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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일러스트레이션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하중으로, 신의 심판의 무게로 느꼈다. 그 압박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그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 느낌은 자꾸만 나타나는 환영들 때문에 더욱 굳어졌다. 그 환영들이 어찌나 생생하고 진짜 같은지, 정신의 눈으로 본 것인지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인지 그 자신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거개가 그리스도의 환영이었다. 

  그러나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니라 심판의 그리스도였다. 가르치는 그리스도나 수난 겪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최후 심판일의 그리스도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죽음 문턱에서 보는 그리스도, 지옥 불구덩이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 분노와 질책과 복수심 곁들인 증오의 ‘견디기 힘든 표정’을 한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의 형상

 

  그분은 가끔 주홍빛 망토를 두르고 무장한 사람 모습으로 보였다. 어떤 때는 환영이 창문 높이 공중에 떠서 죄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교회 문을 지키고 서 있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보고 만질 수 있는 무엇처럼 그리스도가 성체에서 환한 빛으로 발산되는 듯했는데, 그때 아픈 수렝이 얼마나 강한 혐오를 느꼈는지 한 번은 종교 행렬을 지켜보는 사다리에서 실제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들도 있었으니, 칼뱅이 전적으로 옳으며 그리스도가 성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도 했다. 이는 성실한 믿음이 감응에 의해 독실한 신자의 마음에 일으키는 강한 의심 같은 것. 딜레마의 두 뿔 사이에 다른 길은 전혀 없었다. 성병이 그리스도 몸의 일부임을 직접 경험으로 알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저주했음도 직접 경험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단자들의 교리가 옳고 성병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에 못잖게 확실한 저주를 받았다.) 

 

  그에게 나타나는 환영은 그리스도만이 아니었다. 간혹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 혐오와 분노가 담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쳐들어 복수의 벼락불을 내쏟을 때면 그의 온 존재가, 마음과 몸이 다 고통을 느끼곤 했다. 간혹 다른 성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도 저마다 ‘견디기 힘든 표정’을 짓고 번갯불로 놀라게 했다. 수렝이 그들을 꿈에서도 보았으며, 그때마다 마치 벼락 맞은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잠을 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성인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밤에는 ‘성 에드워드, 잉글랜드 왕’의 손에서 나온 번갯불 때문에 오금을 못 폈다.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수난자 에드워드?[각주:1] 아니면 불행한 고백자 에드워드?[각주:2] 어쨌든, 성 에드워드가 「지독한 분노를 터뜨렸고, 나는 이것이 (성인들이 내던진 번갯불이)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감당하게 될 것임을 굳게 믿었다.」 

 

  하늘과 인간 세상에서 오랜 세월 도피하던 처음 시기, 적어도 좋은 나날에는 수렝에게 아직 주변과 접촉을 복원할 여력이 있었다. 「내 영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마구 늘어놓기 위해 난 상급자들과 다른 수사들을 늘 쫓아다녔다.」 하지만 헛수고. 

  (극심한 신체장애와 마찬가지로 정신 착란의 주된 공포 중 하나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 깊은 심연이 고착돼 있다고 느끼는 것. 예를 들어, 긴장성 분열증 환자의 상태는 정상인의 상태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다. 마비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신체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는 세상과 전혀 다르다. 사랑이 가교를 놓을 수는 있지만, 심연까지 제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곳에는 가교조차 없다.) 

 

  수렝이 상급자들과 동료들을 쫓아다니며 고백했지만 그들은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동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테레사 성녀가 하신 말씀의 참됨을 깨달았다. 즉, 네 말을 지나치게 조심스레 듣는 고해신부 수중에 떨어지는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은 없다.」 

  그들은 수렝이 하는 말을 아예 듣지도 않고 피했다. 그가 그들 소매를 움켜쥐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려고 몇 번이나 애를 썼다. 그런 일은 죄다 아주 단순하고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동료 수사들은 냉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이 사람은 미쳤어, 그것도 제 스스로 광기를 불러들였어. 그들이 그에게 단언했다. 우월감을 품고 튀려고 하니 신께서 당신을 벌하는 게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회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만의 엉뚱한 길을 따라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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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판단에 수렝이 불복했다. 

  「우리네 믿음에 기초하는 상식이 다른 삶의 개념에 맞서서 하도 강하게 굳어진 바람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저주받았다고 단언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그 생각을 광기의 표현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멜랑콜리건강 염려증 같은 어리석은 생각은 전혀 다른 부류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물병이나 추기경’이라거나 (진짜 추기경인 알퐁스 리슐리외가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부류다. 

