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가 과거로 미래로 잡아끌면서 우리를 착각과 망상에 빠뜨린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인드도 구체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마인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즉, 마인드를 우리 <내면의 고요>와 결합하고 <참된 나>와 동일시할 때!
알다시피, <참된 나>와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과정은 양립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생각이 (일절) 없는 상태와 사유 과정 양쪽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있어요.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가 그래서 필요해요.)
어떤 과제를 해결할 때, 이런 사고 형태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내면의 지혜와 <존재>의 이성으로써 검증하고 수정하게 되니까요.
우리네 마인드는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고, 논리는 우리를 실패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존재>의 이성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어. 하지만 만약 어떤 논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내면의 지혜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 있다. 이때는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와 <존재>의 이성이 공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습 46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과제를 생각하세요.
혹은, 어떤 의문점에 대해 찾고 싶은 답이라도 좋아요, 그걸 생각하세요.
이 과제나 의문점을 마음속에서 요약하세요.
다음에 주의를 자기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세요.
이제 우리는 평정 상태로 들어서면서, 갖가지 잡념이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작동이 멈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1~2분 그렇게 몰입하면 충분해요.
다음에 평소의 사고하는 방식으로 돌아오세요.
이제 생각이 더 밝고 선명하고 창의적이 된다는 점을 알아차릴 거예요.
과제에 대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억해 두세요. 적어 두면 더 좋습니다.
다음에 다시 <참된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 내면 깊숙이 몇 분 동안 침잠했다가, 다시 보통 생각으로 돌아오세요. 이때 여러 생각이 이리저리 헤매는 게 아니라 과제를 숙고하는 데 집중된다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일반적인 생각 모드에서 내면의 평정으로 몇 번 오가다 보면, 사유 과정에 새로운 특성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인드로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인드와 내면의 지혜와 몸과 에너지가 다 사유 과정에 포함되어 작동하지요.
이렇게 사유한 결과는 보통 생각 모드 때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겁니다.
이렇게 작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적어 두세요.
그 가운데 해결책을 몇 가지 적으세요.
거기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나중에 고를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순간을 믿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지혜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에고>가 극적인 사건들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생활 방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에고>인데…
이 에고는 일상의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보기를 꺼려하고, 과거의 모든 문제며 미래에 겁내는 것을 죄다 이 일상 상황에 붙들어 맵니다. 그 결과,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두려움이나 재앙이나 불행 따위가 들어섬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가로막습니다.
반면에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결합하면…
극적인 사건들이란 없으며 실제 삶만 있음을 알게 돼요. 실제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이며,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바꾸고 싶은 것은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에고>는 우리 삶의 여건을 부정적인 것 아니면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고 바꿉니다.
한데, 생활 여건이란 사실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데요.
동의하기 어렵다구요? 현재 순간에 들어선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전부 자신의 지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재앙과 불행 뒤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요.
어떤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늘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비롯해 바깥세상의 것은 다 환상적이며 덧없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안에만 있다. 이 내면의 행복 상태에 의거하여 산다면,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그녀는 젊어서 아주 예뻤고,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노년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감도 사라졌고, 그러자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여기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자기 외모와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했다면…
자신의 노화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지켜볼 뿐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을 발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깥 껍질을 통해 한층 더 빛났을 것이며, 그 결과 외적 형태의 (육체의) 노화 과정이 더 늦춰질 수 있었겠지요.
한마디로, 에고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 행복에 뒤이어 그 반대되는 것이 늘 따라붙게끔 설계돼 있어요. 즉, 만약 오늘 뭔가를 얻어서 행복하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그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승 뒤에는 늘 하강이 뒤따르고, 그러다가 또 상승하고 또…
세상살이가 실제 그렇지 않나요? 여기에는 영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 오면 그 뒤에는 늘 그와 전혀 다른 것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때…
즉, 외적인 뭔가로 이뤄지거나 얻는 행복을 추구할 때…
사실은 환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복은 어차피 사라지며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 텐데, 그걸 얻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많이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행복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게 됐다시피) 시간이 환상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행복과 불행이 같은 것이라고? 저런, 무섭고 끔찍해라!” 이런 느낌이 드나요?
하지만 더 알고 나면, 여기에 나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며 Up과 Down이 있어요. 꽃이 피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생도 그래요. 이게 자연스럽고 정상이에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노파심이 좀 드는군요. 혹시…
‘흠,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것이며, 어차피 안정된 진짜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외적인 뭔가를 얻고 이루려고 온힘을 쏟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요?
지금 우리 얘기가 세상사에 무관심이나 반감, 무노동, 무위도식 혹은 나아가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진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원천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요 우리의 <참된 나>입니다.
이건 그 무엇에도 전혀 좌우되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에요. 마르지 않는 행복 샘이에요.
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내면의 <존재>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바깥세상을 피해 움츠러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내면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힘과 가능성을 가외로 얻게 됩니다.
바깥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 이건 불필요한 목표에 힘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것만 얻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걱정근심 없이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실습 43
이 실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누워서 눈 감고 자신의 <내면의 몸체>로 가라앉으십시오.
그 에너지를 느끼세요.
이 내면의 <에너지 몸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합니다.
이 <나>를 에너지처럼 느끼세요.
즉, 형체가 없고 나이도 이름도 사회적 역할도 없는 무엇인가로 느껴 보십시오.
자기 몸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인식하세요.
이 몸이 녹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이 한층 더 가볍고 투명해져요. 형태를 잃고 공간과 하나 되어 완전히 무게를 잃습니다.
이때 당신의 <나>는 간직됩니다. 즉, 당신은 그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이 공간이 되고 공허가 되지만… <진정한 나>로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상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형태의 수준에서는, 형태들의 탄생과 소멸, 창조와 파괴, 성장과 하락이 있다. 이건 어디에나 다 반영되니… 별이나 행성, 천체, 나무와 꽃 등의 생명 주기에, 국가와 정치체제, 문명 등의 흥망성쇠에, 개개인 삶에서 획득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순환에 다 반영된다.
부처는 우리의 행복조차도 고뇌나 고통인 dukkha라고 설파했다. 행복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필히 따른다. 우리네 행복과 불행이 사실상 하나라는 의미이다.
<에고>가 세우는 거짓 목표들을 거부하라
“나한텐 목표를 달성하려는 끈기와 의지가 부족해.”
“앞으로 나아갈 동기가 충분치 않아.”
“난 좀 게으른데다가 과단성도 부족한가 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책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누가 이렇게 거세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거야?’
‘누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원하는 거지?’
‘누가 나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질주로 내모는 것이야?’
그렇게 자문해 보면… 대부분 경우 이런 대답이 나올 거예요.
“이건 <참된 나>가 아니라 <에고>가 그렇게 하는 거야!”
(자기도취, 이기심, 우월감, 지배욕 따위에 사로잡힌) 에고는 늘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건 놀랍지도 않은 것이… 에고는 현재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 결과, 차분하고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요. 에고는 늘 볼이 부어 있고,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고 싶어 합니다.
