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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the devils of loudun 삽화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해도 화합될 수 없는, 그의 스피릿 안에서 벌어졌다

 

  하나님이라 명명된 무한함은 본성이라 불리는 유한함을 포함해야 하며, 이 무한함은 공간의 모든 점들과 시간의 매 순간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결말을 회피하고 그 현실적인 결과를 모면하기 위해 구학파의 엄격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창의력을 소비하고 준엄한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설득과 강요를 다 허비했다. 그 사상가들은 선포하기를, 이는 타락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철저히 썩었다고 했다. 그 모럴리스트들은 말하기를, 그런 고로 모든 전선에서 본성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안에서는 억누르고 밖에서는 무시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라는 선물을 얻고자 희망함은 오로지 본성의 경험 소여(所與)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우리는 신의 선물도 받을 자격을 갖출 터이다. 우리가 원초적 사실에 다가든다는 것은 일상의 많은 자잘한 사실을 거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선종의 한 선사가 이르기를,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말라, 그저 고정 관념에 붙들려 있지만 않으면 되느니”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대략 같은 말을 하긴 하되,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얘기가 교리와 신앙 조문, 경건한 전통 등에 관한 것일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정 관념’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기껏해야 이정표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하다. 존재라는 원초적 사실에는 일상의 사실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말로써는, 혹은 말로써 고무된 판타지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느님 왕국을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네 상상이나 종작없는 추론으로는 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리성이라는 주장이나 갈망과 혐오, 보상의 판타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기성 전제들 따위가 가득한 영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시늉을 하는 한, 하나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기란 기대난망. 

  먼저 인간의 왕국이 와야 하고, 그런 뒤에야 하나님 왕국도 올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죽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억누르고 내치는, 우리네 숙명적 성향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편견을 떨치고, 현실을 개조한다고 뿜어대는 언어의 덫을 제거하고, 현실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숨어드는 몽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는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보인 ‘거룩한 무심함’이요, 코사드[각주:1]의 ‘내맡김’이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두 매 순간 자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완전한 길의 징표인 ‘선호하기를 거부함’이다.

 

  교회 권위자들과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수렝은 영혼이 세상 존재의 거룩한 근간과 합일돼 변모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네 최초 조상의 죄 때문에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결과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겼다는 견해도 소중히 여겼다. 

  신과 우주에 대해 그런 관념을 견지하면서 수렝은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즉, 자살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인 요소를 죄다 몸과 마음에서 근절할 필요가 있다고. 한데,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노년에 인정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말해둬야 하겠다. 루덩으로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신에게 다가들리라 기대하면서 육욕을 죽이느라고 고행에 너무 몰두했다. 이 노력에 가상한 열의가 있었을지언정 거기엔 또 속박과 편협한 이성도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편협한 도그마에 빠졌고, 그 도그마는 온건할지 몰라도 적잖이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구별하며 신이 당신의 피조물과 반대편에 있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수렝은 본성에 대한 이기적 태도며 본성 자리에 설정된 몽상과 허황한 생각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본성 자체를, 이 특별한 행성에서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행으로 억누르고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본성을 증오하라. 그 본성이 신께서 예비하신 모든 굴욕을 감내하게 하라.」 본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선고는 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라는 것을 수렝은 가장 쓰라린 경험으로 알았다. 

 

  본성은 터무니없고 무분별하다는 견해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는 노이로제가 종종 수반되는 지적 피로를 인간적 추잡함에 대한 증오와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혐오로 바꾸었다. 이 증오와 혐오가 특히 더 강한 것은, 그가 아직도 미련을 품고 있으며 사람이라 불리는 역겨운 존재들이 야기한 갖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벌써 며칠째 처리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이 입맛에 맞았으며, 그의 병든 본성에 어떤 안도감마저 안겼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상태가 좀 나아진 것은 ‘크리스트교를 배신했기’ 때문이었군. 다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이 상태는 죄책감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는 극심한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그를 행동케 하는 가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동할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발견하니까. 

  그래서 ‘자기 죄를 물처럼 삼키고 빵처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의 의지와 행동 능력은 마비됐지만 감수성은 아직 살아 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이전처럼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사람은 더 많이 벗겨질수록, 가격을 더 아프게 느끼는 법.’ 

 

  그는 ‘죽음의 공허’에 있다. 그러나 이 공허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니다. 그건 격심하고 완전한 공허요, ‘끔찍하고 참담한 나락이며, 거기에는 도움이나 구원 받을 기대가 없고’ 거기서는 조물주가 영혼을 괴롭히며 그 조물주에게 제물은 증오만 품을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홀로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종의 삶을 고난으로 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본성은 궁지로 내몰려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없으며 그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있을 뿐이다.

