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2. 금지된 밸브의 비밀
마리 로랑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가 남긴 작은 재산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공부도 하고 가족 부양도 해야 했다. 몇 해 동안 신문사에서 야간 교정원으로 일했다. 의사 자격을 얻고 일자리를 찾기는 했는데, 헛수고만 한 셈이 됐다.
황열병이 기승을 부리는 뉴기니의 재난 장소로 가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병든 엄마와 함께 거기로 가는 것도, 엄마와 떨어지는 것도 다 원치 않았던 것이다. 코른 교수의 제의가 그녀에겐 탈출구였다.
괴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의 주저하지 않고 동의했다. 코른 교수가 사전에 그녀에 관해 면밀하게 뒷조사했다는 사실을 로랑은 알지 못했다.
코른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두 주가 됐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머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기구들을 낮 동안에 관리해야 했다. 밤에는 존이 교대했다.
코른 교수가 용기들 곁에 있는 밸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설명했다. 머리의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굵은 관이 나오는 큰 실린더를 가리키면서, 코른은 그 실린더 밸브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아주 엄하게 당조짐했다.
“밸브를 건드리면 머리는 즉사할 거요. 머리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체계와 이 실린더의 중요성을 조만간 설명해 주겠소. 일단 기구들을 다루는 법만 알아 두시오.”
하지만 코른은 설명하기를 서둘지 않았다.
머리의 콧구멍에 작은 체온계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정해진 시각에 그걸 빼서 온도를 기록해야 했다. 용기들에도 온도계와 기압계가 많이 달렸다. 로랑이 액체 온도와 용기들의 압력을 검사하고 확인했다. 잘 조정된 기구들이 제 시각마다 정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특별히 바쁠 일은 없었다. 머리의 관자놀이에 부착된 기구가 특히 예민하게 맥박을 표시했다. 하루 밤낮이 지나면 기록 용지를 갈았다. 용기들의 내용물은 로랑이 없을 때, 일터에 도착하기 전에 채워지곤 했다.
로랑은 점차 머리에 익숙해지고 친숙해지기까지 했다.
신선한 대기 속에서 걸어오느라고 아침에 두 볼이 발갛게 된 채 로랑이 들어서자, 그녀를 보고 머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으며 인사하는 표시로 눈꺼풀을 가볍게 떨었다.
머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와 로랑 사이에는 아주 제한적이긴 해도 일정한 언어가 곧 설정됐다. 눈꺼풀을 내려뜨리는 것은 ‘예스’, 치켜 올리는 것은 ‘노’라는 뜻이었다. 소리 없이 달싹이는 입도 조금 도움이 됐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요?”
로랑이 말을 걸자 머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꺼풀을 내려뜨렸다. ‘좋아요. 고마워요.’ 하는 뜻이었다.
“간밤엔 어떻게 보냈어요?”
역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을 걸면서 로랑은 오전에 할 일들을 민첩하게 처리했다. 기구들과 온도, 맥박을 확인하고 일지를 꼬박꼬박 적었다. 그 다음에는 알코올 섞은 물을 부드러운 스펀지에 묻혀서 머리의 얼굴을 아주 조심스레 씻고 탈지면으로 귓바퀴를 닦아냈다. 속눈썹에 걸린 솜뭉치를 떼어냈다. 눈과 귀, 코, 입도 닦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입과 코에는 특별한 관들을 집어넣었다. 머리도 빗어 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민첩하고 능숙하게 머리를 건드렸다. 머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랑도 상쾌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정말 날이 좋아요. 하늘이 그렇게 푸를 수가 없어요. 차가운 공기는 또 얼마나 상큼한지! 온 가슴으로 들이마시고 싶어지지요. 이제 봄기운을 물씬 머금은 태양이 얼마나 환하게 비치는지 보세요.”
도웰 교수의 입매가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두 눈이 우울하게 창밖을 내다보다가 로랑에게 돌아와 멈췄다.
그녀가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속으로 자신을 가볍게 책망했다.
감수성 예민한 여성의 본능으로 그녀는 머리에게 불가능한 것이나 신체적 존재의 괴이함을 연상시키는 말은 일체 피하려고 했다. 자연에 의해 모욕된, 고립무원의 아이를 대하듯이 로랑은 머리에게 엄마로서의 연민 같은 감정을 맛보았다.