에고는 늘 우리한테 속삭이고 다그쳐요.
“해야 돼, 해야 돼! 이걸 해, 저것도 해! 여기로 와, 저기로 가,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더 빨리!!”
우리를 게으름뱅이라 부르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탓하며 욕하는 것은… 바로 <에고>입니다.
그러면 에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노출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다가 무심코 자기(에고)를 보게 될까 두려워서… 에고는 어떤 목표들을 향해 돌진하라고 재촉하면서 우리를 끝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분주한 상태에 잡아둡니다.
이런 입장이 혹자에겐 너무 앞서 나간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죠.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갈망이나 목표가 다 <거짓된 나>와 에고가 강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말고 그 무엇으로도 돌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한마디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거기서 삶이 멈추지 않을까? 우리 인류가 몽유병자 집단 같은 것이 되어서 활동할 생각은 없이 꼼짝도 않고 명상만 하는 건 아닐까?”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구상의 삶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끔’ 설계돼 있으니까요. 살려면 활동도 하고 세속적인 재화에 관심도 가져야지요. 물질이란 다 썩기 마련인 만큼, 우리가 보살피지 않으면 아주 빨리 쓸모없게 되잖아요? 게다가 세상살이 여건이 녹녹치 않아서, 우리에겐 먹을거리가 필요하고 악천후도 막아야 해요. 또한 우리는 최대한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기를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물론이고 생활 여건을 위해서는, 또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관심 기울이고 활동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지상에서 그냥 벌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지식 얻고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서점에 가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컴퓨터를 켜야 하잖아요?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인류가) 완전히 행동하지 않는 상태에는 이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행동하려는 충동이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참된 나>와 <존재>에서 나올 수 있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존재>가 우리를 인도할 때… 그때 우리 행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필요한 대로 정확히 해내면서도 힘은 훨씬 덜 소모합니다.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허겁지겁 움직이게 하지 않아요.
<존재>는 우리를 무의미한 목표와 행동으로 내몰지 않아요.
이런 짓은 에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자신의 <거짓된 나>에 의해 움직이는 까닭에 헛되이 부산떨고 무의미하게 행동하면서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요!
만약 <참된 나>가 항상 우리 행동을 주도한다면… 실패나 패배나 좌절 같은 것은 모를 겁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늘 얻으면서, 언제나 행복하고 평온하고 만족하는 가운데 자신이며 세상과 조화롭게 살 겁니다.
‘하아, 거 참 동화 같은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겨운 생활이며 파란만장한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거기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상에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실습 42
‘이것만 달성하면 난 행복해질 거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 그 기대가 적중했나요? 아니면, 웬만큼 채워졌나요?
- 결국에 정말로 행복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씁쓸함이나 실망 같은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진정 순수한 행복이었나요? 그 행복이 오래 가던가요?
- 예전 언젠가 이러이런 목표들을 달성한 것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는데, 그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적은 것 같지는 않았나요?
자신의 사례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면… 다른 이들의 경험을 참조해 보세요.
어렵게 이룬 행복조차 영원하거나 불변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행복을 열심히 좇아가 잡았는데 기대한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에도 주목하세요.
이번에는 그동안 살면서 있었던 이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세요.
즉, 그 무엇도 딱히 열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금 있고 존재하면서 행복 추구가 아니라 실존을 즐겼던 순간들을 기억해 보세요.
이를테면, 휴가 중에 누린 짧은 순간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요?
어쩌면 그건 원하던 목표를 이루면서 맛본 것보다는 더 차분하고 조용한 행복의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더 참된 진짜 행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지금 여기 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누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욕망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재 순간을 훌쩍 건너뛰겠지요. 저 앞 다음 순간에 더 빨리 이르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겐 다음 순간도 현재가 되고 나면 역시 썩 좋아 보이지 않을 게 확실합니다. 그래서 또 뭔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을 좇아 앞으로 계속 달리고… 그러나 더 좋아 보이는 것은 언제나 저 앞에 있으니, 결국 그걸 얻기란 요원하기만 하지요.
단순한 진리를 하나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일부가 되는 <존재>에게는 지상의 그 어떤 일도 여느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 다 소중해요. 순간순간이 다 소중해요.
만약, 어떤 일을 대하면서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흥미롭지 않아 보이니까 얼른 끝내고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을 하겠어’ 생각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많은 것을 잃는 거예요. 문자 그대로 매 순간이 안겨줄 기회와 가능성을 놓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삶의 기쁨과 존립의 충만함을 만끽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우리를 현혹하는 마인드의 문제와 여기서 또 부닥치는군요. 마인드가 속삭여요.
‘지금은 중요한 게 별로 없어, 더 좋은 건 다음에 있을 거야!’
이 속삭임을 믿는다면, 우리네 삶은 온통 기다림과 기대로 바뀝니다.
기다림과 기대함은 마인드의 상태입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현재를 원치 않고 미래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을 원치 않고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에요. 모순이고 비합리적입니다.
늘 뭔가를 기다리고 기대하기만 한다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유일한 실제인 현재 순간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삶을 그냥 흘려보내고는 나중에 가슴 치며 후회하겠지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끔… 미래의 불확실한 뭔가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 있는 것에 왜 즐거워하지 못하겠는가.
자기 자신을 관찰하면서, ‘뭔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사는’ 상황을 다 관찰하십시오.
예를 들어,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빨리 일에 착수할 생각만 하는 것.
하지만 일이란 게 어디로 가지 않아요. 그 일은 또 그 순간에 즐겁게 하면 돼요. 당장에는 서둘지 않으면서 아침 식사를 왜 못 즐기겠어요?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며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현재 순간으로 되돌아오세요.
실제로 뭔가를 기다려야 할 때도 이런 ‘기다림 모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는데 상대가 오지 않거나, 대기실에서 중요한 면담 차례를 기다린다고 쳐요. 시계만 연신 들여다보면서 초조하거나 지루하게 굴고 안달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한데,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뭔가를 기다리면서, 특히 기다림이 길어진다면, 그렇게들 하지요.
하지만 이것 또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소중한 순간으로 즐길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즐길 수 있어요.
기다린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있기만 해도 돼요.
<지금> 순간으로 돌아와서 거기 머물러 있음을 즐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지 여부는 외부 환경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있어야 할 어떤 순간마다 거기에 충실하세요.
그러면 뭔가를 기다리면서도 심심해하거나 신경 곤두세울 일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산다는 것이 어떤 순간에든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실습 16
‘난 이러이런 것 때문에 지금 순간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드나요?
그 ‘이러이런 것’을 다 열거해 보세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세요.
‘나한테는 뭐가 충분치 않나?’
‘난 인생에서 무엇을 얻기 원하나?’
‘나는 왜 <지금> 순간을 더 빨리 건너뛰어 다른 상황으로 가고 싶어 하나?’
당신이 인생을 즐길 수 있으려면, 당신 현실에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나요?
달리 말해, 당신의 기대와 갈망, 꿈을 말해 보세요.
