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영역. 번역자는 특정 분야에 정통한 언어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분야의 지식뿐 아니라 잘 다듬어진 번역 방법도 갖출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에서 발생하는 여러 번역 방법과 기술을 살펴보고 그 작동 방법을 알아본다.
외국어로 된 뭔가를 읽을 때마다, 먼저 구글 번역기를 돌리고픈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구글 번역기나 그 비슷한 도구들은 많이 발전했고 많은 번역을 꽤 잘 해낼 수 있다.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문 번역가는 문맥을 이용하며, 단어 대 단어 번역을 지양하지만, 온라인 번역 서비스는 아직 그 정도로 똑똑하지는 못하다. (예를 들어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본 사람은 누구나 실감하는 사실).
이를테면 법정과 같은 전문 무대에서, 번역자가 텍스트를 조용히 읽고 즉각 목표 언어로 번역해 소리 내어 말하도록 요청받을 때 스마트폰 앱처럼 행동할 수도 있겠다. 이건 즉시 번역(sight translation)이라 불리며, 번역과 해석을 하나의 예술로 결합한다. 번역가에겐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앱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대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즉시 번역의 어떤 기술과 방법이 번역된 텍스트의 내용과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아니까 말이다.
번역 방법과 절차를 자세히 살펴보자.
번역 방법 (Translation Methods)
흔히 이용하는 번역법 하나는 자유 번역. 이건 창의적 번역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어떤 수단으로든 하는 번역. 그렇다고 해서 부정확하며, 번역자가 원본 언어의 구문이나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대신, 재생된 텍스트가 원본의 의미를 정확히 옮기겠지만, 원본의 구조나 문법 등을 거울처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이와 유사한 방법은 관용적 번역이라 불리는데, 이는 목표 언어의 관용구나 구어체를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원본 텍스트의 메시지를 재생산하는 것. 이건 직역할 수 없으며 원본과 다르게 보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의미상으로 매우 유사한 부분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충실한 번역이라는 방법은 앞엣것들과 다른 시도. 즉, 원문의 구문과 문법 구조에 밀착해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
이와 유사하게, 의미상 번역(의역)은 충실한 번역과 밀접하지만, 원문과 비교할 때 목표 언어의 텍스트가 어떻게 보일지, 그 미적 충실도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인다. 예를 들어, 자유 번역이 창의적인 마케팅 텍스트에 완벽하게 어울릴 수 있다면, 충실한 번역은 아주 작은 뉘앙스조차 중요한 법률 텍스트에 더 적합할 수 있다. 두 언어가 같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관용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법률 텍스트는 언어에 상관없이 법률 텍스트답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져야 한다.
번역 기술 (Translation Techniques)
번역 기술은 전문 번역가가 어떤 텍스트를 옮기는 여러 방법. 그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은, 직역 (혹은, 축어역 = 축자역).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여럿 있다. 개중 많은 것은 번역자가 각 언어의 문화적 뿌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지에 좌우된다. 많은 기계 번역 엔진이 여전히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또한, 인간 번역자들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퇴물로 몰려나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 기술은 번역 방법과 다르다. 즉, 번역자는 전체 문서에 같은 방법을 사용하겠지만,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번역에 사용된 각 기술을 한정하는 세부 특성은 1958년 <A Methodology for Translation>에서 처음 기록됐다. 이건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직접 번역과 간접 번역의 하위 범부로 나뉜 8가지 번역 기술을 제시한다.
직접 번역 기술
원본 텍스트의 개념과 구조가 목표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을 때, 흔히 직접 번역 기술을 이용. 여기엔 세 가지가 있다.
1. 직역 = 축자역 (Literal translation)
이건 직설적인 단어 대 단어 번역. 이건 많은 언어 쌍에 적합하지 않은데, 문장 구조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건 많은 용도에도 적합하지 않은데, 번역본이 지나치게 축자적이거나 원본 텍스트의 섬세한 의미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 소개한 저술에서는, 구문과 의미, 문화 요소 등이 아주 흡사한 일부 언어만을 직역에 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
2. 번역 차입 어구 (Calque / loan translation)
이건 다른 언어에서 문구를 빌려 목표 언어에 그대로 옮기는 관행을 가리킨다. 원본 언어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될 때도 있다.
이런 차용 번역에서 아주 잘 알려진 어구가 여럿 나왔다. 그러나 이건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이 ‘새 단어들’이 과학이나 법률 같은 특수 분야에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일반적 용도에서 널리 알려진 사례:
독일어 Übermensch가 영어의 “superman”, Flammenwerfer가 영어의 'flamethrower'가 됐다.
프랑스어 marché aux puces가 영어의 “flea market”이 됐다.
영어의 "it goes without saying that ‥."은 프랑스어 il va sans dire que ‥를 직역해서 차입한 어구.
3. 차용 (Borrowing)
번역에서 차용은 번역 차입 어구(calque)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여기서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원본 언어에서 바로 목표 텍스트로 옮겨진다.
이런 경우가 각 언어마다 많은데, 특히 영어에서 그렇다. 그러나 베트남어 같은 언어에는 외래어와 차용어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우리 한국어에도 많은데, 근래 들어 이 비율이 급증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 외국어가 한국어에 들어와서 우리말처럼 쓰이는 차용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됐다 = 외래어).
영어에는이런 단어가 '영어의 차용어'이다.
Schadenfreude (독일어에서,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긴다는 뜻)
Café (프랑스어에서)
Hamburger (독일어에서)
Sugar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Borrowing)은 이런 이유에서 정확한 번역 기술로 꼽을 수 있다.
1) 목표 언어에 상응하는 단어/어휘가 없을 수 있으니까.
2) 원본 텍스트의 문화적 맥락을 강조하거나 유지할 수 있으니까.
간접 번역 기술
간접 번역 기술은 원본 텍스트의 개념이나 구조가 문체나 의미, 문법을 크게 바꾸지 않고는 목표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을 때만 사용한다.
간접 번역 기술은 5가지가 있다.
1. 전치법 (Transposition)
이건 언어의 여러 부분이 번역될 때 순서를 바꾸는 과정. (blue ball이 불어로는 boule bleue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품사의 이동. 언어마다 문법 구조가 다른 경우가 많다. ‘He likes swimming’를 독어로는 ‘Er schwimmt gern’로 번역한다. ‘그는 수영을 좋아해’.
도치법의 한 종류인 전치법은 의미 변화 없이 텍스트의 문법 구조를 바꾼다. 이건 문법 구조가 서로 다른 언어들에 종종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어와 불어나 독어나 스페인어 등.
텍스트를 잘 전치하기 위해서 번역자는 단어 범주 대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거나 문장 순서 변경이 텍스트 의미를 손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존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2. 변조 (Modulation)
변조는 같은 생각을 전달하는 데 원문 언어와 목표 언어에서 서로 다른 어구를 사용하는 것.
변조를 통해서 번역자는 목표 텍스트의 독자에게 어색함을 낳지 않고 뜻이 달라지지 않게 하면서 메시지의 관점에 변화를 주는 것.
‘It is easy to understand’와 ‘It is not complicated to understand’라는 표현이 변조의 좋은 예이다.
둘 다 같은 뜻을 전달하지만, ‘It is easy to understand’가 그냥 "용이함"을 전달하는 반면에, ‘It is not complicated to understand’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부정하고 있는, 이전에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런 식으로 메시지의 관점을 바꿀 때, 독자는 “그래, 이게 바로 우리말다운 거야” 하고 말하게 된다.
예: 프랑스어로 누군가가 ‘dernier étage’라 말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건물의 “last stage”. 영어 사용자는 “top floor”라고 말하는 문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독일어로 표지판 ‘Lebensgefahr’는 축자적으로 “Danger to life”.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이걸 이해할 수 있으나, “Danger of death”가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3. 재구성 (Reformation)
이건 속담이나 관용구, 광고 문구 번역에 흔히 쓰이는 번역 기술. 어떤 의미에서 변조/Modulation과 비슷하지만, 창의력이 더 필요하다.
(*우리 한국에서 외국 영화를 소개할 때 제목을 그냥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재구성이라는 번역 기술이 쉽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이탈리아어 “fuori come un balcone”의 축자적 의미는 “outside like a balcony”지만, 영어의 “you’re out of your tree” 혹은 “out of your mind”와 거의 같아서, crazy라는 뜻이다. 하지만, 재구성되지 않았다면 영어 독자한테는 절대 이해되지 못할 것.
또 다른 이탈리아어 문구 “come il cacio sui maccheroni”를 들 수 있다. 직역하면 “like sheep’s cheese on the macaroni 마카로니에 얹힌 양 치즈처럼”이라는 뜻. 이건 (‘그 일에 완벽한 아이템’을 뜻하는) “just what the doctor ordered 의사가 시킨 대로, 정확히 원하는 대로”라는 영어 문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직역은 영어 독자한테 아주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4. 개작, 번안 (Adaptation)
한 언어문화에 특수한 것을 다른 언어문화에 친숙하거나 적절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때 번안/개작이 발생한다. 이건 문화 환경의 이동이다.
원본 언어문화의 누군가하고만 관련된 어떤 문구들은 다른 문화의 누군가한테 관련되게끔 한층 더 충분히 번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어에는 크리켓이나 해군 용어에서 파생된 어구가 아주 많다. (관용구)
Let the cat out of the bag (navy) 숨긴 비밀을 드러내다.
Have a good innings (cricket에서) (고인에 대해) 성공적으로 장수하다. 천수를 누리다.
Show your true colors(navy)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다.
이런 표현은 목표 언어로 번역할 때 대개 번안할 필요가 있을 것.
5. 보정 (Compensation)
대체로 compensation이란 용어는 뭔가가 번역될 수 없을 때 사용되며, 이때 잃어버린 의미는 번역된 텍스트의 다른 어딘가에서 드러난다. 이걸 Peter Fawcett은 “다른 말로 번역될 수 없는 뭔가를 텍스트의 한 대목에서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흔히 인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예는 다른 언어들에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you’를 영어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
불어의 tu와 vous
에스파냐어의 tú와 usted
독어의 du와 sie
문장을 즉각 표현함으로써 혼란스럽거나 다루기 힘들거나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보정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번역 기술의 선택
대다수 번역자는 문서를 옮기면서 번역 기술을 자연스레 전환할 텐데, 이건 매우 중요한 능력. 번역자들이 조만간 기계로 대체되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번역이든, 원본과 목표 언어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이 실제 단어와 연관되는 법을 아는 언어 연구자를 필요로 한다.
"번역이란 두 언어 간의 이동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두 문화 간의 이동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적 전이는 최대의 축자역부터 자유로운 텍스트 번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번역에 존재하며, 원문의 언어문화에 뿌리가 있는 항목들을 목표 언어에 고유한 요소들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다. 번역자는 자신에게 고유한 특징을 얼마나 사용할지 선택하며, 그 결과 성공적인 번역은 번역자가 작업하는 각 언어의 문화적 특성을 얼마나 꿰뚫고 있는지에 좌우될 수 있다." - Louise Haywood
언뜻 눈에 들어온 기사 제목. 월터가 잡념을 떨칠 요량으로 신문을 한 부 샀다. 자유 노동당 내각이 제출한 광산 국유화 법안이 첫 번째 독회에서 통상적인 다수표로 통과됐다. 월터가 뿌듯한 마음으로 그 기사를 읽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석간신문 경영자의 견해는 달랐다. 주요 기사는 아주 폭력적인 논조로 쓰였다.
‘불한당들.’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사가 공격하는 모든 것에 공감과 열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본가들과 수구 세력에 반가운 증오심이 일었다. 그가 폐거하고 있는 담장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복잡한 개인사들이 사라졌다. 정치적 투쟁의 기쁨에 사로잡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섰고, 이른바 본연의 ‘나’보다 더 크고 단순한 사람이 됐다.
‘불한당들.’ 그가 압제자들과 독점 자본가들을 생각하며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캠든 타운 역에서 키가 작고 얼굴 쪼글쪼글한 사람이 곁에 앉았다.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늙은이의 담배 파이프에서 나는 악취가 얼마나 심한지 월터가 다른 빈자리가 있나 객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빈자리가 있었지만, 좀 더 생각하고는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괜히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어 시비가 붙을지도 몰라. 매캐한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자극하는 바람에 기침이 나왔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하네.” 필립 퀄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네 감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주된 전제가 아니라면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만약 자네에게 종교적 체험이 없다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짓일세. 그건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는 굴을 먹을 수 없으면서도 굴이 좋다고 믿는 것과 매한가지야.”
퀴퀴한 땀내가 니코틴 연기에 뒤섞여 월터의 콧구멍까지 침입했다. 기사를 계속 읽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걸 국유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것에 우리는 더 짧고 흔한 명칭을 붙일 수 있으니, 바로 ‘도둑질’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건 도적들한테서 다시 훔치는 것이요, 그 도적들로 인해 피해 본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체수 작은 늙은이가 상체를 숙이더니 쩍 벌린 두 다리 사이로 조심스레 수직으로 침을 뱉었다. 침을 구두 뒤축으로 비볐다. 월터가 눈길을 돌렸다. 그는 억눌리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박해자들에 대한 증오를 절절히 느끼고 싶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취향과 본능은 어쩌다 생긴 것이었다. 불변의 원칙들이 있었다. 한데 그 자명한 원칙들이 당신의 주된 전제가 되지 못했다면?… 옛날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아홉 살이었고, 가텐든 인근 들판을 엄마와 함께 걷고 있었다. 각각 앵초를 한 다발씩 들고 있었다. 분명 배츠 코너 쪽으로 걸었을 거야. 인근에서 앵초가 자라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 엄마가 말했다.
“우리, 가엾은 웨더링턴 집에 잠깐 들를까. 그 사람이 몹시 아프단다.”
엄마가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웨더링턴은 월터네 저택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했는데, 지난 한 달 동안은 보이지 않았다. 월터 기억에, 그는 창백하고 말랐으며 해수를 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도 별로 없었다. 월터는 그 사람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여자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웨더링턴 부인.”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웨더링턴이 쿠션에 떠받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커다란 두 눈에 확대된 동공이 움푹 팬 눈구멍에서 내다봤다. 튀어나온 뼈들을 덮은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땀에 젖었다. 그러나 얼굴보다 더 참혹한 인상을 준 것은 목…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앙상한 목이었다. 잠옷 소매에서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왔는데, 그게 손이었다. 뼈만 남은 손가락들이 달린 손은 영락없는 갈퀴였다. 또 병자의 방에서 풍기는 냄새란! 창문이 죄다 꼭꼭 닫혔는데, 작은 벽난로에서는 불길이 타올랐다. 답답한 공기에는 병든 몸이 발산하는 체취와 퀴퀴한 숨 냄새가 가득했어. 그 후텁지근하고 폐쇄된 방안에서 오랫동안 갇힌 탓에 달달한 듯하면서 구역질 일으키는 썩은 냄새. 세상 그 어떤 냄새도, 아무리 혐오스러운 것일지라도, 그것보다는 덜 끔찍했을 거야. 병자가 누운 방의 그 냄새가 특히 견디기 힘든 건, 통풍이 전혀 되지 않아 구석구석 배면서 들쩍지근하게 썩었기 때문이야.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쳤다.
그가 기억을 소독하기 위해 궐련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일 몸을 씻고 창문 열어 환기하도록 배웠다. 아직 어린애인 그를 처음 교회에 데려갔을 때, 사람들 몸내 때문에 속이 몹시 메스꺼웠다. 급히 데리고 나가야 했다. 엄마는 그를 두 번 다시 교회에 데려가지 않았다.
우리를 지나치게 위생적이고 무균 상태로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모임에서 구토 증세를 보이는 양육이 과연 괜찮을 수 있을까? 그는 그 사람들을 좋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인에게 통제되지 않는 혐오감과 구토를 유발하는 분위기에서는 사랑이 꽃필 수 없어.
웨더링턴이라는 병자의 방안에서는 연민조차 꽃피우기 힘들었다. 죽어가는 사람이며 그 아내와 어머니가 얘기 나누는 동안 그는 최면에 걸린 듯 앉아서 침대 위 피골상접한 사람을 끔찍한 심경으로 훑어보며 앵초 묶음 사이로 후텁지근하고 구역질 나는 공기를 들이켰다. 신선하고 기막힌 앵초 향기에도 방안 퀴퀴한 냄새가 배 있었다. 그는 연민이 아니라 공포와 혐오를 느꼈다. 웨더링턴 부인이 병자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 돌리고 눈물 흘릴 때도, 연민보다는 거북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여인의 비탄은 이 끔찍한 방에서 얼른 밖으로, 한없이 맑은 공기와 햇볕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키우기만 했다.
그 당시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느꼈었고, 이제 또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 본능에 충실해야 하네.” 아니야, 다 그렇지는 않아, 나쁜 취향과 본능은 아니야, 그런 것에는 맞서야 해.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곁에 앉은 노인이 다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월터가 그때 썩은 공기를 최대한 덜 들이쉬려고 애쓰면서 최대한 오래 숨을 참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앵초 묶음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쉰 뒤, 마흔까지 세고 숨을 내뱉은 뒤 다시 들이쉬기. 늙은이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침을 뱉었다.
「국유화로 노동자들 복지가 향상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 지난 몇 해 동안 납세자들은 관료적 통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쓰디쓴 경험으로 확인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상상하기를…」
월터가 눈을 감고 병자의 방을 보았다. 작별 시간이 되자 그가 뼈만 남은 손을 쥐었다. 그 손은 이부자리 위에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가 다 죽어가는 앙상한 손가락들 밑으로 자기 손을 넣어서 잠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건 차갑고 눅눅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기 코트 자락에 손바닥을 슬그머니 문질렀다. 오래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뿜고 역겨운 공기를 다시 들이켰다. 다행히 그게 마지막 할 일이었다. 엄마가 이미 문 쪽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예뻐하는 페키니즈가 왈왈 짖으며 주변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얌전히, 티앙(T’ang)!” 엄마가 또렷하고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월터가 회상하기에, 티앙이라는 이름에서 아포스트로피 음가를 제대로 내는 사람은 영국에서 어머니가 유일했을 듯싶다.
두 사람이 들판에 난 소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중국 용처럼 환상적이고 황당한 티앙이 자기한테는 거대해 보이는 장애물들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앞서 달렸다. 꼬리털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끔 아주 키 큰 풀줄기들이 나타날 때면 티앙은 각설탕을 달라고 할 때처럼 작고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높이를 가늠이라도 하듯이 퉁방울눈으로 덤불을 응시했다.
흰 조각구름 드리운 청명한 하늘 아래서 월터는 자신이 집행 유예된 죄수처럼 느껴졌다. 냅다 달리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어머니는 말없이 천천히 걸었어. 간간이 발길을 멈추고 눈을 감았어. 마음의 동요가 심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심란해하셨어, 월터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떠올렸다. 불쌍한 웨더링턴 때문에 마음이 몹시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얼마나 자주 발길을 멈추었는지, 그는 기억했다.
“엄마, 빨리 가요!” 그가 소리치며 재촉했다. “차 마실 시간에 늦겠어.”
요리사가 차와 함께 먹을 과자를 구워냈고, 또 어제 크림 넣어 만든 파이와 막 병뚜껑을 딴 버찌 잼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해.”
그러나 출생이라는 우연한 사건이 그에게 그런 것들을 결정해 놓았다. 정의는 불변이고, 늙은이의 파이프와 웨더링턴의 병실에도 불구하고 동정심과 형제애는 아름다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것 덕분에 아름다웠다. 기차가 속력을 늦췄다. 레스터 스퀘어. 플랫폼으로 나와서 승강기 쪽으로 향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된 전제는 부정하기 어렵고, 개인적이지 않은 주된 전제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믿기 어려워. 성실과 정조, 다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금 철학의 개인적이고 주된 전제로는 루시 탄타마운트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갈망하는…
“표들을 내십시오!”
내면의 격론이 다시 들썩이려 들었다. 그걸 그가 의식적으로 억눌렀고, 안내원이 문을 쾅 닫았다. 승강기가 올라갔다. 거리에서 월터가 택시를 잡았다.
초크 팜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어떤 이탈리아 운전사의 애정 무용담에 관해 아버지가 입에 올리곤 하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노인에게는 사람들이 얘기를 늘어놓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어. 하인이며 일꾼들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든. 월터는 그런 재주를 부러워했다).
그 운전사 말대로라면, 어떤 여인들은 옷장과 비슷하단다. Sono come cassettone.그 일화를 노인이 얼마나 맛깔나게 들려주곤 했던가! 옷장들이 아주 예쁠 수 있지만, 예쁜 옷장을 포옹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한데, 월터 생각에 마저리는 썩 예쁘지도 않았다). 그 운전사가 그랬다고 하지. “아니요, 좀 못생겼다 해도 다른 부류의 여인들이 더 낫습죠. 내 여자가 바로 그런 부류에요. 그녀는 거품 내는 도구, 진짜 달걀 거품기랍니다.”
그리고 노인은 쾌활하며 심술 궂고 늙은 사티로스처럼 모노클 뒤편에서 눈을 반짝였다. 뻣뻣한 옷장, 아니면 기민한 거품기, 어떤 게 더 낫겠어?
월터는 자신의 취향도 그 운전사와 같은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진정한’ 사랑이 무책임하고 부적절한 성생활로 무뎌질 때마다) 예쁜 옷장 같은 여인들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이론적으로 멀리서 보면, 순수성과 선함, 정제된 영성은 우러를 만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접할 때, 그런 것은 매력이 덜했다. 그리고 매력적이지 못한 누군가한테서 나오는 것은, 그게 헌신이든 듣기 좋은 찬사이든 견딜 수 없었다. 그 참을성 있고 순교자 같은 차가움 때문에 마저리를 그가 혼란스럽게 증오했으며, 동시에 돼지 같은 호색 때문에 자신을 비난했다.
그가 루시를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이고 수치스럽지만, 마저리가 핏기 없고 절반 죽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달리 변명도 필요 없이 즉시 합리화가 됐다. 그래도 결국엔 질책을 더 많이 했다. 그의 관능적 갈망은 저급하고 비열했다. 달걀 거품기와 서랍장이라니, 그런 분류보다 더 불쾌하고 저열한 것이 또 뭐가 있겠나? 아버지의 축축하고 육욕에 찬 웃음소리가 흉중에서 들렸다.
끔찍해!
월터의 의식적 삶은 전부 아버지와 반대로, 아버지의 흥겹고 경솔한 호색과 반대쪽을 지향해 왔다. 의식적으로 그는 늘 어머니 편에, 순수함과 정제됨과 영혼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최소한 절반이 아버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저리와 이태 동안 살면서 그는 차가운 미덕을 의식적으로 싫어하게 됐다. 그걸 의식적으로 미워했다. 그와 동시에 그런 반감이며 자기의 짐승 같은 관능적 욕망이며 루시에 대한 사랑을 수치로 여기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오오, 마저리가 그를 좀 편안하게 놔두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한사코 그에게 강요하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응답을 그만 요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그렇게 겁나게 헌신적이기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에게 우정을 줄 수 있었다. 그녀의 선함과 친절함, 충실함과 헌신 때문에 그녀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녀도 우정으로 갚아 준다면 그는 기쁠 것이야. 그러나 이 사랑은 숨 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다른 여인과 싸운다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도덕적인 차가움을 깨고 열렬한 애무로 그의 사랑을 되돌리려 했을 때, 오오, 그건 끔찍했어, 정말 끔찍했어.
월터의 생각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 무겁고 둔감한 성실함 때문에 그녀는 정말 따분해. 교양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것 때문에, 마저리는 좀 어리석어. 물론 그 교양은 정말 괜찮았어. 그녀는 책을 많이 읽고, 읽은 것을 다 기억했어. 그러나 읽은 것을 이해는 했을까?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온종일 말수가 없다가 가끔 꺼내는 소견, 문화적이고 진지한 소견들이란 얼마나 무거우며 유머나 이해가 얼마나 적은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외려 현명했다. 다듬지 않은 대리석에 위대한 조각상이 들어 있듯이 침묵에는 지혜와 기지가 가득 잠재해있었다. 침묵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다.