 

  수렝이 주장하기를,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믿는 것은 미친 증세가 아니라고 했다. 제 말이 맞음을 입증하기 위해 헨리 수소,[각주:3] 성 이냐시오, 블로시우스,[각주:4] 테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경우를 인용했다. 그들도 다 한 번씩은 저주받았다고 믿었지만, 그러고도 모두 정신 멀쩡하고 성스러운 행동으로 두드러졌소! 그러나 약삭빠르고 타산적인 동료들은 그런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마지못해!) 듣는다 해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가 가뜩이나 크나큰 비참함을 더 키우면서 절망의 길로 더 멀리 내몰렸다. 1645년 5월 17일 보르도 인근 생마케르의 작은 예수회 숙사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전날 밤 내내 그는 자살 유혹과 씨름하고 아침 시간 대부분을 성체 앞에서 기도로 보냈다. 

 

  「점심시간 얼마 전에 내 방으로 올라갔다. 들어서면서 보니 창문이 열려 있기에 다가가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다가 [건물은 돌출된 바위 위에 서 있고 아래에 강이 흘렀다.] 내 안에서 광적인 본능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놀라 방 한가운데로 뒷걸음질 쳤다. 눈길은 여전히 창문에 꽂혀 있었다. 그 다음에 의식을 잃고 갑자기 꿈속처럼 무슨 짓을 하는지 인식도 못한 채 창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몸뚱이가 추락하면서 튀어나온 바위에 부닥친 뒤 강기슭에 떨어졌다. 대퇴부가 부러졌지만 장기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기적을 믿는 성향이 강한 수렝이 이 비극을 거의 코믹한 추신으로 맺는다

 

 「때마침 위그노 한 사람이 말에 앉아 강으로 오던 참이었고, 나는 바로 그의 발 옆에 떨어졌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중에 이 일을 두고 그가 나한테 농담을 퍼부었다. 강을 다 건넌 뒤 그가 다시 말안장에 올라타 초원으로 나섰는데, 완전한 평지에서 말이 갑자기 날뛰는 통에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이랬다. 

  수도사께서 공중을 날아 보려 시도하셨다고 놀린 것을 두고 신께서 나를 벌하시는군요. 그러니 훨씬 더 낮은 곳에서 떨어졌으면서도 똑같은 상처를 입은 게지요

  한데, 내가 몸을 던진 창문은 워낙 높기 때문에 한 달 뒤 참새를 잡으려고 거기서 뛰어내린 고양이는 죽고 말았다. 다들 알다시피 그 녀석들은 가볍고 탄력 있어서 흔히 사뿐히 뛰어내리곤 하는데도 말이다.」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댔고 몇 달 뒤 다시 걷게 됐다. 비록 영원히 절름발이가 되긴 했지만. 그러나 마음은 육신처럼 그리 쉬이 치유되지 않는다. 절망의 유혹이 몇 해 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높은 곳들에 자꾸 눈길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칼이나 로프를 볼 때면 목을 베거나 목매달고 싶다는 욕망이 불같이 일곤 했다. 

 

  파괴 충동은 안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바깥으로도 향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싶다는 욕망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크던 때가 더러 있었다. 건물이며 거기 거주자들, 지혜와 신앙의 보물들이 가득한 도서관, 채플, 성직복, 십자가상들 또 성체 자체도 다 잿더미로 변해야 해

  그런 악의는 악령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는 신을 욕되게 하는 자이니, 저주받은 영혼이요 악마의 화신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미움을 샀고 그 응답으로 하나님을 미워했다. 그에게 이런 부류의 사악함은 완전히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길 잃은 영혼임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저주받은 사람으로서 의무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악을 그의 일부는 거부했다. 자살과 방화 유혹이 상당히 컸지만 거기에 맞서 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위험을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자살 시도 이후 그에겐 수련수사가 붙어서 지켜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침대에 묶여 있게 됐다. 그 이후 삼년 동안 수렝은 우리네 조상들이 미치광이에게 체계적으로 적용했던 비인도적 행위를 겪어야 했다

 

