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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사진

 


 

  일본 임제선 창시의 주요 인물인 남포소명은 이렇게 설파한다. 

  「눈먼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에서 부처가 자신의 황금 입술에서 단어들을 농담조로 흘렸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뒤얽힌 말 덤불로 가득 찼다.」 

  이 덤불들이 극동에서만 자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지고’ 왔다면, 그건 그분과 그분 후계자들이 그들 통찰력을 말로써 구체화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말들처럼, 기독교적 언급들은 때론 너무 공격적이고 때론 너무 개괄적이고 불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늘 구구한 해석의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이런 가르침이 작업가설로 활용될 때… 즉, 인간이 존재의 고통을 수습하도록 돕는 지혜의 원천으로 활용될 때, 기독교적 명제들은 거대한 가치를 지녀 왔다. 한데, 그 명제들이 교리요 우상으로 바뀌면서, 그것들은 신학적 증오나 종교전쟁, 교회 제국주의 같은 거대한 악을 낳았다. 이 악에는 루덩에서 벌어진 광란의 향연과 수렝의 자기암시로 인한 광기 같은 부차적인 참사들도 포함된다. 

 

  모럴리스트들은 정욕을 통제해야 한다고 자주 읊어댄다. 물론 옳은 말씀이다. 한데 불행히도 그들 중 대다수는 그에 못지않게 본질적 의무인 말과 말에 근거하는 사유 형태를 통제하지 못한다

  정욕의 범죄는 뜨거운 피에서만 자행되고, 피는 가끔 뜨거워질 뿐이다. 그러나 말은 늘 우리와 함께 있고, 말은 주문과 마법 공식 같은 것도 황당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 정도로 암시적인 힘을 지닌다.  

 

  정욕의 범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이상주의의 범죄. 이는 바로 신성시 된 말로 쏘삭거리고 조장하고 설교하여 생기는 범죄. 이런 범죄는 맥박이 정상일 때 계획되고 피가 차가운 상태에서 다년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실행된다. 

  과거에는 이상주의 범죄를 강요한 말들이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 그런 말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다. 도그마들은 이제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됐다

 

  유일하게 변치 않은 것은 각종 도그마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맹신이요 조직적 광기요 악마 같은 흉포함이며, 그들은 그런 흉포함을 가지고 저희 믿음을 행한다. 

  실험실과 서재에서 쓰는 작업가설 개념을 이제 교회와 의사당, 정부에서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인류는 집단 광기에서 벗어나고 대량 학살과 대량 자살이라는 고질적 충동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인류의 주된 문제는 바로 환경. 사람들은 물질 수준부터 영적 수준까지 모든 수준에서 우주와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를 배워야 한다. 생물학적 종으로서 우리는 제한된 규모와 자원을 소유한 행성 위에서 거대하고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가 만족스럽게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 자원 중 많은 것은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소모적 자산이 아닌가.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무한한 정신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datum과 donum (받지만 말고 주기도 하는) 원칙에 입각함으로써 서로 만족스럽게 지내는 방법을 키우게 될 것이다.[각주:1] 

 

  이런 말이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찾으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저절로 따라붙을 것이다.”[각주:2]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행동한다. 먼저 ‘나머지 다’를 찾으려고 기를 쓴다. 즉, 이기적인 돌진과 말의 힘에 대한 맹신에서 생긴,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든다. 그 결과 우리네 기본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정치 유희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조직화된 사회가 지구와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게 된다

 

  맹신적으로 숭배된 언어 체계에 지나치게 쏠리다 보면, 존재의 ‘원초적 사실’과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어진다. 먼저 이차적인 ‘나머지 다’를 찾아다니다가 우리는 그것을 잃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마저 잃으며, 또 그 왕국이 도래할 수 있는 유일한 지구도 잃는다

 

  수렝의 경우, 어떤 명제들을 부동의 도그마로 믿게끔 배운 바람에 공포와 절망에 억눌려서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명제들이, 똑같이 독단적이지만 더 용기를 북돋운 명제들이 있었다

 

  1655년 10월 12일 (이맘때 수렝이 복귀한) 보르도 칼리지에서 한 수도사가 그의 고해를 듣고 영성체를 준비시키기 위해 방으로 찾아왔다. 병자가 자책할 수 있는 유일한 중죄는 아주 사악하게 처신하지 못했다는 점뿐이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이미 저주를 내린 이상 모든 악에서 뒹굶으로써 그 저주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텐데, 실제로는 늘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썼으니 말이다.  

  「기독교인이 선을 행하는 문제에서 자책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면, 즉 자신의 죄가 충분치 못해 괴롭다 한다면, 독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다. 이제 내 보기에도 그렇다.」 

 

   이 대목을 1663년도에 썼다. 1655년에도 수렝은 자신을 ‘길 잃은 영혼’이라 여기면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자살보다 훨씬 더 중한 죄를 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바로 이 죄를 그가 ‘아직 희망을 갖고 지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 중 하나로서’ 고해사제에게 고백했다. 고해사제는 필경 어질고 지혜로운 이로서 수렝의 과대망상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참회하는 죄인에게 보증했다. 

