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내면의 빛' 태그의 글 목록
728x90

'내면의 빛'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7.13 루덩의 악마들 3-3편 3
  2.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5
728x90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라퐁텐은 드문 예외일 뿐이다. 라퐁텐의 동시대인들은 글에서 인간 외적 본질인 자연 세계에 눈길을 전혀 돌리지 않았다. 코르네유의 비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면밀하게 조직된 계층적 집단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옥타브 나달이 ‘코르네유의 세계는 바로 도시’라고 쓴다. 

  라신의 여주인공들과 그들을 고민케 하고 특색 없는 남자들의 더 엄격히 제한된 세계는 코르네유의 도시처럼 창문이 없다. 이 세네카 풍 비극의 극치는 숨 막히고 좁아서 공기도 없고 편히 움직일 공간도 없고 배경도 없는 파토스이다. 그것들이 <리어 왕>, <당신 좋을 대로>, <한여름 밤의 꿈>, <맥베스> 등과 얼마나 다른가 말이냐.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비극은 어떤 것이라도 읽다 보면 어릿광대며 악인, 영웅, 고급 매춘부, 눈물 흘리는 왕비들 같은 인간 세상 뒤편에 지구와 우주가 늘 존재하며 생물과 무생물의 세상이, 이성이 없는 것과 의식이 또렷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들이 거의 스무 줄마다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느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1889-1973

 

  우리 시대의 저명한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쓴다.[각주:1]

  “내 가장 깊고 가장 확고한 소신은, 만약 그것이 이단적이라면 정통 교리에는 더 나쁜데, 모든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뭐라 해도 신의 뜻은 우리가 만물을 도외시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만물을 통하고 우리 출발점으로서의 만물과 함께 그분을 찬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신앙 서적을 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17세기에 가장 덜 불쾌한 신앙 서적들 중 하나는 토마스 트러헌[각주:2]의 <명상의 시대>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시인이요 신학자인 그는 하나님이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의 표현에 따르면, 사욕 없는 관상을 통해 ‘세상을 얻는’ 사람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얻으며 나머지는 전부 저절로 추가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든 갈망과 야망을 채우고 의심과 배신을 물리치고 용기와 기쁨으로 굳건해지는 것이 정녕 달콤한 일 아니런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세상을 얻기만 하면 다 달성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와 힘과 선함과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니까.” 

 

  이상적인 삶에서 랄망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자연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의 혼합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이란 자연 전체가 아니라 그저 발췌한 일부일 뿐이다. 

  트러헌도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뒤섞음을 옹호하지만, 그는 자연을 가장 작은 디테일까지 포함해 통째로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자연물에 내재한 이 신성함을 수렝도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무나 지나치는 동물한테서 하나님의 충만한 위대함을 실제로 감지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몇몇 짧은 기록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갖가지 작은 것들 속에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어디서도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많은 영적 서신의 수신자들한테도 백합에 관한 그리스도의 권고를 따르면 암중모색하는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도 조언하지 않았다. 

  타락한 자연은 모두 부패한 것이라고 주입된 믿음이 직접 체험에서 얻은 것보다 그의 마음에서 더 강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겠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독단적인 말과 가르침이 확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선종의 3대 조사는 “제 앞에 있는 이것을 보고 싶다면, 이것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관념을 갖지 말라”고 쓴다.[각주:3]

   그러나 관념 고정은 신학자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고, 수렝과 그의 스승은 깨달음을 추구한 사람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다. 

 

  랄망의 고행에서 가슴의 정화는 성령의 인도에 늘 온유하게 따름으로써 완성됐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각주:4] 중 하나는 이해력인데, 이 이해력에 맞서는 악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난폭함’이다. 이런 난폭함은 갱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흔한 상태이며, 그런 사람은 대체로 내면의 빛에 완전히 눈이 어둡고 감화의 목소리에 완전히 귀가 어둡다.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제 생각을 추적하는 증인을 두고, ‘마음 움직임을 감시하는 작은 파수꾼’을 세움으로써… 사람은 마음 그 어느 깊은 곳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직관적 지식과 직접적 명령과 상징적 꿈이며 판타지 형태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되는 점까지 직관을 키울 수 있다. 

