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생각해 보자. 진자는 어떻게 추종자들이 자기 에너지를 스스로 내주게끔 만드는 것일까? 크고 강력한 진자는 추종자들을 특정한 규칙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진자들은 어떻게 하나?
사람이 누군가에게 뭔가를 하게끔 강제할 힘이 없을 때, 논리적인 이유나 설득, 설복, 약속 따위를 내건다. 이건 다 자연적인 힘과는 거리가 멀어진 인간 사회에만 내재된 빈약한 수법이다.
그런 수법을 진자들도 이따금 이용하지만,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진자는 에너지 정보 실체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력적이고 확고한 법칙들에 따라 움직인다.
사람이 진자의 공명 주파수에서 생각 에너지를 방출할 때 진자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게 된다. 이렇게 하려고 자기 생각을 진자에 유리하게 의식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다. 다들 알다시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대부분은 무의식 영역에놓여 있다. 인간 심리의 이런 속성을 진자들이 이용한다.
진자는 추종자들뿐 아니라 맹렬한 적대자들한테서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식일지 여러분은 이미 짐작할것이다.
동네 슈퍼에서 할머니 몇몇이 정부를 욕하고 있다고 치자. 그들은 정부라는 진자의 지지자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물가가 터무니없이 치솟는데도 팔짱만 끼고 있잖아, 민생을 돌보지 않는 정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게다가 외교도 변변치 못해서 국제 호구 소리나 듣고, 정말 무능해.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네 생각 에너지를 이 진자의 주파수에서 강하게 방출하는 셈이다. 사실, 진자는 당신이 어느 쪽에서 흔들든 상관이 없다. 진자에게는 긍정적인 에너지도 부정적인 에너지도 다 괜찮다. 방출 주파수가 진자에 공명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진자의 주된 과제는 사람을 낚아채고 강렬하게 건드리는 것,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생각이 진자에 쏠리도록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다.
대중 정보 매체가 등장하면서, 진자들의 수법이 한층 더 정교해진다. 사람들이 한층 더 심하게 걸려든다.
여러 정보 프로그램이 흔히 나쁜 뉴스로 도배된다는 사실을 혹시 알아차리셨는가?
그런 소식들은 불안이나 두려움, 분개, 적대감, 증오 같이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매스컴의 과제는 사람들의 눈길을끄는 것이다.
매스컴은 그 자체가 진자이면서, 더 강력한 진자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모든 정보에 자유로운 접근과 이른바 정론 직필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은 하지만, 실제 목표는 어떤 수단으로든 더 강한 진자들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이다.
당신의 에너지에 접근하기 위해 진자가 즐겨 쓰는 수법 하나는 당신의균형을 빼앗는것이다. 균형을 잃게 되면 당신은 진자의 주파수에 맞추어 ‘흔들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진자를 더 세게 흔들게 된다.
물가가 올랐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불만을 토로하고 한탄하고 지인들과 관련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이건 아주 정상적이고 적절한 반응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을 진자는 노리고 있다.
당신은 진자의 주파수에서 주변 세상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방출하는것이며, 이 에너지를 진자가 가로채 한층 더 강하게 흔들거린다. 그리하여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
진자가 당신을 잡아당기고 조종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끈은 바로 두려움이다.
이건 가장 오래되고 강렬한 감정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두려움이 진자의 어떤 측면과 관련된다면, 진자는 당신의 에너지를 가로챌 것이다.
불안과 걱정은 두려움보다 약하지만, 여전히 아주 단단한 끈이다. 이런 감정은 생각 에너지의 방출이 진자의 주파수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게 한다. 당신이 뭔가를 걱정한다면, 다른 것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죄책감역시 진자가 에너지를 긁어내는, 가장 넓은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우리한테 죄책감을 주입한다. 이건 아주 편리한 조종 수법이다.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적은 혹시 없나? “니가 죄가 있다면, 잘못했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죄책감을 안고 살기란 상당히 불편하고,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 벌을받거나 아니면 보상해야 한다. 이거나 저거나 다 복종이나 예속 혹은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을 돌린다는 뜻이다.
의무감은 죄책감의 특별한 경우이다. 뭔가를 해야 한다, 즉, 이행할 책임이 있다. 결국, 이른바 ‘죄인이 된 사람’은 고개 조아리고 진자에게 에너지 형태로 공물을 바친다.
죄책감을 유도하고 주입하는 것이야말로 조종자들이 애용하는 무기이다, 이건 저 뒤에서 다시 얘기할 것이다.
사람들의 갖가지 심리적 콤플렉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콤플렉스는 당신을 심하게 건드리고 괴롭히는 무엇이다.
- 열등 콤플렉스: 나는 외모가 볼품없어, 나에게는 능력과 재능이 없어, 머리가 모자라거나 재치가 부족해, 사람들과 소통할 줄 몰라, 나는 쓸모가 없어.
- 죄책감 콤플렉스: 나는 죄인이야, 다들 나를 비난한다, 나는 내 십자가를 져야 해.
- 전사 콤플렉스: 난 강해야 해, 나는 나 자신과 온 세상에 전쟁을 선포한다, 나는 세상에서 내 자리를 위해 싸울 거야, 내 힘으로 내 것을 가질 거야,
- 진리 추구 콤플렉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낼 거야.
이런 식의 콤플렉스가 개개인의 에너지에 대한 개인적인 열쇠이다.
진자는 사람의 이런 콤플렉스를 강하게 자극하여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알겨낸다.
진자가 자기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끈을 여러분이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정의감, 자부심, 허영, 명예욕, 사랑, 증오, 탐욕, 관대함, 호기심, 흥미, 관심, 굶주림 등과 그 외의 여러 감정과 욕구 등이 그것이다.
감정과 관심은 생각의 흐름을 특정한 방향에 잡아둘 수 있다. 어떤 주제가 흥미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 거기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진자는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건드리면서 생각의 흐름을 포획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부정적인 외부 자극에 획일적으로 반응하는 습성이 있다.
부정적인 뉴스는 불만을 유발하고,
뒤숭숭한 뉴스는 불안이나 두려움의 반응을,
부당한 뉴스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사람의 안 좋은 습관은 진자의 포획 장치가 꿈틀대게 하는 추진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사소한 것에도 화내거나 걱정하는 습관,
누군가의 도발에 대뜸반응하는 습관,
대체로 부정적인 자극에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습관 등이 그렇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좋지 않다는 점을 사람은 인식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익숙해진 실수를습관적으로 범한다.
그런 식으로, 습관은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비효율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데,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습관은 편하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아는 것에 더 익숙하다.