  난 이런 일을 잘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게 잘 되리라는 인상을 종종 강하게 느꼈다오. 그걸 계시라 불러도 좋아요. “당신은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고, 평화롭게 숨을 거둘 것이외다.” 

 

  이 말이 수렝의 마음에 엄청난 인상을 불러일으켰고, 그 순간부터 공포와 비참함으로 숨 막히게 하던 구름이 걷히게 됐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돌아서지 않았다. 아직 희망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질병이 회복된다는 희망,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희망이

  희망과 더불어 건강도 조금씩 회복됐다. 신체 활동 억제와 마비 증세가 차례로 사라졌다. 글을 쓸 수 없던 상태가 먼저 사라졌다. 십팔 년 동안 강요된 병리적 문맹 상태 끝에 1657년 어느 날 그가 펜을 쥐고 영적 생활에 대한 숙고를 세 페이지 끼적일 수 있었다. 철자들이 ‘거의 읽기 힘들 만큼 볼품없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손이 마침내 말을 듣기 시작한 점, 비록 마음먹은 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해도.  

 

  세 해가 지나 보행 능력이 회복됐다. 이건 시골 친구 집에 묵을 때였다. 처음에는 일꾼 둘이 그를 들어 침실에서 식당으로 옮겨 다녔다. 「왜냐면 지독한 통증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으니까. 이건 마비 환자들이 겪는 통증 같은 게 아니었다. 위가 수축되고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통증이었으며, 그때마다 난 창자가 뒤집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1660년 10월 27일 한 친척이 그를 보러 왔다. 떠날 시간이 됐을 때 수렝이 배웅하려고 문까지 고통스럽게 발을 질질 끌고 갔다. 거기 서서 손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갑자기 「모든 사물을 아주 또렷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건 극도의 신경쇠약 때문에 지난 십오 년 동안 전혀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익숙한 통증 대신 ‘어떤 생기’를 느끼면서 계단을 대여섯 개 내려가 정원에 들어서서 제법 오랜 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이끼며 녹색으로 반짝이는 회양목 울타리를 보고, 풀밭과 갯개미취들과 가지가 뒤엉킨 서어나무 오솔길을 보았다. 더 멀리 창백한 창공 엷은 은색 햇빛 속에 부드러운 갈색 가을 나무들이 서 있는 낮은 구릉들을 보았다. 

 

  바람 한 점 없고 거대한 수정 같은 적막이 깔렸는데, 떠오르는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과 무수한 선들이 기적 같은 광경을 펼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영원의 존재를 느꼈으니까.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이 나타나는 자연에서 영원의 존재를 느끼다

 

  다음날 그 동안 거의 망각하고 있던 세상으로 다시 외출을 감행했다. 날이 갈수록 탐사가 과감해져서 한번은 우물 있는 데까지 갔다. 우물을 보고도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지 않았다. 정원을 벗어나서 수도원 너머 작은 숲으로 들어가 발목까지 차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장 조셉 수렝이… 치유됐다. 

 

  그는 ‘극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바깥세계를 인식하지 못했노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쇠약 때문에 신학적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이 일으킨 환상에 집중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연계에서 그렇게나 비참하게 단절된 것은, 사실은 그가 그런 이미지들이며 추상 관념에 병적으로 몰입한 탓이었다. 그를 삶에서 떼어놓은 질병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그는 말과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사물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세계에서,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떨어져 살게끔 자신을 몰아쳤던 것이다

 

  랄망은 믿음의 경계를 모르는 사람의 숭고한 무모함을 가지고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성체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보거나 거기에 경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경탄할 수 있다면, 그분은 이 신비와 부활에만 경탄했을 것이다. 신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이후 우리는 그 무엇에도 놀랄 일이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그 무엇을 보지도 않고 경탄하지도 않는다는 면에서 수렝은 그저 스승의 금지 명령을 따르기만 했다. 그저 주기(donum)만 꿈꾸면서 아무 것도 받기(datum)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신께서 주시는 최고 선물은 주어진 것으로 이뤄진다. 하나님 왕국은 이 세상에 임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기적인 갈망과 증오로써 일그러진 의지며 도그마들로써 왜곡된 지성에 나타나는 세상을 지각할 게 아니라

 

  수렝은 타락한 세상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확신한 엄격주의 신학자였기에 랄망을 좇아 자연에는 바라보거나 경탄할 만한 게 전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가 직접 겪은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다. <영적 교리 문답>에서 이렇게 쓴다. 