  끊임없이 돌아보고 경계하는 가슴은 모든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결국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로 가는 길에서 아주 다른 종류의 점유와 지배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영감과 계시가 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중 어떤 것이 성령의 목소리이며 어떤 것이 미치광이 목소리고 사악한 범죄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식별해야 하나? 

 

  피에르 베일[각주:5]이 한 독실한 재세례파 젊은이의 경우를 인용한다. 이 젊은이는 어느 날 아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서를 많이 읽은 그 아우는 이런 일이 이전에도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계시의 신성함을 인정했다. 같은 신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제 2의 이삭처럼 자발적으로 죽음으로 달려가 참수를 당했다. 

  그런 경우를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성의 목적론적 유보’라고 우아하게 칭한다.[각주:6] 창세기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광기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랄망은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한테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신자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게끔 여러 모로 경고했다. 성령에 순종하라는 그의 교리가 내재적 영혼이라는 칼뱅파 교리 같은 것이 아니냐며 의심쩍게 이의를 제기한 동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계시 형태로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행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종교의 신조이고, 둘째, 종교적 계시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 전통과 교회 권위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만약 계시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에 역행하게 한다면, 그건 거룩한 계시일 수 없으리니. 

 

  이는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광기를 조심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퀘이커교도들이 활용하듯이, 다른 방법도 있다. 특이하거나 위험스러운 뭔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올 때 그 사람은 ‘존중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계시의 본질에 관해 그들 의견을 따라야 했다. 

  랄망도 같은 절차를 옹호한다. 그는 성령이 실제로는 ‘우리한테 판단력 있는 이들과 상의하고 우리 행위를 가까운 이들 의견에 맞추도록 촉구한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좋은 행위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랄망은 이것이 가톨릭신앙의 신조라고 단언한다. ‘난 그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투덜거린’ 동료들한테 이렇게 답했다. 

  참 신자들에겐 그런 계시가 늘 따라다녀요, 본인이 못 느끼는 중에도. 그대들이 온당하게 살기만 한다면 종교적 계시를 필히 인식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제 자신 바깥에 살기를 택하면서 제 영혼을 들여다보러 집으로 잘 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 양심 점검을 아주 피상적으로 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빤한 잘못들만 참작한다. 제 욕구와 습관의 내적 뿌리를 찾으려 애쓰지는 않고, 마음의 상태와 경향이며 가슴의 작열을 돌아보지는 않고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들 놀랄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어찌 들을 수 있겠나? 그들은 저희 행동으로 인한 은밀한 마음속 죄마저도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그런 걸 알기에 적절한 조건을 내면에서 만들기만 하면, 성령이 인도하심을 틀림없이 알게 되리라.」 

 

  이런 점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른바 선행이요 자선이라 하는 것들 대부분이 왜 비효율적이며 나아가서 많은 경우 왜 유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속담처럼 만약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각주:7] 한다면,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내면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못 보기에, 순수한 선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행동하기 이전에 늘 관상(심사숙고)이 선행돼야 한다고 랄망이 말하는 것.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우리는 내면에 더 침잠할수록 바깥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내면의 자신을 덜 들여다볼수록 선을 행하려 애쓰기를 더 삼가야 한다.」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선 활동에 들이덤비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열의와 자선의 동기가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일에서 자기애를 충족하기 때문에, 기도나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 방에서 호젓하게 명상에 잠기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어떤 성직자가 헌신적인 신도들을 많이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자의 말씀과 선행은 ‘그가 얼마나 사리사욕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지에 비례해서만’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언뜻 선을 행하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거룩한 이들이지 사업에 능한 자들이 아니다.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하는 데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 외려 우리를 그분한테 더 큰 사랑으로 더 바짝 묶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과하면 육체의 죽음을 야기하는 어떤 체액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에서도 지나치게 활발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절제되지 않은 활동 필히 영적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결실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칭찬받을 만하고 눈부시고 건설적인 일을 하는데도 말이다! 