자신의 부주의한 발언을 덮으려고 로랑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 이제 일을 시작하지요!”
아침마다 코른 교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머리는 독서에 몰두했다. 로랑이 최신 의학 잡지와 서적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와서 보여주면, 머리는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필요한 논문에서는 두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랑이 저널을 퓨피트르(pupitre)에 올려놓으면 머리는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로랑은 머리의 눈길을 보면서 머리가 어떤 줄을 읽는지 알아차리고 적절한 순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됐다.
페이지에 표시할 필요가 있을 때면 머리가 신호를 보내고 로랑이 머리의 눈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가며 종이 위에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머리가 어떤 대목을 왜 표시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머리의 빈약한 표정 언어로는 마땅한 설명을 듣기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 코른 교수가 없을 때 그의 서재를 지나치다가 책상 위에 놓인 저널들을 보았는데, 그건 머리의 지시에 따라 그녀가 밑줄을 그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종이에는 그 표시된 대목들을 코른 교수가 직접 옮겨 적은 것이 있었다. 그걸 보고서 로랑이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고서 로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쩌면 머리가 어떤 식으로든 대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말 좀 해 보세요, 우리가 왜 학술 논문들의 어떤 대목을 표시하는 거지요?”
도웰 교수의 얼굴에 답답하여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머리가 뭔가를 말하는 눈빛으로 로랑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목구멍으로 굵은 관이 이어지는 밸브에 눈길을 돌리고는 눈썹을 두 번 추켜올렸다. 그건 부탁한다는 표시였다. 금지된 밸브를 열어 달라고 하는 것임을 로랑이 깨달았다.
머리가 그런 부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로랑은 머리의 바람을 나름대로 해석하곤 했다. ‘머리가 사는 게 낙이 없어 스스로 명줄을 끊고 싶어 하나 봐.’ 그래서 금지된 밸브를 열지 않으려고 했다. 머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책임이 돌아오고 일자리를 잃을까 겁을 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질겁하여 대답했다.
“아니, 안 돼요. 이 밸브를 열면 당신은 죽어요. 난 당신이 죽는 걸 원치 않아요. 죽게 할 수 없어요.”
무기력감과 답답함 때문에 머리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머리가 눈꺼풀과 눈을 세 번이나 위로 치켜 올렸다.
그건 ‘아니, 아니야, 난 죽지 않아요!’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로랑이 망설였다.
머리가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그건 마치 ‘열어요. 제발 열어 줘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랑의 호기심이 바짝 달아올랐다. 여기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머리의 두 눈에 끝없는 우수가 반짝였다. 두 눈은 부탁하고 간청하고 요구했다. 인간 사유의 모든 힘이, 긴장된 의지가 바로 그 눈길에 다 집중된 것만 같았다.
로랑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밸브를 조심스레 열 때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손이 떨렸다.
그 즉시 머리의 목구멍에서 스스스 하는 소리가 새나왔다. 가녀리고 희미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망가진 축음기처럼 덜컥대며 쉭쉭 하는 소리였다.
“고-맙-구려... 아-가-씨...”
금지된 밸브가 열리면서 실린더 안에 응축돼 있던 공기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공기가 머리의 목구멍을 통과하며 성대를 움직이자 머리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데 목구멍과 성대의 근육들이 이미 정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머리가 말을 하지 않을 때도 공기는 스스스 소리를 내면서 계속 목구멍에서 새나왔다. 목 부위의 신경 줄기들이 끊어져서 성대 근육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소리는 희미하고 덜그럭거리는 음색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의 얼굴에 모처럼 만족스러운 기색이 피어났다.
그 순간 서재 쪽에서 발소리와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실험실의 문은 늘 서재 쪽에서 잠겨 있었다.) 로랑이 황급히 밸브를 닫았다. 목구멍에서 스스스 하는 소리가 멈췄다.
코른 교수가 들어섰다.
(2장 끝)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Books > SF 도웰 교수의 머리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웰 교수의 머리 4장 (0) | 2019.07.12 |
---|---|
도웰 교수의 머리 3장 (0) | 2019.07.11 |
도웰 교수의 머리 1장 (0) | 2019.07.10 |
도웰 교수의 머리 (소개) (0) | 2019.07.10 |
도웰 교수의 머리 (0) | 2019.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