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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27 Point Counter Point (1)
  2. 2019.05.15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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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 

 

연애 대위법 

 

 

Aldous Huxley

POINT COUNTER POINT

  (First published in 1928)

 

 

 

 

참고: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대위법 (counterpoint) - 서양 음악의 기본 원리로독립성이 강한 복수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기법 성부(聲部) 명료하게 식별될  있는 독립적인 선율 지니며 여러 성부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해 조화를 이룬다.

 

 

 

CHAPTER 1

 

 

늦지 않게 올 거지요?” 마저리 칼링의 목소리에 불안이 감돌았다. 애원조가 배어 있었다.

, 늦지 않을 거요.” 월터가 대꾸하면서도 늦을 게 분명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 목소리는 그를 짜증 나게 했다. 그건 모음을 좀 길게 빼면서 느긋한데다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불행에 처해서도 말이다.

 

자정 넘기지 않게 하세요.” 그녀는 자기를 동행하지 않고는 그가 밤에 절대 나다니지 않던 시절을 입에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녀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 한 시쯤으로 해요. 그런 파티가 어떻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런 파티가 어떤 것인지 몰랐는데, 월터 비들레이크의 정식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파티에 늘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월터 비들레이크와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고,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강하며 사디스트 기질도 다소 있는 남편 칼링은 보복 차원에서 이혼을 거부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두 해가 됐다. 겨우 이태가 지났을 뿐인데, 그의 사랑은 이미 식고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됐다. 이제 죄업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불편을 해소할 길이 사라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그녀가 애절하게 덧붙였다. 같은 말을 자꾸 해봤자 그의 짜증만 키우고 그의 사랑이 한층 더 식을 뿐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를 향한 사랑이 아주 강하고 질투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만약 그녀가 원칙을 좀 줄이고 자기감정을 시원하게 드러냈더라면, 그녀에게, 또 어쩌면 월터한테도,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하면서 아주 엄격한 자제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추태 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원칙을 힘겹게 깨고 나온 것이 기껏해야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월터라는 말이었다. 월터를 움직이기에는 너무 약하고 미미한 이 분출은 짜증만 나게 할 거야. 그걸 알면서도 혀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 (, 그렇게 됐잖아. 그의 말투가 조금 더 거칠어졌어). “하지만 장담은 못 해. 기다리지 말아요.” 왜냐면 열두 시 반까지는 확실히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루시 탄타마운트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그가 흰 타이를 마지막으로 만지작거렸다. 거울 속에서 그녀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게다가 많이 여위어서 머리 위에 걸린 전등 빛을 받아 광대뼈 아래 움푹 팬 부위에 그림자마저 드리었다. 눈 그늘도 가득했다. 한창때에도 다소 길다 싶은 코가 여윈 얼굴에서 더 두드러졌다. 그녀는 볼품없고 지치고 병색 완연해 보였다. 육 개월 뒤면 몸을 풀겠지.

 

단세포였다가 세포 무리가 되고 작은 조직 덩어리가 되며 벌레 같고 아가미 달린 잠재적 물고기 같은 것이 그녀 자궁 안에서 꿈틀거리며 사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성인이 되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육신 안에서 하나의 젤리 뭉치였던 것이, 신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머리 조아리겠지. 물고기 같았던 것이, 선과 악을 만들면서 그 논쟁터가 되겠지. 그녀 안에서 기생하며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것이,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시를 읽겠지. 그 뭔가가 사람이 되고, 작은 덩어리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이 될 거야. 놀라운 탄생 과정이 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마저리는 구토증에 시달리고 나른하기만 했다. 신비라는 것이 그녀에게는 피로와 추레함, 앞일에 대한 끝없는 걱정, 육체적 고생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 따위를 의미할 뿐이었다.