더 많은 돈, 더 흥미로운 일, 다른 사회를 원하나요?
그런 측면에 나쁜 건 전혀 없어요. 하지만 그런 데 전념하느라고 지금 당장 삶을 즐기기 힘들다면… 계획한 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 해도 인생을 기뻐하지는 못할 거예요. 완전한 행복이 되기엔 역시 뭔가가 부족할 테니까!
그 순간이 어떤 것이라 해도 현재 순간을 즐길 줄 알아야만 행복은 찾아듭니다.
눈을 감으세요.
오로지 이 순간만 유일하게 있다고 상상하세요.
지금 이 순간은 한없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며, 시간 바깥에 있습니다.
현재라는 순간이 1초라든가 선형적 시간의 어느 한 조각은 아니잖아요?
만약 우리가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과거나 현재로 건너뛰지 않으면서 현재 순간에 충실하게 머문다면 이 현재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지금 순간에 갖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상상하십시오.
기대나 갈망, 꿈이나 계획을 다 접으세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있어. 난 살아 있어. 난 존재해. 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이 순간에 녹아들고 있어. 이 순간을 난 즐긴다.’
고요한 내면 상태에 잠시 머무르세요.
지금 있다는 것이 큰 기쁨으로 느껴질 거예요.
이 기쁨은 사실 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이 기쁨이 찾아들게 하려고 다음 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그건 항상 현재 순간에 있으면서, 우리도 기쁨과 삶을 접하기 위해 그 순간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떡하든 우리를 현재에서 끌어내려 드는 마인드의 술책을 파헤치고 나면, <지금>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할 거예요. <거짓된 나>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할 거예요. <존재>와 하나 되는 행복을 느낄 거예요. 아픔과 고통을 야기하고 불만과 불행을 초래하는 것을 삶에서 깡그리 몰아낼 겁니다.
무자각 상태는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며 생각의 흐름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생각하는 과정에는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엔 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에고가 만들어 내는 욕망과 감정과 신체 반응도 들어갑니다.
무자각이란 본질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이다. 이건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이다. 이건 삶과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단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회피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맞서지 않아” 하고 말은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반응을 잘 살펴본다면 실제로 우리 안에서는 현실과 투쟁이 늘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까요. 버스에서 불편하게 앉아 장시간 가야 하는 경우에 우리는 뭔가 불쾌감을 느껴요. 한데, 그걸 느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그냥 꾹 참고 시계 들여다보며 ‘이 상태가 곧 끝나겠지’ 하는 생각만 해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아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상황이 얼른 지나가고 다른 뭔가로 대체되기를 바랍니다.
얼핏 보기에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게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듯싶기도 해요. 우리네 마인드가 ‘그렇게 느끼지 마, 그냥 털어 버려, 받아들이지 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있는 것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이건 곧 자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마인드는 그렇게 우리를 호립니다. ‘뭔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속삭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사실 자연스러운 게 전혀 아니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겪고 그 무엇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엔 편안한 것뿐 아니라 불편한 것도 있어요. 불편하고 불쾌하다 해서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고 출구를 못 보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몇 해씩 고민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에 눈을 감고 문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불편한 무엇조차 객관적인 사실로 주어져서 어차피 겪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편이 스르르 사라지며, ‘아하, 그래, 삶의 매 순간을 정말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거기엔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며, ‘이건 나쁜 순간이야, 좋은 순간이야. 이건 편하고 저건 불편해’ 하는 판단이 없어집니다.
불편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피할 수 없는 현재 순간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예전엔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1) 앞에 탄 버스에서 불편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그들 감정과 기분을 느끼면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되겠지요. 2) 혹은 차창 너머 스쳐가는 풍경에 흥미를 느끼거나, 그 상황에서 즐길만한 것을 분명히 찾아낼 겁니다. 3) 물론 무엇보다 더 큰 즐거움은 ‘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등이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지금> 순간을 선명하고 충만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마인드가 강제하는 불편한 상황이나 반응이나 감정의 노예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파괴적인 마인드의 작동 이면에서 다른 뭔가를 보고 느낄 겁니다.
실습 12
뭔가 불편하거나 걱정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 그런 반응을 바깥에서 하듯이 관찰해 보세요. 집중이 잘 안 된다면,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 난 어떻게 느끼고 있지?’
‘무엇 때문에 침착하지 못한 건가?’
두 가지 실재가 (현실이) 있음을 알아둬야겠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서 주변 세상의 실재,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생각과 감정의 실재… 그리고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 실재입니다.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조화롭고 기쁨 넘치고 평온이 가득한 <존재>의 실제로 말이지요.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왜곡되게 볼 수도 있어요. 우리의 내적 불안과 불만과 불쾌함이 투영된 것으로 말입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게 있다면, 그걸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한데, 그런 것은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만 생깁니다.
당신의 경우, 받아들이지 않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말하세요.
“이건 그냥 있는 거야. 난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받아들이면 불편함이나 불쾌감이 사라지고, 그게 어떤 것이든 매 순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는 의식 상태인) 자각으로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설 거예요.
이때의 느낌을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존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존재> 안에 깊이 들어가 있어요.
현재 순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 완전하고 충실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잔잔하면서도 정말 기뻐하는 상태가 꼭 따라붙습니다.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며 감정이며 체험 등이 죄다 썩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상태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거꾸로 현실을 더 깊고 객관적으로 자각하여 납득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상태가 아니라, 에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의 물질세계에서 살고 행동하는 법을 서서히 익히면서도 평온하고 조화로운 <존재>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네 활동이 주눅 드는 건 결코 아니며, 되레 이전보다 힘을 훨씬 덜 들이고도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게 될 거예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힘이 돕는 것이죠.
마인드와 분리되어 잡념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지금> 순간과 하나가 된 덕분에 자기 안에서 <존재>를 찾은 사람에게는 우주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서 우리가 더 우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총기를 띠고 나아가 현명해지기까지 합니다. 무의미한 생각의 흐름 대신 알짜 지식을 갖추게 되니까 말이지요.
잡다한 생각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무익한 마인드 상태요, 내면의 고요는 마인드가 유일하게 거두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인드와 이것이 낳은 생각의 줄기가 우리와 <존재>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데 이것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에 담겨 있는 힘을 전부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자기 생각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가 때로는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에고>요 <거짓된 나>입니다. 바로 이 에고가 자기 자신이며 (생각을 포함하여) 자기가 생산하는 것을 죄다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거예요.
반면에 <참된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중요해 보일 때가 더러 있긴 해도 보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마인드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본질과 진정 융합됨을 느낄 수 있으며, 이때 생각이며 문제며 걱정 따위가 다 의미를 잃고 중요하지 않게 돼요. 그리고 이 덕분에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문제를 대체로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더 심각하게 대할수록 해결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경솔하게 대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라는… 평범한 일들과 일상의 걱정근심을 본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본질이 결코 아니에요. 인생의 으뜸 요소가 아니에요.
