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이런 맥락에서 랄망과 같은 시대 사람이요 가톨릭에서 영국성공회로 개종하고 시인에서 설교자며 신학자가 된 존 던 1이 자기징벌 문제를 두고 쓴 글을 읽는 것도 흥미롭다.
「낯선 땅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가 아니고 다른 이들의 공덕은 내 공덕이 아니야. 내 의지와 달리 과실로 인한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야. 기만적이고 무관하고 불필요한 십자가들을 내 십자가로 여기지 않아.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히 예비하시고 유혹과 시련이 가득한 내 길에 놓인, 나만의 십자가여야 해.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찾느라 내 길을 벗어나서는 안 돼. 왜냐면 그건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잖아. 난 일부러 박해를 찾아 나서면 안 돼, 그걸 피하지 않고 참아서도 안 돼. 굳이 역병에 달려들고 물러나지 않아서도 안 돼. 손상과 강압을 불평 없이 견딜 의무도 없어. 과도한 정진으로 굶주려서도 안 되며, 비인간적인 회초리와 채찍질로 내 육신이 눈물 흘리게 해서도 안 돼.
나는 하나님이 나한테 지운, 나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 강한 욕구의 길에서 피치 못하게 따르는 유혹과 시련의 십자가만을.」
이런 관점은 프로테스탄트한테만 특징적인 게 아니었다. 여러 시대에 많은 위대한 가톨릭 성인들과 신학자들이 같은 관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극한까지 치달은 육체적 고행이 로마교회에서 수 백 년 동안 일상적 관행으로 남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하나는 교리와, 다른 하나는 심리며 생리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많은 신자들에게 자기징벌은 연옥에서 치러야 할 정화의 고통을 피하는 대체 수단이었다. 사후 미래에서 더 가혹한 고문을 겪기보다는 지금 고통 받는 것이 더 낫지.
그러나 육체적 고행에는 다른 모호한 동기들도 있었다. 자기초월을 지향하는 이들한테 단식과 불면, 육체적 고통은 자극물로서 필요했다. 그런 방법으로 영혼의 상태, 즉 자신의 본질을 바꿀 수 있었다. 이런 물리적 자극물을 남용하면 하향적 자기초월로 이어질 수 있고, 그 결과 질병이나 랄망의 경우처럼 요절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온건하게 쓴다면, 육체적 시련은 수평적 자기초월, 심지어 상향적 자기초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감각적 완성에, 나아가 지적 완성에 이를 수도 있다.
몸이 허기지면 정신이 비상하게 맑아지는 때가 왕왕 있다. 수면 부족이 의식과 무의식 간의 문턱을 낮추는 경향이 있다. 통증은 지나치게 강하지 않다면 신체 기관이 습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강장 충격 역할을 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기징벌을 실행하면 상향적 자기초월 과정이 촉진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현상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즉, 만물의 거룩한 근간에 다가드는 게 아니라, 그 근간과 또 의식이며 무의식의 높은 층 사이에 위치하는 괴상한 ‘심령’ 세계에 접근하게 된다. 이 심령 세계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육체적 고행이 종종 비술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일 것) 예전에 ‘초자연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이라 불리던 능력을 종종 얻는다.
그런 능력과 그것을 수반하는 심령 상태를 주변 사람들이 영적 깨달음으로 혼동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실제로 이런 종류의 자기초월은 상향적인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 생기는 심리적 체험이 묘한 매력을 지니는 바람에 많은 남녀가 그런 상태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자기고문도 견딜 뿐 아니라 간절히 고대하기까지 한다.
랄망과 그의 제자들은 신학자로서 그런 식의 ‘특별한 은혜’가 하나님과 합일함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두 가지 현상 간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지 못했다. (많은 ‘특별한 은혜’가 그 현현에서 ‘악령들’의 작용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뒤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지각 있는 믿음이 있다 하여 그런 행위를 결코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랄망은, 어쩌면 수렝도, 그런 고행에 강하게 끌렸을 가능성이 높다. ‘특별한 은혜’를 실제로 얻게 되니까. 또 하나님을 모르는 ‘미개인’은 본질적으로 악하기에 갖은 가장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거돼야 한다는 정통 교리를 믿음에서, 그들이 그런 유혹을 합리화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2
자연에 대한 랄망의 적개심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향했다. 그가 볼 때 타락한 세상은 음모와 간계로 가득했다. 신의 피조물들에서 기쁨을 취하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마음과 생명과 실재물의 수수께끼를 조목조목 알아보기 등은 그가 보기에 인간 본질 포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면 인간 본질은 자연이 아니라 신이며, 그걸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니까.
예수회 수사에게 기독교적 완성이란 과제는 특히 힘겨웠다. 예수회는 멤버들이 은둔 생활을 하며 오로지 기도에만 삶을 바치는 관상 수도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수도회요, 영혼 구원에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세상 전투에 나서겠다고 맹세한 사도들의 수도회였다.
랄망이 본, 예수회 수사의 이상적인 모습을 수렝이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한 노트에 요약했다. 이 조직의 본질과 요점은 이렇다.