  「간혹 성령은 영혼을 꾸준히 점차적으로 일깨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동물이며 나무, 꽃, 기타 모든 피조물 등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죄다 활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넌지시 이르며 위대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 

  같은 맥락의 구절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갖고 계신 지혜와 선의를 모두 꽃송이에서, 미물에서, 영혼들에게 환히 드러내신다. 영혼에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기 위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자신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많은 경우에 내 영혼은 이런 찬미의 상태로 덮였고, 그러면 햇빛이 평소보다 말할 수 없이 더 밝아지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아주 부드럽고 견딜 만한 것이, 자연광이 아니라 마치 더 드높은 시원에서 나오는 듯싶은 것이다. 한번은 그런 상태에 잠겨서 보르도에 있는 우리 칼리지 정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빛이 어찌나 기적 같은지, 내가 마치 낙원에서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색채가 평상시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형상이 더 우아하고 눈부시게 보였다. 우연한 축복 덕분에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의 문으로 자연스레 들어섰다. 그 세계는 만약 블레이크의 말대로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우리가 매 시간 거주할 곳이다.[각주:3]

  그러나 찬미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고, 병고를 겪는 여러 해 내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웅장함이라는 면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주 강렬한 기억 외에 내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일순간이나마 지상에서 하나님 왕국을 접한 이 사람이 그럼에도 엄격주의자이기에 이 징표를 지각하지 않고 창조의 결실을 다 거부해야 했던 까닭은 단순한 말과 추상적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나 트러헌이 <명상의 시대>에서 한 것처럼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성들여 활용하는 대신, 그는 신이 창조한 그 무엇도 보거나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예전 비정상적 정신 상태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러고는 자기 신조에서 더 암울한 명제들과, 그 명제들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과 상상에, 온 생각을 쏟아 부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내던지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길도 없었으리라. 

 

  안타이오스[각주:4]는 땅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위력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이 거인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교살해야 했다. 

  거인이자 동시에 영웅인 수렝은 자연과 접촉하여 치유되는 경험도 했고 의지력 하나로 자신을 지상에서 들어 올려 제 목을 죄기도 했다. 그는 해방을 열망했다. 그러나 성자와 합일을 잘못 해석했다. 그에게는 이 합일이 자연에 깃든 신성을 부정하는 뜻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세상과 떨어져서 영혼이 성부와 합일하는, 또 갖가지 심리적 체험에서 성령과 합일하는 부분적 깨달음만 얻었다

 

  (초기 단계에서 수렝의 치유는 암흑으로부터 ‘행복하고 건강한 의식’으로 이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 건강한 의식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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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틴어 datum은 '주다'라는 동사 dare의 과거분사로서 '주어진'이란 뜻. 즉, 받은 것. donum은 '선물, 기증, 인간에게 강림한 하느님 은총' 등의 뜻. 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다툼과 도눔은 1) datum이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덜 고유한 성질인 반면에 2) donum은 대범함과 규모에서 datum을 훨씬 더 능가한다고. [본문으로]
  2.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and all the rest shall be added." "다만 그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다른 것은 다 더해지리니." (누가복음 12:31) [본문으로]
  3.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 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만물이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드러날 것이야." 영국의 시인, 판화 제작자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0-1793년 어간에 완성한 책 <천국과 지옥의 혼인>에 실려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을 이 구절에서 차용해 <지각의 문>(1954)이라 했다. [본문으로]</지각의></천국과>
  4. Antaios - 그리스와 베르베르 신화에서, 힘이 센 거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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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라퐁텐은 드문 예외일 뿐이다. 라퐁텐의 동시대인들은 글에서 인간 외적 본질인 자연 세계에 눈길을 전혀 돌리지 않았다. 코르네유의 비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면밀하게 조직된 계층적 집단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옥타브 나달이 ‘코르네유의 세계는 바로 도시’라고 쓴다. 

  라신의 여주인공들과 그들을 고민케 하고 특색 없는 남자들의 더 엄격히 제한된 세계는 코르네유의 도시처럼 창문이 없다. 이 세네카 풍 비극의 극치는 숨 막히고 좁아서 공기도 없고 편히 움직일 공간도 없고 배경도 없는 파토스이다. 그것들이 <리어 왕>, <당신 좋을 대로>, <한여름 밤의 꿈>, <맥베스> 등과 얼마나 다른가 말이냐.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비극은 어떤 것이라도 읽다 보면 어릿광대며 악인, 영웅, 고급 매춘부, 눈물 흘리는 왕비들 같은 인간 세상 뒤편에 지구와 우주가 늘 존재하며 생물과 무생물의 세상이, 이성이 없는 것과 의식이 또렷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들이 거의 스무 줄마다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느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1889-1973

 

  우리 시대의 저명한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쓴다.[각주:1]

  “내 가장 깊고 가장 확고한 소신은, 만약 그것이 이단적이라면 정통 교리에는 더 나쁜데, 모든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뭐라 해도 신의 뜻은 우리가 만물을 도외시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만물을 통하고 우리 출발점으로서의 만물과 함께 그분을 찬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신앙 서적을 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17세기에 가장 덜 불쾌한 신앙 서적들 중 하나는 토마스 트러헌[각주:2]의 <명상의 시대>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시인이요 신학자인 그는 하나님이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의 표현에 따르면, 사욕 없는 관상을 통해 ‘세상을 얻는’ 사람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얻으며 나머지는 전부 저절로 추가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든 갈망과 야망을 채우고 의심과 배신을 물리치고 용기와 기쁨으로 굳건해지는 것이 정녕 달콤한 일 아니런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세상을 얻기만 하면 다 달성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와 힘과 선함과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니까.” 

