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
연애 대위법
Aldous Huxley
POINT COUNTER POINT
(First published in 1928)
*대위법 (counterpoint) - 서양 음악의 기본 원리로, 독립성이 강한 복수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기법. 각 성부(聲部)가 명료하게 식별될 수 있는 독립적인 선율을 지니며 여러 성부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해 조화를 이룬다.
CHAPTER 1
“늦지 않게 올 거지요?” 마저리 칼링의 목소리에 불안이 감돌았다. 애원조가 배어 있었다.
“응, 늦지 않을 거요.” 월터가 대꾸하면서도 늦을 게 분명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 목소리는 그를 짜증 나게 했다. 그건 모음을 좀 길게 빼면서 느긋한데다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불행에 처해서도 말이다.
“자정 넘기지 않게 하세요.” 그녀는 자기를 동행하지 않고는 그가 밤에 절대 나다니지 않던 시절을 입에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녀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즉,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한 시쯤으로 해요. 그런 파티가 어떻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런 파티가 어떤 것인지 몰랐는데, 월터 비들레이크의 정식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파티에 늘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월터 비들레이크와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고,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강하며 사디스트 기질도 다소 있는 남편 칼링은 보복 차원에서 이혼을 거부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두 해가 됐다. 겨우 이태가 지났을 뿐인데, 그의 사랑은 이미 식고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됐다. 이제 죄업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불편을 해소할 길이 사라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그녀가 애절하게 덧붙였다. 같은 말을 자꾸 해봤자 그의 짜증만 키우고 그의 사랑이 한층 더 식을 뿐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를 향한 사랑이 아주 강하고 질투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만약 그녀가 원칙을 좀 줄이고 자기감정을 시원하게 드러냈더라면, 그녀에게, 또 어쩌면 월터한테도,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하면서 아주 엄격한 자제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추태 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원칙을 힘겹게 깨고 나온 것이 기껏해야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월터”라는 말이었다. 월터를 움직이기에는 너무 약하고 미미한 이 분출은 짜증만 나게 할 거야. 그걸 알면서도 혀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 (봐, 그렇게 됐잖아. 그의 말투가 조금 더 거칠어졌어). “하지만 장담은 못 해. 기다리지 말아요.” 왜냐면 열두 시 반까지는 확실히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루시 탄타마운트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그가 흰 타이를 마지막으로 만지작거렸다. 거울 속에서 그녀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게다가 많이 여위어서 머리 위에 걸린 전등 빛을 받아 광대뼈 아래 움푹 팬 부위에 그림자마저 드리었다. 눈 그늘도 가득했다. 한창때에도 다소 길다 싶은 코가 여윈 얼굴에서 더 두드러졌다. 그녀는 볼품없고 지치고 병색 완연해 보였다. 육 개월 뒤면 몸을 풀겠지.
단세포였다가 세포 무리가 되고 작은 조직 덩어리가 되며 벌레 같고 아가미 달린 잠재적 물고기 같은 것이 그녀 자궁 안에서 꿈틀거리며 사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성인이 되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육신 안에서 하나의 젤리 뭉치였던 것이, 신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머리 조아리겠지. 물고기 같았던 것이, 선과 악을 만들면서 그 논쟁터가 되겠지. 그녀 안에서 기생하며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것이,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시를 읽겠지. 그 뭔가가 사람이 되고, 작은 덩어리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이 될 거야. 놀라운 탄생 과정이 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마저리는 구토증에 시달리고 나른하기만 했다. 신비라는 것이 그녀에게는 피로와 추레함, 앞일에 대한 끝없는 걱정, 육체적 고생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 따위를 의미할 뿐이었다.
임신 증상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기뻤다. 아니, 출산이 제 몸과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기뻐하려고 애썼다. 아기가 태어나면 월터가 더 다정하게 대해 주리라 믿었다. (그는 그때 이미 그녀한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것이든 그녀를 향한 사랑에 부족해 보이는 요소를 채워줄 감정이 새로이 생겨날 거야. 그녀는 고통을 겁냈고, 피할 수 없는 곤경과 수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월터의 애정을 되돌리고 굳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과 곤경도 참아 내리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웠다. 그리고 처음엔 그녀의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아기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주 상냥해졌다. 두세 주간 그녀는 행복했고, 통증과 불쾌한 느낌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모든 게 바뀌었으니, 월터가 그 여인을 만난 것이다. 루시를 쫓아다니는 중에도 그는 마저리의 상태가 염려스럽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그런 염려 이면에는 불만이 서려 있고, 의무감 때문에 부드러운 눈길을 건네는 것이며, 임부에게 마음 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아기를 미워한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기를 미워하니, 그녀도 아기를 미워하게 됐다. 더 이상 행복감으로 포장되지 못한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고 그녀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통과 불편함, 그것이 그녀 앞날에 드리운 전부였다. 그리고 당장엔 추해진 모습과 욕지기와 피로만 있을 뿐.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어찌 사랑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날 사랑해요, 월터?” 불쑥 그녀가 물었다.
