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노”라고 말한다면… 자신의 <참된 나>가 그렇게 말하게 해야 돼요.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잃지 말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에 빠지지 않아야 해요.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것 속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돼요. 즉,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열 받아서’ 마구 늘어놓지 않게 되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며, 감지하는 것만 정확하게 표현하게 될 거예요.
상대에 대한 자신의 태도며 자기감정, 자신의 바람, 상대에게 동의 여부 등을 표현할 수 있고 해야 돼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 용인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얘기 나눴지요?
상황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분명히 의식하세요.
어떤 관계들이 내 방향이나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현실이 무엇이며 형세가 어떤지를 살펴보세요.
단, <거짓된 나>의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 볼 게 아니라 <내면의 목격자>의 눈으로 보아야 해요. 그때 우리는 그 사안과 관련해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한 질책이나 비난을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이건 우리의 감정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또 자기감정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탓하기 시작한다는 뜻은 아니야. 나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실습 51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불만이 있다면, 그걸 혼자 조용히 알도록 하세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서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한 뒤, 이 불만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바라보세요.
이 불만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를 의식합니다.
혹시… ‘이 감정은 내 <고통의 몸체>에서 파생된 것은 아닌가, 이 가까운 사람의 행동은 그저 ‘방아쇠’가 됐을 뿐이고.’
하여튼 이 감정들을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분류해 보세요.
‘내가 느끼는 것은 구체적으로 뭐지? 모욕감이야? 노여움? 과소평가되고 무시당했다는?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이 감정들을 인식하고 이해했을 때, 이 감정을 두고 가까운 사람과 얘기할 기회를 찾으십시오. 물론, 적절한 시점을 찾고 그 사람이 내 말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돼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겠지요.
확인해야 할 게 또(!) 있습니다.
‘지금 난 차분한 상태에 있고, 내 <고통의 몸체>가 이 순간 꿈틀거리지는 않나?’
주의와 눈길 일부를 내면에 유지하면서 거기에 (내 안에) 고요와 평정이 간직돼 있는지 살펴보세요.
이렇게 준비가 다 됐을 때, 자신의 감정이며 심적 체험을 그 가까운 사람한테 차분하게 말하면 됩니다. 단, 단어 하나하나에, 심지어 억양에도, 질책이나 비난의 기미가 전혀 없게끔 말해야겠지요.
부정이 담긴 말을 해야 할 때는 ‘나’라는 대명사로 어구를 시작하세요.
“넌/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X)
“나는 당신의 그런 행동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 (O)
지금 당신은 자기감정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이런 공식은 상대의 공격을 예방합니다. 즉, 상대방 <고통의 몸체>가 활성화되면서 대응하여 공격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은 관계를 차분하게 거론하고 평화롭게 서로 이해할 기회를 얻게 될 거예요.
고통의 몸체 둘이 맞부딪칠 때는 소통 당사자들 그 누구도 상대방의 말을 듣고 이해할 겨를이 없어요. 각자 자기 고통의 몸체 때문에 눈멀고 귀먹게 돼요.
이런 상황에선 각자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고통의 몸체를 상대한다는 게 맞을 거예요. 고통의 몸체가 차단막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습니다.
만약 자신의 반응이며 감정을 의식적으로 살핀다면, 고통의 몸체는 녹아 없어집니다.
그때 마침내 우리는 고통의 몸체를 거치지 않고 진정 마음과 마음으로, 영혼과 영혼으로 소통할 기회를 얻어요. 그러려면…
1)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2) 경청하는 법을 익히고
3) 상대방을 질책하거나 상대방 비난에 맞대응하지 않으면서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방 행동에 눈을 감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렇게 한다면, 그건 무자각 상태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 행동을 진정한 관점에서 보고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알고 이해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특히, ‘이 사람은 나빠’,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지?’ 등등 감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렇게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요. 돌아가는 게 다 눈에 들어오고 상대방 행동이 훤히 보이는데, 그 행동이 나한테 해를 끼치는데도, 어찌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우리한테 아픔이나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은 상대방의 <진정한 나>가 아니라 상대방의 <거짓된 나>와 에고임을, 특히 상대방 고통의 몸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건 그 사람을 그의 고통의 몸체며 <에고>며 <거짓된 나>와 동일시한다는 뜻이겠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에고며 <거짓 나>며 고통의 몸체와 동일시하기를 멈춰야 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의 고통의 몸체가 우리를 공격한다 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멈추기가 더 쉬울 거예요. 우리는 진실한 장면만 보게 되겠지요. 상대방 고통의 몸체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눈 감지는 않아도.
현재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면서, 깨어 있는 의식을 늘 간직하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의 고통의 몸체가 퍼붓는 공격에 거리를 둘 수 있을 거예요.
또 부정적인 감정에 굴하지도 않게 될 것이며, 이건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에요.
결국, 판단이라는 것도 대응공격과 다를 바 없는 것이잖아요? 하다못해 속으로만 그렇게 한다 해도 말이죠.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고 명확히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감정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태연자약도 여기서 나오겠지요.
실습 49
어느 하루 날 잡아서 이런 점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세요.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생각이 나한테 들지는 않나?’
심지어 자신을 판단하는 생각까지도 추적하세요.
그런 생각들은 저절로 몰래 기어들거나 불쑥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인간 사회에서는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습관이 아주 널리 퍼져 있어서, 이게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 이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거야.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한다 해서 나쁠 게 뭐 있겠어? 다들 그렇게 하는데’ 하고 여기기 쉬워요.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표준도 규범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의식해야 합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우리는 누구한테나 <참된 나>가 있다는 점을 잊어요.
판단과 평가를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거짓된 나>와 같게 보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가 고통의 몸체 같은 것이요 우리가 바로 <에고>라고 인정하는 셈이에요.
하지만 고통의 몸체와 <거짓된 나>의 발현은 사람의 참된 본질과 하등의 관련도 없어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의식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세요.
항상 경계심을 품고 매 순간에 충실히 현존하면서 자신의 비판적인 생각들을 일일이 추적하세요.
전혀 해롭지 않은 판단도, 그런 기미까지도 주의하여 살펴보세요.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을 죄다 적어 둔다면 더 좋을 거예요.
저녁에 그 목록을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주 낙인을 찍었나, 그들에게 라벨을 붙였던가, 사소한 것들을 두고도 평가했구나’ 하고 놀라게 될지도 몰라요.
에고 모드의 의식이 마지막 붕괴 단계에 접어들면서 남녀 관계는 인류가 지금 처한 위기 상태를 고대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됨에 따라 인간관계 대부분이 <존재>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원천으로 바뀌면서 각종 문제와 갈등에 지배되고 있다.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도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필요로 해요.