 

  이상적인 삶에서 랄망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자연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의 혼합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이란 자연 전체가 아니라 그저 발췌한 일부일 뿐이다. 

  트러헌도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뒤섞음을 옹호하지만, 그는 자연을 가장 작은 디테일까지 포함해 통째로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자연물에 내재한 이 신성함을 수렝도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무나 지나치는 동물한테서 하나님의 충만한 위대함을 실제로 감지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몇몇 짧은 기록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갖가지 작은 것들 속에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어디서도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많은 영적 서신의 수신자들한테도 백합에 관한 그리스도의 권고를 따르면 암중모색하는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도 조언하지 않았다. 

  타락한 자연은 모두 부패한 것이라고 주입된 믿음이 직접 체험에서 얻은 것보다 그의 마음에서 더 강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겠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독단적인 말과 가르침이 확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선종의 3대 조사는 “제 앞에 있는 이것을 보고 싶다면, 이것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관념을 갖지 말라”고 쓴다.[각주:3]

   그러나 관념 고정은 신학자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고, 수렝과 그의 스승은 깨달음을 추구한 사람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다. 

 

  랄망의 고행에서 가슴의 정화는 성령의 인도에 늘 온유하게 따름으로써 완성됐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각주:4] 중 하나는 이해력인데, 이 이해력에 맞서는 악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난폭함’이다. 이런 난폭함은 갱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흔한 상태이며, 그런 사람은 대체로 내면의 빛에 완전히 눈이 어둡고 감화의 목소리에 완전히 귀가 어둡다.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제 생각을 추적하는 증인을 두고, ‘마음 움직임을 감시하는 작은 파수꾼’을 세움으로써… 사람은 마음 그 어느 깊은 곳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직관적 지식과 직접적 명령과 상징적 꿈이며 판타지 형태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되는 점까지 직관을 키울 수 있다. 

  끊임없이 돌아보고 경계하는 가슴은 모든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결국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로 가는 길에서 아주 다른 종류의 점유와 지배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영감과 계시가 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중 어떤 것이 성령의 목소리이며 어떤 것이 미치광이 목소리고 사악한 범죄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식별해야 하나? 

 

  피에르 베일[각주:5]이 한 독실한 재세례파 젊은이의 경우를 인용한다. 이 젊은이는 어느 날 아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서를 많이 읽은 그 아우는 이런 일이 이전에도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계시의 신성함을 인정했다. 같은 신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제 2의 이삭처럼 자발적으로 죽음으로 달려가 참수를 당했다. 

  그런 경우를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성의 목적론적 유보’라고 우아하게 칭한다.[각주:6] 창세기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광기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랄망은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한테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신자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게끔 여러 모로 경고했다. 성령에 순종하라는 그의 교리가 내재적 영혼이라는 칼뱅파 교리 같은 것이 아니냐며 의심쩍게 이의를 제기한 동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계시 형태로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행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종교의 신조이고, 둘째, 종교적 계시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 전통과 교회 권위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만약 계시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에 역행하게 한다면, 그건 거룩한 계시일 수 없으리니. 

 

  이는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광기를 조심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퀘이커교도들이 활용하듯이, 다른 방법도 있다. 특이하거나 위험스러운 뭔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올 때 그 사람은 ‘존중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계시의 본질에 관해 그들 의견을 따라야 했다. 

  랄망도 같은 절차를 옹호한다. 그는 성령이 실제로는 ‘우리한테 판단력 있는 이들과 상의하고 우리 행위를 가까운 이들 의견에 맞추도록 촉구한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좋은 행위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랄망은 이것이 가톨릭신앙의 신조라고 단언한다. ‘난 그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투덜거린’ 동료들한테 이렇게 답했다. 

  참 신자들에겐 그런 계시가 늘 따라다녀요, 본인이 못 느끼는 중에도. 그대들이 온당하게 살기만 한다면 종교적 계시를 필히 인식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제 자신 바깥에 살기를 택하면서 제 영혼을 들여다보러 집으로 잘 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 양심 점검을 아주 피상적으로 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빤한 잘못들만 참작한다. 제 욕구와 습관의 내적 뿌리를 찾으려 애쓰지는 않고, 마음의 상태와 경향이며 가슴의 작열을 돌아보지는 않고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들 놀랄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어찌 들을 수 있겠나? 그들은 저희 행동으로 인한 은밀한 마음속 죄마저도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그런 걸 알기에 적절한 조건을 내면에서 만들기만 하면, 성령이 인도하심을 틀림없이 알게 되리라.」 

 

