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렇다면, 현재 순간을 훌쩍 건너뛰겠지요. 저 앞 다음 순간에 더 빨리 이르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겐 다음 순간도 현재가 되고 나면 역시 썩 좋아 보이지 않을 게 확실합니다. 그래서 또 뭔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을 좇아 앞으로 계속 달리고… 그러나 더 좋아 보이는 것은 언제나 저 앞에 있으니, 결국 그걸 얻기란 요원하기만 하지요.
단순한 진리를 하나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일부가 되는 <존재>에게는 지상의 그 어떤 일도 여느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 다 소중해요. 순간순간이 다 소중해요.
만약, 어떤 일을 대하면서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흥미롭지 않아 보이니까 얼른 끝내고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을 하겠어’ 생각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많은 것을 잃는 거예요. 문자 그대로 매 순간이 안겨줄 기회와 가능성을 놓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삶의 기쁨과 존립의 충만함을 만끽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우리를 현혹하는 마인드의 문제와 여기서 또 부닥치는군요. 마인드가 속삭여요.
‘지금은 중요한 게 별로 없어, 더 좋은 건 다음에 있을 거야!’
이 속삭임을 믿는다면, 우리네 삶은 온통 기다림과 기대로 바뀝니다.
기다림과 기대함은 마인드의 상태입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현재를 원치 않고 미래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을 원치 않고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에요. 모순이고 비합리적입니다.
늘 뭔가를 기다리고 기대하기만 한다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유일한 실제인 현재 순간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삶을 그냥 흘려보내고는 나중에 가슴 치며 후회하겠지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끔… 미래의 불확실한 뭔가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 있는 것에 왜 즐거워하지 못하겠는가.
자기 자신을 관찰하면서, ‘뭔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사는’ 상황을 다 관찰하십시오.
예를 들어,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빨리 일에 착수할 생각만 하는 것.
하지만 일이란 게 어디로 가지 않아요. 그 일은 또 그 순간에 즐겁게 하면 돼요. 당장에는 서둘지 않으면서 아침 식사를 왜 못 즐기겠어요?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며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현재 순간으로 되돌아오세요.
실제로 뭔가를 기다려야 할 때도 이런 ‘기다림 모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는데 상대가 오지 않거나, 대기실에서 중요한 면담 차례를 기다린다고 쳐요. 시계만 연신 들여다보면서 초조하거나 지루하게 굴고 안달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한데,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뭔가를 기다리면서, 특히 기다림이 길어진다면, 그렇게들 하지요.
하지만 이것 또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소중한 순간으로 즐길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즐길 수 있어요.
기다린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있기만 해도 돼요.
<지금> 순간으로 돌아와서 거기 머물러 있음을 즐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지 여부는 외부 환경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있어야 할 어떤 순간마다 거기에 충실하세요.
그러면 뭔가를 기다리면서도 심심해하거나 신경 곤두세울 일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산다는 것이 어떤 순간에든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실습 16
‘난 이러이런 것 때문에 지금 순간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드나요?
그 ‘이러이런 것’을 다 열거해 보세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세요.
‘나한테는 뭐가 충분치 않나?’
‘난 인생에서 무엇을 얻기 원하나?’
‘나는 왜 <지금> 순간을 더 빨리 건너뛰어 다른 상황으로 가고 싶어 하나?’
당신이 인생을 즐길 수 있으려면, 당신 현실에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나요?
달리 말해, 당신의 기대와 갈망, 꿈을 말해 보세요.
더 많은 돈, 더 흥미로운 일, 다른 사회를 원하나요?
그런 측면에 나쁜 건 전혀 없어요. 하지만 그런 데 전념하느라고 지금 당장 삶을 즐기기 힘들다면… 계획한 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 해도 인생을 기뻐하지는 못할 거예요. 완전한 행복이 되기엔 역시 뭔가가 부족할 테니까!
그 순간이 어떤 것이라 해도 현재 순간을 즐길 줄 알아야만 행복은 찾아듭니다.
눈을 감으세요.
오로지 이 순간만 유일하게 있다고 상상하세요.
지금 이 순간은 한없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며, 시간 바깥에 있습니다.