 

  수렝은 더 이상 생각이나 연구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랑과 감사를 지니고 조물주에게 가슴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은 아직 살아서 ‘죄악과 꺼림칙한 일에 빠졌다.’ 뭔가 무관한 작업을 하면서 옆으로 빠지려는 번다하고 경망한 갈망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그건 자만심과 자기본위와 공명심 못지않은 죄이니까. 

  내면에서 노이로제와 엄격주의에 시달린 그가 외면에서 고행으로 본성을 더 빨리 파괴하기를 꿈꾼다. 이전처럼 안도감을 주는 작업이 아직 몇몇 있지만 그 작은 기쁨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공허를 내향적 공허와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도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본성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신의 자비에 노출될 테니까. 의사들은 고기를 더 많이 먹으라 하지만 그 권고를 따를 수 없다. 신께서 이 질병을 정화의 수단으로 주셨다. 너무 일찍 좋아지려고 애쓴다면 그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터

 

  그렇게 건강을 거부하고 비즈니스와 휴식도 거부했다. 그러나 재능과 학식을 눈부시게 발휘한 활동 분야가 그래도 남아 있었다. 강론, 신학 저술, 설교집, 경건한 장시들. 거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 왔고, 그것들을 여전히 일면 뿌듯하게 여긴다. 

  길고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그 동안 써온 것을 모조리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몇 권 책의 원고와 다른 많은 글들을 찢어발기고 불태웠다. 이제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됐다.」 그는 이제 「내 본성이 거부하는 험로를 걸으라고 하는 그분의 작업을 밀고나가는 숙련공」 같이 됐다

 

  몇 달 지나니 그 길이 어찌나 힘든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39년부터 1657년까지 그 누구한테도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병리적 문맹이라는 괴이한 질환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었다. 말하기조차 힘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홀로 유폐 상태에 있고 바깥세계와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 스스로 하나님한테서 도피하기로 내린 결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시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자신이 이미 현생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확신에 (여러 해 동안 지탱돼 온 확신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 그 다음엔 지상의 지옥에서 한층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고해사제와 수도회 상급자들이 안심시켰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생명이 있는 한 확고부동한 저주란 있을 수 없다오. 이 점을 한 신학자는 장 조셉에게 삼단논법을 동원해 입증하고, 또 다른 이는 2절판 묵직한 서적을 들고 진료소로 찾아와서 교회 박사들의 권위를 들먹이며 입증했다. 

 

  하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수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았다. 한때 자기가 물리쳤던 악마들이 영원한 화염 속에 그의 자리를 환호하며 준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다른 수도사들도 저희 내키는 대로 다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들과 고통 받는 이의 행위가 그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말했다.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모든 사건,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절망을 굳히기만 했다. 벽난로 곁에 앉았다면, 이글거리는 잉걸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회에 들어섰다면, 그 순간 신의 심판에 대한 어구나 사악한 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늘 들리고 울렸는데,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설교를 들었다면, 회중에 길 잃은 영혼이 있다고 설교자가 단언하는 것을 꼭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의 영혼이었다. 

 

자만심의 악마 레비아탄

 

  언젠가 그가 죽어가는 형제의 침상 곁에서 기도할 때, 갑자기 자신이 그랑디에처럼 마법사가 되어 악마들에게 무고한 사람 육신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힘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문을 걸고, 자만심의 악마인 레비아탄에게 이 육신으로 들어가라 명령하고, 정욕의 악마인 이사카론못된 장난의 스피릿인 발람신성 모독의 왕인 베게모트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게, 영겁의 목전에서 마지막 중대한 행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덤벼들라 권하고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에 영혼이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수렝이 실제로 유황 냄새를 맡고 울부짖음과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한데 이게 뭐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혹은 자발적이었나?) 그가 악마들을 계속 부르면서 악마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돌연 침대에서 몸을 뒤틀며 헛소리를 했다. 한데 그건 이전처럼 하나님 뜻에 복종이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며 거룩한 자비와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는 둥 공격적인 의심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횡설수설이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수렝이 퍼뜩 깨달았다. 그래, 내 느낌이 옳았어, 난 마법사가 된 거야!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이 외적 증거에 어떤 낯설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고무된 내적인 확신이 추가됐다.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엄격함과 (또 감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지가 마비되고 허탈 상태가 갈마들며 근육이 경련돼 침대에 붙박여 있는 오랜 시간에 그는 ‘이와 비교할 통증은 세상에 더 없을 정도로 신의 분노가 거세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번이나 해가 바뀌면서 고통의 양상도 이모저모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결코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이지적으로 알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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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n Pierre de Caussade (1675-1751) - 프랑스의 예수회 성직자, 종교 저술가. <신의 섭리에 내맡김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그는 현재 순간은 신께서 주신 성찬이요 그것에 내맡김과 그것을 필요로 함은 신성한 상태라고 믿었다. 얼핏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듯 보이기에 그의 책은 1861년까지 출간 금지. 저자 본래 뜻에 더 합당한 버전은 1966년도에야 출간됐다. 그의 종교적 관점에서 어떤 작가들은 대승불교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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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젊은 시절 모습

 


11

 

 

  비극에 우리는 참여하고, 코미디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비극의 저자는 자신을 등장인물들 속에 있다고 느낀다. 독자나 청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코미디에서는 창작자와 문학적 피조물 간에, 구경꾼과 구경거리 간에, 일체화가 전혀 없다. 작자는 자신을 등장인물들에 투사하지 않으며 관객도 그들과 거리를 둔다. 작자는 바깥에서 보고 판단하고 묘사한다. 관객 역시 바깥에 머물면서 작자가 묘사한 것을 관찰하고 작자가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고 코미디가 꽤 괜찮다면 웃음을 터뜨린다. 