이건 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인간관계가 왜 그리도 드문가요?
대다수 사람들한테 행복과 기쁨과 사랑의 순간들은 어째서 그렇게 드물며, 그런 순간들조차 또 왜 아주 쉽게 아픔이나 분노, 짜증, 서운함, 불쾌함으로 바뀌는 건가요?
왜냐하면, 자신의 <참된 나>에 머물러서 다른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기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거짓된 나>들의 접촉이고 어울림입니다.
이건 둘이나 그 이상의 <에고>가 만나는 거예요. 에고들이 접하는 곳에서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에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인간관계가 오늘날처럼 아픔과 갈등으로 가득한 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인류가 처한 크나큰 위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기존의 정치와 경제, 사회 구조를 생성한 에고 모드의 의식이 결국엔 붕괴되고 만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계속 존재하려면 인간의 의식이 바뀌어야 해요.
인류가 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은…
영적 동면 상태에서 벗어나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하기를 꿈꾸면서 맺는 관계들이 어찌하여 끝에 가서는 큰 아픔을 안기는 것인가요?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추구하면서 거짓된(잘못된) 동기를 지침으로 삼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인간관계가 없으면 헛헛하거나 비참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요. 그래서 자기네 삶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 부족한 온전함을 채우고 행복을 안겨 주리라 기대해요.
바로 여기에 오류가… 그 뒤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뿌리가 있어요.
진정한 행복은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잖아요?
그걸 다른 이들한테서 기대할 필요가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는데 말입니다.
만약 지금 여기에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하고 있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서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게 돼요.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죠.
‘음, 나한테 지금 어떤 문제가 있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백마 탄 왕자만 만나기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이것도 착각이에요.
시간은 문제를 절대 해결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새로운 문제를 자꾸 양산하기만 합니다.
시간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고 현재 순간과 결합되어야만 (그래서 현재에 충실해야만), 파트너가 있든 없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독자적인 상태에 들어설 때, 진정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비로소 생길 겁니다.
왜냐하면, 독자적일 때…
즉, 곁에 누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행복함을 느낄 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모든 갈등과 불화와 아픔이며, 애정이 증오로 변하는 모든 경우는 파트너들이 서로에게 집착하고 중독됐다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한데, 만약 내 행복의 원천이 다른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가 어렵지요! 자기도 모르게 매달리고 집착하게 돼요. 그러면… 어떡하든 상대를 붙잡으려 애쓸 터이며, 쩍하면 질투하고 의심하고 비난하고, 내 기대에 부응하라고 상대에게 요구하겠지요. 그러면… 상대는 저항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잖아요? 서로 아끼고 서로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서로에게 아픔과 고통만 키우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예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내 행복의 원천을 다른 사람한테서 볼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는 것!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냥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순수하고 사심 없고 진정 성스러운 사랑으로 말이죠! 그때 우리는 상대가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고 할 것이며, 혹여 그 상대가 우리 인생에서 사라진다 해도, 행복의 원천은 우리한테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될 거예요.
행복의 원천이… 우리 내면에 있는 한, 그걸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한테서 빼앗을 수 없다.
실습 47
눈을 감고 <지금> 순간으로 들어서서,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고, <참된 나>에 뿌리를 내리세요.
당신은 내면 공간에서 에너지를 느낍니다.
이건 생생한 삶의 에너지에요.
이건 <존재>가 만들어 냈으며 일정한 형태가 없고 시간을 초월한 삶이에요.
이것이 그저 삶의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라고 상상하세요.
이제 당신 내면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채워졌어요.
이 에너지는 <존재>라는 영원무궁한 원천에서 나와요. 이 원천은 마르는 법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가득 채우는 사랑도 결코 메마르지 않을 거예요.
만약 이것이 그냥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임을 절실히 깨닫는다면, 사랑의 에너지가 원천에서 한층 더 강하게 나올 거예요.
이건 그야말로 순수하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그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는, 신성한 사랑이에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한테서 멀어질 수 없어요. 그 원천이 당신 안에 있는 걸요!
사랑의 원천에 깊숙이 뿌리 뻗어 거기서 단단히 뿌리 내린다고 상상하세요.
이 원천이 늘 당신과 함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세요.
이 원천이 당신에게 사랑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요.
당신은 이제 사랑을 어딘가 바깥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언제든 내면의 원천에 눈길 돌리기만 하면,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누릴 수 있어요.
당신 자신이 곧 사랑의 원천임을 늘 분명하게 의식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덜 기대하고 덜 집착하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과 더 건강하고 더 조화롭고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한 관계를 맺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인드가 과거로 미래로 잡아끌면서 우리를 착각과 망상에 빠뜨린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인드도 구체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마인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즉, 마인드를 우리 <내면의 고요>와 결합하고 <참된 나>와 동일시할 때!
알다시피, <참된 나>와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과정은 양립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생각이 (일절) 없는 상태와 사유 과정 양쪽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있어요.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가 그래서 필요해요.)
어떤 과제를 해결할 때, 이런 사고 형태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내면의 지혜와 <존재>의 이성으로써 검증하고 수정하게 되니까요.
우리네 마인드는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고, 논리는 우리를 실패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존재>의 이성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어. 하지만 만약 어떤 논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내면의 지혜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 있다. 이때는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와 <존재>의 이성이 공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습 46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과제를 생각하세요.
혹은, 어떤 의문점에 대해 찾고 싶은 답이라도 좋아요, 그걸 생각하세요.
이 과제나 의문점을 마음속에서 요약하세요.
다음에 주의를 자기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세요.
이제 우리는 평정 상태로 들어서면서, 갖가지 잡념이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작동이 멈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1~2분 그렇게 몰입하면 충분해요.
다음에 평소의 사고하는 방식으로 돌아오세요.
이제 생각이 더 밝고 선명하고 창의적이 된다는 점을 알아차릴 거예요.
과제에 대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억해 두세요. 적어 두면 더 좋습니다.
다음에 다시 <참된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 내면 깊숙이 몇 분 동안 침잠했다가, 다시 보통 생각으로 돌아오세요. 이때 여러 생각이 이리저리 헤매는 게 아니라 과제를 숙고하는 데 집중된다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일반적인 생각 모드에서 내면의 평정으로 몇 번 오가다 보면, 사유 과정에 새로운 특성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인드로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인드와 내면의 지혜와 몸과 에너지가 다 사유 과정에 포함되어 작동하지요.
이렇게 사유한 결과는 보통 생각 모드 때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겁니다.
이렇게 작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적어 두세요.
