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9. 선과 악마
코른이 서류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머리통들한테 문제라도 생겼소?”
“그건 아니고… 교수님과 할 얘기가 있어 왔습니다.”
코른이 안락의자 등받이로 상체를 젖혔다.
“말해 봐요, 마드무아젤 로랑.”
“브리케 머리에 몸을 붙여주시겠다는 게 진지한 생각인가요, 아니면 그저 그녀를 위로하려고 하시는 건지요?”
“아주 진지한 생각이오.”
“그 수술이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이지. 당신도 개를 봤잖소?”
“한데 톰에게는 제의하시지 않나요? 다리를 붙여준다고…”
로랑이 에둘러서 말하기 시작했다.
“못할 게 뭐 있소? 그도 벌써 나한테 간청했지만, 차례를 기다려야지.”
로랑의 말이 갑자기 빨라지고 고르지 않게 나왔다.
“그러면 도웰 교수님한테도… 물론 톰과 브리케를 비롯해 누구나 인간답게 정상적인 삶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물론 잘 이해하고 계시지요. 도웰 교수의 머리가 당신의 다른 머리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점을… 만일 톰과 브리케를 정상적인 존재로 되돌리려 하신다면, 도웰 교수님의 머리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코른이 얼굴을 찌푸렸다. 경계심 때문에 안색이 굳어졌다.
“도웰 교수에게,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의 머리에게...” 그 단어에 비웃음이 섞였다. “당신 같은 훌륭한 변호인이 생겼군. 그러나 변호인 따위는 필요 없고, 당신도 쓸데없이 열을 올리고 흥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나도 도웰의 머리를 소생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거기부터 시작하지 않는 겁니까?”
“왜냐하면 도웰의 머리가 다른 수천 개 머리들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오. 브리케의 머리에 몸통을 붙이기 전에 내가 개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소? 브리케의 머리가 개의 머리보다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도웰의 머리가 브리케의 머리보다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에...”
“사람과 개의 목숨은 비교가 안 되지요, 교수님…”
“도웰과 브리케의 머리도 마찬가지야. 할 말이 더 있는 거요?”
“아니, 없습니다, 교수님.”
로랑이 대답하고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다면, 마드무아젤, 내가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 보겠소. 기다려요, 마드무아젤.”
로랑이 문가에서 발을 멈추고 코른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
“여기, 테이블로 와서 자리에 앉으시오.”
로랑이 당혹스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안락의자 끝에 몸을 걸쳤다. 상대의 안색으로 보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코른이 안락의자 등받이로 상체를 던지고 탐색하는 눈초리로 로랑을 오랫동안 주시했다. 집요한 눈길을 그녀가 피하자, 큰 키를 재빨리 일으켜서 책상에 주먹을 대고 로랑에게 고개를 숙여 최면을 걸듯이 은근하게 물었다.
“말해 보시오, 도웰 머리에 있는 공기 밸브를 작동시키지는 않았소? 그하고 무슨 얘기를 나눈 건 아니오?”
로랑이 손가락 끝에서 한기를 느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처럼 맴돌았다. 코른으로 인해 생긴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로랑이 망설였다.
‘오오, 이 사람 낯짝에 ’살인자‘라는 말을 내뱉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대들다가는 일을 그르치고 말 거야.’
로랑은 코른이 도웰에게 새 몸통을 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렇게 믿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단 하나, 도웰의 연구 성과를 가로챈 코른을 의학계에서 매장하고, 만천하에 그의 범죄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코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며, 그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코른의 범죄를 폭로하기도 전에 자신이 파멸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과 양심으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제 내면의 동요가 극도로 커졌다.
코른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놀리듯이 말했다.
“거짓말할 생각일랑 아예 거두시오. 그런 죄를 지어서 양심을 괴롭힐 필요는 없지. 머리통하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소? 잡아떼지 마시오, 다 알고 있으니까. 나의 충실한 하인 존에게 귓구멍은 괜히 있나…”
로랑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통하고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단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을 뿐이지.”