가장 급한 것은… <존재>와 하나 되는 것, 또 이 합일을 얻어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잡다한 생각에 빠져서는 이 점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멈추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네 마인드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생각의 내용이 공허한 수다에 불과하여 아무 데도 쓸모없으며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런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면, 자기 생각을 그저 귀하게만 여겨 마냥 매달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요.
실습 11
나중에 마인드에서 또 생각이 줄줄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십시오.
“이 생각들에는 별 의미가 없어. 중요하지 않아. 진지하거나 심각한 게 아니야.”
그러고 나서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세요.
마인드가 무의미한 수다를 떨고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이 생각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반복하여 자신에게 말하세요.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나면... 내면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면서 매혹적이고 조화로운 순간을 접하게 돼요. 거기엔 오직 기쁨만 있을 뿐이요, 아픔이나 고통 따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진짜 자신과 진짜 삶에 파고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젠, 그런 상태를 간간이 누리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다만, 대다수는 그런 번뜩임을 겪고 나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와 늘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출한 기법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지, 그걸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해물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바로 마인드와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존재>와 갈라서게 하는 것이니까.
이 개념을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보지요. 부디 선입견을 다 버리면 좋겠군요.
이런 개념을 접하면서 처음 내보이는 반응은 아마도 이런 저항일 테니까요.
“아니, 마인드와 시간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단 말이야? 마인드와 시간 없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정신 나가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거나, 아니면 존재하기를 아예 끝낸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곧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시간 개념이 없는 동물 수준으로 내려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로, 의식의 다음 진화 단계로 올라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즉,
제한된 인간 마인드에서 우주 마인드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함정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간과 마인드를 장악하게 되겠지요. 장악한다고 해서 마인드와 시간한테 무슨 거창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둔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삶을 저희 뜻대로 결정하게 놔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둘을 지배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마인드와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아주 밀접한데, 어떻게 그런지는 이제 곧 알아볼 겁니다. 마인드는 시간과 어울려서 우리가 <존재>로 달려가지 못하게 함정을 만들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볼까요.
마인드는 어떻게 작동하나
사람에게 마인드가 부여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마인드만큼 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집을 짓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거나, 혹은 뭔가를 손수 만들거나 사업 전략을 세우거나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물론, 계획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분석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최선을 택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 궁리해야겠지요.
구체적인 뭔가를 입안하고 실행할 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에 걸맞게 활용합니다. 이때 마인드는 우리가 작업에 동원하는 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네 마인드의 역할이 그런 일에만 국한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데, 인류는 사실상 큰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마인드에게 파워를 지나치게 많이 내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내 마인드가 바로 나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마인드를 과제 해결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마인드가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게 됐습니다.
자신에게 조용히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흠, 내 머릿속을 마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거기서 제멋대로 따로 살면서 말이야.’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마인드가 당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절대고 속삭이고 지시하고 주장하고 요구한다는 사실도 분명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리고…
이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이지 잠깐이나마 쉴 틈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이건 곧 우리가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마인드가 제 본연의 자리와 역할을 망각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마인드가 외려 주인을 쥐고 흔들어요.
마인드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마인드가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판단하고, 그 모든 것에 의견 덧달고 꼬리표 붙여서 분류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변의 사물과 현상과 사안과 사람에 대해 당신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깊이 규명하고 인식할 시간을 채 다 쓰지도 못했는데, 마인드가 먼저 중뿔나게 제 판단을 들이밉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실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혹은, 보호하는) 방패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생각의 차단막입니다.
이 차단막이 당신과 당신 자신을, 당신과 동료들을, 당신과 세상을, 당신과 자연을, 그리고 당신과 신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분리 망상을 일으킵니다.
덧붙이자면, 이 분리 망상을 우리의 거짓된 나인 <에고>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쓰일 때 마인드는… 유용하다. 갖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체가 될 때 마인드는… 해롭다.
자신의 머릿속 대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커녕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야 할 순간에는 역부족이 될 정도로 우리 힘을 잔뜩 빼앗기만 할 뿐이에요.
머릿속 대화에 들어가는 힘은 다 허튼 데에… 그 무엇에도 소용없는 말과 생각들을 찧고 빻는 데 쓰이기만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 광인들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군요.
그들은 저 혼자서 뭔지 모를 소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려요.
그러나 광인이라 불리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상인’들은 기껏해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니까요.
엄밀히 보자면, 우리네 대다수가 사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 목소리’의 힘에 전혀 맞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니까요.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리네 ‘머릿속 목소리’는…
멀고 가까운 기억을 더듬고, 불평하며 비탄에 빠지고, 뭔가를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뭔가에 화내고 뭔가를 예상하고, 뭔가를 우려하고 희망하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비교하고 화내고 욕하고, 판단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때론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그게 자신의 일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하겠다고 동의해서 하긴 하는데, 마음 한편에서 화가 나고 저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무언의 분노를 품고 있나?
이 때문에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만큼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나?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라.
노여움이나 께름칙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는 않나?
만약 있다면, 그걸 마인드와 감정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라.
이 상황을 피하려고 마인드는 어떤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나?
다음에, 그 생각들에 대해 몸이 드러내는 반응인 감정을 살펴보라. 그 감정을 느끼라.
느낌이 좋은가? 아니면, 불쾌한가?
그것이 실제로 당신 내면에 두려고 하는 에너지인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나?
어쩌면 당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하는 일이 지겨울 수도 있고,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정직하지 않거나 짜증을 유발하거나 혹은 지각이 없을지도… 하지만 그런 건 다 상관이 없다.
이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옳든 아니든 차이가 전혀 없다.
사실, 당신은 지금 있는 것에 저항하고 있다. 현재 순간을 자신의 적으로 바꾸고 있다. 내면과 외부 간에 충돌과 불만을 만들고 있다.
당신의 불만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내적 존재뿐 아니라 당신도 포함되는 집단적 인간 심리까지 더럽힌다. 지구 오염은 인간들 내면의 심적 오염이 밖으로 반영된 것일 뿐이다. 지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 공간에 책임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속으로 불만이나 화를 품고 있을 때 탈출구는 두 가지다.
1)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당신이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낱낱이 표현하기, 아니면…
2) 상황을 둘러싸고 마인드가 만들어 내며 거짓된 자아감 강화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부정성을 내버리기. 이것의 무익하고 무의미함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정적 성향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최적의 방법이 못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부정성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잡아둠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수반되어 실행된 것은 무엇이든 그것으로 오염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과 불만을 더 많이 초래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부정적인 내면 상태에는 전염성이 있다.
불만은 신체 질환보다 더 쉽게 퍼진다. 불만은 공명 법칙을 통해 다른 이들의 잠복된 부정성을 촉발하고 키운다. 물론, 그들이 면역성을 얻기 전까지, 즉, 고도의 의식을 얻기 전까지는 그렇다.
우리는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나? 아니면,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있나?