 

  계시의 조건인, 욕심 없는 자기성찰 없이는 재능도 결실 맺지 못하고 열의와 근면도 영적 가치를 전혀 일궈내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평생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 한 해에 해낼 수 있다.」 

  그래, 외적인 작업은 외부 상황을 바꾸는 데는 효율적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에도 파괴적이고 자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데, 상황에 대해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바꾸고자 하는 일꾼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영혼이 계시를 접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저 외부 지향적인 사람은 트라야누스[각주:8] 황제처럼 일하고 데모스테네스[각주:9]처럼 웅변을 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을 지향하는 사람은 한마디 말로도, 다른 사람이 총명과 학식을 다 동원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상을, 많은 가슴과 마음에 안길 수 있다. 그 한마디에 성령이 깃들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느끼나? 지속적인 계시 상태를 수렝보다 나이 적은 동시대 여성 아멜 니콜이 아주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녀를 고향 브르타뉴 전역에서는 애정을 담아 la bonne Armelle (착한 아멜)이라 불렀다. 

  하녀로서 음식 만들고 걸레질하고 아이들 돌보면서도 관상하는 성자의 삶을 산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해 제 사연을 적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재주 있고 글을 잘 아는 수녀가 있어서, 그녀의 은밀한 얘기와 고백을 거의 놓치지 않고 기록하게 됐다. 

 

  「아멜은 자신이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그저 고생하며 하나님 역사에 순종하는 데에만 적합하다고 여겼다. 고백하기를,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 이 육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인도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녀 영혼에게, 내가 들어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라, 명령하고 거기 들어서셨다. 아멜은 제 육신이나 마음에 관해 말할 때 ‘내 몸’이나 ‘내 마음’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했다.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인이 되었을 때 그 동안 나를 가로막은 것들을 (나쁜 습관과 이기적 충동 따위를) 모두 내버렸어요. 그렇게 되자, 그녀 마음은 주님이 그녀 영혼의 심연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깨닫지 못했고, 그 역사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녀 마음은 하나님만이 자유로이 들어설 수 있는 이 심연의 문 밖에서 주인 명령을 공손하게 기다리는 하인과 같았다. 간간이 아멜은 전능자께서 계신 은밀한 문 앞에 많은 천사들이 입구를 지키듯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됐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그녀의 의식적인 자아를 영혼의 심연으로 들여놓으셨다. 들여놓을 뿐 아니라, 거기 가득 채워진 신성한 완성을 실제로 보게 하셨다. 그건 사실 늘 차 있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가 알지 못했던 것일 뿐.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은 그녀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강해서 한동안 육신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점차 견디게 되면서 그리 큰 고통 없이도 계속 그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아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놀라운데, 다른 비슷한 증언들과 대조해 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즉, 만물의 신성한 근간과 같은 본질인 순수한 자아 혹은 아트만이 이 놀랄 만한 자아에 내재돼 있다는 점. 영혼 안에는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은밀한 심연이 있다.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까닭은… 신성한 근간과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비인격화된 실체, 곧 우리네 무의식의 지대가 깔려 있는데, 거기에는 범죄적 본능과 원죄가 둥지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광기와도 가깝고 하나님과도 가깝다. 

 

  우리는 원래의 죄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원래의 덕도 (원덕도) 있다. 이를 서구 신학에서는 ‘은혜를 감당할 능력’ 혹은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다. 이건 최초의 순수와 결백을 간직한 의식의 파편. 이 타락하지 않은 의식의 파편을 ‘신테레시스[각주:10]라 부른다. 

