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수준에서는, 형태들의 탄생과 소멸, 창조와 파괴, 성장과 하락이 있다. 이건 어디에나 다 반영되니… 별이나 행성, 천체, 나무와 꽃 등의 생명 주기에, 국가와 정치체제, 문명 등의 흥망성쇠에, 개개인 삶에서 획득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순환에 다 반영된다.
부처는 우리의 행복조차도 고뇌나 고통인 dukkha라고 설파했다. 행복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필히 따른다. 우리네 행복과 불행이 사실상 하나라는 의미이다.
<에고>가 세우는 거짓 목표들을 거부하라
“나한텐 목표를 달성하려는 끈기와 의지가 부족해.”
“앞으로 나아갈 동기가 충분치 않아.”
“난 좀 게으른데다가 과단성도 부족한가 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책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누가 이렇게 거세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거야?’
‘누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원하는 거지?’
‘누가 나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질주로 내모는 것이야?’
그렇게 자문해 보면… 대부분 경우 이런 대답이 나올 거예요.
“이건 <참된 나>가 아니라 <에고>가 그렇게 하는 거야!”
(자기도취, 이기심, 우월감, 지배욕 따위에 사로잡힌) 에고는 늘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건 놀랍지도 않은 것이… 에고는 현재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 결과, 차분하고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요. 에고는 늘 볼이 부어 있고,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고 싶어 합니다.
에고는 늘 우리한테 속삭이고 다그쳐요.
“해야 돼, 해야 돼! 이걸 해, 저것도 해! 여기로 와, 저기로 가,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더 빨리!!”
우리를 게으름뱅이라 부르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탓하며 욕하는 것은… 바로 <에고>입니다.
그러면 에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노출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다가 무심코 자기(에고)를 보게 될까 두려워서… 에고는 어떤 목표들을 향해 돌진하라고 재촉하면서 우리를 끝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분주한 상태에 잡아둡니다.
이런 입장이 혹자에겐 너무 앞서 나간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죠.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갈망이나 목표가 다 <거짓된 나>와 에고가 강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말고 그 무엇으로도 돌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한마디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거기서 삶이 멈추지 않을까? 우리 인류가 몽유병자 집단 같은 것이 되어서 활동할 생각은 없이 꼼짝도 않고 명상만 하는 건 아닐까?”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구상의 삶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끔’ 설계돼 있으니까요. 살려면 활동도 하고 세속적인 재화에 관심도 가져야지요. 물질이란 다 썩기 마련인 만큼, 우리가 보살피지 않으면 아주 빨리 쓸모없게 되잖아요? 게다가 세상살이 여건이 녹녹치 않아서, 우리에겐 먹을거리가 필요하고 악천후도 막아야 해요. 또한 우리는 최대한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기를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물론이고 생활 여건을 위해서는, 또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관심 기울이고 활동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지상에서 그냥 벌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지식 얻고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서점에 가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컴퓨터를 켜야 하잖아요?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인류가) 완전히 행동하지 않는 상태에는 이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행동하려는 충동이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참된 나>와 <존재>에서 나올 수 있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존재>가 우리를 인도할 때… 그때 우리 행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필요한 대로 정확히 해내면서도 힘은 훨씬 덜 소모합니다.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허겁지겁 움직이게 하지 않아요.
<존재>는 우리를 무의미한 목표와 행동으로 내몰지 않아요.
이런 짓은 에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자신의 <거짓된 나>에 의해 움직이는 까닭에 헛되이 부산떨고 무의미하게 행동하면서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요!
만약 <참된 나>가 항상 우리 행동을 주도한다면… 실패나 패배나 좌절 같은 것은 모를 겁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늘 얻으면서, 언제나 행복하고 평온하고 만족하는 가운데 자신이며 세상과 조화롭게 살 겁니다.
‘하아, 거 참 동화 같은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겨운 생활이며 파란만장한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거기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상에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실습 42
‘이것만 달성하면 난 행복해질 거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 그 기대가 적중했나요? 아니면, 웬만큼 채워졌나요?
- 결국에 정말로 행복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씁쓸함이나 실망 같은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진정 순수한 행복이었나요? 그 행복이 오래 가던가요?
