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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이 첫 번째 공격에 이어 그랑디에가 카르멜회의 주요 수입원을 겨냥해 무례한 언급을 연달아 퍼부었다. 바로 ‘르쿠브렁스의 성모’로 불린, 이적 행하는 성상을 두고 말이다. 

  루덩 시 전체 구역의 사분지 일이 순례자들을 들이기 위한 여관과 하숙집으로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순례자들은 이 성상에 건강이나 신랑감, 자식이나 더 좋은 행운을 빌기 위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르쿠브렁스의 성모에 위협적인 경쟁자로 아딜리에 성모가 나타났다. 아딜리에 교회는 루덩에서 불과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소뮈르에 위치했다.

 

  질병 치료나 여성 모자에 패션이 있듯이 가톨릭 성인들한테도 유행이 있다. 웅장한 교회들은 성상이며 성물들에 관해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으니, 오랫동안 모셔오던 것들을 새로운 이미지며 성유물로 가차 없이 대체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그러면 예전 것들은 뭔가 더 새롭고 한순간 더 매혹적인 요술사 때문에 대중의 호평에서 밀려나기 마련이다. 

  아딜리에 성모상이 르쿠브렁스 성모상보다 왜 갑자기 훨씬 더 우월한 듯 보이게 됐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아딜리에의 성모상을 오라토리오회 수사들이 관리했다는 점. 

 

아딜리에 성모상

 

  그랑디에의 전기를 맨 처음 쓴 오뱅 목사는 「오라토리오회 성직자들이 유능하며 카르멜회 수사들보다 수완이 더 좋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알려진 대로, 오라토리오회 구성원들은 세속의 성직자이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그랑디에가 르쿠브렁스 성모상에 회의적인 냉담을 표했을 것이다. 

 

  자기 카스트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세속 사제단의 이익과 영광을 위하고 수도사들의 불신과 파멸을 위해 움직였다. 물론, 그랑디에가 루덩에 오지 않았더라도 르쿠브렁스 성상은 예전 명성을 잃었을 게 분명하지만, 카르멜회 수사들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인과관계가 복잡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칫 감정만 소모될 수도 있다. 반면에, 여러 결과를 어떤 단일한 원인 때문으로, 또 가능하다면 개인적 원인 때문으로 돌리기란 얼마나 더 쉬우며 얼마나 더 그럴듯한가! 이런 경우 일이 잘 될 때면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 하나를 골라 그에게 공훈을 돌리고 영웅처럼 떠받드는데, 그렇지 못할 때면 어떤 속죄양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상당한 적대자들을 둔 마당에 그랑디에가 자신에게 엄청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적대자를 또 금방 만들었다. 1618년 초 인근 지역 고위 성직자들이 참가한 종교회의에서, 쿠세에서 온 수도원장을 호되게 몰아붙였다. 루덩 거리를 통과하는 장엄한 행진 때 그 고위 성직자보다 제가 앞장서겠다고 무례하게 주장한 것. 

  주임신부의 주장과 태도가 원칙적으로는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의 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진에서 성 십자가 교회의 참사회 위원에겐 쿠세의 대수도원장보다 앞서서 걸을 권리가 있었다. 이 권리는 그 수도원장이 주교라 해도 유효했다. 

  그러나 정중함 같은 미덕도 있고 신중함이라는 덕목도 있는 법. 쿠세의 수도원장은 또 뤼송의 주교이고, 그 뤼송의 주교는 바로… 아르망 드 리슐리외였으니! 

 

  그 시기에 리슐리외는 실총 상태에 있었다. 한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넓은 마음으로 정중하게 대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1617년 리슐리외의 후견인이자 이탈리아의 엽기적인 인물 콘치니가 암살됐다. 이 궁정 쿠데타는 뤼네가 꾸미고 젊은 왕이 재가한 것.[각주:1]

  그러나 그 추방이 영원하리라 추정할 만한 근거가 있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한 해 지나, 아비뇽에서 짧은 유배 기간 이후,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인 뤼송의 주교가 파리로 부름을 받았다. 1622년에 이르러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 겸 추기경이 됐다

 

  아주 금방 프랑스의 절대 통치자가 된 인물을 그랑디에는 그저 자기주장이라는 쾌감 하나 때문에 괜히 기분 상하게 했다. 이 거친 언행을 나중에 후회할 이유가 생기리라. 하지만 당장에는 제가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서 어린애 같은 만족에 잠겼다. 평민이요 무명의 교구 성직자가 왕비의 총신이요 주교요 귀족의 콧대를 꺾은 거야! 선생을 비웃고도 벌 받지 않고 넘어간 어린 학생처럼 그가 우쭐댔다

  몇 해 뒤 리슐리외도 부르봉가 대공들을 무시하면서 그런 만족감을 맛보았다. 그의 늙은 숙부는 조카가 사보이 대공 앞에서 느긋하게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질겁했다. “오, 이럴 수가! 오래 살다 보니, 귀족도 아닌 변호사 라포트의 외손자가 샤를 5세의 손자에 앞서서 방으로 걸어가는 걸 다 보는구나!” 이 유치하고 당돌한 행동도 벌을 면했고, 리슐리외도 어린애 같은 우월감을 맛보았다. 

 

  루덩에서 그랑디에의 삶이 이제 궤도에 올랐다. 성직자 책무를 수행하고, 직무 중간에 종종 예쁜 과부들을 조심스레 찾아다니고, 지적인 친구들 저택에서 저녁마다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계속 늘어나는 적대자들과 충돌을 빚었다. 그것은 머리와 가슴에도, 생식선과 부신에도, 사회적 페르소나와 그의 사생활에도 똑같이 만족스럽고 아주 괜찮은 생활이었다

  오싹한 일이나 명백한 불운이 아직은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 즐거움이 거저 나오고, 아무런 제재도 안 받으며 욕망을 채우고, 아무런 후과 없이도 증오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한데 운명은 당연히 대차 청구서를 이미 작성했다. 단지, 조용히 진행했을 뿐. 그는 양심의 가책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조금씩 무감각해지고, 내면의 빛이 계속 어두워가고, 영원의 모습이 열리는 영혼 창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당대 체질의학에 따르면 그랑디에는 쾌활하고 격하기 쉬운 기질을 지녔다. 곧, 그에겐 세상만사가 순탄한 듯했다. 세상만사 오케이라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상의 일을 잘 주관하신다는 뜻이지! 주임신부는 행복했다.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병(躁病) 단계에 있었다. 

 

  1623년 봄 스케볼라 생마르트가 충분히 길고 영광스러운 삶을 마쳤다. 노인이 마르셰 성당에 화려하게 안장됐다. 반년 뒤 루덩과 샤틀레로, 시농, 푸아티에 지역 고위인사들이 죄다 참석한 추도식에서 위대한 인물을 기려 그랑디에가 연설했다. (발자크의 문체상 혁명적인 서신들 초판이 그 다음해에 나왔으니까 아직 낡지 않은) 그건 ‘열렬한 인문주의자’ 풍으로 행한 길고 장중한 웅변이었다.[각주:2] 꼼꼼하게 정성 들인 문장들이 고전작품들과 성서의 인용으로 반짝거렸다. 여봐란 듯이 넘치는 박식이 매 순간 자기만족적으로 드러났다. 미문은 인위적인 포효로 길게 이어졌다. 

