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애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들의 순수함과 취약성이며,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어렸을 적에 믿기 어려운 재주와 재능이 우리한테 있었음을 우린 이미 기억도 못한다. 그걸 그저 세월과 함께 사라지게 놔두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자신을 교육받고 성숙하고 주변 세계를 다룰 줄 알게 돼 훨씬 더 좋아졌다고 보긴 하지만,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잃어버린 놀라운 재능이 또 여럿 있기도 하다. 그런 재능 덕분에 정신 건강이 상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독특한 관점으로 보게 됐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내면의 어린애와 연결을 복구하고 왕년에 언젠가 지니고 있던 힘을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우리의 너그러움
어린 시절에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한 ‘다 내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나 인색함으로 아직 망가지지 않았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필요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욕구와 훨씬 더 많이 연결돼 있다. 우리가 주는 까닭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기 때문이지 반대급부로 뭔가 얻을 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네 의도가 바뀌어 가면서, 이 타고난 관대함을 잃고 있다.
어떤 이들이 나이 들어서도 어린 시절의 유머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네 대다수는 농담과 웃음을 출세 수단으로 삼으면서 성장한다. 일상에서 유머를 조금만 발휘해도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더 자주 농담도 하고 명랑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을 즐기고 만족해하며, 현재에 살면서 우리 내면의 평온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평온은 성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다른 사람들과 소통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대체된다. 우리의 마인드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멈출 줄을 모른다. 마음을 맑게 하고 이 내면세계를 다시금 누리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겠다.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하고 아이한테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꽉 차 있던 자신감을 금방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듦에 따라 현실이 파고들면서 확신에 울타리를 둘러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꿈에 사회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면서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더 이상 품지 않는다.
만약 ‘이건 뭔가 잘못되고 있어’라든가 어떤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굳은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유년기의 직관이다. 자연의 이 선물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매일 우리를 돌보아 준다. 하지만 이 직관이 더 강하고 정확해졌다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간과하면 그건 약해질 것이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지금 보기에 좋은 것에 빨리 반응하고 즉각적인 결정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긴다. 나이 먹으면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분석하고 숙고하게 된다. 행동의 후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야 물론 좋지만, 지나치게 궁리에 빠져서 좋아하는 행위를 놓치는 일이 없게끔 균형을 찾아야 한다.
7. 우리의 명상 능력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 주의를 집중하고 부정적인 것에 마음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명상과 주의력을 자연스럽게 실습한다.
바로 이것이 아이들이 저절로 행복하고 기쁨에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바쁜 성인이 되어서도, 아주 유용한 이 행위를 지속하기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종종 본능적으로 숨을 멈춘다. 그건 물론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고 그렇게 한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걸 즐긴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할 때, 숨을 참는다는 게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전문가들 말로는, 호흡 컨트롤은 심리적 안정이며 침착함, 에너지 증대, 집중력 고조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9. 최고선에 대한 우리의 믿음
어린 시절에 우리는 마주치는 사람 누구한테서든 가장 좋은 걸 본다. 순진무구한 우리는 만나는 사람 모두가 천질이 선하며 주변 세상에 범람하는 어둠과 악을 알지 못한다고 여긴다. 한데 나이 먹어 가면서 우리는 준엄한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며 최고선에 대한 믿음도 사라진다.
우리의 양심은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인식이며 자신의 도덕과 신념에 대한 견식이다. 나이 먹어 가면서 우리는 이런 측면을 종종 배격하면서 판단의 오류를 합리화한다. 성공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는 한 그렇다. 하지만 잠깐 멈춰서 자신의 양심에 귀 기울인다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혼의 짝은 완벽한 관계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함께 겪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영혼의 짝은 당신한테 그냥 어울리거나 걸맞은 사람이 아니다.
깊은 수준에서 당신이 연결된 사람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영혼의 짝’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거기에 몰두하다가 좋은 잠재적 파트너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그런 진짜 반쪽은 (the better half) 아예 없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영혼의 짝은 반드시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단지, 이는 첫눈에 심장 오그라드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진정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간 흐르면서 영혼의 짝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
두 가지 다른 견해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
소울메이트란 존재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아아, 아직은 그 누구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나 징표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해!
1. 말이 없어도 서로 뜻이 통할 수 있다.
무슨 심령술사가 되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색한 침묵을 뭔가로 채우려고 쉴 새 없이 재잘댈 필요를 못 느낀다. 왜냐면 이 사람과 있을 때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외려 놀라울 정도로 따스하고 편안하니까.
