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대화를 통제하기가 상당히 힘든 일이긴 해도,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일주일 동안 추적해 보라.
그리고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없음과) 관련된 생각을 다 기록하라.
자문하라.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지?’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정적인 생각 대부분에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긴장이나 불안을 일으키는 다른 이유도 헤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당신의 성격과 성취의 긍정적인 특성 목록을 작성해 보라. 그리고 부정적인 것이 생각 흐름에 스며들 때 그 목록을 읽는다.
3. 자신감이 사라지는 때를 알아두라.
앞 항목에서 언급한 대로 목록을 작성한다면, 회의하거나 의구심 품는 일도 동시에 한다는 걸 곧 알아차릴 것이다.
이를테면, 하루를 멋지게 보냈지만, 아무것도 된 게 없고 모든 게 별로라는 멍청한 생각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머릿속에서 맴돌게 되는 식.
그런 생각의 출현을 그저 자신의 심리 특성이라 치부하고, 밤중에 습관적으로 찾아드는 ‘자기 회의 (self-doubt)’를 자동적인 일로 받아들이면서 그냥 무시하라.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는 의식 상태인) 자각으로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설 거예요.
이때의 느낌을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존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존재> 안에 깊이 들어가 있어요.
현재 순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 완전하고 충실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잔잔하면서도 정말 기뻐하는 상태가 꼭 따라붙습니다.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며 감정이며 체험 등이 죄다 썩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상태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거꾸로 현실을 더 깊고 객관적으로 자각하여 납득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상태가 아니라, 에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의 물질세계에서 살고 행동하는 법을 서서히 익히면서도 평온하고 조화로운 <존재>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네 활동이 주눅 드는 건 결코 아니며, 되레 이전보다 힘을 훨씬 덜 들이고도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게 될 거예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힘이 돕는 것이죠.
마인드와 분리되어 잡념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지금> 순간과 하나가 된 덕분에 자기 안에서 <존재>를 찾은 사람에게는 우주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서 우리가 더 우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총기를 띠고 나아가 현명해지기까지 합니다. 무의미한 생각의 흐름 대신 알짜 지식을 갖추게 되니까 말이지요.
잡다한 생각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무익한 마인드 상태요, 내면의 고요는 마인드가 유일하게 거두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인드와 이것이 낳은 생각의 줄기가 우리와 <존재>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데 이것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에 담겨 있는 힘을 전부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자기 생각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가 때로는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에고>요 <거짓된 나>입니다. 바로 이 에고가 자기 자신이며 (생각을 포함하여) 자기가 생산하는 것을 죄다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거예요.
반면에 <참된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중요해 보일 때가 더러 있긴 해도 보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마인드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본질과 진정 융합됨을 느낄 수 있으며, 이때 생각이며 문제며 걱정 따위가 다 의미를 잃고 중요하지 않게 돼요. 그리고 이 덕분에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문제를 대체로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더 심각하게 대할수록 해결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경솔하게 대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라는… 평범한 일들과 일상의 걱정근심을 본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본질이 결코 아니에요. 인생의 으뜸 요소가 아니에요.
가장 급한 것은… <존재>와 하나 되는 것, 또 이 합일을 얻어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잡다한 생각에 빠져서는 이 점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멈추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네 마인드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생각의 내용이 공허한 수다에 불과하여 아무 데도 쓸모없으며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런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면, 자기 생각을 그저 귀하게만 여겨 마냥 매달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요.
실습 11
나중에 마인드에서 또 생각이 줄줄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십시오.
“이 생각들에는 별 의미가 없어. 중요하지 않아. 진지하거나 심각한 게 아니야.”
그러고 나서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세요.
마인드가 무의미한 수다를 떨고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이 생각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반복하여 자신에게 말하세요.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나면... 내면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면서 매혹적이고 조화로운 순간을 접하게 돼요. 거기엔 오직 기쁨만 있을 뿐이요, 아픔이나 고통 따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진짜 자신과 진짜 삶에 파고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젠, 그런 상태를 간간이 누리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마인드와 동일시하면 그것에 에너지를 더 많이 주며, 마인드를 관찰하면 거기서 에너지를 거둬들인다.
마인드와 동일시하면 심리적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 내며, 마인드를 관찰하면 심리적 시간을 넘어선 차원이 열린다.
마인드를 멈춘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질환을 이겨내고 균형을 되찾는다는 뜻
마인드가 일순간 멎으면서 모든 생각이 멈추고 순간이 정지하는 동시에 온 세상이 정지한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매혹적인 상태인지 압니다. 그건 최고의 의식 상태, 곧 삼라만상과 합일되어 환희를 맛보는 상태로서, 그 순간에는 열락(悅樂)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그걸 잊지 못할 텐데…
그러나 그 상태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하도 쉽게 사라지는 바람에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임의로 다시 그 상태에 들어서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도 역시 느낄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 상태에서 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존재>의 일부이며 우주의 조화를 다 품는 것을 발견하고 <참된 나>를 찾으려면,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야만 가능하지 않겠어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대인들의 생각하는 과정이 정말 병적인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기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외려 마인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요. 이건 신체 세포들의 증식이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는 것과 비슷해요. 균형이 깨지고 병이 생깁니다.
필요할 때 임의로 마인드를 켰다 껐다 하는 법을 배운다면… 생각하는 과정을 통제하게 되어 균형이 복원되겠지요.
그러나 마인드 끄는 방법을 모르고 그렇게 할 힘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마인드에 종속되어 결국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인드를 자기 뜻대로 멈추는 법을 어떻게 익히나요?
