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The Piraha Tribe 피라하 부족

Variety/우주정거장2019. 9. 30. 16:17
728x90

 

  피라하 부족  

 

 

인구 수 3-4백 명.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인 종족. 아마존강 유역에 살며 사냥과 채취가 주업이고 신을 모른다. 그들 언어는 한때 꽃 피웠던 무라노 어족의 마지막 잔재. 

 

“사람의 생각은 언어에 좌우된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을 이 부족이 입증한다. 달리 말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피라하 부족과 선교사 에버렛

 

 

작가이자 전직 선교사인 다이넬 에버렛이 피라하 부족 마을에서 30년을 살았다! 그들은 셈을 할 줄 몰라. 하나(1)도 못 센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살며 미래 계획을 세우지 않아. 과거가 그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도 날짜도 아침도 밤도 몰라, 하루 일정은 더더욱 몰라. 배고프면 먹고, 오래 자면 힘을 빼앗긴다고 여기면서 반 시간씩 짬짬이 잠을 잔다.

그들은 사유재산이란 걸 모르며, 현대 문명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죄다 하찮게 본다. 지구상 인구의 99%를 괴롭히는 불안과 두려움, 편견 따위를 그들은 모른다

 

잠자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은 잠자리로 향하면서 서로 무슨 말을 하나?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겠으나, 달콤하게 자고 좋은 꿈 꾸며 아침에 활기차게 일어나기 바란다는 인사를 나눈다. 한데 피라하 부족은 “잘 자!”라는 말 대신 “오래 잠잘 생각일랑 하지 마! 사방에 뱀이 득실거리니까!” 하고 말한다. 

그들은 잠자는 것이 해롭다고 여긴다. 

1) 잠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니까 

2) 자면서 사람이 죽는 것 같다가 좀 다른 사람이 되어 눈을 뜨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새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자면 본연의 자신에서 벗어난다는 데 있다. 

3) 뱀이 사방에 득실거니까. 

 

그래서 밤에 안 자고 그저 짬이 날 때마다 20-30분씩 야자수 나뭇잎으로 만든 벽에 기대 졸거나 나무 아래서 선잠을 잔다. 나머지 시간에는 다들 수다 떨고 웃고 뭔가를 손으로 만들고 화톳불 곁에서 춤추고 아이들이며 개들과 함께 논다. 

그렇게 하는데도 잠이 피라하 사람들의 외형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가 보다. 거기 사람들은 누구나 예전엔 사람들이 지금과 달랐음을 기억한다. 

 

피라하 부족의 아이들

 

"그 사람들은 체구가 훨씬 더 작고 섹스할 줄 모르고 심지어 젖을 먹고 컸어. 그런데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들 대신 이제 내가 있는 거야. 만약 오랫동안 잠자지 않는다면, 난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속임수가 먹히지 않고 내가 또 바뀌었음을 알고 나면 난 이름을 또 바꿀 거야…" 

 

그들은 6-7년에 한 번 꼴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연령대마다 그들에겐 적절한 이름이 있어서, 이름을 들으면 상대가 어린애인지 소년인지 청년인지 중년 사나이인지 노인인지 알 수 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 

 

밤이 되면 잠을 잠으로써 나날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생활 구조가 아닌 까닭에, 시간에 대해서도 아주 이상한 태도가 형성됐을 것이다. ‘내일’이며 ‘오늘’이 뭔지 모르고,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도 희미하다. 그러니 달력이나 시간 계산 등의 관습을 피라하 부족은 모른다. 그렇기에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피라하 사람들이 숲에서 포즈를 취하다.

 

에버렛이 1976년 처음 찾아간 당시 피라하 부족의 존재를 외부세계에서는 전혀 몰랐다. 언어학자요 선교사인 그는 그들이 음식물을 저장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상 원시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은 음식물을 저장하지 않고 그냥 잡아서 먹는다. (혹은 운이 나빠 먹이를 잡지 못하면 먹지도 않는다.) 먹는 것에도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 매일 먹어야 하지?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들은 하루에 한두 끼 먹으며, 마을에 먹을거리가 많이 있을 때도 일부러 절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728x90

 

숫자와 거리가 먼 사람들 

 

선교 조직은 피라하 부족의 마음을 일깨워 신에게 인도하려고 오랜 기간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선물로 받은 예쁜 팬츠로 알몸을 기꺼이 가렸으며 통조림 음식을 흥미롭게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소통이 사실상 끝나곤 했다. 아무도 피라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젊고 재능 있는 언어학자를 거기로 파송했다. 에버렛은 언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언어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아주 독특해서,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피라하 부족의 언어에는 자음 7개와 모음 3개가 전부다. 더 큰 문제는 어휘에 있다. 그들은 대명사를 몰라서, 만약 ‘나’와 ‘너’, ‘그들’의 차이를 말로 표시해야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든 유일하게 접촉하는 이웃 부족인) 인디언 투피가 쓰는 대명사를 서툴게 사용한다. 

그들 말에서는 동사와 명사가 특별히 나뉘지 않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 규준이 여기서는 대체로 불필요한 듯하다. 예를 들어, 피라하 부족은 ‘하나’라는 개념을 모른다. 오소리와 까마귀, 개들도 아는 것을 피라하 부족은 모른다. 그들에겐 이게 하도 복잡한 철학 같은 것이어서, 이게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사람은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만큼 품을 들여야 한다. 

 

피라하 부족의 부부와 아기

 

그들은 숫자와 셈을 모르며, 모든 것을 ‘조금/약간’과 ‘많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처리한다. 그들에게 피라냐 두세, 서너 마리는 ‘약간’이며 여섯 마리는 확실히 많은 것이다. 그러면 피라냐 한 마리는 뭔가? 이건 그냥 피라냐이다. 

