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루덩의 악마들 1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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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올리버 리드, 악마들

 


 

 

  루덩의 새 주임신부는 제 침대를 실험대로 바꾸려 들기에는 지나치게 정상이고 지나치게 왕성한 식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샤르처럼 그도 존중받는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이고, 부샤르처럼 예수회 기숙학교에서 교육 받고, 부샤르처럼 영리하고 학식 있고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이고, 또 부샤르처럼 교회 무대에서 눈부신 출세를 꿈꾸었다. 

  기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사회와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 두 프랑스 사람한테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샤르가 유년기와 학창시절, 또 방학 때 고향집에서 하던 장난 따위에 관해 하는 얘기가 그랑디에한테도 간접적으로 적용된다 하겠다. 

 

  부샤르의 <고백록>에서 드러난 세계는… 좀 지나치다는 점만 빼면 현대 성과학자들이 우리한테 내보이는 세계와 아주 흡사하다. 작자는 아이들이 성적 유희에 얼마나 자주 거침없이 탐닉하는지를 묘사한다. 모든 정황으로 보건대 어른들은 그들 장난질을 그저 수수방관만 한 듯하다. 

  선량한 수도사들 밑에서 학교에 격렬한 놀이가 없는 차에, 사내애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끊임없는 자위와 반공휴일에 벌이는 동성애 행위 이외에 따로 분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활기찬 대화와 유창한 설교, 고해와 기도를 통해 웬만큼 자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부샤르가 이렇게 적고 있다. 즉, 교회의 4대 축일 중에는 습관적인 성적 유희를 자제하는 편이어서, 어떤 때는 여드레를, 혹은 열흘 내내 참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순결 기간이 아무리 애써도 두 주일을 넘기지는 못했다. 신앙심으로 어느 정도 버티긴 했어도. 

 

  어떤 특정 상황에서건 우리네 실제 행동은 성향이나 이해관계를 가로에 두고 도덕적 이상이나 종교적 최고선을 세로에 두는 사각형의 대각선으로 나타난다. 부샤르의 경우, 또 짐작컨대 그가 쾌감의 동반자라 부르는 다른 학생들 경우에도, 신앙심의 상하 직선이 아주 짧고 베이스에 가까워서 대각선이 베이스와 이루는 각도가 지극히 작았던 듯싶다. 

 

  휴일에 집으로 돌아가면 부샤르의 부모는 젊고 순결한 하녀가 자는 방에 아들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처녀가 깨어 있을 동안에는 순결 그 자체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정말 잠들었는지 잠든 척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중에, 학창시절이 끝난 뒤, 부샤르는 소떼를 돌보는 어린 시골 소녀한테 마음이 끌렸다. 동전 몇 푼에 그녀는 젊은 나리의 욕망을 기꺼이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새 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부샤르의 이복형으로 카쌍의 수도원장인 사람 곁에서 일했는데, 수도원장이 유혹하려고 하자 거기를 떠나 이 가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각종 섹스 실험에서 부샤르의 모르모트요 공동 작업자가 됐다. <고백록> 2부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부샤르와 프랑스 왕위 계승자 사이에 넓고 깊은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럼에도 미래의 루이 13세가 양육된 도덕적 분위기는 미천한 학생의 인격이 형성된 상황과 많은 측면에서 비슷하다. 어린 왕자의 주치의인 장 에로아의 <일지>가 보전돼 있다. 이 문건 덕분에 우리는 17세기 아이들 교육을 아주 상세하게 알게 된다. 

  사실 왕세자는 아주 귀한 아이였다. 팔십 년이 넘어서 프랑스 국왕에게 태어난 첫아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둘도 없이 귀중한 아이의 특별한 교육법이 우리에겐 참으로 놀랍다. 온 나라에서 늘 기도해주는 아이를 주변에서 이제 우리가 보는 식으로 대했다면, 평범한 아이들한테는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왕세자가 서로 다른 어머니 서넛한테서 태어난 이복 형제누이들과 함께 자랐다는 측면부터 시작하자. 같은 피를 지닌 형제누이 중 몇몇은 왕세자보다 나이가 더 많고 몇몇은 더 어렸다. 세 살쯤에, 어쩌면 그 이전에, 어린 루이는 사생아가 무엇이며 서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주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정보를 주고받는 데 동원된 언어가 늘 어찌나 천박한지 아이가 종종 충격을 먹곤 했다. 아이는 가정교사인 마담 몽글라를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Fi donc![각주:1] 정말 구역질나는 여자야!”  

