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애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들의 순수함과 취약성이며,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어렸을 적에 믿기 어려운 재주와 재능이 우리한테 있었음을 우린 이미 기억도 못한다. 그걸 그저 세월과 함께 사라지게 놔두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자신을 교육받고 성숙하고 주변 세계를 다룰 줄 알게 돼 훨씬 더 좋아졌다고 보긴 하지만,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잃어버린 놀라운 재능이 또 여럿 있기도 하다. 그런 재능 덕분에 정신 건강이 상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독특한 관점으로 보게 됐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내면의 어린애와 연결을 복구하고 왕년에 언젠가 지니고 있던 힘을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우리의 너그러움
어린 시절에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한 ‘다 내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나 인색함으로 아직 망가지지 않았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필요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욕구와 훨씬 더 많이 연결돼 있다. 우리가 주는 까닭은 그 자체로 기분이 좋기 때문이지 반대급부로 뭔가 얻을 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네 의도가 바뀌어 가면서, 이 타고난 관대함을 잃고 있다.
어떤 이들이 나이 들어서도 어린 시절의 유머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네 대다수는 농담과 웃음을 출세 수단으로 삼으면서 성장한다. 일상에서 유머를 조금만 발휘해도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더 자주 농담도 하고 명랑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을 즐기고 만족해하며, 현재에 살면서 우리 내면의 평온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평온은 성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다른 사람들과 소통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대체된다. 우리의 마인드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멈출 줄을 모른다. 마음을 맑게 하고 이 내면세계를 다시금 누리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겠다.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하고 아이한테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꽉 차 있던 자신감을 금방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듦에 따라 현실이 파고들면서 확신에 울타리를 둘러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꿈에 사회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면서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더 이상 품지 않는다.
만약 ‘이건 뭔가 잘못되고 있어’라든가 어떤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굳은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유년기의 직관이다. 자연의 이 선물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매일 우리를 돌보아 준다. 하지만 이 직관이 더 강하고 정확해졌다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간과하면 그건 약해질 것이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지금 보기에 좋은 것에 빨리 반응하고 즉각적인 결정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긴다. 나이 먹으면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분석하고 숙고하게 된다. 행동의 후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야 물론 좋지만, 지나치게 궁리에 빠져서 좋아하는 행위를 놓치는 일이 없게끔 균형을 찾아야 한다.
7. 우리의 명상 능력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 주의를 집중하고 부정적인 것에 마음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명상과 주의력을 자연스럽게 실습한다.
바로 이것이 아이들이 저절로 행복하고 기쁨에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바쁜 성인이 되어서도, 아주 유용한 이 행위를 지속하기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종종 본능적으로 숨을 멈춘다. 그건 물론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고 그렇게 한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걸 즐긴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할 때, 숨을 참는다는 게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전문가들 말로는, 호흡 컨트롤은 심리적 안정이며 침착함, 에너지 증대, 집중력 고조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9. 최고선에 대한 우리의 믿음
어린 시절에 우리는 마주치는 사람 누구한테서든 가장 좋은 걸 본다. 순진무구한 우리는 만나는 사람 모두가 천질이 선하며 주변 세상에 범람하는 어둠과 악을 알지 못한다고 여긴다. 한데 나이 먹어 가면서 우리는 준엄한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며 최고선에 대한 믿음도 사라진다.
우리의 양심은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인식이며 자신의 도덕과 신념에 대한 견식이다. 나이 먹어 가면서 우리는 이런 측면을 종종 배격하면서 판단의 오류를 합리화한다. 성공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는 한 그렇다. 하지만 잠깐 멈춰서 자신의 양심에 귀 기울인다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복잡한 일상에서 때론 숨도 돌리고 그저 '멍 때리는' 순간도 필요합니다. 그럴 땐 아마 자연이 최고일 거예요.
풀잎 하나, 꽃잎 하나, 모래알 하나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하지요?
고원 지대에 있는 소도시에서는 기후가 선선해서 여타 지역보다 여름이 좀 천천히 다가오네요. 그래서 결실이 좀 더딘 감이 있어요. 딸기꽃, 오이꽃, 도라지꽃, 호박꽃, 방울토마토꽃, 백합, 양귀비 등이 피고, 피었다 지고 있습니다. 지는 꽃잎들 끝자락에는 열매를 달면서 말이지요.
그런 가운데 벌들이 꽃으로 옮겨 다니고 개구리가 수박 잎사귀 밑에서 튀어나오고 잠자리도 윙윙 맴을 돕니다. 칠월 초순 마당 한구석 텃밭에 얽힌 소박한 장면들 보면서 머리를 식히시지요. ^^
흐흐흐... 혼자 또 속절없이 웃음 흘리는 까닭은, 문자 그대로 '손바닥만한 텃밭 일구면서, 뭐 그리 거창한 생각에 잠기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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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전쟁, 에너지 전쟁, 물 전쟁, 식량 전쟁 등등을 운운하는데, 그 가운데 우선이고 으뜸은 물과 먹을거리 아닌가요? 돈다발이나 메르세데스 벤츠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가뜩이나 먹을거리 안전에 신경 예민해지는 즈음이라 국가든 개인이든 안전 식량 자급에 부쩍 공을 들여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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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고추, 부추, 호박, 가지, 파, 쑥갓, 참깨, 딸기, 수박, 참외, 땅콩... 조금씩, 이것저것, 모종을 심었지요. 아침마다 녀석들 자라는 걸 보면서 나도 함께 익어 가면 좋겠다 싶어요. 그러려고 애는 쓰는데, 정말 그런데, 그 공부 진도가 썩 신통치 못하니 말입니다. 그냥, 그러다가,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가는 게 아닌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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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내린 비 덕분에 흙이 촉촉하게 젖었네요. 주말 아침, 축 처진 방울토마토 가지 올려주고는 하늘 한번 올려다봅니다. 병아리 물 한 모금 찍어 먹고 하늘 쳐다보듯이 말이죠. 한 달이 채 안 지났는데 텃밭이 제법 많은 걸 선사합니다. 감사할 따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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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과 거기 딸린 푸른 식구들 곁에서 아침마다 호흡 체조도 하고 목소리 단련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노부부는 (그림 가운데) 인생의 잔과 (잔 위쪽) 믿음의 왕관을 함께 나눈다. 이 두 심벌은 황금빛으로 잔을 채우고 있는 사랑을 노부부가 공유했음을 보여준다.
오캄포는 그림과 조각에 평생을 바쳐 왔다.
작품들에서 현실적인 세세함과 비유적인 디테일을 한데 엮어서 주로 은유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돈키호테의 그림에는 갖가지 얼굴들이 도대체 몇 개나 들어 있을까.
당신은 몇 개를 찾아냈나?
<바다의 얼굴> (Octavio Ocampo. Metamorphosis Art Faces In Ocean)
-- 1분 동안만 멀게 가깝게, 전체적으로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라.
