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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07.18 루덩의 악마들 9편 1
  4. 2019.07.16 루덩의 악마들 7-1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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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몇 해 동안 마귀 들림 소동이 벌어지는 중에 루덩을 방문한 저명한 영국 여행객들 가운데 젊은 존 메이틀랜드[각주:1]가 있었다. (나중에 로더데일 공작이 됐다.) 부친한테서 장로교 목사의 라틴어를 악마가 스코틀랜드 시골 아낙네의 입을 통해 바로잡아 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젊은이는 그 후 마귀 들림이라는 현상이 확실히 있다고 믿으면서 성장했다

  그런 그가 마귀에 들씌운 자들을 직접 봄으로써 그 믿음을 확고히 하려는 희망으로 대륙 여행을 두 차례 나섰다. 한 번은 앤트워프로, 또 한 번은 루덩으로. 그런데 그 두 번 다, 오호라, 실망하고 말았구나. 앤트워프에서 「나는 그저 라틴어 엑소시즘 주문을 지며리 듣고는 아주 혐오스러운 욕설을 내뱉는 뚱뚱한 네덜란드 시골 아낙들을 봤을 뿐이다.」

 

  루덩에서는 스펙터클이 좀 더 생생했지만, 그렇다고 마귀 들림 현상의 더 생생한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채플에서 진행하는 엑소시즘을 서너 번 참관했지만 프랑스어로 추잡한 노래를 부르는 방종한 여자들만 보게 되자 이게 다 협잡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루덩에 와 보면 그의 ‘성스러운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했고, 도착하자 그날 저녁 교구 교회에 가보라고 말한 예수회 수사에게 그가 불만을 토로했다.

 

  「교구 교회에서 나는 수많은 구경꾼들과 갖가지 묘기를 잘 익힌 시골 처녀 하나를 보았는데, 그래봤자 그녀는 내가 여태껏 보아 온 스무 명의 곡예사며 로프 댄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녀들 채플로 돌아오니 몇몇 제단 앞에서 여전히 열심히 작업하는 예수회 수사들과 가엾은 카푸친회 수사 한 사람을 보게 됐다. 그 수사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악마들이 제 머리 주변에서 뛰어다니고 있다는 음울한 망상에 사로잡혀 성유물들을 끊임없이 머리에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원장수녀한테 시행하는 퇴마 의식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 손바닥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이름자가 적힌 것을 보았다. 엑소시스트들은 그 이름자가 기적으로 쓰인 것임을 나더러 믿게 하려 들었다. (그러나 내 보기에 그 철자들은 질산으로 쓴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인내심이 고갈되어 수도사한테 가서 내 생각을 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마귀 들림이 진짜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래서 난 악마들한테 외국어 시험을 해 보자고 했다. 

 

  “어떤 언어로 말입니까?” 

  수도사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어떤 언어인지 알려주지는 않겠소. 그러나 당신도 이 악마들도 모두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메이틀랜드는 고향 스코틀랜드의 게일 고어를 염두에 두었을 것.] 

  그러자 예수회 수사가 악마들이 언어 테스트를 통과하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냐고 나한테 물었다. (그는 내가 교황 예찬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지옥의 악마가 다 나와도 내 신앙을 돌려놓을 수는 없소. 중요한 것은, 이 여인들이 정말 악마에 사로잡혔느냐는 점이오.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악마에 들씌웠음을 나도 공개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게요.” 

  그러자 그가 “이 악마들은 바다 건너 여행을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난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프란체스코회 수사에 의하면 이 악마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예수회 수사에 따르면 그들은 외국 여행을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외국어 이해 능력이 없음을 그런 식으로 둘러대자니 아주 옹색해 보였다. 그러자 저희 주장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수녀들과 엑소시스트들이 새롭고 (그들이 기대하기로는) 더 설득력 있는 해명을 몇 가지 추가했다

 

  이 악마들이 만약 그리스어나 고대 히브리어를 할 수 없다면,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언어로 말하지 않겠다고 그랑디에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오. 

  한데 이 역시 썩 깔끔하지 못했다. 그러자 더 확실하고 결정적인 근거가 동원됐다. 이 특별한 악마들이 방언을 한다는 건 하나님 뜻이 아닌 게요. 

  Deus non vult, 혹은 잔느 수녀가 서툰 라틴어로 말한 것처럼 Deus non volo.2 

 

  의식 수준에서 그런 격변화 실수는 언어를 잘 모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몽롱한 상태에서 우리네 말실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의식 수준에서 Deus non volo라는 말은 “나는, 하나님, 원하지 않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잔느의 더 깊숙한 자아의 표현이었으리라

  (참조: 프로이트의 실언 (1),  프로이트의 실언 (5))

 

  투시력 테스트도 언어 테스트만큼이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세리제가 그랑디에를 동료 집에 하루 머물도록 꾸미고 수녀원에 가서 엑소시즘 시행 중에 원장수녀에게 지금 주임신부가 어디 있는지 말해 보라고 했다. 잔느 수녀가 그는 다르마냑의 아성 큰 홀에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또 다른 경우, 원장수녀에게 들러붙은 악마 하나가 단언하길, 프루스트라는 고등법원 수사관이 얼마 전 죽었는데 그 영혼을 지옥까지 안내하기 위해 파리를 잠깐 다녀왔다고 했다. 조회해 보니 파리 고등법원에 프루스트라는 수사관은 전혀 없고, 악마가 말한 그날에 죽은 수사관도 없었다. 

  나중에, 이미 그랑디에를 심리하는 중에, 다른 악마는 성찬식에서 잔느 수녀의 입을 통해 그랑디에의 마법 책들이 마들렌 드브루 집에 보관돼 있다고 장담했다. 그 집을 수색했다. 마법 책자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마들렌은 경악과 수치와 모욕감을 느꼈는데, 이것이 바로 원장수녀가 분풀이 삼아 노린 점이었겠다. 

 

  악마에 사로잡힌 스토리를 기술하면서 수렝은 검증에 나선 치안판사들이 고안했거나 저명한 방문객들의 즐거움과 덕성 함양을 위해 마련된 초감각적 지각 테스트를 수녀들이 종종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힌다. 이렇게 실패가 잦다 보니, 그의 많은 동료 수사들은 수녀들이 멜랑콜리와 자궁광란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주장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악마에 들씌웠음을 의심하는 이 동료들은 루덩에 와서 하루 이틀 이상 머무는 법이 없었다고 수렝이 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영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확실히 보려면 밤낮으로 몇 달은 계속 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수렝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상주 엑소시스트로서 수렝이 단언하기를, 잔느 수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생각을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놀랄 일은 별로 없다. 잔느 수녀처럼 고도로 민감한 히스테리 환자가 수렝 신부처럼 고도로 민감한 영적 지도자와 가장 밀접하게 거의 세 해를 살았는데 웬만큼 영교를 키우지 못했다면, 그게 외려 놀라운 일이리라. 