  이 스피치를 청중이 아주 좋아했다. 1623년도 취향에 딱 맞은 것.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아벨 생트마르트가 주임신부 웅변에 하도 감동 받아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내놓았다. 검찰관 트렌캉도 모국어로 쓴 시로 주임신부의 달변을 한껏 추어올렸다. 

 

추도식을 영광스레 거행하기 위해 

이 즐라토우스트가 간택된 데는 근거가 없지 않아. 

고인을 적절하게 칭송하면서 그가 

기적 같은 달변을 쏟았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가엾은 트렌캉! 뮤즈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진실하지만 일방적이었다. 그는 그들을 사랑했으나, 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가 작시에는 서툴렀을지 모르나, 최소한 시를 논할 줄은 알았다. 

 

  1623년부터 검찰관 객실이 루덩의 지성적 삶의 중심이 됐다. 그건 생마르트가 떠났기 때문에 상당히 허약한 삶이었다. 트렌캉 자신이야 책을 많이 읽었지만 친구들과 일가붙이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이전에 생마르트 모임에서 배제됐던 이 사람들이 검찰관 저택은 무상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문가에 나타났다 싶으면 학식 깃들고 고상한 대화는 창문 너머로 날아갔다. 수다만 일삼는 여인들이며, 법규와 소송절차 이외에는 아는 게 없는 변호사들이며, 개와 말들이 유일한 관심사인 토호들과, 달리 뭘 하겠는가? 

 

  약제사 아담과 외과의 만누리도 그 객실 단골이었다. 전자는 코가 아주 길고, 후자는 너부데데한 얼굴에 올챙이배. 그들은 소르본 박사답게 아주 점잔 빼면서 안티몬과 사혈의 이점이며 관장 비누와 총상 치료 때 소작 기구의 유용함 등에 관해 장황하게 떠벌리곤 했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후작 각하의 매독이나 왕실 고문변호사 부인의 두 번째 유산, 치안판사 누이의 어린 딸을 고생시키는 위황병 얘기도 (물론 언제나 극비로) 풀어놓았다. 황당하면서도 거들먹대고 근엄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약제사와 외과의는 운명적으로 경멸 대상이었다. 그들은 비아냥거림을 스스로 벌고 조롱의 예봉을 자초했다. 

  비웃음의 대상과 기회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는 주임신부가 그들에게 그들이 자청한 것을 마음껏 퍼부었다. 아주 금방 그에게 적대자 둘이 더 생겼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상황이 무르익어 갔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4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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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7-2편 2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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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1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는 아들 루이 13세가 성년이 됐음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콘치니를 앞세워 국정을 주물렀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콘치니를 암살하고 그의 아내를 반역죄로 참수했으며, 모후를 1617년 3월 3일 블루아 성으로 추방함으로써 통치권을 찾았다. 이 거사를 총신 뤼네 공작이 주도했다. 또 이맘때 마리 메디치의 신임을 얻고 있던 리슐리외는 파리에서 쫓겨나게 됐다. [본문으로]
  2. 장 루이 드 발자크 (Jean-Louis de Balzac, 1597-1654) - 프랑스 서간체 문학의 대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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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새 주임신부가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가면서 보자 하니, 루덩은 구릉 위에 자리 잡은 소도시인데 우뚝 솟은 탑 두 개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성 베드로 교회의 첨탑, 또 하나는 웅장한 성채 한가운데 있는 중세 시대 아성.

  상징적 측면에서 루덩의 스카이라인은 이미 시대에 뒤졌다. 고딕식 종탑이 제 그림자로 도시 절반을 덮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루덩 주민들은 위그노이기에 이 종탑이 속한 가톨릭교회를 혐오했다.[각주:1]  푸아티에 백작가문이 전성기에 세운 성채는 아직 위풍당당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그 위세도 이미 막판에 이르렀다. 리슐리외가 곧 권좌에 올라 지방 귀족의 세습 성채뿐 아니라 지역자치 자체를 깡그리 무너뜨릴 테니까. 

  자신이 종파 전쟁의 (삼십년전쟁의) 마지막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젊은 주임신부는 당연히 몰랐다. 그 뒤로 거대한 민중혁명의 서곡이 이어진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성문 곁에 세워진 교수대에서는 시체들이 썩고 있었다. 어떤 곳에는 쌍으로 걸려 있기도 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지저분한 거리들과 별의별 희한한 냄새와 악취가 그를 맞이했다. 아궁이 연기, 거위와 돼지 배설물, 빵 굽는 냄새, 말똥 냄새, 씻지 않은 인간 군상의… 

 

성문 곁 교수대에서는 시체가 썩고 있었다.

 

  소작농이며 수공업자, 날품팔이, 하인들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1만4천 주민의 하찮고 이름 없는 다수를 차지했다. 한 계층 위로는 점방 주인들, 숙련공들, 부르주아 신분 최하위에 불안정하게 턱걸이한 하급관리들이 있고, 또 그 위로는 천민들 어깨에 걸터앉아 숱한 특전을 누리고 신성한 권리로 지배하는 부유한 상인들과 학식 있는 전문가들, 귀족들이 있었다. 

  한데 이 귀족에도 나름의 계급이 있으니, 맨 밑에는 소지주, 그 위로 부유한 지주들, 더 위로 봉건적 대지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자리 잡았다. 

 

  이런 배경에서 예외적으로 자유로운 지성과 문화의 오아시스가 드문드문 보였다. 이 오아시스들 바깥의 정신적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촌스럽고 투박했다. 부자들은 오로지 돈과 재산에만 정신 쏟고 권리와 특전에만 미친 듯 달려들었다. 송사를 벌일 여유가 있거나 전문적 법률 자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천에서 삼천 명인데, 루덩에는 법정 변호사가 스물, 사무 변호사가 열여덟, 집행리가 열여덟, 공증인이 여덟쯤 됐다. 

  이문을 쫓아다니다가 남은 시간과 에너지는 가정생활의 반복되는 기쁨과 걱정 같은 일상사에, 이웃에 대한 험담이나 종교 의식, (루덩이 신구 교회 양 진영으로 갈라진 도시인만큼) 신랄하고 지칠 줄 모르는 신학적 논쟁에 녹아들었다. 

 

  주임신부 재직 기간 중 교구민들의 진정한 경건함을 증명할 만한 사건은 전혀 없었다. 최소한 그런 자료는 보전되지 않았다. 단지 예외적인 사람들만이 영적 생활에 몰입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영이요, 그렇기에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점을 직접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긴 해도 루덩에는 꽤 많은 변변치 못한 자들과 더불어 선량하고 반듯한 이들, 경건한 이들, 심지어 독실한 이들까지 다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성인(聖人)은 없었다. 즉, 그 모습 하나가 존재의 영원성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증거요 모든 실체의 거룩한 근간과 온전하게 합일해 있음을 보여주는 이들은…

 

  그런 성스러운 인물이 도시에 나타나려면 육십 년이 더 지나야 했다. 루이즈 트롱셰가 심신의 숱한 체험과 시련을 거친 뒤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루덩 병원에 왔을 때, 그녀는 즉각 강렬하고 신실한 영적 생활의 중심이 됐다. 나이와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묻고 조언과 도움을 청하러 그녀한테 몰려들었다. 루이즈가 파리에 있는 예전 고해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난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아주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지요. 내가 하는 일로 인해 그들이 나를 한층 더 사랑하게 될까 싶어 겁이 납니다.」 

  그녀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시의 신앙심에 붙들린 몸이 됐다. 그녀가 기도하면 병자들이 치유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다들 성녀 덕분에 회복됐다고 확신했는데, 그녀는 외려 부끄러워하며 고행에 충실했다. ‘내가 정말 이적을 하나라도 행했다면, 난 자신을 저주받았다고 여겼을 겁니다.’ 