Octavio Ocampo (1943~ ),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디자이너 가족에서 성장,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했다.
그의 재능은 그림과 조각에 국한되지 않고 연기와 댄스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러나 1976년부터는 그림과 조각에만 몰두.
자신이 만드는 이미지 안에서 비유적인 디테일들을 중첩하고 병치하는 테크닉을 발휘하여,
주로 변형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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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포와 비슷한, 어쩌면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를, 다른 그림을 하나 더 살펴본다.
바로, 살바도르 달리의 <에스파냐>.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조국의 운명에 늘 관심 기울이고 염려했다. 따라서 그가 시민전쟁 (스페인 내전, 1936~1939)이라는 모티브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럽다. 이를 1938년 초현실적인 감각으로 묘사했다.
화폭 전반에 내전으로 황량해진 에스파냐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 멀리, 지평선에 산과 건물 같은 게 보인다. 사암도 아니고 석회암도 아니라, 어쩌면 주민들도 모르는 돌로 지은 것일지도... 또한 아스라이 보이는 하늘은 침침한 잿빛이며 지저분하다. 그건 안개에 잠긴 고원과 흡사하다.
관객의 눈길 바로 앞에 커다란 서랍장 같은 게 보이는데, 맨 위에 서랍 하나만 있다. 손잡이는 청동 핀과 비슷하고 아주 새 것인 듯하다. 서랍에서 뭔가가 빠져나오고 있다. 암적색의 (피 묻은?) 천 조각 같기도 하고 인간의 장기 같기도 하다. 서랍장에 여인이 기대 서 있다. 혼란 속에서 내달리는 군인들과 짐승들 모습이 그녀의 전체 실루엣을 이룬다.
여인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특징으로 보자면 토박이 에스파냐 여인. 그래서 그녀 이름은 에스파냐이다. 황폐해지고 고통에 시달리는 나라. 이 나라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초래된 사변의 와중에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작가이자 전직 선교사인 다이넬 에버렛이 피라하 부족 마을에서 30년을 살았다! 그들은 셈을 할 줄 몰라. 하나(1)도 못 센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살며 미래 계획을 세우지 않아. 과거가 그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도 날짜도 아침도 밤도 몰라, 하루 일정은 더더욱 몰라. 배고프면 먹고, 오래 자면 힘을 빼앗긴다고 여기면서 반 시간씩 짬짬이 잠을 잔다.
그들은 사유재산이란 걸 모르며, 현대 문명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죄다 하찮게 본다. 지구상 인구의 99%를 괴롭히는 불안과 두려움, 편견 따위를 그들은 모른다.
잠자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은 잠자리로 향하면서 서로 무슨 말을 하나?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겠으나, 달콤하게 자고 좋은 꿈 꾸며 아침에 활기차게 일어나기 바란다는 인사를 나눈다. 한데 피라하 부족은 “잘 자!”라는 말 대신 “오래 잠잘 생각일랑 하지 마! 사방에 뱀이 득실거리니까!” 하고 말한다.
그들은 잠자는 것이 해롭다고 여긴다.
1) 잠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니까
2) 자면서 사람이 죽는 것 같다가 좀 다른 사람이 되어 눈을 뜨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새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자면 본연의 자신에서 벗어난다는 데 있다.
3) 뱀이 사방에 득실거니까.
그래서 밤에 안 자고 그저 짬이 날 때마다 20-30분씩 야자수 나뭇잎으로 만든 벽에 기대 졸거나 나무 아래서 선잠을 잔다. 나머지 시간에는 다들 수다 떨고 웃고 뭔가를 손으로 만들고 화톳불 곁에서 춤추고 아이들이며 개들과 함께 논다.
그렇게 하는데도 잠이 피라하 사람들의 외형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가 보다. 거기 사람들은 누구나 예전엔 사람들이 지금과 달랐음을 기억한다.
"그 사람들은 체구가 훨씬 더 작고 섹스할 줄 모르고 심지어 젖을 먹고 컸어. 그런데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들 대신 이제 내가 있는 거야. 만약 오랫동안 잠자지 않는다면, 난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속임수가 먹히지 않고 내가 또 바뀌었음을 알고 나면 난 이름을 또 바꿀 거야…"
그들은 6-7년에 한 번 꼴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연령대마다 그들에겐 적절한 이름이 있어서, 이름을 들으면 상대가 어린애인지 소년인지 청년인지 중년 사나이인지 노인인지 알 수 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
밤이 되면 잠을 잠으로써 나날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생활 구조가 아닌 까닭에, 시간에 대해서도 아주 이상한 태도가 형성됐을 것이다. ‘내일’이며 ‘오늘’이 뭔지 모르고,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도 희미하다. 그러니 달력이나 시간 계산 등의 관습을 피라하 부족은 모른다. 그렇기에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에버렛이 1976년 처음 찾아간 당시 피라하 부족의 존재를 외부세계에서는 전혀 몰랐다. 언어학자요 선교사인 그는 그들이 음식물을 저장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상 원시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은 음식물을 저장하지 않고 그냥 잡아서 먹는다. (혹은 운이 나빠 먹이를 잡지 못하면 먹지도 않는다.) 먹는 것에도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 매일 먹어야 하지?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들은 하루에 한두 끼 먹으며, 마을에 먹을거리가 많이 있을 때도 일부러 절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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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거리가 먼 사람들
선교 조직은 피라하 부족의 마음을 일깨워 신에게 인도하려고 오랜 기간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선물로 받은 예쁜 팬츠로 알몸을 기꺼이 가렸으며 통조림 음식을 흥미롭게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소통이 사실상 끝나곤 했다. 아무도 피라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젊고 재능 있는 언어학자를 거기로 파송했다. 에버렛은 언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언어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아주 독특해서,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피라하 부족의 언어에는 자음 7개와 모음 3개가 전부다. 더 큰 문제는 어휘에 있다. 그들은 대명사를 몰라서, 만약 ‘나’와 ‘너’, ‘그들’의 차이를 말로 표시해야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든 유일하게 접촉하는 이웃 부족인) 인디언 투피가 쓰는 대명사를 서툴게 사용한다.
그들 말에서는 동사와 명사가 특별히 나뉘지 않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 규준이 여기서는 대체로 불필요한 듯하다. 예를 들어, 피라하 부족은 ‘하나’라는 개념을 모른다. 오소리와 까마귀, 개들도 아는 것을 피라하 부족은 모른다. 그들에겐 이게 하도 복잡한 철학 같은 것이어서, 이게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사람은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만큼 품을 들여야 한다.
그들은 숫자와 셈을 모르며, 모든 것을 ‘조금/약간’과 ‘많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처리한다. 그들에게 피라냐 두세, 서너 마리는 ‘약간’이며 여섯 마리는 확실히 많은 것이다. 그러면 피라냐 한 마리는 뭔가? 이건 그냥 피라냐이다.
