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그러나 그건 (마드리갈의 끝이 아주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로, 초저녁 박명이 주변 모든 것을 동화 같은 빛으로 감싼다는 이유 하나로) 여름날 석양이 영원히 지속되고 황금빛 가을이 절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녀는 제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마음 한 구석에서 알았다. 그러나 행복에 넘치는 몇 주일 동안은 이성의 문을 닫고 삶이 파라다이스에서 멈추어 다시는 흐르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었다. 공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사라진 듯했다. 실생활과 몽상이 하나가 됐다. 상상의 세계가 점점 유일하게 진실한 세계처럼 보이게 됐다.
그것은 죄 될 것 없는 행복감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오롯이 마음속에만 있는 거니까. 그건 천상의 기쁨 같은 것이고 두려움이나 자책 없이 자신에게 온 마음으로 줄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 기쁨에 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수록 그것이 더욱 강렬해지는 바람에 은밀히 간직하기가 힘들어졌다. 어느 날 고해실에서 자기감정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이 열렬한 사랑의 대상이 고해사제라는 기미를 내비치지 않고… 어떻든 그녀 생각에는 그랬다.
그런 고해가 잇달아 나왔다. 주임신부가 주의 깊게 듣고 간간이 질문을 던지는데, 그 물음으로 보자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그녀의 순진한 꾀에 완전히 넘어간 게 분명했다. 필리프가 용기를 내어 가장 내밀한 얘기까지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정말 행복했고, 이 고백이 진짜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 즐거움이 계속 반복됐다.
그러다가 혀를 잘못 굴리게 된 날이 왔다. ‘그이’라고 해야 할 것을 ‘당신’이라고 말한 것. 황급히 말을 거둬들이려 했지만 정신이 아뜩해지는 바람에 그의 질문을 받고 눈물 터뜨리면서 진실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마침내! 마침내!! 그랑디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다음엔 순풍에 돛 단 배였다. 주의 깊게 계산된 언사와 제스처의 문제, 다소 기독교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페트라르카 풍 1에 이르고, 페트라르카 풍에서 지상의 사랑으로 넘어가고, 또 거기서 동물적인 애정에 이르기까지 매끈하게 조절하는 유연함의 문제일 뿐이다. 하강은 상승보다 언제나 더 쉬운데다가 이 경우에는 경사면에 기름칠하느라 궤변이 상당히 많았을 터. 어떤 경우든 처녀가 죄에 빠질 가능성은 전적으로 보장돼 있었다.
그러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 그럭저럭 ‘승선’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 그건 좀 실망스러웠다. 그가 자문했다. 왜, 과부로 만족할 수 없었던 거지?
그런데 필리프로서는 평온하고 내면적인 행복감이 정욕이라는 겁나는 현실로 대체됐다. 도덕적 고민으로 시달리고, 힘을 달라 기도하고, 실행하기 벅찬 다짐을 하고 또 하고, 그러다가 막판에 이르러 마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듯한 절박감 때문에 굴복한 것이다.
한데 굴복하고 난 이후 상황은 상상하던 것과 영판 달랐다. 알고 보니… 그녀의 대천사는 동물적 격정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였다. 처음에 필리프는 자신이 고난의 길로 나아가는 암양이요 사랑의 자발적 수난자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상상하던 이상이 그녀가 선택한 사람에게는 아주 적다는 점이 곧 드러났다. 본디 그녀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언변 뛰어난 설교자요 기치 넘치고 정중한 휴머니스트였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점을 그녀가 알게 됐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추상적 관념이고 사랑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 사람이 사랑할 때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영혼과 모든 신체 섬유질로써 사랑한다. 그런 감정에 필리프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이제 그녀한테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한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을까? 들으라는 듯 킬킬대면서 운명이 미리 준비한 올가미를 그녀한테 씌웠다. 임신은 했지만 혼인한 것은 아니기에 그녀가 생리 기능과 사회도덕 사이에서 꼼짝 못하게 됐으며 구제 불능의 수치스러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상상도 못한 일이 실제가 됐고 불가능한 일이 사실로 다가왔다.
보름달이 까만 천궁에 걸려 하루 이틀 광채를 발하다가 조금씩 이지러지더니 결국엔 스러지고 말았다. 희망의 마지막 빛줄기처럼. 남은 길은 하나,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죽는 것.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 끔찍한 상황을 잠시라도 떨치는 것.
그런 무모함과 자포자기에 초조해진 주임신부가 그녀의 애착을 더 가볍고 덜 비극적인 쪽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장난기 어린 고전 작품에서 적절한 문구들을 뽑아 애무하며 들려주었다.