  이런 점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른바 선행이요 자선이라 하는 것들 대부분이 왜 비효율적이며 나아가서 많은 경우 왜 유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속담처럼 만약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각주:7] 한다면,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내면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못 보기에, 순수한 선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행동하기 이전에 늘 관상(심사숙고)이 선행돼야 한다고 랄망이 말하는 것.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우리는 내면에 더 침잠할수록 바깥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내면의 자신을 덜 들여다볼수록 선을 행하려 애쓰기를 더 삼가야 한다.」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선 활동에 들이덤비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열의와 자선의 동기가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일에서 자기애를 충족하기 때문에, 기도나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 방에서 호젓하게 명상에 잠기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어떤 성직자가 헌신적인 신도들을 많이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자의 말씀과 선행은 ‘그가 얼마나 사리사욕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지에 비례해서만’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언뜻 선을 행하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거룩한 이들이지 사업에 능한 자들이 아니다.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하는 데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 외려 우리를 그분한테 더 큰 사랑으로 더 바짝 묶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과하면 육체의 죽음을 야기하는 어떤 체액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에서도 지나치게 활발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절제되지 않은 활동 필히 영적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결실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칭찬받을 만하고 눈부시고 건설적인 일을 하는데도 말이다! 

 

  계시의 조건인, 욕심 없는 자기성찰 없이는 재능도 결실 맺지 못하고 열의와 근면도 영적 가치를 전혀 일궈내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평생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 한 해에 해낼 수 있다.」 

  그래, 외적인 작업은 외부 상황을 바꾸는 데는 효율적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에도 파괴적이고 자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데, 상황에 대해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바꾸고자 하는 일꾼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영혼이 계시를 접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저 외부 지향적인 사람은 트라야누스[각주:8] 황제처럼 일하고 데모스테네스[각주:9]처럼 웅변을 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을 지향하는 사람은 한마디 말로도, 다른 사람이 총명과 학식을 다 동원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상을, 많은 가슴과 마음에 안길 수 있다. 그 한마디에 성령이 깃들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느끼나? 지속적인 계시 상태를 수렝보다 나이 적은 동시대 여성 아멜 니콜이 아주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녀를 고향 브르타뉴 전역에서는 애정을 담아 la bonne Armelle (착한 아멜)이라 불렀다. 

  하녀로서 음식 만들고 걸레질하고 아이들 돌보면서도 관상하는 성자의 삶을 산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해 제 사연을 적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재주 있고 글을 잘 아는 수녀가 있어서, 그녀의 은밀한 얘기와 고백을 거의 놓치지 않고 기록하게 됐다. 

 

  「아멜은 자신이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그저 고생하며 하나님 역사에 순종하는 데에만 적합하다고 여겼다. 고백하기를,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 이 육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인도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녀 영혼에게, 내가 들어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라, 명령하고 거기 들어서셨다. 아멜은 제 육신이나 마음에 관해 말할 때 ‘내 몸’이나 ‘내 마음’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했다.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인이 되었을 때 그 동안 나를 가로막은 것들을 (나쁜 습관과 이기적 충동 따위를) 모두 내버렸어요. 그렇게 되자, 그녀 마음은 주님이 그녀 영혼의 심연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깨닫지 못했고, 그 역사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녀 마음은 하나님만이 자유로이 들어설 수 있는 이 심연의 문 밖에서 주인 명령을 공손하게 기다리는 하인과 같았다. 간간이 아멜은 전능자께서 계신 은밀한 문 앞에 많은 천사들이 입구를 지키듯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됐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그녀의 의식적인 자아를 영혼의 심연으로 들여놓으셨다. 들여놓을 뿐 아니라, 거기 가득 채워진 신성한 완성을 실제로 보게 하셨다. 그건 사실 늘 차 있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가 알지 못했던 것일 뿐.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은 그녀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강해서 한동안 육신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점차 견디게 되면서 그리 큰 고통 없이도 계속 그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아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놀라운데, 다른 비슷한 증언들과 대조해 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즉, 만물의 신성한 근간과 같은 본질인 순수한 자아 혹은 아트만이 이 놀랄 만한 자아에 내재돼 있다는 점. 영혼 안에는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은밀한 심연이 있다.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까닭은… 신성한 근간과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비인격화된 실체, 곧 우리네 무의식의 지대가 깔려 있는데, 거기에는 범죄적 본능과 원죄가 둥지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광기와도 가깝고 하나님과도 가깝다. 

 

  우리는 원래의 죄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원래의 덕도 (원덕도) 있다. 이를 서구 신학에서는 ‘은혜를 감당할 능력’ 혹은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다. 이건 최초의 순수와 결백을 간직한 의식의 파편. 이 타락하지 않은 의식의 파편을 ‘신테레시스[각주:10]라 부른다. 

  프로이트 유파 심리학자들은 원덕보다는 원죄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한다. 그들은 쥐와 바퀴벌레들을 차분히 연구하지만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를 꺼린다. 융과 그의 후계자들이 좀 더 현실적이다. 그들은 개인적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섰고, 마음이 점점 더 비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심령매체와 뒤섞이는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융의 심리학은 내재하는 망상증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내재하는 신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반복컨대, 원죄의 밑바탕이 되는 원덕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아멜의 경우가 독특한 건 아니었다. 영혼의 심연이 있어서, 거기서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 내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 왔다. 