또 대화할 때 마치 서로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편하게 말을 맺을 수 있음을 아주 종종 깨닫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실제로 그렇다.
두 사람의 영혼은 강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 보통사람들한테는 그림의 떡.
2. 당신이 그냥 느낀다.
이 사람이 당신한테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마음속 깊이 느낀다.
내면의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인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사람의 (특히, 여자의) 가장 큰 힘은 직관에 있는 만큼,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3. 눈을 마주볼 때, 두 사람한테서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아주 활발하고 매혹적인 화학 반응의 두 요소 같다.
둘이 만날 때 서로를 사로잡는 감정은 믿기 어려운 힘과 충만함으로 두드러진다.
당신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물론 특별한 감정을 맛봤어.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성적 에너지 역시 뜨겁게 달아오른다 해도 침대에서 아주 좋다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도 열정과 애정이 두 사람을 꽉 채운다.
4.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좋게 만든다.
서로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일깨워 그것이 무르익도록 주제넘지 않고 긍정적으로 조금씩 자극한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당신이 인생에서 최고의 팀에 들어있다고 느낀다. 상대의 관심사를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느낌을 서로 주는 법이 없다.
당신도 당신의 반쪽도 개인적으로 발전하면서 상대의 발전을 응원하기 원한다. 진정한 영혼의 짝은 그냥 아주 친밀한 사람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 아주 소중한 파트너이다.
5. 당신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낀다.
파트너가 치명적으로 마음 상할 뭔가를 실수로 말하게 될까 겁내지 않는다.
당신의 행동을 파트너가 이상하게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까 겁내지 않는다. 샤워하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해도 말이다.
당신은 그런 걸 전혀 겁내지 않는데, 왜냐면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아주 편하고 아늑해지니까.
당신은 어떤 주제로도 대화할 수 있다고 느낀다. 둘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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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쪽에 단점과 결점이 있고, 그걸 서로 알면서도 여전히 함께한다.
그래, 당신에게 결점이 있어, 파트너에게도 그렇고. 그걸 당신이 잘 아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당신은 외모에서 행동까지 이상적인 누군가를 찾거나 늘 웃음 짓고 옳은 일만 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게 전혀 아니니까. 그런 사람은 영혼의 짝이 아니야, 이건 결점만 없는 게 아니라 생명도 없는, 윤기 나는 인형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점과 단점을 보고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서로를 받아들인다.
소울메이트는
당신에게 완벽한 관계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함께 겪을 수 있는 사람이다.
7. 둘이 함께 있으면 좋고 편안하다.
파트너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이 계속 스트레스를 겪어선 안 된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야 한다. 주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된다.
함께 있는 동안 계속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면…
흠, 그 사람이 누구이든, 당신 영혼의 짝은 못 된다.
8. 둘 사이에 이견이 있곤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에서는 뜻이 맞는다.
좋아,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면도한 뒤 세면대를 늘 지저분하게 놔두고 변기 시트를 위로 올린 상태로 두어서 당신을 열 받게 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또 당신이 식사 때 쩝쩝거리고 욕실을 몇 시간씩 차지하는 습관에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래, 그런 것에 짜증이 나고 심지어 화도 날 수 있어…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둘에게 정말 중요한 것에서 뜻이 맞지 않는가.
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에 동의한다.
파트너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도 소중히 여기고, 같은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9. 그 사람한테는 솔직하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며 실제로 느끼는 것을 파트너에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만약 운 좋게 영혼의 짝을 찾았다면, 당신은 원한다면 자기 생각을 죄다 파트너에게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어떤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파트너가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당신을 비난한다고 느낀다면…
그 파트너가 당신 영혼의 짝은 분명히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의 짝은 당신의 어떤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하는 얘기를 비난과 편견 없이 듣는다.
10. 영혼의 짝을 만났다 해서 관계가 반드시 낭만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당신 영혼의 짝이 알고 보니 낭만적인 파트너가 아닐 수도 있다.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항목이 다 성적인 측면과 무관하다는 점을 보면, 이 부분이 이해될 것이다.
당신은 둘 사이에 깊은 정신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지만, 성적 측면에서 서로에게 끌리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11. 둘이 첫눈에 반하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영혼의 동반자가 반드시 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파티에서 막 만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하철이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같은 층에 살며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내는 이웃일 수 있어, 혹은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다만, 대다수는 그런 번뜩임을 겪고 나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와 늘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출한 기법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지, 그걸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해물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바로 마인드와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존재>와 갈라서게 하는 것이니까.