 

임신 증상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기뻤다. 아니, 출산이 제 몸과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기뻐하려고 애썼다. 아기가 태어나면 월터가 더 다정하게 대해 주리라 믿었다. (그는 그때 이미 그녀한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것이든 그녀를 향한 사랑에 부족해 보이는 요소를 채워줄 감정이 새로이 생겨날 거야. 그녀는 고통을 겁냈고, 피할 수 없는 곤경과 수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월터의 애정을 되돌리고 굳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과 곤경도 참아 내리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웠다. 그리고 처음엔 그녀의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아기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주 상냥해졌다. 두세 주간 그녀는 행복했고, 통증과 불쾌한 느낌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모든 게 바뀌었으니, 월터가 그 여인을 만난 것이다. 루시를 쫓아다니는 중에도 그는 마저리의 상태가 염려스럽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그런 염려 이면에는 불만이 서려 있고, 의무감 때문에 부드러운 눈길을 건네는 것이며, 임부에게 마음 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아기를 미워한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기를 미워하니, 그녀도 아기를 미워하게 됐다. 더 이상 행복감으로 포장되지 못한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고 그녀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통과 불편함, 그것이 그녀 앞날에 드리운 전부였다. 그리고 당장엔 추해진 모습과 욕지기와 피로만 있을 뿐.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어찌 사랑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날 사랑해요, 월터?” 불쑥 그녀가 물었다.

월터가 거울 속 넥타이에서 갈색 눈을 잠시 돌려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우울한 잿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좀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 입술을 오므렸다가 입맞춤하듯이 소리를 내며 다시 뗐다. 그러나 마저리는 미소로 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슬프고 불안한 기색이 여전했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나 싶더니, 어느새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오늘 저녁엔 나와 함께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간청했다. 그건 그의 사랑에 절대 호소하지 않고 그가 하고픈 대로 하도록 자유롭게 놓아두겠다는 거창한 결심에 어긋나는 것.

그 눈물 글썽이는 모습과 그 떨리고 질책하는 목소리에 월터가 양심의 가책이자 반발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노여움과 연민, 수치심. 그에게 용기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점을 당신은 정말 모른단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믿었던 것, 그러니까 우리 사랑 같은 건 예전에 결코 없었고, 내가 당신을 실제로 사랑한 적도 없었어. 그냥 친구이자 동료로 지냅시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아껴. 하지만 이렇게 사랑으로 나를 휘감지는 말아요, 제발, 나한테 사랑을 강요하지 마. 이쪽은 안 그런데 저쪽에서 사랑한다고 달려드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당신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 그건 상대에 대한 유린이고 무도한 행위인지를

 

그러나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닫힌 눈꺼풀 밑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괴로움을 안긴 당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증오했다. ‘하지만 내가 왜 저 눈물에 협박당해야 하지?’ 그렇게 묻고 물으면서 그녀마저 증오했다. 눈물방울이 기다란 코를 타고 흘렀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권리는 없어, 이렇게 억지 부리면 안 돼. 왜 이성적으로 처신하지 못하는 걸까?’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난 그녀의 사랑을 원치 않아, 원치 않아.’ 속에서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그를 사랑할 게 아니었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협박이야, 협박이라고. 이렇게 들이대는 사랑에 내가 왜 협박당해야 하는 거지? 나 역시 한때 사랑했다는 것을 가지고 이러는 건가! 아니, 내가 그녀를 진정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마저리가 손수건을 꺼내 두 눈을 훔쳤다.

그는 자신의 역겨운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 수치심의 원인은 그녀였다. 그건 그녀 탓이었다. 남편을 떠나지 말아야 했어. 그러고도 둘이 원할 때면 정사를 나눌 수 있었을 거야. 오후에 그의 원룸 맨션에서. 그건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떠나라고 다그친 건 바로 나였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센스 있게 거부했어야지. 내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어야 했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요청에 따랐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회적으로 불편한 위치마저 받아들였다. 그것 역시 또 다른 협박이야. 그렇게 희생했다고 이제 그를 을러대는 것. 그 희생으로 그가 그나마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호소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품위와 명예가 있다면, 내 체면과 명예를 이용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아기가 있었다.

정녕 아기를 지울 수는 없었단 말인가?’

그는 아기를 미워했다. 아기 때문에 그 엄마를 더 책임져야 하고 그녀에게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이 커졌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신한 뒤 볼품없게 되고 늙기까지 했다. 여자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아니야! 월터가 눈을 감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저급한 생각을 억누르고 물리쳐야 해.

내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자문했다.

 

가지 말아요.” 그녀가 되풀이하는 말이 들렸다. 그 정제되고 길게 끌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얼마나 신경을 건드렸던가! “부탁이야, 가지 말아요, 월터!”

