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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1648년 삼십년전쟁이 끝났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세가 꺾이고 게르마니아 주민 삼분지 일이 사라졌다. 유럽은 위대한 군주의 의지와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그러나 무정부 상태라는 간주곡이 흐르는 동안 한 프롱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다른 프롱드가 나타나곤 했다. 마자랭이 스스로 유배에 내몰렸다가 권좌로 복귀했고, 다시 은퇴했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 다음엔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각주:1]

  그맘때쯤 로바르데몽이 죽었다. 총신 지위에서 쫓겨나고 희미해진 채로. 그의 외아들은 말 타고 출몰하며 노상강도 짓을 하다가 살해됐다. 딸은 고아가 되어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루덩 우르술라회 수녀가 됐고, 거기서 제 아버지의 옛 휘하인 잔느 수녀 밑에 들었다.

 

   1656년 1월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 1부가 출간되고, 넉 달 뒤 위대한 얀센파 기적이 일어났다. 포르루아얄에 보관돼 있는 신성한 가시에 닿자 파스칼의 조카딸 눈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것.[각주:2]

 

한 해 뒤 생주르 신부가 죽자 원장수녀한테는 다른 수녀들과 가엾은 수렝 외에는 서신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게 됐다. 한데 장 조셉 수렝은 아직도 병세가 심해 답신을 보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658년 초 수렝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을 때 그 기쁨이란! 그것도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으니. 그녀가 이제 렌에 있는 방문동정회 수녀가 된 친구 마담 뒤우스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는다. 

   「얼마나 놀라운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감탄할 만해요. 그분은 나한테서 생주르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 내 영적 스승이 다시 나한테 편지를 쓸 수 있게 만드셨지 뭐에요! 이 편지를 받기 불과 며칠 전에 내 영혼 상태에 대해 긴 편지를 보냈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영혼 상태에 관해 수렝한테, 마담 뒤우스한테, 자기 편지를 읽고 응답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그녀의 남아 있는 서신들을 책으로 펴낸다면 몇 권은 좋이 되리라. 소실된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원장수녀는 ‘내면의 삶’이라는 것이 꼭 공개적이고 다중 앞에서 하는 끊임없는 자기분석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내면의 삶이란 자신을 분석하지 않을 때 시작되는 법.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만 집착하여 계속 떠들어대는 영혼은 거룩한 근간을 인식하기 어렵다. 이런 상태를 주목하자. 

 

  「내가 여러분께 편지하지 않은 것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오. 왜냐하면 난 진정 여러분 모두에게 선을 바라니까. 편지하지 않은 까닭이라면, 그저 필요한 것은 이미 충분히 언급된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뭔가 부족하다 싶다면, 그건 글쓰기나 말하기가 아니라오, 그런 것이야 흔히 필요 이상으로 넘치니까. 중요한 것은 침묵과 근면에 있어요.」 

  이 말은 십자가의 성 요한[각주:3]이 자기네 영적 상태를 아주 상세하게 적은 편지에 왜 답하지 않느냐고 불평한 수녀들에게 보낸 것. 그러나 ‘말하기란 마음을 흩뜨리고, 침묵과 근면은 생각을 모아서 스피릿을 굳힌다오.’ 

 

십자가의 성 요한, St. John of the Cross
St. John of the Cross

 

  한데, 오호라, 잔느는 침묵하기를 원치 않았구나. 그녀는 유명한 마담 드 세비네[각주:4]만큼이나 어휘가 풍부하고 표현이 장황했다. 하지만 오로지 자기 자신에 관한 가십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잔느 수녀를 마귀 들림의 절정 시기에 보았던 브리튼 사람 둘이 1660년 왕정복고와 더불어 마침내 저희 자리에 들어섰다. 톰 킬리그루는 궁정 침소관이 됐고, 검열 받지 않고 작품들을 올릴 수 있는 극장을 건축하도록 허가받았다. 존 메이틀랜드로 말하자면, 우스터에서 죄수가 되어 9년을 감금됐다가 이제 새 국왕의 국무비서요 총신 중의 총신이 됐다. 