(그들에겐 셀 필요가 없는) 피라냐를 왜 세어야 하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작시법을 설명하는 게 차라리 더 쉽다. 따라서 피라하 사람들은 자기네가 소수 부족이라고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 보기에 300명은 당연히 많은 것이다. 그들에게 70억 인구를 얘기해봤자 쓸모가 없다. 70억 역시 그냥 많은 것이니까. 너희도 많고 우리도 많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야.
예의 차리지 않는 사람들
“안녕”, “어떻게 지내?”, “감사합니다”, “잘 가”, “미안해요”, “고마워요” 같은 말을 문명사회 사람들이 쓰는 까닭은 서로 상대에게 좋은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피라하 부족은 그런 말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
그런 게 하나 없어도 그들은 서로 아끼며, 주변에서 그들을 보면 다들 반가워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밀히 말해 예의나 정중함이란 상호불신의 부산물이다. 그런데 에버렛에 따르면, 상호불신이란 피라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감정이란다.
모욕감이나 원한을 모르는 사람들
수치심이나 죄책감, 모욕감, 원한이 무엇인지 피라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만약 하아이오하아아가 물고기를 강물에 떨어뜨렸다면, 이건 나빠. 물고기가 없으니 점심도 없어. 그러나 하아이오하아아가 뭔 잘못이람? 물고기를 강물에 떨어뜨렸을 뿐이잖아. 만약 어린 키이히오아가 오키오히아아를 밀쳤다면, 이건 나빠. 왜냐면 오키오히아아의 다리가 부러져서 치료해야 하니까. 그러나 이건 그런 일이 일어났기에 생긴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여기서는 어린애들을 나무라지 않고 창피 주지도 않는다. 화톳불의 잉걸덩이를 쥐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아이들한테 알릴 수 있고, 강가에서 뛰노는 아이를 강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긴 한다. 그러면서도 피라하 부족은 욕하거나 꾸중할 줄을 모른다.
만약 젖먹이가 엄마 젖을 먹지 않더라도 아무도 억지로 먹이려 들지 않는다. 먹지 않는 이유를 아기가 더 잘 아니까. 만약 아기 낳으러 강으로 간 여인이 낳지 못하고 사흘째 숲에서 통곡한다면, 실제로는 출산이 아니라 죽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굳이 거기로 가서 여인을 말릴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남편은 거기로 갈 수 있는 것이, 갑자기 듬직한 설득 근거를 꺼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백인이 왜 상자에 이상한 철제 물건을 담아 거기로 달려가려고 하는 거야?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
피라하 사람들에겐 의식이나 종교적 관념이 극히 적다. 그들은 자기네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숲의 자식임을 알고 있다. 숲은 신비로 가득해… 아니, 그게 아니야, 숲은 법칙과 논리와 질서가 없는 우주야. 숲에는 수많은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이 다 거기로 간다. 그래서 숲이란 무서운 곳이다.
그러나 피라하 부족이 아는 두려움이란 문명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결이 다르다. 뭔가 두려워한다는 것이 문명인에겐 나쁜 일이다. 그런데 피라하 사람들은 두려움을 어떤 매력이 담긴 아주 강한 감정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를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 에버렛이 아침에 잠을 깨어 보니 마을 사람들이 다 강가에 모여 있었다. 부족에게 뭔가를 경고하고 싶은 영혼이 거기에 왔다는 것이다. 강변에 나와 에버렛이 본 장면은… 사람들이 텅 빈 공간을 둘러싼 채 겁에 질려 눈을 휘둥그레 떴으면서도 활기차게 그 빈 공간과 대화하고 있더라. 에버렛이 “거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보이는걸!” 하고 말하자, 영혼이 피라하 부족에게 온 것이기에 그에겐 당연히 안 보인다는 대답이 나왔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에게 혼령이 개인적으로 올 것이라 했다.
신이 없어도 사는 사람들
지금까지 나온 얘기로 인해 피라하 부족에게는 선교가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유일신이라는 생각이 그들한테는 겉돌았어. 왜냐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하나’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누군가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메시지 역시 그들에겐 의아스럽기만 했다. ‘아, 저렇게 덩치 좋고 똑똑해 보이는 사나이가 사람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모른단 말이야?’
피라하 언어로 번역된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도 썩 설득력 있게 보이지 못했다. ‘시대’나 ‘시간’, ‘역사’라는 개념이 그들에겐 허튼소리이다. 사악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아주 선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은 에버렛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직접 보았어? 아니라고?
그러면, 이 그리스도를 본 사람을 당신이 보았나? 그것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이 체구 작고 허기를 달고 살며,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서두르는 법이 결코 없으며 늘 웃음 짓는 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에버렛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이란 성서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이며, 종교는 우리를 더 좋거나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Rye>은 본래 성인들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1961부터 1982년까지 20년 동안 미국의 중고등학교와 도서관에서 1급 금서였다.
소설의 음울한 분위기며 거친 언어와 줄거리가 청소년들에게 반항과 방종과 방탕을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청소년들에게 '추잡한 모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유럽 몇 개 나라에서도 상황이 비슷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번역서에서는 대체로 원전보다 순화된 어휘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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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샐린저는 2차 대전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때 썼다. 소설의 여섯 장이 이미 끝났다.
1942년 군대에 자원. 상륙군에 편입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해 독일의 강제수용소 몇 곳을 해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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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이름과 관련해 몇 가지 설이 있다. 샐린저가 군 복무 때 Holden Bowler라는 수병을 만났는데,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하나. 또 다른 설은 이 이름이 샐린저의 별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설득력 있는 버전으로는, 소설의 제목을 가리키는 문구 <hold on a coal field>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탄전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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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홀든이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실제에서 샐린저와 헤밍웨이는 우의를 나누고 서로의 창작을 크게 존중했으며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1942년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안면을 텄다. 그는 샐린저의 단편을 읽고 “오, 맙소사, 그에겐 악마의 재능이 있어!” 하고 외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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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이 1980년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의 애독서였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보다 조금 덜 알려진 범죄와도 관련이 있다.
이 소설에 집착한 존 힌클리 주니어는 1981년 미국 40대 대통령 레이건 저격을 시도했고, 스토커인 로버트 바르도는 1989년 영화배우 레베카 셰퍼를 살해했을 때 이 소설을 지니고 있었다.
감옥에서 인터뷰하는 마크 채프먼. 그는 자신의 우상인 존 레논에게 다섯 번의 총격을 가한 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가로등 불빛 아래 앉아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 그는 경찰 진술에서 "소설에 레논을 살해하라는 암호 명령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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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린저가 1951년 내놓은 <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Rye>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이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이 소설에 부분적으로 삽입된 초기 단편 두 편에서 처음 나왔다. 즉, <I am Crazy> (1941), <메디슨 거리의 사소한 반란 Slight Rebellion off Madison> (1945)에.