그 목소리에 흐느낌이 있었다. 이건 또 다른 협박이야. , 그는 어쩌다 이렇게 저급해질 수 있었을까? 어쨌든,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수치심이 줄어들기는커녕 한층 더 커졌다. 그 수치심 때문에 그녀가 더 싫어지게 됐다. 그녀가 느끼게 만든 그 병적인 수치심과 자기 혐오감이 그에게 또 다른 반감을 형성한 것. 분개가 수치심을 일으키고, 수치심이 이제 분개를 더 키웠다.

 

 

, 그녀는 왜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을까?’ 그는 그걸 아주 맹렬하게 갈망하면서, 더 가혹하게 억압당한다고 분개했다. (그걸 무자비하게 말로 옮길 용기가 부족했기에, 그녀한테 미안하고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꼈으며 노골적으로 대놓고 잔인하게 굴 수 없었다. 그가 가혹하게 대한 것은 오로지 의지박약 탓이었다).

그녀는 왜 나를 마음 편히 내버려 두지 못할까?’ 만약 평온하게 놓아두기만 한다면,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며, 그녀도 훨씬 더 행복할 텐데. 훨씬 더 행복할 터이며, 그녀한테 훨씬 더 이로울 텐데그러다가 퍼뜩 자신의 위선을 간파했다. ‘그래도, 빌어먹을, 도대체 왜 내 하고픈 대로 하게끔 놔두지 않는 거야?’

 

그는 무엇을 원했던가? 바로 루시 탄타마운트. 그것도 이성에 거슬러서, 자신의 모든 이상과 원칙에 거슬러서, 걷잡을 수 없이, 본연의 소망과 달리,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도 거슬러서 그녀를 원했다. 그는 루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증오했다. 고상한 결말은 수치스러운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다. 한데 만약 결말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그때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희생했으며 이제 불행에 빠진 마저리를 그가 괴롭히고 있는 건 다 루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이 이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나랑 같이 있어요그녀가 한 번 더 간청했다.

그 간청을 받아들여 파티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이 더 강했다. 그가 절반 거짓으로 대꾸했다. 그건 솔직한 거짓말보다 더 나빴는데, 왜냐면 그런 거짓말에는 위선적으로 정당화하는 진실 요소가 있으니까. 그가 그녀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제스처 자체가 거짓이었다.

어린애한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설득하는 사람의 구슬리는 어조로 그가 반박했다.

 

하지만, 여보, 난 거기에 꼭 가야 해요.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오신단 말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비들레이크 시니어는 탄타마운트 가족 파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눌 얘기가 있어. 업무에 관해서.” 그가 업무라는 단어로 자신과 마저리 사이에 남성적 관심사라는 일종의 연막을 피우면서 막연하면서도 좀 거들먹대며 덧붙였다. 그러나 거짓말은 연막 사이로 투명하기 보이기 마련임을 그가 떠올렸다.

 

다른 때 만나면 안 되나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여러 변명이 하나의 변명보다 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잊고 덧붙였다. “게다가 레이디 에드워드가 나를 위해서 특별히 미국인 편집장을 초대했거든. 그 사람이 도움 될지 몰라요. 그들이 원고료를 많이 준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에드워드 부인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초대하겠다고 말했는데, 떠났을지 걱정했었다. “아주 엄청나게 많지.” 그가 허튼소리로 스크린을 두툼하게 만들면서 말을 이었다. “작가가 고료를 과다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거기밖에 없소.” 그가 웃음을 터뜨리려 했다. “그리고 난 천 단어에 2기니밖에 못 받는 사업을 만회하려면 사실 특별한 수당이 좀 필요하거든.” 그러면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마저리가 얼굴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애원했다. “마저리, 울지 말아요, 제발.” 그가 죄책감과 불행을 느꼈다. 그러나 오오! 그녀는 왜 그를 평온하게 놔두지 못한단 말인가?

난 우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가 입술을 댄 볼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마저리,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난 안 가겠어.”

하지만 그냥 가세요.” 그녀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바라지 않는군. 집에 있겠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마저리가 그를 바라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부친과 그 미국인을 보는 게 좋겠어요.” 그가 지어낸 핑계가 그녀 입에서 나오자 아주 공허하고 정말 같지 않게 들렸다. 그가 혐오감에 움찔했다.

그들은 기다릴 수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실렸다. 그런 거짓 핑계를 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그는 조잡하고 가혹한 진실을 대놓고 밝힐 수 없었나? 결국 그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떠올리게 한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그는 자기가 들이댄 핑계가 그냥 잊히고 입에 올린 적이 없던 것처럼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니, 아니요, 가세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미안해요.”