  의사와 환자 간에 그런 종류의 영교가 심리 치료 중에 간간이 발생함을 에렌발트3 박사와 다른 연구자들이 알아냈다. 한데 악마에 들씌운 사람과 엑소시스트의 관계는 정신과 의사와 노이로제 환자의 관계보다 훨씬 더 친밀할 것이다. 

  더욱이 이 특별한 경우에서는 엑소시스트인 수렝 수사가 자기 환자인 잔느 수녀를 침공한 악마들한테 역시 들씌우게 됐다는 점도 기억하자. 그 당시 수렝은 원장수녀가 종종 주변 사람들 생각을 거뜬히 읽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교리에서 정한 바로 보자면, 악마에 사로잡혔거나 아니면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초감각적 지각 ESP는 많은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지닐 수 있는 자연적 요소이며 소수는 그걸 적극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을 수렝 수사는 잠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싶다. 그건 그 시대 다른 사람들이나 이전 시대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그저 두 가지 관념밖에 없었다. 텔레파시와 투시력이라는 건 망상이거나 허구야! 혹시, 그런 게 있다면 그때 생각을 읽는 이가 성자가 아닌 경우, 그건 악령의 짓인 게지! 

 

  수렝은 한 가지 점에서만 교회의 엄격한 정통 시각에서 벗어났다. 즉, 권위 있는 신학자들 대다수는 악마들이 상대방의 신체 변화를 추론하여 간접적으로만 사람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여긴 반면에, 그는 악마들이 사람 생각을 직접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녀들의 해머>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을 인용하여 이렇게 단언한다. 즉, 악마들은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지배할 수 없으며 육체와 신체 기능만을 홀릴 수 있다. 많은 경우 악마들은 저희가 사로잡은 사람의 육체를 전부 지배하지도 못하며 한 기관이나 두어 개 근육이나 뼈 같이 작은 부위에만 들어앉는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주치의들 중 하나인 메스나르디에가 루덩의 마귀 들림에 관여한 악마들의 이름과 악마들이 점거한 신체 부위 목록을 남겼다. 

 

  레비아탄이 원장수녀 이마를, 베헤리트는 그녀 위장을, 발람은 오른편 둘째 갈비뼈를, 이사카론은 왼편 중간 갈비뼈 밑을 차지했다. 

  루이스 수녀의 경우 에아자즈가 심장 아래에서, 카론이 이마 한복판에서 살았다. 아그네스 수녀는 심장 아래에 아스모데우스를, 위의 분문에 베헤리트를 가지고 있었다. 

  클레어 수녀의 육체에는 일곱 악마가 한꺼번에 둥지를 틀었다. 자불론이 이마에, 납달리가 오른팔에, 간혹 그랑디에를 자칭하는 상 핀이 오른편 둘째 갈비뼈에, 엘리미가 복벽 한 쪽에, 처녀들의 적이 목에, 베린이 왼편 관자노리에, 지품천사의 등급을 지니는 콘큐피센스가 왼편 갈비뼈에. 

  세라피카 수녀는 복부에 마법이 걸렸는데, 거기 물 한 방울에 바루크가 숨어 있고, 그가 없을 때면 카로가 대신했다. 데스쿠블로 수녀는 악마 엘리미의 관리 하에 마법 깃든 매발톱나무 잎사귀를 복부에 갖고 있는데, 이 엘리미가 그녀 동생 복부에 있는 주홍빛 자두나무도 동시에 감시했다. 

 

  마귀 들린 수련수녀들 가운데 리즈 블랑샤르는 양쪽 겨드랑이 밑에 악마를 지니며, 동시에 ‘부도덕한 석탄’이라 자칭하는 것이 왼쪽 둔부에 숨어 있었다. 또 다른 수녀들 경우 악마들이 배꼽 밑에, 심장 아래, 왼쪽 젖꼭지 밑에 자리 잡았다. 

  프랑수아 필라트로의 몸을 악마 넷이 점령했는데, 긴니용이 전뇌에, 방랑자인 자벨이 기관 모든 부위에 걸쳐서, 뷔페티송이 배꼽 아래, 대천사 등급인 개꼬리가 복부에 있었다. 

 

  악마들은 희생자 육체의 많은 거처에서 일시에 출격하여 기질과 기분, 감각, 환상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악마들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지는 못해도 그렇게 간접적으로 영향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 의지는 자유롭고 하나님만이 오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악마에 사로잡힌 자는 다른 사람 마음을 직접 읽을 수 없다. 만약 악마들이 가끔 초감각적 능력을 지닌 듯 보인다면, 그건 그들이 기민하고 영리하여 상대의 작은 움직임에서 내밀한 생각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덩에서 초감각적 지각이 실제 생겼을 수도 있다. (적어도 수렝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만약 그런 현상이 생겼다면, 그건 그냥 자동적으로 생긴 것이지, 조사하는 치안판사나 의사들이 실시한 테스트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엑소시스트가 악마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수녀들이 정당하게 강요당했음에도 테스트 상황에서 초감각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건 신학과 율법 게임으로 보건대 그들이 마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랑디에와 이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는 불행하게도 루덩 사건에서는 게임이 룰에 따라 진행되지 않았다

 

악령에 사로잡힌 수녀들

 

  마귀 들림의 정신적 범주에 이어 이제 물리적 범주를 살펴보자. 

  공중부양에 관해서 잔느 수녀의 악마들은 사건 초기에 은근히 밝히기를, 그들이 그랑디에와 맺은 계약에 초자연적인 공중부양을 특별히 금지한 조항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런 기적을 보고자 안달하는 사람들은 호기심이 지나치게 크며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 했다. 잔느 자신은 공중에 떠오를 수 있다고 공언한 적이 결코 없음에도, 어떤 수녀들은 “원장수녀가 두 발을 떼고 24인치 높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몇 번 봤다”고 니옹한테 밝혔다. 니옹은 정직한 사람이기에 제가 들었다는 얘기를 아마도 믿었으리라. 