마저리는 상대방 얘기를 공감하여 경청할 줄 알았다. 한데 그녀가 침묵을 깰 때, 대화에 꺼내는 말들은 절반이 인용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심오한 사유와 화려한 문구들을 버릇처럼 외웠기 때문이다. 침묵과 인용들 이면에 무겁고 가엾을 정도로 이해력 떨어지는 어리석음이 숨어 있음을 월터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걸 알아보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가 칼링을 떠올렸다. 술주정뱅이에다 자칭 신앙인. 미사 예복이며 성인들이며 원죄 없는 수태를 허구한 날 늘어놓지만, 정작 본인은 술병이나 끼고 사는 역겨운 변태. 그자가 그렇게 혐오스럽지 않았다면, 마저리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럼, 어떻게 됐을까? 월터가 자유로운 자신을 상상했다. 그는 동정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았을 것. 칼링이 저지른, 한 역겨운 장면 이후 마저리의 붉게 부어오른 두 눈을 월터가 떠올렸다. 더러운 짐승 같으니!
‘한데 나는 어떻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문 뒤에서 마저리가 울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칼링은 위스키 핑계라도 댔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5) 술주정뱅이 칼링과 달리 그 자신은 늘 정신 멀쩡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마저리가 울고 있다.
“난 돌아가야 해.”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발길을 재촉해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건 자기 양심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욕망을 향한 달음질이었다.
“난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해.” 그가 그녀를 너무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그녀를 증오하면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담뱃가게 곁을 지나칠 때 진열장 곁에 선 사람이 갑자기 뒷걸음질 치다가 월터와 세게 부딪쳤다.
“미안합니다.” 그가 기계적으로 말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둘렀다.
“왜 밀고 그러쇼?” 그자가 등 뒤에서 사납게 소리쳤다. “눈은 뒀다 뭐해. 더비 경마에서 우승이라도 한 거야?”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사내애 둘이 야유하는 웃음을 사납게 터뜨렸다.
“실크해트나 쓰고 다니면 다야!” 남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얄미운 마음에 계속 쫓아왔다.
제대로 대응하자면 돌아서서 그자가 준 것보다 더 후하게 되돌려줬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라면 그런 자를 말 한마디로 박살 냈을 텐데. 그러나 월터는 재빨리 벗어날 줄만 알았다. 그런 충돌을 꺼렸고 바닥 인생들을 겁냈다. 사내의 욕설이 희미해졌다.
정말 역겨워! 그가 몸서리를 쳤다. 생각이 마저리에게 돌아갔다.
“왜 합리적으로 처신하지 못할까?” 그가 중얼거렸다. “그냥 합리적으로 말이야. 뭔가 하는 일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았고, 그게 문제였다.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사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잘못이 있었다. 그녀한테서 직장 일을 빼앗고 오로지 그에게만 열중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녀는 실내장식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건 켄싱턴에 있는 기품 있고 예술적인 아마추어 실내장식 업체 가운데 하나였다. 램프 갓과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젊은 여인들의 친근한 어울림, 또 무엇보다도 사장인 콜 부인에게 쏟는 헌신 따위가 비참한 혼인 생활에 처한 마저리에게 보상이 됐다. 그녀는 칼링과 동떨어져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그건 여학생 기숙사와 비슷한 여자들 세계인데, 거기서는 의상이며 상점들에 관해 얘기하고 가십도 듣고 여학생들 표현대로 사감 선생을 ‘열렬히 사랑하고’, 휴식 시간에는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며 예술이라는 명분에 공조한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걸 다 내팽개치라고 속삭인 사람이 바로 월터였다.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콜 부인에게 헌신하고 그녀를 감상적으로 ‘열애’하며 얻는 행복감이 마저리에게는 칼링과 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한 보상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나 칼링이 더 나빠지면서, 그와의 혼인 생활을 콜 부인도 더 이상 보완해 줄 수 없게 됐다. 월터는 그 부인이 제공할 수 없고 또 제공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을 제안했다. 즉, 피난처와 보호와 금전적 지원.
게다가 월터는 사내였고, 사내란 전통적으로 사랑하게 돼 있었다. 심지어, 월터가 마저리를 두고 최종 결정 내린 것처럼, 그녀가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여자들 모임에만 자연스레 어울리는 때도 그랬다. (이것도 문학의 영향이야! 그가 예술이 인생에 행사할 수 있는 파괴적 영향에 대한 필립 퀄즈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줄기차게 말했듯이 여느 남자들과는 ‘다른’ 남자였다. 그 ‘다르다’는 규정을 그가 그때는 듣기 좋은 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가 의아하게 여겼다. 어쨌든, 그녀는 당시 그가 여느 남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으며,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즉, 아직 남자가 아닌 남자를 얻을 수 있었다. 월터의 설득에 넘어가고 칼링의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작업실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건 월터가 혐오하던 콜 부인을 떠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월터가 보기에, 그 부인은 여성을 괴롭히고 노예처럼 부리고 피를 빨아먹는 귀신이었다.
“당신은 아마추어 실내용품 제작자로 일하기엔 정말 아까워요.” 그가 마저리에게 찬사를 늘어놓곤 했다. 당시에는 그녀의 지적 능력을 정말 믿었다.
그녀는 그의 문학 작업을 어떤 식으로든 돕고, 또 자신도 글을 써야 했다. 그리고 그의 영향 아래 에세이와 단편을 쓰게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썩 좋지 못했다. 처음엔 그가 격려하다가 그녀의 글들에 좀 뜨악하게 대했으며, 나중엔 아예 언급도 안 했다. 그 부자연스럽고 무익한 작업을 마저리가 곧 내팽개쳤다.
그러고 나서 그녀에겐 월터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의 존재 이유가 됐고, 그녀의 인생 전부가 기대는 초석이 됐다. 그 주춧돌이 이제 그녀 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월터가 문을 닫고 시원한 밤거리로 나섰다. 연민과 회한을 안고 희생자의 모습을 피해 범죄 현장에서 달아나는 범죄자도 이보다 더 큰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거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홀가분했다. 기억과 예상에서 벗어나 홀가분했다. 두어 시간 동안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로지 지금 여기서, 매 순간 그의 육신이 처한 곳에서만 홀가분하게 살 수 있게 됐다. 자유야!
그러나 그건 공허한 입찬소리였으니,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달아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목소리가 쫓아왔다. “당신은 가야 해요.” 그의 범죄는 살인일 뿐 아니라 협잡이기도 했다. “가세요.” 그는 얼마나 점잖게 거부했던가! 끝에 가서 얼마나 너그럽게 동의했던가! 그건 가장 잔혹한 가장질이었다.
“오, 신이여!” 거의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어찌 이럴 수가?” 자신이 혐오스럽고,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평온하게 놔두기만 한다면!”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는 왜 합리적이지 못할까?” 무기력하고 헛된 분한이 내면에서 다시 솟구쳤다.
그의 갈망이 전혀 다른 것이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그녀가 그에게만 매달리는 것도 다 그가 조장한 일이었다.
둘이 살던 오두막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은 민둥민둥한 구릉들 사이에서 둘만이 호젓하게 몇 달을 보냈다. 버크셔 쪽 전망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가장 가까운 마을은 1마일 반이나 떨어져 있었다. 오오, 식량 가득한 배낭의 그 무게라니! 비가 내리면 진창은 또 어떻고! 물도 깊이가 좋이 백 피트 넘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려야 했다.
그러나 두레박질같이 지겨운 일을 하지 않을 때도, 그건 정말 아주 만족스러웠을까? 마저리와 함께 정말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어쨌든 그가 상상한 것만큼, 그런 상황에서 누려야 했던 만큼, 그렇게 행복했던가? 그것은 <에핍시치디언>(1)과 같은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 왜냐면 그가 너무 의식적으로 그걸 원했기 때문일 거야. 왜냐면 자신의 감정이며 둘의 생활을 셸리의 시가에 맞추려고 일부러 애썼기 때문일 거야.
“예술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되네.” 언젠가 저녁에 시를 두고 담화 나눌 때 매형인 필립 퀄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사랑에 관한 것일 때 특히 그렇지.”
“예술이 진실하다 해도 그래요?” 월터가 물었었다.
“예술은 너무 진실해 보여서 곤란해. 증류수처럼 순수해 보이는 경향이 있단 말일세. 진실이 단지 진실에 불과할 때, 그건 부자연스러워, 그건 실세계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비실제적 관념이야. 자연에서는 다른 많은 무관한 것들이 늘 가장 중요한 진리와 뒤섞여 있게 마련이네. 그게 바로 예술이 우리한테 작용하는 이유일세.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이 실생활의 관련 없는 것을 다 다루면서도 순수하기 때문이야. 떠들썩한 주연도 포르노 책자만큼 흥분시킬 수는 절대 없어. 피에르 루이스(2) 작품에서 처녀들은 하나같이 젊고 몸매는 완벽하다네. 게다가 환희를 방해하는 건 전혀 없어. 곧, 딸꾹질이나 구취도 없고 피로나 권태도 없고 미납 계산서나 보내지 않은 업무 서신도 없단 말일세. 우리가 예술에서 얻는 감동과 생각과 감정은 아주 순수해, 화학적으로 말이야.” 그리고 웃으면서 덧붙였다. “도덕적이 아니라.”
“그러나 <에핍시치디언>은 포르노가 아니잖아.” 월터가 반박했다.
“아니지, 그러나 그것도 화학자의 관점에서는 똑같이 순수하네. 셰익스피어의 이 소네트를 기억하지?
내 연인의 눈은 태양과 사뭇 다르구나,
산호는 그녀의 붉은 입술보다 훨씬 더 붉고
눈이 백색이라면 그녀 가슴은 왜 회갈색인지,
머리카락이 줄이라면 그 머리에서는 검은 줄이 자란다.
나는 붉고 흰 다마스크 장미를 본 적이 있지만
그녀의 볼에서 그런 장미를 본 적은 없어라.
그리고 어떤 향수에는 더 큰 기쁨이 들어 있어,
내 연인의 입에서 나는 숨결보다도 말이지. (3)
등등. 그는 시인들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그에 반응한 것이야. 이것이 자네한테 보내는 경고라고 해두세.”
물론 필립이 옳았다. 통나무집에서 보낸 몇 달은 <에핍시치디온>과도 <라 메종 뒤 베르제>(4)와도 닮지 않았다. 우물과 마을로 걸어 다니는 게 어땠는지… 그러나 우물과 산책이 없고 순수한 마저리 하나만 그에게 있었다면, 그게 더 좋았을까? 더 나빴을지도 몰라. 순수한 마저리가 자잘한 일상으로 단련된 마저리보다 더 나빴을지도.
예를 들어, 그녀의 정제됨과 다소 차가우며 아주 창백하고 영적인 도덕성을, 그가 이론적으로 멀리서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까이서는?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바로 그 미덕과 또 정제되고 세련되고 창백한 영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불행했으니, 칼링은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고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연민 때문에 월터는 불륜의 기사가 됐다.
당시 그에게 사랑이란 대화였고 영적 교류요 교감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둘에 지독하게 순수했으니까. 성적 갈망을 승화하기에 익숙한 청소년의 순결을 지니고 막 옥스퍼드 대학을 마쳤으며, 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시가와 노작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건 진짜 사랑이었다.
성생활이란 그저 자잘한 일상 중 하나에 불과하며 피할 수 없는 것이야, 왜냐면 안타깝게도 인간에게 몸뚱이가 있으나 그건 가능하면 붙잡아두어야 했으니까. 천사들 편에서 인위적으로 불태우기를 익힌 젊은 욕망의 열정을 지닌 채 지독하게 순수한 그는 마저리에게서 태생적 차가움과 선천적으로 낮은 활력의 산물인, 정제되고 차분한 순수성에 감탄했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게 당신한텐 아주 쉽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나도 당신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건 절반 죽은 사람이 되겠다는 갈망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수줍고 내성적이고 민감한 껍질 아래서 그에겐 삶의 욕구가 강렬했다. 마저리 같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그에겐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선함과 순수함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쏟는 그녀의 헌신에 감동했고, 그녀의 찬양을 받고 우쭐해졌다. 적어도 그녀가 그를 지치게 하고 화나게 하기 전까지는.
*대위법 (counterpoint) - 서양음악의기본원리로, 독립성이강한복수의멜로디를동시에결합하는기법. 각성부(聲部)가명료하게식별될수있는 독립적인 선율을지니며여러성부가일정한규칙에따라결합해조화를이룬다.
CHAPTER 1
“늦지 않게 올 거지요?” 마저리 칼링의 목소리에 불안이 감돌았다. 애원조가 배어 있었다.
“응, 늦지 않을 거요.” 월터가 대꾸하면서도 늦을 게 분명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 목소리는 그를 짜증 나게 했다. 그건 모음을 좀 길게 빼면서 느긋한데다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불행에 처해서도 말이다.
“자정 넘기지 않게 하세요.” 그녀는 자기를 동행하지 않고는 그가 밤에 절대 나다니지 않던 시절을 입에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녀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즉,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한 시쯤으로 해요. 그런 파티가 어떻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런 파티가 어떤 것인지 몰랐는데, 월터 비들레이크의 정식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파티에 늘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월터 비들레이크와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고,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강하며 사디스트 기질도 다소 있는 남편 칼링은 보복 차원에서 이혼을 거부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두 해가 됐다. 겨우 이태가 지났을 뿐인데, 그의 사랑은 이미 식고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됐다. 이제 죄업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불편을 해소할 길이 사라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그녀가 애절하게 덧붙였다. 같은 말을 자꾸 해봤자 그의 짜증만 키우고 그의 사랑이 한층 더 식을 뿐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를 향한 사랑이 아주 강하고 질투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만약 그녀가 원칙을 좀 줄이고 자기감정을 시원하게 드러냈더라면, 그녀에게, 또 어쩌면 월터한테도,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하면서 아주 엄격한 자제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추태 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원칙을 힘겹게 깨고 나온 것이 기껏해야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세요, 월터”라는 말이었다. 월터를 움직이기에는 너무 약하고 미미한 이 분출은 짜증만 나게 할 거야. 그걸 알면서도 혀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 (봐, 그렇게 됐잖아. 그의 말투가 조금 더 거칠어졌어). “하지만 장담은 못 해. 기다리지 말아요.” 왜냐면 열두 시 반까지는 확실히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루시 탄타마운트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그가 흰 타이를 마지막으로 만지작거렸다. 거울 속에서 그녀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게다가 많이 여위어서 머리 위에 걸린 전등 빛을 받아 광대뼈 아래 움푹 팬 부위에 그림자마저 드리었다. 눈 그늘도 가득했다. 한창때에도 다소 길다 싶은 코가 여윈 얼굴에서 더 두드러졌다. 그녀는 볼품없고 지치고 병색 완연해 보였다. 육 개월 뒤면 몸을 풀겠지.
단세포였다가 세포 무리가 되고 작은 조직 덩어리가 되며 벌레 같고 아가미 달린 잠재적 물고기 같은 것이 그녀 자궁 안에서 꿈틀거리며 사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며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성인이 되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육신 안에서 하나의 젤리 뭉치였던 것이, 신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머리 조아리겠지. 물고기 같았던 것이, 선과 악을 만들면서 그 논쟁터가 되겠지. 그녀 안에서 기생하며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것이,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시를 읽겠지. 그 뭔가가 사람이 되고, 작은 덩어리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이 될 거야. 놀라운 탄생 과정이 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마저리는 구토증에 시달리고 나른하기만 했다. 신비라는 것이 그녀에게는 피로와 추레함, 앞일에 대한 끝없는 걱정, 육체적 고생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 따위를 의미할 뿐이었다.
임신 증상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기뻤다. 아니, 출산이 제 몸과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기뻐하려고 애썼다. 아기가 태어나면 월터가 더 다정하게 대해 주리라 믿었다. (그는 그때 이미 그녀한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것이든 그녀를 향한 사랑에 부족해 보이는 요소를 채워줄 감정이 새로이 생겨날 거야. 그녀는 고통을 겁냈고, 피할 수 없는 곤경과 수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월터의 애정을 되돌리고 굳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과 곤경도 참아 내리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웠다. 그리고 처음엔 그녀의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아기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주 상냥해졌다. 두세 주간 그녀는 행복했고, 통증과 불쾌한 느낌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모든 게 바뀌었으니, 월터가 그 여인을 만난 것이다. 루시를 쫓아다니는 중에도 그는 마저리의 상태가 염려스럽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그런 염려 이면에는 불만이 서려 있고, 의무감 때문에 부드러운 눈길을 건네는 것이며, 임부에게 마음 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아기를 미워한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기를 미워하니, 그녀도 아기를 미워하게 됐다. 더 이상 행복감으로 포장되지 못한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고 그녀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통과 불편함, 그것이 그녀 앞날에 드리운 전부였다. 그리고 당장엔 추해진 모습과 욕지기와 피로만 있을 뿐.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어찌 사랑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날 사랑해요, 월터?” 불쑥 그녀가 물었다.
월터가 거울 속 넥타이에서 갈색 눈을 잠시 돌려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우울한 잿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좀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 입술을 오므렸다가 입맞춤하듯이 ‘쩍’ 소리를 내며 다시 뗐다. 그러나 마저리는 미소로 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슬프고 불안한 기색이 여전했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나 싶더니, 어느새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오늘 저녁엔 나와 함께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간청했다. 그건 그의 사랑에 절대 호소하지 않고 그가 하고픈 대로 하도록 자유롭게 놓아두겠다는 거창한 결심에 어긋나는 것.
그 눈물 글썽이는 모습과 그 떨리고 질책하는 목소리에 월터가 양심의 가책이자 반발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노여움과 연민, 수치심. 그에게 용기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점을 당신은 정말 모른단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믿었던 것, 그러니까 우리 사랑 같은 건 예전에 결코 없었고, 내가 당신을 실제로 사랑한 적도 없었어. 그냥 친구이자 동료로 지냅시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아껴. 하지만 이렇게 사랑으로 나를 휘감지는 말아요, 제발, 나한테 사랑을 강요하지 마. 이쪽은 안 그런데 저쪽에서 사랑한다고 달려드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당신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 그건 상대에 대한 유린이고 무도한 행위인지를…”
그러나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닫힌 눈꺼풀 밑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괴로움을 안긴 당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증오했다. ‘하지만 내가 왜 저 눈물에 협박당해야 하지?’ 그렇게 묻고 물으면서 그녀마저 증오했다. 눈물방울이 기다란 코를 타고 흘렀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권리는 없어, 이렇게 억지 부리면 안 돼. 왜 이성적으로 처신하지 못하는 걸까?’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난 그녀의 사랑을 원치 않아, 원치 않아.’ 속에서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그를 사랑할 게 아니었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협박이야, 협박이라고. 이렇게 들이대는 사랑에 내가 왜 협박당해야 하는 거지? 나 역시 한때 사랑했다는 것을 가지고 이러는 건가! 아니, 내가 그녀를 진정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마저리가 손수건을 꺼내 두 눈을 훔쳤다.
그는 자신의 역겨운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 수치심의 원인은 그녀였다. 그건 그녀 탓이었다. 남편을 떠나지 말아야 했어. 그러고도 둘이 원할 때면 정사를 나눌 수 있었을 거야. 오후에 그의 원룸 맨션에서. 그건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떠나라고 다그친 건 바로 나였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센스 있게 거부했어야지. 내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어야 했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요청에 따랐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회적으로 불편한 위치마저 받아들였다. 그것 역시 또 다른 협박이야. 그렇게 희생했다고 이제 그를 을러대는 것. 그 희생으로 그가 그나마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호소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품위와 명예가 있다면, 내 체면과 명예를 이용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아기가 있었다.
‘정녕 아기를 지울 수는 없었단 말인가?’
그는 아기를 미워했다. 아기 때문에 그 엄마를 더 책임져야 하고 그녀에게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이 커졌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신한 뒤 볼품없게 되고 늙기까지 했다. 여자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아니야! 월터가 눈을 감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저급한 생각을 억누르고 물리쳐야 해.
‘내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자문했다.
“가지 말아요.” 그녀가 되풀이하는 말이 들렸다. 그 정제되고 길게 끌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얼마나 신경을 건드렸던가! “부탁이야, 가지 말아요, 월터!”
그 목소리에 흐느낌이 있었다. 이건 또 다른 협박이야. 아, 그는 어쩌다 이렇게 저급해질 수 있었을까? 어쨌든,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수치심이 줄어들기는커녕 한층 더 커졌다. 그 수치심 때문에 그녀가 더 싫어지게 됐다. 그녀가 느끼게 만든 그 병적인 수치심과 자기 혐오감이 그에게 또 다른 반감을 형성한 것. 분개가 수치심을 일으키고, 수치심이 이제 분개를 더 키웠다.
‘아, 그녀는 왜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을까?’ 그는 그걸 아주 맹렬하게 갈망하면서, 더 가혹하게 억압당한다고 분개했다. (그걸 무자비하게 말로 옮길 용기가 부족했기에, 그녀한테 미안하고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꼈으며 노골적으로 대놓고 잔인하게 굴 수 없었다. 그가 가혹하게 대한 것은 오로지 의지박약 탓이었다).
‘그녀는 왜 나를 마음 편히 내버려 두지 못할까?’ 만약 평온하게 놓아두기만 한다면,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며, 그녀도 훨씬 더 행복할 텐데. 훨씬 더 행복할 터이며, 그녀한테 훨씬 더 이로울 텐데… 그러다가 퍼뜩 자신의 위선을 간파했다. ‘그래도, 빌어먹을, 도대체 왜 내 하고픈 대로 하게끔 놔두지 않는 거야?’
그는 무엇을 원했던가? 바로 루시 탄타마운트. 그것도 이성에 거슬러서, 자신의 모든 이상과 원칙에 거슬러서, 걷잡을 수 없이, 본연의 소망과 달리,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도 거슬러서 그녀를 원했다. 그는 루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증오했다. 고상한 결말은 수치스러운 수단을 정당화할 것이다. 한데 만약 결말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그때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희생했으며 이제 불행에 빠진 마저리를 그가 괴롭히고 있는 건 다 루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이 이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나랑 같이 있어요” 그녀가 한 번 더 간청했다.
그 간청을 받아들여 파티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이 더 강했다. 그가 절반 거짓으로 대꾸했다. 그건 솔직한 거짓말보다 더 나빴는데, 왜냐면 그런 거짓말에는 위선적으로 정당화하는 진실 요소가 있으니까. 그가 그녀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제스처 자체가 거짓이었다.
어린애한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설득하는 사람의 구슬리는 어조로 그가 반박했다.
“하지만, 여보, 난 거기에 꼭 가야 해요.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오신단 말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비들레이크 시니어는 탄타마운트 가족 파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눌 얘기가 있어. 업무에 관해서.” 그가 ‘업무’라는 단어로 자신과 마저리 사이에 남성적 관심사라는 일종의 연막을 피우면서 막연하면서도 좀 거들먹대며 덧붙였다. 그러나 거짓말은 연막 사이로 투명하기 보이기 마련임을 그가 떠올렸다.
“다른 때 만나면 안 되나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여러 변명이 하나의 변명보다 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잊고 덧붙였다. “게다가 레이디 에드워드가 나를 위해서 특별히 미국인 편집장을 초대했거든. 그 사람이 도움 될지 몰라요. 그들이 원고료를 많이 준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에드워드 부인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초대하겠다고 말했는데, 떠났을지 걱정했었다. “아주 엄청나게 많지.” 그가 허튼소리로 스크린을 두툼하게 만들면서 말을 이었다. “작가가 고료를 과다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거기밖에 없소.” 그가 웃음을 터뜨리려 했다. “그리고 난 천 단어에 2기니밖에 못 받는 사업을 만회하려면 사실 특별한 수당이 좀 필요하거든.” 그러면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마저리가 얼굴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애원했다. “마저리, 울지 말아요, 제발.” 그가 죄책감과 불행을 느꼈다. 그러나 오오! 그녀는 왜 그를 평온하게 놔두지 못한단 말인가?
“난 우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가 입술을 댄 볼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마저리,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난 안 가겠어.”
“하지만 그냥 가세요.” 그녀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바라지 않는군. 집에 있겠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마저리가 그를 바라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부친과 그 미국인을 보는 게 좋겠어요.” 그가 지어낸 핑계가 그녀 입에서 나오자 아주 공허하고 정말 같지 않게 들렸다. 그가 혐오감에 움찔했다.
“그들은 기다릴 수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실렸다. 그런 거짓 핑계를 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그는 조잡하고 가혹한 진실을 대놓고 밝힐 수 없었나? 결국 그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떠올리게 한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그는 자기가 들이댄 핑계가 그냥 잊히고 입에 올린 적이 없던 것처럼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니, 아니요, 가세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미안해요.”