우리는 다 자신의 내면 공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누가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면에서 하는 대로 바깥에서도 하기 마련이다. 만약 사람들이 내면의 오염을 청소한다면, 외부도 더 이상 오염시키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이 제시한 대로 부정성을 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내던지라. 손에 들고 있는 뜨거운 석탄덩어리를 어떻게 내던지나? 가지고 다니는 짐 가운데 무겁고 쓸모없는 것을 어떻게 내던지지? 아픔 겪거나 무거운 짐 지기를 더 이상 원치 않음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놓아버리면 된다.
고통의 몸체 같이 깊은 무자각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 같이 깊은 아픔은… 대개 우리네 현존의 빛과 결합된 수용을 통해… 즉, 지속적인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며 받아들임으로써 변환해야 한다.
이에 반해, 평범한 무자각은 대부분 쉽게 내던질 수 있다. 그걸 더 이상 원치 않으며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뭔가에 대뜸 조건반사를 내보일 게 아니라 다른 선택의 여지도 있다는 걸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건 다 <지금> 순간의 힘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 만약 당신이 어떤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선과 악의 정신적 양극단을 만드는 건 아닌가?
그건 아니다. 양극단은 초기 단계에서 만들어졌다. 당신 마인드가 현재 순간을 나쁜 것으로 판단했을 때 이미 양극단이 생겼다. 이 판단이 그때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
- 그러나 당신이 어떤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면, 그런 게 있어선 안 되며 그런 감정을 지니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나쁜 것이라 판단하거나 그런 감정은 품으면 안 된다고 하기 보다는 어떤 감정이든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원망을 느껴도 좋고 노여움이나 짜증, 변덕을 느껴도 좋아. 안 그러면, 우린 자신을 억누르고 내적 갈등이나 부정에 빠진다. 어떤 것이든 다 괜찮다.
지당한 말씀. 어떤 마인드 패턴이나 감정이나 반응이 생기면, 그걸 받아들이라. 예전에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뭘 선택해야 할지도 몰랐어. 이건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야.
만약 선택의 여지가 있었거나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의식했다면, 우리는 고통과 기쁨, 평온과 불안, 평화와 갈등 중에서 뭘 택했을 것인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안녕 상태를 망가뜨리고 내면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택했을까?
나쁘고 안 좋음을 뜻하는 감정을 전부 난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 ‘넌 이걸 하면 안 돼’ 같은 의미에서 나쁜 게 아니라, 속이 불편한 느낌 같이 명백하고 실제로 나쁜 것을 뜻하는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
20세기에만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1억 명 이상이나 죽일 수 있었나?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을 가한다. 서로에게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감각 있는 존재들에게 매일 야기하는 고문과 고통과 잔혹함, 정신적 감정적 물리적 폭력까지 감안하면 참으로 끔찍하다.
그런 사람들은 과연 자신의 자연스러운 내면 상태와 내면에서 맛보는 삶의 기쁨을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아주 부정적인 상태에 있고 자신을 정말 혐오스럽게 느끼는 사람들만이 자기감정을 반영하여 그런 현실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부양하고 떠받치는 자연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인간이란 위험하리만치 광기에 사로잡히고 아주 병든 부류이다. 이건 판단이 아니야. 이건 사실이다. 한데, 이 광기 아래 멀쩡하고 온전한 정신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치유와 구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 이제 당신 얘기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면, 자신의 분노나 적대감, 까칠함 등을 수용할 때 그런 것을 더 이상 맹목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른 이들한테 투사할 개연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확실히 맞다. 하지만 그게 혹시… 자기 기만은 아닌지 궁금하다.
당신 경우처럼 한동안이라도 수용을 실천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며, 그 단계에서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말하는 ‘수용’이란 한낱 정신적인 라벨일 뿐이며, 이 상태에서는 당신의 <에고>가 여전히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며 당신의 주변 환경이며 당신의 ‘지금 여기서’와 분리된 느낌만 커지게 된다.
알다시피 분리성은 에고의 정체감을 이루는 기반이다. 진정으로 수용했다면 그런 느낌들이 즉각 변형됐을 것이다. 당신 표현대로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것을 정말 잘 알았다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애초에 품고 있었겠나? 그런 감정은 지금 있는 것을 판단하고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생길 수 없을 거야.
당신 마인드에는 ‘모든 게 괜찮아’라는 생각이 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그걸 믿지 못하고, 그래서 정신과 감정 측면의 낡은 저항 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야. 이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고.
- 그것도 괜찮지, 뭐.
흠, 당신은 “난 무자각 상태가 되어 고통 받아도 좋아!” 하고 말하려는 건가? 걱정하지 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럴 권리를 아무도 빼앗지 않을 테니까. 어떤 음식을 먹고 탈이 난 걸 알고 나서도 그걸 계속 먹으면서 “아, 탈이 나도 괜찮아” 하고 계속 주장하고 싶은 건가?
지금 하는 일에 기쁨이나 편안함, 경쾌함이 혹시 없다 해도, 그 일을 꼭 바꿔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를 바꾸기만 해도 충분할 수 있다.
‘어떻게’가 늘 ‘무엇을’보다 더 중요하다.
그 일을 통해 성취하려는 결과보다 일 자체에 주의와 관심을 훨씬 더 많이 기울일 수 있는지 살펴보라. 이 순간이 선사하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돌리라. 이건 또 지금 있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뭔가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현재 순간을 존중하는 즉시…모든 불행과 투쟁이 사라지고 삶이 기쁘고 평온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현재 순간을 의식하면서 행동할 때…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심지어 아주 단순한 행동조차, 보살핌과 애정과 양질의 느낌으로 가득 찬다.
∫
그러니 행동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행동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면 그에 맞추어 결실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이건 강력한 영적 실천이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영적 가르침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매력적인 <Bhagavad Gita>에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실에 집착하지 않음을 ‘카르마 요가’라 부른다. 또 ‘봉헌된 행동’의 길로 묘사한다.
<지금> 순간부터 강박적인 노력이 멈출 때 <존재>의 기쁨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흘러든다. <지금> 순간에 있는 것에 주의를 돌리는 즉시, 우리는 실재와 고요와 평화를 느낀다. 성취와 만족 때문에 더 이상 미래에 매달리지 않으며, 미래를 구원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실패나 성공이 우리 내면의 <존재> 상태를 바꾸지 못한다. 이건 곧 자신의 여러 생활 상황에서 삶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심리적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자아감은 개개인의 과거가 아니라 <존재>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미 있는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뭔가가 될 심리적 필요성이 사라진다. 세상 살면서 자신의 인생 상황에 따라 우리는 실제로 부자가 되고 지식이 풍부하고 성공하고 이런저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하지만, <존재>라는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제 완전하고 온전하다.
- 이 온전한 상태에서 우리는 바깥의 뭔가를 여전히 추구할 수 있거나 추구하려 들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미래의 어떤 것이나 누군가가 우리를 구하거나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망상적인 기대는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우리네 삶의 상황에 관해 말하자면, 거기엔 달성하거나 획득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이건 형태들의 세계요 득실의 세계이다.
하지만 더 깊은 수준에서 우리는 이미 완전한 상태이며, 이걸 깨달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이면에는 신나고 즐거운 에너지가 있다.