그 가운데 해결책을 몇 가지 적으세요.
거기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나중에 고를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순간을 믿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지혜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에고>가 극적인 사건들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생활 방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에고>인데…
이 에고는 일상의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보기를 꺼려하고, 과거의 모든 문제며 미래에 겁내는 것을 죄다 이 일상 상황에 붙들어 맵니다. 그 결과,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두려움이나 재앙이나 불행 따위가 들어섬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가로막습니다.
반면에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결합하면…
극적인 사건들이란 없으며 실제 삶만 있음을 알게 돼요. 실제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이며,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바꾸고 싶은 것은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에고>는 우리 삶의 여건을 부정적인 것 아니면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고 바꿉니다.
한데, 생활 여건이란 사실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데요.
동의하기 어렵다구요? 현재 순간에 들어선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전부 자신의 지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재앙과 불행 뒤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요.
어떤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늘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비롯해 바깥세상의 것은 다 환상적이며 덧없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안에만 있다. 이 내면의 행복 상태에 의거하여 산다면,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외부 상황에 자기 마인드가 보이는 반응에만 의존해 행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행동해서는 그 무엇에도 이르지 못하거나, 혹은 단기적인 만족만 얻을 뿐인데, 이 만족 뒤에는 똑같은 불행이 또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행동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움직여야지요.
하지만 이건 마인드가 아니라 현재 순간에 존재하는 <참된 나>가 지시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참된 나>만이 진정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거짓된 나>는 거짓 목표만 잡는다.
진정한 목표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인 목표란…
우리로 하여금 내면에서 <존재>의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이 자신을 통과하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열고 자기 내면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도움 되는 것이 전부… 진정한 내적 목표입니다.
내적인 목표들을 세우고 분발할 때, <존재>가 우리를 돕기 시작해요. 하지만 그런 목표들이 애초부터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세울 필요는 없어요. 그 내적인 목표들을 따라가는 즉시… 우리 앞에 길이 환히 열립니다. 사람이며 책이며 지식, 의문에 대한 답, 내적 지혜로 접근, 또한 필요한 물질적 이점까지… 필요한 것이 다 저절로 들어옵니다.
내적인 목표들을 좇는다 하여, 외부 생활을 중단하는 건 아니에요. 예전처럼 외적인 목표들을 세울 수 있고, 물질적인 것들을 즐기며 관능적 만족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이젠 우리의 행불행이 그런 것에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내면에 있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임을 우린 확실히 알고 있잖아요?
그밖에 나머지는 다 한낱 게임일 뿐이에요. 게임에서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어요. 그게 정상이에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기는 쪽에 베팅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패할까 봐 그리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설령 외적인 목표 달성에서 크게 낭패를 봤다 해도, 그걸 기회로 내면에서 <참된 나>와 <존재>의 빛을 발견함으로써 내적 목표 달성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 톨레는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외적인 패배가 내적인 승리로 바뀌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즉, (예를 들어, 부를 얻거나 출세하는 등) 외적으로 뭔가 성공한 사람이, 성공하고서도 영적 측면에서는 가난뱅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설파한 것이죠.
“사람이 세상을 다 얻고도 제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마가 8:36).
우리는 바깥세상을 완전히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 목표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어요. 이때 최상의 선택은…
“이걸 원해, 저걸 갖고 싶어. 아니, 저것도 하고 싶어” 하고 속삭이는 <에고>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꼭 필요한 목표들만 추구하는 겁니다.
영양가 없는 목표들은 세우고 추구해 봤자 계속 안달하면서 정신없이 쫓아다니는 것 외에는 남는 게 없을 거예요.
그런 삶을 피하려면, 무위라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무위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니에요.
무위(無爲)란… 제 생각이나 힘을 섞어서 무리하게 목표를 잡지 않고 인생이 건네는 과제들을 삶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하는 상태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순간순간 최선의 방법들을 속삭이고 성공의 문으로 이끌면서 행복의 기회를 건넨다. 그러나 이 기회는 <지금> 순간에 있는 사람만이 보고 활용할 수 있다.
삶이 제시하는 이 행복한 기회들을 따르는 것이 바로 무위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나>의 목표를 좇는다면, 헛되이 바쁘기만 해서 성공의 문이 열려 있는 것도 보기 힘들어요. 이 문들이 때론 아주 가까이에 있어요. 늘 현재에 있어요. 과거에 갇혀 있거나 미래에 지나치게 눈길 돌리고 있다면, 당연히 이 문들을 못 보고 행복해질 기회를 놓치겠지요.
사냥꾼처럼 <지금> 순간에 머물면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행복의 기회를 추적해야겠어요. 그러면 부주의하거나 산만해지지 않고, 그 덕분에 늘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곳에 있게 될 겁니다.
실습 44
미리 어떤 목표를 잡지 않고 계획도 없이 그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며 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행하기만 한 적이 있었나요? 누구나 살면서 그 비슷한 것을 한 번이라도 겪어 봤을 거예요. 그런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달리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한 발 앞서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고 그저 매 순간만 따르면서 뭔가를 자연스럽게 저절로, 혹은 직관적으로 행한 경우 말이에요.
예를 들어,
1) 아주 복잡하고 꽉 막힌 도로에서 끼어들기 같은 걸 아예 단념하고 다른 차량들 흐름이나 신호등에 맞추어 자동차를 몬 적이 있지 않겠어요? 혹은,
2) 여럿이 함께 운동하거나 춤을 출 때도 (전체적인 틀은 있겠으나) 순간순간을 계획하면서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아니면,
3) 잘 안 풀리던 문제의 해결책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산책하거나 누구와 대화하는 중에 퍼뜩 떠오른 적이 있었을 거예요.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이 어땠나요? 그 느낌이 중요해요.
“어, 꽉 막힌 도로에서 용써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니까 외려 마음이 편해지던 걸.”
“팀원들 속에서 그때그때 그들 움직임에 맞추니까 더 신나던 걸.”
“영감이 번쩍 찾아드는 순간, 날아갈 것 같았지, 뭐.”
그런 느낌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게 잘 풀렸을 겁니다.
비록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잡지 않고 각 단계에서 어찌어찌 하겠다 구상도 안 했는데 말이에요!
별 생각 없이, 이른바 순리에 따른 것이에요.
이게 바로 무위 상태인 것이니…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긴 하는데, 그게 마치 자연발생적으로 수행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뤄지는 느낌이 들어요. <존재>와 하나가 될 때, <존재>는 그렇게 작용합니다.
이제 눈을 감을까요.
그런 순간들에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리면서 그 상태로 다시 들어서는 겁니다.