이제 그가 그녀에게 반대하여 나가지 않고 집에 있겠노라고 고집부렸다. 집에 머물러야 할 위험이 없어진 만큼 고집부릴 여유가 생겼다. 마저리로서는 그가 외출해야 할 게 분명한 만큼,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값싸게, 아예 공짜로 품위 지켜 가며 자신을 희생하는 듯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얼마나 역겨운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연기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집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양 외출하는 데 동의했다.
마저리가 그의 목에 스카프를 둘러 주고 실크해트와 장갑을 내주고 명랑한 빛을 띠려고 애쓰면서 가볍게 작별키스를 했다. 그녀에게는 자존심과 애정사에서 나름의 명예 규범이 있었다. 불행에도 불구하고, 질투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곧, 그는 자유로워야 하며 그의 삶에 자신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 게다가 불개입이 최상의 방침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것이 최상의 방침이기를 바랐다.
돌이 지난 뒤에는 아이가 내뻗은 손이나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기에 일부러 반응하지 말아 보라.
아기가 원하는 것을 주면서 “주세요, 하고 말해 보렴” 하고 유도하라.
말을 조금씩 더 늘여 간다. “엄마, 우유 주세요, 하고 말해 보렴.”
이렇게 말하기를 시킬 때 상냥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중요하다. 요구하지 말라.
5. 동물 소리 흉내 내기
“음메~”, “멍멍”, “야옹~”, “꽥꽥” 등 동물의 소리와 그 흉내에 어린애들은 언제나 큰 관심을 보인다.
내친김에, 책에 있는 여러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동물 이름도 알고 알려주게 될 것이다.
6.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
이미 말문이 트인 또래나 나이가 좀 더 많은 아이들과 어울리게 한다.
당신 아기가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을 분명히 흉내 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입을 열게 되고.
7. 노래하기
동요를 부른다. 조만간 아기가 당신을 따라 노래하게 될 것이다.
8. 동시 읽기
운율이 있고 기억하기 쉬운 동시를 여러 번 읽고 또 읽고 또 읽어 준다.
매번 읽어줄 때마다 아이는 처음 듣는 듯이 귀를 세우고 들을 것이다.
이제 또 읽어 주다가, 어느 순간 어떤 대목에서 다음 시구가 생각나지 않는 척해 보라.
당신이 마치지 못한 단어나 시구를 (이미 여러번 들은) 아이가 마저 끝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
9. 아기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
아기가 뭔가를 당신한테 얘기하게끔 자극하고 장려한다.
아이의 눈을 보면서 주의 깊게 들으려고 애쓰라.
관심을 보이고, 다시 물어보고, 놀라서 “어떻게? 한번 보여주렴” 청하고, 지극히 흥미롭다는 빛을 지을 수 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당신한테 미주알고주알 재잘거리고 싶어 할 것이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아이가 밖에서 흥미로운 무엇을 보았는지 식구들한테 얘기해 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아빠한테, 눈이 내렸는데 차갑고 하얘, 눈을 손으로 잡을 수 있어, 효준이가 눈을 뭉쳤어, 등등. 아니면, 비둘기한테 어떻게 모이를 주었는지,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는지, 미끄럼틀을 내려왔는지, 영미와 친해졌는지 등.
아빠는 끊임없이 “응, 그래,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 끄덕이고, 간혹 놀란 빛으로 되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10. 전자 장난감 수를 줄이기
돌 지난 아이의 놀이 공간이 전자 장난감들로 채워지지 않도록 한다.
왜냐하면, 아이가 놀이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관찰자가 되니까. (버튼 누르거나 레버 당기는 동작 외에는) 그 어떤 행동도 배제되고 판타지는 발붙일 데가 없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놀이의 과정이나 결과가 전부 자신과는 별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
공이나 장난감 자동차, 큐빅, 피라미드, 인형 등을 가지고 놀아주고 놀게 하라. 밝게 빛나고 번쩍거리는 물건들은 아이가 좀 더 큰 다음에 선물한다.
솜씨 좋고 유연하고 힘이 있는 새 몸통의 도움으로 담장을 뛰어넘어 거리로 나온 뒤 브리케는 택시를 잡아서 이상한 주소를 댔다. “페르-라셰즈(Pére-Lachaise) 공원묘지로 가세요.”
그러나 공원묘지에 이르기 전에 택시를 바꿔 타고는 몽마르트로 향했다.
탈출하기 전에 로랑의 지갑을 빼냈는데, 거기엔 몇 십 프랑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는 아주 큰 죄가 아닐 거야. 게다가 나한테는 불가피하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자신을 달랬다.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는 오랜 기간 연기됐다.
그녀는 다시 온전하고 살아 있고 건강한 사람임을 느꼈다. 게다가 이전보다 더 젊어지기까지 했다.
수술하기 전에 그녀의 여성적 계산으로 그녀는 나이 서른쯤 됐다. 새 몸뚱이는 갓 스물을 넘긴 정도였다. 이 신체의 분비선들이 브리케의 머리를 젊어지게 했다. 즉, 얼굴 주름이 사라지고 얼굴색도 더 좋아졌다.
‘이제 재미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갑에 들어 있던 작은 손거울을 몽상적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세워 주세요.”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뒤에는 걸어서 갔다.
새벽 세 시쯤이었다.
늘 다니던 카바레 ‘샤누와(*Chat Noir, 검은 고양이)’를 찾아갔다.
날아든 총탄이 그녀가 부르던 명랑한 샹송을 채 끝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숙명의 밤에 그녀는 이 카바레 무대에 서 있었다. 카바레 창문들에서는 아직 선명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별달리 주저함도 없이 눈에 익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피곤에 빠진 문지기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측면에 난 문으로 재빨리 들어가서 복도를 지나쳐 무대에 붙어 있는 출연자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녀와 먼저 마주친 사람은 빨강머리 마르타였다.
마르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탈의실로 숨었다.
브리케가 웃으면서 문을 두드렸지만, 빨강머리 마르타는 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라스토츠카(*러시아어로 제비. 여성에 대한 애칭)!” 그녀는 상표에 제비가 그려 있는 코냑을 하도 좋아하는 바람에 카바레에서 그런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우리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브리케가 몸을 돌리니 아주 잘 생기고 우아하게 차려입고 퍼런빛이 날 만큼 면도한 남자가 보였다.
그렇게 창백한 얼굴은 햇빛을 잘 안 보는 사람들한테서 보이기 마련이다.
그는 빨강머리 마르타의 남편인 장이었다. 그는 자기 직업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 동료들은 그의 생활 수단에 대해 묻기를 꺼렸다. 임기응변에 능한 장에게 자주 돈이 들어오고 그가 ‘젊은이들의 리더’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와인이 강물처럼 흐르는 밤마다 장이 활수 좋게 다 계산했다.
“어디서 날아온 거야, 라스토츠카?” “병원에서.” 브리케는 몸통 주인의 일가나 친구들이 새 몸뚱이를 빼앗아갈까 겁이 나서 그 기적 같은 수술에 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른 말을 꾸며댔다. “내 상태는 아주 심각했었어. 다들 내가 죽었다고 판정하고 시체 안치소로 보내기까지 한 거야. 그러나 거기서 시신을 검사하는 한 대학생이 내 손목을 잡고 희미한 맥박을 감지했지. 난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거야. 총탄이 심장을 건드리지 않고 살짝 비껴 나갔어. 나는 즉각 병원으로 옮겨지고, 다행히 다 잘 됐지.” “아주 좋아! 친구들이 다 놀라 자빠질 거야. 너의 부활을 축하해야지.” 장이 외쳤다.
탈의실 문의 자물쇠가 딸각거렸다.
빨강머리 마르타가 문 뒤에서 대화를 듣다가 브리케가 유령이 아님을 확신하고 문을 열었다. 두 친구가 포옹하고 힘차게 키스를 나눴다. “제비야, 넌 더 마르고 키가 크고 우아해진 것 같아.” 전혀 예기치 않게 나타난 친구의 자태를 호기심과 약간의 놀람을 가지고 살피면서 빨강머리 마르타가 말했다.
그 호기심 어린 눈길에 브리케가 약간 당황했다. “살이 좀 빠진 게 당연하지. 멀건 수프만 먹이니 그렇지 않겠어? 키는 어떠냐고? 뒤축이 아주 높은 구두를 신었지. 원피스 모양은…” “근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각에 온 거야?” “아, 사연이 한참 길어… 넌 벌써 출연을 마쳤니?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할래?”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큰 거울이 달린 화장대 곁에 앉았다. 장이 이집트 권련을 피우면서 곁에 앉았다.
브리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 도망 나온 거야, 공식적으로는.” “왜?” “부용(bouillon)이 지긋지긋했어. 허구한 날 멀건 수프만 나오니... 너도 이해하겠지? 멀건 수프에 사래가 들릴까봐 겁이 날 정도였어. 근데 의사는 날 내보내려 하지 않는 거야. 나를 의대생들에게 보여야 한대나 어쨌대나. 경찰에서 나를 찾을까봐 무서워… 내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네 신세를 좀 져야 할까봐. 며칠이라도 파리에서 아주 떠나면 가장 좋고... 하지만 돈이 별로 없어.”
빨강머리 마르타가 손뼉까지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만큼 흥미로웠던 것이다. “물론 우리 집에 있어도 돼.”
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생각에 잠겨 거들었다. “나도 경찰이 수배할까봐 걱정된다. 나 역시 며칠 동안 지평선에서 사라져 있어야 돼.” 라스토츠카는 친구였고, 장은 그녀한데 자기 직업을 숨기지 않았다. 라스토츠카는 장이 ‘큰 비행’을 하는 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전문은 금고털이였다.
“제비야, 우리 함께 남쪽으로 날아가자. 너하고 나, 마르타 셋이서. 리비에라에서 바닷바람을 좀 들이키는 거야. 난 오래 웅크리고 있었어, 바람을 쐬어야 돼. 두 달 넘게 태양을 못 보니 이젠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하다면, 믿겠어?” “아이 좋아라.” 빨강머리 마르타가 손뼉을 쳤다.
장이 값비싼 팔찌 시계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어. 젠장, 넌 우리한테 노래를 마저 들려주어야 해… 그리고 날아가는 거지. 그 의사든 경찰이든 너를 찾으려면 찾아보라고 해.” 장의 제의를 브리케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의 등장은 그녀가 예기한 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이 사회자로서 무대에 나가 몇 달 전 여기서 브리케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상기시키고는, 마드무아젤 브리케가 자기가, 장이 그녀 목구멍에 ‘제비’ 코냑을 한 잔 부은 뒤에 대중의 갈망을 좇아서 되살아났다고 밝혔다.
“라스토츠카! 라스토츠카!” 홀 안에 있던 술꾼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손짓을 하여 함성이 가라앉자 장이 말을 이었다.
“라스토츠카가 뜻하지 않게 끊긴 대목부터 샹송을 다시 부를 겁니다. 악단, <검은 고양이>를 준비해 줘요!”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요란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브리케가 지난번에 끊긴 노래를 마지막까지 다 불렀다. 사실 함성이 어찌나 큰지 그녀가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했고, 자기를 사람들이 잊지 않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는 점에 감격했다. 사실 그 따스함이 술기운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그녀에겐 상관이 없었다.
노래를 마치고 그녀가 뜻밖에도 오른손으로 우아한 제스처를 취했다. 예전에는 못 보던 것이었다. 홀에서 한층 더 큰 박수갈채가 터졌다. ‘저런 우아한 제스처가 어디서 났지? 정말 아름다운 자세야. 저 제스처를 배워야 돼…’ 빨강머리 마르타가 생각에 잠겼다.
브리케가 무대에서 홀로 내려왔다. 여자 친구들이 입을 맞추고 잔들을 높이 들어 부딪쳤다. 브리케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고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성공과 와인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녀는 추적의 위험도 잊은 채 여기서 밤새 앉아 있을 태세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보다 덜 마신 장이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그가 짬짬이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브리케에게 다가가서 손을 건드렸다.
“때가 됐어!” “하지만 난 싫어. 너희들끼리 가도 돼.” 브리케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장이 두 말 않고 그녀를 일으켜서 출구로 데려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과 아쉬움이 피어났다.
“공연은 끝났어! 다음 부활 때까지 안녕!” 문가에서 잠시 발을 멈춘 장이 홀을 향해 소리쳤다.
그가 비틀거리는 브리케를 거리로 데려나와 자동차에 태웠다. 곧 마르타도 크지 않은 여행 가방을 들고 왔다. “공화국 광장으로 갑시다.” 장이 종착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중간 지점을 운전수에게 말했다.
톰과 브리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몸통 없이 산다는 건 그들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아주 금세 우울해진 것은 당연했다.
톰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걸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어? 나무 등걸처럼 웅크리고서 구멍 날 정도로 벽만 쳐다봐야 하니…”
코른은 그들을 농담 삼아 ‘과학의 포로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포로들이 시무룩한 모습만 보이자 그도 역시 몹시 안달했다. 대중에 공개할 날이 오기도 전에 머리들이 우울증으로 쇠약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떡하든 그들이 재미나게 지내게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영사기를 들여놓고, 로랑과 존이 저녁마다 필름을 틀었다. 실험실 흰 벽이 스크린 구실을 했다.
톰의 머리는 찰리 채플린과 몬티 뱅크스(Monty Banks)가 출연하는 코미디 필름들을 특히 좋아했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면서 톰은 한동안이라도 자신의 구차한 존재를 잊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웃음소리 같은 것이 터지기도 하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방안 흰 벽에 영사된 한 필름에서 뱅크스가 까불거리는 뒤편으로 시골 농장 전경이 나타났다.
작은 계집애가 닭들에게 먹이를 준다. 볏을 꼿꼿이 세운 암탉이 병아리들을 열심히 거둬 먹인다.
뒤편에 있는 외양간에서는 젊고 튼튼한 여인이 어미 젖통으로 파고드는 송아지를 팔꿈치로 밀면서 암소의 젖을 짜고 있다.
털북숭이 개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면서 마당을 달려갔고, 그 뒤로 농부가 나타났다. 그가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그때 톰이 가성 같이 아주 높은 소리를 쉭쉭 내더니 고함을 쳤다. “그만! 그만둬요!..”
영사기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존이 무슨 뜻인지 언뜻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연을 멈춰요!”
로랑이 소리치면서 서둘러 불을 켰다.
희끄무레해진 장면이 여전히 얼마 동안 어른거리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존이 영사기 작동을 멈췄다. 로랑이 톰을 쳐다봤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건 이미 웃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모욕당한 아이처럼 온통 찌그러들고 입매가 일그러졌다.
톰의 머리가 흐느꼈다. “꼭 우리… 시골 같아… 암소… 암탉… 그것들이 사라졌어, 이젠 다 사라졌어…”
영사기 곁에서 로랑이 필름을 바꾸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곧 다시 불이 꺼지고 흰 벽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해롤드 로이드(Harold Lloyd)가 추적하는 경찰들을 피해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톰의 상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이 그에게 더 큰 우울증을 안기게 됐다.
톰의 머리가 투덜댔다. “저런, 탄내 맡은 놈처럼 정신없이 다니는군. 저자를 나처럼 주저앉히면, 저렇게 팔딱거리며 뛰지 못할 텐데.”
로랑이 프로그램을 다시 바꿔야 했다.
사교계 무도회 장면에 브리케의 기분이 완전히 잡쳤다.
어여쁜 여인들과 그들의 호사한 성장에 짜증스러운 반응을 예민하게 보였다. “필요 없어… 난 다른 이들이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영사기를 내갔다.
라디오가 그들을 조금 더 오래 즐겁게 해주었다. 음악이 흐르자 둘 다 흥분했다. 특히 댄스곡이 나오자 더 달아올랐다.
“아아, 내가 이 춤을 얼마나 많이 추었는데!” 브리케의 머리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외쳤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면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브리케는 변덕이 심했다.
짬만 나면 거울을 비춰 달라고 하지 않나, 툭하면 가르마를 바꾸어라, 아이라인을 그리고 파운데이션과 연지를 발라라, 요구가 많았다.
화장에 크게 관심이 없는 로랑이 무슨 짓인가 싶어 불쾌해졌다. 그러자 브리케의 머리가 짜증을 냈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에요?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더 어둡게 됐잖아요. 거울을 더 올려요.”
브리케는 패션잡지들과 옷감을 가져다 달라고 청하고 자기 머리가 놓인 탁자를 천 같은 것으로 가리라고 했다.
나이가 다 들어 수줍음을 타면서, 한 방에서 남자와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는 등 괴벽을 보이기까지 했다.
“밤에는 병풍으로, 아니면 책으로라도 나를 가려 줘요.” 로랑이 하는 수 없이 큰 책으로 ‘병풍’을 만들어 브리케의 머리 곁 유리판 위에 세워 두었다.
톰도 브리케 못지않게 사람들을 귀찮게 했다. 한 번은 포도주를 요구했다.
코른 교수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용액에 알코올을 조금 집어넣어서 그가 술 취한 기분을 맛보도록 했다.
가끔 톰과 브리케는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빈약한 성대가 받쳐주지 못했다. 그건 듣기에 딱한 이중창이었다.
“내 가련한 목소리… 예전에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당신이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하면서 브리케가 괴롭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녁마다 그들은 상념에 잠겼다.
이상한 존재 방식 때문에 이 평범한 존재들조차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들을 숙고하게 됐다. 브리케는 불멸을 믿었다. 톰은 유물론자였다.
“물론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면, 머리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브리케의 머리가 종알거리자, 톰이 신랄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은 머리와 몸 중 어디에 깃들었나요?” “물론, 몸에 있었지요… 아니, 어디에나 있었어…” 상대가 자기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브리케의 머리가 자신 없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신 몸통의 영혼은 지금 저승에서 머리가 없이 다니고 있나요?” “당신한테도 머리가 없는걸요, 뭐.” 브리케가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톰이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나야 머리하고 있지요. 그것 하나만 남은 걸요. 한데 당신 머리의 영혼은 저 세상에 남지 않았어요? 이 고무 창자를 따라서 지상으로 돌아왔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의 말투가 이제 심각하게 바뀌었다. “우리는 기계와 같아서, 증기를 넣으면 다시 작동했지요. 한데 지금은 산산조각이 나서 아무리 증기를 넣어도 소용이 없는 거고…”
이건 공명 사다리 절반쯤에, 중간 음계에 있다. 이건 아마도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음역일 것.
가슴과 목구멍, 구강의 단순한 통로들에 비하면 중간 음계의 공명 ‘복도’는 미궁에 속한다.
우리는 두개골 구조를 살펴보고, 얼굴 마스크 안의 통로와 굴의 형태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개중 어떤 것들은 단단한 뼈에 ‘움푹 파인’ 것이고, 또 어떤 것은 투명한 연골이 벽을 이루며 너비가 1밀리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렇게 재료가 서로 다르고 형태가 다양한 까닭에, 잠재적인 공명 버전이 무수히 나온다. (이로 인해 사람의 목소리 음색이 저마다 다른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대다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중간 음계를 이용하면서 한두 음정으로 만족한다. 이건 때로 ‘삑삑대는’ 소리요, 때론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나기도 한다. 심지어 소리가 잘 배치돼 있고 한 어조에서 다른 어조로 경쾌하게 이동하기 때문에 듣기 좋다 해도, 잘 설비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자신 안에 많은 것을 감출 수 있다.
섬세한 뉘앙스가 많이 담긴 생각을 다양한 공명 특성 덕분에 드러내게 된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한테 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여러 뉘앙스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발달하는 방어 메커니즘은 인간적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 목소리 부분을 최상으로 방어한다.
소리 높이와 공명 간에 조화를 이루며 교차하는 정신물리학적 과정에서 생기는 목소리 ‘방어 네트워크’에는 얼굴 근육의 긴장이 따른다. 어떤 방어적 반응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럽다. 개중 일부는 시간 흐르면서 습관이 되고, 다른 일부는 개개인이 절반 의식적으로 선택하거나 모방한다.
근육의 방어적 반응 결과, 소리의 발송이 특정 공명기에 이르지 못하고, 진동이 다른 공명기로 들어간다.
1차 공명 반응이 정지되고, 2차 공명 반응에는 왜곡된 메시지가 들어간다.
예를 들어,
“여보, 당신은 차를 너무 빨리 모는 것 같아!” 하는 말이 (즉,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1차 임펄스가), 위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려는 성격에 맞게 바뀐다.
두려움으로 자극된 에너지는 방어 반응이 없을 때 호흡과 성대를 활성화하여 비교적 높은 주파수의 진동을 내는데, 이 진동을 얼굴의 중간과 높은 부위에 있는 공명기들이 강화한다.
후두와 연구개, 상부 부비강들의 표면을 덮는 조직의 미세한 근육 수십억 개가 1차 임펄스의 에너지를 포착하여 높은 주파수의 진동을 많이 만든다. 그리하여 목소리에 첫 느낌이 순간적으로 담긴다.
인격이나 감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걸 바꾸어 놓는 2차 임펄스는, 종종 사람의 성격이나 외부 영향에 좌우된다. 2차 임펄스는 1차 임펄스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부주의하고 불안하게 운전하는 경우, 조수석이나 뒷자리 승객의 정신물리학적 반응은 이런 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1. 두려움의 1차 임펄스가 태양신경총에 전해지면서 숨을 급히 들이쉬게 되고, 이와 동시에 관자놀이와 눈구멍, 두개골, 후두 상부 등의 근육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2. 그리하여 공포 상태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결정이 빠르게 내려진다. 가슴의 낮고 깊고 차분한 공명 영역으로 가는 통로를 만들려다 보니까, 혀뿌리가 긴장하여 조여든다.
3. 두려움으로 자극된 에너지에 대한 응답으로, 후두 근육과 낮은 음계의 정신물리학적 반응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난다. 이 바꿔치기 결과, 따스하고 그윽한 어조로, 늦어서 불쾌한 것보다는 다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말이 나온다. 죽는 것보다 늦는 게 더 낫다. 혹은 운전자가 속도를 줄이게끔 설득할 수 있는 뭔가가 나온다.
두려움으로 자극된 1차 임펄스가 바뀌면서 다른 식의 방어 반응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두려움 대신 높고 톤으로 자지러지게 키득거리는 웃음이 나올 수 있다.
이 단순한 사례 하나에서 무수한 버전이 나올 수 있는데, 가정하는 상황에서 운전자의 지능이나 차량에 있는 두 사람의 관계, 실제 위험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1차 임펄스에 대해 형태를 바꾼 반응이 어떤 감정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일보다 더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연극배우의) 목소리가 순수하고 위장되지 않은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한, 그가 복잡한 감정을 세세히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는 금물이다.
우리는 감정과 상관없이 목소리를 악기처럼 대할 수 있다. 감정을 소리와 ‘결합하든지’ 혹은 그 둘이 서로 자극하게 하든지 상관없다.
(다음에 제시하는 실습으로) 마스크의 공명강을 전부 연구할 수 있다. 이 마스크가 이탈리아 코미디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지 말라. 난 얼굴의 마스크를 말하는 것. 그걸 느끼려면, 내적 차원에 필히 집중해야 한다. 그 깊이는 코 뒤에 있고, 뼈 ‘카타콤들’은 얼굴 근육 뒤에 있다.
먼저 얼굴 근육을 죄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대각선으로 활성화하고 풀어줘야 한다. 그 근육들은 기민하여 소통 과정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기민하지 못해 소통을 막을 수도 있다.
새해는 매번 밤 열두 시에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난 이미 꿈나라에 들어 있었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새해가 흘러갔던가! 한데 난 새해를 한 번도 못 봤어. 엄마와 아빠가 새해를 만나는 시간에 난 잠자고 있었던 것이야. 난 언제나 새해가 오기 전에 잠들곤 했어.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가 새해 선물을 주면서 그러셨지. “얘야, 행복한 새해를 맞으렴!” 하지만 난 새해가 한밤중에 왔었다는 걸 알고 있어. 근데 지금은 없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어.
“엄마는 새해를 만났나요?”
내 물음에 엄마는 “그럼, 만났지” 하고 대답했어.
“새해를 봤단 말이야?”
나의 이어진 물음에 엄마는 미소를 지었어.
“물론, 봤단다!”
“새해를 아빠도 보고, 이모도 봤어?”
“그렇고말고.”
그런 말을 들을 때 난 정말 속이 상하곤 했어!
나는 새해가 털부츠를 신고 털모자 쓰고 커다란 귀마개를 하고 찾아온다고 상상했어. 새해 엽서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야.
자정에 새해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맞아들이는 거지. 다들 새해를 포옹하고 새해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드디어 왔구나!” 하고 반기는 거야. 그러면 새해는 어깨에 멘 자루에서 선물을 꺼내 필요한 사람들한테 두루 나눠주면서 그러지.