수도회는 「학식과 겸양, 젊음과 순결, 다양한 인종과 완벽한 미덕 같이 상반돼 보이는 것들을 한데 묶는다. 살면서 우리는 하늘의 일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과학적인 연구며 다른 자연계의 작업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때 자칫 어떤 극단에 빠지기가 아주 쉽다. 학문에 지나치게 큰 열정을 보이면 기도와 영성을 경시할지 모른다. 혹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다 보면 학리적 지식이나 달변, 분별력 같은 자연적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함에도 경시할 수 있다.」
예수회 정신의 탁월함은 이런 데 있다.
「즉, 신성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과 연합하는 원칙을 경건하게 따르며 영혼의 기관들을 육체의 기관들과 결합하고, 그걸 신성시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성직자들) 가운데 영혼의 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이익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고, 그럼으로써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에서 떨어져 나간다.」
공동체 정신에 따라 생활하지 못하는 예수회 수사는 역사에 기록된 통속적 이미지의, 세속적이고 야심만만하고 계략을 꾸미는 수사로 변한다.
「내적 삶에 온 마음으로 적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필히 이런 죄악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헐벗고 굶주리는 영혼은 허기를 채우려는 일념으로 뭔가에 매달려야 하니까.」 3
랄망에게 완성된 삶이란 적극적인 동시에 관상적인 것이요, 유한과 무한에서 또 시간과 영원에서 동시에 사는 삶이다. 이런 이상은 이성적인 존재가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최고의 것. 최고의 삶이지만, 동시에 인성과 신성의 본질에 가장 잘 어울리며 가장 현실적인 삶이다.
그러나 이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하면서 랄망과 그 제자들은 편협하고 무기력한 엄격주의를 내보였다. 그들이 신성과 연합하기 원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전체 인성이 아니라 단지 그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즉, 지식 충전이나 설교 재능, 사업이나 조직적 능력 따위. 인간 외적 자연은 수렝의 요약에는 전혀 없고, 랄망의 가르침을 리골렉이 더 상세하게 기술한 데서 얼핏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이미 제자들한테 백합들에 관심을 갖고 생각해 보라 이르지 않았던가. (이건 거의 노장철학의 전통에서 나온 명령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인간적인 뭔가의 엠블럼이 아니라 자기네 존재 법칙에 따르고 만물의 질서에 (무의식적이라는 면을 제하면 완벽하게) 부응하여 사는 자주적인 피조물로서 말이다.
잠언의 저자는 게으름뱅이한테 앞날을 내다보는 개미를 잘 생각해 보라 이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백합들이 앞날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매지만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은 히브리 왕보다도 비교할 바 없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백합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저희 형편을 두고 염려하며 징징대지 않아,
한밤중에 잠 깨어 저희 죄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아,
하나님에 대한 의무 운운함으로써 나를 역겹게 하지 않아,
그들 중에 불만인 자들은 하나도 없어,
그들 중 탐욕에 찌들어 허둥대는 자는 하나도 없어,
그들은 서로한테 무릎 꿇지 않아,
천 년 전에 살았던 같은 부류한테도 꿇지 않아,
점잔 빼거나 사업욕 강한 자는 지구 위에 하나도 없어.
그리스도의 백합은 살레의 성 프랑수아 5가 영혼의 정화에 관한 대목을 기술할 때 동원한 꽃과는 물론 거리가 멀다. 그는 이 꽃들이 가슴의 소중한 갈망이라고 필로테아에게 말한다. <서론>에는 자연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것은 플리니우스 6와 동물 우화 저자들 눈에 보인 자연이요, 사람을 상징하는 자연이요,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애서가와 모럴리스트를 상징하는 자연이다.
그러나 들판에 핀 백합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터 훈장에 담긴 명예를 상징한다. 즉, “거기에 가증스러운 공덕이란 없어.” 7 바로 여기에 백합의 매력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백합이 우리 인간에게는 아주 신선하며 도덕보다 더 심오한 수준에서 아주 심오하게 교훈적인 것이다.
선종의 3대 조사는 ‘무상대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은데 단지 택하기를 꺼릴 뿐.
미움이 없으면 탐심도 없고, 그 길이 환히 보이나니. 8
실생활에서 늘 그렇듯이, 우리는 패러독스와 자기모순의 한가운데 있다. 즉, 우리는 악보다는 그래도 선을 택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만물의 신성한 근간과 결합하기 바란다면 효용이나 도덕성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리사욕과 후회 없이 선택해야 한다.
랄망과 수렝의 가르침에는 그 시대와 지역의 특징이 담겨 있다. 즉, 인간 외적인 자연을 아예 무시하거나 아니면 인간에게 봉사하게 돼 있는 도구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17세기 프랑스 문학에서는 프래그머티즘과 심벌리즘을 제외한다면 새와 꽃, 동물, 풍경 등에 대한 관심이 놀랄 만큼 빈약하게 표현된다.
예를 들어 <타르튀프> 전편에서 인간 외적인 자연 상태는 딱 한 번 언급되는데, 그것도 보기 드물게 시적이 아닌, 이런 한 줄로 그렇다.
‘이제 시골을 꽃 피는 곳이라 일컫지 않는다.’
