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단계
신체 작업 - <존재>에 이르는 지점
내면에 뿌리내리기
<내면의 몸체>를 거쳐 <존재>에 이르기
일상에서도 순수한 <실재>와 접촉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물론, 일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할 때 자신 안에 완전히 있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네 주의가 온통 바깥세계로 돌아가지 않게끔 애써야 합니다.
주의의 (눈길, 관심, 신경의) 일정 부분을 항상 내면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면의 몸체와, 즉, 자신의 <참된 나>와, <존재>와 연결되는 들머리가 늘 열려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 근원에 접하고 있으며 그 통로가 열려 있다는 느낌이 늘 우리 안에 유지돼야 합니다. 그렇게 내면에 집중한다 하여 밖에서 벌어지는 것을 인식하는 데 방해받기는커녕 외려 인식이 더 좋아짐을 느낄 거예요. 모든 것을 더 선명하고 더 정확하게 보는 듯하며 더 확실하게 생각하여, 주변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생길 겁니다. 즉, 깊은 내적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순수한 <실재>며 에너지 세계며 형태 없는 세상과 접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왜냐하면… 두려움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외적 형태들과 동일시할 때만 생기기 때문이에요.
사실, 외적 형태란 전부 불안정한 것임을 우리가 매일 보지 않나요?
외적인 것은 모두 바뀌어요. 한 형태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요. 뭔가가 파괴되고 뭔가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자신을 이런저런 형태와 동일시할 때 형태의 이 변화를 우리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순수한 <현존>의 세계에 잠길 때, 우리는 형태를 자기 자신이라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을 <존재>며 에너지 세계며 <현존>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존재>나 <현존>은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위해를 가할 수 없어요.
자기 안에, 내면의 몸체에, 또 그걸 통해 <존재>에 더 뿌리내릴수록…
마인드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 더 줄어든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아픔과 고뇌만 유발하는 마인드의 위세 대신 지금 여기 ‘있다’는 기쁨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정말 유쾌한 일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요. 예전에 신경 건드리던 것이 죄다 아주 사소하게 보이게 됩니다. 하다못해 교통체증조차 즐거운 묵상 시간으로 바뀌면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의를 온통 바깥에 기울일 때, 우리는 걱정과 불안에 시달려요.
주의를 일부라도 내면에 두고 있을 때, 우리는 매사에 기뻐해요.
내면의 몸체에 머무는 기법을 조금씩 숙달하면, 완전히 새로운 생활방식이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 비생산적이고 잘못된 행동 패턴이며 병적인 반응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자기 내면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바깥세계가 우리 행동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행위와 활동과 결정이 우리 안에서, <존재>에서, 우리 본질에서 나오지 못해요.
그건 다 외부 뭔가에 대한 표면적 반응일 뿐이고, 그래서 새로운 문제들만 양산해요.
<존재>에 뿌리내릴 때, 우리의 행위와 활동과 결정은 모두 아주 깊은 뿌리를 지니게 되어…
<존재>라는 영원하고 무한한 진리의 샘에서 직접 퍼 올린, 깊은 내면의 지혜를 따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집 짓는 두 사람을 두고 예수가 행한 비유를 인용합니다.
한 사람은 모래 위에 기초 없이 지었는데 태풍이 닥치자 비바람에 쓸려 내려갑니다.
다른 이는 미리 암반까지 깊이 파 든든한 기초를 닦은 뒤 집을 지어서, 태풍이 닥쳐도 물살에 쓸리지 않고 끄떡없이 서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우리가 바깥 생활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성공 여부가 자신 안에, <존재>에, 자신의 <참된 나>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렸는지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뿌리를 어떻게 깊게 내리지? 든든한 기초를 어떻게 닦아야 하나?’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주의를 집중하면서 ‘내면의 몸체’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몸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몸을 거쳐서 한층 더 깊은 곳으로, <존재> 자체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까지 말이죠.
‘에너지 몸체’의 특별 영역인 단전에 집중하면, 이 느낌이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어요.
주의를 단전에 집중하면, 내적 힘의 원천에 다가가고 ‘내면의 몸체’에 깊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이건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는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기>와 같은 것이에요.
실습 21
아무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잠시 혼자 있도록 하세요.
전화기를 비롯해 소리를 다 끄세요.
등을 펴고 앉거나 누워서 편안한 자세를 취해요.
눈을 감고 이완하세요. 긴장을 푸세요.
몸 안으로 주의를 기울여, 몸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에너지 움직임을 감지하세요.
온몸을 하나의 단일한 에너지장으로 느끼세요.
내면의 몸체를 퍼지는 빛처럼 느끼기가 더 편하다면, 빛이나 빛의 몸체를 상상하세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과 비슷하지 않다면, 거기 얽매이지 말고 억지로 만들어 내지도 말아요.
아랫배로 호흡하면서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끼세요.
주의를 온통 배꼽 아래 부위로 돌리세요.
이 단전 부위를 에너지가 집중된 장으로 여기면서, 이 부위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에 바닥과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내 몸에는 깊이 모를 심연이 있으며, 난 거기에 단단히 뿌리내린다’고 상상하십시오.
아랫배를 지나서 아주 깊이 뿌리내리며 에너지도 뿌리내리게 하고, ‘내면의 몸체’ 가장 깊은 곳에 아주 굳세게 버티고 있다고 상상하는 겁니다.
충분히 깊고 견고하게 뿌리내렸다고 느끼게 될 때, 몸이 다 녹아내리고 뿌리들 덕분에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는 느낌만 남았다고 상상하세요.
주변 세계도 녹아서 다 형태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모든 것을 아주 또렷하고 명료하게 알아봅니다. 생각과 감정은 전혀 없이.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기만 합니다.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느낌을 지닌 채 몸의 느낌과 호흡에 다시 집중하고서 눈을 뜨세요.
이제 주의를 일부 밖으로 돌리세요. 물론, 나머지 주의는 내면에, <존재> 자체에 뿌리 내렸다는 느낌에 계속 기울입니다.
앞으로는 이 실습을 눈 감지 않은 채 언제 어느 곳에서든 수행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교통이 꽉 막힌 상황에서도 안달하거나 지루해하는 대신 내면에 뿌리내리는 연습을 하면 되겠지요.
이렇게 하면, 우리네 인식과 지각이 순간적으로 바뀌어서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주의를 몸 안으로 집중하지 않고 몸 밖으로 기울이거나 기껏해야 머릿속에 붙잡아두는 사람들이 많아요. 주의를 그렇게 분산하면, 힘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허비하는 꼴이 되어요. 외부 자극에 계속 반응하다가 자제력을 잃으면서, 문자 그대로 ‘뚜껑 열리는’ 상태에 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내면에 뿌리내림으로써 상황을 정반대로 바꾸게 되니…
이제, 세상이 우리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 힘을 집중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서 벗어나 사실상 진정한 불멸의 본질을 얻습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세상살이를 계속하는데, 이 생활도 이젠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됩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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