 

  순수 코미디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뛰어난 코미디 작가들이 혼합된 코미디 장르를 택하는 것이며, 거기서는 동일시에서 밀어내기로, 또 그 반대로 초점이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저 보고 판단하고 웃기만 한다. 그러다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지켜보는 대상에 불과했던 인물들에게 공감하고, 나아가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천사들의 수녀 잔느는 관객들한테서 늘 밀어내기 반응을, 즉 순전히 코믹한 효과를 야기하는 불행한 사람 축에 들었다. 자신이 겪은 큰 고통에 독자들 공감을 사기 위해 고백 서신을 끊임없이 썼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서신들을 오늘날 우리가 읽으면서 가련한 그녀를 코믹한 형상으로 여기는 까닭은 그녀가 철저하게 배우 같은 인생을 살았으며, 배우로서도 거의 늘 자신한테마저 정직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의 고백을 행하는 ‘나’는 때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잡탕이고 때론 악귀 들린 여인들의 여왕이요 때론 제 2의 테레사 성녀이며, 또 때로는 연기를 다 걷어치운 채 영악하고 일순간 진실한 젊은 여인, 자신이 누구이며 다른 더 공상적인 인물들과 어떻게 결부돼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여인이기도 하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응당 없었겠지만, 그러면서도 코미디 기법을 죄다 동원했으니, 한 마스크에서 다른 얼굴로 급전, 지나치게 과장된 언행, 자신의 진짜 욕망을 아주 단순하게 합리화하는, 경건하면서도 장황한 선동 따위가 그것이다

 

천사들의 수녀 잔느의 위선

 

  게다가 수신자들이 다른 쪽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생각지 않고 제 생각만 담은 편지를 수없이 써 보냈다. 예를 들어, 그랑디에 공소장에서 우리는 원장수녀와 몇몇 수녀가 후회하는 마음에 자기네 진술이 완전히 거짓이라며 철회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데, 허영심과 자만, 냉담함으로 채색된 진부한 공언이 가득한 자서전에서 자신의 가장 큰 범죄, 무고한 사람을 고문과 화형으로 몰아간 악의적인 거짓 증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명성을 안긴, 이 끔찍한 스토리 전반에서 미더운 일화를 단 하나도 들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이며 지은 죄에 대한 공개적인 참회 따위 말이다. 

  그보다는 로바르데몽과 카푸친회 수사들이 “당신의 통회는 악마들의 간책이고, 당신 거짓말은 거짓이 아니라 신성한 진실이오!” 하는 냉소적 장담을 믿는 쪽으로 돌아서자고 작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녀가 이 사건에 대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한다 해도, 악마의 제물이었다가 하나님 기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필히 손상될 터이다. 잔느는 기이하고 비극적인 사실들은 은폐하면서 자신을 과장되고 허구적인 인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이야말로 코미디의 특성이 아니고 뭐겠는가.  

 

 장 조셉 수렝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삶의 여정에서 어리석고 무분별하고 심지어 괴기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쓰고 행했다. 그러나 그의 서신들과 회고록을 읽은 사람 누구한테든 그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괴상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땅하다 싶어도) 그가 겪은 고통에 우리는 금방 공동 참여자가 되니까

  그가 내면에서 꾸밈없이 자신을 알았던 것만큼 우리는 그를 안다. 그의 고백을 행하는 ‘나’는 언제나 장 조셉일 뿐이다. 그의 고백은 진실한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가련한 잔느처럼 자신을 몽상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녀처럼 비밀을 흘리고 숭고한 것을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은 것으로 바꾸며 끝을 맺는, 사람들 눈길 끌어 모으기에 급급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수렝이 거쳐 간 길고 험한 십자가 길의 시작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 사람은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고 영적 완성이라는 최고 이상에 고무됐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교리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가뜩이나 허약한 체질이 아주 빨리 망가지고 불안정한 기질이 혹사당했다. 루덩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아픈 사람이었다. 거기서 다른 엑소시스트들이 과도하게 적용한 악마 숭배를 저지하려 애썼지만, 결국 그 자신이 근본악이라는 생각과 사실에 지나치게 몰입하면서 악령의 제물이 됐다

 

예수회 수사 장 조셉 수렝

 

  악마들은 자기네와 삶이 아니라 죽음을 놓고 싸우는 사람들의 맹렬함에서 힘을 빨아들인다. 광란에 빠진 수녀들과 악의에 찬 엑소시스트들은 악령을 더 키웠을 뿐이다. 악에 대한 강박 관념이 작동하면서 대개는 의식적으로 억제되던 경향이 (엄격한 종교적 규율이 감응하는, 방종과 신성 모독의 경향이) 표면으로 튀어나왔다. 