 

이제 그가 그녀에게 반대하여 나가지 않고 집에 있겠노라고 고집부렸다. 집에 머물러야 할 위험이 없어진 만큼 고집부릴 여유가 생겼다. 마저리로서는 그가 외출해야 할 게 분명한 만큼,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값싸게, 아예 공짜로 품위 지켜 가며 자신을 희생하는 듯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얼마나 역겨운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연기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집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양 외출하는 데 동의했다.

 

마저리가 그의 목에 스카프를 둘러 주고 실크해트와 장갑을 내주고 명랑한 빛을 띠려고 애쓰면서 가볍게 작별 키스를 했다. 그녀에게는 자존심과 애정사에서 나름의 명예 규범이 있었다. 불행에도 불구하고, 질투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 그는 자유로워야 하며 그의 삶에 자신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 게다가 불개입이 최상의 방침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최상의 방침이기를 바랐다.

(계속) 

 

관련 포스트 : 

루덩의 악마들 8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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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8 “정식으로 강요당한다면 악마는 진실을 말하게 돼 있다.” 이 대전제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입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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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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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2) 

 

 

악마들, 올리버 리드, 켄 러셀,

 

 

3

 

 

  대학 졸업하던 해부터 네 해에 걸쳐 시집을 네 권 냈다. 그 배경에 깔린 비탄이며 신랄함, 냉소주의,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역설적 품위는 나중에 그가 몰입하게 되는 신비주의며 영적 삶에 대한 전조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청소년기에 겪은 세 가지 사건의 정신적 외상은 (모친이 암으로 사망, 자신의 실명 상태, 작은형의 자살 같은 육체적 고통에 노출된 경험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종종 인간 정신과 육신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단편집 <림보>도 발표했지만,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1921년 첫 번째 장편 <크롬 옐로우>. 이건 바로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저택과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눈부신 대화와 기지 넘치는 세태 비평과 냉소주의가 결합된 문체로 인해 그는 10년 어간에 가장 인기 있는 문학 활동가 축에 든다는 평판을 얻었다. 

 

 20년대는 그에게 가장 생산적인 기간일 뿐 아니라 평생 창작과 사상의 정초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력 때문에 1차 대전 전선에 나가지 못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전쟁이 야기한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위기의 주된 정서는 일정하게 흐르던 시간이 단절된 느낌,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확고하고 영원한 듯 보이던 가치며 토대가 붕괴된 느낌. 전쟁은 경제와 정치, 학문, 문화 등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시대와 지나간 시대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게 설정되고, 인간과 문명에 대해 지난 시대에 다듬어진 관념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음을 많은 이들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결과, 다른 세계의 장면을 만들고, 철학이며 미학의 측면에서 새로운 현실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나온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 문화에서 1920년대는 실험 시대가 된 것. 

  M. 프루스트J. 조이스의 소설, T. S. 엘리엇과 마야코프스키의 시, 피카소와 K. 말레비치의 그림, 이젠슈테인의 필름 등이 저마다 가장 중요한 존재 특성이라 본 것을 새로운 예술 언어로 이야기했다. 

 

  당대 많은 영국인들처럼 헉슬리에게 새로운 역사 시대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산업 발달과 물질적 번영,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과 연관됐다. 

 

  그렇다면 새 시대는 어떤 것이며, 새 시대의 가능성과 전망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의 작품들. 헉슬리는 세태 묘사와 풍자라는 전통에서 머물지 않고, 사회 근간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함께 내보였다. 

  그것은 그가 20년대 사상과 관념의 미학적 전투에서 상당히 빨리 제 자리를 찾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문필은 사회생활의 일부여야 하고, 예술가의 과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능한 한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는 어떤 정치적이나 미학적 운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가 평생 접한 동아리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었다. 예를 들어, 문인 친구들 중에는 앙리 바르뷔스가 세운 <클라르테 그룹>의 멤버들, T. 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같은 모더니즘의 기둥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니타 루스 등이 있고, 또 런던 인근 블룸스버리 지역에 살던 당대 지성인, 작가, 화가들의 엘리트 그룹에도 들었다. 여기서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역사가요 전기 작가인 스트레이치 리튼,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교류했다. 