  그런 종류의 일에서 쾌감을 맛보는 자들은 (그런 자들은 꽤 많다) 비정한 행위 자체를 즐기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꺼리는 구석이 없을 수 없다. 이런 개운치 못한 느낌을 좀 누그러뜨려 볼까 해서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자들이나 사디스트들은 저희 오락을 합리화하려고 별의별 이유를 다 갖다 붙인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잔혹하게 다루는 짓이 규율이요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행위로 합리화된다. 바로, “자식에게 매질을 아끼는 자는 제 자식을 미워함이라”[각주:5] 하는 말씀. 또 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는 행위는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지상명령의 추론적 결과라는 모양새를 갖춘다. 또 종교적 이단이나 정치적 반대 진영에 대한 잔혹 행위는 ‘참된 믿음’을 위한 타격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다른 인종에 대한 잔혹 행위는 그럴듯한 학문적 논거로 정당화된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미치광이를 대하던 시대가 있었고, 그런 전통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광인을 대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런 잔혹 행위가 과거에는 신학적 용어를 빌어 합리화됐을지언정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

 

  수렝을 포함해서 히스테리나 정신병 앓는 이들을 괴롭힌 자들은 두 가지 계기에서 그랬다

  첫째, 야만적인 상태를 즐겼기 때문. 방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그냥 좋은 것. 둘째, 그렇게 해야 병자를 도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가 잘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건 또 왜냐하면, 당시 가설로 그런 질환은 미치광이들이 자초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백하거나 은밀한 무슨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불경하고 타락한 자의 영혼에 악마가 들어가도록 허함으로써 징벌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광인들은 하나님의 적대자요 근본악의 일시적 화신으로 간주됐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학대받아 마땅했다. 학대하는 쪽에서는, 하나님 뜻이 천상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이뤄졌다는 보람된 느낌과 좋은 도덕심을 가지고 그리 했다.  

 

  미치광이를 두드려 패고 굶기고 사슬로 묶어 햇볕도 안 드는 쪽방에 가두었다. 미치광이를 성직자가 찾아왔다면, 다 병자 자신의 잘못이며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이라는 힐난이 빠지지 않았다. 

  일반 군중에게 미치광이는 버림받은 범죄자 같은 성격을 띠며 원숭이와 장터 야바위꾼 중간쯤 되는 무엇이었다. 주일과 공휴일마다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치광이 구경하러 갔다. 오늘날 동물원이나 서커스에 데리고 가듯이. 거기엔 오늘날 동물원처럼 ‘야수들에게 지분거리지 말 것’ 같은 금지도 없었다. 그 반대로, 미치광이는 하나님의 적대자로 간주된 만큼 그를 괴롭히는 행위는 그저 허용된 것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했다

 

  (16-17세기 작가들과 극작가들이 가장 즐겨 취한 주제들 중 하나는 정신 멀쩡한 사람을 미쳤다고 공표하고 갖가지 모욕과 조롱을 안기는 것. 예를 들어, 말볼리오가 그렇고, 혹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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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ng Edward the Martyr (962-978) - 잉글랜드 색슨 왕조의 왕. 통치 3년 만에 살해돼. 살해자가 ‘반종교적’인 반대파요 에드워드는 신실한 기독교도였기에 신성한 순교자로 선포, 즉 1001년 성인으로 시성됐다. [본문으로]
  2. King Edward the Confessor (1003-1066) - 1042년부터 잉글랜드 왕. ‘순교자 에드워드 왕’의 이복 아우인 에설레드 왕의 아들. 유년기를 가족과 떨어져 노르망디에서 보내면서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성장. 별명이 ‘고백자’였다. [본문으로]
  3. Henry Suso, 독일어 Heinrich Seuse - 게르마니아의 도미니크회 탁발수사, 저명한 영성 저술가, 신비주의자. 1366년 졸. [본문으로]
  4. Blosius (1506-1566) - 플랑드르의 탁발수사, 신비주의 저술가. 등 라틴어로 쓴 책들이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됐다. [본문으로]
  5. “He that spareth the rod, hateth his son." "초달(楚撻)을 차마 못하는 자, 그 자식을 미워함이니라.” (잠언 13: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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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삽화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해도 화합될 수 없는, 그의 스피릿 안에서 벌어졌다

 