  그것을 수렝 신부도 인식했는데, 단지 저 뒤에서 기록되듯이, 그와 함께 심령매체에 두려움이 있고 개인적 잠재의식에 해로운 쓰레기가 있음을 강하게 인식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탄을 같은 순간에 인식했고 자신이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영원히 결합됐음을 아주 확실히 알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저주받았다는 것도 굳게 믿었다. 

  결국, 우리가 저 뒤에서 보게 되듯이, 그것은 하나님을 두루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고통 받는 마음에서, 원죄는 시간과 상관이 없는 까닭에 훨씬 더 크고 많은 원덕 속으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신비 체험, 현신, 이른바 ‘우주 의식’의 번쩍임 등은 간청한다고 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실험실에서 일률적으로 마음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얻은 체험이 명령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 그 심연으로 다가들고 그 영역 안에 존재하며 천사들 속에서 (아멜의 말대로) 문가에 서는 체험은 반복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최면상태를 실험한 사람들은 이런 점을 발견한다. 즉, 어떤 트랜스 깊이에서 피험자들이 홀로 있고 주의가 산만하지 않다면 내재된 평정과 좋은 상태를 심심찮게 알게 된다는 것. 이때 이 좋은 상태는 광대하지만 고립되지 않은 공간들이나 빛의 인지와 자주 연관된다. 

 

  랄망과 그 제자들은 신비 체험의 근거를 굳이 입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신비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 알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에서부터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각주:11]의 얼마 전 증언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을 만한 문헌들로 확인도 했다. 

  가슴 정화와 성령에 온유함으로써 달성되는 그 목표의 신성한 본질과 가능성을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하나님의 미더운 종들이 이 길을 거치고 서면 증거를 남겼으며, 그 증언들의 정통성을 로마교회 박사들이 담보했다. 이제 그들은 감각과 의지가 몸부림치는 어두운 밤들을 스스로 이겨낸 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평정 상태를 체득하게 됐다

(3편 끝. 4편 1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1. Gabriel Marcel (1889-1973) - 프랑스의 철학자, 극작가, 비평가.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나이 마흔에 가톨릭에 귀의. <형이상학적 일기>, <구체적 철학 경험> 등. [본문으로]</구체적></형이상학적>
  2. Thomas Traherne (1637-1674) -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자, 시인, 사상가, 지복 철학을 다룬 산문 Centuries of Meditations이 20세기 초에 발간돼 널리 읽힌다. [본문으로]
  3. 欲得現前 莫存順逆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신심명> [본문으로]</신심명>
  4. 1지혜 2이해력 3지식 4권고 5인내 6경건함 7신의 외경. 이 일곱 가지 선물의 원천으로 흔히 이사야서 11장 1-2절을 꼽는다 [본문으로]
  5. Pierre Bayle (1647-1706) - 프랑스 계몽시대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요 신학 비평가.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 가톨릭에 귀의. ‘계몽철학의 화약고’라 불리는 <역사와 비평 사전>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과 개혁교회한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의 적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본문으로]</역사와>
  6.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 -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신학자, 저술가,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편적인 윤리를 유보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공포와 전율>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조명한다. 이 저술의 장르를 그 스스로 ‘변증법적 비가’라 정의했다. [본문으로]</공포와>
  7.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 유럽 속담. 좋은 일을 하려고 의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 혹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의도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 [본문으로]
  8. Caesar Nerva Trajanus (53-117) - 고대 로마 황제.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 실시. 도로와 교량, 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본문으로]
  9. Demosthenes (B.C. 384-322) -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본문으로]
  10. Synteresis - 가톨릭 교부요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342-420)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B.C. 525-456)의 작품을 풀이하면서 양심(conscientia)을 뜻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이것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우리 안에서 마지막까지 선을 알게 한다. 세네카 등 스토아학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심에 대한 태도를 여러 모로 정의하면서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철학자들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 등 신비주의자들도 사용했다. [본문으로]
  11. Dionysius the areopagite (460경-520경) - 침묵과 비움을 설파한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영성가. St. John of the Cross (1542-1591) - 성 환 델라 크루스. 에스파냐 영성가, 반종교개혁의 주요 인물, 테레사 성녀와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 창립, 로마가톨릭 성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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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리버 리드, 영화 악마들, 켄 러셀 감독,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3)

 

5

 

 

  그의 삶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30년대 중반 ‘평화서약 연합’의 반전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이후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 인권 수호에도 나섰다.

 

  1937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역사가요 과학 저술가, 철학자인 제럴드 허드(Heard)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의 온후한 기후가 시력 향상에 도움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와서, 지역의 지성인들이며 힌두이즘과 불교에 심취한 지식인들과 친분을 맺었다. 

 

  주로 로스앤젤레스 남부에서 죽을 때까지 살게 됐는데 처음 한동안은 뉴멕시코 주 타우스라는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D. H. 로렌스가 20년대에 거주한 이후 작가와 화가들의 작업지가 된 여기서 헉슬리는 에세이 <수단과 목적>을 썼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해방, 평화, 정의, 형제애’를 꿈꾸기는 해도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뜻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검증한다. 