심리적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제 두려움이나 분노, 불만, 혹은 뭔가가 될 욕구 등에 쫓겨서 비장한 각오로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실패가 <에고>에겐 곧 자신의 상실을 뜻하는데, 우리는 에고를 떨쳐냈기 때문에 실패할까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깊은 자아감이 <존재>에서 나올 때, ‘뭔가가 되겠다’는 심리적 욕구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의 행복이나 자아감은 결과와 무관하게 되며, 따라서 두려움이란 걸 모르게 된다.
형태들의 세계, 얻고 잃는 세계, 태어나고 죽는 세계처럼 영속성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걸 찾으려 들지 않는다. 상황이나 조건, 자리, 사람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고통을 겪는 따위가 우리에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 완전한 의식이나 영적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내 마인드의 작동에 관해 아직도 많이 알아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마인드 문제는 마인드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어. 마인드의 기본적인 기능 장애가 무엇인지 납득하게 되면… 따로 알거나 이해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마인드의 복잡한 성질을 연구하면 훌륭한 심리학자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마인드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광기를 연구한다 해서 멀쩡한 정신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자각 상태의 기본 메커니즘을 우린 이미 알아봤다. 즉…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 거짓된 나인 <에고>가 생겨나고 --> 이 에고가 <존재>에 뿌리내린 <참된 나>를 대체하면서 --> 예수가 이른 대로,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잘려 난 가지’ 신세가 된다.
에고의 욕구에는 끝이 없다. 그건 자신이 취약하고 위협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두려움과 결핍의 상태에서 산다. 마인드의 근본적인 기능 장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되면, 그 장애의 무수한 증상을 일일이 탐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 장애를 개개인의 복합적인 문제로 만들 필요도 없게 된다.
물론 <에고>는 그런 문제를 아주 좋아한다. 에고는 미망에 빠진 자아감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빈대 붙을’ 뭔가를 늘 찾고 있으며, 이른바 문제라는 것들에 쾌히 들러붙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 경우 자아감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에고는 문제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데… 왜냐하면 그건 자신이 없어진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무자각적인 에고는 아픔과 고통을 키울 수 있다.
따라서 무자각의 뿌리가 감정이나 마인드와 자신을 동일시함에 있다는 점을 알기만 하면, 우리는 마인드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우리는 실재하게 된다. 실재할 때… 마인드가 본래대로 있게 하면서도 그 그물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다.
마인드 자체에 기능 장애가 있는 건 아니야. 이건 아주 훌륭한 도구야. 기능 장애는 우리가 마인드에서 자신을 찾고 그걸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 생긴다. 그때 마인드는 에고의 마인드가 되어 우리 삶 전체를 쥐고 흔든다.
의식하는 경우… 이 측면은 ‘난 썩 잘나지 못했어, 별로 가치가 없어’ 같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심란하게 나타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바깥의 뭔가를 몹시 갈망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느낌으로 에둘러서 나타난다.
둘 가운데 어떤 경우든, 자기 내면에서 느끼는 헛헛한 구멍을 채우기 위해 자기가 동일시하는 것들과 에고의 만족을 종종 강박적으로 쫓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재산이나 돈, 성공, 파워, 사회적 인정, 특별한 관계 등을 얻으려고 애쓰는데… 이건 사실 더 좋은 자아감을 느끼고 자신이 더 온전하다고 느끼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얻었다 해도… 헛헛한 구멍은 그대로 있으며 이 구멍에는 바닥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때 그들은 자신을 더 이상 오도하고 현혹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 곤경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을 계속 할 수 있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점점 더 힘들어진다.
에고 마인드에 지배당하는 한 진정으로 안도할 수 없다.
원하던 것을 얻고 갈망이 막 충족된 짧은 기간 이외에는성취감이나 평온을 누릴 수 없다.
<에고>가 자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바깥의 사물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끊임없이 보호 받으려 하고 계속 자양분을 얻으려 한다.
에고가 가장 흔히 동일시하는 것은… 소유물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와 인정, 지식과 교육, 외모, 특별한 능력, 각별한 연줄, 개인과 가족의 내력, 신념 체계 등이며, 또 민족, 인종, 종교 등에서 집단적 일체감도 종종 해당된다.
이 가운데 그 무엇도… <참된 나>가 아니다.
이런 사실이 놀랍고 무서운가?
아니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나?
이 모든 걸 우리는 조만간 내려놓게 될 것이야. 어쩌면 이런 사실을 믿기가 아직은 아주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 어디에서도 우리 각자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믿으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임을…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을 거야. 죽음은 <참된 나>가 아닌 것을 죄다 벗겨낸다. 삶의 신비는 “죽기 전에 죽는” 데 있으며… 죽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것을 어린애한테도 가르칠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축에 들어갈 것이다.
내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감시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기본 원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을 체감함으로써 확실히 깨닫는다면… 가장 강력한 변환 도구를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아무런 내적 저항 없이 아픔을 술술 털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감정적 아픔덩어리와 바짝 동일시하면서 살아왔고 자아감의 전부나 상당 부분이 아픔덩어리에 들어 있다면, 내적 저항이 특히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건… 아픔덩어리에서 불행한 자신을 만들어 냈으며 마인드가 만들어 낸 허구를 ‘나 자신’이라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무자각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든 분리에 (즉, 동일시하기를 멈춤에) 강한 저항이 생길 것이다. 달리 말해, 잘 모르는 것에 뛰어들어서, 불행하지만 친숙한 ‘나’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겪는 게, 아픔덩어리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저항을 관찰하라.
아픔에 집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라. 경계 태세를 아주 높이라. 불행한 상태에서 맛보는 기묘한 만족감을 관찰하라. 그것에 관해 얘기하거나 생각하려는 강박 충동을 관찰하라. 저항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면, 그 저항이 멈출 것이다. 그때 아픔덩어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증인으로 머물러 아픔덩어리의 변형을 주도할 수 있다.
이건 오로지 각자가 개인적으로만 할 수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이미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갖춘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현존 상태에서 연결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하게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각자의 빛이 빠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막 불붙기 시작한 통나무를 이미 훨훨 타고 있는 것 곁에 잠시 두었다가 떼어 놓으면, 첫 번째 통나무는 훨씬 더 강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결국, 그건 같은 불길이야.