새로운 것은 다 위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되고 익숙한 것은 이미 겪어 봐서 입증된 것이다. 이건 일을 끝내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오래된 의자와 같다.
새로운 것이 더 편리할 수도 있겠으나, 그 대신 오래된 것이 더 편안하다.
편안함에는 편리함과 미더움, 긍정적인 체험, 예측 가능 따위가 들어간다.
이런 측면이 새로운 것에는 훨씬 적고, 그래서 새로운 습관이 굳어진 습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진자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수법을 대략 살펴봤다.
사람이 진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벗어나는 방법은 뒤에서 얘기하겠다.
하지만, 자신을 노예로 삼은 진자에 사람이 들고일어서서 공개적으로 맞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는 사람이 항상지고 만다. 진자는 다른 진자한테만 패할 수 있다. 일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한 개인이 복종에서 벗어나 저항하기 시작하면, 에너지만 잃고 아무리 잘돼 봤자 시스템 밖으로 쫓겨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짓밟힐 것이다. 진자가 정한 규칙을 깨려고 덤벼든 추종자는 무법자로 선언된다.
이것이 겉으로는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나지만, 사실, 잘못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종자가순종하지 않는다는 것, 즉, 진자에게 에너지 공급을 멈춘 것이다.
참회한 사람은 대개 처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건 왜냐하면, 죄책감을 품은 사람은 진자의 권력에 완전히 복종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진자에게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한 참회가 중요하지 않다. 잃어버린 통제력을 되찾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조종하게끔 틈을 내준다면, 진자는 금방 더 친절해질 것이다.
만약 죄인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에게서 알겨낼 것이 더 이상 없으므로 제거할 수 있다.
진자의 진짜 동인은, 행동 동기는, 대개 도덕적 원칙들로 포장돼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악한이 아니라는 식.
만약, 진자가 무엇이며 그것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를 항상 기억한다면, 진자의 도덕적 원칙이 어디서 작동하고 시스템의 이익이 어디서 타격을 받는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파괴적인 진자의 주요 특징은, 추종자들을 자기한테 끌어들이기 위해 다른 진자들을 공격적으로 까부수려 든다는 것. 그래서 자기 추종자들을 끊임없이 선동하고 부추긴다.
“우리는 이러한데. 저들은 우리와 달라, 질이 나빠!‘
이 싸움에 말려든 추종자들은 자신의 길을 잃고 잘못된 목표로 나아간다. 진자의 이 허튼 목표를 자신의 목표라고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진자의 추종자들과 싸움은 백해무익해서, 이쪽이나 저쪽 추종자들의 삶을 다 파괴하고야 마는데, 바로 여기서 진자의 파괴성이 드러난다.
추종자들을 두고 벌이는 싸움의 단적인 예를 들자. 바로 전쟁이다. 추종자들을 이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진자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 어울리는 논거를 들이댄다. 예전에 사용하던,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사회가 점점 더 문명화함에 따라, 논거가 더 세련되고 정교한 형태를 띠게 됐다. 이를테면, 어떤 한 국가가 우월하고 나머지 다른 국가들은 결함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열등한 국가들을 이른바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고상한 목표이며, 만약 그들이 저항하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
글쎄, 오늘날 전쟁은 대략 이런 식으로 발발하는 게 아닐까 싶다.
숲속 나무에 벌집이 매달려 있다. 거기 야생벌들이 살아서 꿀을 만들고 새끼들을 키운다.
하지만 이 벌집에 진자가 추종자들을 끌고 와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건 야생벌들이고 아주 위험하지. 그러니까 다 잡아 없애거나 최소한 그들 거처를 파괴해야 해. 믿지 못하겠다고? 그럼, 다들 잘 보시오!”
그러고는 막대기로 벌집을 쑤시기 시작한다.
벌들이 놀라 튀어나와서 추종자들을 쏘기 시작한다.
그때 진자가 의기양양하게 떠든다.
"보시오들, 얼마나공격적인지! 그러니 깡그리 없애야 해. 악의 축을 박멸해야 해!"
전쟁이나 혁명이 어떤 그럴듯한 구호로 치장하든, 그 본질은 하나, 추종자들을 두고 벌이는, 진자들의 싸움이다.
싸움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되겠으나, 그 목적은 단 하나, 추종자들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
추종자들은 진자한테 필수적인 존재라서, 그들이 없으면 진자는 흔들거리기를 멈춘다. 소멸하고 만다. 따라서 진자들의 싸움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생존 투쟁이다.
전쟁이나 혁명이 끝난 뒤에는 덜 공격적이지만 상당히 가혹한 형태의 전투가 벌어진다. 예를 들면, 판매 시장을 확보하려는 싸움, 정당들의 대결, 금융 분야의 경쟁, 각종 마케팅, 광고 캠페인, 이념 선전 활동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 등이 그것이다.
인간의 존재 환경이 진자들에 기반을 두는 만큼, 모든 활동 분야가 경쟁에 휩싸여 있다. 국가적 분쟁부터 스포츠 클럽이나 개인 간의 경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경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새롭고 특이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항상 자신의 길을 뚫기가 힘들다. 이건, 왜 그럴까? 단지, 생각이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일까? 주된 이유는 새로운 진자가 나타나 추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기존 진자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시의 공기를 크게 오염시키는 내연기관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환경친화적인 엔진 모델이 많이 개발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석유회사라는 진자들을 죽음으로 내몰 텐데, 아직은 그들의 힘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어떤 발명가들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요는, 이 괴물들이 새로운 엔진 모델들의 특허를 사들인 뒤 효율성이 낮다면서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진자들은 물질 수준에서 자기네 구조를 실현하면서 재정 수단과 시설, 장비, 아, 물론 인적 자원도 포함하여, 그런 것들로 자기네 위치를 강화한다. 인간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진자의 총아를 앉힌다. 총아는 작은 무리의 보스부터 국가수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의 리더이다.
이 총아가 특별히 뛰어난 자질을 갖출 필요도 없다. 대개는, 진자의 구조에 가장 적합한 매개 변수를 지니는 추종자가 총아가 된다. 이 총아는 자신의 개인적인 장점 덕분에 자기 인생에서 당당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런 측면도 웬만큼 있기는 하다. 그러나 총아를 지명하는 작업 대부분은 진자의 조직화 구조가 실행한다. 만약 총아의 매개 변수가 시스템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가차 없이 제거된다.
진자들의 싸움이 그 추종자들에게는 파멸을 안기기 쉬운데, 이건 추종자들이 실제로는 진자의 의지를 수행하면서도, 자기 소신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종자들의 개인적인 신념은 대개 진자가 낚아챈다.