  그러는 동안 원장수녀가 제 나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병치레를 하면서, 걸어 다니는 성물이요 권표 받드는 사람, 성스러운 대상이요 수다스러운 안내자라는 이중 역할이 이제 견딜 수 없이 고단해졌다. 성스러운 이름자들은 1662년 마지막으로 나타났고, 그 뒤 독실한 신자들이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적이 멈췄다 해도 잔느의 허황된 영적 자부는 이전처럼 여전히 컸다. 수렝이 그녀한테 보낸 여러 편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중요한 긴급함에 관해, 은혜의 근간에 관해 당신에게 말하려 하오. 곧, 겸허함 말이오. 이 성스러운 겸허함이 당신 영혼의 진정하고 견고한 반석이 되게끔 행동하기를 아주 간절히 바란다오. 우리가 편지로 주고받는, 숭고하고 고아한 본질의 것들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한테서 겸허함을 빼앗으면 안 된다오.」 

  아무리 남을 잘 믿고 기적적인 것을 과대평가함에도 불구하고 수렝은 서신으로 소통하는 여인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잔느 수녀는 대단히 널리 퍼진 ‘보바리스트’ 아종에 속했다. 이런 사람들에 관해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스칼테레사 성녀에 관해 이렇게 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계시를 받고도 그녀가 보인 크나큰 겸허함이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녀가 계시를 통해 얻은 인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녀의 말을 본받으려 무던히 애를 쓰고, 그렇게 하면 그녀의 본질을 본받는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마음을 열심히 자극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기꺼워하는 덕목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기꺼운 상태로 들어서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잔느 수녀는 실제로 자신만이 펼치는 코미디의 주인공이었음을 마음 한 구석에서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반대 되는 것을 한층 더 확신했다. 루덩에 몇 차례 방문하고 여러 달 묵었던 마담 뒤우스는 제 가엾은 친구가 거의 모든 시간을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잔느는 마지막까지 환상의 노예였을까? 혹은 조명 받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 뒤편 모습으로 죽을 수 있었을까? 무대 뒤편 본연의 모습은 황당하고 측은했다. 그러나 사실을 인정하기만 했다면, 테레사 성녀인 체하기를 그만두었다면, 모든 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한사코 다른 사람인 양 처신한 이상 기회는 없었다. 그녀에겐 정직성과 온유함이 부족했다. 안 그렇다면 자신 안에 더 훌륭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1665년 1월 그녀가 죽은 뒤 그때까지 그녀가 벌여 온 코미디는 수녀원의 남은 멤버들에 의해 진짜 광대극으로 변했다. 그들은 시신의 목을 베어 잘린 머리를 성스러운 슈미즈와 나란히 크리스털 창이 달리고 은으로 씌운 상자에 담았다

  지역 화가가 주문 받아서 베게모트를 퇴치하는 그림을 엄청나게 크게 그렸다. 화폭 한가운데 원장수녀가 수렝 수사 앞에서 황홀경에 잠겨 무릎 꿇고 있고, 그 수렝을 트랑킬 신부와 어떤 카르멜회 수사가 돕고 있다. 그 장면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를레앙 공 가스통이 동부인하여 위엄 있게 구경하고 있다. 그들 뒤로 창가에는 지체가 좀 낮은 구경꾼들 얼굴이 보인다. 그림 위쪽에는 후광에 둘러싸이고 케루빔을 거느린 성 요셉이 떠 있다. 오른손에 벼락 세 개를 쥐고 있는데, 그것을 마귀 들린 자들 입에서 나오는 시커먼 악마들과 악령들한테 내던지고 있다.  

  이 걸작은 우르술라회 채플에 팔십 년 넘게 걸려 있으면서 만인의 경배 대상이 됐다. 그러나 1750년 푸아티에 주교가 루덩에 왔다가 보고는 어디 멀리 치우라고 지시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순종 의무 사이에서 애를 끓다가 수녀들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화폭 위에 다른 훨씬 더 큰 그림을 걸었다. 원장수녀가 가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수녀원이 쇠락을 거듭하다가 1772년 폐쇄됐다. 그림은 성 십자가 교회 참사회 위원한테 넘어갔고, 슈미즈와 미라가 된 머리는 십중팔구 어떤 좀 더 운이 좋은 수녀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세 가지 다 지금은 종적이 묘연하다. 

(10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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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자기인식.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통 기량 향상 - 신체 언어 팁 16가지

우리를 매트릭스에 묶어두는 환상 6가지

 

 