생각은 필요 없어요, 죄다 내려놓고, 현재 순간에 머물면서 그때의 느낌을 (혹은, 감각적 체험을) 좇아가세요.
그리고 자신의 상태에 집중하면서,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상상하세요.
이 순간의 바람이나 갈망은 <참된 나>가 가리키는 진짜일 거예요. 그걸 따르면 되겠어요.
만약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직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그것이 올바른 목표와 갈망, 나아갈 방향을 속삭이게 하세요.
그녀는 젊어서 아주 예뻤고,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노년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감도 사라졌고, 그러자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여기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자기 외모와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했다면…
자신의 노화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지켜볼 뿐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을 발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깥 껍질을 통해 한층 더 빛났을 것이며, 그 결과 외적 형태의 (육체의) 노화 과정이 더 늦춰질 수 있었겠지요.
한마디로, 에고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 행복에 뒤이어 그 반대되는 것이 늘 따라붙게끔 설계돼 있어요. 즉, 만약 오늘 뭔가를 얻어서 행복하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그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승 뒤에는 늘 하강이 뒤따르고, 그러다가 또 상승하고 또…
세상살이가 실제 그렇지 않나요? 여기에는 영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 오면 그 뒤에는 늘 그와 전혀 다른 것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때…
즉, 외적인 뭔가로 이뤄지거나 얻는 행복을 추구할 때…
사실은 환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복은 어차피 사라지며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 텐데, 그걸 얻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많이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행복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게 됐다시피) 시간이 환상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행복과 불행이 같은 것이라고? 저런, 무섭고 끔찍해라!” 이런 느낌이 드나요?
하지만 더 알고 나면, 여기에 나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며 Up과 Down이 있어요. 꽃이 피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생도 그래요. 이게 자연스럽고 정상이에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노파심이 좀 드는군요. 혹시…
‘흠,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것이며, 어차피 안정된 진짜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외적인 뭔가를 얻고 이루려고 온힘을 쏟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요?
지금 우리 얘기가 세상사에 무관심이나 반감, 무노동, 무위도식 혹은 나아가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진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원천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요 우리의 <참된 나>입니다.
이건 그 무엇에도 전혀 좌우되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에요. 마르지 않는 행복 샘이에요.
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내면의 <존재>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바깥세상을 피해 움츠러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내면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힘과 가능성을 가외로 얻게 됩니다.
바깥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 이건 불필요한 목표에 힘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것만 얻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걱정근심 없이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실습 43
이 실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누워서 눈 감고 자신의 <내면의 몸체>로 가라앉으십시오.
그 에너지를 느끼세요.
이 내면의 <에너지 몸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합니다.
이 <나>를 에너지처럼 느끼세요.
즉, 형체가 없고 나이도 이름도 사회적 역할도 없는 무엇인가로 느껴 보십시오.
자기 몸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인식하세요.
이 몸이 녹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이 한층 더 가볍고 투명해져요. 형태를 잃고 공간과 하나 되어 완전히 무게를 잃습니다.
이때 당신의 <나>는 간직됩니다. 즉, 당신은 그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이 공간이 되고 공허가 되지만… <진정한 나>로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상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형태의 수준에서는, 형태들의 탄생과 소멸, 창조와 파괴, 성장과 하락이 있다. 이건 어디에나 다 반영되니… 별이나 행성, 천체, 나무와 꽃 등의 생명 주기에, 국가와 정치체제, 문명 등의 흥망성쇠에, 개개인 삶에서 획득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순환에 다 반영된다.
부처는 우리의 행복조차도 고뇌나 고통인 dukkha라고 설파했다. 행복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필히 따른다. 우리네 행복과 불행이 사실상 하나라는 의미이다.
<에고>가 세우는 거짓 목표들을 거부하라
“나한텐 목표를 달성하려는 끈기와 의지가 부족해.”
“앞으로 나아갈 동기가 충분치 않아.”
“난 좀 게으른데다가 과단성도 부족한가 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책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누가 이렇게 거세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거야?’
‘누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원하는 거지?’
‘누가 나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질주로 내모는 것이야?’
그렇게 자문해 보면… 대부분 경우 이런 대답이 나올 거예요.
“이건 <참된 나>가 아니라 <에고>가 그렇게 하는 거야!”
(자기도취, 이기심, 우월감, 지배욕 따위에 사로잡힌) 에고는 늘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건 놀랍지도 않은 것이… 에고는 현재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 결과, 차분하고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요. 에고는 늘 볼이 부어 있고,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고 싶어 합니다.
에고는 늘 우리한테 속삭이고 다그쳐요.
“해야 돼, 해야 돼! 이걸 해, 저것도 해! 여기로 와, 저기로 가,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더 빨리!!”
우리를 게으름뱅이라 부르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탓하며 욕하는 것은… 바로 <에고>입니다.
그러면 에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노출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다가 무심코 자기(에고)를 보게 될까 두려워서… 에고는 어떤 목표들을 향해 돌진하라고 재촉하면서 우리를 끝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분주한 상태에 잡아둡니다.
이런 입장이 혹자에겐 너무 앞서 나간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죠.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갈망이나 목표가 다 <거짓된 나>와 에고가 강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말고 그 무엇으로도 돌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한마디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거기서 삶이 멈추지 않을까? 우리 인류가 몽유병자 집단 같은 것이 되어서 활동할 생각은 없이 꼼짝도 않고 명상만 하는 건 아닐까?”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구상의 삶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끔’ 설계돼 있으니까요. 살려면 활동도 하고 세속적인 재화에 관심도 가져야지요. 물질이란 다 썩기 마련인 만큼, 우리가 보살피지 않으면 아주 빨리 쓸모없게 되잖아요? 게다가 세상살이 여건이 녹녹치 않아서, 우리에겐 먹을거리가 필요하고 악천후도 막아야 해요. 또한 우리는 최대한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기를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물론이고 생활 여건을 위해서는, 또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관심 기울이고 활동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지상에서 그냥 벌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지식 얻고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서점에 가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컴퓨터를 켜야 하잖아요?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인류가) 완전히 행동하지 않는 상태에는 이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행동하려는 충동이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참된 나>와 <존재>에서 나올 수 있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존재>가 우리를 인도할 때… 그때 우리 행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필요한 대로 정확히 해내면서도 힘은 훨씬 덜 소모합니다.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허겁지겁 움직이게 하지 않아요.
<존재>는 우리를 무의미한 목표와 행동으로 내몰지 않아요.
이런 짓은 에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자신의 <거짓된 나>에 의해 움직이는 까닭에 헛되이 부산떨고 무의미하게 행동하면서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요!