  랑탕과 트랑킬은 ‘벨리아르에 지배돼 수족이 묶여’ 발작하다가 죽었다. 수렝도 그렇게 자초한 시련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각주:1]   

 

  루덩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엑소시즘을 시행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틈틈이 많은 서신을 썼다. 그러나 경솔한 친구인 아티시 신부에게 보낸 서신에서만 은밀한 속내를 드러냈다. 명상과 고행, 마음 정화 등이 그가 다룬 일반적 주제였다. 악마들과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았다. 한 수도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당신의 정신기도에 관해 말하자면 어떤 주제를 미리 정했음에도 거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보기엔 나쁜 징표가 전혀 아닙니다. 어떤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하시라고 조언합니다. 

  예전에 당신이 얘기 나누고 소일을 돕기 위해 다레락 부인한테 들르곤 하던 때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때 당신은 그녀와 아무 이야기나 다 태평하게 주고받았지요. 무슨 얘기를 할까 미리 정하지 않고서도 서로 즐겁게 대화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친밀함을 만들고 키우겠다는 평범한 의도를 가지고 그녀한테 갔습니다. 하나님께도 바로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다른 친구한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쓴다. 

  「우리 소중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자는 대로 하시게. 그분께서 역사하실 때는 영혼이 제멋대로 놀지 않아야 하네. 그렇게 하시게, 그분의 사랑과 권능의 빛에 자신을 드러내시게. 분주한 근심걱정일랑 한 편에 밀어두게나, 그런 것에는 정화를 요하는 결점이 많으니까.」 

 

  그렇다면 영혼이 그 빛을 받아야 하는 이 사랑과 권능이란 무엇인가

  「이 사랑이 하는 역사는 부수고 깨고 무너뜨리고 나서 새롭게 하고 다시 만들고 소생시키는 것일세. 이 역사는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진정 달콤하네. 더 무서울수록 더 바람직하고 더 매혹적이야. 바로 이 사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하고. 이 사랑이 자네를 사로잡고 소멸시킬 정도로 자네 안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 난 행복하지 못할 것이야.」 

 

  수렝의 경우엔 자신을 소멸하는 과정이 막 시작됐을 뿐이다. 1637년 거의 내내, 또 1638년 초 몇 달 동안 계속 아팠다. 하지만 간간이 차분한 상태가 찾아들기도 했다. 아직 견딜 만큼 정상적인 상태에서 자꾸 벗어나는 게 병이었다. 이십오 년 뒤 그가 <다른 삶의 연구의 실험 과학>에서 이렇게 쓴다.

  「이 강박 관념에는 비상한 정신적 활기와 쾌활함이 수반됐는데, 바로 그 덕분에 인내하며 만족스럽게 이 멍에를 이겨낼 수 있었다.」

 

  사실, 지속적인 집중은 이미 불가능했다. 공부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생 초기에 쌓은 지식으로도 눈부신 글을 간간이 써 내기에는 충분했다. 제 뜻을 자유로이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모르고 입을 뗄 수나 있을까 염려하면서 죄수가 단두대에 오르는 심정으로 설교단에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꼈다. 

  「내면 감정의 출렁임과 강한 은혜의 열기를. 그 은혜가 하도 강해서 강력한 목소리와 생각을 가지고 가슴을 트럼펫처럼 확 쏟아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어딘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도관을 따라 힘과 지혜가 내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다가 급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파이프가 막히고 계시의 급류가 말랐다. 질환이 새로운 형태를 띠었다. 그건 하나님과 제법 정상적으로 접촉하는 영혼의 발작적인 강박 관념이 아니라 그 접촉과 빛을 완전히 차단하면서 사람을 본래보다 더 작은 뭔가로 웅크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비슷한 현상을 겪은 한 수녀에게 1638년도에 보낸 많은 서신들에서 수렝이 자기 질환의 새로운 단계를 묘사한다. 

 

  그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기도 했다.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계속되는 고열 속에서 허우적대며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 빠졌다. 어떤 때는 국부 마비 같은 것에 시달렸다. 아직은 수족을 좀 놀릴 수 있지만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고 종종 통증까지 수반됐다. 

  가장 작은 움직임도 고문이요, 가장 사소하고 평범한 일도 헤라클레스의 노동이었다. 예를 들어, 법의에 달린 호크 하나 끄르는 데도 두세 시간이 걸렸다. 옷을 다 벗는 것은 이미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옷을 입은 채 잠잤다. 그러나 (지독히 혐오하는 이가 꼬이지 않게 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 셔츠는 갈아입어야 했다.  