- 예전 언젠가 이러이런 목표들을 달성한 것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는데, 그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적은 것 같지는 않았나요?
자신의 사례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면… 다른 이들의 경험을 참조해 보세요.
어렵게 이룬 행복조차 영원하거나 불변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행복을 열심히 좇아가 잡았는데 기대한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에도 주목하세요.
이번에는 그동안 살면서 있었던 이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세요.
즉, 그 무엇도 딱히 열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금 있고 존재하면서 행복 추구가 아니라 실존을 즐겼던 순간들을 기억해 보세요.
이를테면, 휴가 중에 누린 짧은 순간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요?
어쩌면 그건 원하던 목표를 이루면서 맛본 것보다는 더 차분하고 조용한 행복의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더 참된 진짜 행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지금 여기 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누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욕망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마인드가 현재 순간과 일대 일로 직면할까 두려워하여 우리를 현재에서 끌어내려 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인드가 현재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연스레 현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마인드는 무엇이든 다 장악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과 진정한 삶을 그리할 수는 없지요. 사실, 꾸며낸 규칙과 법칙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절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흐름을 그 누가 장악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마인드가 우리를 확실히 보호해 주려니 여기는 함정에 가끔씩 빠지곤 합니다. 논리와 상식과 마인드(지력)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계산하고는, 그 어떤 힘도 우리 계획을 깰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건 오판입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검증된 계획마저 망가뜨릴 수 있는 요소들이 인생에는 예상치 못하게 많으니까요.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과 자연발생적인 것을 우리네 마인드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을 우리한테 옮기지요.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 <존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고는 진짜 보호를 그렇게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진정한 보호란 우리가 <존재>와 하나 되고 거기에 헌신할 때 <존재>가 해주는 것이니까요.
마인드는 보호한다는 환상만 주는 것일 뿐, 진정한 보호는 우리가 <존재>와 합일될 때 이 <존재>에서 나온다.
그러나 <존재>와 합일하여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거기에 푹 잠겨야만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또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에 대한 두려움을… 안절부절못하는 마인드가 우리한테 심어 놓는 두려움을 이겨내야합니다.
그런데, 현재를 겁내지 않으려면 또 무슨 묘책이 있을까요?
먼저 이런 점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즉, 직접적인 위험에 접하여 그 반응으로 두려움이 생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 대부분은… 진짜 원인이 없는 두려움이에요. 이것이 걱정 근심이나 동요, 불안, 신경증 등 갖가지 형태의 포비아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실제 벌어지는 것을 겁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것을 겁내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마인드가 우리를 상상의 미래로 데려가는데, 이 미래가 실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모든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고 흔히들 간주합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죽음의 두려움이 실제로는 <거짓된 나>인 에고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차리라!”
바로 에고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물리적인 죽음보다는 소멸을 무서워해요.
에고는 존재하지 못하게 될까봐 겁내며, 마인드는 에고를 고스란히 따라 이 두려움에 맞장구칩니다.
우리는 <존재>의 일부로서 영원합니다.
<존재>는 사라지고 소멸될까 겁내지 않아요. 사라질 수가 없으니까.
한데 <에고>는 늘 소멸될까 두려워해요. 바로 이 때문에 에고는 실제 위험을 겁내기보다는 자신을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예를 들면, <에고>는 창피당하거나 놀림 받는 것을 두려워해요. 하다못해 말싸움에서 지는 것까지 겁을 내지요. 왜냐면, 그런 것이 에고한테는 파멸과 다를 바 없으니까. 우리가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을 부득부득 주장하고 자기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바로 <에고> 때문인데, 그 이유 역시 매한가지에요. 에고 자체가 소멸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 대부분이 (실제가 아니라) 현혹된 것임을 실감하려면, 현재 순간과 결합하여 당장 이 순간에 나를 위협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당장 이 순간에 그런 위협이 없는데 뭔가를 두려워한다면… 마인드가 실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환상을 만들면서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외려) 겁준다는 뜻이에요. 마인드의 농간입니다.
마인드는 두려워함을 보호와 헷갈리면서 이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실제로, 만약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거나 치과에 가거나 성패가 걸린 스피치를 해야 한다면, 어찌 겁나지 않겠어?’