 

  몇 해 지나 상부에서 루덩을 떠나라는 지시가 내렸다. 광명이 뚫고 들어올 창문이 주민들에겐 더 이상 없었다. 얼마 지나 종교적 열기가 식고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이 시들었다. 루덩은 평소 상태로 돌아갔다. 두 세대 이전 우르뱅 그랑디에가 말을 타고 들어오던 때의 상태로. 

 

  새 주임신부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애초부터 날카롭게 양분됐다. 신앙심이 더 깊은 여성들 대다수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전 주임신부는 늙어서 비슬거리며 볼품없었다. 한데 후임자는 한창 젊은 나이에 키가 훤칠하고 몸매도 잘 빠진데다가 분위기마저 당당하며 심지어 (한 증언에 따르면) 위엄이 서리기까지 했다. 

 

우르뱅 그랑디에 신부

 

  검은 눈이 크고 베레 모자 아래로 검은 곱슬머리가 풍성하게 넘실거렸다. 이마가 넓고, 코는 독수리 같고, 입술은 붉고 통통하고 잘 움직거렸다. 밴 다이크[각주:2] 수염이 턱을 장식하고 윗입술 위에 두툼한 콧수염을 달고 있는데, 그건 포마드를 발라 꼼꼼하게 다듬었기에 돌돌 감아 올린 양 끝이 한 쌍의 요염한 의문부호처럼 코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았다.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 눈에는 그의 초상화가 좀 더 통통하고 불퉁스럽지 않으며, 단지 아주 조금 덜 지적인 메피스토펠레스가 화려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매혹적인 외모에다 좋은 매너와 타고난 달변이라는 사회적 덕목을 갖추었다. 듣기 좋은 말을 우아하게 선사할 줄 알았다. 게다가 상대 여인이 볼품없지 않다면, 말하면서 던지는 눈길이 말보다 더 상대를 뜨겁게 만들었다.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여성 교구민들한테 보이는 관심이 유별난데, 그건 단순히 목가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랑디에가 살던 시대는 소위 체면치레를 중시하던 시대의 우중충한 여명기였다. 중세 모든 기간과 근대 초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규정과 성직자 개개인의 실생활 사이에는 괴리가 엄청나서, 그 양 끝이 연결되지 않고 연결될 수도 없어 보였다. 

  가장 높은 대수도원장부터 가장 낮은 탁발수사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 대다수가 방탕에 기울었음을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 중 얘기하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 

  성직자 계급의 부패는 종교개혁을 야기했고, 그건 또 반종교개혁을 초래했다. 트렌토 공의회[각주:3] 이후 스캔들을 일으키는 교황은 점점 더 흔치 않게 됐고, 마침내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그런 품종이 완전히 사라졌다. 귀족 가문의 작은아들이라는 사실이 승진의 유일한 장점이던 주교들도 이제는 행실을 바르게 하려 들었다. 하급 사제단의 도덕성을 이제 교회 권력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시했고, 그 권력은 예수회나 오라토리오회[각주:4] 같이 종교적 순수성의 맹렬한 감시자들이 내부에서 주시했다. 

 

  신교도들과 중견 영주들과 지역 자치권을 억압하는 대가로 왕들이 가톨릭교회를 중앙권력 강화 도구로 썼던 프랑스에서는 성직자들의 존경받는 태도가 왕실의 큰 관심사였다. 민중은 추잡한 행위로 오점 남긴 성직자들의 교회를 우러르지 않을 터이다. 

 

  한데 “짐이 곧 국가니라” 하는 식의 법이 지배하던 나라에서는 교회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즉, 교회에 대한 불경은 곧 국왕에 대한 불경이다. 피에르 베일이 자신의 기념비적인 <사전>에 덧붙인 무수한 주석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쓴다.[각주:5]  

 

   「언젠가 어떤 신사가 베네치아 사제단의 끝도 없는 방탕에 대해 늘어놓기에, 종교와 국가의 명예를 모독하는 그런 난잡한 행위를 공화국 원로원이 어찌 보고만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길, 권력은 공익 차원에서 이 방종을 활용한다고 했다. 또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덧달았다. 원로원은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민중이 최대한 경멸하기를 내심 바라고 좋아한다오. 그런 상태라야 그들이 민중을 선동해 권력에 저항하기 어려워지니까. 그가 하는 말로는 또 군주가 예수회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품위를 지키기 때문에, 그런 고로 하층 계급의 존경을 더 받고, 그래서 반정부적인 선동을 일으킬 힘을 더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17세기 내내 프랑스에서 성직자들의 난잡한 행위에 대한 국가 정책은 베네치아 원로원이 추구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교회의 과도한 영향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돼지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좋아하고 존경받는 예수회 수사들을 의심쩍게 보았다. 

  정치적으로 강력하며 단호하게 갈리아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군주제는 로마교황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교회를 아주 유용한 신민 지배 메커니즘으로 봤다.[각주:6] 그래서 왕들은 예수회 수사들을 비호하며 세속 사제단의 무절제를 근절하느라 부심했다. 적어도, 그런 현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저자 주 ☞ 기술하는 시기 처음에는...  

「트렌토 법규가 교회에 전혀 작용하지 못했다. 1560년 왕의 자문회의가 열렸는데… 빈의 주교인 샤를 마리약이 밝히길, 교회 규율이 다 사라지고 사제단이 이렇게 추잡하게 행동하며 스캔들이 이렇게 자주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이 독일인들을 흉내 내 성직자들로 회합 만드는 풍습을 도입했고 개중에 내연녀를 두지 않은 이들에게는 소정의 벌금을 물린다고…」

  「그런 면으로 보자면 트렌토의 신부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 재판 기록을 연구한 결과,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사회적 도덕이 점차 커짐에 따라 성직자들 쪽에서도 몰염치한 냉소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밖으로 새지 않고 스캔들을 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다. 성직자가 내연녀와 함께 산다면 반드시 누이나 질녀로 둔갑시켰다. 1668년 법규에 따르면 미니모회 수도사들은 ‘정욕의 유혹에 빠지거나 절취 행위를 하기 전에 수도사 옷을 벗었다면’ 교회에서 파문되지는 않는다. 

  이 시기 내내 사제단에게 점잖은 처신을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과민할 정도로 강했다. 예를 들어, 1624년 성직자 르네 소피는 어떤 치안판사 아내와 간통 현장에서 적발됐다. 그것도 바로 교회 안에서. 경찰 책임자 르망사가 죄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선고가 과하다고 르네가 파리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고등법원은 그 선고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각주:7] 

 

  새 주임신부가 교회 조직에서 입신하기 시작한 때는 성직자의 스캔들이 여전히 잦기는 했어도 이미 권력이 극도로 용인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랑디에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더 젊은 장 자크 부샤르가 17세기 자신의 소년기와 청년기 기록을 후손에게 남겼다.[각주:8] 이 문건은 객관적인 임상 관찰을 담고 양심의 가책과 도덕적 판단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기에 19세기 학자들이 소수 전문가를 위해서만 발행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작자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행을 저질렀다고 확실히 강조하면서! 