 

  1928년 출간된 <연애 대위법>은 헉슬리의 가장 복잡한 소설들 중 하나. 전형적 관념 소설인 이 작품으로 헉슬리는 독일식 철학소설과는 또 다르며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지성 소설’이라는 장르의 개척자가 됐다. 

 

  2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 살면서 친구 같은 선배 D. H. 로렌스와 자주 만났다. 삶에 대한 로렌스의 관점을 아주 높이 샀고, <연애 대위법>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램피언의 모델이 로렌스였다. 1930년 로렌스가 죽자 그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 나중에 전기를 쓰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기계문명이 판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로렌스가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헉슬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비판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의 본능보다는 지성으로 접근했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19세기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맹신으로 퇴행한다거나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섣부른 낙관주의로 전락하지만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 주었다. 

  

4

 

    30년대 초 지중해 연안 툴롱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서 쓰고 1932년에 출간돼 헉슬리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굳혔으며 20세기 최고의 미래 소설이 된 <멋진 신세계>는 그의 다섯 번째 장편이요 첫 번째 디스토피아 소설. H. G. 웰스가 <현대 유토피아>, <사람들은 신들을 좋아해> 같은 유토피아 소설에서 과학적 낙관론을 희망차게 제시함에 대한 패러디… 

  당시 널리 인기 끄는 낙관적 유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헉슬리는 소름끼치는 미래상을 제시하려 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개인 청년의 원형은 마거릿 미드의 <사아의 성>서 힌트를 얻었다. 

 

  과학과 의학과 기술을 현대인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 발전에 의존하다 보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이고자 했다. 

  인공 수정으로 동일한 인간을 시험관에서 대량 생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림으로써 현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향하는 관리 사회, 통제국가의 무시무시한 비극적 종말을 예언했는데… 

  시험관 아기나 유전자 복제를 비롯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공학의 경이적인 성취를 우리가 목격할 때, 그의 예언이 결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연 예언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십년 전 타계한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요 문화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내놓은, 우리 시대 미디어 생태 환경에 관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 중 하나인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보게 된다.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 닐 포스트먼

 

  「우리는 1984에 주목해 왔다. 그 해가 닥쳤지만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생각 있는 미국인들은 나직이 흥얼대며 안도했다. 
  봐,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네! 테러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오웰의 악몽이 찾아들지는 않았어! 

  그러나 오웰의 어두운 예언과 더불어 또 다른 예언이, 똑같이 으스스한 전망이,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바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교양인들도 자칫 간과하기 쉬운데, 헉슬리와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은 같은 게 아니었다. 오웰은 우리가 외부 폭압에 억눌릴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헉슬리가 예견하기에는… 독재자 때문에 사람들이 자율과 성숙과 역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가 내다본 것처럼… 사람들은 외려 통제받기 좋아하고 테크놀로지를 떠받들며, 그 결과 사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오웰과 헉슬리의 예언을 포스트먼이 조목조목 비교하여 결론을 낸다.

 

  「오웰은 서적을 금지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서적을 금할 까닭이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왜? 왜냐하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테니. 

  오웰은 우리한테서 정보를 박탈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아예 무감각하게 허투루 대할 만큼 정보가 차고 넘칠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독재자가) 진실을 우리한테 숨길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무의미한 정보의 바다에 진실이 파묻힐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우리 문화가 선택의 자유를 빼앗을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 문화가 허접한 필름과 난잡한 파티, 관능적 유희 따위로 채워져 지질해질 것을 우려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지적하듯이,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과 합리주의자들은 늘 긴장하여 독재와 폭정에 맞서면서도... “인간에게 재미와 오락에 거의 죽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지 못했다.” 

  헉슬리가 또 말하길, 사람들이 <1984>에서는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통제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제공되는 즐거움에 지배된다. 
  간단히 말해… 오웰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탐닉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우려했다.」   

 

  닐 포스트먼은 티브이가 자잘한 즐거움인 연예오락을 주지만 교육이나 주요 이슈에 관해 의미 있는 토론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가 미국 사회의 미래라는 토론의 틀을 잡기 위해 오웰과 헉슬리의 소설을 동원한 까닭은... 현대 사회가 헉슬리의 끔찍한 예언대로 얼마나 충실하게 좇아가고 있는지에 사람들 눈길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티브이는 1906년 이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사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어.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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