  하나님이라 명명된 무한함은 본성이라 불리는 유한함을 포함해야 하며, 이 무한함은 공간의 모든 점들과 시간의 매 순간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결말을 회피하고 그 현실적인 결과를 모면하기 위해 구학파의 엄격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창의력을 소비하고 준엄한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설득과 강요를 다 허비했다. 그 사상가들은 선포하기를, 이는 타락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철저히 썩었다고 했다. 그 모럴리스트들은 말하기를, 그런 고로 모든 전선에서 본성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안에서는 억누르고 밖에서는 무시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라는 선물을 얻고자 희망함은 오로지 본성의 경험 소여(所與)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우리는 신의 선물도 받을 자격을 갖출 터이다. 우리가 원초적 사실에 다가든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자잘한 사실을 거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선종의 한 선사가 이르기를,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말라, 그저 고정 관념에 붙들려 있지만 않으면 되느니”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대략 같은 말을 하긴 하되,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얘기가 교리와 신앙 조문, 경건한 전통 등에 관한 것일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정 관념’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기껏해야 이정표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하다. 존재라는 원초적 사실에는 일상의 사실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말로써는, 혹은 말로써 고무된 판타지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 왕국을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네 상상이나 종작없는 추론으로는 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리성이라는 주장이나 갈망과 혐오, 보상의 판타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기성 전제들 따위가 가득한 영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시늉을 하는 한, 하나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기란 기대난망. 

  먼저 인간의 왕국이 와야 하고, 그런 뒤에야 하나님 왕국도 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죽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억누르고 내치는, 우리네 숙명적 성향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편견을 떨치고, 현실을 개조한다고 뿜어대는 언어의 덫을 제거하고, 현실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숨어드는 몽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보인 ‘거룩한 무심함’이요, 코사드[각주:1]의 ‘내맡김’이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두 매 순간 자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완전한 길의 징표인 ‘선호하기를 거부함’이다.

 

  교회 권위자들과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수렝은 영혼이 세상 존재의 거룩한 근간과 합일돼 변모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네 최초 조상의 죄 때문에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결과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겼다는 견해도 소중히 여겼다. 

  신과 우주에 대해 그런 관념을 견지하면서 수렝은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즉, 자살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인 요소를 죄다 몸과 마음에서 근절할 필요가 있다고. 한데,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노년에 인정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말해둬야 하겠다. 루덩으로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신에게 다가들리라 기대하면서 육욕을 죽이느라고 고행에 너무 몰두했다. 이 노력에 가상한 열의가 있었을지언정 거기엔 또 속박과 편협한 이성도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편협한 도그마에 빠졌고, 그 도그마는 온건할지 몰라도 적잖이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구별하며 신이 당신의 피조물과 반대편에 있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수렝은 본성에 대한 이기적 태도며 본성 자리에 설정된 몽상과 허황한 생각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이 특별한 행성에서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행으로 억누르고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본성을 증오하라. 그 본성이 신께서 예비하신 모든 굴욕을 감내하게 하라.」 본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선고는 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라는 것을 수렝은 가장 쓰라린 경험으로 알았다. 

 

  본성은 터무니없고 무분별하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는 노이로제가 종종 수반되는 지적 피로를 인간적 추잡함에 대한 증오와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혐오로 바꾸었다. 이 증오와 혐오가 특히 더 강한 것은, 그가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으며 사람이라 불리는 역겨운 존재들이 야기한 갖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벌써 며칠째 처리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이 입맛에 맞았으며, 그의 병든 본성에 어떤 안도감마저 안겼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상태가 좀 나아진 것은 ‘크리스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었군. 다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 상태는 죄책감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는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그를 행동케 하는 가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동할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니까. 

  그래서 ‘자기 죄를 물처럼 삼키고 빵처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의 의지와 행동 능력은 마비됐지만 감수성은 아직 살아 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전처럼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사람은 더 많이 벗겨질수록, 가격을 더 아프게 느끼는 법.’ 

 

  그는 ‘죽음의 공허’에 있다. 그러나 이 공허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니다. 그건 격심하고 완전한 공허요, ‘끔찍하고 참담한 나락이며, 거기에는 도움이나 구원 받을 기대가 없고’ 거기서는 조물주가 영혼을 괴롭히며 그 조물주에게 제물은 증오만 품을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홀로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종의 삶을 고난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본성은 궁지로 내몰려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없으며 그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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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렝은 더 이상 생각이나 연구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랑과 감사를 지니고 조물주에게 가슴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은 아직 살아서 ‘죄악과 꺼림칙한 일에 빠졌다.’ 뭔가 무관한 작업을 하면서 옆으로 빠지려는 번다하고 경망한 갈망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그건 자만심과 자기본위와 공명심 못지않은 죄이니까. 