  하지만 하벨록 엘리스, 크라프트에빙, 허쉬펠트, 킨제이의 책들을 읽으며 자란 세대에게 부샤르의 기록은 더 이상 분개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각주:9] 그럼에도 충격을 주지는 않지만 여전히 경악할 만하다. 루이 13세의 신민이 믿기 어려운 섹스 행태를 갖가지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을 읽으면 참으로 놀랍다. 마치 오늘날 여대생이 인류학 리포트를 쓰거나 정신과 의사가 질환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부샤르보다 열 살 더 많다. 하지만 이 위대한 철학자가 아파서 울부짖는 ‘오토마톤’들을 가지고, 천박한 명칭으로는 고양이며 개라 불리는 것들을 상대로, 해부 실험을 실행하기 훨씬 이전에 부샤르는 제 모친의 하녀를 데리고 이미 심리적, 화학적, 생리적 실험을 다 해냈다. 

  그가 처음 눈길 돌렸을 때 그 처녀는 신을 공경하며 도덕적으로 결백한 사람이었다. 파블로프만큼이나 인내와 날카로운 관찰력을 발휘하면서 부샤르는 이 처녀가 자기를 완전히 믿게끔 꼬드겨 결국 자연철학에 헌신하도록 재조립했다. 그 결과 그녀는 실험 대상이 되기에 기꺼이 동의하고 연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부샤르의 침대 곁탁자 위에는 해부와 의술에 관한 대형서적들이 대여섯 권 놓여 있었다. 밀회 중간에, 혹은 고도로 실험적인 애무를 행하면서, 플로스와 바텔스의 이 기이한 선구자는 <De Generatione 생성>과 페르넬, 페란두스를 읽고 이론과 실제를 아주 꼼꼼하게 비교했다.[각주:10]

   대다수 동시대인들과 달리 그는 앞선 시대 권위자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렘니우스와 로데리쿠스 카스트로는[각주:11] 몸엣것의 이상하고 놀라운 특성에 대해 분별 있는 생각을 죄다 기술했지만, 부샤르는 이 확언들이 정말 그런지 직접 확인하기 원했다. 연구열에 감염된 하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련의 실험을 수행하면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의사들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온 것을 다 뒤집었다. 

 

  알고 보니… 몸엣것은 풀을 죽이지 않고, 거울을 흐리게 하지 않고, 포도나무 싹을 시들게 하지 않고, 아스팔트를 녹이지 않고 또 칼날에 지워지지 않는 녹을 남기지도 않더라! 

 

  부샤르가 여자 조수이자 실험동물과 혼인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파리를 떠났을 때 생물학은 아주 전도유망한 연구자 하나를 잃었다. 그는 행운의 여신을 찾아서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원하는 건 아주 소박했다. 이교도들의 땅에서, 아니면 브르타뉴에서라도, 연간 육칠천 리브르 수입이 있는 작은 성직자 직급을 하나 얻는 것. (연간 6500리브르는 데카르트가 유산을 현명하게 굴려서 얻는 수입. 그건 물론 호화롭지는 못하지만 철학자가 신사처럼 살기에는 넉넉했다.) 

  가련한 부샤르는 결국 성직록을 받지 못했다. 당대에 <Panglossia>라는 글이나 콥트어와 페루어, 일본어를 포함해 마흔여섯 개 언어로 된 시선집의 우스꽝스러운 작자로 알려졌을 뿐인 그는 마흔이 못 돼 죽었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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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0편 4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1편 3

루덩의 악마들 6편 2

루덩의 악마들 5편 3

루덩의 악마들 4편 4

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2편 1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1. 위그노 (Huguenot) - 칼뱅 사상에 크게 영향 받은, 16-17세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바시의 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사건 등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본문으로]
  2. Van Dyck, Anthony (1599–1641) - 플랑드르의 화가. 앤트워프 출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뒤 잉글랜드에서 대표적인 궁정화가가 됐다. 초상화,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본문으로]
  3.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으로 실추된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되찾고 새로운 개혁을 이루기 위해 열린 회의.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 열렸다. [본문으로]
  4. 1575년 로마에서 필립 네리가 설립한 성직자 모임. 필립 네리(1515-1595)는 반종교개혁 운동의 한 기둥. 음악을 신에게 봉사하는 수단 중 하나로 중히 여겼으며, 많은 음악가들이 그가 설립한 오라토리오회에 참여했다. [본문으로]
  5. Bayle (1647-1706) - 네덜란드 출신 프랑스 계몽주의 선구자. 18세기 사상의 실제적 원전. 저술가, 신학자. <역사와 비판 사전> [본문으로]</역사와>
  6. 갈리아주의 (Gallicanism) -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황지상주의에 반대하여, 교황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역사적 움직임. 하지만 프랑스 예수회는 교황지상주의를 적극 옹호. [본문으로]
  7. 트렌토 공의회 이후 프랑스 교계 분위기를 다룬 앙리 리의 <대처 금지 역사> 29장 - 저자 주 [본문으로]</대처>
  8. Bouchard (1606-1641) - 프랑스 작가. 루이 13세 비서관의 아들. 에로 문학과 고백록. [본문으로]
  9. 하벨록 (Havelock Ellis, 1859-1939) - 영국의 의사, 심리학자, 사회평론가, 성과학자. 크라프트에빙 (Krafft-Ebing, 1840-1902) - 정신신경질환 교수. 저서 <성적인 정신병 psychopathia sexualis> (1886) 허시펠트 (Hirschfeld, 1868-1935) - 유대계 독일 의사, 성과학자. [본문으로]</성적인>
  10. 플로스 (Hermann Ploss, 1819-1885) - 독일 인류학자, 민속학자, 부인병학자. 바텔스 (Johann Bartels, 1769-1836) - 독일의, 나중에 러시아의 수학자, 교육가. 페르넬 (Fernel, 1497–1558) - 프랑스 내과의. 신체 기능 연구를 묘사하기 위해 ‘생리학’, ‘병리학’이라는 용어를 도입. 페르넬리우스라는 달 분화구 명칭은 그의 라틴어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 [본문으로]
  11. 렘니우스 (Levinus Lemnius, 1505-1568) - 덴마크 의사, 저술가. 수태와 출산의 비밀 연구. 로데리쿠스 카스트로 (Rodericus a Castro) - 부인 질환 연구서 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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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1

 

이름난 풍자 작가요 나중에 주교가 된 조셉 홀[각주:1]이 1605년 처음으로 플랑드르[각주:2] 지역을 방문했다. 

「여로에서 우리는 파괴된 교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도처에 남은 거친 잔해들이 신앙과 더불어 동족상쟁 역시 처절했음을 여행자에게 말해준다. 오오,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여! 그러나 교회들은 무너졌다 해도 (경탄스럽게) 도처에서 예수회 칼리지들이 나타난다. 내가 들른 도시마다 이 학교들이 이미 문을 열었거나 세워지는 중이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과연 정책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이 사람들은 저주를 가장 많이 받는 곳에서 (여우처럼) 일을 가장 잘 꾸려 간다. 저희 진영에서 극도로 괴롭힘을 당하고 모든 이들한테 미움을 받고 우리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이 독한 잡초들은 쑥쑥 자란다.」   

 

칼리지들은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바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셉 홀과 그 세대가 잘 알고 있었듯이 예수회원들은 이른바 ‘정책’을 가장 중시했다. 예수회가 학교를 계속 세운 까닭은 적대자며 자유사상가며 프로테스탄트들에 맞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젊은이들을 가르쳐 교회 이익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계층을 만들고자 했다.[각주:3]

 

이런 현상을 체루티가 아주 잘 표현했다. 「우리가 다리를 곧게 펴 주려고 갓난애 아랫도리를 천으로 동여매듯이, 사람을 평생 건강하고 유복한 상태로 만들려면 유년기부터 의지를 동여매야 한다.」 (이 언급에 줄 미슐레[각주:4]가 극도로 분개했다.) 