두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로랑이 고개를 쳐들고 코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자초지종을 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전부 다 들었다고!”
코른이 여전히 두 주먹으로 책상을 짚은 채 나직하게 으르렁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랑이 다시 눈길을 떨어뜨린 채,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코른이 돌연 문으로 달려가더니 열쇠를 돌려 잠그고는, 뒷짐 진 채 부드러운 양탄자 위를 몇 바퀴 돌았다. 그러다가 소리 없이 로랑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거지, 귀여운 아가씨? 피에 굶주린 괴물 코른을 법정에 넘기려고?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고? 그의 범죄를 폭로하겠다고? 필경 도웰이 그런 짓을 부탁했겠지?”
마지막 말에 로랑이 두려움도 잊은 채 적극 항변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도웰 교수의 머리에 복수심이라는 건 전혀 없어요, 정말입니다. 오오, 그분은 고결한 영혼이에요! 그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만류했습니다. 그분은 당신하고는 전혀 달라요. 자신을 잣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도전적으로 말을 맺었다.
코른이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집무실을 바장였다.
“그래, 그래,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기어이 폭로할 생각이었는데, 도웰의 머리가 말렸다 이거지? 흠, 그렇지 않았다면 코른 교수는 벌써 감옥에 들어갔겠군. 설령 덕행이 이길 수 없다 해도 죄업은 어떻게든 징벌을 받는다! 당신이 읽은 소설들은 다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안 그렇소, 귀여운 아가씨?”
“악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녀가 이제 감정을 거의 억누르지 못하여 언성을 높였다.
“아, 그래, 물론, 저기 하늘나라에서 그렇게 되겠지.”
두터운 흑단을 바둑판무늬로 댄 천장으로 코른이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여기 지상에서는 죄업이 승리한다는 것을, 악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순진한 당신도 이제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선은… 착하게 사는 자들은 거리에서 손을 내밀고 구걸이나 하거나, 아니면 저기 있는 물건처럼 쭈그리고 있게 되는 거야.”
코른이 도웰의 머리가 놓인 방 쪽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까마귀들을 쫓는 허수아비처럼, 지상의 모든 것이 덧없다고 곱씹으면서 말이야.”
그러고는 로랑에게 바짝 다가서서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이런 거 아나?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과 도웰의 머리를 문자 그대로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귀신도 모르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범죄적 행위라도? 잘 알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
코른이 다시 방안을 바장이면서 이젠 혼잣말처럼 평소의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근데 복수에 불타는 귀여운 당신을 어떻게 처리해야지? 유감스럽게도, 아가씨는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으며 진실을 위해서는 고통의 화관도 기꺼이 쓸 준비가 된 부류로군. 연약하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어지간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단 말이야. 당신을 죽여야 하나? 오늘, 아니 지금 당장? 난 살인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좀 법석을 떨기는 해야겠지. 한데 내 시간이 아까워. 매수를 한다? 이건 위협하기보다도 더 어렵고… 그래, 내가 아가씨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지금 이런 얘기를 없었던 걸로 해요… 아직까지 당신을 고발하지는 않았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건가?”
로랑이 한순간 망설이다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발할 겁니다.”
코른이 발을 굴렀다.
“으음, 고집불통 아가씨로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이제 내 책상에 가서 앉고… 겁내지 마시오, 아직은 목을 조르지도 않고 독약을 먹일 생각도 없으니까. 자, 어서 앉아요.”
로랑이 영문을 몰라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책상 앞 안락의자로 옮겨 앉았다.