 

  1938년 크리슈나무르티를 알게 되면서 그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허드를 통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는 베단타학파 회원이 되고 이태 뒤 젊은 영국인 소설가 이셔우드를 이 서클에 소개한다. 세 사람은 명상과 채식주의, 아힘사(불살생) 원칙을 비롯해 철학과 종교에서 브라마난다의 폭넓은 지식에 심취하게 됐다. 

  유럽 문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종교를 발견한 것… 그 얼마 뒤에 쓴 에세이 <만년 철학>에서 헉슬리는 널리 알려진 몇몇 신비주의 가르침을 논한다. 

 

  에세이스트요 사회비평가로서 과학과 기술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주로 다루며 내보인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은 독자들한테서 저항감을 야기하기도 했다. 철학적 신비주의와 동양의 가르침, 초심리학 같은 영적 주제에 더욱 몰두하게 됐다. 

  일부 아카데미 서클에서는 그를 현대 사상의 리더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으로 여겼다. 말년에 남긴 언급 하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인류의 존재 문제를 숙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서 나는 갖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딱 하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우리 각자가 조금만 더 착해지려 애쓰자. 그러면, 다 된다.

 

   로스앤젤레스 시기 이후 내놓은 다섯 편 장편소설 중 첫 번째인 <숱한 여름을 보낸 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할리우드 백만장자 이야기로, 1939년 픽션 부문에서 영국의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받았다. 특유의 위트와 지적 달변이 가득한 이 풍자소설에서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을 거론하는데, 개중 몇몇은 나중에 그의 마지막 장편인 <>에서 주된 주제가 된다.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몰려든 많은 유럽 작가들이 그랬듯이, 헉슬리도 생계를 위해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애니타 루스의 소개로 MGM과 접촉하여 이셔우드와 공동 집필 등으로 여러 편을 썼지만 제대로 빛을 본 것은 <오만과 편견> 정도. 할리우드는 헉슬리의 성향이며 추구하는 바와 잘 안 맞았다.

 

   50년대 초 내놓은 논픽션 <루덩의 악마들>은 그의 작품 활동 지평에서 상당히 독특하며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역사적 일화에 대한 눈부시게 상세한 심리 탐구. 

    

  인간 지각의 확장과 영성에 (그의 용어로는, 자기초월) 관한 관심으로 마지막 십년을 거의 다 보냈다. 

  메스칼린이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1953년 전문의의 관리 하에 직접 실험에 나섰다. 주변 세계 지각에 관한 실험 결과물이 바로 유명한 철학적 에세이 <지각의 문>과 속편 <천국과 지옥>. 이는 보편적 행복의 공식을 찾아내려는 몸부림. 

 

  20세기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의 저자가 이젠 다양한 사이키델릭을 실험하면서 지각의 확장 수단을 찾으려 애썼다. 예전에는 환영을 보는 이들과 신비주의자들과 예언자들한테만 허용된 영역으로, 보통 사람들도 지각을 확장함으로써 들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지각의 문>은 60년대 수천 명 급진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됐고, 그 저자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운동의 ‘영적 아버지’가 됐으며, 한 록그룹으로 하여금 ‘The Doors’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되게 했다. 

 

  이런 흐름에서 헉슬리의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주요 작가인 윌리엄 버로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톰 클레이튼 울프, 페루 태생으로 <돈 후안의 가르침>의 작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같은 이들.

 

   1955년 아내 마리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직전에 소설 <천재와 여신들>을 발표. 이듬해 이탈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의 지각 확장 실험을 도와 오던 로라 아처라와 재혼했다.  

   

  66세가 되던 1960년 암 진단을 받은 뒤 마지막 장편 <>을 쓴다. <멋진 신세계>에서 삶의 극단적인 합리화가 물질적 번영과 더불어 사람들의 정신적 황폐를 초래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미래 형상을 제시한 작가가 이제 <섬>에서는 동양의 철학과 정신에 눈길을 돌리며 정신적 교착에서 벗어날 출구를 모색한다. 

  가상의 섬 팔라에서 사람들은 서구 물질문명의 처방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산다.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 엽기적인 줄거리와 잘 엮인 <섬>은 헉슬리가 인류에게 남긴 유언.  

 

  1962년 인간 잠재력을 주제로 에살렌 대학에서 행한 강연은 이후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의 모태가 됐다.

  1963년 11월 22일 후두암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해서 종이쪽에 적은 글귀로 아내한테 뜻을 알렸다. 

  ‘LSD 100 마이크로그램 피하 주사.’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지각의 문’을 그렇게 장식했다. 아내 로라가 쓴 헉슬리 전기 <이 영원한 순간>을 보면, 그녀는 오전 11시 45분 주사를 놓고 두 시간 뒤 한 번 더 투여했다. 그날 17시 21분 할리우드 집에서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는 그 몇 시간 전에 발생한 케네디 암살과 <나니아 연대기> 작가 C. S. 루이스의 사망 소식에 가려 그의 명성에 비해 크지 못했다. 

  이 예사롭지 않게 일치한 죽음이 보스턴칼리지 철학 교수 피터 크리프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천국과 지옥 사이 - 죽음 저편 어딘가에서 존 F. 케네디와 C. S. 루이스와 올더스 헉슬리의 대화>라는 장편소설이 나왔다. 