  부왕 앙리 4세는 추잡한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궁정 대신들과 하인들이 궁정 일을 보러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끊임없이 불러댔다. 그들이 그런 외설적인 노래를 입에 담지 않을 때면 어린 왕자의 수행원들이, 남자든 여자든, 아이 아버지의 사생아들에 관해, 아이의 미래 아내인 (이미 약혼한 사이인) 오스트리아 안 공주의 어떤 진가를 짐작하여 아이한테 음란한 어휘로 낄낄대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게다가 왕세자의 성교육은 입말에 그치지 않았다. 대개 밤마다 아이를 여관들이 자기네 침대로 데려갔다. 당시에는 나이트가운이나 파자마를 잘 입지 않았고, 그 침대에서는 여관의 남편들도 밤을 보내곤 했다. 네댓 살쯤 됐을 때 어린 루이는 이른바 ‘인생의 사실들’을 이미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귓전으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밀한 관찰을 통해서. 

  17세기 궁전에는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건축가들이 낭하라는 것을 아직 궁리하지 못했다. 건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다른 사람 방의 한 끝을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는데, 그 방에서는 언제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궁정 에티켓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미천한 사람들보다 좀 운이 없게도 왕실 인사한테는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왕족의 피를 가졌다면, 그 사람은 중인환시 하에 태어나고 죽었으며 중인환시 하에 용변도 보고 때로는 중인환시 하에 사랑을 나눠야 했다. 에워싸는 건축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용변 보고 사랑 나누는 장면을 아이가 싫든 좋든 다 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 루이 13세는 여인들을 지극히 혐오하고, (플라토닉 성격이었겠으나) 남성들을 아주 선호하고 갖가지 신체 기형과 질병 따위에 숨넘어갈 정도로 질색했다. 마담 몽글라와 궁정 여인들의 난잡한 언행이 첫 번째 특징과, 또 자연적인 반응으로서 두 번째 특징의 원인일 것이다. 세 번째로 말하자면, 생제르맹앙레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침실들에서 어린애가 어떤 메스꺼운 장면들과 얼마나 부닥쳤을지, 누가 알겠는가? 

 

  자, 루덩에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성장한 세계가 그러했다. 그 세계에서 전통적인 성적 터부는 무지하고 가난에 찌든 다수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고 사회 상층부에서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는 공작부인들이 자기네 딸의 유모가 얼굴 붉힐 농담을 예사로 내뱉고 상류층 귀부인들이 외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지위와 재산을 갖춘 남자는 (너무 결벽하지 않다면) 욕구를 거의 마음대로 채울 수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또 교양 있고 사려 깊은 사람들조차 종교의 가르침을 순전히 피크윅[각주:2] 식의 경박함을 가지고 받아들였으니, 이론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가 엄청나게 컸다. 믿음의 시대라는 중세 세태에 비하면 좀 덜하긴 했을지라도. 

 

  이런 세계의 소산인 우르뱅 그랑디에가 제 교구에 자리 잡으면서 지상과 천상의 열매를 다 맛보기로 한 것이다. 그가 아주 좋아하는 시인은 롱사르[각주:3]인데, 그가 지은 스탠자를 보면 젊은 주임신부의 관점을 완벽하게 엿볼 수 있다. 

 

신 앞에 고개 조아리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우리는 온유하고 얌전해. 

교회 종소리 들으며 무릎 꺾고 

설교단을 바라보네. 

침대로 날아들어 몸뚱이를 결합하며, 

우리는 욕망에 끓고 죄가 많도다. 

태평하게 웃음 날리며 기꺼이 배우노라, 

의미심장한 사랑을. 

 

  이것은 ‘둥글둥글 무난한 삶’을 기술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둥글둥글한 삶을 이 스물일곱 한창 젊은 휴머니스트가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성직자의 삶은 둥글둥글 다 누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정해진 한 점이 되어야 한다. 풍향계가 아니라 컴퍼스 다리인 것. 그 한 점을 고수하기 위해 성직자는 특정한 의무를 지니고 특정한 서원을 한다.

 

  그랑디에의 경우 의무를 다 떠맡고 필요한 서원도 했지만, 그걸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심적 구속감을 나중에 드러내게 된다. 루덩에 도착하고 십년 지나 오직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순결서원에 관한 짧은 글에서. 