  이는 누군가며 뭔가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늘 얼마나 조심스레 대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뿐

 

  다른 몇몇 수녀는 원장수녀보다 신중하지 못했다. 1634년 5월 초 악마 에아자즈가 루이스 수녀를 공중으로 3피트 들어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에 질세라 악마 케르베루스도 캐서린 수녀한테 같은 것을 하자고 제시했다. 한데, 오호라, 젊은 여인 둘 다 공중부양에 실패했구나. 

  얼마 뒤에는 아그네스 수녀 밥통에 둥지 틀고 있는 베헤리트가 로바르데몽이 쓰고 있는 모자를 벗겨 채플 지붕으로 날려 보내겠다고 떠벌렸다. 이 기적을 보려고 숱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남작의 모자는 머리통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 뒤로 공중부양을 해 보라는 요청에는 늘 정중한 거절이 따랐다. 

 

  소뮈르의 프로테스탄트 칼리지 학장으로 있는 스코틀랜드 의사 마크 덩컨이 불가사의한 괴력 테스트에 나섰다. 그는 마귀에 사로잡힌 수녀의 손목을 잡고서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나 그녀가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알아냈다. 

 

  악마들이 그렇게 약한 존재임이 드러난, 이 모욕적인 시연 이후 엑소시스트들은 마귀 들림을 못 믿겠다는 이들을 앞으로 불러내 수녀들 입에 손가락을 넣고 악마가 깨무는지 보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때는 악마들이 손가락을 제대로 깨물었다. 덩컨과 다른 이들이 그 제안을 거부하자, 올바르게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그 거부를 마귀 들림의 실체를 인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확실한 것은… 만약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초감각적 지각과 염력이 악마에 씌웠다는 (혹은 거꾸로,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확실한 표시라면 루덩의 우르술라회 수녀들은 단순한 히스테리 환자가 되는 셈이다. 

  또 그들은 악령이나 살아 계신 하나님 수중에 떨어진 게 아니라 미신에 빠지고 명성을 갈구한 일단의 엑소시스트들 손아귀에 걸려든 것이며, 몇몇 수사는 의도적으로 부정직하고 의식적으로 사악한 짓을 한 셈이 된다. 

 

  ESP나 PK의 증거가 전혀 없게 되자 엑소시스트들과 그 지지자들은 훨씬 더 빈약한 논거에 매달려야 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주장했다. 수녀들이 악마에 들씌운 것은 확실하오, 안 그렇다면 그들의 추잡한 행위와 음란하고 반종교적인 언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이오? 

  트랑킬 신부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수녀들이 어떤 방탕한 자들과 무신론자들 속에서 그런 신성 모독과 추잡함을 내쏟도록 배우기라도 했단 말이오? 

 

  앞에 언급한 니옹은 거의 자랑스러운 투로 이렇게 단언한다. “수녀들은 가장 타락한 자들조차 얼굴 붉힐 만한 추잡한 표현을 쓰면서, 알몸을 노출하고 구경꾼들을 음란한 행위로 불러들이는 행동으로 나라 안의 가장 저급한 창가의 거주자들조차 입을 떡 벌리게 했다.” 

  그들이 퍼부은 악담이며 내뱉은 저주와 신성모독으로 말하자면,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만큼 해괴한 것이었다.’4 

 

  (이야말로 얼마나 가련한 순진함이란 말인가! 오호라, 인간 두뇌가 무엇이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 ...  <계속>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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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0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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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John Maitland (1616-1682) - 스코틀랜드 정치가.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보호하기 위해 엄숙동맹에 서명. 청교도혁명 시기에 많은 역할. 찰스 2세와 함께 올리버 크롬웰 군대와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1660년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왕위를 되찾자 석방돼 주요 각료로 활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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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헉슬리가 아내며 아들과 함께

 


 

5월 초 친구이자 예수회 동료인 다티시 수사에게 그 동안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적어 보냈다. 

 

  「지난번 보낸 편지 이후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상태에 빠졌다네. 하지만 그건 내 영혼에 관해서는 신의 섭리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상태이기도 해… 난 지옥의 가장 사나운 악마 넷과 싸움을 벌이고 있어. 그 적들이 밤이고 낮이고 무수한 방법으로 암약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엑소시즘일세

  지난 석 달 반 동안 책임상 늘 악마를 상대하고 있네. 일이 어떤 지경까지 이르렀느냐 하면, 악마들이 저희가 사로잡은 사람 몸에서 나와 내 몸으로 들어와서 나를 거칠게 공격하고 무너뜨리고 괴롭히는 바람에 이제 내가 몇 시간이고 악령에 홀려 있는 것을 모든 이들이 볼 수 있을 정도라네. 한데 이 또한 (내 생각엔 내 죄 때문에) 신께서 그리 되도록 허락하신 게 아닌가 싶네.[각주:1] 

  악마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기는 정말 힘들어. 이 낯선 영이 내 영과 결합될 때, 내 의식과 내면의 자유가 말짱한 가운데 ‘제 2의 나’가 생기는 것 같다네. 마치 나한테 영혼이 둘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

  개중 하나는 몸에서 빠져 나가 몸의 사분지 일을 관장하며 다른 침입한 영이 주인 행세하며 제멋대로 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일세. 이 두 스피릿이 내 육신이라는 싸움터 안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놓고 전투를 벌이는 게야. 

 

  영혼이 양분된 것 같은데, 그 한쪽 절반에는 악마를 흉내 내는 주체가 있고 다른 절반에는 하나님께 합당하거나 그분한테 힘을 얻는 듯한 주체가 있네. 한편으론 신의 은총 아래 있는 듯 크나큰 평안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론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분께 강렬한 분노와 혐오가 일어서 그분한테서 떨어지려고 미친 듯이 버둥거린다네. (그런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기겁하겠는가.) 또한 크나큰 만족과 기쁨을 맛보면서도 동시에 저주받은 자들처럼 비탄과 악다구니를 내뱉는 참담함도 겪는다네. 

  신의 저주가 내렸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그 점이 두렵다네. 나한테 파고든 낯선 영이 내게 절망의 아픔을 찔러 넣는 느낌이야. 그러는 동안 다른 내 영혼은 아주 우쭐거리면서 그런 느낌을 죄다 우습게 여기며 그걸 야기하는 존재를 저주한다네. 심지어 내 입으로 내지르는 비명이 그 두 영혼한테서 동시에 나오는 것인 양 느끼기도 하지 뭔가. 그 비명이 환희의 소산인지 광란의 물건인지 알 수가 없다네. 성체가 내 몸 어느 구석에 닿을 때 밀려드는 전율은 (적어도 내 보기엔) 거기에 근접한다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절절한 외경심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라네. 

