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가 과거로 미래로 잡아끌면서 우리를 착각과 망상에 빠뜨린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인드도 구체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마인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즉, 마인드를 우리 <내면의 고요>와 결합하고 <참된 나>와 동일시할 때!
알다시피, <참된 나>와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과정은 양립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생각이 (일절) 없는 상태와 사유 과정 양쪽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있어요.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가 그래서 필요해요.)
어떤 과제를 해결할 때, 이런 사고 형태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내면의 지혜와 <존재>의 이성으로써 검증하고 수정하게 되니까요.
우리네 마인드는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고, 논리는 우리를 실패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존재>의 이성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어. 하지만 만약 어떤 논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내면의 지혜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 있다. 이때는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와 <존재>의 이성이 공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습 46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과제를 생각하세요.
혹은, 어떤 의문점에 대해 찾고 싶은 답이라도 좋아요, 그걸 생각하세요.
이 과제나 의문점을 마음속에서 요약하세요.
다음에 주의를 자기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세요.
이제 우리는 평정 상태로 들어서면서, 갖가지 잡념이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작동이 멈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1~2분 그렇게 몰입하면 충분해요.
다음에 평소의 사고하는 방식으로 돌아오세요.
이제 생각이 더 밝고 선명하고 창의적이 된다는 점을 알아차릴 거예요.
과제에 대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억해 두세요. 적어 두면 더 좋습니다.
다음에 다시 <참된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 내면 깊숙이 몇 분 동안 침잠했다가, 다시 보통 생각으로 돌아오세요. 이때 여러 생각이 이리저리 헤매는 게 아니라 과제를 숙고하는 데 집중된다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일반적인 생각 모드에서 내면의 평정으로 몇 번 오가다 보면, 사유 과정에 새로운 특성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인드로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인드와 내면의 지혜와 몸과 에너지가 다 사유 과정에 포함되어 작동하지요.
이렇게 사유한 결과는 보통 생각 모드 때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겁니다.
이렇게 작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적어 두세요.
그 가운데 해결책을 몇 가지 적으세요.
거기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나중에 고를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순간을 믿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지혜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에고>가 극적인 사건들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생활 방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에고>인데…
이 에고는 일상의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보기를 꺼려하고, 과거의 모든 문제며 미래에 겁내는 것을 죄다 이 일상 상황에 붙들어 맵니다. 그 결과,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두려움이나 재앙이나 불행 따위가 들어섬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가로막습니다.
반면에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결합하면…
극적인 사건들이란 없으며 실제 삶만 있음을 알게 돼요. 실제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이며,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바꾸고 싶은 것은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에고>는 우리 삶의 여건을 부정적인 것 아니면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고 바꿉니다.
한데, 생활 여건이란 사실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데요.
동의하기 어렵다구요? 현재 순간에 들어선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전부 자신의 지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재앙과 불행 뒤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요.
어떤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늘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비롯해 바깥세상의 것은 다 환상적이며 덧없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안에만 있다. 이 내면의 행복 상태에 의거하여 산다면,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일상에서 현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기 몸에 완전히 들어앉아 산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몸은… 당신을 <존재> 안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가시적이고 형태를 지니는 몸은 그저 바깥 껍질일 뿐이다.
‘몸에 들어앉아 산다’는 것은… 내면에서 몸체를 느끼고 몸체 안에서 생명을 느끼며, 그리하여 당신이 외적인 형태 너머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존재>에 뿌리 내리려면 의식과 몸을 연결해야
지금까지 우리는 가끔이나마 마인드에서 분리되는 법을 익혔고, 우리를 현실에서 떼어놓는 마인드의 전략을 파헤쳤고, <참된 나>는 생각과 감정이 만들어 내는 거짓 ‘나’가 절대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지금> 순간의 힘을 얻고 본연의 자신이 되고 진정한 삶을 살기에 필요한 것을 제법 많이 했어요. 자신과 자기 삶의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끝내려면 아직 멀었어요. 아니, 이제 시작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새롭게 사는 법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행복이 우리에게 순간순간 나타날 뿐 아니라 우리 현존 전반에 꾸준한 동반자가 되겠지요.