현재라는 순간이 1초라든가 선형적 시간의 어느 한 조각은 아니잖아요?
만약 우리가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과거나 현재로 건너뛰지 않으면서 현재 순간에 충실하게 머문다면 이 현재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지금 순간에 갖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상상하십시오.
기대나 갈망, 꿈이나 계획을 다 접으세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있어. 난 살아 있어. 난 존재해. 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이 순간에 녹아들고 있어. 이 순간을 난 즐긴다.’
고요한 내면 상태에 잠시 머무르세요.
지금 있다는 것이 큰 기쁨으로 느껴질 거예요.
이 기쁨은 사실 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이 기쁨이 찾아들게 하려고 다음 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그건 항상 현재 순간에 있으면서, 우리도 기쁨과 삶을 접하기 위해 그 순간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떡하든 우리를 현재에서 끌어내려 드는 마인드의 술책을 파헤치고 나면, <지금>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할 거예요. <거짓된 나>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할 거예요. <존재>와 하나 되는 행복을 느낄 거예요. 아픔과 고통을 야기하고 불만과 불행을 초래하는 것을 삶에서 깡그리 몰아낼 겁니다.
무자각 상태는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며 생각의 흐름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생각하는 과정에는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엔 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에고가 만들어 내는 욕망과 감정과 신체 반응도 들어갑니다.
무자각이란 본질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이다. 이건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이다. 이건 삶과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단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회피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맞서지 않아” 하고 말은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반응을 잘 살펴본다면 실제로 우리 안에서는 현실과 투쟁이 늘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까요. 버스에서 불편하게 앉아 장시간 가야 하는 경우에 우리는 뭔가 불쾌감을 느껴요. 한데, 그걸 느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그냥 꾹 참고 시계 들여다보며 ‘이 상태가 곧 끝나겠지’ 하는 생각만 해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아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상황이 얼른 지나가고 다른 뭔가로 대체되기를 바랍니다.
얼핏 보기에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게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듯싶기도 해요. 우리네 마인드가 ‘그렇게 느끼지 마, 그냥 털어 버려, 받아들이지 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있는 것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이건 곧 자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마인드는 그렇게 우리를 호립니다. ‘뭔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속삭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사실 자연스러운 게 전혀 아니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겪고 그 무엇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엔 편안한 것뿐 아니라 불편한 것도 있어요. 불편하고 불쾌하다 해서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고 출구를 못 보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몇 해씩 고민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에 눈을 감고 문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불편한 무엇조차 객관적인 사실로 주어져서 어차피 겪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편이 스르르 사라지며, ‘아하, 그래, 삶의 매 순간을 정말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거기엔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며, ‘이건 나쁜 순간이야, 좋은 순간이야. 이건 편하고 저건 불편해’ 하는 판단이 없어집니다.
불편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피할 수 없는 현재 순간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예전엔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1) 앞에 탄 버스에서 불편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그들 감정과 기분을 느끼면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되겠지요. 2) 혹은 차창 너머 스쳐가는 풍경에 흥미를 느끼거나, 그 상황에서 즐길만한 것을 분명히 찾아낼 겁니다. 3) 물론 무엇보다 더 큰 즐거움은 ‘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등이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지금> 순간을 선명하고 충만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마인드가 강제하는 불편한 상황이나 반응이나 감정의 노예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파괴적인 마인드의 작동 이면에서 다른 뭔가를 보고 느낄 겁니다.
실습 12
뭔가 불편하거나 걱정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 그런 반응을 바깥에서 하듯이 관찰해 보세요. 집중이 잘 안 된다면,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 난 어떻게 느끼고 있지?’
‘무엇 때문에 침착하지 못한 건가?’
두 가지 실재가 (현실이) 있음을 알아둬야겠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서 주변 세상의 실재,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생각과 감정의 실재… 그리고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 실재입니다.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조화롭고 기쁨 넘치고 평온이 가득한 <존재>의 실제로 말이지요.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왜곡되게 볼 수도 있어요. 우리의 내적 불안과 불만과 불쾌함이 투영된 것으로 말입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게 있다면, 그걸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한데, 그런 것은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만 생깁니다.
당신의 경우, 받아들이지 않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말하세요.