  프로이트 유파 심리학자들은 원덕보다는 원죄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한다. 그들은 쥐와 바퀴벌레들을 차분히 연구하지만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를 꺼린다. 융과 그의 후계자들이 좀 더 현실적이다. 그들은 개인적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섰고, 마음이 점점 더 비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심령매체와 뒤섞이는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융의 심리학은 내재하는 망상증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내재하는 신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반복컨대, 원죄의 밑바탕이 되는 원덕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아멜의 경우가 독특한 건 아니었다. 영혼의 심연이 있어서, 거기서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 내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 왔다. 

  그것을 수렝 신부도 인식했는데, 단지 저 뒤에서 기록되듯이, 그와 함께 심령매체에 두려움이 있고 개인적 잠재의식에 해로운 쓰레기가 있음을 강하게 인식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탄을 같은 순간에 인식했고 자신이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영원히 결합됐음을 아주 확실히 알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저주받았다는 것도 굳게 믿었다. 

  결국, 우리가 저 뒤에서 보게 되듯이, 그것은 하나님을 두루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고통 받는 마음에서, 원죄는 시간과 상관이 없는 까닭에 훨씬 더 크고 많은 원덕 속으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신비 체험, 현신, 이른바 ‘우주 의식’의 번쩍임 등은 간청한다고 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실험실에서 일률적으로 마음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얻은 체험이 명령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 그 심연으로 다가들고 그 영역 안에 존재하며 천사들 속에서 (아멜의 말대로) 문가에 서는 체험은 반복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최면상태를 실험한 사람들은 이런 점을 발견한다. 즉, 어떤 트랜스 깊이에서 피험자들이 홀로 있고 주의가 산만하지 않다면 내재된 평정과 좋은 상태를 심심찮게 알게 된다는 것. 이때 이 좋은 상태는 광대하지만 고립되지 않은 공간들이나 빛의 인지와 자주 연관된다. 

 

  랄망과 그 제자들은 신비 체험의 근거를 굳이 입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신비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 알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에서부터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각주:11]의 얼마 전 증언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을 만한 문헌들로 확인도 했다. 

  가슴 정화와 성령에 온유함으로써 달성되는 그 목표의 신성한 본질과 가능성을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하나님의 미더운 종들이 이 길을 거치고 서면 증거를 남겼으며, 그 증언들의 정통성을 로마교회 박사들이 담보했다. 이제 그들은 감각과 의지가 몸부림치는 어두운 밤들을 스스로 이겨낸 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평정 상태를 체득하게 됐다

(3편 끝. 4편 1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1. Gabriel Marcel (1889-1973) - 프랑스의 철학자, 극작가, 비평가.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나이 마흔에 가톨릭에 귀의. <형이상학적 일기>, <구체적 철학 경험> 등. [본문으로]</구체적></형이상학적>
  2. Thomas Traherne (1637-1674) -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자, 시인, 사상가, 지복 철학을 다룬 산문 Centuries of Meditations이 20세기 초에 발간돼 널리 읽힌다. [본문으로]
  3. 欲得現前 莫存順逆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신심명> [본문으로]</신심명>
  4. 1지혜 2이해력 3지식 4권고 5인내 6경건함 7신의 외경. 이 일곱 가지 선물의 원천으로 흔히 이사야서 11장 1-2절을 꼽는다 [본문으로]
  5. Pierre Bayle (1647-1706) - 프랑스 계몽시대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요 신학 비평가.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 가톨릭에 귀의. ‘계몽철학의 화약고’라 불리는 <역사와 비평 사전>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과 개혁교회한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의 적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본문으로]</역사와>
  6.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 -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신학자, 저술가,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편적인 윤리를 유보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공포와 전율>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조명한다. 이 저술의 장르를 그 스스로 ‘변증법적 비가’라 정의했다. [본문으로]</공포와>
  7.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 유럽 속담. 좋은 일을 하려고 의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 혹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의도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 [본문으로]
  8. Caesar Nerva Trajanus (53-117) - 고대 로마 황제.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 실시. 도로와 교량, 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본문으로]
  9. Demosthenes (B.C. 384-322) -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본문으로]
  10. Synteresis - 가톨릭 교부요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342-420)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B.C. 525-456)의 작품을 풀이하면서 양심(conscientia)을 뜻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이것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우리 안에서 마지막까지 선을 알게 한다. 세네카 등 스토아학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심에 대한 태도를 여러 모로 정의하면서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철학자들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 등 신비주의자들도 사용했다. [본문으로]
  11. Dionysius the areopagite (460경-520경) - 침묵과 비움을 설파한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영성가. St. John of the Cross (1542-1591) - 성 환 델라 크루스. 에스파냐 영성가, 반종교개혁의 주요 인물, 테레사 성녀와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 창립, 로마가톨릭 성인. [본문으로]
728x90