“반가워. 근데 난 좀 바빠. 다른 집에도 다 들러야 하거든.”
다들 새해를 골목 모퉁이까지 배웅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어.
이게 바로 내가 마음속에 그리던 새해였다구.
새해가 오는 걸 보기 위해 잠을 안 자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매번 어디선가 잠이 들고 마는 거야. 그리고 깨어 보면 항상 내 침대에 누워 있지 뭐야. 곁에는 새해 선물들이 있었고.
내 동생은 새해를 나보다 더 일찍 만났어. 나보다 어리지만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그 애는 잠들지 않으려고 식탁 밑으로 기어들었어. 물론 처음엔 거기서 잠이 들었지만, 가족과 손님들이 다 식탁에 둘러앉으면 흥겹고 소란스러운 장면이 벌어지잖아. 그때 동생은 반짝 잠을 깨는 거야.
그 애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이러더라구.
“새해라는 건 없었어.”
그 말에 난 좀 놀랐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냐구? 거야 아주 간단해.”
“너, 식탁 밑에서 잠을 안 잔 거, 맞아?”
“당연하지! 벽시계가 열두 번 친 건 나도 들었어. 하지만 새해는 없었어. 그저 사람들이 서로 ‘새해를 축하해요!’ 하고 외치는 순간, 난 식탁 밑에서 기어 나온 거야.”
“그래서 누구를 맞이했는데?”
“새해지, 뭐.”
“새해를 그렇게 맞이했단 말이야? 그럴 수가 있냐? 예를 들어, 니가 나를 맞이한다면, 넌 니가 맞이하는 나를 보는 거잖아. 나를 만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맞이할 수 있겠어?”
“형아도 알게 될 거야. 다음 해에 알게 될 거야. 새해라는 건 전혀 없을 거라구. 그냥 시계 종소리만 울릴 텐데, 그래도 새해는 안 보일 거야.”
“넌 아마 식탁 밑에서 잠들었던 모양이다. 잠결에 시계 종소리는 들었겠지만, 새해는 못 본 거야.”
“난 안 잤어!”
“니가 새해를 못 봤다는 건 잠을 잤다는 뜻이야.”
“잠은 형아가 잤잖아.”
“나야 물론 자고 있었지. 하지만 너도 잠을 잔 거야. 단지 난 침대에서 잔 거고, 넌 식탁 밑에서 잤을 뿐이야. 너도 침대에서 자면 더 좋았을 텐데.”
“난 안 잤어.”
“그러면, 새해를 왜 못 본 거냐?”
“새해는 없었다니까 그러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쿨쿨 자고 있었던 거야. 됐다, 그만하자!”
그걸로 우리 언쟁은 끝이 났지. 동생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면서 자리를 떴어. 동생이 나한테 화를 냈지만, 그래도 난 그 애가 식탁 밑에서 잠자는 바람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온 새해를 못 본 거라고 여겼다.
아주 아주 꼬맹이 시절에, 그때 난 새해를 그렇게 마음속에 그리곤 했다.
(*러시아 사이트에서 옮김.
*슬라브정교회의 달력으로는 성탄절이 1월 6-7일이 된다. 그래서 신년 트리와 크리스마스 트리가 거의 같은 목적으로 쓰인다.)
누군가는 책이 재미나고 흥미로운지를 중시하고, 또 누군가는 책에서 얻을 게 있는지를 중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독서가 재미나서 시간 보내기 좋다는 이유로 책을 읽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어떤 목표를 이루려고 책을 읽는다.
전자를 '과정을 위한 독서', 후자를 '성과를 위한 독서'라 부른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두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기에, 그건 ‘과정을 위한 독서’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독서가 좋은 것이라고 배웠으며, 대다수는 특별한 생각 없이 그냥 과정을 위해 책을 읽는다.
‘재미있으면 되지 뭐, 뭔가 남는 게 있을까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야!’
한데, 좀 더 의식을 갖고 사는 이들은 책 읽기 전에 목표를 정하고 다 읽은 뒤에 남는 게 무엇인지 살핀다. 이건 아주 중요한 스킬이요 습관이다.
유원지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 흥미로운 과정이다. 휴일에 모처럼 롤러코스터 타면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느라 돈 들이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유희 시설에서 돈을 다 쓴다면, 문제가 되겠지. 지하철에서 벽에 붙은 잡다한 광고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책 읽는 것이 더 유익하지만, 해야 할 사업을 하는 대신 책만 읽는다면, 이것도 문제가 된다.
물론, 독서 자체가 일일 수도 있는데, 그러려면 독서에서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생활에 뭔가 실질적인 결과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건 독서 방법을 궁리하는 것보다 더 큰 무엇이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유익한 책 읽기>, <성과 있는 독서 방법>을 익히는 것.
"아니, 독서는 다 좋은 거 아니야? 거기도 뭐 유익하고 무익한 게 있나?!"
물론 차이가 있다. 크다. 남독과 난독의 폐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 '뭔가 남는 게 있는 독서' 형태를 익히는 게 중요하다.
이런 물음을 예로 들자. “문학 작품은 어떻게 읽나?”
좋은 문학 작품은 제대로 읽는다면 인격 발달에 좋은 훈련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자...
아름답고 밝은 형상들이 우리 영혼에 어떻게 새겨지는지, 그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흉내 내기 시작하는지, 우리가 더 선하고 더 정직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어떻게 배우는지! 좀 다른 얘기지만, 많은 독서광이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 속 세계로 달아나기도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문학 작품을 현명하게 읽는 데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다.
독서하는 자세와 방법을 정리해 보자.
일반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거기서 무엇을 읽을지, 얼마나 오랫동안 읽을지, 독서에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 그 결과를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등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책이야 많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다 읽기가 불가능할 만큼 많다. 우리한테 긴요한 것조차 다 읽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계산을 해 본다. 흥미로운 단락을 (음미하고 반추하면서) 읽는 데 10분쯤 걸린다 치자. 한 페이지에 단락이 여섯 개 있고, 그 한 페이지를 읽으려면 한 시간이 든다. 240쪽 얇은 책을 읽으려면, 안 자고 안 먹고 꼬박 10주야 걸릴 것. 하루에 8시간씩 꾸준히 읽는다 해도 한 달! 한데 우리가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책은 수천 권!!
이걸 어떡한담? 속독을 익히나? 괜찮은 방법일 수 있지만,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야. 반년이란 시간을 들여 속독을 익힌 뒤, 이것저것 다 신나게 읽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상태만으로는 외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왜? 왜냐하면, 신나게 읽어 들인,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 빤하니까.
속도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이 빨리 달리기를 배운다 해도 방향을 잘못 잡고 달린다면, 방향을 제대로 잡고 태평하게 걸은 사람보다 집에 더 늦게 도달하겠지.
해결책은 하나. 골라서 읽기.
불필요한 것은 안 읽어, 오로지 읽어야 할 것만 읽는 것.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을 얼른 확실하게 걸러낼 줄 안다면, 헛된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더 빨리 읽는 셈이 되는 것 아닌가? 시리즈와 단행본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단행본이 더 낫다. 중요한 일들과 책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는 것이 중요해.
선별적인 독서, 골라 읽는 방법을 습득하자.
"그걸 어떻게 정하는데?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하는 거야?" 이건 별개의 대화 주제.
"나한테 불필요한 것은 읽지 않을래!" 하는 원칙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다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 왔다. “책은 친구란다! 책은 지식의 원천이야! 책을 사랑하렴!” 다 옳은 말이지만, 사랑도 현명하게 해야 하는 법 아닌가.
아이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 아이 때는 더 많이 읽을수록 더 좋아. 아이는 자신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주인공들을 알고, 안목을 넓히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결과적으로 인내심을 기른다. 이건 유익해. 그러나 유소년기가 마냥 이어질 수는 없고, 그와 더불어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권리도 사라진다.
좀 지나치다 싶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18세까지는 아주 많이 읽어야 하지만, 18세 이후엔 이미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
"어, 이건 뭔 소리야? 말이 되는 얘기야?!"
조금만 더 듣고 생각해 보시라.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18세를 넘긴 뒤엔 이미 독서 대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는 개념과 방법에서 크게 다르다.
나한테 필요한 게 뭐지? 알았어, 그게 어디 있는지 대강 감 잡았어, 뒤적이고 찾아낸 뒤 작업에 돌입하는 거야.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 독서가 아니다. (글쎄, 독서라는 개념이 좀 다른 경우도 없지는 않을 터.)
성인들한테 시간은 소중해. 바쁜 사람에게 남아도는 시간이란 없어, 시간을 다 최상으로 써야 한다.
효율적인 사람은 독서를 비롯해 모든 것이 생산적인 작업이 되게끔 한다.
책은 (특히 흥미롭고 수준 있는 책은!) 지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야수이기도 하다. 책들은 전부 우리네 시간을 사정없이 잡아먹는다. 그러나 시간을 빼앗기면서 우리한테 필요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건 좋은 책이고, 우리는 현명한 독자.
다른 경우도 있기 마련. 정보 찾으려고 페이지를 펼치고, 흥미롭다 싶은 대목에 집중하고, 그 페이지에 빠지고 책에 몰입했다. 두 시간 반이 흘렀는데, 성과가 없어, 시간만 죽였다면... 이건 노 쌩큐.
인생과 마찬가지로 독서에도 원칙이 필요하니,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요한 것을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독서가 유용한 것이 되게 하려면, 독서 원칙을 익혀야 한다. 이건 무슨 뜻?
독서 원칙은 금지에서 시작된다. "내 독서 목록에 없는 책은 읽지 않겠어!"
필요한 독서 목록을 지금 당장 작성하자.
필요하거나 원하는 책을 떠올려서 리스트를 만들라. 요 몇 달 동안, 요 몇 해 안에, 읽을 필요가 있는 도서 목록을 작성하라.
목록 작성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읽지 마. 어쩌면, “아, 거 참 좋은 생각이야!” 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한마디로, 당신에게 필요치 않은 책들은 읽지 말라.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자.
책을 쥐고, 조금은 세심하게 자신을 조율하라. 책을 펼치지 말고 자문하라.
‘오늘 내 목표는 뭐지? 이번 한 달의, 올해의 목표는? 내 목표에 가장 걸맞은 답이 이 책에 들어 있을까?'
찾고자 하는 것이 그 책에 들어있는지 꼼꼼히 살핀다.
'여기에 정말 있는 거야?' 아니면, '이 책은 그냥 지나치는 게 좋지 않을까?'
독서도 신중한 행위가 되어야 하는 것. 자동차 구입이나 집 짓는 일, 아기를 낳는 것처럼. 비록 그런 일들보다 책은 더 자주 읽을 수 있기는 해도…
‘이건 읽겠어’ 하고 결정했을 때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단원은 읽지 마.
책을 통째로 다 읽는다는 것은, 귀갓길에 이 아파트 저 아파트 다 들러보고 집에 가는 것과 매한가지. 우리에겐 다른 건물들이 필요 없어, 내 집만 필요해.
그러니, 책을 들고 목차를 펼치고 필요한 단원만 찾으라.
그런 것을 찾았다면, 나머지는 안 읽어. 2분 들여서, 수십 시간을 벌었다. 불필요한 페이지들은 그냥 지나치라. 주마간산 격으로도 방향 잡기에 충분할 것. ‘이건 필요치 않아, 이것도 다른 얘기야…’ 시간 허비하지 말고, 오로지 당신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다.
불필요한 단원들은 그냥 넘긴다. 책의 단원을 전부 분석하는 것은 집에 가면서 상점마다 다 들르는 것과 같아. 상점들이 유혹하지만, 우리는 묵묵히 제 길을 간다. 그리고 정작 필요한 것이 실제로 들어있는 단원에서는 시간을 아끼지 말라. 눈으로 읽어서 뭔가를 흡수하게 된다면, 한 단원에 10분은 많이 들이는 시간이 전혀 아니야.
선택적 독서 방법
•목차를 펼친다. •흥미로운 (목표에 부합하는) 챕터를 찾는다. •그 챕터를 펼치고 정말 필요한 것인지 확인한다. (앞부분을 살피라.) •그 챕터에서 필요한 페이지들을 찾는다 •그 챕터에서 필요한 단락들 찾는다.
곁들이자면, 필요한 챕터나 페이지 안에서 필요한 자료를 더 빨리 찾으려면, 텍스트의 논리적 블록을 알면 좋다.
모든 텍스트에는 대개 머리말, 본문, 결론이 있다.
머리말에 뭐가 있나?
주된 테제와 근거, 생생한 사례는 머리말이 아니라 본문에 있다.
그리고 저자는 흔히 맨 마지막 결론에서 중요한, 당신 위해 준비한 결론을 요약하거나 이런저런 서비스를 내놓는다. 어떤 책들을 당신이 읽어야 (사야) 하는지, 혹은 어떤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지.
이런 점을 안다면, 썩 도움 되지 않는 것은 아예 안 읽을 수 있고, 필요한 것이 있을 만한 곳에서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세 살 난 딸이 장난감 청진기를 가지고 놀고 있다. - 뭐를 하는 거니? - 물고기 잡는 거야! - 얘야, 그건 의사들이 쓰는 물건이야. - 좋아, 그럼 내가 의사 할게. 어디가 아파? - 응, 여기, 목구멍이 좀 아프다. 좀 봐줄 수 있겠니? - 아니, 못해. - 왜? - 난 물고기를 잡고 있으니까...
초등학생 아들이 묻는다. - 엄마, 메타포가 뭐야? - 내 삶은 난파선이야. - 아, 그건 알아, 엄마. 근데 메타포가 뭐냐니까?
다섯 살 된 아들이 엄마한테 말한다. - 엄마는 그래도 좋은 여자야, 소리치지만 않는다면.
내가 어린애였을 때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을 군소리 없이 거의 다 했다. 지금 내 아들은 다섯 살인데, 툭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을러댄다. 내가 김치를 억지로 먹게 강요한다고...
어린 아들이 아빠한테 나직하게 묻는다. - 아빠, 비밀 하나 말해줄까? - 어, 그러렴, 아들아! 아들이 두 손으로 아빠 눈을 가리고 속삭인다. - 금방 똥 싸고 손을 안 닦았어.
다섯 살 된 아들이 엄마한테 묻는다. - 엄마, 좌절이란 게 뭐야? - 아, 그건... 울적하고 고독하고 마음이 무거운데도, 더 이상 뭔가 달라질 게 없어 보이는 상태야. - 아, 그러니까, 결혼하면 나타나는 모습이로군?
초등학생 아들한테서 온 문자. 1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에요. (잠시 뒤에) 2신: 난 엄마를 사랑해. (또 잠시 뒤에) 3신: 오늘 국어 시험에서 낙제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이미 ‘좋은/똑똑한’ 아이나 ‘나쁜/멍청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이것이 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한 심리학자가 평범한 초등학교 두 학급의 수업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교사에게 아이들 행동을 관찰한다고 설명하고 맨 뒷줄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실제로 그의 관심은 교사가 이른바 ‘우등생들’과 ‘열등생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 학급에서 각 그룹의 학생을 서너 명씩 점찍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우등생’으로 평가된 아이들한테는… “잘했어”, “훌륭해”, “좋아”, “(다른 아이들에게) 이 애를 본받아라”, “넌 벌써 다 공부했지”, “늘 잘 해내는구나” 같이 긍정적인 말을 하루 평균 23번 건넸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은 하루에 한두 번만 했다.
한데 이른바 ‘열등생들’의 경우엔 완전히 정반대였다. (“또 너로구나!”, “하는 짓이 어째 그 모양이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 “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등) 나무라고 지적하고 혼내는 말을 하루에 평균 25번이나 하고, 긍정적인 말이나 중립적인 말은 아예 하지 않거나 어쩌다가 한 번이었다.
교사의 이런 태도는 급우들에게도 전염됐다.
아이들은 휴식 시간에 이 심리학자를 둘러싸고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최대한 더 가까이 다가들어 이 사람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등 호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둘러싼 이 아이들 틈으로 이른바 ‘열등생’이 끼어들려고 하자, 아이들은 “저리 꺼져, 이 멍청이야!” 하면서 그애를 몰아낸 것이다.
그 아이의 입장이 됐다고 생각해 보자. 권위 있고 존경받는 사람들한테서 꾸중이나 지적, 비판의 소리를 하루 평균 25번이나(!) 들으면서,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간다고 상상해 보라! 게다가 수업 중간중간 휴식 시간엔 또래의 급우들한테서 배척을 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될까? 견딜 수 있겠나? 버텨 내겠는가?
이 연구를 소년 교정시설에서 계속한 결과 아이들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분명해졌다.
알고 보니… 거기에 수용된 미성년자들의 98%가 이미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또래들과 교사들에게 배척된 경험을 안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감정 ‘항아리’를 이용하여 각각의 경우에서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수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앞에서 다룬 답변을 죄다 복습하고 체계화할 것이다.
* * *
1. 아이가 엄마한테 화를 낸다. “엄마는 나빠, 난 엄마 미워해!”
그렇게 화를 내는 이면에 아픔과 서운함 등이 숨어 있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이런 경우 그 말을 적극적으로 듣고 아이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헤아려 짚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의 태도에 대응하여 나무라고 벌주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부정적인 심적 체험만 더 깊어질 수 있으니까. (게다가 당신의 감정도 나빠지고.) 상황이 가라앉고 당신의 말투가 다정하게 될 때까지 훈계나 설교조의 말을 삼가는 게 더 좋아.
2. “넌 (마음이) 아프구나.”
만약 아이가 고통이나 서운함, 두려움 등에 시달리는 게 확실히 보인다면, 적극적 듣기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방법은 우리 도표의 2층에 있는 여러 심적 체험을 위한 것이다.
만약 부모가 같은 감정을 맛본다면, 그것을 <나-메시지>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때 만약 아이의 ‘컵’도 가득 차 있다면 아이가 당신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먼저 아이의 얘기를 듣는 것도 괜찮다.
3. 아이한테 무엇이 부족한가?
아이의 불만이나 아픔이 같은 이유로 반복된다면, 만약 늘 징징대고 같이 놀자거나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면, 혹은 그 반대로 늘 말을 안 듣고 싸우고 거칠게 군다면… 원인은 아이의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도표의 3층). 아이에게 당신의 눈길이나 관심이 부족하거나, 거꾸로 자유와 독자성의 느낌이 부족할 수 있어, 아이가 학교생활이 좋지 못하거나 학습이 부진해서 고통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적극적 듣기 하나로는 충분치 못해. 사실 그것으로 시작할 수는 있지만, 그다음엔 그래도 내 아이한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써야 한다. 만약 아이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아이의 학습이나 활동에 더 자주 관심 기울이고, 또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아이를 실제로 돕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얘기 나눈 것처럼, 아주 효율적인 방법 하나는... 아이의 욕구에 거스르지 않고, 반대로 그에 화답하는 조건과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아이가 많이 움직이고 싶어 할 때 안전하고 열린 공간을 만들어 주면 될 것이고, 물웅덩이에 호기심을 보이고 철벅거리고 싶어 한다면 장화를 신기면 될 테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하고 싶어 한다면 값싼 벽지를 발라 주면 되지 않겠는가.
물살을 따라 노를 젓는 것이 거슬러 올라가기보다 더 쉽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아이의 욕구를 이해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이의 얘기를 가장 폭넓게 적극적으로 듣는다는 뜻. 부모의 이런 능력은 적극적 듣기 기법을 더 많이 실천하면서 발달된다.
4. “넌 나에게 소중하단다, 네가 하는 일은 다 잘 될 거야!”
우리 항아리 도표의 층을 따라 더 밑으로 내려갈수록, 아이와 소통하는 스타일이 아이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좋은, 소중한, 재능 있는, 혹은 나쁜, 쓸모없는, 실패한 사람인지를) 아이는 오로지 어른들한테서, 특히 부모한테서 알게 될 것.
만약 가장 깊은 층이 (즉, 감성적인 자아감이) 부정적인 심적 체험으로 이뤄져 있다면, 아이의 여러 생활 분야가 어지러워진다.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루기 힘든’ 골칫덩이가 된다. 그런 경우 아이를 돕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부모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가장 많고,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트레이닝이 아주 효율적이다.
아이가 자기 자신이며 주변 세계와 불협화음을 크게 만들지 않게 하려면, 아이의 자존감을 늘 북돋울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다시 살펴보자.
► 아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
► 아이의 심적 체험과 욕구를 적극적으로 듣기
► 함께 있기 (책 읽기, 놀기, 작업하기)
► 아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에 간섭하지 않기 (독자성 존중)
► 아이가 요청할 때 도와주기 (근접발달 영역 법칙)
► 아이가 하는 일이 잘 되게끔 지지하기
► 자신의 여러 감정을 나누기 (즉, 아이를 신뢰하기).
►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결하기.
► 일상 소통에서 다정한 어구를 이용하기. 예를 들어,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좋구나. 널 보니까 기쁘단다.
네가 집에 오니까 좋다.
네가 ... 하는 게 난 좋단다.
엄마는 네가 보고 싶었단다.
자, 함께 (해볼까, 앉자꾸나 등등.)
넌 당연히 해낼 거야. 잘 처리할 거야.
네가 우리한테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 하루에 최소한 4번 포옹하기, 8번이면 더 좋아.
저런 방법 이외에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직관이 당신에게 알려줄 방법이 또 많이 있다.
비록 갈등과 충돌로 한숨과 탄식이 생긴다 해도, 그런 것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많이 있다.
그러니 늘 희망을 품고 차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꾸준히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어린애가 태어난 직후부터 자신의 ‘태양’을 위해 투쟁한다 해도, 아기의 힘은 제한돼 있고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파워에 더 의존한다.
한 번 더 강조하자.
아이한테 보내는 말과 몸짓, 억양, 제스처, 찌푸린 눈썹, 심지어 침묵까지... 그것으로써 어른은/부모는 아이에게 자기 자신의 상태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 대한 태도 같은 것도 늘 전달하는 셈이다.
격려와 인정, 애정, 용인 등의 신호나 징표를 반복해서 보낼 때
아이에겐 “난 다 괜찮아”, “난 좋은 애야” 같은 느낌이 쌓이는 반면에,
꾸지람과 비난, 불만, 지적 등의 신호를 자꾸 보낼 때
아이에겐 “나한테 문제가 있나 봐”, “난 나쁜 사람이야” 같은 느낌이 쌓여 간다.
일상에서 어린애의 움직임에 우리 관심을 확대해 보자. 이를 위해 한 아동 심리학자의 상담 사례를 소개한다.
돌 지난 아이의 아빠가 상담하러 와서 이런 경우를 털어놓았다.
"11개월 된 아들이 아기 침대에 혼자 있게 됐어요. 침대 곁에는 탁자가 있는데, 아기가 침대 난간을 타고 어찌어찌 그 탁자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그 순간 방에 들어선 내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기는 두 팔과 두 다리로 기우뚱거리며 환하게 웃었는데, 그 불안한 모습에 난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기에게 달려가서 얼른 끌어안아 침대에 다시 앉히고는 집게손가락을 치켜들어 엄하게 주의를 주었지요. 아빠의 엄한 얼굴에 아기가 슬프게 울더니 오랫동안 진정하지 못하더군요.」"
나는 그 아빠한테 이렇게 제시했다.
"이제 당신이 그 11개월 된 아들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아기인 당신이 영웅적인 노력을 다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싫증난 침대를 벗어나 새로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선 겁니다. 그때 느낌이 어떨까요?"
그 아빠는 “기쁘고 자랑스럽고 통쾌하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젠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인 아빠가 나타나서 당신은 기쁨을 전하려고 그를 부릅니다. 손짓이든 몸짓이든 표정으로든 말입니다. 한데 그 사람은 함께 기뻐하는 대신 화를 내며 당신을 나무라는군요. 당신이 왜 부르는지 전혀 이해도 못하고!"
젊은 아빠가 머리를 감싸 쥐고 탄식했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엾은 아기!”
이 사례가 아기가 탁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아이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지금 아이한테 보내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대개 징벌을 “넌 나쁜 애야!”로, 실수 비판을 “넌 할 줄 몰라!”로, 무시를 “난 너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 혹은 “넌 사랑받지 못해” 같은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아주 많다.