사람이 진자의 주파수에 맞춰지면, 그 즉시 에너지 수준에서그 사람과 진자가 상호작용하게 된다. 추종자의 생각 에너지 방출 주파수가 진자의 에너지에 의해 고정되고 유지된다. 일종의 호크 같은 갈고리와 피드백 루프, 되먹임 순환 고리가 생긴다. 추종자는 진자의 공명 주파수에서 에너지를 방출하며, 진자는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추종자에게 먹고살 만큼 에너지를 공급한다.
에너지 수준에서 일어나는 이런 상호작용을
물질적 실현의 수준에서도 우리는 익숙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당이라는 진자는
선전과 선동으로 추종자를 붙잡아둔 뒤,
무슨 당당함이나 만족감, 자부심, 중요성의 느낌 같은 형태로 약간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추종자는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처럼, 즉,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선택된 것이고, 그가 통제받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또, 겉으로는 추종자가 자기 의지를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의지는 진자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교묘하게 그에게 강요된 것이다.
그다음에 추종자는 진자의 정보 마당에 들어가고, 진자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에너지 연결에 들어서서 자신의 주파수를 고정한다. 그러다가 추종자의 기대가 어긋나게 되면, 진자에 맞서는 생각이 나타나고, 방출 주파수가 포획 순환 고리에서 벗어난다.
장악력은 진자의 파워에 따라 다르다. 그냥 떠나게 놓아둘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이단자의 자유나 생명을 박탈할수도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고, 의무를 수행하며, 국가나 가족, 정당, 회사, 이념, 사상 등에 봉사하고 헌신하도록 배웠다. 누구한테든 무엇에든 그렇게 하는데, 정작 자신은 맨 마지막이다.
누구한테나 책임감이나 의무감, 필연성, 죄책감 등이 웬만큼 있다. 우리 각자가 다 가족이나 클럽, 교육 시설, 기업, 정당, 국가 등 다양한 사회 집단이나 조직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를테면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 그룹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런 구조들이 발생하고 커진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구조는 성장하고 힘을 얻고, 구성원들에게 정해진 규범을 따르게 하고, 결국에는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 구체화한 수준에서 보자면, 구조는 공통의 목표로 뭉친 사람들과 물체들로 이뤄진다. 이 물체에는 건물이나 설비, 가구, 장비, 기계 등이 들어간다.
하지만 에너지 수준에서 볼 때, 그 모든 것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구조는사람들 집단의 생각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따라서 생각 에너지의 매개 변수가 같을 때 생겨난다. 개개인의 생각 에너지가 에너지장에서 간섭 패턴을 만든다. 즉, 같은 종류의 파동이 서로 겹쳐 강화된다.
(*간섭 - 소리나빛따위의둘이상동종의파동이서로겹쳐파동을강화하거나약화하는것.)
이런 경우 에너지 바다 한가운데는 별개의 독자적인 에너지-정보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에너지 진자이다. 이 구조는 독자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며, 그걸 세운 사람들한테 자기의 규범이나 법칙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이 독자적인 에너지 정보 구조를 왜 진자라고 부르는가? 왜냐하면, 이 구조는 더 많은 지지자나 추종자들한테서 에너지를 더 많이 받을수록 더 강하게 흔들거리기 때문이다.
각각의 진자에는 고유한 진동수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즐겨 타는 그네를 일정하게 흔들려면, 일정한 진동수의 힘을 들여야 한다. 이런 진동수나 주파수에서 공명이 발생한다.
진자가 같은 진동수의 힘을 주기적으로 받을 때 진폭이 커지는 것처럼, 어떤 생각이나 이념에 깊이 동감하여 공명할 때 그것도 역시 강화된다.
거꾸로 진자의 공명이 줄어들면, 즉, 지지자들이 줄어들면, 진동은 약해진다. 지지자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 진자는 멈추고 그 본질이나 실체가 죽는다.
소멸한 진자의 예로는 이런 것을 들 수 있다.
-고대의 여러 신앙,
-돌로 만든 도구, 석기
-고대의 무기들
-오래된 유행, 패션 트렌드
-비닐 레코드, 축음기판...
달리 말하자면, 예전에 한때 있었으나 현재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아니, 이런 게 다 정말 진자란 말이야? 여러분은 놀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사람들의 생각 에너지로 만들어지고 나름의 속성을 지니는 구조는 전부 진자이다.
일반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생명체는 모두 이르든 늦든 에너지 진자를 만들어 낸다. 야생에서 진자의 예를 들면, 박테리아 집단, 생물들의 군집, 물고기 떼, 동물의 무리, 울창한 삼림, 대초원, 개미집 등이 모두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다소 정연하고 균일한 에너지 정보 구조이다.
개개의 생명체는 에너지 단위인 만큼, 그 자체가 다 이미 기본적인 진자이다. 그런 개개의 진자 그룹이 일치하여 진동하기 시작할 때, 그룹 진자가 형성된다. 이건 상부 구조로서 지지자들 위에 서고, 별개의 독자적인 구조로 존재하며, 규범을 정하여 지지자들을 유지하고 확충한다.
이 구조는 자체 법칙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전한다는 면에서 독립적이다.
하지만, 추종자들은자기네 뜻이 아니라 진자의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관료 조직은 소속 공무원 각각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구조로 커간다. 물론, 영향력 있는 공직자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시스템의 법칙에 어긋나면 구성원들이 반발할 것이다. 심지어 진자 노릇을 하는 일개인조차 자기 동인을, 행동 동기를 항상 인식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에너지 뱀파이어가 그렇다.
모든 진자는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추종자나 지지자들한테서 에너지를 알겨내고 그들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그 파괴적인 성질은 구성원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드러난다. 진자의 목표는 단 하나, 추종자의 에너지를 얻어내는 것이며, 이것이 추종자에게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는 중시하지 않는다.
시스템 혹은 조직의 영향력에 얽매인 사람은 그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조직이 그를 잘근잘근 씹어 뱉을 테니까. 파괴적인 진자의 세력에 끌려들어 자기 운명을 망치기는 아주 쉽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대개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시스템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물 만난 고기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추종자로서 진자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며, 진자는 그에게 생존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다가 이 추종자가 구조의 규칙을 깨게 되면, 그가 방출하는 주파수가 진자의 공명 주파수와 어긋난다. 그러면 진자는 에너지를 얻을 수 없으므로, 이 고집 센 추종자를 내쫓거나 파멸로 몰아간다.