 

  「속옷 갈아입는 일이 아주 고통스러웠다. 어떤 때는 지저분한 셔츠를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느라고 토요일 밤부터 주일 아침까지 날을 새기도 했다. 통증이 어찌나 심했든지, 그래도 가냘픈 행복을 찾는 듯싶다면 그건 언제나 목요일 이전이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 셔츠 갈아입을 생각을 하면서 목요일부터는 두려움에 떨었으니까.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이 고문을 다른 그 어떤 고통과도 기꺼이 바꾸었을 것이다.」  

 

  음식 먹는 일도 옷을 입고 벗는 것 못지않게 힘들었다. 셔츠는 일주일에 한 번만 바꾸었다. 그러나 고기를 자르고 포크를 입에 올리고 컵을 쥐고 기울이는 시지포스의 노동은 날마다 겪어야 하는 시련이었다. 입맛이 전혀 없는데다가 먹은 것을 다 토하거나, 그게 아니면 지독한 소화불량에 시달릴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의사들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사혈을 하고 하제를 써서 장을 세척하고 온욕을 처방했다. 다 소용없었다. 여러 증상은 분명 신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환자의 썩은 피와 병든 체액이 아니라 정신에 있었다

 

  (악마들이 떠남으로써 정신이 마귀 들림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 레비아탄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하나님이라는 이데아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이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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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철창 너머로 대화하는 잔느 수녀

 


 

  하지만 수렝이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봤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그가 다른 수도사들처럼 가혹한 엑소시즘을 공공연히 벌이는 대신 피후견인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 보낸다는 것. 그녀를 가르쳐서 (그녀의 악마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완성의 길로 이끌려는 시도가 동료들한테는 그저 허튼짓으로 보였을 뿐이다. 더욱이 수렝 본인도 악령에 사로잡혀서 종종 엑소시즘을 필요로 하는 마당에

  (5월에 왕제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이 악마들에 대한 호기심을 풀려고 왔을 때, 잔느 수녀 몸에서 불시에 출격한 이사카론이 수렝에게 들러붙었다. 마귀 들린 여인이 정신 멀쩡하게 조용히 냉소 짓고 있는 동안 엑소시스트가 발작하여 마룻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런 장면에 왕제야 당연히 좋아했지만, 수렝에게 그 일은 불가사의한 섭리로 인해 겪어야 한 숱한 굴욕의 일부였다.) 

 

  동료들은 수렝의 의도나 활동의 순수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위를 무분별하다 여겼으며, 그런 무분별로 인해 험담이 나도는 데 쓴 입맛을 다셨다. 이미 여름 막바지에 수도회 관구장은 수렝을 보르도로 소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럿 접하게 됐다. 

 

  원장수녀 역시 시련을 적잖이 맛봐야 했다. 그녀는 성처녀라는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그 역할에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 기대했다. 한데 그렇기는커녕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자매들과 대화할 때 그들에게 들러붙은 악마들을 통해 내게 많은 고통을 내리셨어. 내 행동과 생활방식이 바뀐 것을 보고 대다수 수녀들이 반감을 크게 품은 거지. 그들을 악령들이 자꾸 부추겼다. 원장수녀를 저렇게 바꾼 것은 바로 악마들인데, 이제 그녀는 너희를 멸시하면서 망신 주려 들 것이야! 내가 자매들과 있을 때마다 악령들은 몇몇 자매를 꼬드겨 내 언행을 비웃고 놀리라고 충동질했다. 그건 나한테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었고.」 

 

  수녀들은 엑소시즘 중에 원장수녀를 가리켜 ‘신을 섬기는 악마’라 불렀다. 수렝을 제외하고 다른 엑소시스트들도 정말 그런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성 요셉한테서 묵상기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잔느가 다른 수녀들한테 단언해봤자 소용없었다. “하나님 권세로써 정관(靜觀)의 경지에 오르고, 그리하여 큰 계시를 얻었으며, 우리 주님이 특별하고 은밀하게 내 영혼에 와 닿았어요” 하고 겸손하게 설명해봤자 씨도 안 먹혔다. 

거룩한 지혜의 이 살아 있는 샘물 앞에서 부복할 만도 했거늘 엑소시스트들은 이것이 마귀 들린 자가 흔히 겪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뿐이었다. 그런 몰이해와 냉혹함에 부닥치면 원장수녀가 주춤하여 광기에 빠지거나, 아니면 소중하고 선량하고 사람 잘 믿는 수렝 수사와 함께 다락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렝 수사조차 그녀한테는 고난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내렸다는 특별한 은혜 운운을 죄다 믿을 준비가 충분히 돼 있었다. 하지만 거룩함에 대한 그의 이상은 불편할 정도로 높고, 그가 평가하는 잔느 수녀 품성은 불편할 정도로 낮았다

  혹자가 자신을 교만하고 방탕한 사람이라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그런 불쾌한 진실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것은, 차이가 아주 크다.

