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서 "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요" 하고 말한다면, 정신과의사한테 가보라는 말을 들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늘 자기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를 듣는다.
이건 자신도 모르게 여러 생각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 끝없는 머릿속 독백이나 대화를 멈출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늘 뭔가를 쉴 새 없이 혼자 중얼거리는, 이른바 '맛이 간' 사람들을 거리에서 간혹 본다. 한데, 그 미친 사람들이 하는 짓과 우리를 포함해 이른바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짓의 차이란 기껏해야 우리는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는다는 점일 뿐이다.
이 머릿속 목소리는 늘… 누군가나 뭔가를 촌평하고, 주장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이 머릿속 목소리는… 어떤 순간에 우리가 처한 상황과 별반 관련 없는 것이 많다. 이건 대체로 최근이나 먼 과거를 떠올리거나 가능한 미래 상황을 미리 짚어보거나 상상한다. 그러면서 일이 잘못 되거나 안 좋은 결과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우리는 근심 걱정이라 부른다. 때로는 이 사운드트랙에 시각적 형상이나 '정신적 필름‘이 수반되기도 한다.
머릿속 목소리가 혹시 당면한 상황과 관련된다 하더라도, 그 상황조차 머릿속 목소리는 과거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머릿속 목소리가 조건에 얽매인 마인드에서 나오는데, 또 이 제한된 마인드는 우리네 인생 내력뿐 아니라 우리가 물려받은 사회적, 문화적 사고방식의 반영이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과거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며, 그 결과 현재에 대해 완전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다.
머릿속 목소리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징벌하고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갉아먹는 고문자를 자기 머릿속에 둔 채 살고 있다. 이것이 질병뿐 아니라 크나큰 비참함과 불행의 원인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자기 마인드의 전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해방이다. 이 길을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중중대는 목소리에 최대한 자주 귀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라.
반복되는 생각 패턴에, 아마도 몇 년씩이나 양쪽 귀 사이에서 뱅뱅 돌았을 낡은 레코드판 소리에, 특히 주목하라.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생각꾼 지켜보기’이다.
달리 말해, 머릿속 목소리를 들으면서 목격자로 머릿속에 실재하라.
그 목소리를 들을 때 편견을 갖지 말라. 즉, 판단하지 말라.
듣는 것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같은 목소리가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다는 뜻일 테니까.
저기에 목소리가 있고 여기에 그것을 듣고 지켜보는 ‘나’가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있다’는 실감이나 나의 실재감은 생각이 아니다. 이건 마인드 너머에서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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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그 생각뿐 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로서 자기 자신도 분명히 알게 된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들어선 것이다. 생각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그 생각의 이면이나 기저에 있는 의식적인 실재를 느낀다.
이것이 우리의 더 깊은 자아이다.
그러면 생각은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금방 잠잠해진다. 왜냐하면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함으로써 마인드에 에너지 공급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도 모르게 강박적으로 생각하기를 끝내는 작업의 첫걸음이다.
생각이 잠잠해질 때 머릿속 흐름이 중간 중간 끊어지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인드가 없는 틈새이다. 혹은 무념(無念)의 간격이다. 이 틈새들이 처음엔 짧아서 몇 초에 불과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길어질 것이다.
이 틈새들이 생길 때, 우리는 내면에서 고요와 평온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존재>와 하나 됐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나아간다.
물론 그 이전에 이 상태는 대개 마인드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 연습을 계속 할수록 고요와 평온의 느낌이 더 깊어질 것이다. 사실, 이 느낌의 깊이에는 끝이 없다. 또한 내면 깊은 곳에서 신비하게 솟아나는 기쁨도 느끼게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존재>의 기쁨이다.
이건 트랜스 (꿈결, 비몽사몽) 같은 상태가 아니다. 전혀 아니야. 여기서는 의식이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아. 외려 그 반대이다. 평온을 얻느라고 의식 수준을 낮춰야 하며 고요를 얻느라고 활력과 기민함을 잃는다면, 그런 것은 얻으려 애쓸 가치가 없으리라.
이 내면의 연결 상태에서는 마인드와 동일시할 때보다 훨씬 더 경계하고 깨어 있게 된다.
우리는 완전히 현존한다. 게다가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장의 진동수가 이 상태에서 높아지기도 한다.
이 무념(無念)의 영역에 더 깊이 들어서면서 우리는 순수 의식 상태를 실감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 자신의 현존이 어찌나 강렬하고 기쁘게 느껴지는지, 이에 비하면 생각이며 감정이며 육체며 바깥세상 모든 것이 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진다. 하지만 이건 이기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심 없는 상태이다. 자신의 실재를 실감함으로써 우리는 이전에 ‘나 자신’이라 여기던 것을 훨씬 더 넘어서게 된다. 이 실재는 본질적으로 ‘나’이면서 동시에 이 ‘나’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여기서 내가 전하려는 것이 역설적이거나 모순된 듯이 들릴지 모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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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꾼 지켜보기’ 이외에도 <지금> 순간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머릿속 흐름에서 틈새를 만들 수 있다. 현재 순간을 그냥 강렬하게 의식하기만 하라. 그렇게 하는 자체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마인드의 움직임에서 의식을 끌어내 무심의 틈새를 만드는데,이 틈새 안에서 우리는 높은 경계심과 인식 상태에 있으면서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이걸 우리는 일상에서도 연습하고 실행할 수 있다. 우리네 일상 움직임은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어떤 것을 행할 때 거기에 온통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자체가 적어도 그 순간에는 목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이나 직장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계단 하나하나에, 동작 하나하나에, 심지어 호흡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라. 거기에 전적으로 현존하라. 몰입하라.
또는 손을 씻을 때, 그 행동과 관련된 모든 감각적 인식에 주의를 기울이라. 즉, 흐르는 물소리며 손놀림이며 비누 냄새 등에 집중하라.
혹은 차에 탈 때, 차 문을 닫고 나서 아주 잠깐 휴지를 취하고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라.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절절이 느껴 보라.
‘이런 실습을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확인하고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내면에서 체감하는 평온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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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분리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마인드의 흐름에 틈새를 만들 때마다 (no-mind, 무념의 찰나에 접할 때마다) 의식의 빛이 더 선명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린애들 장난에 미소 짓듯이 머릿속 목소리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자신을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건 자기 마인드의 내용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아감이 더 이상 거기에 좌우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