이 개념을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보지요. 부디 선입견을 다 버리면 좋겠군요.
이런 개념을 접하면서 처음 내보이는 반응은 아마도 이런 저항일 테니까요.
“아니, 마인드와 시간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단 말이야? 마인드와 시간 없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정신 나가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거나, 아니면 존재하기를 아예 끝낸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곧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시간 개념이 없는 동물 수준으로 내려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로, 의식의 다음 진화 단계로 올라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즉,
제한된 인간 마인드에서 우주 마인드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함정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간과 마인드를 장악하게 되겠지요. 장악한다고 해서 마인드와 시간한테 무슨 거창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둔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삶을 저희 뜻대로 결정하게 놔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둘을 지배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마인드와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아주 밀접한데, 어떻게 그런지는 이제 곧 알아볼 겁니다. 마인드는 시간과 어울려서 우리가 <존재>로 달려가지 못하게 함정을 만들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볼까요.
마인드는 어떻게 작동하나
사람에게 마인드가 부여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마인드만큼 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집을 짓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거나, 혹은 뭔가를 손수 만들거나 사업 전략을 세우거나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물론, 계획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분석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최선을 택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 궁리해야겠지요.
구체적인 뭔가를 입안하고 실행할 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에 걸맞게 활용합니다. 이때 마인드는 우리가 작업에 동원하는 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네 마인드의 역할이 그런 일에만 국한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데, 인류는 사실상 큰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마인드에게 파워를 지나치게 많이 내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내 마인드가 바로 나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마인드를 과제 해결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마인드가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게 됐습니다.
자신에게 조용히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흠, 내 머릿속을 마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거기서 제멋대로 따로 살면서 말이야.’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마인드가 당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절대고 속삭이고 지시하고 주장하고 요구한다는 사실도 분명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리고…
이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이지 잠깐이나마 쉴 틈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이건 곧 우리가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마인드가 제 본연의 자리와 역할을 망각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마인드가 외려 주인을 쥐고 흔들어요.
마인드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마인드가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판단하고, 그 모든 것에 의견 덧달고 꼬리표 붙여서 분류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변의 사물과 현상과 사안과 사람에 대해 당신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깊이 규명하고 인식할 시간을 채 다 쓰지도 못했는데, 마인드가 먼저 중뿔나게 제 판단을 들이밉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실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혹은, 보호하는) 방패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생각의 차단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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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단막이 당신과 당신 자신을, 당신과 동료들을, 당신과 세상을, 당신과 자연을, 그리고 당신과 신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분리 망상을 일으킵니다.
덧붙이자면, 이 분리 망상을 우리의 거짓된 나인 <에고>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쓰일 때 마인드는… 유용하다. 갖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체가 될 때 마인드는… 해롭다.
자신의 머릿속 대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커녕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야 할 순간에는 역부족이 될 정도로 우리 힘을 잔뜩 빼앗기만 할 뿐이에요.
머릿속 대화에 들어가는 힘은 다 허튼 데에… 그 무엇에도 소용없는 말과 생각들을 찧고 빻는 데 쓰이기만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 광인들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군요.
그들은 저 혼자서 뭔지 모를 소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려요.
그러나 광인이라 불리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상인’들은 기껏해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니까요.
엄밀히 보자면, 우리네 대다수가 사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 목소리’의 힘에 전혀 맞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니까요.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리네 ‘머릿속 목소리’는…
멀고 가까운 기억을 더듬고, 불평하며 비탄에 빠지고, 뭔가를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뭔가에 화내고 뭔가를 예상하고, 뭔가를 우려하고 희망하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비교하고 화내고 욕하고, 판단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때론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아, 그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된 무엇이야,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이 목소리가 우리한테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더 좋은지 확실히 알고 있어.’ (이런 경우도 물론 있긴 하다. 직관이나 통찰.)
한데, 그 내면의 목소리가 뭔가 부정적인 것을 말할 때, 궁극적으로 옳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어떡하지?
내면의 목소리 뭔가를 말할 때, 우린 그걸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 머릿속에 있는 목소리
딱히 특별한 사유도 없이 진급에 자꾸 누락된 당신이 직장 상사에게 승진을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치자.
고심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당신은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거기에 준비도 거의 다 한 상태야.