 

  잔느의 흠결을 들추면서 수렝이 만족을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그런 면을 바로잡아 주려고 늘 애썼을 뿐이다. 그는 원장수녀가 악마들에 사로잡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악마는 제물의 흠결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린다는 점도 굳게 믿었다. 흠결을 제거하면 악령도 떨어질 터. 그렇기 때문에, 수렝의 말에 따르자면, ‘기수를 안장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말을 공격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공격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왜냐하면 잔느 수녀가 ‘완성을 얻어 신에게 나아가기로’ 굳게 결심했다 할지라도, 스스로는 이미 성자라고 여기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그저 지각없는 (혹은 지나치게 의도적인) 코미디언으로 볼 때 가슴 아팠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신성함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지극히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수녀 잔느

 

  수렝은 그녀가 체험하는 법열이나 무아지경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거기에 그녀가 우쭐거렸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나 그보다 아직은 참회와 고행에 더 진지하게 대했다. 그래서 그녀가 주제넘게 굴 때마다 호되게 꾸짖었다. 그녀가 공개적인 참회나 수련수녀 신분으로 강등 같이 여봐란 듯한 속죄 장면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할 때, 수렝은 그런 것보다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 꾸준한 고행이 더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가끔 일어난 일이지만 그녀가 귀부인처럼 행세할 때면, 그는 그녀를 부엌데기처럼 대했다.

 

  그런 취급에 감정이 격해지자 그녀가 레비아탄의 오만한 분노나 신에 대한 베게모트의 불경스러움, 발람의 외설스러운 농담 따위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수렝은 이때까지 악마들이 아주 즐기던 엑소시즘에 의존하는 대신 사납게 들끓는 그들한테 스스로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 자기계발을 위해서는 거리낌 없음과 진짜 갈망을 늘 지니고 있는 원장수녀가 여기에 동의하자 다른 악마들도 따라야 했다. 악마들이 말했다. “우리는 교회에 맞설 수 있고, 성직자들한테 덤빌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암캐의 고집에는 저항할 수 없어!” 

 

  악마들이 저들 특질에 따라 불평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도 고행용 채찍을 참아냈다. 레비아탄이 가장 세게 때리고, 그 다음이 베게모트였다. 그러나 발람과 특히 이사카론은 통증을 지독히 무서워했다. ‘정욕의 악마가 채찍을 맞으며 울부짖는 장면은 정말 볼만했다’고 수렝이 말한다. 채찍질은 실상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비명이 귀청을 때리고 눈물이 폭포 같았다. 

악마들은 정상 상태에 있는 잔느 수녀보다 아픔을 더 견디지 못했다. 한번은 레비아탄 때문에 야기된 심신증 증세를 떨치기 위해 그녀가 한 시간 내내 제 몸을 채찍으로 때렸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징벌 몇 분이면 악령들이 달아났고, 그러면 잔느 수녀가 완전한 경지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그건 고난의 행진이었다. 한데, 적어도 원장수녀가 보기에 완전한 경지에는 한 가지 중대한 흠이 있었다. 그건 수렝 신부가 쩍하면 강조하는 작은 고행처럼 사람들 이목을 끌지 못한다는 점. 잔느가 혼자 중얼거렸다. 

  넌 이미 정관의 경지에 올라섰어, 저 높은 곳과 사적으로 접하는 영광을 얻었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없잖아!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람들한테 말했지만, 그들 반응이라야 기껏해야 고개를 젓거나 어깨를 추썩이는 것일 뿐. 그녀가 축복받은 마더 테레사가 했을 법한 행동을 하고 다닐 때,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며 그녀를 위선자라 불렀다. 더 설득력 있는 뭔가가, 사람들 눈길을 끌고 분명히 초자연적인 뭔가가 필요했다. 악마의 이적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잔느 수녀가 마귀 들린 여인들의 여왕 노릇을 그만두고 생전에 성인 반열에 오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가 보인 성스러운 기적들 중 첫 번째가 1635년 2월에 일어났다. 

 

  하루는 이사카론이 털어놓는 얘기가 이랬다. 익명의 마법사 셋이 말이야, 둘은 루덩 출신이고 하나는 파리지앵인데, 축성된 면병 세 개를 가로챘어, 그리고 그걸 불태우려고 한단 말이야! 

  수렝이 즉각 이사카론에게 명했다. 네가 파리로 가서 그들이 매트리스 밑에 숨겨둔 면병을 가져 오거라! 

  이사카론이 사라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이사카론을 도우라고 발람한테 명령했지만 한사코 거부하며 수렝의 천사와 싸우다가 결국 복종하게 됐다. 다음날 저녁식사 후 벌이는 엑소시즘 때 면병 세 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명령이었다. 