 

  이 두 영혼 중 하나의 충동에 따라 내 입술에 십자가 표식을 만들려 할 때, 다른 영혼이 내 손을 밀치거나 그 손가락을 이빨 사이로 넣어 사납게 깨물도록 한다네. 또 내가 알게 된 점은, 내 몸뚱이가 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는 발작의 정점에서 기도가 더 진실하고 더 감동적으로 나오며, 이때 성직자들은 마치 악마 대하듯이 나한테 저주를 퍼붓는다는 것일세. 

  내 자신이 악마로 바뀌면서 맛보는 희열을 자네한테 묘사하기 힘들다네. 한데 이때의 변화는 신께 항거함이 아니라 내 죄업으로 인해 처하게 된 불행한 상태 때문이고… 

 

  다른 마귀 들린 이들이 그런 상태의 나를 보면서 기뻐 날뛰는 걸 보고 그들 안에 있는 악마들이 나를 신나게 조롱하는 걸 듣는 일도 기쁨이야! 

  “영혼의 구제자여, 당신 자신이나 치유하지, 그래! 자, 이제 설교단에 올라설 시간이야! 어떻게 설교하는지, 한번 꼴을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주시기 이전의 상태를 경험으로 알고, 그분의 희생으로 속죄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선물인가! 그것도 들은풍월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 상태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말일세. 

  바로 이것이 지금 내가 매일 처하는 상태일세. 나 때문에 논란이 들끓는다네. 정말 악령에 홀린 것일까? 성직자가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걸까?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내가 품은 환상 때문에 신께서 내린 징벌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달리 말한다네. 나로 말하자면, 마음이 평화로워서 이 운명을 바꿀 생각이 없네. 왜냐면 내 확신으로는, 극한 상태를 접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까…」  

 

 (나중에 쓴 글에서 수렝은 이 주제를 더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구원의 앞 단계인 정화 과정의 일부로 마귀에 사로잡히도록 하느님이 역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신께서 고도의 신성함으로 끌어 올리고자 하는 영혼들을 악마가 홀리거나 지배하게끔 허용함은 은혜의 길에서 그분이 더 일반적으로 이끄심이다.」 

 

  악마들은 인간 의지를 지배할 수 없고, 저희 제물에게 죄를 지으라고 다그칠 수 없다. 악마가 저지른 신성 모독과 외설한 행위와 신에 대한 증오는 영혼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다. 거꾸로, 악마들은 실제로 좋은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 두려운 짓을 자발적으로 범했다면 영혼이 굴욕을 느끼도록 하니까. 

  악령들이 사람들 정신에 채우는 이 굴욕감과 고통과 불안 따위는 바로 ‘모든 자기본위를 심장 속살과 골수에 이르기까지 다 태워 버리는 호된 시련’인 것. 한데, 하나님 역시 고통 받는 영혼에 작용하시니, 그분의 역사는 ‘아주 강력하고 아주 계시적이고 아주 황홀해서, 전능자의 자비를 힘입은 영혼은 지극히 매혹적인 것이 된다’) 

 

  로마에 있는 다티시 신부한테 보낸 편지를 맺으면서 수렝은 자신의 고백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내 고해사제와 상급자들 외에 유일하게 자네한테만 이런 비밀을 털어 놓았네.’ 그 신뢰는 안타깝게도 잘못된 것이었다. 

  다티시 신부는 이 편지를 별의별 사람들한테 다 보여 주었다. 편지 사본이 수없이 나돌다가, 몇 달 뒤에는 아예 신문처럼 인쇄돼 나오기까지 했다. 사형 선고받은 살인자나 다리 여섯 개 달린 송아지 같이 수렝은 저속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뉴스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엑소시즘을 받는 수녀

 

  이제부터는 레비아탄과 이사카론이 그에게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가 공격 받고 영혼이 지배된 가운데서도 수렝은 잔느 수녀의 정화와 구제라는 사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달아나면 쫓아갔다. 구석에 몰린 그녀가 몸을 돌려 욕설을 퍼부으며 사납게 덤벼들었다. 그래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 발밑에 무릎 꺾고 앉아 기도문을 읽었다. 때론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고집 부리는 귓전에 랄망 신부의 영적 교리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내면의 완성, 성령 앞에서 온유함, 마음의 정화, 하느님 뜻에 순종…

 

  그녀의 악마들이 몸을 뒤틀며 뜻 모를 말을 내뱉었지만, 그가 계속했다. 그의 마음에서도 레비아탄이 낄낄거리고 부도덕의 악령인 이사카론이 내뱉는 외설을 들을 수 있었음에도, 계속했다. 

 

  그러나 수렝은 악마들하고만 싸운 게 아니었다. 원장수녀는 정신이 멀쩡한 시간에도 (어쩌면, 정신 멀쩡할 때 특히 더) 여전히 그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지 않은 까닭은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겁냈으니까. 

  사실 그녀는 제 정신이 돌아온 시간에는 자신이 절반은 위선자요 절반은 참회하지 않는 죄인이며 완전한 히스테리 환자임을 잘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을 그가 꿰뚫어볼까 겁냈다. 그가 자기한테 마음을 열라고 애원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악귀의 으르렁거림 아니면 고백할 게 전혀 없다는 쏘아붙임. 

 

  마귀 들린 사람과 엑소시스트의 관계가 더 복잡해진 것은… 그렇게나 겁내고 미워한 남자한테 잔느가 부활절 주간에 문득 ‘아주 사악한 육욕과 걷잡을 수 없는 애정’을 품게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비밀을 제 입으로 고백할 수 없었는데, 결국 성체 앞에서 세 시간을 기도한 끝에 이 ‘수치스러운 유혹’을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바로 수렝이었다. 

  잔느 수녀는 ‘그 고백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문이 다 막히고 말았다’고 기록한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그가 곧 떠났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가 마음을 다잡았다. 수렝 수사에 대한 행동 노선만이 아니라 내 생활방식 자체를 몽땅 바꿀 때가 된 거야! 

 

  그것은 표면적 의지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 아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악령들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읽으려 하는데 단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 존재 안에 제 영혼을 붙잡아두려 하자 즉각 머리가 쪼개지는 듯이 두통이 생기면서 ‘뒤숭숭한 혼란과 미약함’이 수반됐다. 그런 증상에 대처할 최고 요법으로 수렝이 제시한 길은 단 하나, 묵상기도. 그녀가 해 보겠노라고 동의했다. 악마들이 두 배로 맹렬하게 날뛰었다. 내면의 완성이라는 언급 하나에 악마들이 그녀 육체를 발광하게 만들었다. 