다행히도 우리에겐 아주 좋은 도구가 있어요. 이 도구를 통해 모든 변화가 더 좋은 쪽으로 굳어지고 지속되게 하면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말 그대로 세포 수준에서 달라질 수가 있어요. 이 도구는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가치와 중요성이 아직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신체에요.
몸을 아주 소중하게 건사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나 어느 쪽이든 대체로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합니다. 즉, 몸 안에서 살지 않고 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하는 게 또 마인드인데, 이 마인드가 우리를 생각과 감정으로 채우는 바람에 우린 결국 생각과 감정이 곧 나인 양 여기면서 몸은 잊고 맙니다.
만약 사람들이 생각과 감정만 갖고 산다면, 자신이 늘 몸 밖에 있는 듯이 느낍니다. 몸이 그 안에 의식도 영혼도 자신에 대한 느낌도 없는, 별개의 생명 없는 구조인 것처럼 말이지요.
자신이 마치 몸 밖에 있는 듯 여기면서 에너지를 다 생각과 감정에만 쏟는 것은 사실상 몸에서 에너지를 빼앗는 셈이에요. 이 때문에 몸이 실제로 생기를 잃어서 병들고 골골하고 일찍 노화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많은 영적 구도자들이 육신을 방해물이나 심지어 죄악처럼 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 득도자들이 아주 적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그들은 몸을 부정하면서 영적 탐구 노정에 장애물로 취급해요. 하지만 몸이야말로 영적 통찰과 고도의 진리로 이끄는 매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인드가 현재 순간과 일대 일로 직면할까 두려워하여 우리를 현재에서 끌어내려 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인드가 현재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연스레 현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마인드는 무엇이든 다 장악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과 진정한 삶을 그리할 수는 없지요. 사실, 꾸며낸 규칙과 법칙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절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흐름을 그 누가 장악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마인드가 우리를 확실히 보호해 주려니 여기는 함정에 가끔씩 빠지곤 합니다. 논리와 상식과 마인드(지력)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계산하고는, 그 어떤 힘도 우리 계획을 깰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건 오판입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검증된 계획마저 망가뜨릴 수 있는 요소들이 인생에는 예상치 못하게 많으니까요.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과 자연발생적인 것을 우리네 마인드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을 우리한테 옮기지요.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 <존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고는 진짜 보호를 그렇게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진정한 보호란 우리가 <존재>와 하나 되고 거기에 헌신할 때 <존재>가 해주는 것이니까요.
마인드는 보호한다는 환상만 주는 것일 뿐, 진정한 보호는 우리가 <존재>와 합일될 때 이 <존재>에서 나온다.
그러나 <존재>와 합일하여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거기에 푹 잠겨야만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또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에 대한 두려움을… 안절부절못하는 마인드가 우리한테 심어 놓는 두려움을 이겨내야합니다.
그런데, 현재를 겁내지 않으려면 또 무슨 묘책이 있을까요?
먼저 이런 점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즉, 직접적인 위험에 접하여 그 반응으로 두려움이 생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 대부분은… 진짜 원인이 없는 두려움이에요. 이것이 걱정 근심이나 동요, 불안, 신경증 등 갖가지 형태의 포비아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실제 벌어지는 것을 겁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것을 겁내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마인드가 우리를 상상의 미래로 데려가는데, 이 미래가 실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모든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고 흔히들 간주합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죽음의 두려움이 실제로는 <거짓된 나>인 에고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차리라!”
바로 에고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물리적인 죽음보다는 소멸을 무서워해요.
에고는 존재하지 못하게 될까봐 겁내며, 마인드는 에고를 고스란히 따라 이 두려움에 맞장구칩니다.
우리는 <존재>의 일부로서 영원합니다.
<존재>는 사라지고 소멸될까 겁내지 않아요. 사라질 수가 없으니까.