사람이 자기한테 유리한 생명선에서 멀리 떨어지면, 이질적인 진자의 구조 속에서 삶이 고역으로 바뀌거나 그 자신이 우울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진자는 그 추종자에게 정말 파괴적인 것이다. 파괴적인 진자의 손아귀에 든 사람은 자유를 잃는다. 진자의 규범에 따라 살며, 큰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한다. 좋든 싫든.
사람이 진자의 후견을 받아 뛰어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스탈린 등은 다 파괴적인 진자들의 총아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자는 자기 추종자의 안녕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만 할 뿐이다. 나폴레옹에게 ‘정말로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런 날들이 자기 인생에서는 손꼽을 정도라고 대답했다.
진자는 새로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교한 방법을 동원하며, 그들은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날아든다. 진자의 선전에 현혹되고 낚시에 걸려사람들은 종종 행복에서 멀어진다. 그 행복이 사실은 바로 자기 곁에 있었는데 말이다.
용병으로 입대하여 죽어간다. 학교에 들어가고 자기한테 맞지 않는 것을 습득한다. 썩 내키지 않지만 화려해 보이는 직장을 찾고는 숱한 문제에 시달린다. 자기 삶을 낯선 사람과 맺고 나서, 그다음에는 고통을 겪는다.
진자는 그 행동 동기를 갖가지 선하고 정당한 가면으로 숨기려고 들지만, 결국 진자의 작용은 추종자들의 운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아주 많다. 파괴적인 진자의 손아귀에 놓인 사람에게 가장 큰 위험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여러 생명선으로부터 이 사람을 진자가 자꾸 멀어지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파괴적인 진자의 특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진자는추종자들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자체 진동을 키운다.
· 진자는 에너지를 더 많이 알겨내기 위해 추종자를 최대한 많이 끌어들이려고 기를쓴다.
· 진자는 자기 추종자 집단을 나머지 다른 집단과 대립하게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고, 그들은 우리와 다르며 나쁘다는 식으로.)
· 진자는 추종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제 편으로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제거하려고 든다.
· 진자는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고 추종자를 최대한 얻기 위해 매력적인 가면을 쓰고 고상한 목표로 포장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한다.
진자는 본질적으로 에그레고르이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통의 관심사나 열정, 생각으로 뭉친 사람들의 에너지로 형성되는 에너지-정보 공간인) 에그레고르라는 개념은사람과 에너지-정보 실체가 상호작용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점을 다 반영하지 못한다. 진자들은 인간의 삶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더 큰 역할을 한다.
진자가 추종자들의 에너지를 어떻게 빨아들이는지, 이런 사례에서 생생히 엿볼 수 있다.
관객이 꽉 들어찬 스타디움에서 팽팽한 경기가 펼쳐지면서 열기가 들끓고 팬들이 극성을 부린다. 한 선수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서 팀이 패했다. 팬들이 그 선수에게 죽일 것처럼 분노를 퍼붓는다. 얼마나 많은 부정적 에너지가 이 불행한 선수에게 쏠리는지 상상할 수 있겠나? 그런 끔찍한 일을 겪으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는 해도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 선수에게 쏟아진 부정적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진자가 거둬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중의 분노 대상은 죽었을 터이고, 우상은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진자가 살아 있는 에너지 실체인지 아니면 단순한 에너지 형태인지, 나는 판단하지 않겠다.이건 트랜서핑 기술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자를 알아보고, 그 게임에 무익하게 말려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파괴적인 진자는 한 가지 특징으로 아주 간단히 알수 있다. 그건 사람들을 포섭하는 싸움에서 항상 자신과 비슷한 것들과 경쟁한다. 진자의 목표는 오직 하나, 가능한 한 더 많은 추종자를 포획하여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추종자를 포섭하기 위한 싸움에서 진자가 더 공격적으로 움직일수록, 그건 더 파괴적이다. 즉,개개인의 운명에 위험을 초래한다.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다. 아, 그렇다면, 자선 단체 혹은 자연이나 동물 보호 단체도 있는데, 이게 왜 파괴적인 거야? 얼핏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먹고 살면서 당신 개인의 행복과 안녕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요구하면서도 정작 당신에게는 무심하다.
만약, ‘거야 다 아는 사실인데, 뭐,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여기고, 그런 말을 하면서 정말로 행복하게 느낀다면, 그건 당신의 소명이고 자신의 진자를 찾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당신은 혹시 자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당신은 진정으로, 사심 없이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에너지와 돈을 내주는 건가, 아니면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선 활동을 하는 건가?
파괴적인 진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곧 자주성을 얻는 것이 아니런가. 그런 사람을 진자는 자기 추종자로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은 더 좋은 운명을 그냥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가 힘들게 됐다.
진자는 추종자를 제 손아귀에 잡아두는 것이 이익이므로, 갖가지 조종 방법을 궁리해 낸다. 그들의 조종 수법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다.
만약, 트랜서핑이 어떤 컬트나 활동 단체나 유파를 만든다면, 이것 역시 진자일 수 있다. 물론, 진자마다 파괴성의 정도가 다다른데, 만에 하나, 트랜서핑이 진자라면가장 덜 파괴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뭔가 일반적인 바깥의 목표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데 주력하니까. 그러므로, 이건오로지 자신의 운명에만 몰두하는 개인들의 공동체 같은 것으로서, 아주 특이한 진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숙제를 하나 내드린다. 어떤 진자를 건설적인 진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자기 운명을 선택한다는 게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조금만 더 인내하시라. 모든 게 그리 간단치는 않지만, 그림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저명하고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앙리 로트렉은 운명에 의해 정상적인 삶에서 바닥으로 던져졌다. 이건 그의 구원이기도 하고 파멸과 성공과 수치이기도 했다. 극적인 운명, 단순한 상업광고를 높은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화가로서의 재능, 굳은 의지와 삶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인물.
키 작은 천재의 인생 비극
이젤 앞에 있는 앙리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1864년 태어났다. 가문의 혈통을 중시한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고, 유전적으로 열등한 자식을 낳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나이 열셋에 앙리는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1년 뒤 같은 상황에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뼈를 다 맞추었지만, 그 뒤로 성장이 멈추어 키가 150센티미터에 그쳤다. 이건 Piknodizostoz라는 희귀한 난치병일 가능성이 높다.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가 이 건강 문제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백작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은 집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앙리 툴루즈-로트렉의 초상화: 조반니 볼디지 작(作)
그의 머리와 두 손은 지나치게 큰데 두 다리는 짧고 두 발은 작았다. 지나치게 큰 두개골을 항상 검은 모자로 숨기고 묵직한 턱은 무성한 수염으로 가렸다. 그의 옷장을 헐렁한 바지와 긴 코트 등속이 차지했다. 또 변함없는 특징은 구부러진 대나무 지팡이를 항상 짚고 다니는 것.