월터가 거울 속 넥타이에서 갈색 눈을 잠시 돌려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우울한 잿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좀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 입술을 오므렸다가 입맞춤하듯이 ‘쩍’ 소리를 내며 다시 뗐다. 그러나 마저리는 미소로 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슬프고 불안한 기색이 여전했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나 싶더니, 어느새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오늘 저녁엔 나와 함께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간청했다. 그건 그의 사랑에 절대 호소하지 않고 그가 하고픈 대로 하도록 자유롭게 놓아두겠다는 거창한 결심에 어긋나는 것.
그 눈물 글썽이는 모습과 그 떨리고 질책하는 목소리에 월터가 양심의 가책이자 반발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노여움과 연민, 수치심. 그에게 용기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점을 당신은 정말 모른단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믿었던 것, 그러니까 우리 사랑 같은 건 예전에 결코 없었고, 내가 당신을 실제로 사랑한 적도 없었어. 그냥 친구이자 동료로 지냅시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아껴. 하지만 이렇게 사랑으로 나를 휘감지는 말아요, 제발, 나한테 사랑을 강요하지 마. 이쪽은 안 그런데 저쪽에서 사랑한다고 달려드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당신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 그건 상대에 대한 유린이고 무도한 행위인지를 …”
그러나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닫힌 눈꺼풀 밑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괴로움을 안긴 당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증오했다. ‘하지만 내가 왜 저 눈물에 협박당해야 하지?’ 그렇게 묻고 물으면서 그녀마저 증오했다. 눈물방울이 기다란 코를 타고 흘렀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권리는 없어, 이렇게 억지 부리면 안 돼. 왜 이성적으로 처신하지 못하는 걸까?’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난 그녀의 사랑을 원치 않아, 원치 않아.’ 속에서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그를 사랑할 게 아니었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협박이야, 협박이라고. 이렇게 들이대는 사랑에 내가 왜 협박당해야 하는 거지? 나 역시 한때 사랑했다는 것을 가지고 이러는 건가! 아니, 내가 그녀를 진정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마저리가 손수건을 꺼내 두 눈을 훔쳤다.
그는 자신의 역겨운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 수치심의 원인은 그녀였다. 그건 그녀 탓이었다. 남편을 떠나지 말아야 했어. 그러고도 둘이 원할 때면 정사를 나눌 수 있었을 거야. 오후에 그의 원룸 맨션에서. 그건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떠나라고 다그친 건 바로 나였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센스 있게 거부했어야지. 내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어야 했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요청에 따랐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회적으로 불편한 위치마저 받아들였다. 그것 역시 또 다른 협박이야. 그렇게 희생했다고 이제 그를 을러대는 것. 그 희생으로 그가 그나마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호소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품위와 명예가 있다면, 내 체면과 명예를 이용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아기가 있었다.
‘정녕 아기를 지울 수는 없었단 말인가?’
그는 아기를 미워했다. 아기 때문에 그 엄마를 더 책임져야 하고 그녀에게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이 커졌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신한 뒤 볼품없게 되고 늙기까지 했다. 여자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아니야! 월터가 눈을 감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저급한 생각을 억누르고 물리쳐야 해.
‘내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자문했다.
“가지 말아요.” 그녀가 되풀이하는 말이 들렸다. 그 정제되고 길게 끌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얼마나 신경을 건드렸던가! “부탁이야, 가지 말아요, 월터!”
그 목소리에 흐느낌이 있었다. 이건 또 다른 협박이야. 아, 그는 어쩌다 이렇게 저급해질 수 있었을까? 어쨌든,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수치심이 줄어들기는커녕 한층 더 커졌다. 그 수치심 때문에 그녀가 더 싫어지게 됐다. 그녀가 느끼게 만든 그 병적인 수치심과 자기 혐오감이 그에게 또 다른 반감을 형성한 것. 분개가 수치심을 일으키고, 수치심이 이제 분개를 더 키웠다.
‘아, 그녀는 왜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을까?’ 그는 그걸 아주 맹렬하게 갈망하면서, 더 가혹하게 억압당한다고 분개했다. (그걸 무자비하게 말로 옮길 용기가 부족했기에, 그녀한테 미안하고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꼈으며 노골적으로 대놓고 잔인하게 굴 수 없었다. 그가 가혹하게 대한 것은 오로지 의지박약 탓이었다).