  1.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에서 1648-1653 어간에 잇따라 발생한 반정부 폭동으로, 사실상 시민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이는 또 1635년에 시작된 프랑스와 에스파냐 전쟁의 와중이었다. 파리 고등법원의 프롱드와 귀족들의 프롱드로 대별되는데, 전자는 베스트팔렌 조약 직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 프롱드 난은 결국 지역 귀족세력의 권한 약화와 절대군주국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fronde는 본래 투석기를 뜻하는데, 파리 군중이 마자랭 지지자들 집의 창문을 깨는 데 이용했다. 이 와중에 마자랭은 두 번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했다. 오늘날 프롱드는, 말만 그럴싸하게 하며 실제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권력자들에 대한 불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파스칼의 누이의 어린 딸인 마르그뤼트 페리에는 왼쪽 눈의 누공이 썩어 들어가는 질병으로 3년 넘게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기독교 교육을 시키려는 모친의 뜻에 따라, 언니와 함께 포르루아얄 수녀원에 기숙학생으로 들어갔다. ‘fistula lacrymalis’라고 일컫는 질환 때문에 누공이 안에서 심하게 손상되고 코뼈가 썩고 입천장에 구멍이 나서, 분출물이 뺨과 콧구멍, 목구멍으로 흘러내릴 정도. 머리를 만지기만 해도 눈가에 극심한 통증. 그 모습이 참으로 딱한데다가 분비물 냄새가 하도 역겨워서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 독방을 써야 했다. 파리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다 들러붙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날 신성한 가시를 눈에 댄 뒤 그 즉시 병이 싹 사라졌다. 6명 의사와 5명 외과의가 이 기적을 인정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어찌나 컸든지, 안 도트리시조차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설에 의하면 마자랭이 이후 5년 동안 얀센파를 박해하지 않게끔 했다고. 신성한 가시를 접하고 치료받은 사람이 두어 달 사이에 수십 명으로 늘었다. [본문으로]
  3. St. John of the Cross (에스파냐어: San Juan de la Cruz, 1542–1591) - 반종교개혁의 중심인물, 에스파냐의 신비주의자, 로마가톨릭 성인, 카르멜회 탁발수사요 성직자. 수도원 개혁에 박차. 영성에 관해 에스파냐어로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다. “신앙은 하나님께 가는 두 다리요, 사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안내자.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신앙의 신비와 은밀함을 잘 묵상하고 관상케 한다면, 사랑은 신앙 안에 담긴 것을 겉으로 드러나게 해줄 것.” [본문으로]
  4. Marie de Sévigné (1626-96) - 프랑스의 귀족. 나이 스물넷에 남편 잃고 홀로 자녀들 양육. 위트와 생생함이 넘치는 편지들을 남긴 일로 유명한데, 대부분 편지를 딸에게 썼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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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악마에 사로잡힌 잔느 수녀


 

  그건 또 하나의 이적이었다. 자신을 지배한 것을 자신이 적어도 웬만큼은 지배했다는 점을 다시금 과시한 셈. 저번에는 의지를 발휘하여 레비아탄의 추방을 넌지시 암시하더니, 이번에는 분명 치명적인 급성 심신증 질환의 증세를 다 떨치겠다고 의지를 보이고는 그렇게 한 것이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채플로 내려가서 다른 자매들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 

  의사 팡통을 부르러 다시 사람을 보냈고, 달려온 위그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했다. 하나님 권능은 지상의 치료법들을 단연 능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며, 앞으로는 우리 치료도 거부하겠지.」 이건 원장수녀의 기록. 

 

  의사 팡통만 가여운 신세가 됐다! 로바르데몽이 루덩으로 돌아온 뒤 사법위원회에 소환됐고, 위원회는 그에게 잔느의 회복이 기적이라는 증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거부했다. 거부하는 근거를 설명해 보라는 압력을 받자 죽을병에 걸렸다가 급작스레 건강해지는 경우는 흔히 자연스레 생길 수 있다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인체에는 체액이라는 물질이 있어서, 느낄 수 있게 배출되거나 피부 모공을 통해 느낄 수 없게 방출되거나, 아니면 생명에 중요한 신체 기관에서 덜 중요한 기관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때, 체액의 작용으로 생긴 불안한 증세는 치료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 있지요. 이것은 체액이 자연에 의해 완화됨으로써 그렇습니다. 혹은 처음 해로운 체액을 그보다 덜 포악한 다른 체액이 대체할 때도 그렇습니다.” 

 

  팡통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체액은 용변을 보거나 구토하고 땀이며 피를 흘릴 때 배출됩니다. 이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이런 식의 배출은 더운 체액, 특히 담즙이 많은 환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데, 그들이 질병에서 갑자기 벗어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은, 진작 썼지만 효능이 늦게 나타나는 약제 때문일 수 있습니다. 체액은 환자 몸에서 좀 빠져나오면서 병의 선행 원인뿐 아니라 복합적 원인도 함께 가지고 나오는 게 분명합니다. 아, 여기에 덧붙일 것이, 여러 체액은 균형 잡힌 움직임 등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듯이, 몰리에르는 자신의 희곡에서 당대 의사들의 무지를 전혀 과장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이틀이 지났다. 원장수녀가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나를 치료해준 성 요셉의 기름을 다 닦아내지 않았으니까 자국이 슈미즈에 아직 남아 있을 거야. 부원장이 보는 앞에서 수녀복을 걷어 올렸다. 