1944년 <이별 전날>이라는 단편도 발표했는데, 여기서 빈센트 콜필드라는 인물이 학교에서 쫓겨난 남동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파수꾼>이 처음 출판되기 이태 전인 1949년 샐린저는 단편 <볼링공이 가득한 바다>를 저널 <The New Yorker>에 팔았는데, 웬일인지 저널에 게재가 안 되자 도로 회수했다. 이 단편에서도 콜필드가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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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이 소설에 눈독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샐린저는 자기 소설의 각색 얘기조차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파수꾼>이 영화로 제작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완 관련해 스티븐 스필버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잭 니콜슨, 토비 맥과이어, 테렌스 말릭 등 많은 사람이 샐린저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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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의 모티브를 흉내 낸 아류가 적잖이 나왔다. 2009년 스웨덴의 작가 프레드릭 콜팅이 존 데이비드라는 필명으로 <60 Years Later: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제목으로 이른바 ‘속편’ 성격의 소설을 내놓았는데, 여기서 76세의 주인공 K라는 노인은 양로원을 뛰쳐나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뉴욕 거리를 방황한다.
하지만 샐린저의 변호사들이 이 작품을 표절로 보고 지적 재산권 침해 소송을 제기한 결과, <파수꾼>의 저작권이 만료될 때까지 (작가 사후 50년 지난 2060년까지) 콜팅의 소설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출판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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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겨울에 오리들은 어디로 사라지나? 뉴욕 공원의 관리 책임자인 헨리 스턴은 이런 질문이 담긴 편지들을 해마다 받은 끝에 2001년 뉴욕 타임스를 통해 공식적으로 답변했다. “겨울철에 호수는 한가운데가 가장 늦게 얼어붙어서 야생오리들이 대개 거기서 산다. 그러다가 그마저 얼어붙으면 이스트강이나 허드슨강으로 이동한다.”
뉴욕 타임스는 2010년에도 센트럴 파크 관리자 사라 밀러의 언급을 전했다. “샐린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공원에서 26년 동안 일하고 있는데, 오리들은 늘 제 자리에 있다. 이 소문난 오리들이 얼음판 위에 있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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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20세기 후반 세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 유수의 출판사들이 제시하는 최고의 영어 소설 목록에 여러 번 포함됐다.
이뿐 아니라 <호밀밭의 파수꾼>은 다른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예를 들면, 존 파울즈의 <수집가 Collector>, 리처드 도너 감독의 영화 <음모 이론 Conspiracy theory> 등.
미국의 짐 터커는 15년 동안 전생에 관한 아이들 이야기를 탐구하며 환생(reincarnation)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자.
환생이라는 기이한 현상 이면에 과학적 측면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는다.
자연스러운 기억들과 아이들 놀이
라이언 해몬스라는 사내애가 네 살일 때 영화감독 놀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액션!” 같은 소리가 아이 방에서 늘 들리곤 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놀이에 부모가 곧 염려하게 됐다.
어느 날 밤 아이가 자기 고함에 놀라 잠에서 깬 뒤 가슴을 움켜쥐고 자기가 할리우드에 있을 때 심장이 터지는 꿈을 꾸었다고 얘기한 뒤로 걱정이 더 깊어졌다. 엄마 신디가 의사를 찾아갔지만, "그건 악몽일 뿐이며 나이가 들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설명만 들어야 했다.
그 뒤 어느 날 밤 어린 아들을 잠재우려고 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엄마 손을 쥐고는 “엄마, 난 예전 언젠가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하얀 집과 수영장을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그 집은 지금 사는 오클라호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할리우드에 있었다. 아이는 자기한테 아들이 셋 있었지만 이름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왜 그 아이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엄마한테 계속 물었다.
엄마의 얘기. “난 어떡해야 할지 몰랐어요. 몹시 놀랐지요. 아이가 집요하게 묻는 거예요. 그날 밤 이후 아이는 세 아들의 이름을 계속 떠올리려 했지만 매번 실망만 하고 말았어요. 난 인터넷에서 환생에 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어요. 할리우드에 관한 책을 몇 권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는데, 거기 실린 사진들이 라이언한테 도움 될까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그 일을 몇 달 동안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한번은 엄마 신디와 아들 라이언이 할리우드에 관한 책을 훑어보다가 1930년대 영화 <Night after night>의 흑백 사진이 있는 페이지가 나오자 라이언이 흠칫 멈췄다. 사진은 두 사내가 한 남자를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또 다른 남자 넷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을 신디는 물론 전혀 몰랐지만, 아들 라이언이 가운데 있는 사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엄마, 봐봐, 이건 조지야. 나랑 같이 영화를 찍었다구.”
그러고는 오른쪽에 재킷 입고 우울한 표정의 남자를 가리켰다. “이 사람이 바로 나야, 이제 난 나 자신을 찾았어!”
라이언의 사례가 드물긴 하지만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정신과 의사 짐 터커가 버지니아 대학 부설 지각 연구 의료 센터의 기록 보관소에 모아둔 2500여 건의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의 아이들이 예전 언젠가 살았다고 밝히는 이야기를 터커는 15년 가까이 연구하고 있다. 이 전생을 아이들이 때로는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다. 먼저 살다가 죽은 이들이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사람인 경우는 아주 드물며, 이 아이들의 가족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기이한 현상을 연구하는 터커는 그런 체험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 가운데 몇몇 경우는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가까운 친척을 떠나보낸 가정에서 아이가 죽은 사람의 과거 삶에 대해 별생각 없이 하는 이야기가 그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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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과 비슷한 여러 경우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터커는 말한다. 그건 단순하면서도 놀라운데, “어떻든 아이가 다른 삶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경계 바깥에 뭔가가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이건 큰 진전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사건들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억이 전달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환생이 있다는 열쇠
저서 <Return to Live>에서 터커는 미국에서 자신이 연구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사례를 몇 가지 얘기하며 양자역학에서 최근 발견된 사실들이 환생이 있다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우리네 물질계가 우리의 의식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이 관점을 나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과학자들도 견지하고 있다.”
한데 현재의 과학 모델들은 터커의 발견을 반박도 입증도 할 수 없다는 데에 논란의 소지가 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다면, 구멍보다 더 작은 물고기는 결코 잡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신이 찾는 것으로 국한돼 있다. 현재의 방법과 개념들로는 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없다.”
터커는 1990년 말 환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난 사후의 삶에 대한 생각과 이 분야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쓸 수 있는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터커의 연구 결과, 수치로 본 환생
터커의 연구는 전생에 관한 기억을 얘기하는 아이들 사례에 관해 흥미로운 패턴을 밝혀냈다.
☞전생의 기억을 얘기하는 아이들 대다수는 나이가 2세~6세
☞ 전생에 살던 사람의 평균 사망 연령은 28세
☞ 전생의 기억을 얘기하는 아이들 60%는 사내애
☞ 그 아이들의 70%는 자신이 변사나 횡사했다고 확언
☞ 죽은 사람들 70%가 남성이었는데, 이건 전체 인구에서 횡사한 남성 비율과 비슷하다.