 

  지정된 시각에 발람과 이사카론이 수렝 앞에 나타나 잔느 몸 안에서 이리저리 나대며 저항하던 끝에 면병이 제단 위 벽감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고서 악마들은 원장수녀의 아주 작은 몸뚱이가 길게 늘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한껏 내뻗은 팔 끝에서 손이 벽감으로 들어가더니 꼼꼼하게 접힌 종이쪽을 들고 나왔는데, 거기에 면병 세 개가 싸여 있었다.

 

  이 안쓰러울 정도로 수상쩍은 경이로움을 수렝은 중요한 징표로 간주했다. 그러나 잔느의 자서전에는 이 스토리가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남을 잘 믿는 영적 지도자를 멋지게 골려준 트릭을 부끄럽게 여긴 걸까? 아니면, 그 기적을 썩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은 건가? 이 사건에서 그녀가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한테는 전적으로 본인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이적이 필요했고, 그 원하던 것을 그해 가을에 결국 얻었다. 

 

  수도회 내부 여론에 견디다 못해 아키텐 관구장이 10월 말경 수렝에게 보르도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그 자리에는 좀 덜 기이한 엑소시스트를 지명했다. 이 소식이 루덩까지 알려지자 레비아탄은 기뻐 날뛰었지만 제 정신으로 돌아온 잔느 수녀는 되레 침울해졌다.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성 요셉에게 기도한 끝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이 오만한 악마를 물리치게 하리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그 뒤 사나흘 동안 자리보전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나아져서 자기한테 엑소시즘을 시행해 달라고 청했다. 「그건 많은 귀빈들이 엑소시즘을 보러 교회에 와 있던 그날 (11월 5일) 생긴 일이었다. 난 여기서 신의 특별한 섭리를 보았다.」 (VIP들이 교회에 올 때면 늘 ‘특별한 섭리’가 나타났다. 바로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악마들이 늘 가장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린 것이다.) 

 

  엑소시즘이 시작되고 금방 ‘레비아탄이 나타나서 성직자한테 승리를 거뒀노라고 떠벌렸다.’ 수렝이 성체에 경배하라고 이르면서 악령에게 역공을 가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레비아탄이 울부짖으며 발광했다. 

  그때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하셨다.’ 레비아탄이 엑소시스트 발밑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혹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잔느 수녀가 그렇게 한 것. 악령은 수렝의 명예를 더럽히고자 간계를 꾸몄노라 시인하고는 용서를 빌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발작을 일으킨 뒤 원장수녀 몸에서 떠났다. 영원히. 

 

  이야말로 수렝의 승리이자 그의 방법론이 옳다는 증거였다. 이 장면에 감명 받은 다른 엑소시스트들이 수렝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수도회 관구장이 수렝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잔느 수녀가 원하던 바를 얻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악마들을 웬만큼은 지배할 수 있다는 점도 과시했다. 악마들이 그녀를 미치광이처럼 날뛰게 만들 수 있지만,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악마들을 영원히 내쫓을 수도 있는 것

 

  레비아탄이 달아난 뒤 핏빛 십자가가 원장수녀 이마에 나타나더니 세 주일 내내 또렷한 형태를 유지했다. 이적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효과적인 뭔가가 뒤따라야 했다

  이제 발람이 뜻을 밝혔다. 난 원장수녀 몸에서 떠날 용의가 있는데, 떠나게 되면 기념으로 내 이름을 그녀 왼손에 적어 넣겠어, 그러면 죽을 때까지 손바닥에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못된 장난을 일삼는 스피릿의 서명을 평생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예측을 잔느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흠, 악령한테 예를 들어 성 요셉의 이름자를 쓰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렝의 조언을 좇아 그녀가 성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홉 번 연속 영교 과정에 들어섰다. 그 아흐레 기도를 막으려고 발람이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러나 육신에 병이 도지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히는 짓도 소용없었다. 원장수녀가 꿋꿋이 맞섰다. 

 

  언젠가 아침에 미사 드리기 직전 (못된 장난과 신성 모독의 악령들인) 발람과 베게모트가 그녀 두개골로 기어들어 어찌나 소란 피우고 혼란스럽게 하든지 그녀가 잘못인 줄 빤히 알면서도 식당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거기서 ‘나는 음식에 게걸스레 달려들어 굶주린 장정 셋이 온종일 먹는 것보다 더 많이 먹어 치웠어.’ 그렇게 잔뜩 배를 채운 뒤 성체 배령은 불가능했다. 이것이 모든 구상을 위협하게 됐다.