한데 <에고>는 늘 소멸될까 두려워해요. 바로 이 때문에 에고는 실제 위험을 겁내기보다는 자신을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예를 들면, <에고>는 창피당하거나 놀림 받는 것을 두려워해요. 하다못해 말싸움에서 지는 것까지 겁을 내지요. 왜냐면, 그런 것이 에고한테는 파멸과 다를 바 없으니까. 우리가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을 부득부득 주장하고 자기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바로 <에고> 때문인데, 그 이유 역시 매한가지에요. 에고 자체가 소멸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 대부분이 (실제가 아니라) 현혹된 것임을 실감하려면, 현재 순간과 결합하여 당장 이 순간에 나를 위협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당장 이 순간에 그런 위협이 없는데 뭔가를 두려워한다면… 마인드가 실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환상을 만들면서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외려) 겁준다는 뜻이에요. 마인드의 농간입니다.
마인드는 두려워함을 보호와 헷갈리면서 이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실제로, 만약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거나 치과에 가거나 성패가 걸린 스피치를 해야 한다면, 어찌 겁나지 않겠어?’
그러면서 이 두려움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건 미망일 뿐입니다. 겁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입니다.
두려움은 전혀 도움 되지 못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건 보호 장치가 아니라 착각이고 환상이다.
이 두려움이란 것은 또 우리 삶의 실제 사건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에이, 괜히 걱정했네, 공연히 마음 졸였어” 하고 중얼거린 적이 얼마나 되나요?
두려움이 있기에 앞으로 닥칠 사건을 준비하여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더러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켜주거나 도울 수 있다는 환상을 낱낱이 파헤쳐 보세요.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질 겁니다.
실습 14
‘난 무엇을 두려워하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이나 앞날이 어떤 불안과 염려를 일으키나요? 어떤 불상사가 생길까봐 겁이 날 수도 있어요. 책임 있는 일 때문에 걱정될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냥 막연히 불안한가요?
눈을 감으세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상상하세요.
그리고 자문하세요. ‘지금 누가 겁을 내는 거야?’
겁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참된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에고>가, <참된 나>가 아니라 <거짓된 나>가 두려워하는 거예요.
에고는 뭔가를 놓치고 잃을까봐, 실패하거나 소멸될까봐 겁을 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발동하여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해요. 하지만 이건 착각이고 망상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그 무엇에서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현재 순간에 있는 동안 우리는 <에고>와 분리되며, 에고의 두려움이 우리한테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나야, <존재>의 일부야. 나는 영원무궁한 공간에, <지금 여기에> 있어, 두려움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는 힘과 보호의 진정한 근원과 연결돼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헤쳐 나아가야 할 것을 죄다 가장 멋지게 해낸다.”
마인드와 동일시하면 그것에 에너지를 더 많이 주며, 마인드를 관찰하면 거기서 에너지를 거둬들인다.
마인드와 동일시하면 심리적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 내며, 마인드를 관찰하면 심리적 시간을 넘어선 차원이 열린다.
마인드를 멈춘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질환을 이겨내고 균형을 되찾는다는 뜻
마인드가 일순간 멎으면서 모든 생각이 멈추고 순간이 정지하는 동시에 온 세상이 정지한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매혹적인 상태인지 압니다. 그건 최고의 의식 상태, 곧 삼라만상과 합일되어 환희를 맛보는 상태로서, 그 순간에는 열락(悅樂)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그걸 잊지 못할 텐데…
그러나 그 상태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하도 쉽게 사라지는 바람에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임의로 다시 그 상태에 들어서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도 역시 느낄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 상태에서 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존재>의 일부이며 우주의 조화를 다 품는 것을 발견하고 <참된 나>를 찾으려면,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야만 가능하지 않겠어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대인들의 생각하는 과정이 정말 병적인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기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외려 마인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요. 이건 신체 세포들의 증식이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는 것과 비슷해요. 균형이 깨지고 병이 생깁니다.
필요할 때 임의로 마인드를 켰다 껐다 하는 법을 배운다면… 생각하는 과정을 통제하게 되어 균형이 복원되겠지요.
그러나 마인드 끄는 방법을 모르고 그렇게 할 힘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마인드에 종속되어 결국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인드를 자기 뜻대로 멈추는 법을 어떻게 익히나요?
아주 드물게 어쩌다 ‘마인드가 잠잠한’ 상태에 (혹은, 무아지경에) 이르는 게 아니라, 늘 의식적으로 고요한 내면 상태에 들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면의 대화를 멈추는 방법은 많은데, 에크하르트 톨레가 아주 유용한 방법을 하나 제시합니다.