☞ 전생의 기억을 알리는 아이들 90%가 전생에서도 젠더가 같았다고 말한다.
☞ 아이들이 알리는 바에 의하면, 죽고 나서 새로 탄생하기까지 평균 기간이 16개월이었다.
☞ 그런 아이들의 20%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에 대한 기억을 알린다.
연구 대상 사내애들의 70%쯤이 (전생에서) 변사하거나 횡사했다. 이런 경우의 1/3가량을 아이들이 기억한다. 이건 정상 인구 가운데 횡사한 남자들 비율에 해당한다.
환생이 종교적 문화의 일부인 나라들에서 환생 사례가 더 자주 알려지지만, 터커의 연구에 따르면, 환생을 경험한 가족의 신앙과 사례의 빈도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죽고 나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데 대략 16개월이 걸렸다.
터커와 다른 사람들의 이후 연구를 보면, 전생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IQ가 대개 평균 이상이지만, 평균 이상의 정신장애나 행동 문제가 관찰되지는 않았다. 연구 대상 아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런 사연을 통해 가족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들지 않았다.
터커에 따르면, 아이들의 그런 이야기 대부분은 6세 무렵에 줄어드는데, 이건 아이의 뇌가 새로운 발달 단계를 준비하는 시기에 상응한다.
이야기의 범상치 않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 아이들 거의 전부가 ‘초자연적’ 능력이나 ‘깨달음’ 같은 징표를 보이진 않았다고 터커는 전한다. “몇몇 아이들은 철학적인 언급도 하지만 대다수는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아이들이었다. 이건 학교에 온 첫날 아이가 유치원 마지막 날 때보다 더 똑똑하지 않은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
터커는 지난 50년 동안 미국에서 수집한 사례를 보면 많은 부모가 자녀의 이야기를 그저 무시하거나 심지어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제법 된다고 말한다. “아이들 얘기를 안 듣거나 믿지 않는 징표를 보일 때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부모 비위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라이언이 전생의 딸과 만남
어린 아들이 80년 전 사진에서 자기 모습을 알아보던 즈음에, 신디는 환생 같은 데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 사람에 관한 정보가 책에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이건 조지야’ 하고 말한 사진 속 남자가 지금은 거의 잊힌 영화배우 조지 래프트라는 사실은 곧 알아냈다. 한데 아들이 (과거의) 자기라고 지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종내 밝히지 못했다.
그러자 인터넷에서 터커의 주소를 알아내고 메일을 보냈다. 사진 속 인물이 터커를 통해 영화 아카이브에 들어갔고, 거기서 몇 주 동안 알아본 결과 우울한 얼굴의 사내는 영화 <Night after Night>의 크레딧에도 나오지 않은 무명 배우 마틴이었다.
그리고 몇 주 지나 해몬스 가족을 방문했을 때 터커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여자들 흑백 사진 넉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가운데 석 장은 무작위로 고른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는 여인이 있는지 라이언에게 물었다. 라이언이 사진들을 훑어보고는 한 여인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마틴의 아내였다.
얼마 뒤 해몬스 가족이 터커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갔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마틴의 딸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라이언과 만나기 전에 터커는 그 여인과 얘기를 좀 나누었다. 여인이 처음엔 좀 꺼렸지만, 대화하면서 자기 아버지에 관해 점점 더 자세히 말하게 됐는데, 그건 라이언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라이언은 ‘그 사람’이 뉴욕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는데, 마틴은 브로드웨이에서 댄서로 일했다. 라이언은 그가 ‘에이전트’로도 일하고 그에게 일을 맡긴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었다고 얘기했다. 실제로 마틴은 댄서 활동 이후 여러 해 동안 할리우드의 재능 에이전시에서 일했는데, 거기서는 창의적인 이름들을 만들곤 했다. 라이언은 또 자기 옛 주소에 ‘rock’이란 단어가 들어갔다고도 했다.
그러나 라이언과 (전생의) 딸의 만남은 썩 매끄럽지 못했다. 라이언이 그녀와 악수는 했지만 나머지 대화 시간 내내 자기 엄마 뒤에 숨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이는 엄마에게 그 여자의 에너지가 (기가) 달라졌다고 말했고, 그러자 엄마가 아이한테 사람은 성장하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라이언이 “난 과거로 (할리우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금 가족하고만 있고 싶어” 하고 말했다. 이후 몇 주 동안 라이언한테서 할리우드에 관한 이야기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한때 자기가 그 사람이었다고 여긴 사람'의 가족과 만날 때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 터커는 설명한다.
“아이들의 기억을 확인시켜 주면 기억의 강도가 떨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과거의 그 누구도 더 이상 자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아이들은 그래서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엔 그걸 받아들이고 눈길을 현재로 완전히 돌린다.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이건 그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산등성이에 부는 시원한 바람’... 뭔가 색다른 용모에다 우수에 젖어 있고 언제나 젊은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하와이 이름에는 그런 뜻이 있다. (Keanu Reeves)
그의 모친은 잉글랜드 출신이며, 부친에겐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뿌리 이외에 중국과 포르투갈, 하와이의 뿌리도 있다. ‘산등성이 시원한 바람’ 키아누가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했는데, 그 이후 아들은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봤다. 키아누에겐 누이동생 셋이 있다. 아버지가 다른 킴과 카렌, 어머니가 다른 엠마.
어린 시절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1964년 출생. 유소년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자주 이사 다녔다. 토론토에서 여러 해 살았다.
(지능엔 이상이 없지만 읽고 쓰기에 애를 먹는 유전적 신경성 장애) 난독증과 잦은 이주와 전학 때문에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고교 졸업장을 못 받았다. 그 대신 아이스하키에 푹 빠져서 아주 좋은 성과를 냈다. 골키퍼로서 철벽이란 별명을 얻은 까닭은 퍽을 기막히게 막아내곤 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꿈이었지만, 부상하는 바람에 운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 흥미로운 사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서 처음 진지하게 맡은 배역이 아이스하키와 관련된 것이었다. 키아누는 아이스하키 선수에 관한 영화 <Young Blood>(1986)에서 골키퍼로 출연했다.
연기 경력의 시작
연기하는 직업에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있긴 했지만, 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다. 15세 때 아마추어 연극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맘때 티브이 광고를 한 편 찍었다. 여기에 열중했다. 캐나다 TV 시리즈에 등장해 크지 않은 배역을 몇 번 맡았다.
<Young Blood> 이후 키아누 리브스는 배우로서 경력을 키우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긴다. 미국에서도 처음엔 여전히 소소한 배역들만 맡는다. 하지만 스릴러와 액션, 예술영화 등 아주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을 시험해 본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연기가 밋밋하고 일방적이며 배역들이 다 고만고만하다고 지적한다.
1986년 영화 <River's Edge>이 그의 연기 경력에서 도약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배우로서 눈에 띄게 됐고 평론가들도 그의 연기를 좋아했다.