만약 <참된 나>가 항상 우리 행동을 주도한다면… 실패나 패배나 좌절 같은 것은 모를 겁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늘 얻으면서, 언제나 행복하고 평온하고 만족하는 가운데 자신이며 세상과 조화롭게 살 겁니다.
‘하아, 거 참 동화 같은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겨운 생활이며 파란만장한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거기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상에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실습 42
‘이것만 달성하면 난 행복해질 거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 그 기대가 적중했나요? 아니면, 웬만큼 채워졌나요?
- 결국에 정말로 행복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씁쓸함이나 실망 같은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진정 순수한 행복이었나요? 그 행복이 오래 가던가요?
- 예전 언젠가 이러이런 목표들을 달성한 것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는데, 그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적은 것 같지는 않았나요?
자신의 사례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면… 다른 이들의 경험을 참조해 보세요.
어렵게 이룬 행복조차 영원하거나 불변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행복을 열심히 좇아가 잡았는데 기대한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에도 주목하세요.
이번에는 그동안 살면서 있었던 이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세요.
즉, 그 무엇도 딱히 열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금 있고 존재하면서 행복 추구가 아니라 실존을 즐겼던 순간들을 기억해 보세요.
이를테면, 휴가 중에 누린 짧은 순간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요?
어쩌면 그건 원하던 목표를 이루면서 맛본 것보다는 더 차분하고 조용한 행복의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더 참된 진짜 행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지금 여기 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누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욕망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면,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제법 많다는 것을 안다. 인생에서 고통과 슬픔을 없애고 싶다면, 그런 경우에 승복할 필요가 있다. 있는 것을 수용하는 즉시 마인드와 동일시에서 벗어나며 <존재>와 다시 연결된다. 저항은 마인드가 하는 짓이다. 승복은 순전히 내적인 현상이다.
승복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 나 자신을 맡긴다는 뜻
우리네 마인드는 현재 순간에 저항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마인드가 현재 순간을 겁내기 때문이에요. 삶이 매 순간 새롭게 달라지기 때문에 현재라는 순간은 늘 새로운데, 이 새로운 것을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는 두려워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고 애써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도 역시 새로운 순간을 겁내고 거기에 저항하고, 그래서 현재 순간에서 떨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 순간에서 떨려난다는 것은…
삶에서 내몰린다는 뜻 아니겠어요?
게다가 현재 순간에서 떨려난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고통에 몰아넣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항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에 맞설 때, 우리에겐 불만과 고통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으로 에크하르트 톨레가 제시하는 것이…
<현재 순간 받아들이기>입니다. 이걸 배우기 위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그 개념을 더 깊이 알아볼 시간이 됐습니다.
그건… 현재 순간에 우리가 접하는 것이 전부 실제이며 그것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인정은 이성에서 더 많이 나올 겁니다.
현재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푹 잠겨 그 안에 머물면서 그것을 저항 없이 따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에크하르트 톨레는 수용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 개념을 더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승복이란 단어를 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승복을 우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힘겨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절대 굴하지 마, 단념하지 마!” 하고 말하는데, 이건 아주 적절하고 올바른 촉구입니다. 또, 자신의 훼손된 권리를 법적 근거에서 옹호하는 사람한테 “자네 입장을 포기하지 마, 양보하지 마!” 하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단어라도) 다른 맥락에서 쓸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는 존중하는 사람이나 연장자에게 길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돛을 달고 항해하거나 서핑을 한다면, 바람이나 파도의 힘에 굴할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길을 갈 때, 우리를 이끄는 권리를 강한 리더에게 맡기면서 스스로 길을 택할 권리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나 열정을 좇음으로써 외려 자유롭고 편안하며 삶의 흐름에 어렵잖게 올라탄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보니까, 양보나 승복이라는 개념이 자기 권리를 내던지거나 자신을 비하하는 등 뭔가 나쁜 쪽과 연관된 것만은 아니로군요. 사실, 세상 거의 대부분의 것은 상대적이지 않겠어요?
승복한다는 것이 마뜩치 않은 것을 따르거나 나쁜 뭔가를 꾹 참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정말 없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나쁜 것에 승복한다는 게 아니라…
현재 순간에 승복하며, 지금 여기 있는 것과 진짜 현실과 <존재>에 승복한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괴로워하고 불만이나 불안을 느낀다면… 이게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지금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고 있구나!’ 바로 이것입니다.
이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예요.
만약 삶에서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면, 우리는 바꿀 수 있어요.
참기만 하면서 계속 고통 받아선 안 돼요.
그러나 뭔가를 바꿀 수 있으려면…
먼저,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저항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하기를 멈추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원천인 <존재>에서 우리한테 힘이 들어올 테니까요. 게다가 저항이며 저항에 수반되는 부정적 감정에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지금>이라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임이요 거기에 거스르지 않음을 뜻한다. 만약 삶을 우리가 거기에 섞여 따라가는 흐름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현재 순간에 머무는 것은 찰나적인 느낌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실습 37
혼자 떨어져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으십시오.
주의를 내면으로 기울이고 <지금> 순간과 연결하세요.
자신을 파도라고 상상하십시오.
우리는 다 망망대해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드넓은 바다가 지닌 힘의 일부요, 바다에 깃든 평온함의 일부입니다.
그 힘과 평온함이 이제 파도가 된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끼면서, 우리는 해면을 따라 천천히 부드럽게 굴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는 우리로 하여금 불만이나 모욕감, 적의, 짜증, 초조함, 우울함, 나쁜 기분 등을 갖도록 자꾸 자극하고 도발합니다. 자기가 크기 위해 필요하니까요.
만약 달라는 대로 먹이를 준다면…
고통의 몸체는 거대해져서 우리 삶에 아픔과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겠지요.
아픔에서는 아픔만 나오지 않겠어요? 거기서 기쁨이나 행복, 성공이 나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고통의 몸체가 원하는 자양분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해요. 하지만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그러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늘 현재 순간에 머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어떤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부정적 감정들이 날뛰게 놔두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려면 어떤 상황에서 고통의 몸체가 도발하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추적해야겠지요.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상황들뿐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 역시 우리한테 도발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매스컴이나 서적, 영화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많은 이들의 <고통의 몸체>에 먹이를 주는 경우가 아주 잦습니다.
황색 언론과 티브이는 있는 그대로의 뉴스를 전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뉴스라는 형태로 부정적인 감정들만 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의 몸체한테 자양분이 됩니다.