운명은 그에게 가혹했다, 그는 매일 자신이 남들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더 못난 것이 하나 없으며, 외려 많은 면에서 더 낫다는 것을. 또한 그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그리고 술독에 빠지고 ‘파리 보헤미안 생활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사랑까지도. 그런 생활이 입맛에 딱 맞았다.
자화상
나이 열아홉에 그는 몽마르트와 매춘 업소의 단골이 되었고, 파리의 밤 생활 관찰과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했다. 그는 본성적으로 재미와 즐거움, 축제를 찾아다녔다. 달리 말하자면, 가족한테 얻지 못한 것을 편견이 없고 반짝이는 재미가 있는 세계에서, 기형적으로 작은 사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세계에서 찾아냈다. 그 세계에서 그는 사실상 죽는 날까지 지낸다.
앙리 로트렉의 사랑과 고통
성장이 멈추어 키가 아주 작았지만, 그의 ‘물건’은 지나치게 컸다. 그 스스로 자신을 ‘주둥이가 아주 커다란 주전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 그림의 모델들과 분방한 성생활을 벌였는데, 특히 젊은 마리 샤를의 입에서 그의 비상한 성적 능력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몽마르트의 거주자들한테서 그는 인기가 매우 좋았다. 왜냐면 그들과 허물없이 친절하게 배려하며 지냈으니까. 그는 매음굴의 여성들을 거리낌없이 극장에 초대하고 그들과 파리의 밤거리를 누비고 선물을 주곤 했다. 심지어 댄서며 창녀, (매춘을 부업으로 하는) 세탁부들한테 열정적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런 여성 탐닉으로 인해 ‘등이 굽은 돈 후안’이라는 별명마저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랑을 꿈꾸지 않았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정말 사랑할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평생 꿈꾸었다.
앙리 로트렉의 유화
그리고 한번은 그에게 운명의 여신이 미소 지은 듯했다. 같은 계층의 여성과 만나게 됐다. 순수한 영혼과 천사의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이름은 알리나였다. 로트렉은 술을 끊고 요란한 파티도 더 이상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아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충격받은 부모가 딸 알리나를 얼마 전까지 머물던 수녀원으로 돌려보낸 것. 로트렉은 자신이 평온한 가정을 꾸릴 팔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욕실의 여인>. 1889. 67 X 54. 파스텔화. 프랑스 파리 오르세 박물관 소장.
앙리 로트렉은 몽마르트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가벼움과 젊음, 힘, 아름다움 등에 계속 빠졌다. 고삐 풀린 재미, 단순하고 저속한 유흥이 그의 기질에 맞았다. 또, 자신을 향한 비뚤어진 시선과 동정, 경멸에 무심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코르셋 차림의 여인>
구원과 예술
사진. 앙리 로트렉의 망중한
귀족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기회를 박탈당한 앙리 로트렉은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고, 그것이 그에게 구원이 됐다.
세 살 때 (돌이 지나 죽은) 아우의 세례식에서 그림 솜씨로 이미 가족을 놀라게 했으며, 화가로 대성할 것이라고 짐작들 했다. 아우가 죽은 뒤 부모가 이혼했고, 한동안 어린 앙리는 유모와 살았다. 여덟 살이 되어서야 모친의 시골 영지로 돌아갔다.
동물을 주로 그리는 화가 르네 Princeteau의 스튜디오에서 첫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의 지인이며 청각장애가 있는 화가였다.
18세 되는 1882년 파리로 나와 대학 입시를 치렀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 스물하나 되는 1885년 앙리는 마침내 몽마르트로 거처를 옮겨, 작은 작업실에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에만 몰두했다. 에드가 드가의 대담하고 거친 듯한 선과 색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일본 판화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독창적이고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나아갔다.
당시 몽마르트는 사실상 파리 예술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앙리는 자기 창작의 소재를 발견하곤 했다. 파리 보헤미안의 사는 방식, 카바레와 댄스 룸과 댄서들 또 여배우와 매춘부 등의 삶.
<물랭 루주의 라 귈류 Goulue>. 1891-1892. 80 X 60.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 (물랭 루주의 인기 댄서 루이즈. 별명 귈류는 대식가라는 뜻으로, 그녀가 공연하면서 손님들 테이블을 다니며 음료를 마구 마셔서 붙었다. 오른쪽은 친언니, 왼쪽은 애인. 로트렉은 이 그림을 '물랭 루주 시리즈' 가운데 가장 좋은 작품으로 여겼다.)
1886년 화가 페르낭드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반 고흐를 알게 됐고 둘은 굳은 우정을 나누었다.
둘 다 꼬인 운명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위대한 후기 인상파 작가로 남은 것이다. 둘 다 격렬한 기질과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보는 눈은 서로 달랐다. 빈센트가 세상을 사랑하고 공감하려고 애썼다면, 앙리는 세상과 차갑게 거리를 두면서 관찰하기만 했다.
로트렉이 다른 화가 앙리 드 그로에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그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1890년초 브뤼셀의 전시회에 반 고흐가 자기 작품 여섯 점을 내놓았는데, 대중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정적인 평가 드 그로가 앞장섰다. 이를 두고 로트렉이 격분한 나머지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드 그로가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반 고흐가 죽기 전 그의 초상화를 로트렉이 파스텔로 그렸다. 두 화가가 나이트클럽에 있던 어느 날 밤, 혼자 생각에 잠긴 옆 모습. 매부리코와 듬성듬성한 눈썹이 잘 포착돼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 1887. 앙리 로트렉 작
사회의 이단자들 속에서 살면서, 로트렉은 울적함이나 환희, 슬픔, 무심함을 드러내는 여성들 얼굴을 즐겨 관찰했다. 그의 손으로 화폭에 옮겨진 젊은 여성이나 이미 시든 여성들의 얼굴은 부어오른 눈과 피곤한 입매를 달고 있다.