리브스가 출연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들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70편이 넘는다. 그는 스스로 흥미롭게 여기는 작품들에 출연한다. 그건 저예산 영화일 수도 있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블록버스터일 수도 있다.
<빌과 테드의 놀라운 모험 Bill & Ted's Excellent Adventure>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초기 작품 하나는 1987년에 촬영이 끝났지만 2년 지나 1989년에 상영됐다. 판타지 코미디.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멍청한 코미디’라고 여겼지만, 관객들이 좋아하고 흥행수익이 아주 짭짤했다. (제작비 650만 달러, 수익 4천50만 달러).
그 2년 뒤 속편이 나왔는데, 이것도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리브스가 그런 장르의 영화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그를 보는 것이 더 흥미롭다.
<Point Break 폭풍 속으로> (1991)
이 영화가 나온 뒤 사람들이 리브스를 ‘섹스 심볼’로 여기게 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FBI 요원으로서, 많은 여인의 심장을 녹였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함께 연기하는 배우로서도 눈에 띄었다. 패트릭은 1987년 <Dirty Dancing> 이후 스타가 되었지만, 키아누는 그의 명성에 가려지지 않았다. 그건 대조적이지만 강렬한 두 캐릭터의 보기 좋은 대결이었다.
★ 이 영화에서는 서핑이 큰 역할을 한다. 원칙에 충실한 키아누는 파도 타는 법을 배웠으며 영화에서 많은 것을 스스로 해냈다. 신뢰성이 필요했다. 그는 이 스포츠에 흠뻑 빠져서 나중에 취미가 되었다. 서핑 보드 위에서 자유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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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1994)
이 영화로 키아누는 스타가 됐다. 그는 또 특수경찰이 됐으며 영화는 또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도 키아누의 연기를 호평했다. 다양한 연기 기법을 선보이면서 명확하게 연기한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이 주인공 역할을 볼드윈 형제, 톰 행크스, 브루스 윌리스, 조니 뎁, 톰 크루즈 등이 거부했다.
촬영하면서 리브스는 샌드라 블록을 알게 됐다. 그때 맺어진 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중에 샌드라는 자기가 키아누를 사랑했지만, 그건 짝사랑이었다고 고백했다.
♨ 캐나다의 작은 극장에서 <햄릿>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블록버스터인 <스피드 2>에 출연을 거부했다. 한데 이건 올바른 결정이 됐다. 이 영화는 실패했으니까.
<Johnny Mnemonic 코드명 J>
캐나다와 미국의 제작자들이 합작한 혼합 장르 사이버펑크 액션 스릴러. 시나리오가 오랜 기간에 걸쳐 어렵게 탄생했으며, 필름 촬영 후 상영까지 제작도 오래 걸렸다. 거의 준비가 됐는데, <스피드>가 영화관마다 절찬리에 상영 중이었다.
영화 보스들은 액션 장면과 총격전, 격투 등을 추가하기로 결정하면서 키아누가 주연을 맡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 보았다. 본래 아이디어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작비도 건지지 못했다.
<매트릭스> 시리즈
인류를 구할 마지막 영웅의 배역으로 리브스만 꼽힌 것은 아니었다. 톰 크루즈, 니콜라스 케이지, 레오 디카프리오 등이 시나리오와 함께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거부했다. 이제는 네오 역할에 키아누가 아주 적격이어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기 어렵다.
키아누는 이 배역에 진지하게 접근했다. 영화에 많이 나오는 격투 장면이 자연스레 보이게 하려고 4개월 동안 ‘모피어스’며 ‘스미스 요원’과 함께 무술 훈련을 받았다. 캡슐에서 ‘재탄생’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체중 15Kg을 빼고 눈썹까지 미는 등 온몸의 체모를 다 제거했다.
<매트릭스> 세 편이 나온 뒤 당시로는 몸값이 최고인 배우가 됐다. 그러나 특수효과 전문가들을 위해 출연료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 바로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영화에 더 공헌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2019년 8월 21일, 막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키아누 리브스는 워쇼스키 감독 자매(형제, 남매)와 함께 <매트릭스> 4편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고 한다.)
♨ 키아누는 영화에 출연한 모든 스턴트맨에게 Harley-Davidson 오토바이를 한 대씩 선사했다. (세 편의 영화로 들어온) 1억1천4백만 달러 수입에서 그의 몫으로 3천4백만 달러가 돌아갔다.
<콘스탄틴> (2005년)
신비감 넘치는 스릴러, 이 영화로 키아누는 할리우드에서 위치를 확실히 굳혔다. 엄중한 엑소시스트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냈다. 배역의 성격이 아주 강함에도 불구하고 키아누는 일관되게 두드러졌고 영화의 ‘별’이었다.
그의 캐릭터는 음울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성격이다. 모든 심적 체험과 두려움 등이 아주 잘 드러나는 바람에, 주인공을 더 잘 알고 그의 사연과 행동 동기를 알아서 공감하고 싶어진다. 영화 평론가들과 관객이 키아누의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 <콘스탄틴>은 리브스의 성공적인 연기 목록에 확실히 집어넣을 수 있다.
<존 윅> (2014)
리브스가 주연배우일 뿐 아니라 제작자이기도 한 액션 영화. 영화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흥행에도 성공했다. 배우의 연기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액션의 독특함도 주목받았다. 이를 위해 그는 촬영 전에 몇 달을 또 훈련받았다. 총격 장면들이 매우 잘 연출되고 눈에 확 띌 정도로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실행됐다.
이 성공 덕분에 <존 윅 2: 리로드>(2017)를 또 제작했는데 1편보다 흥행에 더 성공했다. 반응과 평가도 더 좋았다.
2019년 5월 9일 브루클린에서 개봉된 3편 <존 윅: 파라벨룸>은 1편의 4배, 2편의 2배 가량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입해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전 세계에서 누적 수익 2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액션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제작사는 <존 윅> 4편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키아누의 음악 활동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키아누는 두 개 그룹에서 베이스기타를 연주하는 등 진지하게 음악 활동을 했다. 1991년 그룹 Dogstar를 결성하고 앨범 2장을 냈다. 이 그룹은 ‘포크-펑크’ 스타일로 연주했다. 키아누가 몇 곡을 만들었다.
그룹 Dogstar 해체 뒤 2002년 친구 롭 메일하우스의 초청으로 그룹 Becky에서 베이시스트가 됐다.
수상 경력
2005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그의 이름이 담긴 기념판이 새겨졌는데, 이건 2277번째 별이었다.
♨ 최악의 영화에 수여되는 패러디 상 ‘골든 라즈베리’에 최악의 배우 후보자로 몇 번 지명됐다. 2015년 또 후보자 명단에 올랐는데, 이번엔 ‘평판을 회복한 배우에게 주는 상’ 부문이었다.