  「우리 둘은 놀라운 향내를 맡았다. 나는 슈미즈를 벗어서 허리춤을 잘라냈다. 슈미즈에는 신성한 향유가 다섯 방울 떨어져 있어, 거기서 천상의 향기가 풍겼다.」 

 

  <젠체하는 새침데기들>[각주:1]에서 고르기부스가 하녀한테 묻는다. “네 젊은 여주인들은 어디 있느냐?” 마로트가 대답한다. “자기네 방에 있지요.” “거기서 뭘 하는 거지?” “입술에 바르는 포마드를 만들어요.” 

  그 시대에는 패션을 아는 여인이라면 누구나 엘리자베스 아덴[각주:2]이 되어 화장품을 제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얼굴 크림과 손 로션, 입술연지와 향수를 만드는 레시페는 비밀 병기처럼 소중히 간직되고 특별한 친구들 사이에서만 너그럽게 주고받았다. 

 

  잔느는 어려서 집에 있을 때나 수녀원에 들어온 뒤에나 뛰어난 화장품 제조자요 아마추어 약제사였다. 성 요셉의 성유는 신성한 것이 아니라 지상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거기엔 다들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다섯 방울이 있었다. 원장수녀가 이렇게 적는다.

  「이 축복받은 성유를 사람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믿으며 이 다섯 방울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이적을 역사하셨는지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잔느 수녀한테는 이제 자신의 신용을 위한 일급 경이로움이 두 가지나 됐다. 성흔이 나타나는 손, 향내 풍기는 슈미즈. 그 둘은 그녀가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영원한 증거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아직 모자랐다. 

 

  그녀가 루덩에 박혀 있다가는 자기 재능을 매장하는 꼴이라고 느꼈다. 물론 순례자들이 있고 대공들과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도시로 찾아왔다. 

  그러나 루덩까지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국왕과 왕비를 생각해 봐! 또 예하께서는 어떻고! 게다가 공작이며 후작들, 프랑스의 장군들, 로마교황의 사절들, 전권대사며 특명대사들, 소르본 박사들, 참사회장들, 대수도원장들, 주교며 대주교들을 생각해 봐! 이 훌륭한 분들이 경이로운 일에 감탄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호의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사람을 직접 보고 말을 듣도록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한데 그런 소망을 제 입으로 드러낸다면, 그건 주제넘은 짓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얘기를 먼저 끄집어낸 것은 베게모트였다. 

  한번은 가장 격렬한 엑소시즘이 끝났을 때 레쎄 수사가 악마한테 물었다. 어째서 이다지도 고집스레 저항한 것이냐? 악귀가 대답했다. 원장수녀가 사보이 공국 안시에 있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 묘지로 성지 참배를 떠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몸뚱이에서 나가지 않겠어!   

 

  엑소시즘을 하고 또 했다. 저주를 억수로 받으면서도 베게모트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게다가 이전의 최후통첩에다 다른 조건을 하나 덧붙이기까지 했다. 반드시 수렝 수사를 불러와야 해! 안 그러면 안시 순례조차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엑소시즘을 받는 원장수녀 잔느

 

  6월 중순 수렝이 다시 루덩에 나타났다. 그러나 성지 참배 출발은 옛 엑소시스트를 불러들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드러났다. 예수회 장군 비텔레스키는 제 휘하의 수도사가 수녀와 함께 프랑스를 돌아다닌다는 발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푸아티에 주교 쪽에서도 자기네 수녀가 예수회 수사와 돌아다닌다는 발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비 문제도 있었다. 왕실 금고는 흔히 그렇듯이 텅 비었다. 수녀들에게 지급한 보조금이며 엑소시스트들에게 들인 급료로 마귀 들림 사건에 국왕은 이미 막대한 금액을 들였다. 그런 마당에 사보이로 유람을 떠난다니! 

 

  그런데도 베게모트는 끝까지 버텼다. 그가 선심 쓰듯 하면서 루덩을 떠나는 데 동의했지만, 그것 또한 잔느와 수렝이 나중에 안시로 성지 순례를 반드시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결국 제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았다. 수렝과 잔느가 성 프랑수아의 묘지에서 만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단, 거기까지는 각자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조건 하에. 두 사람이 그렇게 하기로 서약했고, 그 얼마 뒤 10월 15일 베게모트가 자취를 감췄다. 잔느가 마침내 자유로운 몸이 됐다. 두 주일 뒤 수렝이 보르도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 트랑킬 수사가 악령의 광란에 휘둘린 끝에 죽었다. 