이보다 더 맞는 말은 없었다. 당대 문학으로 말하자면, 프랑스 시골은 ‘위대한 세기’ 9 도래하기 전까지는 거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들판의 백합들은 응당 제 자리에 있지만 시인들이 눈길 돌리지 않았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한데 대단히 적어서, 테오필 비오, 트리스탕, 그리고 나중에 라퐁텐 정도를 꼽을 수 있다. 10
라퐁텐은 모피와 깃털 속에 있는 은유적 인간들로서의 동물이 (인간이) 아니라 관계는 있지만 다른 질서의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또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동물에 관해 간간이 글을 썼다. <마담 사블리에를 위한 담론>에는 그 이후에 유행한 철학에 대한 놀라운 구절이 있다.
동물들은 기계와 비슷하다오.
그들에겐 생각이 없고, 행위도 선택할 수 없어,
그들에겐 육신의 요구가 있어, 감정과 영혼은…
야수가 급작스레 흥분할 때, 무지한 자들은 말하지요.
저놈이 기분이 안 좋아, 좋아하는 거야, 괴로워해, 아니면 사랑에 빠졌어.
그러나 이건 다 키메라이고,
야성의 감각에는 현혹될 필요가 없다오.
이것은 혐오할 만한 데카르트 철학의 요약이라 할 수 있겠다. 덧붙이자면, 이런 독트린은… 짐승들에겐 영혼이 없으니까 그저 단순한 물건처럼 인간이 쓸 수 있다는 정통 가톨릭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11
라퐁텐의 저 대목 다음에는 수사슴과 자고새, 비버 같은 동물의 지능 사례가 잇달아 나온다. 전체 구절은 나름대로 사색적인 운문, 혹은 명상시로서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라퐁텐은 드문 예외일 뿐이다... <3-3편 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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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 John Donne (1572-1631) - 잉글랜드의 형이상학파 시인, 설교자, 런던 세인트폴 성당 참사원장, 잉글랜드 바로코문학의 중견 대표자. 1615년 사제 서품 받기 전에 쓴 세속적인 시가뿐 아니라 종교적 저술과 뛰어난 설교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 수렝이 한 편지에서 쓰기를, “기도의 위안과 즐거움은 육체의 고행과 밀접합니다. 고행하지 않은 육신은 천사를 영접하기 어렵지요.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시게 하려면, 우리는 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거나 육체를 혹사시켜야 합니다.” - 저자 주. [본문으로]
- “예수회는 하나님과 세상을 다 차지하려 했지만, 그 결과 양쪽의 경멸만 샀을 뿐이다.” (파스칼) - 저자 주. [본문으로]
- Walt Whitman (1819-1892) - 미국의 시인, 수필가, 기자. '자유시의 아버지'. 이신론에 심취했고 모든 종교가 대등하다고 여겼다. [본문으로]
- Saint François de Sales (1567-1622) - 제노바의 주교,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인. <신심 생활 입문> 등 영성 지침서를 여럿 저술. [본문으로]</신심>
- Pliny the Younger (61-113경) - 고대 로마의 작가, 행정관. 개인 서한집. [본문으로]
- The Order of the Garter - 1384년 에드워드 3세가 기사도를 추구하기 위해 제정한 잉글랜드 최고 명예 훈장. 이런 프랑스어 글귀가 새겨져 있다. "Honi Soit Qui Mal Y Pense." "악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니." 19세기 영국 수상 멜버른 경이 대귀족한테만 수여된 이 훈장의 이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There's no damned merit in it." [본문으로]
- 승찬 대사 - 중국 수나라 시대 606년에 입적. 선가의 수행 지침서인 <신심명 信心銘>) 사언절구의 시문으로 남기다. 여기 인용한 대목은 <신심명>의 첫 구절, 至道無難 唯嫌揀擇. [본문으로]</신심명></신심명>
- Grand Siecle - 위대한 세기. 위대한 앙리 4세(1589-1610), 공정한 루이 13세 (1610-1643),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등 부르봉왕가 처음 세 왕의 시대를 일컫는다. 르네상스와 여러 종교전쟁 시기, 위대한 세기, 우아한 세기를 다 합쳐서 혁명 전 프랑스 시대 혹은 앙시엥 레짐이라 칭한다. [본문으로]
- 비오 (Théophile de Viau, 1590-1626) - 프랑스의 극작가, 시인. 위그노 하급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유사상가들의 지도자로 활약. 트리스탕 (Tristan L'Hermite, 1601경-1655) - 프랑스의 고전 희곡 창시. 코르네유의 그늘에 오랜 세월 가려 있다가 19세기 말에 재평가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퐁텐 (Jean de La Fontaine, 1621-1695) - 프랑스의 시인. <우화>. 본문의 <담론>은 혼인이라는 멍에에 대한 에피그램. [본문으로]</담론></우화>
- “동물에겐 언어가 없을 뿐 아니라, 감각도 없고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였으니, 동물은 이성능력이 없는 단순한 기계처럼 보고 인간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라고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그가 인간의 보편적 능력이라 말한 이성 능력을 강조.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은 인간의 비이성적 측면을 직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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