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까마귀 이야기
-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견디기 힘들어하나?
*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나? (나 혹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보듬어 안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 <우리 이외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는 곧 <우리가 자신의 불안감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사람들이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곱씹어 볼 여력도 없이 순간순간에 반응하는 쪽으로 기운다면, 그들은 불안감을 없애거나 최소화하여 (일단, 표면적으로라도) 마음 편케 하기 위해 ‘어렵지 않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호라, (자기네와)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집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떠받치고 자신의 불안감을 줄이는 것이더라.
경제나 정치, 군사 어떤 분야에서 어떤 긴장이든, 한 사회에서 긴장이 클수록 포용은 더 줄어든다는 점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대다수는 <우리>라는 커다란 집단 정체성을 만드는데,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책임이나 고통스러운 선택이나 건강한 의혹을 지니는 개별적인 <나>는 용해되고 ‘비인격화’가 (혹은, 몰개성화, 주체나 자아감 상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여러 후과로는, 들어오는 정보에 대한 비판 감소 (소스가 권위적이라면 특히 더!), 흑백 논리, 총체적인 단순화, 거친 일반화, ‘우리 편 아닌’ 사람의 이미지를 밋밋하게 만들어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묶어두기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별생각 없이 무조건 싸잡다 보니 희한한 일반화가 벌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다 ‘뙤놈(되놈)’이요 일본인은 다 ‘쪽발이’라는 말을 듣거나 입에 올린 적은 없는가? 보수라 자처하는 자들은 다 ‘수구 꼴통’이요, 진보라 자처하는 자들은 (알고 보니) 다 ‘후안무치와 위선 덩어리’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뜻이다.)
사람들이 이루는 집단은 (혹은, 무리나 패거리는) 만족스러운 자아감을 맛보기 위해 ‘외부의 적’을 아주 필요로 한다. 한데, ‘만일, 그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대상이 어찌어찌하여 사라진다면, 그들은 뭘 할까?’ 하는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들 대열의 결속은 <누군가와 맞서서 우리끼리 의리 지키기>라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들은 이 원칙을 꽤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시민과 유권자들의 관심을 더 화급한 현안에서 떼어놓곤 했다.
중세 서구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 이단자나 (마녀라 이름 붙인) 아름다운 여성들을 ‘(우리와 다른) 외부의 적’으로 공표하곤 했다. “갈라놓고 통치하라”는 원칙은 문명화됐다는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의 정치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런 행위는 종교에도 전형적이니, (우리) 종파 바깥의 사람들을 다 일반화해서 (싸잡아서) 뚜렷한 원인 설명도 없이 ‘저들은 잘못되고, 바르지 못하고, 알아먹지 못하는 이단자’들로 치부할 때 그렇다.
자기네를 <외부의 적>과 확실하게 구별하는 집단은 전부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다 우리에 맞서는 자”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고수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 우린 신념이나 믿음이 같지 않아, 그래도 난 그 사람의 이런저런 점은 존중해”라는 접근은 불가능해지며, “그는 한 가지에서 나와 생각이 달라, 그러니 다른 것도 다 좋을 수 없어”와 같은 생각이 퍼지게 된다.
사실, 포용력이 부족한 건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요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에 관해 그에게 불편한 정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적대적 집단이 어떤 우월성으로 자극할 때), 혹은 주변 세상에 관해 그에게 썩 편치 않은 정보에서 보호하고, 또 예를 들어, 노인이나 병자, 노숙자, 장애인 등을 두고 ‘나도 저런 모습이 될까 봐’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 사람은 제가 잘못해서 저렇게 된 거야, 나한테는 저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하는 확신 뒤에 숨으려 든다.
* 당신 자신이 사회 통념에서 좀 떨어져 있고, 그로 인해 ‘(다수인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괴롭힘을 가하는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 비인격화를 (혹은, 몰개성화를) 무너뜨려야 한다. 만약, 직장에서 당신이 대다수와 뭔가 좀 다르다 하여 괴롭힘을 당한다면, 구성원 각자와 개별적으로 접촉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당신한테서 사람을 보게끔. 그들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당신의 소신이 그들의 소신을 위협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당신이 채식주의자이거나 독신주의자라 해서, 고기를 먹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증오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난 어떤 걸 하지 않지만, 당신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아”라는 입장이 적합할 것이다.