그러면서 이 두려움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건 미망일 뿐입니다. 겁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입니다.
두려움은 전혀 도움 되지 못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건 보호 장치가 아니라 착각이고 환상이다.
이 두려움이란 것은 또 우리 삶의 실제 사건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에이, 괜히 걱정했네, 공연히 마음 졸였어” 하고 중얼거린 적이 얼마나 되나요?
두려움이 있기에 앞으로 닥칠 사건을 준비하여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더러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켜주거나 도울 수 있다는 환상을 낱낱이 파헤쳐 보세요.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질 겁니다.
실습 14
‘난 무엇을 두려워하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이나 앞날이 어떤 불안과 염려를 일으키나요? 어떤 불상사가 생길까봐 겁이 날 수도 있어요. 책임 있는 일 때문에 걱정될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냥 막연히 불안한가요?
눈을 감으세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상상하세요.
그리고 자문하세요. ‘지금 누가 겁을 내는 거야?’
겁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참된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에고>가, <참된 나>가 아니라 <거짓된 나>가 두려워하는 거예요.
에고는 뭔가를 놓치고 잃을까봐, 실패하거나 소멸될까봐 겁을 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발동하여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해요. 하지만 이건 착각이고 망상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그 무엇에서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현재 순간에 있는 동안 우리는 <에고>와 분리되며, 에고의 두려움이 우리한테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나야, <존재>의 일부야. 나는 영원무궁한 공간에, <지금 여기에> 있어, 두려움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는 힘과 보호의 진정한 근원과 연결돼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헤쳐 나아가야 할 것을 죄다 가장 멋지게 해낸다.”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는 의식 상태인) 자각으로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설 거예요.
이때의 느낌을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존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존재> 안에 깊이 들어가 있어요.
현재 순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 완전하고 충실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잔잔하면서도 정말 기뻐하는 상태가 꼭 따라붙습니다.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며 감정이며 체험 등이 죄다 썩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상태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거꾸로 현실을 더 깊고 객관적으로 자각하여 납득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상태가 아니라, 에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의 물질세계에서 살고 행동하는 법을 서서히 익히면서도 평온하고 조화로운 <존재>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네 활동이 주눅 드는 건 결코 아니며, 되레 이전보다 힘을 훨씬 덜 들이고도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게 될 거예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힘이 돕는 것이죠.
마인드와 분리되어 잡념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지금> 순간과 하나가 된 덕분에 자기 안에서 <존재>를 찾은 사람에게는 우주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서 우리가 더 우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총기를 띠고 나아가 현명해지기까지 합니다. 무의미한 생각의 흐름 대신 알짜 지식을 갖추게 되니까 말이지요.
잡다한 생각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무익한 마인드 상태요, 내면의 고요는 마인드가 유일하게 거두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인드와 이것이 낳은 생각의 줄기가 우리와 <존재>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데 이것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에 담겨 있는 힘을 전부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자기 생각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가 때로는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에고>요 <거짓된 나>입니다. 바로 이 에고가 자기 자신이며 (생각을 포함하여) 자기가 생산하는 것을 죄다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거예요.
반면에 <참된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중요해 보일 때가 더러 있긴 해도 보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마인드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본질과 진정 융합됨을 느낄 수 있으며, 이때 생각이며 문제며 걱정 따위가 다 의미를 잃고 중요하지 않게 돼요. 그리고 이 덕분에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문제를 대체로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더 심각하게 대할수록 해결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경솔하게 대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라는… 평범한 일들과 일상의 걱정근심을 본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본질이 결코 아니에요. 인생의 으뜸 요소가 아니에요.
가장 급한 것은… <존재>와 하나 되는 것, 또 이 합일을 얻어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잡다한 생각에 빠져서는 이 점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멈추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네 마인드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생각의 내용이 공허한 수다에 불과하여 아무 데도 쓸모없으며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런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면, 자기 생각을 그저 귀하게만 여겨 마냥 매달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요.
실습 11
나중에 마인드에서 또 생각이 줄줄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십시오.
“이 생각들에는 별 의미가 없어. 중요하지 않아. 진지하거나 심각한 게 아니야.”
그러고 나서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세요.