'루덩의 악마들 (헉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덩의 악마들 4편 4  (0) 2019.07.14
루덩의 악마들 4편 1  (2) 2019.07.14
루덩의 악마들 3-3편 1  (0) 2019.07.13
루덩의 악마들 3-1편  (0) 2019.07.13
루덩의 악마들 2편 7  (0) 2019.07.11
728x90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이 첫 번째 공격에 이어 그랑디에가 카르멜회의 주요 수입원을 겨냥해 무례한 언급을 연달아 퍼부었다. 바로 ‘르쿠브렁스의 성모’로 불린, 이적 행하는 성상을 두고 말이다. 

  루덩 시 전체 구역의 사분지 일이 순례자들을 들이기 위한 여관과 하숙집으로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순례자들은 이 성상에 건강이나 신랑감, 자식이나 더 좋은 행운을 빌기 위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르쿠브렁스의 성모에 위협적인 경쟁자로 아딜리에 성모가 나타났다. 아딜리에 교회는 루덩에서 불과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소뮈르에 위치했다.

 

  질병 치료나 여성 모자에 패션이 있듯이 가톨릭 성인들한테도 유행이 있다. 웅장한 교회들은 성상이며 성물들에 관해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으니, 오랫동안 모셔오던 것들을 새로운 이미지며 성유물로 가차 없이 대체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그러면 예전 것들은 뭔가 더 새롭고 한순간 더 매혹적인 요술사 때문에 대중의 호평에서 밀려나기 마련이다. 

  아딜리에 성모상이 르쿠브렁스 성모상보다 왜 갑자기 훨씬 더 우월한 듯 보이게 됐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아딜리에의 성모상을 오라토리오회 수사들이 관리했다는 점. 

 

아딜리에 성모상

 

  그랑디에의 전기를 맨 처음 쓴 오뱅 목사는 「오라토리오회 성직자들이 유능하며 카르멜회 수사들보다 수완이 더 좋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알려진 대로, 오라토리오회 구성원들은 세속의 성직자이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그랑디에가 르쿠브렁스 성모상에 회의적인 냉담을 표했을 것이다. 

 

  자기 카스트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세속 사제단의 이익과 영광을 위하고 수도사들의 불신과 파멸을 위해 움직였다. 물론, 그랑디에가 루덩에 오지 않았더라도 르쿠브렁스 성상은 예전 명성을 잃었을 게 분명하지만, 카르멜회 수사들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인과관계가 복잡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칫 감정만 소모될 수도 있다. 반면에, 여러 결과를 어떤 단일한 원인 때문으로, 또 가능하다면 개인적 원인 때문으로 돌리기란 얼마나 더 쉬우며 얼마나 더 그럴듯한가! 이런 경우 일이 잘 될 때면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 하나를 골라 그에게 공훈을 돌리고 영웅처럼 떠받드는데, 그렇지 못할 때면 어떤 속죄양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상당한 적대자들을 둔 마당에 그랑디에가 자신에게 엄청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적대자를 또 금방 만들었다. 1618년 초 인근 지역 고위 성직자들이 참가한 종교회의에서, 쿠세에서 온 수도원장을 호되게 몰아붙였다. 루덩 거리를 통과하는 장엄한 행진 때 그 고위 성직자보다 제가 앞장서겠다고 무례하게 주장한 것. 