 

  수렝이 그녀를 탁자에 눕히고 밧줄로 꽁꽁 묶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자해에 대비했다. 곁에서 무릎을 꺾고 그녀 귀에 대고 명상의 이로움을 속삭였다

  「내가 취한 주된 주제는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 뜻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세 가지 요점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가장 단순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이런 의식이 날마다 반복됐다. 수술 앞둔 사람처럼 묶인 채 누워서 원장수녀는 신의 은총만 기대했다. 그녀가 버둥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소란 속에서도 선량한 수도사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때로 레비아탄이 수녀한테서 엑소시스트로 옮겨 붙으면, 수렝이 갑자기 언어 능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원장수녀한테서 악귀의 요란한 웃음이 와르르 터져 나왔다. 그러면 기도가, 속삭이는 가르침이, 끊긴 대목부터 다시 시작됐다. 

  악마들이 지나치게 광포하게 굴 때면, 수렝이 은제 상자에서 축복받은 면병을 꺼내 원장수녀의 가슴이나 이마에 올려놓았다. 처절한 발작이 끝나면 「그녀는 커다란 믿음으로 가득 찼고, 난 신께서 내게 넌지시 이른 것을 그녀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내 말을 아주 주의 깊게 듣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말씀이 그녀 가슴에 끼친 작용은 아주 커서… 그녀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것은 변신이요 전환이었다. 그러나 히스테리라는 맥락에서 벌어진 변신이요, 상상의 무대에서 일어난 전환일 뿐이었다

 

  8년 전, 당시 수녀원장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면서 잔느는 제 2의 테레사 성녀가 되겠는 야심을 일시적으로 과시한 바 있다. 사실은 그때도 그녀의 위선적 행위에 늙은 수녀원장 외에는 아무도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원장수녀로 지명되면서 수녀원을 운영해 왔다. 신비주의에 대한 흥미는 점차 잃기 시작했다

 

수녀를 유혹하는 악령

 

  그 뒤 뜬금없이 그랑디에를 두고 에로틱한 착란에 빠지게 됐다. 노이로제가 갈수록 더 깊어졌다. 미뇽이 악마들 얘기를 늘어놓고, 엑소시즘을 시행하고 루이 조프리디 사건에 관해 미카엘리스가 쓴 책을 읽으라고 그녀한테 주었다. 그녀가 그 책을 읽은 뒤 곧 악령에 사로잡힌 수녀들의 여왕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다. 그때 그녀의 야심은 모든 면에서, 그러니까 신성 모독이며 꿀꿀대는 소리며 음란한 말이며 곡예사 같은 쇼에서, 다른 수녀들을 다 능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어서 「내 영혼의 모든 무질서가 내 성격에서 나오며, 그런 무질서를 두고 외부 원인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을 비난해야 한다.」 미카엘리스와 미뇽의 영향 하에 잔느의 타고난 결함들이 일곱 악마로 구체화됐다. 그리고 이제 그 악마들은 저희 독자적인 삶을 살며 그녀의 주인이 되었다

 

  그것들한테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의 악습과 추잡한 성향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끊임없이 하는 말대로 부지런히 기도하고 영혼을 신성한 빛에 드러내야 했다. 수렝의 열성이 전달됐다. 그 사람의 성심에 그녀가 감동했으며, 그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심오한 경험으로써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강박관념 속에서도 깨달았다.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한 뒤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탄복하는 많은 군중 앞에서 가능한 한 극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했다

  마귀 들린 수녀들의 여왕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성자가 되고자 했다. 혹은 성자로 알려지고 이제 현세에서 시성되고 이적을 행하고 기도문에 실려 사람들 입에 오르기를 원했는지도… 

 

  자신에게 고유한, 마르지 않는 에너지를 가지고 새로운 역할에 몰입했다. 먼저 하루 삼십 분씩 묵상기도를 하다가 곧 서너 시간으로 늘렸다. 그러면서 계시를 받들기에 합당하게끔 가장 모진 고행에 들어섰다. 깃털 이부자리를 딱딱한 판자로 바꾸고, 음식에는 소스 대신 쑥을 갈아 뿌렸다. 헤어 셔츠[각주:2]를 걸치고 못들이 박힌 허리띠를 맸다. 하루에 적어도 세 차례 제 몸에 채찍질을 가했으며, 가끔씩은 (그녀가 단언하는 바로는) 24시간 중에 일곱 시간 내내 채찍 고행을 치르기도 했다. 

 

  고행용 채찍을 신봉하는 수렝이 그녀를 여러 모로 격려했다. 교회 의식을 비웃는 악마들이 호된 채찍 맛을 보면 잠시라도 달아나는 일이 잦다는 점을 그는 오래전에 알아차렸다. 또 채찍은 초자연적인 마귀 들림에 그렇듯이 자연적인 멜랑콜리 치유에도 잘 먹혔다. 테레사 성녀도 왕년에 같은 현상을 알아냈다. 

 

  「(이 멜랑콜리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접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는데,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악령을 정복하는 것 외에 다른 치유법은 없어요. 만약 말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징벌에 의존할 필요가 있고, 가벼운 징벌이 작용하지 않으면 중한 징벌이 필수지요.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아픈 자매를 건강한 사람처럼 체벌한다는 것이 부당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할 것은 이 노이로제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영혼에도 엄청난 해를 끼친다는 점이다. 테레사 성녀가 계속 증언한다. 

  「신체 고장은 규율이 없고 겸허가 부족하고 잘못 훈련된 스피릿에서 아주 종종 비롯된다고 난 확실히 믿어요. (멜랑콜리의) 이런 기질을 핑계 삼아 사탄은 많은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획책하지요. 그런 일은 예전보다 우리 시대에 와서 더 흔한데, 그건 자기본위며 자유방임 따위가 이제는 다 멜랑콜리라 불리니까 그래요.」 

 

  의지의 절대적 자유와 인성의 전적인 타락을 당연시하던 시대에는 신경증 환자 치료에 이런 물리적 수단이 대단히 효과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몇몇 경우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 환자한테 필요한 치료는 스스로 가하는 충격 요법보다 ‘편안하고 진솔한 대화’이다. 이 방법이 적어도 현재의 지적 풍토에 더 잘 어울린다

 

  엑소시즘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구경꾼들이 드나드는 통에 수녀원 채플은 잔느 수녀와 영적 지도자가 차분하게 대화 나누기엔 많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래서 1635년 초여름부터 그들이 숙사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더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임시변통으로 쇠창살을 세워 방을 두 공간으로 나누었다. 