아이의 정신적 저금통은 끊임없이 작동하는데, 더 어릴수록 부모가 거기에 집어넣는 것의 영향이 더 크게 새겨진다. 다행히도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들이 더 다정하고 주의 깊게 대한다. 비록 바로 앞의 경우처럼 사소한 부주의와 실수가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러나 아이가 더 자라면서 키우고 가르치는 강도가 더 커지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아이의 자존감이라는 ‘보물창고’에 무엇이 쌓이는지 헤아리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즉, 아이의 정신적 저금통에 부모의 따스함과 용인과 격려 같은 선물이 쌓이는지, 아니면책망과 지적과 처벌의 무거운 돌들이 쌓이는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어릴 적에 부모에게 인정받는 경우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그 아이의 삶이 (또 나중에 어른이 된 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다음 두 가지 사례가 잘 보여준다.
첫 번째 사례는…한 놀라운 여인과 접촉한 내 경험이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와 나는 운 좋게도 몇 달을 함께 보내게 됐다. 정말 선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자기한테 있는 것을 다 기꺼이 나누고, 선물할 계기를 세심하게 찾아냈으며, 사람들을 물질로든 일로든 적극 돕곤 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아주 특별한 관대함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우울해하거나 비탄에 잠겨 있는 순간에 그녀는 늘 친절한 말이나 미소를 건네고, 긴장이나 대립의 순간에는 지혜로운 탈출구를 마련하곤 했다. 그녀가 있으면, 어떤 문제든 더 단순해지고 분위기가 더 인간적인 면을 띠곤 했다. 그런 재능 덕분에 그녀와 접촉한 사람은 다 그녀에게 매료됐다.
한번은 내가 대놓고 물었다.
"당신의 그런 선함과 너그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아주 간단해요. 엄마가 나를 아주 사랑하며 내가 건강하게 나오기만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걸 엄마 뱃속에서부터 난 확실하게 알았거든요. 그리고 태어나서 며칠 지난 이후 엄마와 아빠가 나를 아주 사랑하며 내가 그분들께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고요. 그렇게 부모한테서 받은 것을 이제 난 세상에 돌려주고 있을 뿐이에요."
당시 이미 할머니가 된, 그녀 모친에게 배어 있는 배려심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다른 사례 역시 안타깝지만 실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15세 된 소녀는 엄마와 관계가 거의 끊겼다. 많은 날을 거의 바깥에서 보내는데,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이 소녀가 네댓 살 때 벽에 다가가서 자기 머리를 세게 부딪는 경우가 자주 반복됐다. “왜 그러니? 그만해!” 하고 엄마가 말려도 “아니, 할 거야! 난 나를 벌하고 있어, 왜냐면 난 나쁜 애니까” 하는 답변만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 사연은 정말 충격적이다.
다섯 살 될 무렵에 이 소녀는 자신이 좋은 애가 아니라고 여겼다. 부모가 따스하게 대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좋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가족의 상황이 아주 나빴다.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가계는 쪼들리고 둘째 아이도 태어나고… 삶에 지친 엄마가 힘들고 괴로운 상태를 딸한테 폭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소녀는 ‘좋은’ 아이가 되고픈 마음에서 스스로 ‘교정’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자기 징벌이라는 방법만 알고 있었을 뿐이며, 그 방법이 도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처벌은, 그것도 아이의 자기 징벌은, 자신이 불행하고 평온치 못하다는 느낌을 심화시키기만 한다. 결국 아이는 “내가 못된 애라고? 그래, 그러면 그렇게 되지, 뭐!” 하는 결론에 이른다. 이건 괴로운 절망감을 은닉한 도전이다.
이 절망과 자포자기 상태를 우리는 늘 듣는가?
사실상 결코 그렇지 못하다. 일이 잘 안 풀려서 애태우는 아이를 계속 벌하고 나무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집에서는 내놓은 자식으로, 학교에선 포기한 학생으로 만든다.
“저리 꺼져, 이 멍청한 놈아!”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이미 ‘좋은/똑똑한’ 아이나 ‘나쁜/멍청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이것이 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심리학자가 모스크바의 평범한 초등학교 한두 학급의 수업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계속>
그럼에도 말을 안 듣고 나쁘게 행동하는 진짜 원인을 알아내기란 상당히 간단하다. 이 방법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부모가 자기감정에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아이가 자꾸 말을 안 듣고 고집만 부릴 때 당신에게 어떤 감정적 반응이 생기는지를 살펴보라. 원인이 다양하면 이 반응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으니...
부모가 겪게 되는 심적 체험은 바로 아이가 품고 있는 감정 문제를 고대로 반영한다는 점!
부모의 어떤 감정적 반응이 (앞에서 알아본, 아이가 비뚤어지게 행동하는) 네 가지 원인 각각에 상응하는지 살펴보자.
아이가 관심 끌려고 하면서 말을 안 듣거나 당돌한 언행을 보인다면... 부모에게는 짜증이 생겨. 만약 고집스레 말을 듣지 않는 배경이 부모 의지에 맞서는 것이라면... 부모에겐 분노가 생겨. 말을 듣지 않는 은밀한 원인이 보복심이라면... 이에 대해 부모한테 생기는 감정은 모욕감. 끝으로, 아이가 자신의 안 좋은 상태에 깊이 묶여 있을 때... 부모는 무망함을 느끼거나, 때론 실망에 사로잡힌다.
보다시피, 아이가 말 안 듣고 속썪일 때 부모에게 상응해 일어나는 감정은 여러 가지다. 개중에 어떤 것이 당신 경우에 해당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이 물론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이에 대한 첫 번째이자 일반적인 답변은...
그동안 해오던 식으로, 달리 말해, 아이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왜 이렇게 해야 하냐면...
아이가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대로 반응하는 경우 악순환이 생기니까. 즉, 부모가 (짜증내고 화를 내고 모욕감 느끼고 낙담하는 등) 불만에 더 크게 사로잡힐수록, 아이는 자기의 목적이 이뤄졌다고 더 크게 확신하면서 저 앞의 4가지 형태의 언행을 더 열심히 가열차게 반복할 테니까 말이다.
이런 점을 알아차렸다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불순종에 이전과 같이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의 기대와 예상에 부응하지 않음으로써) 악순환을 깨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가 물론 쉽지는 않다.
짜증을 억누르고 화를 참고 모욕감이나 무망함을 숨기기가 보통사람으로는 쉽지 않다. 특히 자녀와 갈등이 오래 되고 깊은 것이라면, 부모의 대응 감정이 거의 자동으로 터지기 쉽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해도...
소통 성격을 바꿀 수는 있어! 감정이 드러남을 자제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감정 뒤에 따라붙는 지적이나 비판, 벌을 주는 행동 등은 다 자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당신이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면, 아이의 문제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아하, 내 아이는 지금 (앞의 4가지 원인 가운데) 무엇무엇 때문에 이렇게 부모 말을 안 듣고 대드는구나.'
렇게 제대로 짐작한 뒤에는 교정이나 제재의 입장에서 도움의 입장으로 전환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 * *
아이가 말을 안 듣게 된 원인에 따라 부모의 돕는 방식도 물론 다르리라.
1. 만약 관심 끌기 싸움이 벌어진다면, 아이에게 당신의 긍정적인 관심 보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건 서로를 귀찮게 하지 않고 서로에게 화내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차분한 순간에 하는 게 더 좋다. 어떻게 하는지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뭔가 함께 하는 활동이나 놀이나 산책을 생각해 내는 것. 그렇게 한번 해 보면,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고 고마워하는지 보게 될 것.
그러면서도 아이가 (이미 웬만큼 습관이 되어 여전히) 말을 안 듣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시기에는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놔두는 것이 최선이다. 얼마 지나면, 불순종이나 어깃장 놓는 방식이 먹혀들지 않음을 아이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할 필요성 자체가 부모의 긍정적인 관심 덕분에 사라지고 만다.
참고: "그냥 한번 해 보시라!..“ 아이들에겐 더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있다. 정말 그런지 살펴보자. ‘나사 조이기’ 방법이 규율을 달성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나?
한 실험에서 유치원 상급반 아이들에게 아주 멋있고 값비싼 로봇을 리모컨과 함께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른이 같이 있지 않을 때는 이 로봇을 가지고 놀지 말라고 했다. 이 '금지'를 아이들 절반에게는 1) 아주 엄격하고 단호한 말투로 전달하면서 어길 경우 큰 벌이 따를 것이라고 당조짐했다. 다른 절반 아이들에게는 2) 역시 아주 분명하지만 그래도 더 부드러운 말투로 금지했다.
두 그룹의 아이들이 요구에 순종하여 교사가 없을 때는 로봇에 다가가지 않았다.
몇 주일 지난 뒤 같은 아이들이 그 로봇이 있는 방에서 놀게 됐다. 이번엔 교사가 다른 사람으로서, 이전의 금지 사항을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 교사가 아이들만 놀게 하고는 곧 방을 나갔다. 이제 아이들은 로봇을 어떻게 할까? 이것이 심리학자들의 관심사였다.
알고 보니... 어길 경우 벌을 주겠다는 위협과 함께 아주 엄중한 금지를 지시받았던 첫 번째 그룹의 아이들 18명 가운데 14명이 교사가 나가자마자 로봇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부드러운 말투로 금지 지시를 받았던 두 번째 그룹의 아이들은 2/3가 교사가 자리를 뜬 뒤에도 이전처럼 로봇에 다가가지 않았다.
이 차이를 심리학자들은... 두 번째 그룹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이 없을 때) 로봇 장난감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한다. 어른이 곁에 없을 때는 로봇을 갖고 놀지 말라는 교사의 '외적 요구'가 그 부드러운 말투 덕분에 아이들의 '내적 행동 규칙'이 되었다. 스스로 만든 이 '내적 행동 규칙'을 그 아이들은 금지 지시가 따로 없었던 두 번째 경우에서도 준수한 것이다.
이 실험과 또 다른 많은 비슷한 실험에서 도출된 실제 결론은... 우리가 아이에게 규율과 규율 준수를 심어주고 싶어 한다면, 아이가 옳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아이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몫을 느낄 만큼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규칙 세우는 데 함께 참여하게 하고, 규칙을 실행함에 아이의 '내적 동의'를 구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규율 문제에서도 <근접 발달 영역> 법칙의 놀라운 힘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3과 참조).
다그치고 닦달하고 위협하는 <나사 조이기> 전략은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아주 많다. 아이들이 반항하고, 이런저런 규칙이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2. 부모 자녀 간 갈등의 원천이 아이의 독자성과 자기주장, 자기 확인을 위한 투쟁이라면, (1번 경우와 달리) 외려 아이의 일에 부모의 통제나 간섭, 참견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얘기했다시피, 스스로 결정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 아이들한테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 결정으로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렇다!
자녀와 좋은 관계를 세우는 과도기에는 당신 보기에 아이가 실행하지 못할 요구를 삼가라. 이와 반대로 <매칭>이라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좋은데, 이건 아이가 도달한 결론이나 내린 결정에 당신이 가타부타하지 않고 그걸 실행하는 구체적인 조건을 아이와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불필요한 지시와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의 고집과 방자함이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요청 형식이지만 “이제라도 내 생각과 뜻에 따라 살게 해 주세요” 하는 요청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3. 만약 당신이 아이한테 모욕감을 느낀다면, 이런 점들을 자문할 필요가 있다.
'아이가 왜 나에게 모욕감을 안기게 됐나? 아이의 아픔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아이한테 상처를 주었나, 혹은 늘 아프게 하나?'
그런 자문에 답이 나왔다면, 원인을 알고 나면, 물론 그걸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지.
4. 부모는 아이를 포기하고 아이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가장 힘든 상황이다.
이런 경우 부모의 현명한 행동은...
그동안 아이에게 걸고 있던 기대를 일단은 접는 것.
부모 자신의 기대와 주장을 제로로 만들 필요가 있다. 당신 아이는 분명 뭔가를 할 수 있고 뭔가에는 심지어 아주 뛰어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당신에게 보이는 아이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믿지 못하는 모습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수준의 과제를 찾으라. 이것을 교두보 삼아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일이나 활동을 조만들라. 아이는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때 아이에게 그 어떤 지적이나 비판을 가하면 안 돼!
무엇이든 아이를 격려할 계기를 찾아내라. 아주 작은 것부터 무엇이든 아이가 잘 해낸 것을 알아주라.
아이를 잘 보살펴 의기소침과 자포자기 상태에서 벗어나게 도우라. 유치원과 학교의 교사들과 아이에 관해 얘기 나누고 그들을 동맹자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작은 것들에서 성공을 거둔 아이는 곧 고무되어 힘을 낼 것이다.
결론에 이르러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한다.
가정에서 평화와 규율을 세우려는 노력이 단번에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멀고 힘든 길이 예정돼 있으며, 이 길은 당신에게 적잖은 인내를 요구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얘기를 통해 당신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짜증, 분노, 모욕감, 실망 등을) 건설적 행동으로 돌리는 데 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맞아,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를 바꾸기 전에, 바꾸는 대신) 자신을 바꿔야 할 것이다. 당신에게 이른바 '문제아'가 있고 다루기 힘든 아이가 있다면, 이것이 아이를 바로잡는 유일한 길이다.
마지막으로 알아둬야 할 아주 중요한 것 하나. 관계를 개선하려는 당신의 시도 초기에 아이가 나쁜 행동이나 '못된' 짓을 더 키울 수 있다는 점! 아이는 당신 의도의 진정성을 단번에 믿지 못하고, 확인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이 중대한 시험을 견뎌내야 한다.
어쨌든 그런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처벌을 적용할 때 아주 중요한 법칙 하나를 견지하는 게 좋다.
법칙 6. 아이를 나쁘게 만들면서 벌하기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벌하는 게 더 낫다.
달리 말해, 제로에서 마이너스로 가기보다 플러스에서 제로로 향하면서 벌하는 게 더 낫다. 여기서 제로는 부모와 자녀 두 사람의 중립적이고 평탄한 관계를 뜻한다.
그럼, 플러스는 무슨 뜻?
예를 들어, 일요일마다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낚시에 가기, 혹은 엄마가 맛있는 과자를 구워 주거나 다 함께 산책하러 나가기 등이 이 가족의 일이다. 아이들은 그런 가족 행사를 대체로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부모가 아이에게 각별한 관심을 돌리고 아이와 함께 흥미로운 시간을 보낸다면... 이건 아이에겐 진짜 축제이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 말을 안 듣거나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날이나 그 주간에 이 ‘축제’는 취소된다.
"아, 그걸 어떻게 처벌이라 할 수 있나?" 의문을 품게 되나?
하지만 이건 아이한테 상당히 뼈저린 처벌이다! 더욱이 아이 마음에 상처를 주지도 않고 아이를 비하하지도 않는 처벌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아이들은 어떤 것이 공정한지 아닌지를 잘 느낀다. 부모가 속상하거나 화가 났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내주지 않을 때, 이건 공정하다고 인정한다.
한데 만약 부모가 늘 바쁘고 모든 양육이 요구와 지적과 ‘마이너스’ 처벌로 국한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이런 경우 통상 규율 확립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부모를 경원시하며 겉으로 맴돌 수 있다는 점. 그러면서 상호 불만이 생겨 쌓이고 결국 부모와 자녀가 갈라지게 된다.
실질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이미 짐작했을 터인데, 가능한 한 크고 작은 축제를 자꾸 만들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낼 필요가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활동이나 작업, 즐거움이 생기는 가족 행사 등을 궁리하라.
개중 몇 가지를 정기적으로 실행하면서, 아이가 그걸 기다리고,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 행사를 꼭 치르게 된다고 알게 하라.
아이가 정말 말을 안 듣거나 못된 짓을 저질러 당신 속을 뒤집는 경우에만 그 이벤트를 취소하라.
하지만 자잘한 것들로 행사를 (이벤트, 축제를) 취소한다고 위협하지는 말라.
아이와 함께 하는 즐거움의 영역은 당신 삶의 ‘황금 펀드’이다.
그건 동시에 아이의 근접 발달 영역이며, 아이와 당신의 우의적 소통의 기반이요 갈등 없는 규율의 담보이다.
* * *
이제 우리에겐 가장 어려운 경우들을 얘기하는 것만 남았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다룰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아이가 말을 안 듣고 규율 때문에 일어나는 충돌이 예외보다는 더 자주 일어나는 경우 말이다. 십대 아이들이 상대하기 더 ‘힘든’ 법이지만, 연령대와 무관하게 아이들이 다 그럴 수 있다.
기펜레이터 여사는, 아이와 소통이 기쁨보다 걱정과 비탄을 더 안기고 나아가 소통 절벽에 이르렀다 해도 낙담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특별한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부모나 교사들도 다 알지는 못하는 것 한 가지를 공유하고 싶다.
말 안 듣는 아이들, 이른바 ‘불량한’ 아이들을 흔히 비난한다. 그들에게서 악의적인 의도나 나쁜 유전자 등을 찾는다.
실제로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나쁜’ 아이들이 아니라 특히 민감하고 상처받기 쉬운 아이들이다. 그들은 더 안정적인 아이들보다 삶의 부담과 힘겨움에 훨씬 더 일찍 강하게 반응하면서 이른바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다.
이런 면을 생각하면 여기서 나오는 결론도 확실하다.
즉, 소위 ‘문제아’라는 아이들에겐 오로지 도움만 필요할 뿐, 어떤 경우에도 비난과 처벌은 필요가 없다.
아이가 한사코 말 안 듣는 원인을 아이의 심리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 아이가 ‘그냥 말을 안 듣거나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것 등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며,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체로 이성적인 게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다. 게다가 이 원인을 어른도 아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인을 알아야 하며, 이제 우리는 그걸 다룰 것이다.
* * *
아이들이 비뚤어진 행동을 보이는 주요 원인 네 가지를 심리학자들이 밝혀냈다.
1) 첫째 원인 – 관심 끌기 위한 투쟁
만약 아이가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감정적으로 평온해질 만큼 (이에 관해 우린 이미 많이 얘기했어) 관심을 얻지 못하면, 아이는 나름대로 그것을 얻을 방법을 찾는다. 바로, 부모의 말을 안 듣기. 불순종.
그러면 부모는 자기가 하던 일을 잠시 그만두고 지적을 퍼부어… 이것이 아이한테 기분 좋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부모의 관심은 얻었다! 관심과 눈길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런 것이라도 있으면 더 좋아.
2) 둘째 원인 – 부모의 지나친 파워와 간섭에 맞서서 자기주장과 독자성을 위한 투쟁
세 살쯤에 아이에겐 뭔가를 ‘스스로 직접’ 하려는 욕구가 아주 커지는데, 이것이 유년기 내내 간직되며 십대에 이르러 특히 두드러진다. 이 욕구와 갈망의 침해나 손상에 아이들은 아주 민감하다. 그러나 부모가 지시나 지적, 의구심 등을 주로 표명할 때 아이들은 특히 더 힘들어한다. 부모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올바른 습관을 들이고 규율을 가르치고 실수를 경고하면서 교육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교육은 정말 필요해, 한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적과 잔소리, 충고가 지나치게 잦으면, 지시와 비판이 지나치게 격하면, 염려가 지나치게 과장되면... 아이가 들고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이는 양육자를 상대로 완강하게 고집부리고 제멋대로 굴고 어깃장을 놓는다. 아이로서는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자기 일을 자신이 결정할 권리를 지키고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임을 내보이는 것. 아이의 결정이 때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잘못된 것이라 해도,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대신 그게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는 점, 이게 중요해!
3) 셋째 원인 – 보복하고 싶은 마음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주 삐친다.
원인은 매우 다양할 수 있어. 부모가 동생에게 더 관심 보인다, 엄마가 아빠와 헤어졌다, 집에 계부가 나타났다, 아이를 가족과 떼어놓았다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할머니한테 보내), 부모가 늘 싸워…
개인적인 이유로 삐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날카로운 지적, 지키지 않은 약속, 불공정한 처벌. 그러면 또 마음속 깊이 아이는 불안하고 고통을 겪는데,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반항, 말 안 듣기, 학교생활 부적응 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이가 하는 ‘나쁜’ 행동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당신들이 나한테 나쁘게 했어, 그러니까 당신들도 나쁘게 당해 봐!..”
4) 끝으로 네 번째 원인은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 상실
아이가 어떤 한 생활 영역에서 문제를 겪는데, 전혀 다른 영역에서 실패하거나 낭패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학급에서 다른 아이들과 관계가 안 좋을 수 있는데, 그 결과 수업을 빼먹는 것. 또는 학교에서 원만치 못한 생활함이 집에서 반항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아이의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쓰라린 실패 경험과 자신에 대한 비판을 쌓으면서 아이는 자신감을 아예 잃는다. 그리고는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어, 그래봤자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거야’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건 마음가짐에서 그렇고, 외적 행동으로 내보이는 것은 “어차피 나한텐 똑같아”, “나쁘게 되라고 해”, “난 나빠질 거야!” 같은 외침이다.
이른바 ‘다루기 힘든’ 아이들의 갈망이 아주 긍정적이고 온당하며, 그들은 부모의 따스함과 관심을 자연스레 요구하며 자기 인격을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어 하며 공정함과 성공을 갈망한다. 그렇지 않은가?
소위 ‘문제아’라 불리는 아이들의 재앙은
1) 이 갈망이 실현되지 못하고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서 날카롭게 고통받고
2) 이 결핍을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는 방법들로 채우려고 시도하면서 고통받는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왜 그렇게 ‘비합리적’인가?
왜냐하면, 그걸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이들의 크게 비뚤어진 행동은 전부 도와 달라는 신호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한테 “난 힘들어! 안 좋아! 날 좀 도와줘요!” 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때 부모가 아이를 도울 수 있을까? 실제에서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단지, 그러려면 아이가 말을 안 듣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네 가지 감정적 문제 가운데 어떤 것이 아이가 정상적으로 존재하기를 방해하는지 밝혀내고, 그에 걸맞게 부모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원인을 알아내기가 얼핏 보기엔 간단치 않다. 사실 여러 원인이 밖으로야 똑같이 드러나지 않는가. 예를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부모의 관심 끌려는 욕구와도, 남의 의지에 매이지 않겠다는 갈망과도, 부모에게 ‘보복하려는’ 시도와도, 또 자기 힘의 믿음 상실과도 다 관련되지 않는가.
* * *
그럼에도 말을 안 듣고 나쁘게 행동하는 진짜 원인을 알아내기란 상당히 간단하다. 이 방법이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부모가 자기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엄마 말이 다르고 아빠 말이 다르고, 때론 할머니 말이 다른 경우가 잦은가? 이런 식이다.
순이에게 예쁜 구두를 새로 사 주었더니, 다음 날 아침 그걸 신고 유치원에 가고 싶어 한다. 순이: 새 구두를 신을래요. 엄마: 아니야, 그건 특별한 날이나 손님으로 갈 때 신으려고 산 거야. 순이: 싫어, 오늘 신고 싶단 말이야! (징징대기 시작해.) 아빠: 걱정 마라,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내에게) 오늘 하루만 신게 하면 안 될까? 엄마: 아니, 안 돼요. 아이들은 값비싼 물건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아야 돼! 순이 (눈물을 더 흘리면서): 그럼, 유치원에 안 갈래! (이때 나타난) 할머니: 또 뭔 일이여? 아침부터 애를 울리고 그래?! 얘야, 이리 오렴, 왜 속이 상한 거니. 아, 구두 때문에? 내가 오늘 다른 걸 사줄 테니, 신고 싶을 때마다 그걸 신어라.
이런 경우 아이가 규칙을 습득하고 규율에 적응하기 어렵다.
아이는 어른들 의견을 갈라놓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얻는 데 익숙해진다.
그 결과 집안에서 어른들 간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게 된다.
아이를 앞에 두고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쪽의 요구와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엔 침묵했다가 나중에 아이가 없을 때 이견을 의논하고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좋다.
규칙을 일관성 있게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만약 9시에 잠자리에 드는 아이를 이틀 연달아 9시가 아니라 10시에 잠자게 했다면, 셋째 날에는 제 시각에 재우기 힘들 것이다. 아이가 "어제 그제는 10시에 자도 좋다고 허락했잖아요" 하고 이의를 제기할 게 분명하다.
아이들은 부모의 어떤 요구가 얼마나 확실한지 늘 시험하면서 정말 확고부동한 것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점을 간과하면, 아이가 고집부리고 징징대며 떼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법칙 5. 요구나 금지를 전하는 말투는 명령조가 아니라
친근하고 설명하는 식이어야 한다.
부모가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할 때 아이는 대체로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한데, 그 금지가 짜증 묻어 있거나 고압적인 어조로 나온다면, 부모 요구대로 하기가 아이에겐 두 배로 어려워진다.