교육자들 의도야 정말 단호했지만 그 뜻을 알리고 지도하는 방법이 미흡했다. 학생들 의지를 천으로 동여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최우수 생도들 중 몇몇은 칼리지를 졸업하자 열렬한 자유사상가가 됐고, 장 라바디[각주:5]처럼 프로테스탄트가 된 이들도 있었다. ‘정책’이 관련된 이상 교육 체계는 설립자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중은 정략적 측면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저희 자식들이 젊은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다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중요할 뿐이었다. 이런 요구에 예수회원들이 다른 대다수 교육 공급자들보다 더 잘 부응했다.

 

「예수회 지붕 아래서 보낸 일곱 해 동안 나는 무엇을 눈여겨보았던가? 온건하고 근면하고 절도 있는 생활. 예수회 수사들은 하루 모든 시간을 우리들 교육에, 혹은 그들 서원을 엄격히 실행하는 데 바쳤다.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나처럼 그들 밑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이 증언하기를 바란다.」  

볼테르가 그렇게 적었다. 이 말은 예수회 교수법이 아주 뛰어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와 동시에, 볼테르의 생애 자체는 학습을 ‘정책’이라는 목표에 맞추려고 한 교육자들의 시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한층 더 확실하게 입증한다.[각주:6]   

 

볼테르가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때, 예수회 학교들은 이미 잘 알려지고 익숙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 교육 현장에서는 칼리지의 많은 장점이 정말 혁명적이었다. 대다수 교육자들이 회초리 휘두르는 능력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이던 그 시기에, 예수회원들의 교육 방식은 제법 인도적이었으며 교수진도 신중하게 선별돼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는 고급 라틴어를 가르치고 광학과 지리와 수학, 극작 분야에서 최신의 성취를 들려주고 (그들의 학기 말 연극 공연은 유명했다), 좋은 예절과 교회에 대한 존중과 (적어도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는) 국왕 권위에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회 칼리지들이 전형적인 상류 부유층 취향에 맞았다. 즉, 애지중지하는 아이가 구식 교육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마음먹은 어머니들, 그 자신이 학식을 갖추고 있으며 건전한 교리와 키케로 식 달변에 관심이 큰 숙부들, 또 그 자신이 애국심 있는 관리로서 군주제 원칙을 인정하거나 미리 앞을 내다보는 부르주아로서 예수회가 폭넓은 연줄로 제자들한테 좋은 직무나 궁정의 한 자리, 교회 명예직 따위를 찾아주겠지 기대한 아버지들… 바로 그들 입맛에 딱 맞은 것이다. 

 

예를 들어, 루앙 시의 코르네유 부부 같은 이들을 보자. 가장은 왕실 고문변호인이고 아내는 변호사 딸인 마르트 르 프장. 어린 아들 피에르가 특출한 재주를 보이는데, 어떻게 칼리지에 보내지 않을 수 있겠나?[각주:7] 

혹은 렌 시의회 고문인 조아킴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1604년 총명한 막내아들 르네를 여덟 살밖에 안 됐지만 공부시키느라 라 플레시로 데려간다.[각주:8] 얼마 전 국왕의 승인을 받아 문을 연 예수회 칼리지로. 

 

또 거의 비슷한 시기, 생트 시에 학식 있는 참사회 위원인 그랑디에가 있다. 그에게 조카가 있으니, 비록 데카르트나 코르네유 같이 부유한 귀족은 못 되더라도 당당한 사회 구성원인 또 다른 법률가의 아들이다. 우르뱅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이제 열네 살이며 지극히 영리하다.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 생트 인근에는 보르도의 예수회 칼리지보다 더 좋은 학교가 없었다. 

이 유명한 배움터에는 소년들을 위한 중등 과정과 우아한 예술을 가르치는 칼리지, 신학교, 사제 임명 뒤에도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형제들을 위한 심화 과정이 다 있었다. 조숙하고 영리한 우르뱅 그랑디에가 여기서 십년을 넘게 보냈다. 중등학생에서 신학 대학생으로, 그리고 나이 스물다섯 된 1615년 이후 예수회 수련수사로… 그렇긴 해도 수도사가 될 마음은 없었다. 예수회 엄한 규율을 따를 소명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니야, 수도회 안이 아니라 수도원 담장 밖에서 교구 신부로 커리어를 쌓고 싶어. 재주가 뛰어난데다가 막강한 교회 조직의 비호를 받는 사람은 이 직업에서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잖아. 

예를 들어, 어떤 고관대작의 종교의식 담당이나 나중에 프랑스 육군원수나 추기경이 될 사람의 영적 카운슬러가 되는 거야. 또 주교 회의나 왕실 공주들 앞에서, 심지어 왕비 면전에서 뛰어난 언변을 과시할 기회가 분명 있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랴, 외교 사절이나 고위 행정직, 수입 좋은 명예직, 구미 당기는 불로소득 따위도 가능해. 또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확률이 떨어지긴 해도) 운이 좋다면 주교 예모로 머리를 장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인생 노년이 화려하게 보장되는 거야. 

 

그의 이력 초기에는 그런 장밋빛 꿈이 다 이뤄질 수 있는 듯싶었다. 신학과 철학을 이태 동안 깊이 연구한 뒤 스물일곱 나이 젊은 그랑디에 신부가 오랜 기간 근면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온 보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예수회가 루덩 시에 있는 생피에르 뒤 마르셰 교구라는 중요한 생활 수단을 선사한 것. 같은 후견인들 덕분에 성 십자가 공주 성직자단 교회의 참사회 위원도 됐다. 사다리에 발을 걸쳤으니, 이제 할 일은 올라가는 것만 남았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1편 1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1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1

 

  1. 조셉 홀 (Joseph Hall1, 574-1656) - 잉글랜드의 주교, 모럴리스트 문인, 풍자가. 호주가 발견되기 이전 남부 대륙의 환상적인 여행과 거기 풍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다르면서도 같은 세상 mundus alter et idem>(1605)의 저자. 이 책은 여러 모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전신으로 평가된다. [본문으로]</걸리버></다르면서도>
  2. 플랑드르 - 현재의 벨기에 서부,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 [본문으로]
  3. 예수회 - 종교개혁 시기인 1534년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세운 로마가톨릭 수도회. 과격한 전투적 가톨릭 수호 선교기관. 1. 교육에 중점 2. 종교개혁에 대항 3. 세계 선교 등이 주요 목표. [본문으로]
  4. Jules Michelet (1797-1874) - 프랑스의 역사가, 사회평론가. 교회권력 반대자. 역사와 사회, 자연에 관해 아주 주관적인 책을 명료하고 격동적인 언어로 여러 편 썼다. ‘르네상스’ 용어의 창시자. [본문으로]
  5. Jean Labadie (1610-1674) - 프랑스 신학자,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고 경건주의 단체인 라바디파를 만들었다. (경건주의/Pietism - 정통 프로테스탄트에 맞서는 신비주의적 가르침, 보수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특색) [본문으로]
  6. Voltaire (1694-1778) -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자. 18세기 유럽의 전제 정치와 종교적 맹신에 저항하고 진보적 이상을 고취. 비판 정신과 재치, 풍자 같은 프랑스 정서 특유의 자질을 구현한 작품 활동으로 유럽 문명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7. 피에르 코르네유(1606-1684) - 몰리에르, 라신과 함께 17세기 프랑스의 3대 극작가. [본문으로]
  8. 르네 데카르트(1596-1650) -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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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4)

 

 

7

 

 

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있지요. 한 수녀원 수녀들이 모두 악마에 들씌웠는데, 이건 협잡과 히스테리, 음모로 시작되어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오. 이 사건에는 또 당대 가장 경건한 성직자에 속하는 수렝 수사가 등장하여 원장수녀 잔느한테서 퇴마 작업을 합니다. 사실, 마귀 들렸다는 점 때문에 명성을 누린 이 원장수녀가 모든 재앙의 주범입니다. 

