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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20 루덩의 악마들 11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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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삽화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해도 화합될 수 없는, 그의 스피릿 안에서 벌어졌다

 

  하나님이라 명명된 무한함은 본성이라 불리는 유한함을 포함해야 하며, 이 무한함은 공간의 모든 점들과 시간의 매 순간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결말을 회피하고 그 현실적인 결과를 모면하기 위해 구학파의 엄격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창의력을 소비하고 준엄한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설득과 강요를 다 허비했다. 그 사상가들은 선포하기를, 이는 타락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철저히 썩었다고 했다. 그 모럴리스트들은 말하기를, 그런 고로 모든 전선에서 본성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안에서는 억누르고 밖에서는 무시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라는 선물을 얻고자 희망함은 오로지 본성의 경험 소여(所與)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우리는 신의 선물도 받을 자격을 갖출 터이다. 우리가 원초적 사실에 다가든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자잘한 사실을 거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선종의 한 선사가 이르기를,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말라, 그저 고정 관념에 붙들려 있지만 않으면 되느니”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대략 같은 말을 하긴 하되,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얘기가 교리와 신앙 조문, 경건한 전통 등에 관한 것일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정 관념’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기껏해야 이정표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하다. 존재라는 원초적 사실에는 일상의 사실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말로써는, 혹은 말로써 고무된 판타지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 왕국을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네 상상이나 종작없는 추론으로는 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리성이라는 주장이나 갈망과 혐오, 보상의 판타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기성 전제들 따위가 가득한 영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시늉을 하는 한, 하나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기란 기대난망. 

  먼저 인간의 왕국이 와야 하고, 그런 뒤에야 하나님 왕국도 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죽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억누르고 내치는, 우리네 숙명적 성향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편견을 떨치고, 현실을 개조한다고 뿜어대는 언어의 덫을 제거하고, 현실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숨어드는 몽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보인 ‘거룩한 무심함’이요, 코사드[각주:1]의 ‘내맡김’이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두 매 순간 자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완전한 길의 징표인 ‘선호하기를 거부함’이다.

 

  교회 권위자들과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수렝은 영혼이 세상 존재의 거룩한 근간과 합일돼 변모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네 최초 조상의 죄 때문에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결과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겼다는 견해도 소중히 여겼다. 

  신과 우주에 대해 그런 관념을 견지하면서 수렝은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즉, 자살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인 요소를 죄다 몸과 마음에서 근절할 필요가 있다고. 한데,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노년에 인정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말해둬야 하겠다. 루덩으로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신에게 다가들리라 기대하면서 육욕을 죽이느라고 고행에 너무 몰두했다. 이 노력에 가상한 열의가 있었을지언정 거기엔 또 속박과 편협한 이성도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편협한 도그마에 빠졌고, 그 도그마는 온건할지 몰라도 적잖이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구별하며 신이 당신의 피조물과 반대편에 있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수렝은 본성에 대한 이기적 태도며 본성 자리에 설정된 몽상과 허황한 생각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이 특별한 행성에서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행으로 억누르고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본성을 증오하라. 그 본성이 신께서 예비하신 모든 굴욕을 감내하게 하라.」 본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선고는 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라는 것을 수렝은 가장 쓰라린 경험으로 알았다. 

 

  본성은 터무니없고 무분별하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는 노이로제가 종종 수반되는 지적 피로를 인간적 추잡함에 대한 증오와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혐오로 바꾸었다. 이 증오와 혐오가 특히 더 강한 것은, 그가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으며 사람이라 불리는 역겨운 존재들이 야기한 갖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벌써 며칠째 처리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이 입맛에 맞았으며, 그의 병든 본성에 어떤 안도감마저 안겼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상태가 좀 나아진 것은 ‘크리스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었군. 다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 상태는 죄책감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는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그를 행동케 하는 가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동할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니까. 

  그래서 ‘자기 죄를 물처럼 삼키고 빵처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의 의지와 행동 능력은 마비됐지만 감수성은 아직 살아 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전처럼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사람은 더 많이 벗겨질수록, 가격을 더 아프게 느끼는 법.’ 

 

  그는 ‘죽음의 공허’에 있다. 그러나 이 공허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니다. 그건 격심하고 완전한 공허요, ‘끔찍하고 참담한 나락이며, 거기에는 도움이나 구원 받을 기대가 없고’ 거기서는 조물주가 영혼을 괴롭히며 그 조물주에게 제물은 증오만 품을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홀로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종의 삶을 고난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본성은 궁지로 내몰려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없으며 그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수렝은 더 이상 생각이나 연구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랑과 감사를 지니고 조물주에게 가슴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은 아직 살아서 ‘죄악과 꺼림칙한 일에 빠졌다.’ 뭔가 무관한 작업을 하면서 옆으로 빠지려는 번다하고 경망한 갈망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그건 자만심과 자기본위와 공명심 못지않은 죄이니까. 