우리가 앞에서 알게 된 것을 상기하자면,
“왜 안 돼요?” 하고 묻는 아이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렇게 해야 되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같은 대답은 삼가야 한다.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미 늦었어”, “이건 위험해”, “깨지기 쉬우니까…" etc.
설명은 간략하게 한 번만 해야 한다.
아이가 또 “왜?” 하고 묻는다면, 이건 아이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금하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을 금방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당신이 예를 들면 <적극적 듣기> 같은 방법을 이미 습득하고 훈련했다는 것이 도움 된다.
지시나 명령조, (부정적인) <너-메시지>는 아이의 반항을 키울 뿐이다.
부모인 당신이 규칙을 얘기할 때는 무인칭 형식으로 말하는 게 더 좋다. 이를테면...
“라이터를 갖고 놀면 안 돼” 대신 “아이들은 라이터를 갖고 놀지 않는단다.” “당장 초콜릿을 제 자리에 갖다 놔!” 대신 “초콜릿은 대개 식사 후에 먹는다.” “고양이를 못살게 굴지 마라!” 대신 “고양이 꼬리는 잡아당기라고 있는 게 아니란다.”
같은 상황에서 엄마와 자녀들의 대화 형식 두 가지를 보자. 전자는 실패, 후자는 성공적인 대화가 됐다.
아이들이 놀이에 정신 팔려 있다. 엄마: 됐어, 이제 그만 끝내라! (지시) 아들: 네? 왜 그만둬야지요? 엄마: 왜 그런지 잘 알잖아. 너희가 잠잘 시간이야. (<너-메시지> 형식의 지시) 딸: 어, 벌써 자야 돼요? 엄마: 그래, 이미 시간 됐어! 딴 소리 하지 마라! (지시) (놀이를 중단시키고, 아이들은 기분 상하고 화가 난다.)
엄마의 첫마디부터 다르게 대화한다면 훨씬 더 좋다.
엄마: 얘들아, 이제 그만 끝낼 시간이 됐다. (무인칭 형식) 아들: 네? 왜 그만둬야지요? 엄마: 자러 갈 시간이야. (무인칭 형식) 딸: 어, 벌써 자야 돼요? 엄마: 놀이가 재미있어서 그만두기 힘든 것 같구나. (적극적 듣기) 딸: 네, 아주 재미있어! 봐요, 이제 금방… 5분이면 끝날 거야! 엄마: 좋아, 5분은 길지 않으니까, 약속한 거야. 아이들: 네, 네. 끝내고 우리가 다 치울게요.
보다시피, 여기서 엄마는 다정한 말투를 취하면서 아이들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했다. 이 때문에 규율이 흔들리지 않았다. 외려 아이들이 놀이 뒤 정리할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부모의 요구를 아이가 즉각 전적으로 실행하기 힘들어할 것을 예견하여, 그 요구 사항을 아이와 미리 의논하면 아주 좋다. 예를 들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영화가 늦은 시간에 끝나는데 아이가 시작 부분이라도 꼭 봐야겠다고 한다면, 중간에 그만 보게 될 것이라고 미리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경고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선택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잠자기 전에 재미난 놀이를 하기 혹은 책을 읽어 주기. 그래도 아이가 ‘미련 버리지 못한, 힘든’ 버전을 택하면, 합의를 실행하고 아이가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합의 사항을 지정된 시간 5분 전에 아이한테 부드럽게 상기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조건을 지키도록 돕는 '조력자'가 된다. 시간이 다 되어 불시에 재촉하고 닦달하는 ‘경찰’이 아니라. 그러면 아이는 갈등 없는 규율의 경험을 작게나마 또 얻는 것이다.
* * *
규율에 관한 얘기는 처벌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즉, 여러 규칙에 관한 법칙 5가지와 또 앞의 여덟 수업에서 알아보고 습득한 것을 전부 준수할 때, 자녀가 말을 안 듣는 경우가 (아예 없어지진 않는다 해도) 몇 배는 줄어들 것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명백히 나쁜 행동에 당신이 반응하게 될 순간이 닥칠 수 있다.
체벌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나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반대한다.
체벌을 받은 아이들은 겁먹고 적개심을 품게 되며 수치심을 겪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는 적고 부정적인 후과가 더 크게 마련이다.
부정적인 후과 없이 신체에 작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황하고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억제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열세 살 된 존이 집 옆에 세워둔 자동차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호기심에 시동을 걸었다. 드라이브 상태로 있던 자동차가 (아이는 이걸 못 봤어) 급격히 움직이면서 울타리를 부수고 나무에 충돌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기겁하여 차에서 나와 집으로 뛰어들었다. “큰일 났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동생이 이 광경을 창문 너머로 보고는 들어오는 오빠에게 뭐라고 쓴소리를 하자, 오빠가 그냥 밀치는 바람에 넘어졌다.
딸의 비명에 엄마가 나타났다. 아들의 상태를 보더니 손을 잡아 얼른 소파에 앉혔다.
– 이거 놔요. - 존이 자기 손을 잡아 뺐다.
– 아니야. -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 네가 진정될 때까지 너를 꼭 붙잡고 있겠어.
– 싫어, 놔 줘요. – 존이 버텼다. - 이럴 수 없어! 이건 폭력이에요!
– 아니야, 존 – 엄마가 아이를 계속 붙잡은 채 차분하면서도 귀에 와닿게 말했다. - 지금 널 놓아줄 수 없단다. 네가 자신을 통제하게 되면 놔주겠어. 한데 넌 지금 그럴 수 없잖니.
– 하지만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엄만 몰라! (그때 엄마는 주변에서 오가는 짤막한 얘기들을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 안다, 얘야. 네가 자동차로 울타리를 부수고 나무에 들이박았어. 그러나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지금 중요한 것은 네가 진정하는 거야. 난 너를 벌하지 않을 거야, 네가 마음을 추스르도록 도울 거야. 네가 진정되면, 그때 자동차 얘기를 하자.
그 사건을 나는 긴박한 상황에서 엄마가 지혜롭고 품위 있게 십대 아들을 대하는 교훈으로 기억해 왔다. 혹시 누군가는 "잘못했으면 벌을 줘야 하는데, 여기엔 처벌이 전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소개한 장면에서는 부모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처벌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십대 아이는 일어난 사건에 의해 이미 벌을 받은 셈이고, 엄마는 아들이 그 교훈에서 뭔가 얻도록 돕는 것을 자기 역할이라고 본 것이다.
자, 우리는 아이가 저지른 부정적 결과에 관한 문제에 다시 부닥쳤다.
그런 것을 허용해도 되나? 허용하면 안 되나?
저 앞의 레슨에서 우리는 아이가 이런저런 실수를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게끔허용할 가치가 있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제 거기에 덧붙일 수 있어. 아이가 규율 존중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도 뭔가 실수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다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 * *
부모나 인생 선배, 선생 등의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후과는 그 자체가 삶에서 나오는 징벌의 한 형태이다. 게다가 그런 경우 아이는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후과가 소중한 징벌이기도 하다.
고양이 발톱에 심하게 긁힌 아이나 공부하지 않은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은 학생은 그 후과로 인해/덕분에 어쩌면 부모가 하는 요구의 중요성과 생생한 필요성을 처음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아, 그 말씀이 옳았어!'
그런 경험 하나가 말로 하는 열두 가지 지시나 훈계보다 더 값지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가 갈 수 있는 곳 어디나 다 쫓아다니면서 자리를 깔아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대신 나중에 아이가 실패할 때 적극 도울 수 있다.
여기서 <적극적 듣기>가 꼭 필요하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 방법은 아이가 어떤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돕는다.
아이가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 했을 때 부모로서
"내가 진작 너한테 경고했지…", "엄마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런 거야, 다 네 탓이다"
같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인 경우가 더러 있다 하더라도,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까닭은...
1) 아이는 부모의 경고를 잘 기억하며
2) 아이는 지금 속상하고 풀이 죽어서 어떤 합리적인 지적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3) 자기 실수를 인정하기 힘들고, 당신의 (올바른) 지적이나 핀잔에 덤벼들 준비가 돼 있으니까.
(인생 자체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징벌보다) 두 번째 처벌 유형이 더 익숙한데, 이건 부모한테서 나온다.
“네가 만약 …하면/이면, … 될 거야”
같은 경고에서 시작되어 경고 약속의 집행으로 끝난다. 예를 들어...
“계속 그렇게 버릇없이 굴면, 너를 방구석에 세워 놓겠어.”
"네 방을 청소하지 않으면, 놀러 나갈 생각도 하지 마라."
이런 처벌은 불복종의 조건부 후과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건 아이 행동에서 자연스레 비롯되는 게 아니라 부모의 재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까.
* * *
불복종의 조건부 후과 같은 것에 어떻게 대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처벌을 적용할 때 아주 중요한 법칙 하나를 견지하는 게 좋다.
법칙 6. 아이를 나쁘게 만들면서 벌하기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으면서 벌하는 게 더 낫다.
달리 말해, 제로에서 마이너스로 가기보다 플러스에서 제로로 향하면서 벌하는 게 더 낫다. 여기서 제로는 부모와 자녀 두 사람의 중립적이고 평탄한 관계를 뜻한다.
앞의 여러 레슨에서 우리는 아이들의 감정과 심적 체험에 대해, 또 아이들 말을 듣고 경청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이쯤에서 부모들에게 이런 답답함이나 조급함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규율과 순종에 관해서는 언제 얘기하지? 사실, 아이들이 따라야 하는 규칙들이 있고, 부모의 요구 가운데 어떤 것은 군소리 없이 무조건 실행해야 하는 것도 있는데 말이야!”
기펜레이터 여사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규칙들과 요구가 당연히 있고 이제 그걸 거론할 시간이 됐다고 말한다.
“근데 왜 하필 지금에 와서야 거론하나?”
여기엔 확실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
즉, 아이의 감정과 심적 체험, 관심사와 요구를, 또 자기 자신의 그런 면들을 고려할 줄 모른다면 부모가 규율을 세우기는 어렵다. 앞에서 여러 수업을 거치면서 우리에겐 소통에 관해 새로운 지식과 솜씨라는 중요한 토대가 생겼다.
그것을 우리는 이번 단원에서 여러 차례 이용할 것이다.
일부 부모들에겐 예상치 못한 것일 수 있는 하나의 ‘비밀’로 시작하겠다.
아이들에겐 질서와 행동 규칙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그것을 원하고 기다린다는 점!
이것이 아이들 생활을 이해되고 예견되게 만들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만든다.
집을 떠나 어딘가 낯선 곳에 몇 시간 있게 된 젖먹이가 불안하여 보채고 예민하게 굴다가 집으로 돌아와 익숙한 상황에 들어서면 차분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보다도 더 질서에 충실히 따를 자세가 돼 있다.
기펜레이터 여사가 언젠가 목격한 장면이 감동적이었다면서 소개한다.
한 엄마가 두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 현관을 나선 뒤 엄마가 열린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몇 발짝 걷다가 어린애가 뭔가 염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는 엄마 손에서 제 손을 뺀 뒤 앙기작거리며 현관문으로 다가가더니 제 딴엔 힘을 들여 문을 닫았다.
아이의 얼굴에 안도의 빛 같은 것이 서렸다. 질서가 복구된 것이다. 그 순간 내가 보니까, 엄마 얼굴엔 당혹스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아이들의 건강한 ‘보수주의’를 엿볼 수 있는 다른 사례나 익숙한 것을 되풀이하려는 아이들의 갈망을 물론 다들 접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엄마가 취학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동화를 들려주는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어떤 책이나 동화에 아이가 전혀 싫증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는 그것을 다 외울 정도로 알고 있다 해도 듣고 또 들을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텍스트에서 뭔가를 바꾸려고 해 보라. 곧장 항의나 반박이 튀어나올 것이다.
“아니야, 엄마, 여길 빼먹었어. 건너뛰었어.”
“아니, 그 사람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말했는데…”
기펜레이터 여사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우를 소개하면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 때 아이가 얼마나 흔들리고 심지어 놀라기까지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언젠가 세 살 된 여자애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아이 부모는 나와 가까운 친구인데, 정말 오랜만에 둘이 연극을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 이전에 난 그 아이를 자주 보진 않았지만, 아이가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는 나의 ‘심리학적 능력’을 고려했고, 나도 사실은 그랬다.
“자, 뭔가 놀이를 하자꾸나. 예를 들어 집짓기를 해볼까!” 하고 내가 제안했다. 내 어린 시절 기억과 다른 아이들 노는 걸 관찰할 결과 나는 그 놀이를 아이가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걸 어떻게 해요?” 아이가 수줍게 물었다.
그래서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시범 보였다. 의자 몇 개를 옮겨 한데 모으고 위에 이불을 씌웠다. 그 ‘집’ 안에 책상 램프를 또 놓으려고 했다.
이때 아이의 울음 섞인 고함이 날카롭게 들렸다. “물건들을 다 당장 제자리에 둬!” 소리치는 아이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 부모는 집에서 그런 무질서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가 “안 돼” 하면서 뭔가를 금지할 때 그 이면에 자녀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느낀다. 한 소년은 부모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왜냐하면 다른 집에서 다른 애들한테는 흔히 금지되는 것까지 포함하여 자기한테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허용하니까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부모는 나한테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모양이에요.” 소년은 우울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약 주어진 질서와 일정한 행동 규칙 속에서 더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느낀다면, 그럼에도 왜 아이들은 이 질서와 규칙을 깨려고 드는 건가?
이런 모습을 부모들과 양육자들, 교사들은 어째서 늘 발견하며 불평을 하는 건가?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 많은 이유를 우리는 이 레슨의 끝에 가서 얘기 나누고, 지금은 이것 하나만 알아두자. 즉...
아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규칙을 '주입하는’ 방법이라는 점! (귀에 익숙한 이 단어가 이미 강제성을 가리키지 않는가).
그런 까닭에 우리의 의문을 달리 요약해 보자.
저항과 충돌 없이 아이가 따르고 지킬 수 있는 규율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그런 규율을 모든 부모가 꿈꾸고 있을 것이다. 이건 물론 아이들 키우는 데 가장 어렵고 섬세한 과제이다. 이 과제를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아이가 내적으로 차분하게 집중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랄지 여부가 결정된다.
* * *
가정에서 충돌 없는 규율을 세우고 유지하게 돕는 법칙이 몇 가지 있다. 이건 규칙들에 관한 법칙 같은 것이라 하겠다.
법칙 1 - (제한, 요구, 금지 등의) 규정은 모든 아이의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건 아이들을 가장 덜 화나게 하고 아이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부심하는 부모들이 기억하면 특히 유용하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아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게 된다. 이건 허용되는 양육 스타일. 그 후과를 우리는 앞 단원에서 논의했다.
문: 우리 가정에서는 자녀와 갈등을 해소하는 데 비생산적인 방법 2가지만 주로 이용해 왔다. 건설적인 방법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답: 가족이 차분한 환경에서 다 함께 모여 대화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서로의 생각과 요구와 주장을 조율하고 ‘합의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하, 이 방법대로 같이 해보자고 이끌라. 어른들은 아이가 하는 말을 정말 잘 들어보겠다고 마음가짐을 분명히 갖춰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당신의 주된 도구요 조력자는 바로 <적극적 듣기>이다.
문: 부모의 권위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답: 권위와 권위주의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이야기해 보자.
파워를 지향하고 힘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종속시키려는 사람을 권위주의자 혹은 독재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권위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능력이나 공정성 등 개인적 자질을 인정함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어린애한테 부모란... 아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어린애 눈에 아빠는... 가장 강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공정한 사람이며, 엄마는 가장 예쁘고 가장 다정하고 가장 멋진 사람이다. 부모들이 아이한테 이런 권위를 지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어른인데, 아이는 아직 작고 어리고 능력 없고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권위가 생후 처음 몇 해 아이에게 아주 많은 것을 준다. 아이는 행동거지, 말투, 입맛, 관점, 가치관, 도덕규범 등 모든 것을 부모한테서 무의식적으로 흡수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힘의 균형이 달라진다. 아이들과 부모들의 가능성이나 능력이 필연적으로 균등해진다. 아들이 처리하는 과제를 어떻게 하는지 이젠 아빠가 모를 수 있고, 엄마가 딸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할 수가 있다.
먼저 인생을 살고 여러 경험을 거쳤기 때문에 형성된, 부모의 권위가 토대를 잃게 될 때 위기 순간이 찾아든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
부모들은 합당한 권위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극적인 선택에 직면한다.
권위주의의 길은 완전히 막다른 길이다. 무조건적인 복종과 처벌 위협으로 꾸려 오던 파워가 작동하기를 멈춘다. 아이가 조만간 자신의 독자성을, 자신의 욕구와 목적 실현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면서 젊은 에너지를 다 동원하여 싸운다. 부모 자식 간에 간혹 노골적인 전쟁에 이르기도 한다. 이 길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되돌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느낌.
우리가 보기에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어떤 선택이냐고?
아이를 윽박지르고 억누르는 방법은 희망이 없고 조만간 관계 결렬로 이어진다. 만약 금지와 압박, 지시에 의존하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하는 어른은 (아이가 어렸을 때 누리던) 권위를 잃는다. 만약 힘과 연륜의 모델로 남는다면... 그러나 지시하는 힘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 또 기계적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지혜로운 행동으로 이뤄지는 연륜의 모델로 남는다면... 그 어른은 권위를 계속 유지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본 방법은 당신과 자녀가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지혜를 드러내게 돕는 동시에, 당신을 권위주의라는 위험한 굴레에 빠지지 않게 한다.
문: 갈등의 건설적 해결 과정에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것은 아닌가?
답: 사실 여기서는 ‘군대식으로’, 명령 하나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10분이든 때론 30분이든 시간을 들여야 된다. 그러나...
1) 이 시간이 공연히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얻는 시간임을 알도록 하라. 아이들과 온 가족이 이 시간에 소중한 소통의 경험을 얻는다.
2)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건 언제고 (다시) 불거질 것이다. 그때 결실 없는 입씨름과 언쟁에 들어가는 시간은 그 합리적 해결에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3) 많은 부모들이 주목하는 사실이 있다. 즉, 올바른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이 갈수록 줄어들고 더 빨리 해결되기 시작한다.
문: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답: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할까 하는 우려는 대체로 확인된 바 없다. 이런 우려가 생기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다. ‘낫이 돌에 부닥치는’ 것을 외부에서 관찰한다면 걱정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 방법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관심사를 전제하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려고 서로 자극 받으며 창의성을 발휘하려 든다.
문: 아이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자기주장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하나? 그래도 끝까지 함께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나?
답: 아이의 생명이 당신 행동의 긴급성에 달려 있다면, 당연히 반박을 허용하지 말고 강력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위험을 예방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지시와 금지는 적합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물음을 두고 종종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즉, "안 돼" 하고 금지해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뜨거운 촛불로 자꾸 손을 뻗는다면, 어떡해야 하나? 어떤 부모들은 억지로라도 손을 못 뻗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또 어떤 부모들은 정 그렇다면 아이가 뜨거운 맛을 좀 보도록 놔둬야 한다고 여긴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 아이가 더 커갈수록, 어떤 (특히 쓰라린) 경험을 얻는 데 드는 대가가 더 비싸게 먹힌다는 점은 분명한 듯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여기에 보편적인 답은 물론 없다. 그러나 아이를 당장의 위험에서 든든히 보호하는 바람에 우리는 어쩌면 아이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기억하자. 무슨 소리냐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이가 자기 행동에 책임질 기회를 빼앗는 셈이니까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갈등의 해결책을 아이와 함께 건설적으로 이끌어내서 잘 실천한다면, 그 자체로 아이한테는 경계심과 조심성을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문: 아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달아오르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답: 아이들이 서로 고함 지르면서 다툴 때 부모가 덩달아 “당장 그만두지 못해?!”, “둘 다 이제 따끔하게 혼내야겠어!” 하고 목소리 높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또 대개는 더 어린 아이를 역성들기 쉬운데, 이건 더 나쁠 것이다. 왜냐하면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동생은 버릇이 나빠지고 형이나 언니는 질투와 원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싸우는 경우 대체로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알고 상황을 파악하게끔 놔두는 게 나쁘지 않다. 이런 식으로 <나-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집안에서 그런 고함이 터지는 것을 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이 자기네 일을 스스로 다루고 해결하는 걸 좋아해."
하지만 아이들 갈등 해결에 부모가 중재자로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이때 건설적인 방법이 아주 유용하게 작동한다. 물론 먼저 양측의 얘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는데, 이때 다음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즉, 그 순간 당신이 한 아이의 얘기를 듣고 그 아이의 문제를 당신이 잘 알게 됐음을 그 아이가 감지하게 했다면, 다른 아이한테도 곧 그의 얘기 역시 주의 깊게 들을 것임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하라.
다른 아이는 당신 대화의 톤을 아주 예민하게 살피면서 당신 목소리에 나무라는 기색이 없고 음색이 다정하다면 당신이 자기의 ‘적수’에게 공감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음에 조심하라. 따라서 한 아이의 심적 체험을 경청하면서, 다른 아이에게는 눈길이나 고갯짓, 터치 등으로 “네가 있는 것도 알아, 곧 네 얘기를 주의 깊게 들을 거야” 하는 비언어적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좋다.
아이들과 그런 대화 사례를 살펴보자.
아빠: 얘들아, 내가 지금 욕실을 쓰려고 보니까 정말 어수선해서 기분이 안 좋았다. 수건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욕조도 닦지 않고… (<나-메시지>).
영애: 그건 다 철수가 그런 거야. 얘는 치우고 정리하는 법이 없어요!
철수 (화가 나서): 아니야, 니가 거기다 다 늘어놨잖아!
영애: 아니, 니가 그랬다!
철수: 아니, 너야!
엄마: 이런 장면은 내 마음에 안 든다. (<나-메시지>). 영애야, 네가 쓰고 난 뒤에는 욕실이 깨끗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구나. (적극적 듣기)
영애: 아, 아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철수가 쓰고 난 뒤 같지는 않았어.
철수: 바로 그거야, ‘아주 깨끗하지는 않았다’는 거야!
엄마: 철수야, 이제 네 얘기를 들어보자꾸나. 그러니까 너도 뭔가를 치우지 않았다는 뜻이구나. (계속 적극적 듣기)
영애: 응, 뭔가를 안 치웠을 거야.
엄마 (철수에게): 철수야, 너한테 모든 걸 다 떠넘기면 화가 나겠지. (철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즉, 각자 조금씩 어지럽혔다고 인정한 것으로 난 이해했다. (들은 얘기를 엄마가 요약한다.) 이제 아빠가 욕실 들어가시기에 기분이 안 좋아 (아빠 이야기의 적극적 듣기), 나도 그렇고 (<나-메시지>). 자, 그럼 이제 어떡하지? (서로의 이야기를 다 듣고 열기가 좀 가라앉을 때 핵심 질문).
철수: 각자가 자기 것을 치우게 해요. (엄마는 아이들 중 누군가가 뭔가를 제시하기를 기다렸다.)
엄마: 그러면 널린 양말과 철벅이는 물에 ‘철수’와 ‘영애’ 이름을 붙일까? (유머감각은 상황을 푸는 데 흔히 크게 도움 돼.)
철수 (웃으면서): 아, 그 정도는 아니고.
영애: 내가 바닥과 욕조를 닦겠어, 철수가 나머지를 다 치우라고 하지. (또 하나의 제시).
철수: 좋아, 난 동의해.
엄마: 흠, 이 결정에 다들 만족하는 것 같구나. 그럼, 언제 할래, 지금? 아니면 저녁 먹고 나서? (해결책/결정의 구체화)
철수: 뭐, 지금 당장 하자. (영애가 고개 끄덕인다.) 근데 ‘나머지를 다 치운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엄마: 가서 보자꾸나. (다 함께 간다.) 네가 보기에 여기서 뭘 해야겠니?
철수: 수건, 양말들… 또 비누와 목욕 타월… (해결책의 구체화.)
아이들이 욕실 청소를 금방 마치고 사이좋게 저녁을 먹는다.
자칫 소란을 일으킬 뻔한 사건은 잊히고, 아이들은 갈등을 윈윈으로 해결하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알고 보니, 그 어느 쪽도 졌다는 느낌에 시달릴 필요 없이 양측이 다 승리하는 길이 있다.
이 방법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방법은 두 가지 소통 기법을 기반으로 한다. 적극적 듣기와 <나-메시지>.