<매트릭스>, <A Walk in the Clouds 구름 속 산책> (1992), <스피드> 등으로 MTV 채널의 상을 몇 번 받았다. 아쉽게도 더 굵직한 상을 리브스는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사생활
키아누의 인생에는 두 번의 비극이 있었는데, 그 뒤로 그는 자기 자리를 다시 찾지 못했다. 1999년 말 출산 예정일을 1주일 앞당겨서 그의 연인 제니퍼가 딸을 사산했다. 탯줄에 혈전이 생긴 것. 이 사건은 이 커플에게 큰 괴로움을 안겼다. 둘은 함께 하기가 힘들어 헤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다.
그런데 1년여가 지나 제니퍼도 그만 죽고 말았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자기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 리브스는 그녀를 딸 곁에 안장했다.
★ 이 두 차례 불행한 사건이 키아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그는 한층 더 집안에 틀어박혀 아예 바깥에 나다니지를 않았다. 그에게 남은 건 일뿐이었다. 키아누는 아직 싱글이다. 다른 여인들과 데이트하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고 소문도 더러 나돌긴 하지만, 진지한 관계로 확인된 것은 없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은 누구나 그가 촬영장 안팎에서 예의 바르고 의사소통이 간결하고 우호적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남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 그에 관해 안 좋은 얘기는 들을 수 없다.
명성과 ‘스타’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키아누는 검소하게 산다. 상당히 소박한 집도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부유해진 2003년도에야 구입했다. 그 이전엔 호텔에 살거나 아파트를 임차했다. 자주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 파파라치들이 거리 벤치에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리브스를 자주 찍는다. 그 사진들이 인터넷 밈이 됐는데, 8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키아누가 생각에 잠겨 홀로 시간 보낼 때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사진 밈이 인터넷에 나도는 것에 유머로 대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우울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생각에 잠겨 있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라고 밝힌다. 생일도 혼자서 맞이한다.
흥미로운 사실 13가지
1. 왼손잡이인데, 베이스기타는 오른손으로 연주한다.
2. 무신론자로 보인다. 리브스 자신은 신앙 문제는 아주 개인적인 사안이기에 이에 관해 언급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3. 2011년 시집 <Ode to happiness 행복 송가>를 발간했다.
4. 같은 해에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 생산 회사를 만들었다. 오토바이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그에겐 ‘철마’가 몇 대 있어 타고 다닌다.
5. 키아누의 매니저인 어윈 스토프( Erwin Stoff)는 30년 넘게 그와 일하고 있다. 경력 초기에 키아누라는 이름이 이국적인 냄새가 나니까 타이틀에 다른 이름을 넣자고 한 사람이 그였다. 노먼 리브스, 척 스피든 같은 이름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6. 사교춤을 아주 좋아한다. 배우로서 경력 초기에 ballroom dancing을 일부러 배웠다.
7.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들을 초빙할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의 출연료를 줄이자고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악마의 변호인> (1997)에서 알 파치노, <The Replacements> (2000)에서 진 해크먼.
8. 미국과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다.
9. 난독증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즐겨. 좋아하는 작가는 프루스트.
10. <시베리아>(2018)를 촬영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11. 암 재단을 설립하고 자선사업에 거액을 기부한다.
12. 거액을 기부하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아누의 재산은 3억 달러쯤 된다.
13. 컴퓨터를 가져 본 적이 없고 SNS를 좋아하지 않으며 팬들이 보낸 편지를 읽지 않는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족이며 친한 이들과 보내기를 더 좋아해. 하지만 우연히 마주친 팬들이 요구하는 사진 촬영을 거부하는 법이 없다.
맺는말
키아누 리브스는 상당히 독특하다! 관객과 영화 평론가들에게 사랑받는 배우. 영화 일은 그의 삶이다. 그는 부유하고 유명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이 필요치 않은 듯하다. 선량하고 너그럽고 남을 잘 돕고 공감할 줄 아는 그는 배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에겐 신비한 측면이 있다. 생각이 깊고 매력적인 그는 ‘산등성이에 부는 시원한 바람’이다. Keanu Reeves.
연기에 몰입하고 열중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을 촬영한 뒤 키드먼은 정말로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왜냐면 자신이 연기한 여주인공의 모멸감과 아픔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에.
촬영 중에도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잠시 촬영을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 육체적으로도 쉽지 않았으니, 촬영장에서는 허리를 48센티까지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다.
※ 극장 역사에서 보면 배우들이 배역에 푹 빠져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연기를 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병자 역할을 하면 정말로 고열에 시달리고, 사랑에 빠진 연인 역할을 하면 사실은 임포텐츠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니는 중인데도 힘이 불끈 솟는다는 것.
예를 들어, 김혜자 씨는 티브이 미니 시리즈 <겨울 안개>의 녹화를 막 시작하기 전부터 실제로 조금씩 아팠다고 한다. 그리고 맡은 역할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바뀌는 기질을 스스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퍼블릭 스피킹: 자기암시>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자매 역할을 한 (오른쪽) 니콜 키드먼과 제니퍼 제이슨 리(Leigh)
2007년 코미디 영화 <Margot at the Wedding>에서 키드먼은 신랑이 신통치 못하다는 이유로 딸의 결혼식을 깨려고 하는 괴짜 작가를 연기했다. 그녀는 “우리가 진짜 가족과 최대한 비슷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미묘한 것까지 죄다 느끼기 위해 촬영 기간에 잭 블랙, 제니퍼 제이슨 리(Leigh)와 함께 살았다. 그 결과 영화의 가족은 진짜 가족과 아주 흡사했다.
7. 그녀의 여러 취미 중 하나는 글쓰기/문필
니콜에게 생각을 서간문 형식으로 표현하도록 가르친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딸에게 일기를 쓰도록 권했고, 나중에 니콜은 스토리를 구상하고 습작을 하기도 했다. 현재 인상적인 단편소설들을 모아두었는데, 이를 언젠가는 출간하리라 꿈꾸고 있다.
영화 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놀랍게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심과 열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8. 자선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유엔 여성개발기금의 친선대사이다.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적극적인 사회적 위치를 위해 유엔은 니콜에게 ‘세계 시민’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여건이 안 좋은 국가들에서 여성의 권리를 수호하는 UNIFEM의 친선대사이며 특별한 여행을 종종 주도하기도 한다.
아이들 돕기 역시 니콜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 예를 들어, 컨트리 싱어 키스 어반과 재혼할 때 부부는 하객들에게 결혼 축하 선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대신 질병에 시달리는 아동들 돕는 기금에 희사해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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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네스북에 오르다
직업 덕분에 그녀는 일종의 기록 보유자가 됐다. 아주 값비싼 일. 향수 샤넬 5의 광고 비디오에 출연 대가로 받은 돈이 자그마치 371만 달러. 4분 길이의 이 비디오는 그녀에게 엄청난 출연료뿐 아니라 기네스북의 한 자리까지 안겨 주었다. 짧은 광고에 출연해 가장 짭짤한 수입을 올린 사람으로 기록된 것.