(그들에겐 셀 필요가 없는) 피라냐를 왜 세어야 하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작시법을 설명하는 게 차라리 더 쉽다. 따라서 피라하 사람들은 자기네가 소수 부족이라고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 보기에 300명은 당연히 많은 것이다. 그들에게 70억 인구를 얘기해봤자 쓸모가 없다. 70억 역시 그냥 많은 것이니까. 너희도 많고 우리도 많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야. 

 

예의 차리지 않는 사람들 

 

“안녕”, “어떻게 지내?”, “감사합니다”, “잘 가”, “미안해요”, “고마워요” 같은 말을 문명사회 사람들이 쓰는 까닭은 서로 상대에게 좋은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피라하 부족은 그런 말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 

그런 게 하나 없어도 그들은 서로 아끼며, 주변에서 그들을 보면 다들 반가워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밀히 말해 예의나 정중함이란 상호불신의 부산물이다. 그런데 에버렛에 따르면, 상호불신이란 피라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감정이란다. 

 

모욕감이나 원한을 모르는 사람들 

 

수치심이나 죄책감, 모욕감, 원한이 무엇인지 피라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만약 하아이오하아아가 물고기를 강물에 떨어뜨렸다면, 이건 나빠. 물고기가 없으니 점심도 없어. 그러나 하아이오하아아가 뭔 잘못이람? 물고기를 강물에 떨어뜨렸을 뿐이잖아. 만약 어린 키이히오아가 오키오히아아를 밀쳤다면, 이건 나빠. 왜냐면 오키오히아아의 다리가 부러져서 치료해야 하니까. 그러나 이건 그런 일이 일어났기에 생긴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피라하 부족은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아

 

여기서는 어린애들을 나무라지 않고 창피 주지도 않는다. 화톳불의 잉걸덩이를 쥐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아이들한테 알릴 수 있고, 강가에서 뛰노는 아이를 강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긴 한다. 그러면서도 피라하 부족은 욕하거나 꾸중할 줄을 모른다.

만약 젖먹이가 엄마 젖을 먹지 않더라도 아무도 억지로 먹이려 들지 않는다. 먹지 않는 이유를 아기가 더 잘 아니까. 만약 아기 낳으러 강으로 간 여인이 낳지 못하고 사흘째 숲에서 통곡한다면, 실제로는 출산이 아니라 죽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굳이 거기로 가서 여인을 말릴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남편은 거기로 갈 수 있는 것이, 갑자기 듬직한 설득 근거를 꺼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백인이 왜 상자에 이상한 철제 물건을 담아 거기로 달려가려고 하는 거야?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 

 

피라하 사람들에겐 의식이나 종교적 관념이 극히 적다. 그들은 자기네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숲의 자식임을 알고 있다. 숲은 신비로 가득해… 아니, 그게 아니야, 숲은 법칙과 논리와 질서가 없는 우주야. 숲에는 수많은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이 다 거기로 간다. 그래서 숲이란 무서운 곳이다. 

 

그러나 피라하 부족이 아는 두려움이란 문명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결이 다르다. 뭔가 두려워한다는 것이 문명인에겐 나쁜 일이다. 그런데 피라하 사람들은 두려움을 어떤 매력이 담긴 아주 강한 감정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를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 에버렛이 아침에 잠을 깨어 보니 마을 사람들이 다 강가에 모여 있었다. 부족에게 뭔가를 경고하고 싶은 영혼이 거기에 왔다는 것이다. 강변에 나와 에버렛이 본 장면은… 사람들이 텅 빈 공간을 둘러싼 채 겁에 질려 눈을 휘둥그레 떴으면서도 활기차게 그 빈 공간과 대화하고 있더라. 에버렛이 “거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보이는걸!” 하고 말하자, 영혼이 피라하 부족에게 온 것이기에 그에겐 당연히 안 보인다는 대답이 나왔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에게 혼령이 개인적으로 올 것이라 했다. 

 

신이 없어도 사는 사람들 

 

지금까지 나온 얘기로 인해 피라하 부족에게는 선교가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유일신이라는 생각이 그들한테는 겉돌았어. 왜냐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하나’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누군가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메시지 역시 그들에겐 의아스럽기만 했다. ‘아, 저렇게 덩치 좋고 똑똑해 보이는 사나이가 사람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모른단 말이야?’

 피라하 언어로 번역된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도 썩 설득력 있게 보이지 못했다. ‘시대’나 ‘시간’, ‘역사’라는 개념이 그들에겐 허튼소리이다. 사악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아주 선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은 에버렛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직접 보았어? 아니라고?

그러면, 이 그리스도를 본 사람을 당신이 보았나? 그것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피라하 사람과 에버렛이 강에서 촬영

 

이 체구 작고 허기를 달고 살며,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서두르는 법이 결코 없으며 늘 웃음 짓는 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에버렛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이란 성서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이며, 종교는 우리를 더 좋거나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몇 해 지나서야 그가 또 깨달은 게 있었으니… 

‘이들을 내가 가르칠 게 아니라, 내가 이들한테서 배워야 해.’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8단계. 승복이라는 의미 37

지금 순간의 힘 practice 방법

(21) 존재한다는 기쁨

(12) 지금 순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어

(11) 시간이란 망상에서 벗어나기

(13) 영적 차원에 이르는 열쇠

(15) 심리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8) 두려움의 근본 원인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 (2)

'나'를 찾기 - 분리, 동일시

(3) 깨달음이란?

The Power of Now

내 안에 있는 보물

깨달음 추구하는 사람들

09. 우리 삶에서 단어들의 역할

누군가가 마음을 선사할 때

환생의 증거? 전생을 얘기하는 아이들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의 명구 24개

남자 사귀면서 여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77가지

 

728x9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