Quantum, quelle latus, quam juvenile femur! 2
사랑을 나누는 중간 중간에 브랑톰 3의 <용감한 레이디들>에서 부적절한 스토리를 들려주고, 부부관계에 관한 산체스 포마 4의 글에서 퍼낸 자료를 간간이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필리프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묘지 대리석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얼굴이 꾹 닫혀서 반응이 없고 생기를 잃었다. 그러다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녀는 마치 고통과 절망밖에 없는 다른 세상에서 그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보고 그가 불안해졌다.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그녀의 대답은 손을 들어 그의 두툼하고 검은 곱슬머리를 쥐어 제 입과 목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여인들을 위한 특별한 컵으로 (컵 안쪽에는 사랑을 나누는 체위들이 묘사돼 있어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그림이 조금씩 드러났다) 마시는 프랑수와 1세 왕에 관한 이야기 중간에 그녀가 툭 끼어들어 아기를 가졌다고 퉁명스레 밝히고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주임신부가 그녀 가슴에 얹은 손을 축 늘어진 머리로 옮기고는 외설스러운 어조를 순식간에 성직자 어조로 바꾸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저 기독교적인 감내 정신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밖에.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까맣게 잊고 있었군. 자궁암에 시달리는 드브루 부인을 방문하기로 약속해 놓고선. 그 가엾은 부인한테는 영적 위안이 필요해. 그러고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그가 아주 바빠져서 라틴어 수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로 고해실 바깥에서는 필리프가 그와 단둘이 만나지 못했다. 고해실에서 그녀가 고해사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로서 그에게 말하려 했을 때 (가엾은 처녀는 그가 여전히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녀 앞에는 그녀 말을 제지하는 엄격한 성직자가, 빵과 포도주를 성변화 시키고 죄를 사하고 종교적 징벌을 부과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한테 참회하고 신의 은총을 믿으라고 얼마나 그럴싸하게 다그쳤던가! 그녀가 바로 얼마 전 사랑 얘기를 꺼낼라치면 그는 거의 예언자 같은 분노를 보이며 질책했다.
제가 좋아 타락에 빠져 뒹굴고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절박하게 묻자 그가 열정을 과장하여 대답했다. 기독교인답게 처신해야 하는 게야,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네게 예비하신 굴욕적 시련을 그저 온순하게 견딜 뿐 아니라 그 고통을 기뻐하고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녀의 불행에서 그가 책임져야 할 몫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결국, 모든 죄인은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해.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 건 금물이야. 고백실에 오는 까닭은 네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기 위함이지 다른 사람 양심을 건드리기 위한 게 아니야.
그런 식의 훈계를 듣고 필리프가 눈물범벅이 되고 아연실색한 상태에서 쫓기듯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고통을 보면서 그는 동정도 자책도 하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빛만 내보였다. 포위 공격 기간은 마냥 지루했는데, 포획해 봤더니 기쁨도 없고 그 이후의 즐거움도 그저 그랬을 뿐. 한데 이제 그녀는 느닷없고 적절치 못한 다산 능력으로 그의 명예와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그 동안 험난한 여정을 다 헤쳐 왔는데 사생아라니, 이건 나한테 파멸이야!
그는 그녀를 실제로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를 대놓고 싫어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쁘지도 않았다. 임신과 불행한 체험 때문에 호되게 매질 당한 개나 기생충에 시달리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그녀의 한순간 사라진 매력이 그로 하여금 자기는 그녀에게 더 이상 의무가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그녀가 그에게 해를 끼쳤으며 이제 또 자꾸 무례하게 군다는 생각을 굳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차분한 양심으로 어떤 경우에서나 불가피한 결정을 내렸다.
모든 것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자.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그런 입장을 고수해야 돼.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냐. 필리프 트렌캉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괴물 같은 생각을 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
아아, 심장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지 않는구나.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법.
(<루덩의 악마들> 1편 끝)
관련 포스트: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1374)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학자, 시인. ‘휴머니즘의 아버지’. 그의 소네트를 르네상스 기간 전 유럽에서 열광하고 모방했으며, 서정시의 모델이 됐다. [본문으로]
- 얼마나 푸짐하고 근사한 대퇴부인가, 이 젊은 허벅지는! (라틴어) [본문으로]
- 브랑톰 (Pierre Brantome, 1540-1614) - 역사가, 샤를 9세와 앙리 3세의 궁정 대신. 위그노 전쟁 등에 참전. 많은 <비망록>을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들 중 하나. [본문으로]</비망록>
- 산체스 (Sanchez, 1550-1610) - 에스파냐 사람, 가장 유명한 예수회 결의론자들 중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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