그런 불꽃이 되는 것이 영적 마스터의 기능들 중 하나이다. 일부 치유 전문가들도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단, 이미 마인드 수준을 넘어섰고 누군가와 작업하는 동안 강렬한 의식적 존재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 멋진 자동차를 한 대 뽑았어요. 신나지요. 괜히 '폼'도 잡고 싶고... 그런데 어느 날 옆구리에 흠집이 난 걸 발견했어요. 속상해요, 안 해요? 화가 나요, 안 나요? 그래서 며칠 동안 우울하고 밥도 잘 안 넘어갔다구요? ㅠ.ㅠ
-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기 시간이나 생활도 팽개치고 직장에 '올인'해요. 몰지각한 상사가 가끔 눈꼴시게 굴어도 꾹 참아요. '에이, 요즘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데, 여기서 떨려나면 어떡해? 이게 내 밥줄이니까 견뎌야지 별 수 있겠어?' ㅠ.ㅠ
- 자기 일이나 취미 활동도 포기하고 아이들 키우는 데 헌신했어요. 가끔 속 썩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쁘게 잘 크는 걸 보니까 흐뭇했어요. 자신이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 크고 나니까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내 곁을 떠나서 잘 찾아오지 않아요. 전화도 별로 안 해요. '에그, 자식도 크면 남이야!' 절로 탄식이 나와요. 허전함과 상실감마저 든다구요? ㅠ.ㅠ
이런 말이 (진리가) 하나 있더군요.
우리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에 지배당하지만, 자신과 분리하는 것들은 지배하고 컨트롤한다.
(이 말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 대신 '집착' 같은 단어를, 분리 대신 '초연(하게 대하다)' 같은 단어를 써도 무방하겠네요.)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나 시기에 가장 소중해 (때론, 절실해) 보이는 것을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커요. 또, 살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이 주로 수행하는 역할, 혹은 자신의 주된 정신 방향이나 기능을 자신과 동일시해요.
자동차며 직장이며 자녀를, 성공이나 출세나 직위를, 아름다운 외모나 옷이나 액세서리를, 근사한 집이나 돈이나 하다못해 구두까지도... '나한테 중요한 것'이라 여길 수는 있는데, 그게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할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어떤 문제가 생기냐구요?
'나에게 아주 좋고 소중하고 절실한' 것들에 얽매여,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소중한 <나>를 홀대하면서 그 <나>가 한껏 펼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 되니까요. 게다가 <나>가 없는 바에야 자동차며 자녀들이며 출세며 돈이며 예쁜 얼굴이며 정의를 위한 투쟁이며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 등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나오지 않았겠어요? (이 대목에서 자칫 곡해를 살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 길어지니까 일단 넘어가기로 하지요. ^^)
자기 안팎의 어떤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한동안 즐겁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여기엔 심각한 단점이 있어요. <나>에게 위험하기까지 해요.
먼저, 외적인 요소를 들어볼까요. 결론적으로...
직장을 잃는다고 해서 <나>가 죽나요? (당장엔 힘들 수 있지만, 다른 직장을 찾으면 돼요.)
실패했다고 해서 <나>가 사라지나요? (칠전팔기는 <나>를 잘 간수할 때 가능하잖아요?)
자동차가 긁혔다고 해서 <나>까지도 긁어야 (속상해하고 화내야) 하나요?
자식들이 '코빼기도 잘 안 비친다' 해서 원망할 필요가 있나요? 그들에겐 그들 삶이 있는 걸요. 새도 키워 놓으면 나가서 따로 둥지 틀잖아요? 그게 자연과 삶의 정상적인 흐름인 걸요. '아, 그래. 어릴 때처럼 늘 곁에서 재롱 떨고 등 두드려 주기를 바랄 순 없어. 열심히 키워서 내보냈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이젠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자신의 주된 역할이나 기능을 계속 자신과 동일시하면... 결국엔 사는 게 힘들어질 수 있어요. 아니, 그러기가 십상이에요. 상실감이나 좌절감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위험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죠.
나이 들면서 체력이 달리는 운동선수, 젊었을 때의 미모가 시들어 가는 여배우, 졸업 후에 새로운 책임감에 시달리는 대학생, 치열하게 일했지만 어쩌다 실패한 사업가, 근사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재산가... 등이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진다면, 그건 그들이 '전성기의 체력'을, '한창 때 미모'를, '학생 신분'을, '일이나 돈'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에요.
내적인 요소로 보자면, 자신의 머리나 (지력이나) 자기감정이나 몸 같이 자신의 특정한 일부와 동일시하는 경우에 일이 더 안 풀리고 삶이 더 힘들어질 수 있어요. 왜냐구요? 왜냐하면... 흔히 하는 이런 말들이 반증이 될 수 있겠네요.
"머리만 믿고 까불다가 낭패를 봤어.'
"자기감정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어."
자신의 특정한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즉, 자신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네 <진짜 나>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셈이에요. (지금 우리 얘기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한 토막이에요.)
그 결과, '어디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 늘 기껍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것밖에 안 되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야?'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면 우울해지지 않겠어요? 자칫 열등감에 시달릴 수도 있어요.
이건 다 <나> 자체는 지극히 다양하고 심오하고 힘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나>의 일부만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진면목을 스스로 다 드러내지 않기 (혹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점을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Assagioli가 알아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분석과 명상을 결합하여 <psychosynthesis, 정신종합요법>을 만들어 냈어요. '동일시'나 '분리'라는 용어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론과 실습이 좀 많은데, 여기서는'개인의 신체며 감정이며 지력과 분리하는' 실습을 하나 간략히 소개하지요.
조용한 곳에 홀로 편하게 앉아서 긴장을 푸세요. (이완 실습을 미리 해도 좋아요.)
숨을 깊고 느리게 몇 번 들이쉬고 내쉬세요. (이완과 호흡 실습은 우리 블로그에 많아요.)
다음에 아래 텍스트를 의미 새겨 가면서 자신에게 천천히 말해 주세요.
1.
나에게 몸이 있지만, 몸이 나는 아니다. 내 몸은 건강하거나 아플 수 있고, 피곤하거나 가뿐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상태가 나에게, <참된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 몸이 내가 세상 살면서 인식하고 활동하는 데 소중한 도구임은 분명해. 하지만, 도구보다 더 큰 무엇은 아니야. 나는 늘 건강하도록 몸가축에 소홀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몸은 아니야. 나에게 몸이 있지만, 이 몸이 곧 ‘나’는 아니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1~2분 동안 뜻을 음미하면서 몇 번 더 비슷하게라도 되풀이하세요. 마지막 어구가 핵심이에요. 이건 요 다음 2번과 3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2.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내 감정은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다. 내 감정은 사랑에서 증오로, 평온에서 분노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뀔 수 있어. 하지만 내 본성과 내 진짜 천질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그대로 나야. 이를테면, 분노의 파도에 휩쓸릴 때가 더러 있지만, 시간 지나면 그게 사라진다는 걸 난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노가 아니다. 더 나아가, 내 감정이 <나>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 내 감정을 내가 지켜보고 이해하면서 다스리고 활용하고 조화롭게 통합하는 법도 점차 배울 수 있어. 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이 곧 나는 아니다.
3.
나에게 마인드가 (마음이, 지력이) 있지만, 마인드가 나는 아니야. 내 마인드는 뭔가를 탐구하고 나를 표현하는 데 소중한 도구야. 하지만 그것이 내 본질은 아니다. 사상이며 지식이며 경험을 새로 얻을 때마다 내 마인드의 내용은 늘 달라진다. 가끔은 내 말을 안 듣기도 해.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인드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어. 마인드는 내 안팎의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기관인 것이지 ‘나’가 아니야. 나에게 마인드가 있지만, 이 마인드가 곧 나는 아니다.