  주임신부의 주장과 태도가 원칙적으로는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의 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진에서 성 십자가 교회의 참사회 위원에겐 쿠세의 대수도원장보다 앞서서 걸을 권리가 있었다. 이 권리는 그 수도원장이 주교라 해도 유효했다. 

  그러나 정중함 같은 미덕도 있고 신중함이라는 덕목도 있는 법. 쿠세의 수도원장은 또 뤼송의 주교이고, 그 뤼송의 주교는 바로… 아르망 드 리슐리외였으니! 

 

  그 시기에 리슐리외는 실총 상태에 있었다. 한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넓은 마음으로 정중하게 대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1617년 리슐리외의 후견인이자 이탈리아의 엽기적인 인물 콘치니가 암살됐다. 이 궁정 쿠데타는 뤼네가 꾸미고 젊은 왕이 재가한 것.[각주:1]

  그러나 그 추방이 영원하리라 추정할 만한 근거가 있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한 해 지나, 아비뇽에서 짧은 유배 기간 이후,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인 뤼송의 주교가 파리로 부름을 받았다. 1622년에 이르러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 겸 추기경이 됐다

 

  아주 금방 프랑스의 절대 통치자가 된 인물을 그랑디에는 그저 자기주장이라는 쾌감 하나 때문에 괜히 기분 상하게 했다. 이 거친 언행을 나중에 후회할 이유가 생기리라. 하지만 당장에는 제가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서 어린애 같은 만족에 잠겼다. 평민이요 무명의 교구 성직자가 왕비의 총신이요 주교요 귀족의 콧대를 꺾은 거야! 선생을 비웃고도 벌 받지 않고 넘어간 어린 학생처럼 그가 우쭐댔다

  몇 해 뒤 리슐리외도 부르봉가 대공들을 무시하면서 그런 만족감을 맛보았다. 그의 늙은 숙부는 조카가 사보이 대공 앞에서 느긋하게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질겁했다. “오, 이럴 수가! 오래 살다 보니, 귀족도 아닌 변호사 라포트의 외손자가 샤를 5세의 손자에 앞서서 방으로 걸어가는 걸 다 보는구나!” 이 유치하고 당돌한 행동도 벌을 면했고, 리슐리외도 어린애 같은 우월감을 맛보았다. 

 

  루덩에서 그랑디에의 삶이 이제 궤도에 올랐다. 성직자 책무를 수행하고, 직무 중간에 종종 예쁜 과부들을 조심스레 찾아다니고, 지적인 친구들 저택에서 저녁마다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계속 늘어나는 적대자들과 충돌을 빚었다. 그것은 머리와 가슴에도, 생식선과 부신에도, 사회적 페르소나와 그의 사생활에도 똑같이 만족스럽고 아주 괜찮은 생활이었다

  오싹한 일이나 명백한 불운이 아직은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 즐거움이 거저 나오고, 아무런 제재도 안 받으며 욕망을 채우고, 아무런 후과 없이도 증오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한데 운명은 당연히 대차 청구서를 이미 작성했다. 단지, 조용히 진행했을 뿐. 그는 양심의 가책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조금씩 무감각해지고, 내면의 빛이 계속 어두워가고, 영원의 모습이 열리는 영혼 창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당대 체질의학에 따르면 그랑디에는 쾌활하고 격하기 쉬운 기질을 지녔다. 곧, 그에겐 세상만사가 순탄한 듯했다. 세상만사 오케이라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상의 일을 잘 주관하신다는 뜻이지! 주임신부는 행복했다.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병(躁病) 단계에 있었다. 