루덩 수녀원의 잔느 수녀원장과 자매들


이 여인에게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려고 고군분투하던 중에 수렝 수사가 외려 심리적 질환에 감염됐어요. 즉,
악마들에 사로잡혀 거의 광인 같은 세월을 이십 년 넘게 보냈는데, 그런 광기 속에서도 고결한 성품과 영적 투쟁 덕분에 결국 제 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면서 총체적 인식(지각)과 더불어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해 당대 가장 의미 있는 저술을 몇 편 내놓았어요. 

 

잔느의 경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이모저모로 과시하고 관상 경지에 이른 성녀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찬탄과 사랑과 경배까지 받으며 살다가 종내에는 명성과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귀신들림과 엑소시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 마법사로 낙인찍힌 신부를 화형으로 몰아간 사법 살인,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미치광이 취급받는 수도사의 면면 등이 죄다 아주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원장수녀와 수렝 수사의 성격이 흥미진진하답니다.」 

 

이건 헉슬리가 1942년 7월 런던에 있는 발행인에게 보낸 편지.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마귀 들린 여인들,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권력과 엑소시스트들, 그들 편에 선 재판관들, 마법사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한 성직자. 

 

작가가 역사의 특별한 사건을 대하면서 (오늘날에도 응당 통용되는) 다양한 질문을 상정하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한 각종 문헌의 방대함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 결과, 교리며 신앙, 신비주의, 영성, 초자연적 현상, 심리학, 정신의학,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시대, 휴머니티 등이 담긴 역사 탐방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된다. 

 

엑소시즘을 시행하는 수사들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성 바깥에 있다. 하지만 헉슬리 같은 문필가가 구상한 세계를 그저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 어떤 사건이나 관점을 읽는 이가 수긍하게끔 보이고자 하는 경우… 예술적 실제의 과학적 이면은 미학적 구상의 토대가 된다.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학적 구성은 1930년대 이후 명료한 예술적 투영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영국에 거주하던 때 발표한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정연한데 비해 미국 체류 시기 작품들이 문학적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후기에 나온 픽션이며 에세이들이 더 독특한 맛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과잉 정보’와 ‘교훈적 요소’ 같은 것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섭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의 혈관에 과학과 문학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존재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겪는 공포에서, 미래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평생 숙고했으며, 그 숙고의 결과를 카프카나 조이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을 무엇보다도 지성인으로 내보였다.

그런 측면 때문인가, 자신은 줄거리를 쉽게 궁리하고 살아 있는 형상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처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했다. 그것도,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심리학, 초심리학, 의학, 정신병학, 정신약리학 등의 전문적 심포지엄과 학술 대회들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전문가들 못지않게 연구하고 중시한 심리학, 의학, 생물학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귀신들림과 ‘마녀 사냥’이라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상존한다 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분석한 <루덩의 악마들> 같은 독창적 논픽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과 과학의 공존을 추구했다. 

 

<루덩의 악마들>이 아이디어 면에서 1961년 미셸 푸코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의 개념을 앞섰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이들에겐 헉슬리의 이 텍스트가 술술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갈구한다면, 웬만큼 고생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말랑말랑하여 접하기는 쉽지만 남는 게 별로 없는 글이 있는 반면에, 뭔가 묵직한 게 있어 보이는데 파고들기 쉽지 않은 글도 있다. 헉슬리가 인생 후반에 픽션보다는 에세이와 논픽션에 더 치중한 까닭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그에게 기존의 문학 장르 개념과 원칙은 외려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 하나, 독자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깊숙이 탐구하게끔 단초를 제공하자는 것

 

마지막 장편 <섬>에서 픽션이 철학적 에세이며 사회적 비평과 상당히 혼재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루덩의 악마들>에서 그가 동원한 문장들은 거의 시적 수준이다. 압축적이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 간명함이라는 미덕은 그 본연의 목적 달성 이외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선사하지 않는가. (번역문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것이 또 언어 차이에서 비롯되는 번역 한계이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 그 생각의 논거로 각종 고전의 든든한 인용, 거기서 나오는 설득력, 우아한 문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적 스타일, 무엇보다도, 달변이나 수사적 효과와는 상관없이 진솔하고 정직한 토로…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적 일화에 대한 논픽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일방의 입장과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아니, 상호 대립적인 해석을 전부 끄집어내고 소개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역사가요 스토리텔러, 철학자, 사회비평가, 조사 연구자로서 번쩍이는 재능이 여기 다 녹아 있다. 그것도, 우아하고 알기 쉽게.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이며 사물의 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지적, 물리적 유기체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면밀하게 탐구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헉슬리의 박식과 기지와 혜안이 (우리 한국에서도) 공공 자산이 될지 여부는 독자들한테 달린 게 아닌가. 진정한 재능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법. 

 

8

 

삼백 년이 훨씬 지나 케케묵은 사건에 작가는 왜 주목했던가? 

사실, 헉슬리 이전에도 ‘수녀들의 집단 광란’과 이를 빙자한 마녀 재판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눈길 돌리고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The History of the Devils of Loudun&#44; Volumes 1-3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작가들이며 줄 미슐레를 비롯한 역사가들, 샤르코 같은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연구자들이 말이다. (‘이야기 역사’라는 틀에서 볼 때, 뒤마가 전통적 이야기체로 썼다면 헉슬리는 이 책에서 현대적 이야기체를 동원했다 하겠다.) 

게다가 1980년 <루덩의 마귀 들림>이라는 책을 내놓은 프랑스 역사가요 문화학자 미셸 세르토처럼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왜?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쓰고 내던 때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잔학무도 이후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세계주의와 투쟁’이라 불린 부끄러운 캠페인이 펼쳐졌다. 즉, 강력한 징벌 기계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권력은 대중의 의식을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로 감염시키고자 기를 썼다. 

또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매카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해 정점에 이르면서 모든 것이 알 만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전됐다. 즉, 불온사상 소유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특위에 소환되고 체포되고 숙청되고…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작가로 하여금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를, 또 그 광기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유도한 엑소시즘과 잔인한 고문과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만행을… 한데, 알고 보니, 그 본질에 악마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성적 억압과 종교적 과대망상을 이용해 다중을 조종한 정치적 술책과 박해였던 것일 뿐. 

 

대화와 관용과 공존 대신 음모와 조작과 선동과 탄압이 난무하는 사회는

집단 순응적 사고에 물들고 집단 광기에 빠지기 쉽다. 

루덩에서 벌어진 맹신과 증오와 폭압의 장면들 이후 삼백여 년이 지났건만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헉슬리는 절감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과 자기기만에 굴하기를 거부한 그가 볼 때… 20세기의 독재자와 독재 권력과 선동가들은 교회의 수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외상을 입는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세와 근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마법사와 그 고객을 20세기 ‘공공의 적’처럼 대했다. 즉,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스탈린 시대에 자본주의자들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코뮤니스트와 그 동조자들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외국 열강의 앞잡이 취급을 당했으니, 아무리 좋게 봐도 반애국주의자요 최악의 경우엔 매국노, 이단자, 인민의 적이었다. 