그런 면을 보이려면, 당신의 포용이 필요하다. 아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경우에는,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면, 짐을 싸라. 그리고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하여 집단에서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선 어떡하나. 예를 들어, 당신이 childfree를 고수하는데 직장에는 전형적인 ‘엄마들’만 있어서 당신을 ‘여자답지 못하다’고 몰아세울 수 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이런 태도가 온당할 것.
“당신에겐 멋진 자녀들이 있고, 난 엄마가 되기로 한 당신 선택을 존중해요. 하지만 엄마가 되지 않기로 한 내 결정도 역시 존중한답니다.” 진심으로 말한다면, 통한다.
한데, 만약 속으로는 아이를 둔 그 엄마들이 다 어미돼지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당연히 안 먹히겠지. 진정성이 중요하다. 자신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 다른 이들이 당신을 공격하진 않는 대신 아예 무시하는 경우엔 어떡하나? 어떻게 처신하면 좋지?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시가 노골적인 공격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이건 공격과 마찬가지인데 다만 위장된 것일 뿐이고, 그래서 두 배로 긴장하게 만든다. 즉,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니까.
그 상황을 눈에 띄는 것으로 만들고, (건강과 생명에 위협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드러난 공격으로 바꾸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렇게 묻는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당신(들)은 얘기를 멈추고 보란 듯이 등을 돌리는군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 당신이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라는) 자기 관점을 말할 때, 듣고 나서 그런 짓은 그만두라면서 ‘올바른 길’을 알려줄 테니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어떻게든 당신을 저지하려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그런 귀찮은 성화를 피하려면, 어떻게 반응하고 처신해야 하나?
– 이럴 때 대개 상대방은 당신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는 주제넘게 나서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상대가 당신과 썩 상관없고 개인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사람일 때는,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다. “고맙지만,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1) 그게 왜 안 된다고 느끼는지 이유를 관심 있게 경청하고
2) 상대의 관점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럿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하고
3) 그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당신 소신은 다르다고 표명한다.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상대도 알아들을 것이다.
* 많은 사람이 왜 자기네와 같은 ‘꽈’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비관용 태도를 당당하게 여기기까지 하나? 왜 갖은 방법으로 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나?
– 왜냐하면, 그들 딴에 ‘옳다고’ 보는 어떤 다수의 일원이 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다수가 없으면 미미한 존재로 남을지도 모를 자신의 중요성을 키워 준다고 느끼니까. 즉, 이것 역시 불안감과 자기 회의, 신념 상실에서 비롯된다. 그런 상태에서, 옳다고 여기는 (커다란) 집단의 구성원임을 여봐란듯이 과시하다 보면, 제 눈에는 자신이 더 높아지고 여타 ‘시시껄렁한 자들’에 비해 슈퍼맨이라도 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겐 이런 착각이 왜 필요한가? 왜냐하면, 그 ‘시시껄렁하다고 여기고 싶은 자들’의 우월성에 그들 자신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하고 더 행복할 수 있거나 그렇게 보인단 말이야.’
이런 메커니즘은 위험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여러 번 가동됐다. 파시스트 독일에서 소수 민족과 성 소수자들을 상대로 그렇게 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그렇게 대했다. 우리 한국에서도 ‘수구 꼴통’이라 불리는 집단과 ‘위선적 진보’라 불리는 집단이 서로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 앞의 두 가지 사례와 양상이 조금 다를지는 모르나,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편협함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맹목적으로 자기편 감싸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네 진영과 패거리만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포용이나 공존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무늬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우려면, ‘흰 까마귀’가 지금보다 더 늘어나서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나와 생각 다른 사람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알고, 못된 것에 공분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흰 까마귀’들이.)
언젠가 처칠은 영국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응답했다.
“영국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유대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처칠의 이 언급 하나가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의 지향점을 100% 대변한다. (아래, 주석 참고)
하지만...
만약, 괴롭힘이 신체 안전을 실제로 위협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공격자에게 “난 당신한테 위험하고 방해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다 접어야 한다. 이때는 자신과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
혹시, 오호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이 이 정도의 갈라치기까지 치달은 건 아닌가.
만에 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겠다.
담대해지려면?..
당신의 생각을 적어 주시라! 담대하게!
* 주석: 앞에 처칠의 언급이라고 소개한 생각에 대해 이견도 있다. 즉, 그런 말은 처칠 시대 이전부터 나돌긴 했는데, 거짓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반유대주의의 선두로서 12세기에 유대인들을 내쫓은 최초의 국가이며, 14세기에 경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부분을, 그 진위를, 나는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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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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