이건... 우리한테 중요하긴 하지만 정작 <나> 자신보다는 덜 중요한 것을 떼어내는 (분리하는) 단계에요. 물론, 그 다음에 동일시 단계가 이어지겠지요. 그건 별도로 다루겠어요.
결국 <분리> 작업이란 가장, 정말, 진짜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과 그 아래로 중요한 것들을 구별하는 일이에요. 구분하고 판별할 줄 알면, 일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삶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마음에 너무 담아두지 마."
"뭐 사소한 일에 목숨 걸 일 있나!"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런 말들도 분리의 중요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저 실습을 상황에 맞게 더 확장하고 변형할 수 있어요.
(지금 나에게 소중하고 절실한) 이 자동차가, 이 직장이, 직업이, 출세가, 성공이, 자녀들이, 부모가, 학업이, 발표가, 면접이, 돈이, 집이, 예쁜 얼굴이, 근육질 몸이, 옷이, 하다못해 이 구두까지도... 곧 <나>인 것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여기서 두 가지만 덧붙여야겠네요.
1.
노파심에서 먼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해서 일이나 자녀나 학업 등등에 소홀히 대해도 된다는 것은 정말로 절대 아니에요. 저렇게 한다면, 오히려 저 모든 것이 더 잘 될 거예요. 그 이유는... 저렇게 할 때 우리가 더 자유롭고 편해지며 크고 넓게 보게 되니까요.
"잡으려면 먼저 놓아주라" 하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겠어요.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서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서고 승복하고 용인하고 받아들이기 같은 개념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듯한데, 이 역시 우리가 따로 다룰 대목이에요.)
2.
'그렇다면, 그놈의 <나>는 도대체 뭔데 돈이나 출세나 권력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드나요? 흠... 이건 제법 긴 얘기가 되겠어요. 이때의 <나>는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만 안기는) '거짓된 나'나 <에고>가 아니라, 진정 <참된 나>를 가리킨다는 것만 우리가 일단 알아두지요. 그리고 그 안에 (우리 내면에!) 보물이 들어 있어요. (<낡은 궤짝의 비밀> 포스팅을 보면 좋겠어요.)
한창 때 미모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 나이 들어 그 미모가 사라지면서 인기도 사라지자, 실망하고 좌절하던 끝에 아예 세상을 등진 여배우들이 나라 안팎으로 제법 있어요. 그들이 만약 '한창 때 미모'를 곧 자기 자신이라 여기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닦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외려 더 꽃 파웠을 거예요. 예를 들어, 아프리카 아이들 돌보는 오드리 햅번...
우리네 마인드는 활동의 도구요 수단이다. 그것은 특정 작업에 이용할 수 있고, 그 작업이 끝나면 내려놓게 돼 있다. 그게 마인드의 소명이다. 그런 만큼,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의 8할에서 9할쯤은 쓸데없이 반복되는 것일 뿐 아니라, 또 이 반복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그 기능 장애와 종종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는 것. 이게 사실이라는 점은 자신의 마인드를 잘 관찰해 보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하고 해로운 과정이…생명 에너지가 심각하게 유출되는 원인이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중독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중독 형태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 그걸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야.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중독 상태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또 우리한테 거짓된 쾌감을 안기는데, 이 거짓된 쾌감이 나중엔 반드시 고통으로 바뀐다.
- 우리는 왜 강박적인 생각에 중독되나?
왜냐하면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이건 우리가 자아감을 마인드의 내용과 움직임에서 끌어낸다는 뜻이다. 또 왜냐하면, ‘만약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텐데’ 하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입각하여 자신에 대한 심상을 형성한다. 이 허깨비 같은 자신을 <에고>라 부를 수 있다. 에고는 마인드의 움직임으로 이뤄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에고>라는 용어를 여러 사람이 제각각으로 이해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에고란… 자신을 무의식중에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거짓된 나>를 의미한다.
에고한테는 현재 순간이란 게 거의 없다. 그건 과거와 미래만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진실에 완전히 거꾸로 가는 까닭은… 에고 모드에서 작동하는 마인드의 기능에 문제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마인드는 과거를 생생하게 유지하는 데 늘 신경 쓴다. 왜냐하면, 마인드가 보기엔… “아, 과거가 없다면, 넌 도대체 누구야? 네가 있을 수 있겠어?”
마인드는 계속 살아남고 미래에서 해방이나 충족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미래에 투영한다.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젠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난 행복하고 만족할 거야, 편안해질 거야.”
에고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는 건 사실상 현재가 아니다. 즉, 에고는 과거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잘못 지각한다. 혹은, 마인드가 투사된 미래의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 정도로 현재를 축소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관찰해 보면, 이것이 <에고>의 작동 방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해방에 이르는 열쇠는 현재 순간에 있다.
그러나 마인드가 곧 자신이라 여기는 한, 그 현재 순간을 찾을 수 없다.
- 난 분석하고 판별하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아. 더 명료하고 더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내 마인드를 잃고 싶지는 않아. 사유하는 재능은 우리한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야. 그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지 않겠나?
마인드가 우세한 상태는… 의식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긴급히 넘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계속 괴물로 커지는 마인드에 의해 우리가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측면에 불과하다.
생각은 의식 밖에서 실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생각 위로 올라선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동식물 수준으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야.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사고력을 여전히 이용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또 생각하는 마인드를 주로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하면서도, 무의식적인 내면 대화에서는 벗어나 내적인 고요와 평온을 맛본다.
마인드를 이용할 때, 특히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때, 생각과 고요 사이를, 마인드와 무념 사이를, 몇 분마다 오가면 좋다. (no-mind 상태인) 무념이란… 생각이 제거된 의식이다. 그렇게 해야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에 진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과 연결되지 못한 생각은 금방 빈약하고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마인드는 본질상 생존을 위한 장치이다. 다른 마인드들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기 등은 마인드가 곧잘 해내지만, 그런 건 다 창의적인 것이 전혀 못 된다. 진정한 아티스트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마인드가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고요에 머물러서, 뭔가를 만들어 낸다. 그때 마인드가 창의적 임펄스와 직관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 그들의 창의성이 심적으로 고요한 시기에 번뜩였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미국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작업 방법을 알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 아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생각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인데, 그마저도 창의적 과정의 짧고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주 많은 학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한 까닭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지구상의 생명이나 우리 몸이 만들어져 지속되는 기적은 마인드나 사고 활동의 결과가 아니다. 마인드보다 훨씬 더 큰 지능이 (혹은, 지혜가) 작동하는 게 분명하다. 크기가 1천 분의 1 인치밖에 안 되는 사람 세포 하나가 어떻게 6백 쪽짜리 책 1천 권에 해당하는 DNA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일하는 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 또 우리네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지 더 깨닫게 된다. 마인드가 이 내면의 지혜와 다시 연결될 때, 그건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러면 그 자체보다 더 큰 뭔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