앙리 로트렉은 모델들을 절대 미화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왜곡하곤 했다. 여성 모델들을 왜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그리냐고 물으면, 그는 “그들이 추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노래하는 이베뜨 쥘베르>
앙리가 가장 좋아하던 카바레 가수의 이미지에 놀랐다. 선명한 빨강 머리, 얇은 입술,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깡마르고 큰 키, 기다란 검은 장갑. 그녀의 이미지를 담은 화집을 냈는데, 이것이 그녀의 가족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고소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쥘베르 자신도 로트렉의 그림을 처음 보고서 "내가 그렇게 흉칙하는 않아!" 소리쳤다. 하지만 그 화집이 가수에게 진정한 명성을 안겼고, 스캔들은 눈 녹듯이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모습을 두고 자연도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델들을 종종 그로테스크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비꼬아 묘사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수했다. 그가 비록 모든 모임에서 언제나 관심을 끌었지만, 그건 그에게 외려 불쾌하기만 했다. 그런 명성을 꿈꾼 게 아닌데.
그의 작품들로는 파리 매춘 업소와 그 종사자들의 삶을 다룬 연작이 유명한데, 그 가운데 한 여성이 애정에 굶주린 화가에게 매독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물랭 루주의 댄서>. (잔느 아브릴은 앙리의 또 다른 뮤즈. 앙리가 죽을 때까지 둘은 친구로 남았다.)
<키스>
상업 포스터 장르에서 도약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은 상업 포스터 제작에 진지하게 관여했으며, 광고 포스터를 높은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물랭 루주 광고 포스터
1889년 파리에 최초의 카바레 '물랭 루주'가 문을 열었다. 처음에 영업이 신통치 않자 물랭 루주의 소유주가 카바레 광고 포스터 제작을 앙리에게 부탁했다. 이 일이 이후 그의 모든 작업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얼마 뒤 앙리의 작품을 보고는 의뢰자가 그 파격성에 질겁했다. 하지만, 12월 하룻 저녁 3천 매가 파리 전역에 붙었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본 사람들이 카바레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물랭 루주의 인기가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았다. 그 뒤 앙리는 물랭 루주를 무상을 출입할 권리를 얻었다.
이 포스터를 다른 화가들은 “회화 장르를 망치려는 악마의 손장난”이라고 불렀다. 하룻밤 사이에 로트렉이 인기와 명성을 얻었고, 유명 인사와 스타들이 그런 광고를 하고 싶어 줄지어 그를 찾아왔다.
물랭 루주 광고 포스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여러 분야에서 그를 찾았다. 각종 인쇄물에 들어갈 삽화 주문이 쇄도했고, 그는 만화를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다. 한번은 콘페티와 자전거 광고 포스터 제작 의뢰를 받고 런던으로 갔는데, 거기서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 친구가 되고,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대다수 예술사가들은 만약 앙리 로트렉이 없었다면 현대의 광고 예술가 앤디 워홀(Warhol)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앙리가 평범한 광고를 문화적 현상의 표식으로 만들었고, 그리하여 팝 아트 시대를 연 것이다.
*팝 아트 - 현대미술에나타난양식의하나. 1950년대중후반주로미국과영국을중심으로전개. 전통적예술개념의타파를시도하는전위적인미술운동으로광고디자인, 만화, 사진, 텔레비전영상따위를그대로그림의주제로삼는것이특징. 주요예술가로는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 R.), 올덴버그(Oldenburg, E.), 워홀(Warhol, A.) 등
또 다른 시련
운명이 마침내 그에게 ‘사람들한테서 진정으로 인정받는’ 작은 선물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런 성공에 고무된 앙리가 1893년 파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 회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대중의 판결은 가혹했다. ‘예술과는 전혀 동떨어진, 음탕한 난쟁이의 지저분한 작품들’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상업 포스터로 얻은 인기와 즐거움에 이미 익숙해졌는데 말이다. 편견과 규칙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세상은 용서하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항변. “내 그림들은 지저분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야. 사실, 추한 것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런 앙리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부모와 일가친척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그가 저명한 귀족 가문을 더럽혔다고 보았다. 언젠가 그의 모친에게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묻자. 백작 부인은 ‘내 아들만 아니라면 다 좋다’고 대답했다. 모친은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예술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기야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더 무슨 말을 하랴. 그의 숙부는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조카의 그림 여덟 점을 불태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하찮은 쓰레기가 우리 가문에 더 이상 수치를 안기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이 숙부는 앙리가 대여섯 살 때부터 그림 공부를 지지하고 지원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물감을 선물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사람의 패러디야.” 이 고백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엿보인다. 그는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았으며, 갈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누구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게 됐다.
앙리 로트렉의 모친의 초상화
인생 후반에 그는 너무 자유로워서 방종하다 싶게 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항상 가지고 다니기 위해 지팡이에 구멍을 뚫었다. 모친이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미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원을 나왔으나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 보기에 외모가 기이한 이 천재의 운명은 다른 재능 특출한 사람들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다. 요절. 서른일곱 해의 인생 여정. 1901년 모친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가족은 가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앙리의 각종 작품을 수집하여 영지에 있는 성에 숨겨 두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앙리가 멸시받던 광고를 고도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그림들은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팔리고 있다.
<세탁부>. 1886. 93 X 75 (*당시 이 일을 하는 여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매춘을 겸했고, 그래서 프랑스 미술에서 인기 있는 테마였다.)
앙리 툴루즈-로트렉이 1886-1887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 <세탁부>는 200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익명의 구매자에게 2240만 달러에 팔렸다.
20년에 불과한 활동 기간에 유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 363점, 소묘/데생 5084점을 남겼다.
이후 그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영화 <물랭 루주>가 그것인데, 여기서 그의 역할을 배우 José Ferrer가 연기했다.
선택의 모델은 세상의 구조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각. 이것이 트랜서핑의 개념적 기반. 원하는 것을 힘들여 성취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럼, 이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새벽 별들 바스락거리는 소리
꿈은이뤄지지 않는다.
이웃집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이 가증스러운 짐승이 항상 나를 깨운다. 정말 지긋지긋해! 이 고약한 녀석이 내는 소리에 내가 왜 잠을 깨야 하는 건가? 산책이나 나가서 마음을 달래야겠다. 그래야 옆집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힐 수 있으려나. 개를 보면, 그 주인도 알 수 있다.
내 인생에는 항상 추잡한 것들이 기어들어 정말 짜증 나게 한다. 옷을 입는데도 신경이 곤두선다. 슬리퍼는 또 왜 안 보이나.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찾으면 내다 버리고 말아야지, 원!