  국고에서 급료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살아남은 엑소시스트들이 본래 저희 소속 거처로 다 돌아갔다. 그들이 떠나자 남아있던 악마들도 곧 하나씩 둘씩 사라졌다

  여섯 해 쉴 새 없이 벌이던 투쟁 끝에 전투 교회가 악을 상대로 한 싸움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교회의 적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신속하게 사라졌다. 길고 떠들썩했던 파티가 끝났다. 
만약 엑소시스트들이 없었다면, 악마들도 없었으며, 그런 파티도 결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9편 끝)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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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 몰리에르의 단막 코미디. 1659년 파리 프티 브르봉 극장에서 초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본문으로]
  2. Elizabeth Arden (1884-1966) - 캐나다 출신 사업가로 미국에서 화장품 제국을 이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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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철창 너머로 대화하는 잔느 수녀

 


 

  하지만 수렝이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봤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그가 다른 수도사들처럼 가혹한 엑소시즘을 공공연히 벌이는 대신 피후견인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 보낸다는 것. 그녀를 가르쳐서 (그녀의 악마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완성의 길로 이끌려는 시도가 동료들한테는 그저 허튼짓으로 보였을 뿐이다. 더욱이 수렝 본인도 악령에 사로잡혀서 종종 엑소시즘을 필요로 하는 마당에

  (5월에 왕제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이 악마들에 대한 호기심을 풀려고 왔을 때, 잔느 수녀 몸에서 불시에 출격한 이사카론이 수렝에게 들러붙었다. 마귀 들린 여인이 정신 멀쩡하게 조용히 냉소 짓고 있는 동안 엑소시스트가 발작하여 마룻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런 장면에 왕제야 당연히 좋아했지만, 수렝에게 그 일은 불가사의한 섭리로 인해 겪어야 한 숱한 굴욕의 일부였다.) 

 

  동료들은 수렝의 의도나 활동의 순수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위를 무분별하다 여겼으며, 그런 무분별로 인해 험담이 나도는 데 쓴 입맛을 다셨다. 이미 여름 막바지에 수도회 관구장은 수렝을 보르도로 소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럿 접하게 됐다. 

 

  원장수녀 역시 시련을 적잖이 맛봐야 했다. 그녀는 성처녀라는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그 역할에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 기대했다. 한데 그렇기는커녕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자매들과 대화할 때 그들에게 들러붙은 악마들을 통해 내게 많은 고통을 내리셨어. 내 행동과 생활방식이 바뀐 것을 보고 대다수 수녀들이 반감을 크게 품은 거지. 그들을 악령들이 자꾸 부추겼다. 원장수녀를 저렇게 바꾼 것은 바로 악마들인데, 이제 그녀는 너희를 멸시하면서 망신 주려 들 것이야! 내가 자매들과 있을 때마다 악령들은 몇몇 자매를 꼬드겨 내 언행을 비웃고 놀리라고 충동질했다. 그건 나한테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었고.」 

 

  수녀들은 엑소시즘 중에 원장수녀를 가리켜 ‘신을 섬기는 악마’라 불렀다. 수렝을 제외하고 다른 엑소시스트들도 정말 그런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성 요셉한테서 묵상기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잔느가 다른 수녀들한테 단언해봤자 소용없었다. “하나님 권세로써 정관(靜觀)의 경지에 오르고, 그리하여 큰 계시를 얻었으며, 우리 주님이 특별하고 은밀하게 내 영혼에 와 닿았어요” 하고 겸손하게 설명해봤자 씨도 안 먹혔다. 

거룩한 지혜의 이 살아 있는 샘물 앞에서 부복할 만도 했거늘 엑소시스트들은 이것이 마귀 들린 자가 흔히 겪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뿐이었다. 그런 몰이해와 냉혹함에 부닥치면 원장수녀가 주춤하여 광기에 빠지거나, 아니면 소중하고 선량하고 사람 잘 믿는 수렝 수사와 함께 다락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렝 수사조차 그녀한테는 고난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내렸다는 특별한 은혜 운운을 죄다 믿을 준비가 충분히 돼 있었다. 하지만 거룩함에 대한 그의 이상은 불편할 정도로 높고, 그가 평가하는 잔느 수녀 품성은 불편할 정도로 낮았다

  혹자가 자신을 교만하고 방탕한 사람이라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그런 불쾌한 진실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것은, 차이가 아주 크다.