의식하는 경우… 이 측면은 ‘난 썩 잘나지 못했어, 별로 가치가 없어’ 같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심란하게 나타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바깥의 뭔가를 몹시 갈망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느낌으로 에둘러서 나타난다.
둘 가운데 어떤 경우든, 자기 내면에서 느끼는 헛헛한 구멍을 채우기 위해 자기가 동일시하는 것들과 에고의 만족을 종종 강박적으로 쫓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재산이나 돈, 성공, 파워, 사회적 인정, 특별한 관계 등을 얻으려고 애쓰는데… 이건 사실 더 좋은 자아감을 느끼고 자신이 더 온전하다고 느끼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얻었다 해도… 헛헛한 구멍은 그대로 있으며 이 구멍에는 바닥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때 그들은 자신을 더 이상 오도하고 현혹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 곤경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을 계속 할 수 있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점점 더 힘들어진다.
에고 마인드에 지배당하는 한 진정으로 안도할 수 없다.
원하던 것을 얻고 갈망이 막 충족된 짧은 기간 이외에는성취감이나 평온을 누릴 수 없다.
<에고>가 자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바깥의 사물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끊임없이 보호 받으려 하고 계속 자양분을 얻으려 한다.
에고가 가장 흔히 동일시하는 것은… 소유물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와 인정, 지식과 교육, 외모, 특별한 능력, 각별한 연줄, 개인과 가족의 내력, 신념 체계 등이며, 또 민족, 인종, 종교 등에서 집단적 일체감도 종종 해당된다.
이 가운데 그 무엇도… <참된 나>가 아니다.
이런 사실이 놀랍고 무서운가?
아니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나?
이 모든 걸 우리는 조만간 내려놓게 될 것이야. 어쩌면 이런 사실을 믿기가 아직은 아주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 어디에서도 우리 각자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믿으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임을…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을 거야. 죽음은 <참된 나>가 아닌 것을 죄다 벗겨낸다. 삶의 신비는 “죽기 전에 죽는” 데 있으며… 죽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것을 어린애한테도 가르칠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축에 들어갈 것이다.
내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감시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기본 원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을 체감함으로써 확실히 깨닫는다면… 가장 강력한 변환 도구를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아무런 내적 저항 없이 아픔을 술술 털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감정적 아픔덩어리와 바짝 동일시하면서 살아왔고 자아감의 전부나 상당 부분이 아픔덩어리에 들어 있다면, 내적 저항이 특히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건… 아픔덩어리에서 불행한 자신을 만들어 냈으며 마인드가 만들어 낸 허구를 ‘나 자신’이라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무자각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든 분리에 (즉, 동일시하기를 멈춤에) 강한 저항이 생길 것이다. 달리 말해, 잘 모르는 것에 뛰어들어서, 불행하지만 친숙한 ‘나’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겪는 게, 아픔덩어리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저항을 관찰하라.
아픔에 집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라. 경계 태세를 아주 높이라. 불행한 상태에서 맛보는 기묘한 만족감을 관찰하라. 그것에 관해 얘기하거나 생각하려는 강박 충동을 관찰하라. 저항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면, 그 저항이 멈출 것이다. 그때 아픔덩어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증인으로 머물러 아픔덩어리의 변형을 주도할 수 있다.
이건 오로지 각자가 개인적으로만 할 수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이미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갖춘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현존 상태에서 연결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하게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각자의 빛이 빠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막 불붙기 시작한 통나무를 이미 훨훨 타고 있는 것 곁에 잠시 두었다가 떼어 놓으면, 첫 번째 통나무는 훨씬 더 강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결국, 그건 같은 불길이야.