지난 시대 이 극히 추상적인 퀴슬링 부류에게 부과된 형벌이 죽음이었듯이, 현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세속적 악마 숭배자들을 기다리는 형벌도 죽음인데… 이들을 어떤 나라들에서는 코뮤니스트(빨갱이)라 부르고 또 어떤 나라들에서는 반동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뒤돌아보면, 종교의 모든 폐해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아도 무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 확신에 찬 유물론자들이 값싸게 날림으로 내놓은 이상을 절대자라도 되는 양 숭배할 태세가 돼 있으며, 열렬한 휴머니스트들이 사탄 신봉자들을 몰살하는 종교재판관의 열정으로 자기네 적들을 박해할 수 있음도 우리는 본다. 

그런 행동 패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인간의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오래 됐다. 우리 시대에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은 선조들처럼 행동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네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이론들을 도그마로 바꾸고, 자기네 내규를 제 1원리로 격상시키고, 자기네 정치 보스들을 신으로 추앙하고, 자기네한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악의 화신이라 몰아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맹신적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은 가장 추악한 작업에 탐닉할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도 맑은 양심을 간직하며 지고지순하게 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다가 작금의 믿음과 신조가 낡아져 다시 터무니없어 보이게 되면 새로운 추세가 만들어질 터이고, 그리하여 태고의 광기가 적법성이네 이상주의네 진짜 종교네 하는 상습적인 가면을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루덩의 집단 광란 사건 이후 사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헉슬리 시대 이후 육십여 년 지난 지금, 사람들과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앞에 언급한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들이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이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폭압과 광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이나 매카시즘 따위 철 지나고 위험한 유행에서,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것도, 모든 근거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누가 귀신들린 수녀들이며, 누가 그랑디에 신부이며, 누가 리슐리외 같은 절대 권력이고 누가 그 권력의 앞잡이이고 엑소시스트들이며, 누가 몇 푼에 팔려 양심을 속이며 위증하는 자들이고, 누가 고용된 판사들이며 누가 사법살인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며, 누가 엑소시즘과 화형에 희희낙락하거나 내심 분개하는 군중인지… 

우리 사회 적지 않은 현상과 사건에도 거의 에누리 없이 대입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메아리요 교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심하거나 게을러서 잘 모르거나 둔감할 뿐이지.)

「우리한테, 근본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악이나 경제적 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증주의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악’이라 부르기 좋아하니까) 그 근본악이 오늘날에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라 어떤 증오에 빠진 계급이나 민족한테서 추종자들을 찾는다. 사회적 증오의 인과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렇다 하여 증오와 불공정이 더 줄어들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헉슬리의 이 이야기를 그저 오래 전 사건들의 파노라마로 치부하고 만다면, 그건 더 큰 메시지를 놓치는 꼴이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헉슬리의 이 스토리를 영국 극작가 존 화이트닝이 1961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영국 영화감독 켄 러셀이 1971년 <악마들>이라는 충격적인 필름으로 선보인 것도,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1972년 <루덩의 악마들>이라는 오페라로 구성했으며 유럽 극장들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다 그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오페라는 동영상으로 다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라든가 바탕에서 헉슬리가 호소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르마즈드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다른 동료들을 악의 원리인 아리만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시대의 악마주의에, 극악무도한 행위에 승리를 안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악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악이 세상에 더 횡행하게끔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문에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죄보다는 원덕(신테레시스)에 더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 

 

(끝)

(루덩의 악마들 1편 1)

 

관련 포스트: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2편 4

루덩의 악마들 7-1편 1

루덩의 악마들 6편 4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4

루덩의 악마들 5편 1

루덩의 악마들 4편 5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7

루덩의 악마들 2편 1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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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리버 리드&#44; 영화 악마들&#44; 켄 러셀 감독&#44;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3)

 

5

 

 

그의 삶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30년대 중반 ‘평화서약 연합’의 반전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이후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 인권 수호에도 나섰다.

 

1937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역사가요 과학 저술가, 철학자인 제럴드 허드(Heard)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의 온후한 기후가 시력 향상에 도움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와서, 지역의 지성인들이며 힌두이즘과 불교에 심취한 지식인들과 친분을 맺었다. 

 

주로 로스앤젤레스 남부에서 죽을 때까지 살게 됐는데 처음 한동안은 뉴멕시코 주 타우스라는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D. H. 로렌스가 20년대에 거주한 이후 작가와 화가들의 작업지가 된 여기서 헉슬리는 에세이 <수단과 목적>을 썼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해방, 평화, 정의, 형제애’를 꿈꾸기는 해도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뜻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검증한다. 

 

1938년 크리슈나무르티를 알게 되면서 그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허드를 통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는 베단타학파 회원이 되고 이태 뒤 젊은 영국인 소설가 이셔우드를 이 서클에 소개한다. 세 사람은 명상과 채식주의, 아힘사(불살생) 원칙을 비롯해 철학과 종교에서 브라마난다의 폭넓은 지식에 심취하게 됐다. 

유럽 문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종교를 발견한 것… 그 얼마 뒤에 쓴 에세이 <만년 철학>에서 헉슬리는 널리 알려진 몇몇 신비주의 가르침을 논한다. 

 

에세이스트요 사회비평가로서 과학과 기술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주로 다루며 내보인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은 독자들한테서 저항감을 야기하기도 했다. 철학적 신비주의와 동양의 가르침, 초심리학 같은 영적 주제에 더욱 몰두하게 됐다. 

일부 아카데미 서클에서는 그를 현대 사상의 리더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으로 여겼다. 말년에 남긴 언급 하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인류의 존재 문제를 숙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서 나는 갖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딱 하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우리 각자가 조금만 더 착해지려 애쓰자. 그러면, 다 된다.

 

 로스앤젤레스 시기 이후 내놓은 다섯 편 장편소설 중 첫 번째인 <숱한 여름을 보낸 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할리우드 백만장자 이야기로, 1939년 픽션 부문에서 영국의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받았다. 특유의 위트와 지적 달변이 가득한 이 풍자소설에서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을 거론하는데, 개중 몇몇은 나중에 그의 마지막 장편인 <>에서 주된 주제가 된다.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몰려든 많은 유럽 작가들이 그랬듯이, 헉슬리도 생계를 위해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애니타 루스의 소개로 MGM과 접촉하여 이셔우드와 공동 집필 등으로 여러 편을 썼지만 제대로 빛을 본 것은 <오만과 편견> 정도. 할리우드는 헉슬리의 성향이며 추구하는 바와 잘 안 맞았다.

 

50년대 초 내놓은 논픽션 <루덩의 악마들>은 그의 작품 활동 지평에서 상당히 독특하며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역사적 일화에 대한 눈부시게 상세한 심리 탐구. 

    

인간 지각의 확장과 영성에 (그의 용어로는, 자기초월) 관한 관심으로 마지막 십년을 거의 다 보냈다. 

메스칼린이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1953년 전문의의 관리 하에 직접 실험에 나섰다. 주변 세계 지각에 관한 실험 결과물이 바로 유명한 철학적 에세이 <지각의 문>과 속편 <천국과 지옥>. 이는 보편적 행복의 공식을 찾아내려는 몸부림. 