“이건 그냥 있는 거야. 난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받아들이면 불편함이나 불쾌감이 사라지고, 그게 어떤 것이든 매 순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다만, 대다수는 그런 번뜩임을 겪고 나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와 늘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출한 기법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지, 그걸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해물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바로 마인드와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존재>와 갈라서게 하는 것이니까.
이 개념을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보지요. 부디 선입견을 다 버리면 좋겠군요.
이런 개념을 접하면서 처음 내보이는 반응은 아마도 이런 저항일 테니까요.
“아니, 마인드와 시간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단 말이야? 마인드와 시간 없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정신 나가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거나, 아니면 존재하기를 아예 끝낸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곧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시간 개념이 없는 동물 수준으로 내려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로, 의식의 다음 진화 단계로 올라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즉,
제한된 인간 마인드에서 우주 마인드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함정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간과 마인드를 장악하게 되겠지요. 장악한다고 해서 마인드와 시간한테 무슨 거창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둔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삶을 저희 뜻대로 결정하게 놔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둘을 지배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마인드와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아주 밀접한데, 어떻게 그런지는 이제 곧 알아볼 겁니다. 마인드는 시간과 어울려서 우리가 <존재>로 달려가지 못하게 함정을 만들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볼까요.
마인드는 어떻게 작동하나
사람에게 마인드가 부여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마인드만큼 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집을 짓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거나, 혹은 뭔가를 손수 만들거나 사업 전략을 세우거나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물론, 계획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분석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최선을 택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 궁리해야겠지요.
구체적인 뭔가를 입안하고 실행할 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에 걸맞게 활용합니다. 이때 마인드는 우리가 작업에 동원하는 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네 마인드의 역할이 그런 일에만 국한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데, 인류는 사실상 큰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마인드에게 파워를 지나치게 많이 내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내 마인드가 바로 나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마인드를 과제 해결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마인드가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게 됐습니다.
자신에게 조용히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흠, 내 머릿속을 마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거기서 제멋대로 따로 살면서 말이야.’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마인드가 당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절대고 속삭이고 지시하고 주장하고 요구한다는 사실도 분명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리고…
이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이지 잠깐이나마 쉴 틈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이건 곧 우리가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마인드가 제 본연의 자리와 역할을 망각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마인드가 외려 주인을 쥐고 흔들어요.
마인드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마인드가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판단하고, 그 모든 것에 의견 덧달고 꼬리표 붙여서 분류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변의 사물과 현상과 사안과 사람에 대해 당신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깊이 규명하고 인식할 시간을 채 다 쓰지도 못했는데, 마인드가 먼저 중뿔나게 제 판단을 들이밉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실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혹은, 보호하는) 방패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생각의 차단막입니다.
이 차단막이 당신과 당신 자신을, 당신과 동료들을, 당신과 세상을, 당신과 자연을, 그리고 당신과 신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분리 망상을 일으킵니다.
덧붙이자면, 이 분리 망상을 우리의 거짓된 나인 <에고>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쓰일 때 마인드는… 유용하다. 갖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체가 될 때 마인드는… 해롭다.
자신의 머릿속 대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커녕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야 할 순간에는 역부족이 될 정도로 우리 힘을 잔뜩 빼앗기만 할 뿐이에요.
머릿속 대화에 들어가는 힘은 다 허튼 데에… 그 무엇에도 소용없는 말과 생각들을 찧고 빻는 데 쓰이기만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 광인들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군요.
그들은 저 혼자서 뭔지 모를 소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려요.
그러나 광인이라 불리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상인’들은 기껏해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니까요.
엄밀히 보자면, 우리네 대다수가 사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 목소리’의 힘에 전혀 맞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니까요.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리네 ‘머릿속 목소리’는…
멀고 가까운 기억을 더듬고, 불평하며 비탄에 빠지고, 뭔가를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뭔가에 화내고 뭔가를 예상하고, 뭔가를 우려하고 희망하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비교하고 화내고 욕하고, 판단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때론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우리네 마인드는 활동의 도구요 수단이다. 그것은 특정 작업에 이용할 수 있고, 그 작업이 끝나면 내려놓게 돼 있다. 그게 마인드의 소명이다. 그런 만큼,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의 8할에서 9할쯤은 쓸데없이 반복되는 것일 뿐 아니라, 또 이 반복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그 기능 장애와 종종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는 것. 이게 사실이라는 점은 자신의 마인드를 잘 관찰해 보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하고 해로운 과정이…생명 에너지가 심각하게 유출되는 원인이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중독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중독 형태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 그걸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야.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중독 상태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또 우리한테 거짓된 쾌감을 안기는데, 이 거짓된 쾌감이 나중엔 반드시 고통으로 바뀐다.
