  대화와 관용과 공존 대신 음모와 조작과 선동과 탄압이 난무하는 사회는 집단 순응적 사고에 물들고 집단 광기에 빠지기 쉽다. 

  루덩에서 벌어진 맹신과 증오와 폭압의 장면들 이후 삼백여 년이 지났건만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헉슬리는 절감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과 자기기만에 굴하기를 거부한 그가 볼 때… 20세기의 독재자와 독재 권력과 선동가들은 교회의 수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외상을 입는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세와 근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마법사와 그 고객을 20세기 ‘공공의 적’처럼 대했다. 즉,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스탈린 시대에 자본주의자들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코뮤니스트와 그 동조자들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외국 열강의 앞잡이 취급을 당했으니, 아무리 좋게 봐도 반애국주의자요 최악의 경우엔 매국노, 이단자, 인민의 적이었다. 

  지난 시대 이 극히 추상적인 퀴슬링 부류에게 부과된 형벌이 죽음이었듯이, 현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세속적 악마 숭배자들을 기다리는 형벌도 죽음인데… 이들을 어떤 나라들에서는 코뮤니스트(빨갱이)라 부르고 또 어떤 나라들에서는 반동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뒤돌아보면, 종교의 모든 폐해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아도 무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 확신에 찬 유물론자들이 값싸게 날림으로 내놓은 이상을 절대자라도 되는 양 숭배할 태세가 돼 있으며, 열렬한 휴머니스트들이 사탄 신봉자들을 몰살하는 종교재판관의 열정으로 자기네 적들을 박해할 수 있음도 우리는 본다. 

  그런 행동 패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인간의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오래 됐다. 우리 시대에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은 선조들처럼 행동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네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이론들을 도그마로 바꾸고, 자기네 내규를 제 1원리로 격상시키고, 자기네 정치 보스들을 신으로 추앙하고, 자기네한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악의 화신이라 몰아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맹신적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은 가장 추악한 작업에 탐닉할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도 맑은 양심을 간직하며 지고지순하게 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다가 작금의 믿음과 신조가 낡아져 다시 터무니없어 보이게 되면 새로운 추세가 만들어질 터이고, 그리하여 태고의 광기가 적법성이네 이상주의네 진짜 종교네 하는 상습적인 가면을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루덩의 집단 광란 사건 이후 사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헉슬리 시대 이후 육십여 년 지난 지금, 사람들과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앞에 언급한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들이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이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폭압과 광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이나 매카시즘 따위 철 지나고 위험한 유행에서,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것도, 모든 근거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누가 귀신들린 수녀들이며, 누가 그랑디에 신부이며, 누가 리슐리외 같은 절대 권력이고 누가 그 권력의 앞잡이이고 엑소시스트들이며, 누가 몇 푼에 팔려 양심을 속이며 위증하는 자들이고, 누가 고용된 판사들이며 누가 사법살인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며, 누가 엑소시즘과 화형에 희희낙락하거나 내심 분개하는 군중인지… 

  우리 사회 적지 않은 현상과 사건에도 거의 에누리 없이 대입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메아리요 교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심하거나 게을러서 잘 모르거나 둔감할 뿐이지.)

  「우리한테, 근본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악이나 경제적 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증주의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악’이라 부르기 좋아하니까) 그 근본악이 오늘날에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라 어떤 증오에 빠진 계급이나 민족한테서 추종자들을 찾는다. 사회적 증오의 인과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렇다 하여 증오와 불공정이 더 줄어들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헉슬리의 이 이야기를 그저 오래 전 사건들의 파노라마로 치부하고 만다면, 그건 더 큰 메시지를 놓치는 꼴이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헉슬리의 이 스토리를 영국 극작가 존 화이트닝이 1961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영국 영화감독 켄 러셀이 1971년 <악마들>이라는 충격적인 필름으로 선보인 것도,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1972년 <루덩의 악마들>이라는 오페라로 구성했으며 유럽 극장들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다 그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오페라는 동영상으로 다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라든가 바탕에서 헉슬리가 호소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르마즈드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다른 동료들을 악의 원리인 아리만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시대의 악마주의에, 극악무도한 행위에 승리를 안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악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악이 세상에 더 횡행하게끔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문에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죄보다는 원덕(신테레시스)에 더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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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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