 

  잔느의 흠결을 들추면서 수렝이 만족을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그런 면을 바로잡아 주려고 늘 애썼을 뿐이다. 그는 원장수녀가 악마들에 사로잡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악마는 제물의 흠결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린다는 점도 굳게 믿었다. 흠결을 제거하면 악령도 떨어질 터. 그렇기 때문에, 수렝의 말에 따르자면, ‘기수를 안장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말을 공격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공격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왜냐하면 잔느 수녀가 ‘완성을 얻어 신에게 나아가기로’ 굳게 결심했다 할지라도, 스스로는 이미 성자라고 여기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그저 지각없는 (혹은 지나치게 의도적인) 코미디언으로 볼 때 가슴 아팠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신성함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지극히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수녀 잔느

 

  수렝은 그녀가 체험하는 법열이나 무아지경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거기에 그녀가 우쭐거렸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나 그보다 아직은 참회와 고행에 더 진지하게 대했다. 그래서 그녀가 주제넘게 굴 때마다 호되게 꾸짖었다. 그녀가 공개적인 참회나 수련수녀 신분으로 강등 같이 여봐란 듯한 속죄 장면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할 때, 수렝은 그런 것보다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 꾸준한 고행이 더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가끔 일어난 일이지만 그녀가 귀부인처럼 행세할 때면, 그는 그녀를 부엌데기처럼 대했다.

 

  그런 취급에 감정이 격해지자 그녀가 레비아탄의 오만한 분노나 신에 대한 베게모트의 불경스러움, 발람의 외설스러운 농담 따위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수렝은 이때까지 악마들이 아주 즐기던 엑소시즘에 의존하는 대신 사납게 들끓는 그들한테 스스로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 자기계발을 위해서는 거리낌 없음과 진짜 갈망을 늘 지니고 있는 원장수녀가 여기에 동의하자 다른 악마들도 따라야 했다. 악마들이 말했다. “우리는 교회에 맞설 수 있고, 성직자들한테 덤빌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암캐의 고집에는 저항할 수 없어!” 

 

  악마들이 저들 특질에 따라 불평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도 고행용 채찍을 참아냈다. 레비아탄이 가장 세게 때리고, 그 다음이 베게모트였다. 그러나 발람과 특히 이사카론은 통증을 지독히 무서워했다. ‘정욕의 악마가 채찍을 맞으며 울부짖는 장면은 정말 볼만했다’고 수렝이 말한다. 채찍질은 실상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비명이 귀청을 때리고 눈물이 폭포 같았다. 

악마들은 정상 상태에 있는 잔느 수녀보다 아픔을 더 견디지 못했다. 한번은 레비아탄 때문에 야기된 심신증 증세를 떨치기 위해 그녀가 한 시간 내내 제 몸을 채찍으로 때렸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징벌 몇 분이면 악령들이 달아났고, 그러면 잔느 수녀가 완전한 경지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그건 고난의 행진이었다. 한데, 적어도 원장수녀가 보기에 완전한 경지에는 한 가지 중대한 흠이 있었다. 그건 수렝 신부가 쩍하면 강조하는 작은 고행처럼 사람들 이목을 끌지 못한다는 점. 잔느가 혼자 중얼거렸다. 

  넌 이미 정관의 경지에 올라섰어, 저 높은 곳과 사적으로 접하는 영광을 얻었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없잖아!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람들한테 말했지만, 그들 반응이라야 기껏해야 고개를 젓거나 어깨를 추썩이는 것일 뿐. 그녀가 축복받은 마더 테레사가 했을 법한 행동을 하고 다닐 때,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며 그녀를 위선자라 불렀다. 더 설득력 있는 뭔가가, 사람들 눈길을 끌고 분명히 초자연적인 뭔가가 필요했다. 악마의 이적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잔느 수녀가 마귀 들린 여인들의 여왕 노릇을 그만두고 생전에 성인 반열에 오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가 보인 성스러운 기적들 중 첫 번째가 1635년 2월에 일어났다. 

 

  하루는 이사카론이 털어놓는 얘기가 이랬다. 익명의 마법사 셋이 말이야, 둘은 루덩 출신이고 하나는 파리지앵인데, 축성된 면병 세 개를 가로챘어, 그리고 그걸 불태우려고 한단 말이야! 

  수렝이 즉각 이사카론에게 명했다. 네가 파리로 가서 그들이 매트리스 밑에 숨겨둔 면병을 가져 오거라! 

  이사카론이 사라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이사카론을 도우라고 발람한테 명령했지만 한사코 거부하며 수렝의 천사와 싸우다가 결국 복종하게 됐다. 다음날 저녁식사 후 벌이는 엑소시즘 때 면병 세 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명령이었다. 

 

  지정된 시각에 발람과 이사카론이 수렝 앞에 나타나 잔느 몸 안에서 이리저리 나대며 저항하던 끝에 면병이 제단 위 벽감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고서 악마들은 원장수녀의 아주 작은 몸뚱이가 길게 늘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한껏 내뻗은 팔 끝에서 손이 벽감으로 들어가더니 꼼꼼하게 접힌 종이쪽을 들고 나왔는데, 거기에 면병 세 개가 싸여 있었다.