“어찌 됐든 당신은 나한테 필요해. 지금 당신을 없앤다면 남자든 여자든 다른 조수를 또 구해야겠지. 새로 들이는 자가 도웰 머리의 비밀을 알아낸 뒤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내는 악당이 아니란 보장이 없어. 그럴 바엔 차라리 아가씨 같은 사람과 상대하는 게 더 편해. 자, 받아 적으시오. 소중한 어머니, 혹은 집에서 부르는 대로 적어요, 내가 돌보는 환자들의 상태가 안 좋아서 당분간 코른 교수의 자택에 계속 있게 됐어요…”
“내 자유를 박탈하려는 겁니까? 여기, 이 집에 감금하려는 겁니까?”
로랑이 펜을 쥔 채 발끈하여 물었다.
“바로 그거야, 나의 착한 조수여.”
“이런 편지는 쓰지 않겠습니다.”
로랑이 단호하게 밝혔다. 그러자 코른이 벽시계 스프링이 울릴 만큼 고함을 내질렀다.
“됐어, 이제 그만! 나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모르나?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게.”
“나는 당신 집에 남지도 않을 것이고, 이런 편지도 쓰지 않을 겁니다!”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좋아. 아가씨가 무슨 짓을 해도 좋아. 그러나 여기서 나가기 전에 내가 어떻게 도웰의 머리에서 생명을 빼앗고 그 머리를 화학 용액에 담가 녹이는지를 보게 될 거야. 나가게, 나가서 사방팔방 다니며 ‘난 코른의 집에서 도웰의 머리를 봤어요!’ 하고 외쳐 봐. 그런 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다들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야. 그러나 조심하게!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자, 얼른 가게, 나가 보시라고!”
코른이 로랑의 팔을 잡아 문으로 끌고 갔다. 그 거친 습격에 저항할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코른이 문을 홱 열고 톰과 브리케의 방을 잽싸게 지나쳐서 도웰 교수의 머리가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도웰의 머리가 난데없는 방문에 어리둥절했다. 코른이 머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기구들 쪽으로 성큼 다가가서 혈액을 공급하는 용기의 밸브를 사납게 돌려 잠갔다.
내막을 모르는 머리의 두 눈이 평온하게 밸브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위협적인 코른과 아연실색한 로랑을 바라봤다. 공기 밸브가 닫혀 있기 때문에 머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머리와 비언어적 소통에 익숙한 로랑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건 “이제 끝장인가?” 하는, 소리 없는 물음이었다.
머리의 두 눈이 로랑에게 쏠렸다가 흐려지는 듯했다. 동시에 눈꺼풀이 넓게 열리고 동공이 부풀어 올랐으며,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며 수축되기 시작했다. 머리는 호흡곤란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로랑이 히스테리 환자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면서 코른에게 다가가더니 팔에 매달려서 거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날카롭고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세요, 밸브를 얼른 열어요… 하라는 대로 다 하겠어요!!”
코른이 엷은 냉소를 지으면서 밸브를 열었다. 생기를 불어넣는 공기 흐름이 관을 타고 도웰의 머리로 흘러들었다. 얼굴의 발작적인 경련이 멈추고 두 눈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으며 눈길이 밝아졌다. 꺼져가던 생명이 도웰의 머리로 되돌아왔다. 의식도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왜냐면 도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니, 심지어는 낙담했다는 표정으로 로랑을 다시 바라보았으니까.
로랑이 동요하여 비틀거렸다.
“내가 부축해 주겠소.”
코른이 중세 기사처럼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기묘하게 보이는 남녀가 방을 나갔다.
서재로 돌아와 로랑이 책상 앞에 앉자 코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우리가 어디서 멈췄지? 그래… ‘환자들의 상태로 보아 내가 늘 여기 있어야 되겠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이렇게 써요. ‘코른 교수의 자택을 잠시도 비울 수가 없게 됐어요. 코른 교수는 아주 좋은 분이어요. 나한테 정원으로 창문이 난 예쁜 방을 제공하고, 근무시간이 늘어났다고 급료를 세 배로 올렸어요.‘”
로랑이 무슨 헛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코른을 쳐다봤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오. 어쩔 수 없이 아가씨를 묶어두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보상을 해줘야지. 실제로 급료를 올리겠소. 자, 그 다음에 이렇게 적으시오. ‘여기 생활은 나무랄 데가 없고, 일이 많긴 하지만 내 상태도 아주 좋아요. 나를 보러 오지는 말아요. 교수님은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아요. 하지만 궁금하게 여기지도 말아요, 또 편지를 할 테니까…’ 됐소. 이제 당신이 평소 편지에 담던 애정의 표현을 덧붙이시오. 그래야 편지가 수상쩍게 보이지 않겠지.”