바깥에는 안개가 끼고 공기가 축축하다. 어두운 숲을 지나 미끄러운 길을 걷는다. 잎사귀들이 거의 다 떨어져서 반쯤 죽은 나무들 잿빛 줄기가 드러났다. 나는 왜 이 음울한 습지에 살고 있나? 담배를 꺼낸다. 피울 마음은 별로 없는데, 습관이/ 피워야 한다고 부추긴다. 피워야 한다고? 언제부터 내가 담배에 얽매이게 됐지? 그래, 아침부터 빈속에 담배는 정말 역겹다. 예전에는 흥겨운 모임에서 담배가 만족을 안겼고, 유행이나 자유, 스타일의 상징 같은 것이었지. 하지만 그 축제의 날들은 지나가고 비 내리는 잿빛 일상이 끈적끈적한 문제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몇 번씩이고 담배를 꺼내 문다. 이제 이걸 태우면서 숨 좀 돌리고, 다시 차가운 일상으로 뛰어들어야겠다.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화난 아이처럼 잠깐 눈을 찡그렸다. 다 지겨워졌다. 그때 내 생각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교활하게 굽은 자작나무 가지가 얼굴을 따끔하게 때렸다. 빌어먹을! 화가 나서 그걸 부러뜨려 한옆으로 내던졌다. 그건 나무에 걸려서 광대처럼 까불며 흔들거렸다. 이 세상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을 놀려대는 것만 같다. 무거운 발걸음을 우울하게 옮긴다.
세상과 싸우려 들 때마다, 세상이 처음에는 한발 물러서서 희망을 주다가도 그다음엔 곧 내 콧잔등을 보기 좋게 갈기곤 했지. 자기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쓸어내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건 영화에서만 나오는 얘기야. 인생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 인생은 룰렛 게임과 비슷해. 처음에 한두 번, 두세 번은 이긴다. 그러면 의기양양해져서 세상이 다 내 주머니에 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 털리고 말지. 파티에 내놓은 거위와 같은 꼴이야. 처음엔 통통하게 살찌우고 그다음에 흥겨운 음악과 웃음소리를 날리면서 구워 먹거든. 네가 실수했어. 이건 너의 파티가 아니야. 네가실수한 거야…
그렇게 즐겁지 못한 생각에 잠겨 바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작은 파도들이 모래 해안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바다는 나한테 축축한 냉기를 불친절하게 불어넣었다. 살이 오른 갈매기들이 바닷가를 느릿느릿 걸으면서 뭔가를 쪼아댄다. 그 녀석들 눈에는 감정이나 이성이 눈곱만치도 없다. 그저 차갑고 검은 공허뿐이다. 그 눈들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상이 되비치는 듯했다. 그 세상 역시차갑고 적대적이다.
웬 노숙자 하나가 해변에서 빈 병을 줍고 있었다. 저 얼간이가 꺼지면 좋을 텐데. 난 혼자 있고 싶다. 아니, 나한테 오는 것 같은데, 구걸하려는 모양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어디에고 평온이란 없구나. 정말 피곤하다. 이 피로감은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쉴 때도 그렇다. 내 삶이란 게 감옥에 갇혀 사는 것과 다를 바가 뭔가. 곧 모든 게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처럼 보여. 그러면 다른 사람이 되어 인생을 즐길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건 다 미래의 일이다. 당장은 여전히 우울한 고역이야. 계속 기다리지만, 그 미래가 잘 오지를 않는구나. 이제는 여느 때처럼 맛없는 조반을 때우고 따분한 일을 하러 가서, 또 누군가에게 필요한 결과를 짜내겠지, 하지만 그건 나한테 필요한 게 아니다. 부담스럽고 무의미한 삶의 하루를 또 보내야 한다.
새벽 별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금방 보았던 우울한 꿈은 무엇일까? 마치 전생의 한 자락이 돌아온 것 같은데. 그냥 꿈이었다니, 참다행이다. 고양이가 하는 것처럼 안도하면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이 태평한 녀석은 사지를 쭉 뻗고 누운 채,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귀로만 보여준다. 이 수염 달린 녀석아, 일어나라. 같이 산책하러 나갈래?
날이 화창하기를 바라면서 바다로 갔다.
오솔길은 숲을 가로질러 뻗어 있고, 새벽 별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갖가지 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뭔가가 관목 속에서 “먹이야! 먹이!” 유별나게 짹짹거리고 있었다. 아, 저 녀석이군. 작은 털북숭이, 어찌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들 목소리가 이렇게나 다채로운데도, 그 어떤 것 하나도 전체 합창에 불협화음이 없구나, 여기서 나오는 조화로운 교향곡은 그 어떤 정교한 오케스트라도 흉내 내지 못할 거야.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흘러들었다. 이 마법 같은 조명이 여러 색상의 깊이와 풍부함을 살리면서// 숲이 멋진 홀로그램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바다가 나왔다. 에메랄드빛 파도가 따스한 바람과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해변은 무한히 넓고 텅 빈 듯 보였지만, 나는 아늑함과 평온함을 느꼈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세상이 나에게 이 한적한 공간을 특별히 마련해 준 건 아닌가. 누군가는 이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여긴다. 아, 아니야, 이런 아름다움이 그저 나의 감각기관과 뇌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지.
새벽녘 우울한 꿈의 흔적을 더듬다가 나의 이전 삶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실제로 상당히 우울했으며 밝은 게 아니었다. 이 세상이 나에게 마치 빚을 지고 있는 듯했고, 그걸 요구하려고 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다. 하지만 그런 요구에 세상은 쌀쌀맞게 등을 돌리곤 했지.
그럴 때, 경험 많은 조언자들이 들려주던 말. “세상이 그리 쉽게 굴복되는 건 아니야, 세상은 정복해야 하는 것이야.”
그래서 나는 이 세상과 싸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얻어낸 것 하나 없이 녹초가 됐을 뿐이다. 그때에도 조언자들은 준비된 대답을 읊었다. “너한테 문제가 있어, 먼저 자신을 바꿔야 해, 그러고 나서 세상에 뭔가를 요구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싸우려고 해 봤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건 한층 더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꿈을 꾸었는데, 어딘가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것 같았다. 형용키 어려운 아름다움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장관에 연신 감탄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때 허연 수염을 한 노인이 화난 듯한 표정으로 불쑥 나타났다. 보호구역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훑어보았다. 내가 다가가면서 입을 열려고 하자, 노인이 재빨리 손을 젓고는 차갑게 말했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소, 제멋대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방문자들한테 지쳤어, 그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고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소음을 일으키면서 나중에는 쓰레기 더미만 남기고 떠난다오.”
나는 알아들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걸었다.
자연보호구역의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여기를 왜 이제야 온 거지? 넋이 나간 듯 목적도 없이 걸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생각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말로 나타내는 건 더욱더 그렇다. 내 머릿속에는 황홀한 공허만이 자리 잡았다.