  내면에서 노이로제와 엄격주의에 시달린 그가 외면에서 고행으로 본성을 더 빨리 파괴하기를 꿈꾼다. 이전처럼 안도감을 주는 작업이 아직 몇몇 있지만 그 작은 기쁨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공허를 내향적 공허와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도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본성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신의 자비에 노출될 테니까. 의사들은 고기를 더 많이 먹으라 하지만 그 권고를 따를 수 없다. 신께서 이 질병을 정화의 수단으로 주셨다. 너무 일찍 좋아지려고 애쓴다면 그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터

 

  그렇게 건강을 거부하고 비즈니스와 휴식도 거부했다. 그러나 재능과 학식을 눈부시게 발휘한 활동 분야가 그래도 남아 있었다. 강론, 신학 저술, 설교집, 경건한 장시들. 거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 왔고, 그것들을 여전히 일면 뿌듯하게 여긴다. 

  길고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그 동안 써온 것을 모조리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몇 권 책의 원고와 다른 많은 글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이제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됐다.」 그는 이제 「내 본성이 거부하는 험로를 걸으라고 하는 그분의 작업을 밀고나가는 숙련공」 같이 됐다

 

  몇 달 지나니 그 길이 어찌나 힘든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39년부터 1657년까지 그 누구한테도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병리적 문맹이라는 괴이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었다. 말하기조차 힘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홀로 유폐 상태에 있고 바깥세계와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 스스로 하나님한테서 도피하기로 내린 결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시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자신이 이미 현생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확신에 (여러 해 동안 지탱돼 온 확신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 그 다음엔 지상의 지옥에서 한층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고해사제와 수도회 상급자들이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생명이 있는 한 확고부동한 저주란 있을 수 없다오. 이 점을 한 신학자는 장 조셉에게 삼단논법을 동원해 입증하고, 또 다른 이는 2절판 묵직한 서적을 들고 진료소로 찾아와서 교회 박사들의 권위를 들먹이며 입증했다. 

 

  하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수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았다. 한때 자기가 물리쳤던 악마들이 영원한 화염 속에 그의 자리를 환호하며 준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다른 수도사들도 저희 내키는 대로 다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들과 고통 받는 이의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모든 사건,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절망을 굳히기만 했다. 벽난로 곁에 앉았다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회에 들어섰다면, 그 순간 신의 심판에 대한 어구나 사악한 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늘 들리고 울렸는데,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설교를 들었다면, 회중에 길 잃은 영혼이 있다고 설교자가 단언하는 것을 꼭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의 영혼이었다. 

 

자만심의 악마 레비아탄

 

  언젠가 그가 죽어가는 형제의 침상 곁에서 기도할 때, 갑자기 자신이 그랑디에처럼 마법사가 되어 악마들에게 무고한 사람 육신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힘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문을 걸고, 자만심의 악마인 레비아탄에게 이 육신으로 들어가라 명령하고, 정욕의 악마인 이사카론못된 장난의 스피릿인 발람신성 모독의 왕인 베게모트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게, 영겁의 목전에서 마지막 중대한 행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덤벼들라 권하고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에 영혼이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수렝이 실제로 유황 냄새를 맡고 울부짖음과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한데 이게 뭐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혹은 자발적이었나?) 그가 악마들을 계속 부르면서 악마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돌연 침대에서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했다. 한데 그건 이전처럼 하나님 뜻에 복종이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며 거룩한 자비와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는 둥 공격적인 의심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횡설수설이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수렝이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내 느낌이 옳았어, 난 마법사가 된 거야!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이 외적 증거에 어떤 낯설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고무된 내적인 확신이 추가됐다.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엄격함과 (또 감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지가 마비되고 허탈 상태가 갈마들며 근육이 경련돼 침대에 붙박여 있는 오랜 시간에 그는 ‘이와 비교할 통증은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신의 분노가 거세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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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n Pierre de Caussade (1675-1751) - 프랑스의 예수회 성직자, 종교 저술가. <신의 섭리에 내맡김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그는 현재 순간은 신께서 주신 성찬이요 그것에 내맡김과 그것을 필요로 함은 신성한 상태라고 믿었다. 얼핏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듯 보이기에 그의 책은 1861년까지 출간 금지. 저자 본래 뜻에 더 합당한 버전은 1966년도에야 출간됐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서 어떤 작가들은 대승불교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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