  쇠창살을 통해 수렝이 가르침을 건네고 신비주의 신학을 상세히 해석해 주었다. 쇠창살을 통해 원장수녀는 자신이 겪은 유혹이며 악령들과 벌인 싸움, 묵상기도 중에 겪은 (이미 놀라운) 경험 등을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침묵 속에서 함께 명상에 잠기곤 했을 것이다

 

쇠창살 너머로 대화하는 수녀

 

  수렝의 말에 따르면, 다락방은 ‘천사들의 집이요 환희의 파라다이스’가 되었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은 특별한 은혜를 맛보았다. 어느 날 예수가 수난 받던 중에 처한 모욕을 명상하는 동안 잔느가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리고 황홀경이 끝나자 창살 사이로 수렝에게 알렸다. “난 입맞춤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께 아주 가까이 다가갔어요.” 

 

  일련의 이런 과정을 다른 엑소시스트들은 어떻게 여겼을까? 루덩 주민들 의견은 또 어땠을까? 수렝이 우리한테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이 수상쩍다는 듯 수군거렸다. 이 예수회 수사는 귀신들린 수녀하고 만날 뭘 하는 거지? 내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네는 이해도 못할 거외다. 이 마귀에 사로잡힌 영혼한테서 나는 천국 광채와 지옥 불을 동시에 보는 것 같았소. 그 영혼의 한 쪽은 사랑으로, 다른 쪽은 증오로 채워졌는데, 그 두 힘이 그녀를 각각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오.」 

 

  (하지만 수렝이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봤다. ...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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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3-3편 1

루덩의 악마들 2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4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이 악귀 들씌움은 4월 6일 성 금요일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수렝이 처음 악마에 들씌웠다고 느낀 1월 19일부터 이날까지 마귀 들림 증상은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었다. - 저자 주. [본문으로]
  2. hair shirt - 고행자가 입는 셔츠, 말이나 낙타 등의 털을 섞어 짠 마소직(馬巢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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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악마에 들씌웠다고 하는 원장수녀 잔느

 


9

 

  마법사 그랑디에가 사라졌는데도 에아자즈자불론 같은 악마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이 사실을 많은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지도 않은 것이, 근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 결과가 늘 따르는 법이니까

  수녀들의 히스테리를 악마라는 형상으로 구체화한 것은 바로 미뇽과 엑소시스트들이었고, 이제 악마들을 여전히 붙잡아 두고 있는 것 또한 그들이었다. 주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하루 두 번씩, 마귀 들린 수녀들이 익숙한 공연을 펼쳤다. 예상한 대로 그들 상태는 그랑디에가 살아 있을 때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외려 좀 더 악화됐다. 

 

수녀들을 상대로 계속되는 엑소시즘

 

  9월 말경 로바르데몽이 예수회에 도움을 요청했노라고 추기경께 보고했다. 예수회 수사들은 학식과 재능을 겸비했다는 평판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을 섭렵한 그들 권위에 의존한다면 군중은 ‘루덩의 마귀 들림이 명백한 사실임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교단의 비텔레스키 장군을 비롯해 많은 예수회원들은 그 동안 이 마귀 들림 사건에 관여하기를 정중히 거부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도 달리 두수가 없었다. 로바르데몽의 요청 이후 왕명이 신속하게 나왔다. 한층 더 어려운 인물인 추기경 예하께서 국왕의 입을 통해 명하니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어! 

 

  1634년 12월 15일 예수회 수사 넷이 루덩에 도착했다. 그들 가운데 장 조셉 수렝이 있었다. 아키텐 수도회 관구장인 보이르 수사가 젊은 그를 엑소시스트로 선택했는데, 나중에 협의회 조언에 따라 지시를 철회했다. 하지만 늦었다. 수렝이 이미 마렌을 떠나 루덩으로 향한 것. 그렇게 하여 그가 임무를 맡게 됐다. 

 

  그때 수렝 나이 서른 넷, nel mezzo del cammin,[각주:1] 성격이 형성됐고 사고방식이 굳어졌다. 동료 수도사들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종교적 열의를 인정하고 금욕 생활과 기독교적 완성을 향해 달리는 열정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들의 감탄은 뭔가 조마조마한 염려로 인해 다소 줄어들었다. 수렝 수사가 신앙의 길에서 영웅적 덕목을 갖추기는 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운 동료들과 상급자들은 그 인격에서 뭔가 불안한 특징을 본 것이다. 

  그들은 그의 언행에서 어떤 과도함과 터무니없음을 간파했다. 그가 즐겨 하는 말은 이랬다. “하나님 일에 관해 지극한 생각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께 결코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오!” 

 

  물론 맞는 말이었다. 그 지극한 생각이 옳은 방향에 있다면 말이다. 이 젊은 수도사의 극단적인 견해 중 일부는 상당히 정통적이긴 해도 분별이라는 탄탄대로에서 일탈한 듯 보였다. 예를 들어,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사는 이들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마치 적수인 듯이 그들한테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입장은 그와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 먹는 형제들을 썩 편치 않게 했을 것이다. 

  반사회적이라 부를 만한 극단적인 생각들로 인해 경건함에서도 지나치게 단호했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허영심을 신성 모독처럼 몹시 슬퍼하고, 우리의 무지와 경솔함을 가장 준엄하게 벌해야 합니다.” 

 

  완성을 위한 이 냉혹한 엄격주의에다 이른바 ‘특별한 은혜’에 대한 관심이 자못 컸는데, 그런 면을 그의 선배와 동료들은 무분별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런 ‘특별한 은혜’란 성인들에게 허용돼 가끔 이적을 행하기도 하지만 구원과 신성화에는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이었으니까

  그의 친구인 앙지노 신부가 여러 해 지나 이렇게 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런 측면에 강하게 이끌렸으며, 거기에 의미를 지나치게 많이 부여했다. 그런 쪽에서 그저 비위를 맞추고, 그가 다수에겐 익숙지 않고 평범치 않은 길을 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루앙에서 ‘2차 수련기’를 마치고 네 해쯤 보낸 항구 도시 마렌에서 수렝은 주목할 만한 두 여인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은 마담 베르제, 부유하고 신을 공경하는 상인의 아내였으며, 또 하나는 마들렌 부아네, 프로테스탄트 땜장이의 딸이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 