  내면에서 노이로제와 엄격주의에 시달린 그가 외면에서 고행으로 본성을 더 빨리 파괴하기를 꿈꾼다. 이전처럼 안도감을 주는 작업이 아직 몇몇 있지만 그 작은 기쁨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공허를 내향적 공허와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도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본성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신의 자비에 노출될 테니까. 의사들은 고기를 더 많이 먹으라 하지만 그 권고를 따를 수 없다. 신께서 이 질병을 정화의 수단으로 주셨다. 너무 일찍 좋아지려고 애쓴다면 그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터

 

  그렇게 건강을 거부하고 비즈니스와 휴식도 거부했다. 그러나 재능과 학식을 눈부시게 발휘한 활동 분야가 그래도 남아 있었다. 강론, 신학 저술, 설교집, 경건한 장시들. 거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 왔고, 그것들을 여전히 일면 뿌듯하게 여긴다. 

  길고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그 동안 써온 것을 모조리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몇 권 책의 원고와 다른 많은 글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이제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됐다.」 그는 이제 「내 본성이 거부하는 험로를 걸으라고 하는 그분의 작업을 밀고나가는 숙련공」 같이 됐다

 

  몇 달 지나니 그 길이 어찌나 힘든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39년부터 1657년까지 그 누구한테도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병리적 문맹이라는 괴이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었다. 말하기조차 힘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홀로 유폐 상태에 있고 바깥세계와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 스스로 하나님한테서 도피하기로 내린 결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시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자신이 이미 현생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확신에 (여러 해 동안 지탱돼 온 확신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 그 다음엔 지상의 지옥에서 한층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고해사제와 수도회 상급자들이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생명이 있는 한 확고부동한 저주란 있을 수 없다오. 이 점을 한 신학자는 장 조셉에게 삼단논법을 동원해 입증하고, 또 다른 이는 2절판 묵직한 서적을 들고 진료소로 찾아와서 교회 박사들의 권위를 들먹이며 입증했다. 

 

  하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수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았다. 한때 자기가 물리쳤던 악마들이 영원한 화염 속에 그의 자리를 환호하며 준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다른 수도사들도 저희 내키는 대로 다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들과 고통 받는 이의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모든 사건,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절망을 굳히기만 했다. 벽난로 곁에 앉았다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회에 들어섰다면, 그 순간 신의 심판에 대한 어구나 사악한 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늘 들리고 울렸는데,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설교를 들었다면, 회중에 길 잃은 영혼이 있다고 설교자가 단언하는 것을 꼭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의 영혼이었다. 

 

자만심의 악마 레비아탄

 

  언젠가 그가 죽어가는 형제의 침상 곁에서 기도할 때, 갑자기 자신이 그랑디에처럼 마법사가 되어 악마들에게 무고한 사람 육신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힘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문을 걸고, 자만심의 악마인 레비아탄에게 이 육신으로 들어가라 명령하고, 정욕의 악마인 이사카론못된 장난의 스피릿인 발람신성 모독의 왕인 베게모트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게, 영겁의 목전에서 마지막 중대한 행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덤벼들라 권하고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에 영혼이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수렝이 실제로 유황 냄새를 맡고 울부짖음과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한데 이게 뭐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혹은 자발적이었나?) 그가 악마들을 계속 부르면서 악마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돌연 침대에서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했다. 한데 그건 이전처럼 하나님 뜻에 복종이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며 거룩한 자비와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는 둥 공격적인 의심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횡설수설이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수렝이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내 느낌이 옳았어, 난 마법사가 된 거야!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이 외적 증거에 어떤 낯설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고무된 내적인 확신이 추가됐다.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엄격함과 (또 감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지가 마비되고 허탈 상태가 갈마들며 근육이 경련돼 침대에 붙박여 있는 오랜 시간에 그는 ‘이와 비교할 통증은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신의 분노가 거세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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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n Pierre de Caussade (1675-1751) - 프랑스의 예수회 성직자, 종교 저술가. <신의 섭리에 내맡김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그는 현재 순간은 신께서 주신 성찬이요 그것에 내맡김과 그것을 필요로 함은 신성한 상태라고 믿었다. 얼핏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듯 보이기에 그의 책은 1861년까지 출간 금지. 저자 본래 뜻에 더 합당한 버전은 1966년도에야 출간됐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서 어떤 작가들은 대승불교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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