 

20세기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의 저자가 이젠 다양한 사이키델릭을 실험하면서 지각의 확장 수단을 찾으려 애썼다. 예전에는 환영을 보는 이들과 신비주의자들과 예언자들한테만 허용된 영역으로, 보통 사람들도 지각을 확장함으로써 들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지각의 문>은 60년대 수천 명 급진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됐고, 그 저자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운동의 ‘영적 아버지’가 됐으며, 한 록그룹으로 하여금 ‘The Doors’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되게 했다. 

 

이런 흐름에서 헉슬리의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주요 작가인 윌리엄 버로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톰 클레이튼 울프, 페루 태생으로 <돈 후안의 가르침>의 작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같은 이들.

 

1955년 아내 마리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직전에 소설 <천재와 여신들>을 발표. 이듬해 이탈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의 지각 확장 실험을 도와 오던 로라 아처라와 재혼했다.  

   

66세가 되던 1960년 암 진단을 받은 뒤 마지막 장편 <>을 쓴다. <멋진 신세계>에서 삶의 극단적인 합리화가 물질적 번영과 더불어 사람들의 정신적 황폐를 초래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미래 형상을 제시한 작가가 이제 <섬>에서는 동양의 철학과 정신에 눈길을 돌리며 정신적 교착에서 벗어날 출구를 모색한다. 

가상의 섬 팔라에서 사람들은 서구 물질문명의 처방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산다.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 엽기적인 줄거리와 잘 엮인 <섬>은 헉슬리가 인류에게 남긴 유언.  

 

1962년 인간 잠재력을 주제로 에살렌 대학에서 행한 강연은 이후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의 모태가 됐다.

1963년 11월 22일 후두암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해서 종이쪽에 적은 글귀로 아내한테 뜻을 알렸다. 

‘LSD 100 마이크로그램 피하 주사.’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지각의 문’을 그렇게 장식했다. 아내 로라가 쓴 헉슬리 전기 <이 영원한 순간>을 보면, 그녀는 오전 11시 45분 주사를 놓고 두 시간 뒤 한 번 더 투여했다. 그날 17시 21분 할리우드 집에서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는 그 몇 시간 전에 발생한 케네디 암살과 <나니아 연대기> 작가 C. S. 루이스의 사망 소식에 가려 그의 명성에 비해 크지 못했다. 

이 예사롭지 않게 일치한 죽음이 보스턴칼리지 철학 교수 피터 크리프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천국과 지옥 사이 - 죽음 저편 어딘가에서 존 F. 케네디와 C. S. 루이스와 올더스 헉슬리의 대화>라는 장편소설이 나왔다. 

 

6

 

 

인간과 사회의 발전 가능한 길들을 모색하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대열에 들어선 헉슬리는 마지막 장편 <섬>에서 인류 미래에 대한 회의론을 극복했다. 노년 들어 그는 에세이 제목 <지각의 문> 같은 인생 방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루덩의 악마들>에 묘사된 것 중 많은 부분은, 헉슬리의 관념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잘못된 ‘지각’을 지닌 후과이다. 즉, 탐욕과 두려움과 편협 때문에 잔느와 수녀들이 그랑디에를 상대로 행한 중상비방, 독단적인 교리에 의거하거나 빙자하여 엑소시스트들이 저지른 폭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증거마저 인정하며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어용 판사들, 독재를 굳히기 위해 종교재판을 부활하려는 목적으로 루덩 현상을 이용하려 한 리슐리외의 속셈 따위는…

모두 헉슬리가 보기엔 이 비극적 사건의 주된 원인이라기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 모든  바탕에는 그들의 잘못된 지각(인식)이 도사리고 있던 것일 뿐. 

 

루덩의 악마들 1634

 

 

가련하고 불행한 그랑디에 신부에 이어 소개되는 장 조셉 수렝 수도사의 스토리는 총체적 인식의 힘이 얼마나 크고 기적 같은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주변과 만물에 대한 지각이 올바른 경우 영혼뿐 아니라 육신마저 치유될 수 있다는 점! 

 

수렝이 영웅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갖은 유혹과 싸우고 엄격한 금욕을 실천하며 고행하는 동안에도, 매 순간 악령에 들린 듯이 악마들을 믿으며 원장수녀를 치유하려 들면서 정신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동안에는, 그런 젊은 예수회 수사가 헉슬리 눈에는 영적으로 완전치 못하고 잠재적으로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 

수렝이 이십년 가까이 심신증적 마비 상태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비정상의 필연적인 귀결로 해석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본문에서) 

 

하지만 비정상은 결국 바로잡히고, 수렝이 아직은 확신 없는 발길을 낙엽 수북이 쌓인 정원으로 처음 내딛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니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시험과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치유됐다. 혹은, 헉슬리의 용어를 쓰자면, 올바른 지각을 획득했다. 

 

지각은… 사람이 교회의 독단적 교리에 구속된 상태를 훌훌 떨치고 자연과 하나 된다는 생각을 굳히는 순간부터 올바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게 곧 조물주와 합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니까.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헉슬리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동시대인으로서, 헉슬리가 만년에 내놓은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즉, 인간과 신의 올바른 관계는 자연을 거스르거나 정복함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긴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마르셀이 우리한테 입증했다. 

이런 생각들은 <명상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토마스 트러헌은 조물주가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조물주를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한 시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이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본문에서)

 

수렝의 스토리는 마르셀 사상의 몇몇 기초적 명제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즉, 객관적 세계와 우리네 개인적이고 소중한 존재의 세계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며, 가혹한 혼돈 속에 있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주변 현실에 대한 우리네 태도가 중요할 뿐이라는… 

삶이란 신비이고, 삶의 여러 신비함은 늘 직관적으로 납득된다. 우리가 도그마에 묶여 있는 한, 설령 그것이 아무리 무조건적 믿음을 주입하는 것이라 해도 삶은 우리네 의지와 따로 놀면서 제대로 살아 보려는 시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헉슬리는 종교의 의미와 바른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개개인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버리도록 돕는다면 종교는 응당 깨달음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깨달음의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공포와 협량, 의분, 기업애국주의, 십자군 식의 증오 같은 감정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며, 또 어떤 신학적 개념들과 어떤 신성한 단어들만 중언부언할 때, 그렇다.」 (본문에서) 

「선행을 통해 성자와 합일하고 계시에 온유함으로써 성령과 합일하면 성부와도 의식적이고 변모되는 합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합일 상태에서 사물과 현상은 들뜨고 과장된 자아의 프리즘을 통해 감지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달리 말해, 최종 정체성에서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교회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렝은 1665년 행복한 상태로 눈을 감았다. (반면에 천사들의 수녀 잔느는 참회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이승에서 만물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지각을 얻은 덕분에 그에게 지복이 강림했는지, 우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수렝의 생각이 헉슬리가 언급한 방향으로 실제 발전했다면, 그는 자신이 섬긴 교회와 힘겨운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특히 예수회는, 자연을 죄악의 왕국처럼 간주했기에 모든 감각에 재갈 물리기를 요구했으니까.  

 

헉슬리의 인식에서는 그와 반대로 자연과의 유기적 결합이 정신뿐 아니라 신체 건강의 담보이다. (마르셀의 영향이나 불교철학에서 퍼온 논거들과 함께, 만년에 아주 강하게 몰입한) 이런 사상은 그가 2차 대전 직후 정신적 굴곡을 겪고 나서 발표한 모든 글에 다 배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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