  순결서원에 맞서는 주요 근거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첫 번째는 이런 삼단논법으로 요약되리라. ‘지키기 불가능한 약속은 구속력이 없다. 젊은 남자한테 금욕은 불가능하다. 고로, 그런 금욕 서약은 구속력이 없다.’ 이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면, 그에겐 두 번째 근거가 준비돼 있다. 강압에 못 이겨 한 약속은 지킬 의무가 없다는 보편적 공리에 근거한 것. 

 

  「성직자가 금욕을 받아들임은 금욕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성직을 얻기 위함이다. (그의 서약은)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락하지 않으면 성직을 맡을 수 없으니 힘겨운 조건이라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교회가 그에게 부과한 것이다.」 

  그런 시각을 견지하면서 그랑디에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혼인의 자유가 있으며, 일단은 화답하는 여인 누구하고든 둥글둥글 원만한 삶을 꾸릴 권리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새 주임신부가 성적 매력을 풍긴다는 측면이 교구에서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끔찍한 스캔들로 보였다. 그러나 고상 떠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다른 주민들에겐, 심지어 자기가 정결을 지키는 기독교인이라고 믿는 이들한테도, 그랑디에 같은 사람의 출현과 성향과 평판으로 생긴 상황에서는 뭔가 유쾌하게 흥분되는 면이 있었다. 

  섹스와 종교는 서로 기막히게 결합된다. 이 결합에는 토심스런 구석도 좀 있지만 절묘하고 통렬한 풍미가 있어서 계시라는 미각을 깜짝 놀라게 한다. 무슨 계시냐고? 바로 그게 문제다.

 

  그랑디에가 여신도들한테 인기 끌면서 남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평판이 안 좋았다. 여성 교구민들의 남편과 아버지들은 매너 좋고 혀도 잘 굴리며 똑똑한 이 젊은 멋쟁이를 처음부터 아주 의심쩍게 대했다. 

  새 주임신부가 설령 성자라 해도 그렇지, 성 베드로 교회 같은 부유한 교회가 왜 외지인한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아, 우리 지역 성직자들이 뭐가 모자라서? 루덩의 헌금은 루덩 출신자 주머니에 들어가야 하잖아. 

  설상가상으로 그 외지인은 혼자 부임하지도 않았다. 모친과 형제 셋과 누이 하나까지 줄줄이 달고 왔다. 

  형제 중 하나한테는 이미 도시 수석행정관 사무실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어. 성직자인 다른 아우는 성 베드로 교회 주임신부 대리로 임명됐고… 역시 성직에 있는 셋째는 아직 공식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뭔가 교회 직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거든. 이거야말로 심각한 외침()이 아니고 뭐란 말이오! 

 

그랑디에 신부 집전

 

  하지만 그 불평꾼들조차 그랑디에 신부가 강론을 우레처럼 힘차게 할 수 있고 건전한 교리며 학식까지 충분히 갖춘 유능한 성직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점들이 외려 그에게 해를 끼쳤다. 

 

  기지 넘치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기에 그랑디에가 처음부터 도시의 가장 귀족적이고 교양 있는 인사들한테서 초대를 받았다. 루덩의 상류사회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소위 상류사회 엘리트층에는 들지 못하는, 돈은 많지만 투박한 시골뜨기들과 거들먹거리는 관리들과 집안 좋지만 망나니짓 하는 자들한테 굳게 닫혔던 저택 문들이 외지에서 굴러온 이 시건방진 애송이한테는 즉각 열린 것이다. 

 

  얼마 전 도시와 성채의 지방장관으로 임명된 장 다르마냑과 친교를 맺었을 뿐 아니라 법률가요 정치가, 역사가, 시인으로 유명한, 루덩 최고의 명사 스케볼라 생마르트[각주:4] 노인 저택에도 무상으로 드나들게 됐다. 나름대로 내로라하면서도 거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는 한층 더 화를 내고 한을 품게 됐다. 

 

  다르마냑은 주임신부의 일처리 능력과 판단력을 아주 높이 샀고, 그래서 궁정으로 떠날 때마다 관방 업무를 다 그에게 맡겼다. 생마르트에게는 무엇보다도 주임신부가 고전을 잘 알기에 노인의 작품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문주의자라는 점이 좋았다. 예를 들어, 베르길리우스 전문가로서 노신사의 걸작과 <Paedotrophiae Libri Tres> 같은 작품 말이다. 특히 후자는 아이들 보육과 양육에 관한 연역적 장시인데,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작자 생전에 열 판을 찍었다. 또 시구들이 아주 우아하고 적확해서 롱사르 같은 거장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난 우리 시대 그 어떤 시인들보다 이 시의 저자를 더 좋아해. 설령 벰보와 나바제로, 숭고한 프라카스토로[각주:5] 불쾌하게 여긴다 해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겠어.” 