아주 드물게 어쩌다 ‘마인드가 잠잠한’ 상태에 (혹은, 무아지경에) 이르는 게 아니라, 늘 의식적으로 고요한 내면 상태에 들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면의 대화를 멈추는 방법은 많은데, 에크하르트 톨레가 아주 유용한 방법을 하나 제시합니다.
다만, 대다수는 그런 번뜩임을 겪고 나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와 늘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출한 기법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지, 그걸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해물을 버려야 하는데, 그건 바로 마인드와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존재>와 갈라서게 하는 것이니까.
이 개념을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보지요. 부디 선입견을 다 버리면 좋겠군요.
이런 개념을 접하면서 처음 내보이는 반응은 아마도 이런 저항일 테니까요.
“아니, 마인드와 시간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단 말이야? 마인드와 시간 없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정신 나가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거나, 아니면 존재하기를 아예 끝낸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곧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시간 개념이 없는 동물 수준으로 내려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로, 의식의 다음 진화 단계로 올라선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즉,
제한된 인간 마인드에서 우주 마인드로,
선형적 시간이라는 함정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간과 마인드를 장악하게 되겠지요. 장악한다고 해서 마인드와 시간한테 무슨 거창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둔다는 뜻일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삶을 저희 뜻대로 결정하게 놔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둘을 지배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마인드와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아주 밀접한데, 어떻게 그런지는 이제 곧 알아볼 겁니다. 마인드는 시간과 어울려서 우리가 <존재>로 달려가지 못하게 함정을 만들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볼까요.
마인드는 어떻게 작동하나
사람에게 마인드가 부여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마인드만큼 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집을 짓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이루거나, 혹은 뭔가를 손수 만들거나 사업 전략을 세우거나 책을 쓰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물론, 계획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분석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최선을 택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 궁리해야겠지요.
구체적인 뭔가를 입안하고 실행할 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에 걸맞게 활용합니다. 이때 마인드는 우리가 작업에 동원하는 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네 마인드의 역할이 그런 일에만 국한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데, 인류는 사실상 큰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마인드에게 파워를 지나치게 많이 내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내 마인드가 바로 나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마인드를 과제 해결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마인드가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게 됐습니다.
자신에게 조용히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흠, 내 머릿속을 마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거기서 제멋대로 따로 살면서 말이야.’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마인드가 당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절대고 속삭이고 지시하고 주장하고 요구한다는 사실도 분명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리고…
이 끝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이지 잠깐이나마 쉴 틈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이건 곧 우리가 마인드를 그 본래 소명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마인드가 제 본연의 자리와 역할을 망각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인에게 봉사해야 할 마인드가 외려 주인을 쥐고 흔들어요.
마인드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을 마인드가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판단하고, 그 모든 것에 의견 덧달고 꼬리표 붙여서 분류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변의 사물과 현상과 사안과 사람에 대해 당신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깊이 규명하고 인식할 시간을 채 다 쓰지도 못했는데, 마인드가 먼저 중뿔나게 제 판단을 들이밉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실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혹은, 보호하는) 방패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생각의 차단막입니다.
이 차단막이 당신과 당신 자신을, 당신과 동료들을, 당신과 세상을, 당신과 자연을, 그리고 당신과 신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분리 망상을 일으킵니다.
덧붙이자면, 이 분리 망상을 우리의 거짓된 나인 <에고>가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쓰일 때 마인드는… 유용하다. 갖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체가 될 때 마인드는… 해롭다.
자신의 머릿속 대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커녕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야 할 순간에는 역부족이 될 정도로 우리 힘을 잔뜩 빼앗기만 할 뿐이에요.
머릿속 대화에 들어가는 힘은 다 허튼 데에… 그 무엇에도 소용없는 말과 생각들을 찧고 빻는 데 쓰이기만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 광인들을 떠올려 보라고 하는군요.
그들은 저 혼자서 뭔지 모를 소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려요.
그러나 광인이라 불리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상인’들은 기껏해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일 뿐이니까요.
엄밀히 보자면, 우리네 대다수가 사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 목소리’의 힘에 전혀 맞서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 중얼거리니까요.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리네 ‘머릿속 목소리’는…
멀고 가까운 기억을 더듬고, 불평하며 비탄에 빠지고, 뭔가를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뭔가에 화내고 뭔가를 예상하고, 뭔가를 우려하고 희망하고 후회하고, 누군가와 비교하고 화내고 욕하고, 판단하며 비판하고 분노하고, 때론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모욕감을 느낄 만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미국의 연구자들이 사람의 내면 목소리를 해독하게 됐다고 한다. 즉, 사람이 속으로 말하는 (생각하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알고리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간질 발작으로 시달리는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뇌 활성화의 특정 수준을 기록했다.
이를 위해 머리에 특수한 전극들을 붙였다.
그런 뒤 여러 대통령의 연설문이며 동요 몇 편을 보여주고, 그 텍스트들을 먼저 소리 내어 읽게 했다.
다음에는 흉중에서 (마음속으로) 읽게 했다.
또 잠시 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거나 다른 뭔가를 좀 생각하게 했다.
이 각각의 경우 머리에 장치한 전극들이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반응했는데, 텍스트를 소리 내 읽을 때 뇌에서 특정한 뉴런들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뉴런들 움직임의 크기를 각각 기록했고, 이 데이터를 정리하여 spectrogram을 (스펙트럼 사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연구자들은 피험자가 읽은 텍스트를 재현하게 됐다.
그런데 속으로 읽은 텍스트를 해독할 때도
이 결과는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과학의 힘. 흠, 인간의 신비가 조금씩 벗겨지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이른바 <내면의 (목)소리>는 마음 공부와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하고 화급한 주제이다. 집중 조명 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