  이 둘은 적극적인 명상가요 (특히 베르제 부인이) ‘특별한 은혜’의 혜택을 입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계시와 법열에 관심이 얼마나 컸든지 수렝이 베르제 부인의 일기를 수십 쪽이나 옮겨 적고 두 여인을 자세히 설명하는 글을 작성하여 친구들이 돌려가며 읽게 했다. 물론 그 자체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본질상 기연미연하며 함정과 위험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대상에 왜 그렇게 눈길을 집중해야 하는 것인가? 평범한 은혜로도 영혼이 천국에 이를진대, 어째서 특별한 은혜에 그렇게 안달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기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하나님인지 악마인지, 혹은 상상의 소산이거나 협잡의 산물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판국에 말이다

  만약 수렝 수사가 완성으로 나아가기 원했다면 수도회 다른 수사들이 필요로 하고 좇아가는 왕도를 따라야 했으리라. 순명과 적극적 열정의 길, 육성기도와 광범위한 명상의 길을

 

  그를 비판하는 이들이 볼 때 더 안 좋은 것은, 수렝이 아픈 사람이며 노이로제의, 혹은 당시 표현대로 ‘멜랑콜리’의, 희생자였다는 점이다. 루덩에 오기 두 해쯤 전에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심신증 장애로 고생했다. 육체를 조금만 움직이려 들어도 날카로운 근육통이 생겼다. 글을 읽으려 하면 견디기 힘든 두통이 났다. 정신은 흐리고 혼란스러웠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다.」 

  그의 행위와 가르침의 특이함이 혹여 건강하지 못한 신체에 살던 아픈 정신의 소산은 아니었을지? 

 

  많은 동료 수도사들은 마지막까지도 수녀들이 정말 마귀에 들린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고 수렝은 기록한다. 한데 그 자신은 루덩에 오기 전부터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초자연적인 것이 늘 확연하고 놀랄 만큼 가득하다고 믿었다. 그런 확신은 또 그가 남을 대단히 잘 믿는 기질이 되게끔 했다. 누군가가 성인이나 천사나 악마들과 접촉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걸 의심이나 비판도 하지 않고 다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영적 분별력[각주:2]이 상당히 부족했다

  사실 그는 판단력과 평범한 상식조차 결여된 상태였다. 모순적이지만 제법 널리 퍼진 현상이 있지 않은가. 즉,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면서도 어떤 구석에서는 뭔가 좀 어수룩한 사람 말이다

  테스트 씨가 제 얘기를 하면서 맨 처음 꺼낸 말을 수렝은 결코 편하게 입에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리석음은 나의 강점이 아니야.”[각주:3] 예리한 두뇌며 고결함과 더불어 어리석음 또한 그의 강점이었다. 

 

  트랑킬과 미뇽, 카르멜회 수도사들이 벌인 공개 엑소시즘에서 수렝은 마귀에 사로잡힌 자들을 처음 봤다. 마귀 들림이 실제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루덩에 와서 목격한 장면들로 인해 그 확신이 한층 더 굳어졌다. 이제 그는 악마들이 아주 진짜임을 알게 됐고, 「불행한 수녀들을 두고 신께서 무한한 연민을 품도록 하셨기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그는 연민을 낭비했다. 혹은 적어도 잘못 발휘했다. 잔느 수녀가 남긴 글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악마에 들렸다는 수녀들을 대상으로 엑소시즘

 

  「악마는 내가 흥분 상태에서 받아들인 어떤 쾌락과 내 몸에 행한 특별한 일들로 종종 나를 즐겁게 했다.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크나큰 기쁨을 얻었고, 다른 자매들보다 내가 더 힘겨운 고통을 겪고 있다고 구경꾼들한테 보인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하지만 쾌감이란 지나치게 늘어지다 보면 그 정반대의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엑소시스트들이 너무 과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마귀 들림은 즐거운 것이 못 됐다. 적당히만 한다면 공개 엑소시즘은 이 젊은 여인들한테 여느 향연처럼 본질상 유쾌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엄격한 도덕성을 가지고 자성하는 데 익숙해진 그들이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비록 악마로 인해 발작을 일으킨 상태에서 나온 언행에는 영혼이 책임질 게 전혀 없다고 엑소시스트들이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잔느 수녀는 늘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그건 놀랍지도 않아. 왜냐하면 내 심신 기능 부조는 대개 나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악마는 내가 제공한 자극에 작용했을 뿐임을 아주 명백히 감지했으니까.」 광포하게 행동할 때조차, 본인이 그걸 자유로이 원했기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혼란스럽게도 난 확실히 느꼈어. 악마가 그런 짓을 하게끔 내가 만들었으며, 내가 협조하지 않았다면 악마에겐 그렇게 할 힘이 없었을 거야! 강하게 저항하면, 그 모든 마귀 들림 징후가 올 때만큼이나 한순간에 사라졌지. 하지만, 오호라, 악마들에게 저항하고픈 마음이 그리 자주 들지 않았던 것을.」 

 

  수녀들은 발작 상태에서 저지른 언행이 아니라 그 발작에 저항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를 범했음을 인지하면서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죄를 확신하다가 방탕하게 펼쳐지는 마귀 들림과 엑소시즘은 마치 행복한 휴일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광란과 꼴불견을 연출할 때가 아니라 중간 중간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수렝한테는 원장수녀의 악마를 내쫓는 임무가 루덩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부여됐다. 예수회 수사들한테 도움을 청했으며, 아키텐 지방에서 가장 경건하고 능력 있는 젊은 수도사를 당신의 영적 상담자로 지정했소. 그런 얘기를 로바르데몽한테 들은 잔느의 얼굴이 대뜸 퍼렇게 질렸다. 

 

  예수회 수사들이란 언제든 쉽게 속일 수 있는 카푸친회나 카르멜회 수사들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들은 총명하고 공부를 많이 했어, 더욱이 이 수렝 수도사는 정결하고 덕이 높은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이요, 위대한 명상가로 유명하잖아. 나를 당장 꿰뚫어볼 테고, 내가 언제 정말 마귀에 들씌웠으며 언제 쇼를 하거나 악마들에게 자진 협조하는지 알아차릴 텐데. 

  그녀가 로바르데몽에게 이전 엑소시스트들을 계속 붙여 달라고 애원했다. 상냥한 참사회 위원 미뇽과 선량한 트랑킬 수사와 훌륭한 카르멜회 수사들한테 계속 맡겨 주세요. 그러나 로바르데몽과 그의 상전인 리슐리외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들에겐 마법의 실체를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게 해주는 확인이 필요했고, 그건 예수회 수사들만 제공할 수 있었다. 잔느 수녀가 마지못해 따랐다. 