(*이런 점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감지하는 이들이 뉴스 시청을 자연스레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 자신이 고통의 몸체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자양분을 자꾸 공급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 의식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살피고 의식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개인적인 고통의 몸체뿐 아니라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도 우리에게 아주 종종 영향을 끼친다고 말해요.
고통은 모든 인류의 집단 심리에 들어 있어요.
수많은 전쟁과 노예제, 탄압, 갖가지 폭력 등의 유산이고 잔재입니다.
인류의 힘겨운 역사 때문에 지상의 갓난애들은 다 이미 고통의 몸체를 웬만큼 갖고 태어납니다.
인간의 고통은 유전적으로 대물림됩니다.
모든 민족, 모든 국가, 모든 인종에게는 나름의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가 있습니다.
남자들에게도 여자들에게도 나름의 아픔덩어리가가 있습니다.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는 종종 매스컴이나 인터넷, 대중문화, 대중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작용해요.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빛과 진실을 가져다줘요.
그러나 집단적 고통의 몸체에 먹이를 대주기만 하는 대리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한테 들어오는 정보를 다 정신 바짝 차리고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집단적 고통의 몸체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어요. 그것이 우리한테 끼치는 영향을 의식하기 시작한다면 말이죠.
당신의 아픔덩어리가 외부 정보나 자극으로 인해 잠을 깬다 해도 자신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늘 조심하세요. 그러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각 상태에서 그런 선동적인 작용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자신의 주의를 기울여 변화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실습 35
어떤 종류의 외부 영향이 당신의 아픔덩어리를 잠 깨우는지 추적해 보십시오.
어떤 뉴스나 영화, 글 등을 대할 때 부정적인 감정을 맛보게 되나요?
무엇이 당신을 초조함이나 울적함, 좌절 상태에 빠뜨리나요?
어쩌면, 인터넷 소통, 혹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 혹은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을 망가뜨리고 상태를 나쁘게 만드는 듯한 뭔가가 있나요?
당신 고통의 몸체를 활성화하는 사건들이며 정보를 다 작성하세요.
개중에 무엇을 지금 당장 거부할 수 있는지 정하고, 그렇게 하세요.
만약 뭔가를 거부할 수 없다면 (예를 들어, 뭔가를 듣거나 읽어야 하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을 현재 순간에 완전히 머물면서 <내면의 목격자>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세요.
동정심과 연민 때문이라 여기면서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함께 끌려들어가는 상황을 특히 잘 살펴보세요.
당신의 연민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외려, 그 사람의 고통에 자신의 고통을 보탬으로써 고통을 배가하는 것이 되기가 쉽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금> 순간에서 인식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흐려지지 않은 객관적 장면을 본다면,
그게 더 큰 이로움을 안기는 거예요.
그런 경우, <존재>의 빛과 힘이 담긴 눈길과 주의를 광선처럼 거기에 돌림으로써 다른 이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어요.
그건 우리를 무자각 상태로 몰아가며, 심지어 우리한테 어떤 고통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게 만들려 할 겁니다.
어떤 고통이 우리한테 실제로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걸 몇 해 동안 끌어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진짜 충격일 수도 있어요. 그런 자각 자체가 종종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해요.
그래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왜냐하면, 고통의 몸체가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게 내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치유도 가능하니까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 내가 예전에는 이 고통의 몸체가 지시하는 대로 살고 행동했구나’
하면서 자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정말 몰랐으니까요.
<고통의 몸체>에 지배돼 저지른 행동을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예전에 행한 것은 전부 그것의 행위요 결정이요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의 횡포에 저항할 힘이 우리한테 부족했을 뿐이에요.
그러므로 자신을 꾸짖어선 안 됩니다.
자책과 자기비판에 빠지지 말아요.
죄책감을 안고 살면 안 돼요.
예전엔 우리가 본연의 삶 속에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가 우리를 지배한 것이라는 점만 깨달으면 됩니다. 즉,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의 몸체가 선택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책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 상황에서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이젠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진정 존재하는 사람이 됐어요.
자기 자신 안에 있고 현재 순간에 존재해요.
이제 우리는 일어나는 것을 전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 맞추어 의식하는 자각 상태에 있어요. 곧, 이젠 우리의 <참된 나>가 우리 삶에서 결정하고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렇게 하기 위한 힘이 이젠 우리한테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우리가 삶에 존재하지 않고 힘이 없음을 이용하여 고통의 몸체가 선택하고 결정했다면,
이젠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한테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주는 것이 바로 현재 순간이에요.
현재 순간에 있을 때, <존재> 자체와 그 힘에 접근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힘으로써 고통의 몸체를 이겨내고 과거의 고통들에 사로잡힌 현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어요.
당신 삶에 있던 극적인 사건이며 불쾌한 일이며 문제는 전부 고통의 몸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신을 비슷한 불행으로 잇달아 끌어들일 수 있다.
전형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볼까요.
아버지가 엄마에게 못되게 굴고 술독에 빠져 살면서 딸을 갖가지로 학대하며 폭력까지 휘두른 가정에서 한 소녀가 살았다면…
성인이 됐을 때 이 여성의 아픔덩어리는 아버지와 비슷한 파트너를 선택할 개연성이 아주 높아요.
만약 그녀가 이 아픔덩어리의 에너지를 자각의 빛으로 바꾸면서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유년기에 시작된 일련의 고통이 이후에도 계속될 겁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낯선 (괴물 같은) 에너지에 예속되고 지배받았기 때문에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이제 우리는 그런 것이 반복되지 않게 할 힘을 갖추었어요.
고통의 몸체가 언제 또 부정적인 감정을 들쑤셔서 우리를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 끌어들이는지 알아차리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겠다 싶으면 즉각 행동과 생각을 멈추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됐어, 그만. 여기에 끌려드는 건 내 의지가 아니야. 난 다른 건 선택할래.”
그렇게 자각된 자세를 통해 우리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아주 빨리 바꿀 수 있습니다.
실습 34
살면서 어떤 불쾌한 일이 생겼거나 뭔가 실패한 상황을 몇 가지 떠올리세요.
그런 상황을 우선 서너 가지라도 들어 보세요. 종이에 간단히 적어도 좋아요.
그리고 그 각각의 상황에 앞서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발생하기 전 자신의 상태를 기억하는 거예요.
기분이 어땠는지, 어떤 생각과 감정에 휩싸여 있었는지 등을.
‘아, 그래. 안 좋은 상황에 빠지기 전에 나에겐 부정적인 감정들이 상당히 컸구나’
알게 됐을 거예요. 이를테면, 두려움이나 초조, 긴장, 짜증, 적대감, 뭔가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었어요.
그 결과,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원치 않는 사건들에 뜻하지 않게 빠져들었어요.