그런 불꽃이 되는 것이 영적 마스터의 기능들 중 하나이다. 일부 치유 전문가들도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단, 이미 마인드 수준을 넘어섰고 누군가와 작업하는 동안 강렬한 의식적 존재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우리네 마인드는 활동의 도구요 수단이다. 그것은 특정 작업에 이용할 수 있고, 그 작업이 끝나면 내려놓게 돼 있다. 그게 마인드의 소명이다. 그런 만큼,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의 8할에서 9할쯤은 쓸데없이 반복되는 것일 뿐 아니라, 또 이 반복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그 기능 장애와 종종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는 것. 이게 사실이라는 점은 자신의 마인드를 잘 관찰해 보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하고 해로운 과정이…생명 에너지가 심각하게 유출되는 원인이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중독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중독 형태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 그걸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야.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중독 상태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또 우리한테 거짓된 쾌감을 안기는데, 이 거짓된 쾌감이 나중엔 반드시 고통으로 바뀐다.
- 우리는 왜 강박적인 생각에 중독되나?
왜냐하면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이건 우리가 자아감을 마인드의 내용과 움직임에서 끌어낸다는 뜻이다. 또 왜냐하면, ‘만약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텐데’ 하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입각하여 자신에 대한 심상을 형성한다. 이 허깨비 같은 자신을 <에고>라 부를 수 있다. 에고는 마인드의 움직임으로 이뤄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에고>라는 용어를 여러 사람이 제각각으로 이해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에고란… 자신을 무의식중에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거짓된 나>를 의미한다.
에고한테는 현재 순간이란 게 거의 없다. 그건 과거와 미래만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진실에 완전히 거꾸로 가는 까닭은… 에고 모드에서 작동하는 마인드의 기능에 문제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마인드는 과거를 생생하게 유지하는 데 늘 신경 쓴다. 왜냐하면, 마인드가 보기엔… “아, 과거가 없다면, 넌 도대체 누구야? 네가 있을 수 있겠어?”
마인드는 계속 살아남고 미래에서 해방이나 충족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미래에 투영한다.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젠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난 행복하고 만족할 거야, 편안해질 거야.”
에고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는 건 사실상 현재가 아니다. 즉, 에고는 과거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잘못 지각한다. 혹은, 마인드가 투사된 미래의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 정도로 현재를 축소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관찰해 보면, 이것이 <에고>의 작동 방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해방에 이르는 열쇠는 현재 순간에 있다.
그러나 마인드가 곧 자신이라 여기는 한, 그 현재 순간을 찾을 수 없다.
- 난 분석하고 판별하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아. 더 명료하고 더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내 마인드를 잃고 싶지는 않아. 사유하는 재능은 우리한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야. 그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지 않겠나?
마인드가 우세한 상태는… 의식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긴급히 넘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계속 괴물로 커지는 마인드에 의해 우리가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측면에 불과하다.
생각은 의식 밖에서 실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생각 위로 올라선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동식물 수준으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야.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사고력을 여전히 이용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또 생각하는 마인드를 주로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하면서도, 무의식적인 내면 대화에서는 벗어나 내적인 고요와 평온을 맛본다.
마인드를 이용할 때, 특히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때, 생각과 고요 사이를, 마인드와 무념 사이를, 몇 분마다 오가면 좋다. (no-mind 상태인) 무념이란… 생각이 제거된 의식이다. 그렇게 해야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에 진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과 연결되지 못한 생각은 금방 빈약하고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마인드는 본질상 생존을 위한 장치이다. 다른 마인드들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기 등은 마인드가 곧잘 해내지만, 그런 건 다 창의적인 것이 전혀 못 된다. 진정한 아티스트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마인드가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고요에 머물러서, 뭔가를 만들어 낸다. 그때 마인드가 창의적 임펄스와 직관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 그들의 창의성이 심적으로 고요한 시기에 번뜩였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미국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작업 방법을 알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 아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생각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인데, 그마저도 창의적 과정의 짧고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주 많은 학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한 까닭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지구상의 생명이나 우리 몸이 만들어져 지속되는 기적은 마인드나 사고 활동의 결과가 아니다. 마인드보다 훨씬 더 큰 지능이 (혹은, 지혜가) 작동하는 게 분명하다. 크기가 1천 분의 1 인치밖에 안 되는 사람 세포 하나가 어떻게 6백 쪽짜리 책 1천 권에 해당하는 DNA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일하는 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 또 우리네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지 더 깨닫게 된다. 마인드가 이 내면의 지혜와 다시 연결될 때, 그건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러면 그 자체보다 더 큰 뭔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