잠시 뒤 그 관리인이 다시 나타났다. 얼굴에 새겨진 엄격한 표정이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푸른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곡 아래에 마을 같은 게 있었다. 장난감 같은 집들이 녹음방초에 묻혀 있는 것이, 무슨 마법의 동화에 나오는 삽화처럼 보였다.
이게 뭔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정말 가슴 뭉클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이런 건 다 그저 꿈에서나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아한 눈길을 관리인에게 돌렸지만, 그는 수염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건 마치 “더 놀랍고 예상치 못:한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거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계곡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어떻게 이 보:호구역에 들어섰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노인한테서 어떤 설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어색하게 꺼낸 듯했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서 살 수 있는 행운아들은 정말 좋겠네요” 그 말에 노인이 딱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자네가 저들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누가 막기라도 한단 말인가?”
내가 닳아빠진 레코드를 돌렸다.
“누구나 호화롭게 태어나는 건 아니지요. 자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하나도없습니다.”
관리인이 나를 웬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요는, 누구나 자기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오. 우리한테 딱 하나 주어진 자유란 바로 선택의 자유지. 다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네.”
삶에 대한 그런 견해가 나에겐 지극히 생소한 것이기에,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관리인은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소리! 자네한테는 선택권이 있네, 다만 그걸 이용하지 않는 것이지. 선택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일세.”
이게 무슨 말이야, 막걸리야?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게 허용된단 말인가.
그때 문득 이게 다 한낱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혹스러움이 어찌나 큰지, 이 이상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노인한테 이렇게 넌지시 말한 것 같다.
“꿈속에서야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 아니, 현실에서도 그렇구요. 그게 노인장께서 누리는 자유의 전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의 빈정거림에도 노인은 태연하게 쓴웃음만 날렸다.
꿈속의 인물과 논쟁에 엮이다니...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깨닫자 나는 얼른 잠을 깨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졌다.
노인이 내 생각을 읽은 듯했다.
“됐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그들이 자네 같은 멍청이를 나한테 보낼 줄은 몰랐네. 그래도 내 임무는 다해야겠지.”
그 말에나는 ‘임무’란 무엇이며 또 ‘그들’이란 누구인지 물었다. 노인은 내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기에는 어리석은 수수께끼를 건넸다.
“사람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얻을 수 있다네. 자네한테 이런 수수께끼를 하나 주지. 이자유를 어떻게 얻어야 하겠나? 이걸 알아맞힌다면, 자네의 사과는 하늘로 떨어질 것이네.”
여기서 사과는 또 왜 나온담? 나는 그만 자제심을 잃고 그런 수수께끼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내뱉었다.
“이건 그저 꿈일 뿐이고, 동화에서야 별의별 기적이 다 일어나지만, 현실에서 사과는 결국 땅으로 떨어지는 법이지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나직하게 소리쳤다.
“이제 그만하게! 가자구, 내가 보여줄 게 있네.”
잠을 깬 뒤, 아쉽게도 그 꿈의 뒷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정보를 그 관리인이 나한테 불어넣었다는 느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무슨 뜻인지 모를 단어가 하나 기억에 남았다. 트랜서퍼링.
그리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은 이런 것뿐이었다.
나의 세계를 더 잘 가꾸려고 스스로 애쓸 필요가 없고, 모든 건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나의 안녕을 위해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지구상에서 내 자리를 위하여 세상과 싸워서는 안 되며,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을 선택하는데, 이걸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터무니없어 보여서 그 꿈도 금방 잊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자신이 놀랍게도 알아낸 것이 있었다. 그 관리자-노인의 ‘선택하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명료한 그림이 기억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관리인이 내준 수수께끼는 어디서나 나오는 지식처럼 저절로 풀렸다. 하루하루 새로운 뭔가를 알아냈고, 그때마다 엄청난 놀라움에 떨었다. 그건 두려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 모든 지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성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런 것이 내 머리에서는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
트랜서퍼링을 알게 된 뒤 내 삶은 새로운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창작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이 얼마나 큰 기쁨과 만족을 안기는지 실감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자기 운명의 창조 과정에 비하면 하찮을 정도이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운명의 창조’라는 용:어가 여기서는 썩 적절하지 않다.
트랜서퍼링은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과 똑같다. 이게 다 무슨 뜻인지, 이제 얘기하려고 한다.
왜 사과가 ‘하늘로 떨어질’ 수 있는지’, ‘새벽 별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무엇인지, 또 아주 범상치 않은 여러 가지를 여러분은 이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인생은 그렇지 못해서, 폭풍우 속에 떠 있는 종이배처럼 사람을 뒤흔들어 툭하면 불안이나 좌절, 나아가서 분노 따위를 안기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행복을 찾으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찾고 시도해 본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마음을 다스리기에 괜찮은 방법들이 정말로 더러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좋:은 가르침마다 또 뭔가 허전한 구석이 있거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마저 나올 때가 있다.
트랜서핑이라는 기법에는 아주 기묘하고 특이한 것이 많이 나온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정말이지,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행히도 여기에 있는 방법은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트랜서핑은 진부한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게 하는 강력한 기법이다. 달리 말해, 내 운명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 것.
이게 말이 되나? 그런데 여기에는 기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현실이, 알고 보니 그 어떤 신비주의보다 더 놀랍더라.
성공 비결, 부자가 되는 법, 행복해지는 길 등을 알려주는 책은 많다. 귀가 솔깃해지는 제목들이다. 누가 그걸 원치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거기서는 무슨 실습이나 명상, 자기완성 같은 것이 주를 이룬다. 그것도 필요하긴 하지, 그런데 금방 따분해진다. 인생 자체가 이미 끊임없는 시험이고 시련인데, 그들은 또 긴장하고 자신에게서 뭔가를 짜내라고 하는 거다.
너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러니까 변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래, 나 자신에 백 퍼센트 만족을 느끼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그대로 살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러면 왜 안 되는 거야? 이런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않는가? 바깥에서, 주변에서 누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나 자신을 바꿀 필요도 없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에 해결책이 있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바꾸면 된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려 자신에게 돌아가면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실습이나 명상, 자기 계발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트랜서핑은 새로운 자기완성 방법론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달리함으로써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이다.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오게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다 많은 오류를 저지른다. 그러고 나서는, 그때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바로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꾼다. 그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다. 이게 곧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심지어는 “과거로 전진!” 같은 것이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 책 끝에서 알게 된다.
이제부터 하려는 얘기는 여러분이 그 어디서도 듣거나 읽어볼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것에 대비하시라. 그건 아주 놀랍고도 유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