 

6

 

 

   인간과 사회의 발전 가능한 길들을 모색하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대열에 들어선 헉슬리는 마지막 장편 <섬>에서 인류 미래에 대한 회의론을 극복했다. 노년 들어 그는 에세이 제목 <지각의 문> 같은 인생 방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루덩의 악마들>에 묘사된 것 중 많은 부분은, 헉슬리의 관념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잘못된 ‘지각’을 지닌 후과이다. 즉, 탐욕과 두려움과 편협 때문에 잔느와 수녀들이 그랑디에를 상대로 행한 중상비방, 독단적인 교리에 의거하거나 빙자하여 엑소시스트들이 저지른 폭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증거마저 인정하며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어용 판사들, 독재를 굳히기 위해 종교재판을 부활하려는 목적으로 루덩 현상을 이용하려 한 리슐리외의 속셈 따위는…

  모두 헉슬리가 보기엔 이 비극적 사건의 주된 원인이라기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 모든  바탕에는 그들의 잘못된 지각(인식)이 도사리고 있던 것일 뿐. 

 

루덩의 악마들 1634

 

 

  가련하고 불행한 그랑디에 신부에 이어 소개되는 장 조셉 수렝 수도사의 스토리는 총체적 인식의 힘이 얼마나 크고 기적 같은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주변과 만물에 대한 지각이 올바른 경우 영혼뿐 아니라 육신마저 치유될 수 있다는 점! 

 

  수렝이 영웅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갖은 유혹과 싸우고 엄격한 금욕을 실천하며 고행하는 동안에도, 매 순간 악령에 들린 듯이 악마들을 믿으며 원장수녀를 치유하려 들면서 정신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동안에는, 그런 젊은 예수회 수사가 헉슬리 눈에는 영적으로 완전치 못하고 잠재적으로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 

  수렝이 이십년 가까이 심신증적 마비 상태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비정상의 필연적인 귀결로 해석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본문에서) 

 

  하지만 비정상은 결국 바로잡히고, 수렝이 아직은 확신 없는 발길을 낙엽 수북이 쌓인 정원으로 처음 내딛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니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시험과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치유됐다. 혹은, 헉슬리의 용어를 쓰자면, 올바른 지각을 획득했다. 

 

  지각은… 사람이 교회의 독단적 교리에 구속된 상태를 훌훌 떨치고 자연과 하나 된다는 생각을 굳히는 순간부터 올바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게 곧 조물주와 합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니까.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헉슬리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동시대인으로서, 헉슬리가 만년에 내놓은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즉, 인간과 신의 올바른 관계는 자연을 거스르거나 정복함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긴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마르셀이 우리한테 입증했다. 

  이런 생각들은 <명상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토마스 트러헌은 조물주가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조물주를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한 시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이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본문에서)

 

   수렝의 스토리는 마르셀 사상의 몇몇 기초적 명제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즉, 객관적 세계와 우리네 개인적이고 소중한 존재의 세계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며, 가혹한 혼돈 속에 있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주변 현실에 대한 우리네 태도가 중요할 뿐이라는… 

  삶이란 신비이고, 삶의 여러 신비함은 늘 직관적으로 납득된다. 우리가 도그마에 묶여 있는 한, 설령 그것이 아무리 무조건적 믿음을 주입하는 것이라 해도 삶은 우리네 의지와 따로 놀면서 제대로 살아 보려는 시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헉슬리는 종교의 의미와 바른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개개인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버리도록 돕는다면 종교는 응당 깨달음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깨달음의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공포와 협량, 의분, 기업애국주의, 십자군 식의 증오 같은 감정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며, 또 어떤 신학적 개념들과 어떤 신성한 단어들만 중언부언할 때, 그렇다.」 (본문에서) 

  「선행을 통해 성자와 합일하고 계시에 온유함으로써 성령과 합일하면 성부와도 의식적이고 변모되는 합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합일 상태에서 사물과 현상은 들뜨고 과장된 자아의 프리즘을 통해 감지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달리 말해, 최종 정체성에서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교회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렝은 1665년 행복한 상태로 눈을 감았다. (반면에 천사들의 수녀 잔느는 참회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이승에서 만물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지각을 얻은 덕분에 그에게 지복이 강림했는지, 우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수렝의 생각이 헉슬리가 언급한 방향으로 실제 발전했다면, 그는 자신이 섬긴 교회와 힘겨운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특히 예수회는, 자연을 죄악의 왕국처럼 간주했기에 모든 감각에 재갈 물리기를 요구했으니까.  

 

  헉슬리의 인식에서는 그와 반대로 자연과의 유기적 결합이 정신뿐 아니라 신체 건강의 담보이다. (마르셀의 영향이나 불교철학에서 퍼온 논거들과 함께, 만년에 아주 강하게 몰입한) 이런 사상은 그가 2차 대전 직후 정신적 굴곡을 겪고 나서 발표한 모든 글에 다 배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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