바로 이 파도에 떠밀려 불상사나 실패나 문제에 부닥치게 된 것이었지요.
일련의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잘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대답해 보세요.
- 그때 나는 무엇을 하거나 하려 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었나?
- 그때 난 자제할 수 있었나?
- 어떤 걷잡을 수 없는 힘이 나를 마구 내몬다는 느낌은 없었나?
-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고 나중에 자신에게 말하진 않았나?
만약,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에 휩쓸려서 바람직하지 못한 뭔가에 끌렸다면…
그건 고통의 몸체에 조종당했다는 표시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각을 잃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한 것이에요.
어쩌면, 당시에는 우리한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달리 행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사실, 선태의 여지가 없었던 건 맞아요. 왜냐면 그 상황에서는 우리의 <참된 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가 대신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고통은 새로운 고통을 낳기만 할 뿐이지, 다른 것은 전혀 낳을 수 없어요.
그 상황을 다 이제 <참된 나>와 <내면의 증인> 입장에서 차례로 다시 살펴보세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세요.
판단과 감정의 프리즘을 거치지 말고 선입견 없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보세요.
그 각각의 상황에서 원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행동 버전을 몇 가지 찾으세요.
자신의 <참된 나>가 이끌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실제로 더 좋게 선택할 길이 몇 가지 있었음을 알게 됐을 거예요.
단지 <거짓된 나>의 눈으로 보는 동안엔 그 길들이 보이지 않았을 뿐, <참된 나>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보게 될 겁니다.
만약 지금 삶에서 긍정적인 선택을 못 보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도 <내면의 증인> 관점에서 살펴보세요.
이 퇴적된 아픔이 우리 몸과 마인드를 점령하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장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아픔덩어리, 혹은 고통의 몸체이다.
과거의 아픔이 몸에 만든 부정적 에너지장 감지
깨달음 상태에 있지 못하는 동안에는…
즉, 마인드나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존재>며 <참된 나>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든 스스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어요. 때로는 아무 이유나 근거도 없이 마인드가 그냥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아주 평온하고 쾌적한 상황에 있을 수 있는데…
하지만 갑자기 어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요. 우리 생각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거나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기 시작해요. 전자도 후자도 현실이나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으니…
걱정거리가 전혀 안 돼요!
그런데도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아픔과 고통의 에너지까지 만들어내고, 그 에너지가 우리 몸에 자리를 잡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우리네 몸에 나름의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몸은 합리적이에요.
그러나 또 뭔가를 아주 쉽게 믿기도 해요. 그래서 실제 상황을 생각하는 상황과 구분하지 못해요.
우리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마치 실제인 양 반응합니다.
심지어 따뜻한 침대에 편하고 안전하게 누워 있으면서도
‘흠, 뭔가가 나를 위협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한다면…
몸은 실제로 위협당하는 것처럼 반응해요.
그래서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나고 호흡이 불규칙하게 바뀌며 근육이 긴장해요.
그렇게 해서 몸은 에너지를 추가로 더 만드는데…
하지만 이 에너지는 그 어디로도 나갈 데가 없어요. 위협이 실제 벌어진 게 아니라 가상이고 허구니까!
출구를 찾지 못한 이 에너지는 독성을 띠고 신체에 축적되어 정상적인 신체 기능을 방해하게 돼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불안한 생각을 만들어 내고 긴장을 키워요.
안 좋은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해도 고통과 아픔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어요.
이 독성 에너지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우리 마인드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경우에만 생성됩니다.
그러나 <존재>에게는 이 세상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전혀 없잖아요?
우리의 <참된 나>와 <내면의 목격자>한테 그런 게 없듯이 말이죠.
오로지 있는 것이 있을 뿐이며, “좋네, 나쁘네” 하는 판단은 우리네 마인드가 일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고>의 삶이 아니라 <참된 나>의 삶을 산다면,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심지어 마인드가 나쁘다고 여기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든 다 필요하며 유용하고 ‘좋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목표들 중 하나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어 의식하는) 자각 상태의 제고라 하겠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인생에서 아픔과 고통을 더 이상 자초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픔, 고통 따위는… 쉽게 사라지고 증발될 수 없는 에너지임을 기억해 둬야겠어요. 이 에너지는 몸 안에 쌓여서 완전한 에너지 구성체를 만드는데, 이걸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통의 몸체> 혹은 아픔덩어리라 부릅니다.
고통의 몸체란… 부정적으로 충전된 에너지장으로서, 우리 심신을 점령할 수 있다.
고통의 몸체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휴면 상태와 활동 상태.
그것이 늘 활동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범죄자나 자살자가 나와요. 필사적인 영웅이나 진실과 정의를 위한 투사도 이 부류에 든다고 할 수 있어요. 또 알코올중독자나 마약중독자, 거지, 노숙자처럼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도 고통의 몸체에 늘 시달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잠자지 않는 고통의 몸체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행복이나 삶의 만족, 진정한 자기실현 등에 대한 희망을 늘 모조리 앗아갑니다. 그러나 줄곧 깨어서 활동 상태에 있는 <고통의 몸체>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한테서 그건 잠자고 있다가 눈을 뜨고 또 졸기도 해요.
고통의 몸체가 눈뜰 때…
아주 다정하던 사람이 갑자기 불쾌하고 못된 사람으로 바뀌거나, 혹은 낙천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우울하고 비관적인 불평분자로, 혹은 조용하던 사람이 시끄럽고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요.
고통의 몸체가 깨어났다는 징후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바깥에서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고통의 몸체가 잠깨는 순간을 추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본연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으로 변합니다. 헐크처럼 말이죠.
알아차리고 의식하고 추적하고 관찰하기… 오직 이 방법으로만 <고통의 몸체>를 다루어서 그것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도 바로 이 고통의 몸체가 심하게 횡포 부릴 때 나타나는 징후인데, 이걸 막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고통의 몸체는 자신이 발견되거나 노출되기를 아주 꺼리니까요. 그건 그림자처럼 빛을 겁내요. 그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몰래 숨어 있거나 위장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를 내서 그걸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각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의 몸체를 깨우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그것이 언제 돌출할지 알아내기가 더 쉽지 않겠어요? 결국, 그것이 제 스스로 그냥 잠을 깨는 게 아니라 어떤 ‘방아쇠’가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과거에 아픔을 야기한 뭔가가 떠오르게 하는 상황이 전부 이 ‘방아쇠’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
1) 부모가 생활비 같은 돈 문제로 자주 다투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은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얘기나 암시가 나오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혹은,
2) 어려서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친구가 약속 시간에 겨우 5분 늦은 걸 두고도 그 사람의 아픔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있는 이 고통의 몸체가 무엇에 반응하여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차린다면, 그것을 감지하여 다스리기가 더 쉬워질 겁니다.