그러고는 이미 로랑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이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마냥 갈 수는 없어. 당신을 오래 잡아 두지도 않을 거야. 우리 연구는 막바지에 다다랐고, 완성되기만 하면… 즉, 머리가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머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러면 어떻게 될지는 당신이 잘 알지. 간단히 말해서, 내가 도웰과 함께 연구를 다 끝내면, 도웰의 머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거요. 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때 당신은 좋아하는 엄마한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때엔 아가씨가 나한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말하는데, 어디 가서 입을 놀리겠다고 고집한다면 난 증인들을 내세울 것임을 염두에 두시오. 필요한 경우 그들은 해부가 끝난 뒤 도웰 교수의 머리와 팔다리를 포함해 시신 전부를 내가 화장터에서 소각했다고 성서에 손을 얹고 증언할 테니. 이런 경우에 화장터가 아주 편리한 곳이지.”
코른이 종을 울리자, 곧 존이 들어왔다.
“존, 마드무아젤 로랑을 정원으로 창이 난 하얀 방으로 안내해라. 앞으로 일이 많기 때문에 마드무아젤 로랑은 내 집에서 머물 거야.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마드무아젤에게 물어서 다 챙겨 줘라. 상점들에 전화해서 내 이름으로 주문해도 좋아. 내가 계산할 테니까. 마드무아젤을 위해 점심식사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말고.”
코른이 자리를 뜬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닥이고 나갔다.
존이 로랑을 새 방으로 안내했다.
코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방은 실제로 아주 좋았다. 밝고 넓고 아늑하게 꾸며졌다. 커다란 창문이 정원 쪽으로 나 있었다. 그러나 이 아늑하고 단정한 방이 로랑에게는 가장 음울한 감옥보다 더 큰 우수를 안겼다. 로랑이 중환자처럼 힘겹게 발을 옮겨 창문으로 다가가서 정원을 내다봤다.
‘이층이야… 높아… 여기서 달아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설령 달아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녀는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탈주가 곧 도웰 머리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
로랑이 기진맥진하여 쿠세트(couchette)에 몸을 던지고 고통스러운 상념에 잠겼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꿈결처럼 존의 목소리를 듣고 천근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마워요.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그냥 내가세요.”
엄하게 훈련된 하인이 군소리 없이 지시를 따랐다.
그녀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길 건너편 건물 창들이 불빛으로 환해졌을 때, 그녀가 심한 고독감에 휘둘려서 당장 머리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도웰의 머리가 특히 보고 싶었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로랑이 들르자 브리케의 머리가 반색하여 소리쳤다.
“아아, 드디어! 벌써 됐나요? 가져왔어요?”
“무슨 말이지요?”
“내 몸통 말이에요.”
브리케는 마치 새 원피스 애기라도 하는 것 같은 투로 말했다.
로랑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가져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곧 될 거예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아흐, 더 빨리 할 수는 없을까!..”
“나한테도 다른 몸을 붙일 건가요?”
톰이 물었다.
“네, 물론이지요.” 로랑이 그를 위로했다. “당신은 예전처럼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이 될 거예요. 돈을 벌어서 고향 마을로 내려가 당신의 마리를 아내로 맞겠지요.”
로랑은 머리의 은밀한 소망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톰이 기분이 좋아져서 입술로 쪽 소리를 냈다.