하지만 갑자기 머릿속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괜히 중뿔나게 나서지 말고 그냥 잠자코 있어, 안 그러면 아예 쫓겨날지도 몰라.”
혹은 예를 들어, 목소리나 소통 훈련, 스피치 공부를 위해 <나나나 커뮤니티> 웹 세미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치자.
‘이 작업은 흔히 말하는 자기계발의 근본이잖아, 사람들을 많이 접하는 나한테는 특히 필요한 거야’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가 또 이렇게 속삭인다.
‘그런 거 안 하고도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 한데 이제 와서 이 나이에 애들처럼 공부는 무슨 공부야?’
그리고 이 내면의 목소리 하나 때문에 당신의 열정은 비눗방울처럼 꺼지고 만다.
저런 상황들이 익숙하지 않은가? 저 비슷한 일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 어렸을 적에, 혼자 뭔가를 계속 중얼대며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하면서 동네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들은 자꾸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또 별개의 곁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있는 비판자로서 효율적인 제어시스템 같이 작동한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 그런 내면의 목소리가 하는 일은 열정을 식히고 자신감을 파괴하고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 이럴 때, 내면 목소리는 또 궁리가 아주 멀쩡해서, 새로운 뭔가를 하지 않게 하는 핑계를 잔뜩 들이대며 합리화에 나선다.
내면의 목소리가 신통치 못한 소리를 지껄이고 우리가 그 목소리에 지배된다면, 인생은 무채색이 되며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시도해 보지 못하겠지, 왜냐면 두려움과 의혹에 사로잡히니까.
그런 내면 목소리의 99%는 우리를 제 자리에 붙잡아둔다. 복지부동하게 만든다.
한데, 전진하지 않는 자는 퇴보하는 것 아니던가?
내면의 목소리는 직관인가?
우리는 내면에서 벌어지는 독백이나 (자신과의) 대화를 대체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왜?
왜냐하면, 그 목소리가 진정한 ‘나’이며 잠재의식의 시그널이거나 직관이라고 여길 때가 많으니까.
사실, 목소리 형태로만 (혼자 중얼거려야) 직관이 번뜩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그들은 자기 머릿속에서 뭔가를 분명히 듣는다고 말한다. 이런 <우주의 조력>과 <내적인 제동>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나?
이건 사실 아주 간단해.
진짜 번뜩이는 직관에는 비판도 논쟁도 설명도 없다.
직관과 통찰의 본질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단순할 것이다.
이를테면, ‘저쪽 어디로는 가지 마’, ‘다른 길로 가라’, ‘집에 전화해 봐’ 등등.
이때 '뭔가에 대처하지 못하거나 길을 잃을 테니까 그쪽으로 가지 마' 같은 말을 머릿속에서 듣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거기로 가지 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한데 대부분의 <내면 목소리>에는 하나의 목표만 있어.
즉, 우리를 심리적으로 약하게 만들어 자신의 제물로 삼으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거나 최소한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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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어떻게 막아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목소리가 마구 일어나는 경우에 부닥친다. 그렇다 하여 ‘내가 미친 건가?’ 하는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고 내면의 독백 때문에 우울해할 까닭도 없다. 단지 하나, 이런 현상이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다는 사실 때문에 어떡하든 잘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
그런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 행위를 통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통째로 달라질 것이다.
1. 극복을 위한 첫걸음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기, 국외자 입장에서 관찰하기, 또 관점을 바꾸기.
우리는 우주나 세상의 손아귀에 붙들린 볼모가 아니며 장난감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이 우리 행위의 주역이요 주인공 아니던가. 그럼, 내면의 목소리가 뭔가 안 좋은 쪽으로 또 속삭일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소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자문하라.
"이건 내 내면의 목소리이지 본연의 ’나‘가 아니야" 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다독이라. 그리고 정말 그렇게 믿어야 한다.
2. 두 번째 스텝
자신의 약점이나 단점, 결점 따위를 다 허용하는 거야.
뭔가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잘못 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해.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을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세상에 더 이상 감추려 들지 않게 되니까.
누구한테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천사와 악마가, 영웅과 악한이 다 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 하는 점.
‘애써 봤자 아무 것도 안 될 거야,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나’
같은 목소리가 내면에서 꿈틀대며 일어날 때,
“스톱!”
하고 외치면서 그 목소리를 단호하게 차단하라.
그런 생각이며 마인드의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잡념의) 장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떡하든 더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즐겁게 할 일이다. 바로 여기서 <긍정적 자기암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목소리>는 나름대로 설득력과 창의력이 강하다.