실습 32
당신의 아픔덩어리가 어떤 상황에서 잠을 깨는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어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거나 그 비슷한 기미라도 나타나게 된다면…
고통의 몸체가 잠을 깬다는 신호이자 반증입니다.
갑자기 불만이나 짜증이 생기거나 화가 나거나 반감이나 혐오가 들거나 울적함을 맛본 적이 있나요?
자기도 모르게 기분 나빠진 적이 있나요?
그런 것이 때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생기기도 해요.
또 때로는 어떤 외부 원인 때문에 그런 상태에 빠지는 듯싶기도 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한 말에 기분이 상한 경우. 혹은 무슨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경우.
그런데… 그 외부 원인이란
우리 내면의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실제로, 같은 입장에서 같은 말을 듣거나 같은 실패를 겪었어도 기분 상하거나 화내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일 때문에 당겨질 ‘방아쇠’가 그에게 없다면… 안 그렇겠어요?
외부 상황이 우리 상처를 건드립니다.
과거에 우리한테 아픔이나 마음고생, 고통 겪게 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외부 상황이 당신한테 과거의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해 내려고 애쓰세요.
그렇게 하느라고 마음속에서 과거로 이동하여 거기 한참 머무르거나 갇힐 필요는 없어요.
이야말로 과거 경험을 도움 삼아 현재에서 뭔가를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경우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회상이 유용해요.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즉,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을 야기한 과거 상황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순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과 감정적 반응으로 흐려지지 않은 장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가장 자주 일어나며 어떤 방아쇠로 촉발되는지’ 끊임없이 추적할 때, 우리는 <고통의 몸체>를 더 경계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이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경각심을 가지면, 고통의 몸체가 당신을 지배하는 힘이 금방 몇 배 더 약해질 거예요.
2) 불안이나 걱정, 긴장, 압박감, 고심 등 모든 형태의 두려움은 다… 미래가 너무 많고 현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3) 죄책감이나 후회, 분노, 불만, 슬픔, 낙담, 괴로움, 갖가지 불용(不容) 등은… 과거가 지나치게 많고 현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왜 <지금> 순간에 들어서지 못하나
앞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금> 순간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현재 순간에 늘 몰입하여 침잠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겁낼 필요는 전혀 없어요. 뭔가를 익히는 단계에서 이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현재 순간에 몰입하지 못해서 두세 번 시도해도 안 되는 이들이 많아요.
그들은 내면에서 어떤 저항이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즉, <내면의 몸체>에 가라앉은 다음 그 상태를 통해서 <지금> 순간에 몰입하려 들면, 뭔가가 들여보내지 않거나 심지어 내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현재 순간에 대한 이 저항에 메스꺼움이나 현기증 같이 불쾌한 신체 증상이 수반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겼다 해도 <지금> 순간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한층 더 공들이는 계기로 삼아야겠지요.
중도에 어떤 장애물이 생겼다 해도 우린 극복할 수 있어요. 그럴 깜냥이 충분합니다.
그럼, 그런 저항이 왜 생기는지 살펴보지요.
당신이 느끼는 저항은 당신 안에 있는 특정 에너지가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인데,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라는 함정에 빠져 살 때, 그런 감정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심리적 시간’을 멈추고 <지금> 순간으로 옮겨가 살기로 마음먹을 때…
이 감정이 내면에서 저항하는 것이지요.
아,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화내기보다는 기쁘게 여기세요.
그런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 만큼, 거기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뜻이니까요.
만약 <지금> 순간에 침잠하려는데 내면의 뭔가가 저항한다고 느꼈다면… 우울해하는 대신 기뻐하라. 이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고 거기서 벗어날 계기이다.
먼저, 이런 감정이 나타나는 원인을 기억해 볼까요.
우리가 알게 됐다시피, 감정이란 전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판단, 평가, 해석 등을 두고 우리네 몸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한데, 생각이나 판단, 평가, 해석 등은 우리가 <지금> 순간에서 떨어져 나갈 때 생겨요.
이 때문에, 감정은 우리가 현재 순간 밖에서 ‘심리적 시간’에 빠질 때만 생길 수 있어요.
이 감정이 우리를 현재 순간 바깥에 잡아두기 원하여 거기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을 때론 불쾌한 신체 증상 형태로 드러내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에크하르트 톨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오로지 현재 순간을 부정할 때만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안이나 걱정, 긴장, 두려움 따위는 현재보다 미래를 더 많이 그리며 살 때 나타납니다.
또, 죄책감이나 불만, 회한, 분개, 침울, 비통, 불용서 같은 감정은 현재보다 과거에 더 매달려 살 때 나타납니다.
“아니, 부정적인인 감정이 전혀 없이 과연 살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아요.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태도 등이 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뿐임을 이해한다면…
그런 삶이 불가능한 건 전혀 아닙니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미 알다시피, 바로 이 감정들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를 버리지 못하게 하잖아요?
우리는 정말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 시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끊기만 하면 됩니다.
첫째, 현재 순간으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내던지기.
둘째, 부정적 감정 자체를 떨치면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내던지기.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떨치려 한다면, 그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한데, 이 사실을 <에고>는 부정할 겁니다. 에고는
‘너한테 부정적인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어’
하고 속삭일 거예요. 이것 역시 과거와 미래에서 현재 순간으로 옮겨오려는 우리네 열망에 에고가 저항하는 수법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거짓된 나>의 이런 어깃장을 이겨내고 실제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더 과감해지세요, 사실을 겁내지 말아요!
거짓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만, 진실은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곧 그걸 떨쳐낸다는 뜻 아니겠어요?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것과 동일시되기 쉽습니다. 그걸 인식하면, 즉시 거기서 분리되고 그것이 되기를 멈춥니다.
실습 27
혼자 조용한 곳에서 이렇게 자문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난 마음 편하고 즐겁고 만족스럽게 느끼나?’
만약, 진심으로 “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아, 내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있구나’ 여겨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자신을 탓하지는 말아요.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해서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다만, 현재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마인드의 농간에 빠져 있다는 뜻일 뿐이에요.
또 자문해 보세요.
‘난 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나? 내 안에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있나?’
이 물음에 대답을 생각하면서, 예리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관찰자가 되어 여러 감정을 그냥 살피기만 하세요. 당신을 썩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아주 사소한 징후라 해도, 여러 감정 상태와 안에서 꿈틀대는 에너지에 주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