“얼른 그런 날이 오기를.”
로랑이 서둘러 도웰의 머리가 있는 방으로 갔다.
공기 밸브를 열자마자 머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요?”
로랑이 코른과의 대화며 자신의 감금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로랑의 말이 끝나자 머리가 말했다.
“정말 괘씸한 작태로군! 내가 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가씨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텐데…”
머리의 두 눈에 분노와 결연함이 서렸다.
“아주 간단하오. 영양 공급하는 관을 닫아요, 그러면 내가 죽을 거요. 정말이지, 코른이 밸브를 다시 열어 나를 살려냈을 때 난 낙담하기까지 했다오. 이제 내가 죽으면, 코른이 아가씨를 집에 보내줄 거외다.”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로랑이 언성을 높였다.
“아아, 내가 키케로만큼 말을 잘한다면, 아가씨를 설득할 수 있을 텐데.”
로랑이 그렇지 않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키케로가 아니라 키케로 할아버지라도 나를 설득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 생명을 끊는 짓을 난 결코 용납하지 못해요…”
“한데, 내가 과연 사람일까?‘
우울한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가 물었다.
로랑이 위로하고 달래는 투로 대답했다.
“데카르트의 말을 교수님이 인용했던 것을 기억하세요. ‘나는 사유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그건 그래.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할 테요. 코른을 더 이상 지도하지 않겠소. 그 어떤 고문을 가한다 해도 더 이상 그를 돕지 않을 거요. 그러면 제 손으로 나를 끝장내겠지.”
그 말에 로랑이 안달이 나서 머리에게 바짝 다가섰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 말을 들어 보세요. 얼마 전까지 난 복수를 꿈꾸었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만약 코른이 브리케의 머리에 몸통을 접합하는 데 성공하고, 그런 수술 기법이 자리 잡는다면, 교수님도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희망이 있다는 뜻이에요… 코른이 아니라 다른 외과의사의 손으로 말이지요.”
“안타깝게도 그런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오. 코른도 그 실험을 성공하기 힘들게요. 그는 성정이 못되고 범죄적이며,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헤로스트라투스를 수천 명 합해 놓은 것처럼 헛된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이오. 하지만 외과의로서는 재능이 있고, 내 곁에 있던 조수들 중에서 능력이 가장 출중할 거요.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면서도 이 실험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누구도 못할 거라는 뜻이오. 하지만 그가 이 전대미문의 수술을 성공하리라고 난 확신하지 못하오.”
“그러나 벌써 개들을…”
“개들은 다른 문제라오. 머리들을 이식 수술하기 전에 건강하게 살아 있는 개 두 마리가 같은 탁자 위에 누워 있었지. 수술은 아주 빠르게 진행됐소. 그런데도 코른은 한 마리만 살릴 수 있었던 모양이오. 그렇지 않다면 자랑하려고 두 마리를 다 내게 데려왔을 테니까. 그런데 시신은 아무리 빨라도 죽은 뒤 몇 시간이 지나서야 가져올 수 있지 않겠소? 그때는 이미 부패가 시작됐을 수도 있는 게고. 수술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아가씨도 의사니까 판단할 수 있겠지. 그건 반쯤 잘린 손가락을 붙이는 것과 달라요. 정맥과 동맥, 그리고 중요한 건데, 신경과 척수를 다 면밀하게 연결하고 꿰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불구가 나올 테니, 그러고 나서 피가 돌도록 하고… 아아, 이건 정말 어려운 작업이오. 지금의 외과의들에게는 버거운 과제지.”
“교수님이 그런 수술을 다 해내시지 않았던가요?”
“나는 모든 걸 다 감안해서 개들을 대상으로 이미 몇 번 실험했다오. 지금 이런 꼴만 아니라면 아마도 성공했을…”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문턱에 코른이 나타났다.
“음모자들의 밀담인가? 당신들을 방해하지 않겠어.”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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