우리네 마인드는 활동의 도구요 수단이다. 그것은 특정 작업에 이용할 수 있고, 그 작업이 끝나면 내려놓게 돼 있다. 그게 마인드의 소명이다. 그런 만큼,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의 8할에서 9할쯤은 쓸데없이 반복되는 것일 뿐 아니라, 또 이 반복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그 기능 장애와 종종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는 것. 이게 사실이라는 점은 자신의 마인드를 잘 관찰해 보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하고 해로운 과정이…생명 에너지가 심각하게 유출되는 원인이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중독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중독 형태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 그걸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야.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중독 상태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또 우리한테 거짓된 쾌감을 안기는데, 이 거짓된 쾌감이 나중엔 반드시 고통으로 바뀐다.
- 우리는 왜 강박적인 생각에 중독되나?
왜냐하면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이건 우리가 자아감을 마인드의 내용과 움직임에서 끌어낸다는 뜻이다. 또 왜냐하면, ‘만약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텐데’ 하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입각하여 자신에 대한 심상을 형성한다. 이 허깨비 같은 자신을 <에고>라 부를 수 있다. 에고는 마인드의 움직임으로 이뤄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에고>라는 용어를 여러 사람이 제각각으로 이해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에고란… 자신을 무의식중에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거짓된 나>를 의미한다.
에고한테는 현재 순간이란 게 거의 없다. 그건 과거와 미래만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진실에 완전히 거꾸로 가는 까닭은… 에고 모드에서 작동하는 마인드의 기능에 문제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마인드는 과거를 생생하게 유지하는 데 늘 신경 쓴다. 왜냐하면, 마인드가 보기엔… “아, 과거가 없다면, 넌 도대체 누구야? 네가 있을 수 있겠어?”
마인드는 계속 살아남고 미래에서 해방이나 충족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미래에 투영한다. 흔히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젠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난 행복하고 만족할 거야, 편안해질 거야.”
에고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는 건 사실상 현재가 아니다. 즉, 에고는 과거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잘못 지각한다. 혹은, 마인드가 투사된 미래의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 정도로 현재를 축소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관찰해 보면, 이것이 <에고>의 작동 방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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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 이르는 열쇠는 현재 순간에 있다.
그러나 마인드가 곧 자신이라 여기는 한, 그 현재 순간을 찾을 수 없다.
- 난 분석하고 판별하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아. 더 명료하고 더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내 마인드를 잃고 싶지는 않아. 사유하는 재능은 우리한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야. 그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지 않겠나?
마인드가 우세한 상태는… 의식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긴급히 넘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계속 괴물로 커지는 마인드에 의해 우리가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측면에 불과하다.
생각은 의식 밖에서 실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생각 위로 올라선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동식물 수준으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야.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사고력을 여전히 이용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또 생각하는 마인드를 주로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하면서도, 무의식적인 내면 대화에서는 벗어나 내적인 고요와 평온을 맛본다.
마인드를 이용할 때, 특히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할 때, 생각과 고요 사이를, 마인드와 무념 사이를, 몇 분마다 오가면 좋다. (no-mind 상태인) 무념이란… 생각이 제거된 의식이다. 그렇게 해야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에 진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과 연결되지 못한 생각은 금방 빈약하고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마인드는 본질상 생존을 위한 장치이다. 다른 마인드들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기 등은 마인드가 곧잘 해내지만, 그런 건 다 창의적인 것이 전혀 못 된다. 진정한 아티스트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마인드가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고요에 머물러서, 뭔가를 만들어 낸다. 그때 마인드가 창의적 임펄스와 직관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 그들의 창의성이 심적으로 고요한 시기에 번뜩였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미국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작업 방법을 알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 아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생각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인데, 그마저도 창의적 과정의 짧고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주 많은 학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한 까닭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지구상의 생명이나 우리 몸이 만들어져 지속되는 기적은 마인드나 사고 활동의 결과가 아니다. 마인드보다 훨씬 더 큰 지능이 (혹은, 지혜가) 작동하는 게 분명하다. 크기가 1천 분의 1 인치밖에 안 되는 사람 세포 하나가 어떻게 6백 쪽짜리 책 1천 권에 해당하는 DNA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일하는 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 또 우리네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지 더 깨닫게 된다. 마인드가 이 내면의 지혜와 다시 연결될 때, 그건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러면 그 자체보다 더 큰 뭔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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