 

  이 안쓰러울 정도로 수상쩍은 경이로움을 수렝은 중요한 징표로 간주했다. 그러나 잔느의 자서전에는 이 스토리가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남을 잘 믿는 영적 지도자를 멋지게 골려준 트릭을 부끄럽게 여긴 걸까? 아니면, 그 기적을 썩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은 건가? 이 사건에서 그녀가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한테는 전적으로 본인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이적이 필요했고, 그 원하던 것을 그해 가을에 결국 얻었다. 

 

  수도회 내부 여론에 견디다 못해 아키텐 관구장이 10월 말경 수렝에게 보르도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그 자리에는 좀 덜 기이한 엑소시스트를 지명했다. 이 소식이 루덩까지 알려지자 레비아탄은 기뻐 날뛰었지만 제 정신으로 돌아온 잔느 수녀는 되레 침울해졌다.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성 요셉에게 기도한 끝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이 오만한 악마를 물리치게 하리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그 뒤 사나흘 동안 자리보전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나아져서 자기한테 엑소시즘을 시행해 달라고 청했다. 「그건 많은 귀빈들이 엑소시즘을 보러 교회에 와 있던 그날 (11월 5일) 생긴 일이었다. 난 여기서 신의 특별한 섭리를 보았다.」 (VIP들이 교회에 올 때면 늘 ‘특별한 섭리’가 나타났다. 바로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악마들이 늘 가장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린 것이다.) 

 

  엑소시즘이 시작되고 금방 ‘레비아탄이 나타나서 성직자한테 승리를 거뒀노라고 떠벌렸다.’ 수렝이 성체에 경배하라고 이르면서 악령에게 역공을 가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레비아탄이 울부짖으며 발광했다. 

  그때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하셨다.’ 레비아탄이 엑소시스트 발밑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혹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잔느 수녀가 그렇게 한 것. 악령은 수렝의 명예를 더럽히고자 간계를 꾸몄노라 시인하고는 용서를 빌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발작을 일으킨 뒤 원장수녀 몸에서 떠났다. 영원히. 

 

  이야말로 수렝의 승리이자 그의 방법론이 옳다는 증거였다. 이 장면에 감명 받은 다른 엑소시스트들이 수렝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수도회 관구장이 수렝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잔느 수녀가 원하던 바를 얻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악마들을 웬만큼은 지배할 수 있다는 점도 과시했다. 악마들이 그녀를 미치광이처럼 날뛰게 만들 수 있지만,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악마들을 영원히 내쫓을 수도 있는 것

 

  레비아탄이 달아난 뒤 핏빛 십자가가 원장수녀 이마에 나타나더니 세 주일 내내 또렷한 형태를 유지했다. 이적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효과적인 뭔가가 뒤따라야 했다

  이제 발람이 뜻을 밝혔다. 난 원장수녀 몸에서 떠날 용의가 있는데, 떠나게 되면 기념으로 내 이름을 그녀 왼손에 적어 넣겠어, 그러면 죽을 때까지 손바닥에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못된 장난을 일삼는 스피릿의 서명을 평생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예측을 잔느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흠, 악령한테 예를 들어 성 요셉의 이름자를 쓰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렝의 조언을 좇아 그녀가 성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홉 번 연속 영교 과정에 들어섰다. 그 아흐레 기도를 막으려고 발람이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러나 육신에 병이 도지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히는 짓도 소용없었다. 원장수녀가 꿋꿋이 맞섰다. 

 

  언젠가 아침에 미사 드리기 직전 (못된 장난과 신성 모독의 악령들인) 발람과 베게모트가 그녀 두개골로 기어들어 어찌나 소란 피우고 혼란스럽게 하든지 그녀가 잘못인 줄 빤히 알면서도 식당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거기서 ‘나는 음식에 게걸스레 달려들어 굶주린 장정 셋이 온종일 먹는 것보다 더 많이 먹어 치웠어.’ 그렇게 잔뜩 배를 채운 뒤 성체 배령은 불가능했다. 이것이 모든 구상을 위협하게 됐다.

 

  비탄에 잠긴 잔느가 수렝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영대를 걸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악령이 다시 내 머리에 파고들더니 곧장 나로 하여금 산더미처럼 많은 양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런 뒤 발람이 이제 수녀의 위장이 텅 비었다고 장담하자, 수렝은 그녀가 성체를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런 곡절 끝에 나는 성 요셉을 향한 아흐레 기도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11월 29일 못된 장난과 사악한 웃음의 악마가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이 사건 때 구경꾼들 중에 영국인 두 명이 있었다. 맨체스터 백작의 아들로서 얼마 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개종자의 열정으로 기적을 믿는 월터 몬테규, 또 그의 젊은 친구이자 부하이며 나중에 극작가가 된 토마스 킬리그루. 