그런 만큼 앞의 레슨에서 우리가 다룬 것을 전부 확실히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
갈등이 없고 덜 복잡한 상황에서... 아이의 얘기를 잘 들을 수 있는지, 당신의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부터 한 뒤에 좀 더 복잡한 상황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방법에는 몇 가지 연속적인 단계가 전제된다.
이 단계를 먼저 열거한 뒤, 각 단계를 하나씩 자세히 알아본다.
1. 갈등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기 2. 여러 제안을 취합하기 3. 취합한 제안들을 평가하여 채택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선택 4. 해결책이나 결정을 세부적으로 구체화 5. 결정 사항을 실행하고 확인.
1단계: 갈등 상황 규명
먼저 부모가 아이의 얘기를 듣는다. 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즉, 아이가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지, 아이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등을 알아본다.
부모는 이걸 적극적 듣기 스타일로 수행한다. 즉, 아이의 바람이나 요구, 어려움에 반드시 공명(共鳴)한다. 그 뒤 부모가 (엄마나 아빠가) 자신의 바람이나 요구, 문제를 밝히는데, <나-메시지> 형식을 이용한다.
앞의 사례 가운데 딸에게 식빵 사다 달라는 상황을 다시 보자.
엄마: 영희야, 가게에 가서 식빵 좀 사다 주렴. 손님들이 곧 오는데 내가 할 일이 많구나!
딸: 아, 엄마, 난 지금 동아리에 나가야 돼!
엄마: 모임이 있는데, 늦고 싶지 않구나. (적극적 듣기)
딸: 응, 이제 워밍업이 시작되는데, 그걸 놓치면 안 돼.
엄마: 넌 늦으면 안 되는구나… (적극적 듣기). 한데 나도 지금 힘든 상황이니… 손님들은 이제 막 도착할 텐데, 빵이 없네! (<나-메시지>) 어떡하지? (2단계로 전환.)
다시 강조하건대, 아이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아이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잘 듣고 있음을 아이가 확인하게 되면, 아이는 당신 얘기를 훨씬 더 잘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며 또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어른이 아이의 얘기를 적극적으로 듣기 시작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 경우 자칫 커질 수 있는 충돌의 예리함이 곧 무뎌지는 경우가 많다. 적극적으로 듣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아망'으로 치부하던 것을 부모가 이젠 눈길 돌릴 만한 (아이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며, 이때 비로소 아이와 접촉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새해 전날 아빠와 열네 살 된 아들이 언쟁을 벌였다. 섣달그뭄 저녁이며 겨울방학 일부가 망쳤다.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아빠가 샤워를 하라고 하는데 아들이 거부한 것.
이 충돌을 나중에 얘기하면서 아빠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일이 우리집에서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뭔가가 매끄럽지 못했지요. 글쎄, 내가 지나치게 엄하게 지시를 했나? 아니면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 그렇게 했나? 어떻든 그 다음엔 아이가 안 하겠다고 버티면서 성질도 부렸는데, 내가 보기엔 그게 다 괜한 오기인 듯해서 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를 억지로 욕실에 집어넣고 한 시간 동안 문을 잠갔어요. 아이가 물론 씻긴 했지만, 그 뒤 며칠 동안 우린 서로 소 닭 보듯이 했어요.
자신의 독자성을 지키고자 하는 아들의 갈망을 아빠는 (나중에!) 정확히 짚었다. 그리고 아들의 독자성을 간과하여 불거진 갈등을 (일단은 부모가 이기는)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말았다.
– 그 순간 아들 얘기를 적극적으로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아, 그러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아이가 그렇게 고집 부리지 않았을 테고, 나도 아이를 그다지 심하게 윽박지르지 않았을 거예요.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아이 얘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나서 부모의 바람이나 요구, 문제를 아이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부모가 처한 상황과 겪고 있는 심적 체험을 아이가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은... 당신이 아이의 그것을 그렇게 하는 것 못지않게 아주 중요하다.
당신의 언급이 <너-메시지>가 아니라 <나-메시지> 형식을 띠었는지 확인해 보라. 예를 들어,
– 집안일을 나 혼자 꾸리기가 힘들고 속상해요. (“남편과 아이들은 모든 걸 나한테 떠넘겼어” 대신)
– 난 그렇게 빨리 걷기 힘들어. (“넌 왜 나보다 한참 앞서 가니, 넌 왜 그렇게 빨리 걷니” 대신).
– 이 프로그램을 난 목이 빠지게 기다렸단다. (“이걸 내가 매일 본다는 걸 넌 모르냐?” 대신).
갈등 상황에서 정확한 <나-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도 중요하다. 즉, 어른은 자신의 어떤 욕구가 아이의 행동이나 갈망 실현 때문에 침해당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철수는 부모가 준 용돈을 착실히 모았고, 이제 그 돈으로 캔디와 우표를 사기로 했다. 하지만 부모는 캔디 대신에 배드민턴 채 같이 다른 물건을 사라고 한다. 아이와 부모가 각각 제 주장을 고집한다. 결국 서로 질책하고 상처 주고 말다툼으로 끝났다.
부모가 옳았을까? 아니다!
물어보자, 철수가 캔디와 우표를 산다고 해서 부모의 어떤 욕구가 침해되나? 아니다!
즉, 갈등의 근거가 전혀 없는데 불필요하게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뭔가를 하려 할 때, 하고 싶어 할 때,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하는 생각에 빠져서 일방적으로 금하거나 반대하는 부모가 상당히 많다. 안 되는 이유를 아이가 묻거나 궁금하게 여기면,
“너한테 일일이 설명할 의무는 없어!”
하고 마무리 짓는다.
한데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 본다면? 그러면...
이 “안 돼” 하는 말 이면에는 부모의 파워를 과시하거나 부모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욕망 이외엔 아무 것도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파워와 권위에 대해서는 잠시 뒤 질의응답에서 얘기 나누고 지금은 이 방법의 여러 단계를 계속 분석하자.
2단계: 여러 제안을 취합하기
이번 단계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된다.
"그럼, 우린 어떡하지?"
"우리가 무엇을 궁리해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런 물음이 나온 뒤 반드시 기다리면서 아이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게 하고, 그다음에 비로소 당신의 버전을 내놓아야 한다. 이때 아이가 내놓은 해결책이 당신에겐 아주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부정하거나 반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일단은 갖가지 제안을 모아 ‘바구니’에 담아 둔다. 제안이 많다면, 기록해도 좋겠다.
우리 세미나에서 한 부인이 들려준 사례.
퇴근하여 집에 와 보니 12세 아들 철수가 친구 영호와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엄마에게 밤 11시에 시작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재미있으니까 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영호의 부모는 아이가 친구 집에서 자는 걸 허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아주 피곤해서 10시에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마침 티브이가 엄마 방에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침에 학교에 가야 하고, 밤 늦은 시간에 티브이를 보느라 생활 리듬을 깨뜨리면 안 될 듯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엄마는 갈등 상황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기로 했다. 아이들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자신의 우려를 얘기하고 나서... “그럼, 어떻게 하지?” 하고 물었다.
두 아이가 해결책을 몇 가지 내놓았다.
1. 영호 집에서 티브이 보게 허락해 달라고 영호 부모에게 부탁하기
2. 함께 티브이를 본 뒤 영호가 집에 가기
3. 엄마와 철수가 방을 바꾸면 아이들이 엄마 방해 안 되게 티브이를 볼 수 있다.
4. 11시까지 같이 놀다가 잠자리에 들기. 영호도 자기 집으로 안 가고 남는다.
엄마의 제안은 이랬다.
5. 아이들이 10시까지 놀다가 함께 잠자리에 든다.
6. 아이들이 영호네 집에 가서 묵는다.
7. 각자 자기 집에서 잔다.
8. 아이들이 10시에 잠자리에 들지만, 엄마가 아이들이 책을 읽게 허락한다.
아이들의 제안 가운데 어떤 것은 (예를 들어, 2번은) 처음부터 엄마가 보기엔 적절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엄마가 그걸 지적하고 싶은 유혹을 꾹 참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제안을 다 모은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3단계: 취합한 제안들을 평가하여 채택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선택
이번 단계에서는 여러 제안을 함께 의논한다. 이때 양측은 상대의 이해관계를 이미 알고 있으며, 앞의 두 단계를 거치는 동안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우리가 살펴보는 사례에서 이 3단계는 이렇게 진행됐다.
1번 제안은... 영호 부모가 반대했기에 저절로 무효가 됐다.
2번 제안은 엄마가 일방적으로 물러서야 하니까 바람직하지 못해.
3번 제안대로 하면 엄마가 아주 불편해진다. 자기 침대에서 자는 데 익숙해졌으니까. 게다가 엄마는 잠들기 전에 책을 읽는 편인데 철수 방에는 스탠드가 없어. 불이 환하게 켜진 전체 조명에서는 엄마한테 두통이 생겨. 곁들여서 철수가 영호에게 말하길, "밤늦게 티브이 앞에 있다 보면 난 잠들 거야."
4번 제안에 엄마가 반대하지 않는다. 철수가 티브이를 자기 방으로 가져오자고 자기 생각을 키운다. 영호가 "그래, 그리고 우린 이어폰을 끼는 거야" 하고 맞장구를 친다.
5번 제안대로 하면, 아이들 뜻이 다 꺾인다.
6번 제안은... 영호가 자기 부모에게 전화해서 물었더니, 엄마가 밤늦게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7번 제안에는 아이들이 불만이다. “우린 함께 있고 싶어요.”
8번 제안에 아이들의 반응. "그렇게 할 수야 있지만, 책을 읽는 대신 철수 방에서 노는 게 더 좋겠어요."
세 사람이 이리저리 의논 끝에 결국 4번 제안이 선택된다.
만약 (이 경우처럼) 최선책 선택 과정에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면 만장일치 채택이 가장 좋다.
이 사례는 이 엄마가 건설적인 갈등 해결 방법을 처음 적용해 본 것인데, 상당히 잘 이끌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 세 사람이 합의한 결정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건 아이들이 늦게 잠자리에 든다는 뜻이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 해결책이 좋은지 여부를 따지지는 말자. 그보다는 이 결정에 이른 과정을 주목하고, 여기서 몇 가지 긍정적인 면을 도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1) 참여자들이 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했음이 보인다. 2) 다들 다른 사람의 제안을 잘 이해했다. 3) 당사자들 간에 짜증이나 서운함이 생기지 않았어. 그 반대로,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됐다. 4) 아이들이 자기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새삼 인식하게 될 기회가 주어졌다. 예를 들어, 알고 보니 둘에게는 티브이 보는 것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끝으로 5) ‘자칫 충돌하고 어느 한쪽의 불만을 일으킬 수 있는, 까다로운’ 문제를 어떻게 함께 해결하는지, 아이들이 아주 잘 배웠다.
이런 상황을 반복하면...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 데 아이들이 익숙해진다는 것을 여러 부모의 실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4단계: 해결책이나 결정을 세부적으로 구체화
이렇게 가정해 보자. 아들이 혼자 일어나고 아침 먹고 학교에 갈 만큼 이미 컸다고 가족이 결정했다. 그러면 엄마가 이른 아침부터 허둥대지 않고 느긋하게 좀 더 잠을 잘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했다고 해서 나머지 다른 일이 다 저절로 이뤄지거나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이에게 자명종 사용법을 가르치고, 음식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어떻게 데워야 하는지 등을 알려줘야 한다.
5단계: 결정 사항을 실행하고 확인
이런 예를 들자. 엄마의 가사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식구들이 집안일을 조금씩 더 많이 나누어 하기로 결정했다. 앞에서 알아본 단계를 다 거쳐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 사항을 종이에 적어 벽에 붙여 두면 좋을 것이다. (4단계 참조)
큰아들은쓰레기통 비우기, 저녁마다 설거지하기, 자기 방 청소하기, 동생을 유치원에서 데려오기 같은 일을 맡았다고 가정하자. 만약 큰아들이 이런 일을 예전에 해본 적이 많지 않다면 처음엔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제대로 하지 못한다거나 잘 안 될 때마다 아이를 탓하지는 말라. 며칠 기다리는 게 더 좋다. 그리고 아이와 당신에게 시간이 있고 서로 마음 편한 순간에 물어보라. “일이 어때? 잘 되고 있니?”
잘 되지 않는 것을 아이가 스스로 말한다면, (부모 입에서 나오는 지적보다) 훨씬 더 좋아.
어쩌면 잘 안 된 일이 아주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이 생각에 무엇 때문에 그런지 원인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또 어쩌면 뭔가를 아직 익히지 않았거나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혹은 아이가 다른, ‘더 책임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방법은 부모와 자녀 그 누구에게도 일방적으로 물러서거나 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 외려 맨 처음부터 구성원들이 서로 협조하게 되어 결국엔 다 승리자가 된다.
무엇이 중요한가 갈등/충돌의 원인 갈등 해소의 비생산적인 방법 2가지: 일방의 승리 건설적인 갈등 해소 방법: 양쪽이 다 승리 단계 1–5 부모들의 질문
기펜레이터 여사는 언젠가 한 심리학 서적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놀랐다고 전한다.
“가정에서 갈등과 충돌은 아무리 좋은 관계일 때도 피할 수 없고, 갈등을 피하거나 외면하려 들 게 아니라 제대로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나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거의 모든 단계와 국면에서 갈등 상황에 부닥친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인 언쟁으로 끝나고, 어떤 경우에는 무언의 숨겨진 분노로 끝나며, 또 때론 진짜 ‘전투’로 끝날 때도 있다. 오늘날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이제 우리도 이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은 어떻게 왜 생기는지 먼저 살펴보자.
전형적인 사례. 가족이 저녁에 티브이 앞에 둘러앉았지만 채널 선택을 두고 다툰다. (당신에게도 익숙한가?) 예를 들어, 아들은 열렬한 팬이어서 축구 중계를 보려 하고 엄마는 외화 시리즈에 ‘필’이 꽂혀 있다. 언쟁이 벌어진다. 엄마는 온종일 기다렸다면서 드라마를 고집한다. 한데 아들 역시 어제부터 기다렸다면서 양보하지 않는다.
다른 사례.
엄마가 손님 맞이할 준비를 마치려고 서두른다. 뜻밖에도 집안에 식빵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딸한테 빵집에 좀 다녀오라고 한다. 그러나 딸은 클럽의 운동 시간이 곧 시작되는데 늦지 않기를 원한다. 엄마가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부탁하는데, 딸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은 강청하고 다른 쪽 역시 한사코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 서로의 감정이 달아오른다.
이 사연에서 공통점은?
무엇 때문에 갈등 상황이 벌어지고 서로의 감정이 달아오르게 됐나?
문제는 엄마와 딸의 관심사가 서로 맞서고 충돌한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한쪽의 바람이나 욕구의 만족은 다른 쪽의 이해관계가 축소된다는 뜻이며, 그러면서 짜증이나 마음의 상처, 분개같이 강한 부정적 체험을 야기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를 이용하여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즉각 쌍방에, 자녀와 부모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부모들이 해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부모들은 “그런 걸 갖고 충돌까지 갈 필요는 없지!” 하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의도야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바람과 욕구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충돌까지 안 간다는 보장은 아쉽게도 확실치 않다. 부모와 자녀들의 (심지어 부부간에도) 이해관계가 늘 일치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
자녀와 대립이 시작될 때...
1) 어떤 부모들은 각자 자기 길을 고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전혀 알지 못한다.
2) 또 어떤 부모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차라리 내가 양보하고 말겠어’ 하는 자세를 취한다.
갈등 해소의 두 가지 비건설적 방법이 그렇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통칭 ‘일방의 승리’라 불린다.
이것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자.
* * *
갈등 해소의 첫 번째 비건설적인 방법은... 부모가 이기는 것.
예를 들어, 티브이 채널을 두고 충돌하는 경우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축구가 밥 먹여 주냐, 잠시 뒤에 보면 되잖아. 채널을 또 돌리면 혼날 줄 알아!
식빵의 경우 엄마의 ‘일방적 승리’는 이런 말로 휘갑칠 수 있겠다.
– 그래도 가서 식빵을 사 와라! 스포츠 동아리가 어디로 사라지겠냐. 엄마가 부탁하는데!“
여기에 자녀들은 어떻게 대답하나?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감정적으로 충전돼 있는데 엄마의 말에는 지시와 비난, 위협이 담겨 있음을 떠올리자. 이 때문에 자녀의 ‘감정 컵’의 수준은 분명히 더 올라갈 것이다.
– 엄마 드라마가 허접한 거지!
– 아니, 안 갈래! 그만! 엄마가 나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어!
첫 번째 방법을 주로 이용하는 부모들은 아이를 이기고 아이의 저항을 부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여긴다. '아이가 자기 의지대로 하도록 허용하면 나중엔 수염까지 잡아당길 거야.'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즉, 그런 부모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필요나 갈망은 고려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을 늘 얻으라‘는 식의 행동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
한데 아이들은 부모의 언행에 아주 민감하고 일찍부터 부모를 흉내 내지 않는가. 그래서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을 애용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그렇게 하기를 빨리 배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받고 배운 모습과 교훈을 고대로 어른들에게 돌려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이때 의견이나 이해관계, 갈망, 욕구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여 충돌하는 것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두 마리 염소처럼.
이 첫 번째 방법의 다른 버전이 있다. 부모가 자신의 뜻이나 갈망을 아이가 수행하도록 부드럽지만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 여기엔 설명이나 해명이 종종 수반되며, 그런 얘기를 듣고 아이는 결국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늘 이런 심적 압박 전략을 구사한다면, 아이에겐 이런 생각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즉, '내 부모에게 나의 개인적인 소망이나 욕구의 실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어떡하든 자신들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하게 될 거야.‘
어떤 가정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몇 해씩 계속되면서 자녀들이 늘 물러서거나 양보하거나 진다. 그런 아이들은 대체로 공격적이거나 지나치게 수동적인 성향을 띠기 쉽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두 경우 다 그들에게는 적대감과 분노가 쌓이고, 부모와 관계가 친근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 * *
갈등 해소의 두 번째 비건설적 방법은... 아이가 늘 이기는 것.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이와 충돌을 겁내거나 혹은 이른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늘 희생할 준비가 돼 있거나 혹은 이 두 가지에 다 해당하는 부모들이 이 두 번째 길을 간다.
이런 경우 이 아이는 조직이나 사회의 질서에 익숙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에고이스트로 자랄 것이다.
그런 성향이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대체로 너그러이 양보하면서 그리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르지만, 집 대문을 넘어서는 즉시 이 아이는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그 어느 모임에서도 누가 그의 부모처럼 양보하고 너그러이 대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에고이스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요구가 크며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종종 비웃음을 사거나 심지어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 가정의 부모들에겐 자기 아이와 자기 운명에 대한 불만이 희미하기 쌓여 간다. 그렇게 ‘자녀한테 늘 양보하는’ 어른들이 노년에는 종종 고독해지고 버림받게 된다. 그때 가서 비로소 무엇이 잘못 됐는지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를 지나치게 받자하고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해 온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자녀와의 갈등이나 충돌을 잘못 해결하는 경우 그 여파나 후과는 크든 작든 반드시 축적되기 마련이다. 또 이에 따라 아이의 성격이 형성되며, 이 특성이 나중에 아이와 부모의 운명을 좌우한다. 따라서 당신과 자녀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마다 매번 주의 깊게 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도 이 물음에 답변은 비슷하다. 즉, <나-메시지>와 우리가 습득하는 다른 방법들을 적용한다 해서 아이가 당장 책상 앞에 앉거나 싫어하는 스카프를 두른다거나 저녁 늦게 외출하는 일이 없어지는 등 무슨 획기적인 변화나 성과가 금방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
이 몇몇 방법의 목적이나 용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와 부드럽게 접촉하기,
아이와 상호이해 향상하기,
아이가 자립성과 책임감 갖추도록 돕기 등이다.
보다시피, 목적이 더 장기적이고 훨씬 더 일반적이다.
당신의 어떤 말을 듣고 아이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경우도 물론 있겠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겠다고 아이가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개는 자녀와 관계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의 소통 스타일이 개선되고 있음을 아이가 믿어야 한다.
당장에는 당신의 적절하고 올바른 말과 표현 등이 새 건물을 쌓은 작은 벽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작은 벽돌을 많이 쌓지 않고서 어떻게 건물을 올리겠나?
문: 딸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뒤 눈물을 흘리며 집에 왔다. 난 아주 걱정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답: 그 순간 누구의 심적 체험이 더 강한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아이의 실패나 트러블은 전부 당신의 대응하는 감정을 일으킨다. 아이 일 때문에 당신이 크게 속상하고 화가 난다면, <나-메시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그런 감정을 딸에게 전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면 가뜩이나 마음 상한 딸의 문제가 더 깊어질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자기감정을 자신에게, 또 다른 성인에게 털어놓거나 혹은 노트에 적을 수도 있겠다.
당신의 감정은 그렇게 처리하되, 괴롭힘을 당한 딸의 감정과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어줄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당신의 공감이 드러난다.
문: 내가 아이한테 아주 화가 났다면 <나-메시지>를 어떻게 보내나?
답: 분노는 대개 2차 감정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여긴다. 그건 다른 어떤 1차적 심적 체험을 기반으로 생긴다. 따라서 만약 아이한테 분노의 말을 던지고 싶어진다면, 잠시 멈춰서 본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애쓰라.
예를 들어,
1) 아이가 당신에게 아주 거칠게 굴었다. 당신의 첫 반응은 분노 같은 것일 수 있다.
2) 부모들 모임에서 당신 아이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많이 듣고 괴로움과 실망, 수치심을 느꼈다.
3) 아이가 세 시간이나 늦게 집에 돌아오는 바람에 당신이 심하게 걱정했다. 하지만 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첫 감정은 반가움과 안도! 이 처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다.
– (너의 행동에) 난 마음이 아프고 상처를 받았다.
– (너에 관해) 그런 얘기를 듣고 난 아주 화나/당황해/불쾌해.
– 다행이야! 무사하구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런 여러 경우에서 ‘천둥과 번개’가 들어설 자리는 이미 없게 됨을 당신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문: 우리한테는 이런 경우가 잦다. 그러니까, “난 걱정돼” 하는 내 말에 아들이 “엄마, 걱정 말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들 입에서 “엄마 걱정은 엄마 문제야!” 하는 말까지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아들이 그렇게 대꾸한다면, 이건 당신이 아이의 영역에 들어섰고 아이 스스로 해결하려는 문제에 간섭했다는 징표이다. 그런 경우 이렇게 자문하는 게 가장 좋다.
“아이가 하는 일이 나와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 관련되나?”
당신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해 염려할 권리를 아이 본인에게 넘겨 주시라.
그런 경우에는 당신이 아무리 걱정하고 안달한다 해도 아이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외려 방해가 될 수 있다!
과제 1의 답변
상황 1.
2번 어구가 <나-메시지>일 것. 1번은 전형적인 <너-메시지>, 3번은 <나>로 시작해서 <너-메시지>로 넘어간다.
상황 2.
1번이 <나-메시지>, 나머지 둘은 <너-메시지>. 2번 어구에 <너>가 없지만, 그런 암시가 행간에 들어 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노여움이나 짜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그렇게 해봤자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는커녕 외려 뜻하지 않은 불만을 사기 쉽다. 왜냐하면...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기감정을 완전히 억누르거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아이들은 부모가 화났는지 아닌지 늘 알고 있다. 만약 부모가 화나 있다면 아이는 그걸 금방 알아채고 이제 자기가 불쾌감이나 두려움을 느껴 부모를 피하거나 노골적인 언쟁으로 나설 수 있다. 그 결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부모의 처음 의도와는 정반대로 평화 대신에 전쟁이 벌어진다.
12세 소녀가 엄마와 대화중에 울면서 자신이 ‘서운하게 여긴 점’을 다 털어놓았다.
엄마가 나한테 언제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다 본다구요! 예를 들어, 오늘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우리가 공부하는 대신 음악 틀어놓은 것을 봤을 때, 엄마가 말은 안 했지만 나한테 화가 났잖아요. 난 다 보고 아니까 부정하지 않아도 돼.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고개 돌리는 것만으로도 알았어요!
엄마가 (충돌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불만을 숨기지만, 결국 딸은 그걸 알아차리고 엄마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또 보였다. 이 대목에서 기펜레이터 여사는 ‘우리네 애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관찰력 뛰어난지, 심리학자와 다를 바 없다’고 놀라움을 표한다. 이 소녀는 부모들이 왜 불필요한 침묵을 깨고 자기감정의 출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 <나-메시지>는 아이들이 부모를 더 잘 알게 되는 기회를 준다.
