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로버츠 (3-1)
할리우드 최고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다양하고 생생한 역할 덕분에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팬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역할이
1990년 개봉한 <pretty woman>에서 비비안 워드.
줄리아 로버츠는 진정한 은막의 스타요 당대 최고 배우라는 위상을 계속 굳혀 오기만 했다.
이제 50대 초반에 들어선 그녀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사실 30가지를 소개한다.
어린 시절에 대해, 배우로서 출세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실제에서도 그녀를 왜 ‘도망친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렀는지,
꿈을 어떻게 이뤘는지,
사생활은 어떤지 등등.
1967년 10월 28일 조지아 주에서 출생. 가족의 세 번째 아이였다.
오빠 에릭은 유명한 영화배우이자 TV 탤런트로서 오스카와 골든 글로브의 수상 후보자였다.
언니 리자 역시 영화와 TV에서 연기하며 프로듀서로도 활동한다.
줄리아 로버츠의 혈통에는
영국, 독일, 스웨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뿌리가 들어 있다.
줄리아 로버츠의 엄마와 아빠도 아마추어 배우였다.
그녀의 부친이 아동 연기 학교를 자그마하게 운영했는데, 여기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녀들이 다녔다.
셋째 아이 줄리아가 태어날 때 부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이를 알고서 킹 목사 부부가 자녀들 교육에 감사하는 뜻으로 병원비를 대신 지불했다.
(줄리아가 11세 때 엄마, 언니, 계부와 함께)
줄리아가 4살 때인 1971년 부모가 이혼했다.
몇 해 뒤 엄마가 연극 평론가 마이클 모츠와 재혼했는데,
이 혼인을 나중에 엄마는 ‘일생에 가장 큰 실수’라고 불렀다.
모츠는 그녀와 그녀 아이들에게 가혹하게 대했으며,
이 때문에 줄리아의 엄마는 1983년 이혼 소송을 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줄리아 로버츠는
자신의 힘겨운 유년기를 한 번도 공공연히 입에 올리지 않았다.
(18세 줄리아 로버츠. 1985년)
줄리아는 학교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영화 <Dying Young> (1991)에서)
어린 시절에 줄리아 로버츠는 배우가 아니라 수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줄리아는 저널리즘을 전공했지만, 학업을 끝마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국 배우 길드에 가입할 때 본명인 줄리 로버츠를 줄리아 로버츠로 바꿔야 했다.
그맘때 그 조합에 줄리 로버츠라는 이름의 여배우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에릭 로버츠와 함께)
당시 이미 유명한 배우가 된 오빠 에릭의 권유로
줄리아는 (1989년 개봉한) 영화 <Blood Red>에서 대사가 두 단어뿐인 단역을 맡았고,
그 뒤에 인기 배우가 되었다. 나중에 에릭 로버츠는
“내가 줄리아에게 영화계로 들어서는 길을 놓아 주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중에 에릭이 캘리 커닝햄과 딸의 양육권 문제를 두고 다툴 때
줄리아가 왠지 캘리의 편을 드는 바람에 그 이후 남매의 사이는 아주 소원해졌다.)
(영화 <Steel Magnolias>의 한 장면)
23세 되던 1990년 줄리아 로버츠는 멜로드라마 <Steel Magnolias> (1989)에서
셸비의 역할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자에 지명됐으며 골든 글로브 상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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