  며칠 뒤 킬리그루가 잉글랜드에 있는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루덩에서 본 것을 낱낱이 전달했다. 그는 그 경험이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각주:1]

 

   방문 첫날 수녀원 교회에서 그는 귀신들린 수녀 네댓이 무릎 꿇고 나직이 기도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들 등 뒤에 엑소시스트가 한 명씩 서서 줄을 쥐고 있는데, 그 다른 끝이 각 수녀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 줄마다 작은 십자가들이 매달려 있어서 악마들의 작은 광란을 통제하는 개줄 역할을 했다. 그렇긴 해도 아직은 모든 게 평온하고 차분했으며 ‘나는 무릎 꿇은 것 외에 특기할 만한 장면은 전혀 못 봤다.’ 

 

  그러나 삼십 분 뒤 개중에 두 수녀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는 수도사 목에 들러붙고, 다른 하나는 혀를 내밀고 제 엑소시스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입맞춤하려고 들었다. 그러는 동안 으르렁대는 소리가 숙사와 교회를 가로막은 격자 창살을 통해 사납게 들려 왔다. 

 

  그 다음에 젊은 킬리그루를 월터 몬테규가 불러 마귀 들린 수녀들이 과시하는 독심술을 직접 경험하라고 했다. 악마들이 개종자의 생각은 읽을 수 있지만, 킬리그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맞힐 수 없었다. 독심술을 자랑하는 중에 악마들은 칼뱅을 위해 기도하고 로마가톨릭교회를 저주했다. 그러다가 악귀 하나가 문득 사라졌기에 구경꾼들이 그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수녀가 응답하는데 어찌나 추잡하든지, 그 답변을 <유럽 매거진> 편집인이 지면에 싣지 못할 정도였다. 

  이어서 예쁘고 어린 아그네스 수녀를 대상으로 엑소시즘이 시작됐다. 킬리그루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는 이미 앞의 장에서 얘기했다. 이 아름다운 피조물을 다부진 농민 둘이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엑소시스트가 가슴에 이어 하얀 목을 발로 밟는 광경은 젊은 신사의 가슴을 공포와 혐오로 채웠다

 

  다음날 그런 장면이 모조리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엔 퍼포먼스가 흥미는 더 일으키고 비위는 덜 거스르는 식으로 끝났다. 킬리그루가 이렇게 쓴다. 

  「기도가 끝나고 그녀(원장수녀)가 탁발수사(수렝) 쪽으로 돌아서자 그가 그녀 목에 작은 십자가들이 달린 밧줄을 걸고 세 번 돌려 묶었다. 그녀는 내내 무릎 꿇고 앉아서 줄이 바짝 조일 때까지 기도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나서는 묵주 알 세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제단에 경의를 표한 뒤 장의자로 갔다. 그건 엑소시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채플 안에는 그런 것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소파의 이 원형이 아직도 현존할까? 궁금하다.)

 

  「이 장의자 머리는 제단 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어찌나 겸허한 자세로 다가갔는지, 수도사들의 기도가 없이 그 참을성 하나만으로도 악마를 내쫓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장의자에 와서 눕더니 제 몸을 수도사가 로프 두 개로 의자와 함께 묶도록 거들었다. 허리 부위를 묶고, 허벅지며 다리를 또 묶었다. 그렇게 묶인 상태에서 성체가 담긴 상자를 들고 있는 성직자를 보자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고문을 앞둔 사람처럼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만이 내보인 특별한 겸허함과 참을성이 아니었다. 다른 수녀들도 그런 경우에 다 그렇게 했으니까. 엑소시즘이 진행됐을 때, 마귀 들린 다른 수녀가 다른 수도사를 부르더니 장의자에 누워서 단단히 묶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본래 모습일 때 얼마나 얌전하게 제단으로 나아가는지, 수녀원에서 얼마나 조신하게 걸어 다니는지를 보면 야릇한 마음이 든다. 그들의 표정과 얼굴은 신앙에 삶을 바친 처녀들답게 정숙하다. 이 원장수녀도 엑소시즘을 시작할 때는 차분하게 누워 있었다. 잠자는 듯이…」 

 

  (수렝이 원장수녀에게 엑소시즘을 시작하자 일이 분 뒤 발람이 나타났다. 사지를 뒤틀고 경련을 일으키고 하느님을 거세게 모욕하는 말이 나오고...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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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이 서신은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1803년 2월 호 <유럽 매거진>에 실렸다. - 저자 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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