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상과학(SF) 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7. 머리들이 기분을 전환하다
톰과 브리케의 머리들은 새로운 존재에 적응하기가 도웰의 머리보다 더 힘들었다.
도웰 교수의 뇌는 이전에 흥미를 보였던 과학 연구에 지금도 전념하고 있었다.
톰과 브리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몸통 없이 산다는 건 그들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아주 금세 우울해진 것은 당연했다.
톰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걸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어? 나무 등걸처럼 웅크리고서 구멍 날 정도로 벽만 쳐다봐야 하니…”
코른은 그들을 농담 삼아 ‘과학의 포로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포로들이 시무룩한 모습만 보이자 그도 역시 몹시 안달했다. 대중에 공개할 날이 오기도 전에 머리들이 우울증으로 쇠약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떡하든 그들이 재미나게 지내게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영사기를 들여놓고, 로랑과 존이 저녁마다 필름을 틀었다. 실험실 흰 벽이 스크린 구실을 했다.
톰의 머리는 찰리 채플린과 몬티 뱅크스(Monty Banks)가 출연하는 코미디 필름들을 특히 좋아했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면서 톰은 한동안이라도 자신의 구차한 존재를 잊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웃음소리 같은 것이 터지기도 하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방안 흰 벽에 영사된 한 필름에서 뱅크스가 까불거리는 뒤편으로 시골 농장 전경이 나타났다.
작은 계집애가 닭들에게 먹이를 준다. 볏을 꼿꼿이 세운 암탉이 병아리들을 열심히 거둬 먹인다.
뒤편에 있는 외양간에서는 젊고 튼튼한 여인이 어미 젖통으로 파고드는 송아지를 팔꿈치로 밀면서 암소의 젖을 짜고 있다.
털북숭이 개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면서 마당을 달려갔고, 그 뒤로 농부가 나타났다. 그가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그때 톰이 가성 같이 아주 높은 소리를 쉭쉭 내더니 고함을 쳤다.
“그만! 그만둬요!..”
영사기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존이 무슨 뜻인지 언뜻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연을 멈춰요!”
로랑이 소리치면서 서둘러 불을 켰다.
희끄무레해진 장면이 여전히 얼마 동안 어른거리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존이 영사기 작동을 멈췄다.
로랑이 톰을 쳐다봤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건 이미 웃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모욕당한 아이처럼 온통 찌그러들고 입매가 일그러졌다.
톰의 머리가 흐느꼈다.
“꼭 우리… 시골 같아… 암소… 암탉… 그것들이 사라졌어, 이젠 다 사라졌어…”
영사기 곁에서 로랑이 필름을 바꾸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곧 다시 불이 꺼지고 흰 벽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해롤드 로이드(Harold Lloyd)가 추적하는 경찰들을 피해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톰의 상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이 그에게 더 큰 우울증을 안기게 됐다.
톰의 머리가 투덜댔다.
“저런, 탄내 맡은 놈처럼 정신없이 다니는군. 저자를 나처럼 주저앉히면, 저렇게 팔딱거리며 뛰지 못할 텐데.”
로랑이 프로그램을 다시 바꿔야 했다.
사교계 무도회 장면에 브리케의 기분이 완전히 잡쳤다.
어여쁜 여인들과 그들의 호사한 성장에 짜증스러운 반응을 예민하게 보였다.
“필요 없어… 난 다른 이들이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영사기를 내갔다.
라디오가 그들을 조금 더 오래 즐겁게 해주었다.
음악이 흐르자 둘 다 흥분했다. 특히 댄스곡이 나오자 더 달아올랐다.
“아아, 내가 이 춤을 얼마나 많이 추었는데!”
브리케의 머리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외쳤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면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브리케는 변덕이 심했다.
짬만 나면 거울을 비춰 달라고 하지 않나, 툭하면 가르마를 바꾸어라, 아이라인을 그리고 파운데이션과 연지를 발라라, 요구가 많았다.
화장에 크게 관심이 없는 로랑이 무슨 짓인가 싶어 불쾌해졌다.
그러자 브리케의 머리가 짜증을 냈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에요?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더 어둡게 됐잖아요. 거울을 더 올려요.”
브리케는 패션잡지들과 옷감을 가져다 달라고 청하고 자기 머리가 놓인 탁자를 천 같은 것으로 가리라고 했다.
나이가 다 들어 수줍음을 타면서, 한 방에서 남자와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는 등 괴벽을 보이기까지 했다.
“밤에는 병풍으로, 아니면 책으로라도 나를 가려 줘요.”
로랑이 하는 수 없이 큰 책으로 ‘병풍’을 만들어 브리케의 머리 곁 유리판 위에 세워 두었다.
톰도 브리케 못지않게 사람들을 귀찮게 했다.
한 번은 포도주를 요구했다.
코른 교수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용액에 알코올을 조금 집어넣어서 그가 술 취한 기분을 맛보도록 했다.
가끔 톰과 브리케는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빈약한 성대가 받쳐주지 못했다. 그건 듣기에 딱한 이중창이었다.
“내 가련한 목소리… 예전에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당신이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하면서 브리케가 괴롭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녁마다 그들은 상념에 잠겼다.
이상한 존재 방식 때문에 이 평범한 존재들조차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들을 숙고하게 됐다.
브리케는 불멸을 믿었다. 톰은 유물론자였다.
“물론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면, 머리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브리케의 머리가 종알거리자, 톰이 신랄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은 머리와 몸 중 어디에 깃들었나요?”
“물론, 몸에 있었지요… 아니, 어디에나 있었어…”
상대가 자기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브리케의 머리가 자신 없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신 몸통의 영혼은 지금 저승에서 머리가 없이 다니고 있나요?”
“당신한테도 머리가 없는걸요, 뭐.”
브리케가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톰이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나야 머리하고 있지요. 그것 하나만 남은 걸요. 한데 당신 머리의 영혼은 저 세상에 남지 않았어요? 이 고무 창자를 따라서 지상으로 돌아왔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의 말투가 이제 심각하게 바뀌었다.
“우리는 기계와 같아서, 증기를 넣으면 다시 작동했지요. 한데 지금은 산산조각이 나서 아무리 증기를 넣어도 소용이 없는 거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또 각자 상념에 잠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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