 

  비탄에 잠긴 잔느가 수렝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영대를 걸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악령이 다시 내 머리에 파고들더니 곧장 나로 하여금 산더미처럼 많은 양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런 뒤 발람이 이제 수녀의 위장이 텅 비었다고 장담하자, 수렝은 그녀가 성체를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런 곡절 끝에 나는 성 요셉을 향한 아흐레 기도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11월 29일 못된 장난과 사악한 웃음의 악마가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이 사건 때 구경꾼들 중에 영국인 두 명이 있었다. 맨체스터 백작의 아들로서 얼마 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개종자의 열정으로 기적을 믿는 월터 몬테규, 또 그의 젊은 친구이자 부하이며 나중에 극작가가 된 토마스 킬리그루. 

  며칠 뒤 킬리그루가 잉글랜드에 있는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루덩에서 본 것을 낱낱이 전달했다. 그는 그 경험이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각주:1]

 

   방문 첫날 수녀원 교회에서 그는 귀신들린 수녀 네댓이 무릎 꿇고 나직이 기도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들 등 뒤에 엑소시스트가 한 명씩 서서 줄을 쥐고 있는데, 그 다른 끝이 각 수녀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 줄마다 작은 십자가들이 매달려 있어서 악마들의 작은 광란을 통제하는 개줄 역할을 했다. 그렇긴 해도 아직은 모든 게 평온하고 차분했으며 ‘나는 무릎 꿇은 것 외에 특기할 만한 장면은 전혀 못 봤다.’ 

 

  그러나 삼십 분 뒤 개중에 두 수녀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는 수도사 목에 들러붙고, 다른 하나는 혀를 내밀고 제 엑소시스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입맞춤하려고 들었다. 그러는 동안 으르렁대는 소리가 숙사와 교회를 가로막은 격자 창살을 통해 사납게 들려 왔다. 

 

  그 다음에 젊은 킬리그루를 월터 몬테규가 불러 마귀 들린 수녀들이 과시하는 독심술을 직접 경험하라고 했다. 악마들이 개종자의 생각은 읽을 수 있지만, 킬리그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맞힐 수 없었다. 독심술을 자랑하는 중에 악마들은 칼뱅을 위해 기도하고 로마가톨릭교회를 저주했다. 그러다가 악귀 하나가 문득 사라졌기에 구경꾼들이 그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수녀가 응답하는데 어찌나 추잡하든지, 그 답변을 <유럽 매거진> 편집인이 지면에 싣지 못할 정도였다. 

  이어서 예쁘고 어린 아그네스 수녀를 대상으로 엑소시즘이 시작됐다. 킬리그루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는 이미 앞의 장에서 얘기했다. 이 아름다운 피조물을 다부진 농민 둘이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엑소시스트가 가슴에 이어 하얀 목을 발로 밟는 광경은 젊은 신사의 가슴을 공포와 혐오로 채웠다

 

  다음날 그런 장면이 모조리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엔 퍼포먼스가 흥미는 더 일으키고 비위는 덜 거스르는 식으로 끝났다. 킬리그루가 이렇게 쓴다. 

  「기도가 끝나고 그녀(원장수녀)가 탁발수사(수렝) 쪽으로 돌아서자 그가 그녀 목에 작은 십자가들이 달린 밧줄을 걸고 세 번 돌려 묶었다. 그녀는 내내 무릎 꿇고 앉아서 줄이 바짝 조일 때까지 기도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나서는 묵주 알 세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제단에 경의를 표한 뒤 장의자로 갔다. 그건 엑소시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채플 안에는 그런 것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소파의 이 원형이 아직도 현존할까? 궁금하다.)

 

  「이 장의자 머리는 제단 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어찌나 겸허한 자세로 다가갔는지, 수도사들의 기도가 없이 그 참을성 하나만으로도 악마를 내쫓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장의자에 와서 눕더니 제 몸을 수도사가 로프 두 개로 의자와 함께 묶도록 거들었다. 허리 부위를 묶고, 허벅지며 다리를 또 묶었다. 그렇게 묶인 상태에서 성체가 담긴 상자를 들고 있는 성직자를 보자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고문을 앞둔 사람처럼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만이 내보인 특별한 겸허함과 참을성이 아니었다. 다른 수녀들도 그런 경우에 다 그렇게 했으니까. 엑소시즘이 진행됐을 때, 마귀 들린 다른 수녀가 다른 수도사를 부르더니 장의자에 누워서 단단히 묶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본래 모습일 때 얼마나 얌전하게 제단으로 나아가는지, 수녀원에서 얼마나 조신하게 걸어 다니는지를 보면 야릇한 마음이 든다. 그들의 표정과 얼굴은 신앙에 삶을 바친 처녀들답게 정숙하다. 이 원장수녀도 엑소시즘을 시작할 때는 차분하게 누워 있었다. 잠자는 듯이…」 

 

  (수렝이 원장수녀에게 엑소시즘을 시작하자 일이 분 뒤 발람이 나타났다. 사지를 뒤틀고 경련을 일으키고 하느님을 거세게 모욕하는 말이 나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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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이 서신은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1803년 2월 호 <유럽 매거진>에 실렸다. - 저자 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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