‘그녀는 왜 나를 마음 편히 내버려 두지 못할까?’ 만약 평온하게 놓아두기만 한다면,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며, 그녀도 훨씬 더 행복할 텐데. 훨씬 더 행복할 터이며, 그녀한테 훨씬 더 이로울 텐데… 그러다가 퍼뜩 자신의 위선을 간파했다. ‘그래도, 빌어먹을, 도대체 왜 내 하고픈 대로 하게끔 놔두지 않는 거야?’
그는 무엇을 원했던가? 바로 루시 탄타마운트. 그것도 이성에 거슬러서, 자신의 모든 이상과 원칙에 거슬러서, 걷잡을 수 없이, 본연의 소망과 달리,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도 거슬러서 그녀를 원했다. 그는 루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증오했다. 고상한 결말은 수치스러운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다. 한데 만약 결말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그때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희생했으며 이제 불행에 빠진 마저리를 그가 괴롭히고 있는 건 다 루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이 이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나랑 같이 있어요” 그녀가 한 번 더 간청했다.
그 간청을 받아들여 파티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이 더 강했다. 그가 절반 거짓으로 대꾸했다. 그건 솔직한 거짓말보다 더 나빴는데, 왜냐면 그런 거짓말에는 위선적으로 정당화하는 진실 요소가 있으니까. 그가 그녀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제스처 자체가 거짓이었다.
어린애한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설득하는 사람의 구슬리는 어조로 그가 반박했다.
“하지만, 여보, 난 거기에 꼭 가야 해요.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오신단 말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비들레이크 시니어는 탄타마운트 가족 파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눌 얘기가 있어. 업무에 관해서.” 그가 ‘업무’라는 단어로 자신과 마저리 사이에 남성적 관심사라는 일종의 연막을 피우면서 막연하면서도 좀 거들먹대며 덧붙였다. 그러나 거짓말은 연막 사이로 투명하기 보이기 마련임을 그가 떠올렸다.
“다른 때 만나면 안 되나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여러 변명이 하나의 변명보다 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잊고 덧붙였다. “게다가 레이디 에드워드가 나를 위해서 특별히 미국인 편집장을 초대했거든. 그 사람이 도움 될지 몰라요. 그들이 원고료를 많이 준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에드워드 부인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초대하겠다고 말했는데, 떠났을지 걱정했었다. “아주 엄청나게 많지.” 그가 허튼소리로 스크린을 두툼하게 만들면서 말을 이었다. “작가가 고료를 과다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거기밖에 없소.” 그가 웃음을 터뜨리려 했다. “그리고 난 천 단어에 2기니밖에 못 받는 사업을 만회하려면 사실 특별한 수당이 좀 필요하거든.” 그러면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마저리가 얼굴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애원했다. “마저리, 울지 말아요, 제발.” 그가 죄책감과 불행을 느꼈다. 그러나 오오! 그녀는 왜 그를 평온하게 놔두지 못한단 말인가?
“난 우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가 입술을 댄 볼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마저리,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난 안 가겠어.”
“하지만 그냥 가세요.” 그녀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바라지 않는군. 집에 있겠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마저리가 그를 바라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부친과 그 미국인을 보는 게 좋겠어요.” 그가 지어낸 핑계가 그녀 입에서 나오자 아주 공허하고 정말 같지 않게 들렸다. 그가 혐오감에 움찔했다.
“그들은 기다릴 수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실렸다. 그런 거짓 핑계를 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그는 조잡하고 가혹한 진실을 대놓고 밝힐 수 없었나? 결국 그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떠올리게 한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그는 자기가 들이댄 핑계가 그냥 잊히고 입에 올린 적이 없던 것처럼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니, 아니요, 가세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미안해요.”
이제 그가 그녀에게 반대하여 나가지 않고 집에 있겠노라고 고집부렸다. 집에 머물러야 할 위험이 없어진 만큼 고집부릴 여유가 생겼다. 마저리로서는 그가 외출해야 할 게 분명한 만큼,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값싸게, 아예 공짜로 품위 지켜 가며 자신을 희생하는 듯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얼마나 역겨운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연기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집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양 외출하는 데 동의했다.
마저리가 그의 목에 스카프를 둘러 주고 실크해트와 장갑을 내주고 명랑한 빛을 띠려고 애쓰면서 가볍게 작별 키스를 했다. 그녀에게는 자존심과 애정사에서 나름의 명예 규범이 있었다. 불행에도 불구하고, 질투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곧, 그는 자유로워야 하며 그의 삶에 자신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 게다가 불개입이 최상의 방침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최상의 방침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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