부모들은 대체로 '권위'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채 아이들한테 닫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는 부모로서 책임감 같은 것도 작용한다. 어디 그뿐이랴. 아이를 가르치고 이끄는 ‘교육자’의 마스크도 써야 하며, 그걸 쓰고 난 뒤로는 잠시라도 들어 올리거나 벗을 엄두를 못 낸다.
그렇게 '닫혀 있고, 위에 있고, 완전한 듯싶던' 엄마와 아빠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아이들이 때론 놀란다. 이건 아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안긴다. 중요한 것은... 거리감이 있던 어른이 아이에게 더 친근하고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점.
얼마 전 들은 대화 한 토막.
한 엄마가 열 살 된 아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참이었다. 교사인 엄마는 아주 힘든 수업이 끝났다고 아들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얘야, 오늘 아침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너도 알 거야. 그러나 다 잘 끝났고, 난 아주 기쁘단다. 너도 기쁘지? 고마워!!"
엄마와 아들 간에 그런 감성적 친밀함을 관찰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3. 부모가 마음을 열고 자기감정 표현에 진실할 때, 아이들도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부모가 그렇게 할 때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기네를 믿는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한 엄마가 아들에게 자신이 제대로 행동했는지 묻는 편지를 보내 왔다.
「난 아들이 여섯 살일 때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이제 아들은 열한 살이 됐어요. 아이는 속이 더 깊어지고 철도 많이 들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언젠가 한번은 어쩌다가 이런 말이 튀어나왔어요. “아빠랑은 영화관에 갈 텐데, 엄마하고는 싫어.”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아들이 심심하고 외롭다고 대놓고 말하기에, 내가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그래, 아들, 넌 요 근래 계속 울적하구나, 아마 아빠가 없어서 그럴 거야. 나도 그리 즐겁지 못하단다. 너에게 아빠가 있고 나에게 남편이 있다면, 우리 사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텐데...”
아들이 좀 움찔하는 듯했어요. 그러고는 내 어깨에 기대더니 말없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나도 아이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둘 다 마음이 편해졌어요.
난 그날 일을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래, 아이한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 잘 한 일이야'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이 엄마는 올바른 말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아이가 겪고 있으며 털어놓는 심적 체험을 들어 알고는 아이에게 말했으며 (적극적 듣기) 또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얘기하기도 했다 (<나-메시지>).
두 사람 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이 방법의 효험을 잘 증명한다.
아이들은 부모한테서 소통 매너를 아주 빨리 습득한다. 부모가 <나-메시지>를 이용하면 자녀도 그렇게 되기 마련인데, 아이가 <나-메시지>를 이용해 말할 때 부모는 아이의 감정과 욕구를 더 쉽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4. 끝으로, 지시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남겨둔다.
그때, 놀랍게도, 아이들은 부모의 갈망과 마음 상태를 (심적 체험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4세 소년의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
아들과 같이 약국에 갔다. 아이가 비타민을 원해서 사주었다. 그러더니 다른 것을 보고는 그걸 또 사 달라고 했다.
난 “얘야, 이 비타민을 다 먹고 나면 그때 다른 걸 또 사줄게" 하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징징대더니 나를 떠밀고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난 아주 불쾌하고 부끄러웠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했다.
– 지금 이런 장면 때문에 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란다.
내 말에 아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내 다리를 껴안고 말했다.
– 엄마, 가자. 엄마 마음대로 해요. 엄마가 먹으라는 대로 비타민을 먹을게.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엄마 말대로 할게.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왔다. 아이는 계속 내 눈을 보면서 비타민을 엄마가 먹으라는 대로 먹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르칠 때는 단번에, 단호하게
- 이 스토리는 아들에게 크게 화가 난 엄마의 사연
오래 전 일이다. 그때 아들이 여섯 살. 아이가 나가 놀자고 청하는데, 난 몸이 안 좋아 누워 있었기에 아이 혼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당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겠다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놀이터에서만 놀기로 단단히 약속하고 나갔다. (놀이터는 건물 양편에 두 군데가 있었다.)
아이가 지나가는 어른에게 시간을 물어서 몇 시에는 돌아오기로 했는데... 그 시각이 지났다. 그리고 30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놀이터를 다 뒤지고 갈 만한 곳을 다 찾아 다녔지만 아이는 아무 데도 없었다. 혹시 집에 돌아왔나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가 또 찾으러 뛰어나가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런 일은 처음이어서 더 걱정되고 더 불안했다. 아이는 엄마 말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선을 피운 끝에 아이를 찾았는데, 난 이미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렀기에 단단히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과 불안으로 시작하여 노여움에 휩싸인 난 진정하지 못하고 마구 떨리는 상태였다.)
“네가 한 짓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으니, 벌을 줘야겠다. 선택하렴. 허리띠로 맞을래, 아니면 일주일 동안 내가 책을 읽어 주지 않기를 택할래?!"
아들이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허리띠로 맞으면, 책은 읽어 줄 거예요?"
"그래." 내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면 허리띠로 맞을래요!" 아들이 말했다.
난 아이에게 바지를 벗으라 지시하고 장롱에서 허리띠를 찾았다.
"어떻게 서야 돼요?" 아이가 묻는다.
그러자 난 왠지 불편해졌다. (아이가 진지하게 생각하여 책을 택했을 때부터 불편한 느낌은 시작됐다.) 하지만 끝까지 벌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를 허리띠로 몇 차례 때렸다. 그러고 나서 난 아주 부끄러워졌다.
‘화가 잔뜩 난’ 나보다도 더 '품위를 지킨' 어린애한테 내가 마음의 상처를 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때 내가 무척 화가 났었나? 처음엔 죽을 만큼 걱정하고 동요하다가 아이를 찾자 그런 건 다 사라지고 벌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생겼다.
만약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금방 얘기했다면 아이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상황을 이해했을 테고, 그러면 의연하게 서 있는 아들에게 벌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면서 동시에 내 불편한 느낌을 야기하는 멍청한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다시는 아이를 때리지 않았다.
또 <나-메시지>라는 방법을 알고 나서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면 좋은지를 깨달았다.
* * *
<나-메시지> 전하는 법을 익히기란 아이의 말을 적극적으로 듣는 것만큼이나 간단치 않다. 처음에는 실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계속>
규칙 5: 자신의 심적 체험을 아이한테 말하기 규칙 6: <나–메시지>보다 <너–메시지>로 규칙 7: 조건이나 환경을 바꾸기 규칙 8: 기대를 바꾸기 규칙 9: 누가 더 걱정해야 하나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부모들의 질문
내 생각에, 지금까지 레슨을 거치면서 당신은 이런 의문을 여러 번 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모들의) 감정은 어떻게 처리하지? 부모들 역시 동요하고 화내고 지치고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가. 아이를 상대하고 돌보고 인도하면서 키우느라 우리도 힘들어,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우리의 힘겨운 얘기는 도대체 누가 들어줄 것인가? 우리가 겪는 심적 체험과 마음 상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관해 이번 레슨에서 생각해 보자.
* * *
우선 어떤 상황에 관한 얘기인지 더 분명하게 알아보자.
심적 동요, 염려, 마음 상함, 화가 남, 불쾌함 따위에 부모가 훨씬 더 크게 휘둘리는 경우를 말한다. 아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정작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고 태연하기만 한 경우를 말한다. 달리 말해, 이 상황은 아이의 정서적 문제를 다룰 때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감정을 두 개의 ‘컵’으로 묘사하자.
아이가 더 많이 애를 태울 때, 여러 감정 상태에서 들끓을 때, 아이의 ‘컵’은 가득 차고, 부모는 상대적으로 차분하며 ‘컵’ 수준이 낮다.
그리고 다른 상황은...
아이는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안달하지도 않는데, 부모가 어떤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두 번째 유형의 예는 이렇다.
1.
귀가하는 길에 집에 거의 다 와서 당신이 아들과 마주쳤는데, 아이의 얼굴이 지저분하고 상의 단추가 뜯겨 나가고 셔츠가 바지에서 튀어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이를 쳐다보며 씩 웃는데, 그런 아들 모습에 당신은 불쾌하고 이웃들 보기에 좀 창피하다. 하지만 아들은 그런 주변 정황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신나게 놀다가 이제 퇴근하는 아빠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아한다.
2.
어린애가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열심히 마루를 달린다.
당신은 출근 준비하느라 서두르는데, 어린 아들이 자꾸 발에 걸리적거리면서 출근 준비에 방해가 된다. 은근히 짜증이 난다.
3.
십대 아들이 또 오디오를 아주 크게 틀었다. 당신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 * *
이런 경우에, 그러니까 부모가 어떤 (부정적인) 감정에 가득 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규칙 5>는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만약 아이의 행동 때문에 당신 마음이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다면, 그렇다는 걸 아이한테 알리라.
이 규칙은 감정을, 특히 부정적이고 거센 감정을, 어떤 경우에도 눌러 담고 있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분노를 말없이 참거나 화를 억누르거나 마음의 동요가 큰데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애써 봤자 자기 자신도 아이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당신의 포즈와 제스처, 억양, 표정, 눈빛 등을 보고 어렵지 않게 뭔가 잘못 되고 있음을 ‘읽는다’.
사실 바로 이 ‘비언어적’ 시그널들을 통해서 우리 내면 상태에 관한 정보의 90% 이상이 전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시그널을 임의로 통제하기란 아주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얼마 지나면 감정은 통상 날카로운 말이나 행동으로 ‘돌출하고’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상상하기를 즐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화를 듣거나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 푹 빠지며, 현실 세계 못지않게 그 세계에서도 충만하게 산다.
아이의 꿈과 판타지 속에서 함께 놀면서 아이가 품는 이 상상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아이가 정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엄마가 철수를 침대에 눕히자 아이가 떼를 쓴다.
철수: 싫어, 안 잘래. (침묵) 아빠는 언제 와? 기다리다가 지쳤어. (아빠는 장기 출장을 떠나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 넌 아빠가 무척 보고 싶구나.
철수: 응, 많이.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엄마: 나도 그렇단다. 그럼, 아빠가 오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떻게 오실까?
철수 (생기가 돌면서): 기차역에서 내린 뒤 전화를 걸어 “벌써 역에 내렸어, 곧 집에 도착할 거야!” 하고 알리지.
엄마: 그래, 우린 아주 기뻐서 집 청소를 시작하고…
철수: 아니야, 우리는 청소를 벌써 끝냈는걸, 엄마가 특별히 갈비찜도 만들어 놓고.
엄마: 아, 그렇지. 우린 식탁을 차리는 거야, 밥을 소복이 담고 국과 반찬도 내놓지.
철수: 난 내 ‘차고’에서 새 장난감 자동차를 꺼내고, 탱크를 그린 앨범도 꺼내 놓아요.
엄마: 아, 문 앞에서 벌써 발소리가 들리고, 벨이 울리네…
철수: 내가 달려가서 문을 열고 “아빠!” 하고 안기면, 아빠가 웃으면서 나를 안아서 들어 올리고…
대화가 몇 분 더 이어진다, 그다음에 아이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잠이 든다.
***
다른 예는 많은 이들이 흔히 접하는 경우이다.
영희: 아빠, 초콜릿 먹고 싶어, 사 줘요.
아빠: 엄마가 어제 사준 거 같은데.
영희: 한 개만, 작은 걸로.
아빠: 근데 넌 많이 원하는구나.
영희: 응, 많이 많이.
아빠: 열 개, 아니, 스무 개가 더 좋겠다.
영희 (게임을 가로채서): 아니, 백 개, 천 개야!!!
아빠: 그래, 우린 초콜릿을 천 개 사서 꽃마차에 싣고 집으로 옮기는 거야.
영희 (웃으면서): 사람들이 놀라서 “이 많은 초콜릿이 어디서 생겼어요?” 하고 물어봐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눠주지요.
아이와 부모가 함께 꿈을 품을 때, 아이는 자기의 감정을 어른이 듣고 함께 나눔을 알게 된다.
* * *
이번 레슨의 결론으로 실제 대화를 하나 더 인용하고 싶다.
이건 부모들이 <적극적 듣기> 방법을 얼마나 충분히 습득하는지 보여준다. 이것도 한 엄마의 기록이다.
「우리는 딸이 유치원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본다. 딸이 여교사를 가리킨다. (사진의 교사 얼굴이 긁혀 있다.)
딸: 저 선생님 꼴도 보기 싫어!
나: 넌 이 선생님을 보는 게 싫구나.
딸: 응, 아주 못됐어.
나: 네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
딸: 응, 나를 사냥개라고 욕하고 또 내가 훔치면 그때는…
나: 그러면 선생님이 뭔가를 하겠다고…
딸: 응.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나: 넌 이 얘기를 예전에 하고 싶지 않았구나.
딸: 응, 난 무서웠거든. (울먹거린다.)
내가 아이의 손을 쥔다.」
이 대화에서 이 엄마는 이미 첫 번째 말에서 자동적으로 나올 수 있는 오류를 피했다.
즉, ‘교육적’ 지적이나 촌평을 범하지 않았다.
흔히 하는 실수대로 하자면,“선생님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하고 대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이 엄마는 아이의 감정에 ‘공명/화답하고’, 아이의 감정을 함께 나누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그리하여 딸은 그동안 숨겨두었던 두려움과 속상함에서 벗어나기가 한결 쉬워졌다. 여기서 아이가 글썽인 눈물은 안도의 눈물이다.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과제 1
다음 대화에서 부모의 응답이 어떤 유형의 잘못된 말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라. (열쇠는 이 수업 끝에 있다.)
딸: 치과에 다시는 안 갈래!
엄마: 그런 소리 마라, 내일 예약돼 있으니까 다른 치아를 마저 다 손봐야지. (1)
딸: 더 못 참겠어.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엄마: 그렇다고 죽지는 않았잖니. 살다 보면 참아야 할 때가 종종 있단다. 그리고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이가 다 빠질 거야. (2)
딸: 말이야 쉽지, 엄마한테 드릴을 대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아!
* * *
아들: 내가 마지막 훈련을 두 번 빼먹었더니, 코치가 오늘 나를 후보지 명단에 넣었어요.
엄마: 아, 괜찮다. 네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어차피 후보자 명단에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이번엔 네가 잘못했네. (3)
아들: 벤치에는 다른 애한테 앉아 있으라고 하면 돼, 난 싫어. 이건 불공평해. 철수는 나보다 실력이 약한데 경기에 내보냈어요.
엄마: 그애 실력이 너보다 못하다는 걸 넌 어떻게 아니? (4)
아들: 당연히 알지! 우리 팀에서 내가 최고에 드는걸.
엄마: 내가 너라면 자리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을 거야,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5)
아들 (짜증을 내며): 엄마랑은 무슨 얘길 못하겠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 * *
여섯 살 된 소녀가 아버지에게 (울면서): 저 애가 (3살 남동생이) 내 인형을 어떻게 했는지 봐요! 이제 다리가 덜렁거려.
아빠: 그래, 어쩌다 그랬니? (6)
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인형, 아-앙!
아빠: 진정해라, 뭔가 생각해 보자꾸나. (7)
딸: 진정할 수 없어, 난 몰라, 내 인형이…
아빠 (기쁜 표정으로): 아, 묘안이 떠올랐다! 인형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다쳤다고 상상하는 거야, 이렇게 멋지게 말이야. (미소 짓는다.) (8)
딸 (더 크게 운다): 그런 상상은 싫어… 웃지 마. 저 애를 다음에 죽일 거야!
아빠: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런 말을 다시는 하지 마라! (9)
딸: 아빠는 나빠, 엄마한테 갈래. 엄마, 이것 좀 봐…
과제 2
그림 6.1, 6.2를 보고 과제 1처럼 어른들의 응답이 어떤 유형의 오류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림 6.1
그림 6.2
과제 3
아이와 대화하면서 잘 관찰해 보라. 특히 아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순간에 아이의 상태며 당신의 반응과 응답을 정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대화와 당신의 반응에 12가지 유형의 오류 가운데 어떤 것이 들어 있나?
<적극적 듣기>를 계속 훈련하라.
이걸 습득하지 않고서는 우리 레슨을 더 이어가기가 힘들 것이다.
과제 4
자녀에게 어떤 지적도 꾸지람도 하지 말고 하루를 보내 보라.
지적이나 꾸지람 대신 적절한 계기가 생기면 (혹은 그런 계기가 없다 해도) 아이를 인정하고 장려하고 응원하는 말을 건네 보라.
그리고 아이의 반응을 관찰해 보라.
부모들의 질문
문: 아이한테 질문도 하지 않고 조언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답: 다시 강조하건대, <적극적 듣기>에 장애가 되고, 그래서 피해야 한다고 정리해 놓은 12가지 자동적인 응답에 꼭 얽매일 필요는 없다. 만약 아이가 차분한 상태에 있거나 아이와 이미 교감이 있다고 느낀다면, 더 자유로이 대화할 수 있다. 아이의 상태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열 가지 말 가운데 질문 하나 넣는다고 해서 일이 잘못될 리는 거의 없다.
어떤 부모들은 <적극적 듣기> 방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이 더 유용할 때가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이와 소통의 새로운 스타일이 옛것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낡은, 습관적인' 말을, 어구를, 표현을 알아두고, 그것이 자동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 아이가 불가능한 것을 계속 조르면서 울거나 심하게 보챈다면 어떻게 하나? 이럴 때는 듣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답: 그래도 아이가 하는 말을 적극적으로 듣도록 하라. 아이가 자기 마음을 알아준다고 느낄 만한, 당신의 처음 몇 마디가 예리한 상황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다음에 그 불가능한 것을 두고 아이와 함께 꿈을 품도록 하라. (<다른 식으로 듣기 두 번째 사례 참조)
과제 1의 열쇠
(1) 지시 (2) 논거, 위협 (3) 충고, 훈계, 지적 (4) 질문 (5) 조언, 비판 (6) 캐묻기 (7) 조언, 충고 (8) 조언, 농담 (9) 교화, 도덕적 훈계, 위협.
이 권고가 앞에 나온 여러 얘기와 모순되는 듯이 보일지 모르겠다. 자칫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대목을 규명하기 위해, 칭찬과 격려 혹은 칭찬과 인정 간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칭찬에는 늘 평가 요소가 들어간다.
“잘했어, 넌 정말 천재네!”
“네가 제일 예뻐 (똑똑해, 재주 좋아)!”
“넌 아주 용감해, 뭐든 잘 해내는구나.”
한 엄마가 <부모 훈련 강좌>에서 받은 인상을 보내 왔다.
난 자녀 양육에 관한 글과 책을 많이 읽었어요. 어떤 책들에서는 아이를 가능한 한 자주 칭찬하라는 조언이 있었는데, 그게 나한테는 당혹스러웠구요. 그런 과정을 내가 직접 겪어 봤다는 점이 중요하며, 어린 시절 난 칭찬을 많이 받곤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집에서 칭찬 받는 데 익숙해진 상태로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됐을 때 주변 사람들이 찬사를 잘 보내지 않자 난 화가 나고 우울해졌어요. 그 이전에 초중고교와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서) 익숙해진 칭찬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의욕이 나질 않는 거예요. 나를 칭찬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지어 삐딱하게 대하기까지 했어요. '그렇다면 나도 당신에게,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해줄 거야.'
그러나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나한테 주어진 과제나 맡은 일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결과나 보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세미나에서 (마침내!) 나에게 정말 적절하고 필요한 조언을 접했습니다. 즉...
“넌 정말 잘했어!”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난 아주 기뻐!” 하고 반응하는 게 훨씬 더 좋다는 것 말이죠!
생각을 바꾸게 하고 행동도 바꾸게 만드는, 이런 조언과 구체적인 사례를 난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됐을까. 사람마다 대체로 가족 구성과 가족 관계가 다르기 마련이라는 점은 나도 알겠어요. 구체적인 사례를 더 많이 들어 주세요. 그러면 각자가 처한 입장을 감안하여 우리에게 맞는 해답을 스스로 찾을 겁니다.
고마워요. 오늘 조언을 접하지 못했다면 (내 경험을 떠올리고 좀 주저가 되긴 하지만) 난 어린 딸을 계속 칭찬하고 또 칭찬할 뻔했어요.
“넌 정말 똑똑하구나.”
“넌 어쩜 이렇게 예쁘니 (착하니, 멋있니, etc.)"
***
그러면, 평가가 담긴 (평가하는) 칭찬은 왜 나쁜가?
1) 부모가 자주 칭찬할 때, 아이는 칭찬이 있는 곳에 꾸중도 있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아이를 어떤 경우에는 칭찬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지적하고 나무란다.
2) 아이가 칭찬에 좌우될 수 있다. 칭찬을 기대하거나 칭찬 받기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오늘은 왜 나를 칭찬하지 않았어요?”) (바로 앞에 소개한 젊은 엄마의 사연 참조).
3) 당신의 칭찬이 진심인지 의심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부모에게 어떤 의도가 있어서 칭찬하는 것은 아닌가.
아들: 이 글자를 잘 못 쓰겠어요!
엄마: 무슨 소리니, 아주 잘 썼는데!
아들: 거짓말, 내가 기죽지 말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
그렇다면, 아이의 올바른 행동이나 성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 당신의 감정을 아이한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가장 좋다.
→ ‘너’ 대신 ‘나’, ‘나에겐’ 같은 대명사를 이용하라.
딸: 엄마, 나 오늘 국어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어요!
엄마: 난 정말 기쁘단다! 아주 기쁘구나! (“아유, 우리 똑똑이!” 대신에)
아들: 오늘 내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지 못했지요?
아빠: 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 반대로 (이러이러한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단다. (“무슨 말이니, 넌 정말 여느 때처럼 훌륭하게 연주했어!” 대신에)
8. 안 좋은 뜻의 이름(별명) 붙이기, 놀리고 조롱하기
“넌 울보야.”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있지 말고...”
“넌 얼굴이 왜 그렇게 길쭉하니!”
“넌 정말 게으름뱅이야!”
아이에게 부모한테 거리감을 갖게 하고 아이가 자신감 잃게 만들고 싶다면, 정히 그러고 싶다면... 저런 투의 말을 자주 애용하도록 하시라. 그런 경우 아이들은 대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자기방어에 나서게 된다.
“그럼, 엄마는 뭔데?”
“그래, 난 길쭉해, 그래서 어쩔래?”
“그래, 그렇게 살 거야!”
여기 생생한 사례가 있다.
14세 영미가 엄마와 함께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장에 가려고 한다. 소녀가 마음이 들떠서 선택의 폭이 크진 않지만 갖가지 ‘의상’을 입어 본다. 그렇게 법석을 떤 끝에 마침내 곱슬거리는 가발을 쓰고 긴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엄마와 할머니 앞에 나타난다. (이 물건은 다 언니 것이다.)
영미 (환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자, 어때?!
엄마: 와, 잘 차려입었구나! 정말 최고의 미녀야. 사람들이 신부하고 혼동하지 않게 하렴.
할머니: 근데 하이힐은 왜? 그걸 신으니까 키만 껑충한 기린 같구나! (이 말에 소녀의 표정이 흐려진다. 기분이 상했다.)
영미: 그럼, 두 분이 다녀오세요. 난 아무 데도 안 갈래.
9. 지레짐작, 추측, 자의적 해석
“이건 다 네가 ...했기/이기 때문일 거야.”
“보나 마나 또 쌈박질했겠지.”
“그래봤자 넌 또 거짓말을 하는 거지.”
한 엄마가 십대 아들에게 툭하면 이런 말을 했다. “난 너를 속속들이 꿰뚫어 본다. 훤히 들여다본단 말이야. 알겠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들은 늘 기분 상하여 화를 냈다.
사실, 그 어떤 아이가 (어른도 마찬가지고) 자신에 대해 상대방이 ‘제멋대로/임의로 추측하고 예단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런 경우에는 자신을 방어하거나 아예 접촉을 피하고 싶어 할 수 있다. (* "지레짐작 매꾸러기"라는 우리 옛말이 이런 경우에 좋은 반증이 되겠다.)
열다섯 살 된 철수가 집에 와서 엄마한테 물었다.
철수: 나한테 전화 온 거 없어요?
엄마: 없다. 내 보기에 넌 영희 전화를 기다리는구나.
철수: 엄마는 뭐든 다 알아?
엄마: 알지. 예를 들어, 네가 어제 왜 기분이 안 좋았는지도 안다. 영희하고 다퉜잖아. 맞지?
철수: 엄마, 그만해! 도대체 엄마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어른들이 자주 범하는 다음 실수 유형도 안타깝지만 저런 '지레짐작이나 자의적 해석 오류'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