 

  아아,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으며 인간의 자부심이란 또 얼마나 헛된 것인가! 나바제로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추기경 벰보라는 이름도 우리한테는 의미가 적다. ‘숭고한 프라카스토로’가 후손들 기억에 남아 있다면 순전히 이런 사실 덕분이다. 즉, 불행한 왕자 시필리스에 관해 깔끔한 라틴어로 의학적 전원시를 쓰면서 매독이라는 창피한 질병에 점잖은 별명을 달아 주었다는 점. 왕자는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유창목 달인 물을 잔뜩 마시고 나서야 ‘갈리아(프랑스) 병’을 털어냈다. 

  죽은 언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죽어만 간다. 생마르트의 교훈적 장시 세 권은 프라카스토로의 시필리스보다 역사에 남을 기회가 훨씬 더 적었다. 한때 모든 사람한테 읽히고 신성보다 더 신성한 대접을 받았건만, 오늘날엔 그 스케볼라 생마르트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랑디에가 친분을 트던 시기에 노시인은 저무는 영광 속에 아직 머물러 있으며 최고의 원로요 일종의 국정 기념비였다. 그의 만찬에 간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존경받는 정치가요 인문학의 수반이 은퇴하여 살고 있는 화려한 저택에서 그랑디에는 그 위대한 인물은 물론이고 역시 유명한 아들들이며 손자들과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거기로는 명성 높은 객들이 드나들었다. (신분을 감춘) 웨일스 왕자, 박애주의자요 혁신적 의사이며 프랑스 저널리즘의 창시자인 테오프라스트 르노도, 나중에 방대한 노작 <Astronomia Philolaica>를 쓰고 변광성 주기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결정한 이스마엘 부요 같은 이들. 

  게다가 지역 사회 등불도 합류하곤 했다. 루덩의 수석치안판사 기욤 세리제, 독실하고 학식 있는 검찰관 루이 트렌캉. 그는 아벨 생마르트와 동문수학했으며 문학과 골동품 연구에서 취향이 그 가족과 비슷했다. 

 

  그런 선택된 인사들과 나누는 우의는 참으로 흡족한 것이지만, 아웃사이더들한테서 받아야 하는 적대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주 총기 있다는 이유로 우둔한 자들한테 불신을 사고, 일처리가 좋다 하여 무능한 자들한테 시기 받고, 넘치는 기지 때문에 둔감한 자들한테 또 훌륭한 매너 때문에 촌뜨기들한테, 또 여인들한테 사랑 받는다 하여 매력 없는 자들한테 경원시되다니… 그의 보편적 우월함에 대한 대접이 뭐 이렇단 말인가!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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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3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2편 4

루덩의 악마들 6편 4

루덩의 악마들 5편 4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2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2)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1. 흥, 쳇, 제기랄! (불어) [본문으로]
  2. 디킨스의 장편 <피크윅 보고서>(1836)의 주인공. 단순하고 쾌활하며 막연한 성격의 대명사. [본문으로]</피크윅>
  3. 롱사르 (Pierre de Ronsard, 1524-1585) - 프랑스 시인, 당대에는 ‘시인들의 왕자’라 불렸다. [본문으로]
  4. 생트마르트 (Sainte-Marthe) 가문 - 16-18세기 프랑스 주요 시인들을 줄줄이 배출. 1555년에 죽은 시인 샤를은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의심받아 투옥됐다가 미친 척하여 석방됐고, 그의 조카 스케볼라(1536-1623)는 앙리 4세의 총신으로 라틴어로 시를 지어서 롱사르를 비롯해 동시대인들을 환호케 했다. 그의 장남 아벨과 쌍둥이인 차남들도 시인, 손자 스케볼라 3세는 국왕의 사관. [본문으로]
  5. 벰보 (Pietro Bembo, 1470-1547) -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마교황 레오 10세의 비서관, 추기경, 학자. 나바제로 (Andrea Navagero, 1483-1529) -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베네치아 귀족 출신.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 1478-1553) - 베네치아 의사, 시인. 그의 장시 <시필리스 혹은 갈리아 질병>에서 매독을 가리키는 Syphilis 용어가 나왔다. [본문으로]</시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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