 

  1623년 봄 스케볼라 생마르트가 충분히 길고 영광스러운 삶을 마쳤다. 노인이 마르셰 성당에 화려하게 안장됐다. 반년 뒤 루덩과 샤틀레로, 시농, 푸아티에 지역 고위인사들이 죄다 참석한 추도식에서 위대한 인물을 기려 그랑디에가 연설했다. (발자크의 문체상 혁명적인 서신들 초판이 그 다음해에 나왔으니까 아직 낡지 않은) 그건 ‘열렬한 인문주의자’ 풍으로 행한 길고 장중한 웅변이었다.[각주:2] 꼼꼼하게 정성 들인 문장들이 고전작품들과 성서의 인용으로 반짝거렸다. 여봐란 듯이 넘치는 박식이 매 순간 자기만족적으로 드러났다. 미문은 인위적인 포효로 길게 이어졌다. 

  이 스피치를 청중이 아주 좋아했다. 1623년도 취향에 딱 맞은 것.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아벨 생트마르트가 주임신부 웅변에 하도 감동 받아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내놓았다. 검찰관 트렌캉도 모국어로 쓴 시로 주임신부의 달변을 한껏 추어올렸다. 

 

추도식을 영광스레 거행하기 위해 

이 즐라토우스트가 간택된 데는 근거가 없지 않아. 

고인을 적절하게 칭송하면서 그가 

기적 같은 달변을 쏟았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가엾은 트렌캉! 뮤즈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진실하지만 일방적이었다. 그는 그들을 사랑했으나, 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가 작시에는 서툴렀을지 모르나, 최소한 시를 논할 줄은 알았다. 

 

  1623년부터 검찰관 객실이 루덩의 지성적 삶의 중심이 됐다. 그건 생마르트가 떠났기 때문에 상당히 허약한 삶이었다. 트렌캉 자신이야 책을 많이 읽었지만 친구들과 일가붙이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이전에 생마르트 모임에서 배제됐던 이 사람들이 검찰관 저택은 무상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문가에 나타났다 싶으면 학식 깃들고 고상한 대화는 창문 너머로 날아갔다. 수다만 일삼는 여인들이며, 법규와 소송절차 이외에는 아는 게 없는 변호사들이며, 개와 말들이 유일한 관심사인 토호들과, 달리 뭘 하겠는가? 

 

  약제사 아담과 외과의 만누리도 그 객실 단골이었다. 전자는 코가 아주 길고, 후자는 너부데데한 얼굴에 올챙이배. 그들은 소르본 박사답게 아주 점잔 빼면서 안티몬과 사혈의 이점이며 관장 비누와 총상 치료 때 소작 기구의 유용함 등에 관해 장황하게 떠벌리곤 했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후작 각하의 매독이나 왕실 고문변호사 부인의 두 번째 유산, 치안판사 누이의 어린 딸을 고생시키는 위황병 얘기도 (물론 언제나 극비로) 풀어놓았다. 황당하면서도 거들먹대고 근엄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약제사와 외과의는 운명적으로 경멸 대상이었다. 그들은 비아냥거림을 스스로 벌고 조롱의 예봉을 자초했다. 

  비웃음의 대상과 기회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는 주임신부가 그들에게 그들이 자청한 것을 마음껏 퍼부었다. 아주 금방 그에게 적대자 둘이 더 생겼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상황이 무르익어 갔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4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4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2편 2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1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1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는 아들 루이 13세가 성년이 됐음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콘치니를 앞세워 국정을 주물렀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콘치니를 암살하고 그의 아내를 반역죄로 참수했으며, 모후를 1617년 3월 3일 블루아 성으로 추방함으로써 통치권을 찾았다. 이 거사를 총신 뤼네 공작이 주도했다. 또 이맘때 마리 메디치의 신임을 얻고 있던 리슐리외는 파리에서 쫓겨나게 됐다. [본문으로]
  2. 장 루이 드 발자크 (Jean-Louis de Balzac, 1597-1654) - 프랑스 서간체 문학의 대가. [본문으로]
728x90

'루덩의 악마들 (헉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덩의 악마들 1편 7  (0)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6  (0)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4  (0)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3  (0)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2)  (0) 2019.07.1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