마인드가 무의미한 수다를 떨고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이 생각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반복하여 자신에게 말하세요.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나면... 내면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면서 매혹적이고 조화로운 순간을 접하게 돼요. 거기엔 오직 기쁨만 있을 뿐이요, 아픔이나 고통 따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진짜 자신과 진짜 삶에 파고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젠, 그런 상태를 간간이 누리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다만, 대다수는 그런 번뜩임을 겪고 나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와 늘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출한 기법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지, 그걸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해물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바로 마인드와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존재>와 갈라서게 하는 것이니까.
이 개념을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보지요. 부디 선입견을 다 버리면 좋겠군요.
이런 개념을 접하면서 처음 내보이는 반응은 아마도 이런 저항일 테니까요.
“아니, 마인드와 시간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단 말이야? 마인드와 시간 없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정신 나가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거나, 아니면 존재하기를 아예 끝낸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곧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시간 개념이 없는 동물 수준으로 내려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로, 의식의 다음 진화 단계로 올라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즉,
제한된 인간 마인드에서 우주 마인드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함정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간과 마인드를 장악하게 되겠지요. 장악한다고 해서 마인드와 시간한테 무슨 거창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둔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삶을 저희 뜻대로 결정하게 놔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둘을 지배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마인드와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아주 밀접한데, 어떻게 그런지는 이제 곧 알아볼 겁니다. 마인드는 시간과 어울려서 우리가 <존재>로 달려가지 못하게 함정을 만들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볼까요.
마인드는 어떻게 작동하나
사람에게 마인드가 부여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마인드만큼 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집을 짓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거나, 혹은 뭔가를 손수 만들거나 사업 전략을 세우거나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물론, 계획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분석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최선을 택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 궁리해야겠지요.
구체적인 뭔가를 입안하고 실행할 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에 걸맞게 활용합니다. 이때 마인드는 우리가 작업에 동원하는 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네 마인드의 역할이 그런 일에만 국한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데, 인류는 사실상 큰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마인드에게 파워를 지나치게 많이 내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내 마인드가 바로 나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마인드를 과제 해결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마인드가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게 됐습니다.
자신에게 조용히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흠, 내 머릿속을 마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거기서 제멋대로 따로 살면서 말이야.’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마인드가 당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절대고 속삭이고 지시하고 주장하고 요구한다는 사실도 분명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리고…
이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이지 잠깐이나마 쉴 틈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이건 곧 우리가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마인드가 제 본연의 자리와 역할을 망각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마인드가 외려 주인을 쥐고 흔들어요.
마인드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마인드가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판단하고, 그 모든 것에 의견 덧달고 꼬리표 붙여서 분류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변의 사물과 현상과 사안과 사람에 대해 당신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깊이 규명하고 인식할 시간을 채 다 쓰지도 못했는데, 마인드가 먼저 중뿔나게 제 판단을 들이밉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실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혹은, 보호하는) 방패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생각의 차단막입니다.
이 차단막이 당신과 당신 자신을, 당신과 동료들을, 당신과 세상을, 당신과 자연을, 그리고 당신과 신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분리 망상을 일으킵니다.
덧붙이자면, 이 분리 망상을 우리의 거짓된 나인 <에고>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쓰일 때 마인드는… 유용하다. 갖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체가 될 때 마인드는… 해롭다.
자신의 머릿속 대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커녕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야 할 순간에는 역부족이 될 정도로 우리 힘을 잔뜩 빼앗기만 할 뿐이에요.
머릿속 대화에 들어가는 힘은 다 허튼 데에… 그 무엇에도 소용없는 말과 생각들을 찧고 빻는 데 쓰이기만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 광인들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군요.
그들은 저 혼자서 뭔지 모를 소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려요.
그러나 광인이라 불리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상인’들은 기껏해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니까요.
엄밀히 보자면, 우리네 대다수가 사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 목소리’의 힘에 전혀 맞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니까요.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리네 ‘머릿속 목소리’는…
멀고 가까운 기억을 더듬고, 불평하며 비탄에 빠지고, 뭔가를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뭔가에 화내고 뭔가를 예상하고, 뭔가를 우려하고 희망하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비교하고 화내고 욕하고, 판단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때론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