10. 친구 리스 위더스푼과 함께 소설 <Big little lies>의 영상 제작 권리를 획득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티브이 시리즈 <Big little lies 커져 버린 작은 거짓말 >에서 주요 역할을 맡은 니콜 키드먼과 리스 위더스푼은 이 소설의 영상 제작 권리를 얻은 회사의 소유주이다. 이 소설은 당초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는데, 그보다는 티브이 시리즈가 주제를 더 잘 드러낼 것이라고 두 친구는 결정했다. 둘은 캐스팅과 시나리오 작성에도 관여했다. 이 시리즈의 시즌 1은 8개의 에미 상을 포함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시즌 2는 2019년 6-7월에 나와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니콜 키드먼은 같은 배우들이 다 출연하는 경우에 시즌 3도 내놓을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건 그들의 일정을 감안할 때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1. 이상적인 반려자를 찾았다
니콜은 2006년 호주의 컨트리 싱어 Keith Urban과 재혼해서 현재 자녀를 둘 보았다. 니콜은 “이상적인 남자를 찾았다”고 여러 번 얘기했고, 키스는 “내 아내는 내 모든 노래에 들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기자들은 이 스타 커플의 삶이 위기에 처했다고 쩍하면 떠들지만 부부는 단연코 부정한다. 또 공동 인터뷰 때마다 둘은 늘 서로 장난하여 놀리고 사랑에 빠진 십대처럼 행동한다. 여기 소개한 비디오도 그런 식이다.
특급 스타요 많은 영화상 수상자이며 다양한 재능으로 감독들과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몸값이 가장 비싼 배우들 중 하나인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자신이 창의적인 인생을 살게 되리라는 점을 소녀는 늘 알고 있었다.
니콜은 발레와 노래, 연극, 음악 등에서 자신을 검증해 보았다. 인생이 그녀를 몇 번 자빠뜨렸지만, 눈부시고 독특한 니콜 키드먼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자신이 맡은 여러 배역에서 보여주는 진정성이 그녀 매력의 비결이라고 많은 팬들은 입을 모은다. 올해 (2019년) 52세가 됐지만, 화면에 비치는 이미지는 나이를 뛰어넘는다.
1. 어려서부터 콤플렉스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연관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키가 부쩍 크고 빨강머리인 니콜 키드먼은 어려서부터 사람들 눈에 쉽게 띄었는데, 이런 점이 나중엔 콤플렉스가 될 정도였다. 발레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다음에는 극장 무대에 출연도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꺽다리란 별명이 붙은 외모와 흥분할 때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결함이 창의적 활동에 큰 장애가 됨을 일찍이 깨달아서 딕션을 열심히 다듬고 수줍음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풀줄기처럼 길게 늘어진 외모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를 부각시키는 요소가 됐다.
젊은 시절 음악에 푹 빠져 피아노를 쳤으며 오스트레일리아 그룹 Divine Madness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기한테는 연기가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고 연극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좋아하던 일들이 니콜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어서, 예를 들어 영화 <물랑 루즈 Moulin Rouge>에서는 노래하는 연기를 다 스스로 해내고 멋진 춤을 선보였으며, 또 <Cold Mountain>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2. 엄마의 병 때문에 평생 배우가 못 될 수도 있었다
게시물이 270여 점 있고 팔로워가 5백만인,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
연극학교에서 공부는 가족에게 일어난 어려움 때문에 중단해야 했다.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 묘하게도 니콜의 아버지는 암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엄마가 치료받고 재활하는 기간에 니콜은 물질적으로 가족을 도와야 했고 학교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그예 학교는 포기하고 아픈 엄마를 돌봤다.
3. 완벽한 감정 연기 덕분에 유명해졌다
니콜의 학업은 중단됐으나 영화 경력은 상당히 일찍 시작됐다. 이미 15세에 첫 영화에 출연한 뒤, 호주 티브이 시리즈에서 배역을 맡았다.
티브이 드라마 <방콕 힐튼 Bangkok Hilton>은 1989년 화면에 소개됐는데, 여기서 니콜이 연기 재능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아주 냉정한 비평가들조차 그녀가 연기한 여주인공 때문에 마음 졸일 정도였으며, 바로 이 작품 덕분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같은 해에 니콜은 예민한 스릴러 <Dead calm 죽음의 항해>에서도 열연했고, 이 작품이 나온 뒤 영화계에서는 “만지고 건드릴 수 있는 듯이 감정을 전달할 줄 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관해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4. 톰 크루즈의 그늘에서 벗어난 뒤에야 정말로 인정받게 됐다
그렇게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곧 첫 번째 남편이 된 사람과 사귀게 됐는데, 그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였다. 톰 크루즈는 1990년 개봉된 영화 <폭풍의 질주 Days Of Thunder>를 촬영하면서 매력적인 빨강머리 아가씨를 알아봤고, 뜨거운 감정을 걷잡지 못해 아내 미미 로저스와 이혼하고 말았다.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 중 하나였으며, 자녀 둘을 입양하면서 10년을 같이 살았다. 니콜은 인기가 상당히 많은 배우였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겐 그저 ‘톰 크루즈의 아내’였으며 그의 재능에 눌려 있었다. 부부는 영화 세 편에 함께 출연했으며, 1999년 개봉된 <질끈 감은 눈 Eyes Wide Shut>을 촬영한 뒤 헤어졌다.
키드먼은 이혼을 몹시 가슴 아파했고, 바로 이맘때 그녀에 대한 언론의 태도가 좋아졌다. 이혼을 이미 알고 있던 기자들은 새 영화와 관련된 기자회견에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니콜은 회견이 끝날 때 “톰에 대해 묻지 않아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하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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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객이 늘 좋아하는 역할들을 택하지만, 가끔은 실패하기도 한다
톰 크루즈와 헤어진 뒤 최대한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물랑 루즈>에서 고급 창부의 역할로 오스카상에 지명됐지만, 그 상은 다른 역할로 받게 됐다. 2002년 개봉된 영화 <The Hours>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놀랄 만큼 변신하면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이로써 호주 여배우로서는 최초로 이 상을 받았다.
니콜은 관객의 영혼에 와 닿는 배역을 택하곤 했다. 신비한 스릴러 <The Others> (2001), <도그빌>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작업, 서사 영화 <Cold Mountain> 등 인생과 드라마를 여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던 작품들에서 열연한 결과 니콜은 여러 상을 받고 인정을 받았다.
한데 그녀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들은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그로테스크한 공상과학 영화 <The Stepford Wives> (2004)는 흥행에 실패했고, 로맨틱 코미디 <Practical Magic> (1998)에서 만들어진 무심한 이미지로 키드먼은 최악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에 주는 패러디 상 골든 라즈베리를 받기도 했다. 또 2012년 개봉된 <페이퍼보이>에서 연기에 관객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칸 영화제에서는 호평을 받고 비평가들이 가장 성공적인 역할 중 하나라고 꼽은 점은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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