- 우리는 왜 강박적인 생각에 중독되나?
왜냐하면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이건 우리가 자아감을 마인드의 내용과 움직임에서 끌어낸다는 뜻이다. 또 왜냐하면, ‘만약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텐데’ 하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입각하여 자신에 대한 심상을 형성한다. 이 허깨비 같은 자신을 <에고>라 부를 수 있다. 에고는 마인드의 움직임으로 이뤄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에고>라는 용어를 여러 사람이 제각각으로 이해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에고란… 자신을 무의식중에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거짓된 나>를 의미한다.
에고한테는 현재 순간이란 게 거의 없다. 그건 과거와 미래만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진실에 완전히 거꾸로 가는 까닭은… 에고 모드에서 작동하는 마인드의 기능에 문제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마인드는 과거를 생생하게 유지하는 데 늘 신경 쓴다. 왜냐하면, 마인드가 보기엔… “아, 과거가 없다면, 넌 도대체 누구야? 네가 있을 수 있겠어?”
마인드는 계속 살아남고 미래에서 해방이나 충족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미래에 투영한다.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젠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난 행복하고 만족할 거야, 편안해질 거야.”
에고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는 건 사실상 현재가 아니다. 즉, 에고는 과거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잘못 지각한다. 혹은, 마인드가 투사된 미래의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 정도로 현재를 축소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관찰해 보면, 이것이 <에고>의 작동 방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해방에 이르는 열쇠는 현재 순간에 있다.
그러나 마인드가 곧 자신이라 여기는 한, 그 현재 순간을 찾을 수 없다.
- 난 분석하고 판별하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아. 더 명료하고 더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내 마인드를 잃고 싶지는 않아. 사유하는 재능은 우리한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야. 그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지 않겠나?
마인드가 우세한 상태는… 의식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긴급히 넘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계속 괴물로 커지는 마인드에 의해 우리가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측면에 불과하다.
생각은 의식 밖에서 실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생각 위로 올라선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동식물 수준으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야.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사고력을 여전히 이용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또 생각하는 마인드를 주로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하면서도, 무의식적인 내면 대화에서는 벗어나 내적인 고요와 평온을 맛본다.
마인드를 이용할 때, 특히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때, 생각과 고요 사이를, 마인드와 무념 사이를, 몇 분마다 오가면 좋다. (no-mind 상태인) 무념이란… 생각이 제거된 의식이다. 그렇게 해야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에 진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과 연결되지 못한 생각은 금방 빈약하고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마인드는 본질상 생존을 위한 장치이다. 다른 마인드들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기 등은 마인드가 곧잘 해내지만, 그런 건 다 창의적인 것이 전혀 못 된다. 진정한 아티스트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마인드가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고요에 머물러서, 뭔가를 만들어 낸다. 그때 마인드가 창의적 임펄스와 직관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 그들의 창의성이 심적으로 고요한 시기에 번뜩였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미국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작업 방법을 알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 아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생각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인데, 그마저도 창의적 과정의 짧고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주 많은 학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한 까닭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지구상의 생명이나 우리 몸이 만들어져 지속되는 기적은 마인드나 사고 활동의 결과가 아니다. 마인드보다 훨씬 더 큰 지능이 (혹은, 지혜가) 작동하는 게 분명하다. 크기가 1천 분의 1 인치밖에 안 되는 사람 세포 하나가 어떻게 6백 쪽짜리 책 1천 권에 해당하는 DNA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일하는 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 또 우리네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지 더 깨닫게 된다. 마인드가 이 내면의 지혜와 다시 연결될 때, 그건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러면 그 자체보다 더 큰 뭔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