 

  수렝이 도착할 때까지 남은 몇 주일 동안 그녀가 새 엑소시스트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자 진력했다. 다른 수녀원들에 있는 지인들한테 편지로 정보를 청하고, 지역 예수회 수사들한테도 세세하게 캐물었다. 유일한 목적은 「나한테 지정된 사람의 기질을 연구하고 최대한 많이 알아낸 뒤 그에게 내 영혼의 상태를 전혀 알리지 않으면서 될 수 있는 한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것이었어. 이런 결심은 아주 확고했다.」 

 

  새 엑소시스트가 도착했을 때는, 그가 마렌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녀가 제법 많이 알게 됐고, 그래서 ‘부아네트’ 얘기를 빈정거리는 투로 늘어놓았다. (잔느의 악마들은 마들렌 부아네를 그렇게 놀림조로 불렀다.) 그 말을 듣고 수렝이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지? 이야말로 진짜 기적이로군! 비록 지옥의 기적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명백한 사실이야. 

 

  잔느가 새 엑소시스트에게 제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외려 심한 반감을 품고, 그걸 드러내면서 결심한 대로 움직였다. 그래서 수렝이 그녀의 영혼 상태를 알아보려고 질문할 때마다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그녀 말로는, 「악마들이 안팎에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다가서면 즉각 달아났으며, 그가 제 말을 들어보라고 몰아세우면 킥킥대며 혀를 내밀었다. 그녀 말대로라면, 「나는 그의 인내를 여러 모로 시험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너그러워서 그런 당돌한 언행을 전부 악마의 소행으로 돌렸다.」 

 

  수녀들이 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악마들 탓이라 함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죄를 범했다는 확신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원장수녀한테는 다른 자매들보다도 더 큰 죄책감에 짓눌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랑디에가 처형된 뒤 곧 정욕의 악마 이사카론이 「내 느슨함을 이용하여 순결을 깨려고 사납게 유혹했어. 그가 내 육신에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격렬하게 작용했지. 그런 뒤 악마는 내 뱃속에서 아이가 크고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주입했고, 난 그 사실을 굳게 믿어서 모든 증상을 내보인 거야.」 

 

  자신의 재액을 다른 수녀들한테 고백하자, 곧 많은 악마들이 그녀가 임신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이 사건을 엑소시스트들이 전권대행에게 알렸고, 전권대행은 추기경 예하께 서면으로 보고했다. 알고 보니, 벌써 석 달 동안 달거리가 없으며 헛구역질이 심하고 소화불량에다 가슴에서 젖이 나오고 배가 눈에 띄게 불렀습니다. 

 

  (몇 주일이 흐르면서 원장수녀가 심신의 고통에 한층 더 휘둘렸다. 정말 임신한 것이라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이끄는 수녀원과 우르술라회 전체가 무시무시한 치욕을 맛볼 텐데.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이사카론의 방문. 악마가 거의 밤마다 찾아왔다...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0편 5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6

루덩의 악마들 7-2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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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단테의 <신곡>의 첫 구절.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우리 인생 여정 중반에 접어들어… [본문으로]</신곡>
  2. discernment of spirits - 가톨릭신학 이론에서, 영적 동인(動因)들을 그 도덕적 영향으로 평가하고 판단함을 가리키는 용어. 성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룰이 있다. [본문으로]
  3. 프랑스의 시인, 에세이스트, 철학자 폴 발레리(1871-1945)의 소설 <테스트 씨와 보낸 저녁>의 유명한 오프닝. "Stupidity is not my strong suit" [본문으로]</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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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악마의 기운

 


 

  우리의 두 번째 사례는 최면에 걸린 사람으로, 최면에 의해 강경증(强勁症) 상태로 들어선 경우이다. 최면의 본질이며 그 암시가 자율신경계에 어떻게 영향 끼치는지를 우리는 아직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면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상태에서 그들 잠재의식의 어떤 부분이 최면술사가 건넨 암시에 몸이 따르게 한다는 것쯤은 우리가 알고 있다. 

  피험자가 최면에 잘 걸리는 타입이라면 노련한 최면술사는 그를 언제든 강경증 같은 경직 상태로 유도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경직 상태를 루덩의 독실한 신자들은 사탄의 소행으로 여긴 것이다. 정말 그랬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개념으로 보아 그런 희귀한 현상은 수녀들이 속임수를 썼거나, 아니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 분명하니까. 

 

  만약 당신이 아리스토텔레스며 성 아우구스티누스, 갈레노스[각주:1], 아랍 학자들의 저술을 다 읽는다 해도,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언급은 눈곱만치도 없다는 점을 발견하리라. 우리네 선조들에겐 한 쪽에 영혼이나 의식적인 자아가, 또 다른 쪽엔 하나님과 성인들, 일단의 선하고 악한 스피릿들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의식적 자아의 활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어떤 면에서는 더 효율적인 무의식의 활동이라는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개념을 그 시대에는 도저히 갖출 수 없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당대 이론에는 무의식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지금 우리가 무의식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희귀한 현상을 그때는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 인간 외적인, 외계 혼령들의 행위로 치부해야 했다. 그러니까 발작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강경증은 속임수 아니면 악마들이 들끓는다는 징후였다

 

  토마스 킬리그루[각주:2]가 젊은 시절인 1635년 가을 루덩에서 시행된 한 엑소시즘을 참관했다. 진행을 맡은 탁발수사가 이 영국인에게 수녀의 돌덩이 같은 팔다리를 만져 보라고 했다. 사탄의 파워와 그보다 더 큰 전투 교회[각주:3] 파워를 느끼고 인정하고서, 하나님 뜻이라면, 이단적 종교를 버리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의미였다. 친구 월터 몬테규는 그 이전 해에 그렇게 했다. 이 사건을 묘사하는 편지에서 킬리그루가 이렇게 썼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돌덩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단단한 근육과 강한 팔과 뻣뻣한 다리만 느꼈을 뿐.」 

  (수녀들이 프라이버시와 존중 받을 권리를 얼마나 철저히 박탈당했는지에 주목하자. 엑소시즘을 시행한 수도사는 장터에서 여흥 돋우는 쇼의 여리꾼처럼 행동한다. “여러분, 이쪽으로 오시오! 주저 말고! 눈으로 못 믿겠다면 만져 볼 수 있어요. 이 뚱뚱한 여인의 허벅지를 꼬집어 봐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 백 프로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겁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반려자들이 카바레 사회자나 서커스 열광자로 바뀌곤 했다.) 

 

  킬리그루의 편지가 이어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수녀 몸뚱이가 아주 딱딱하고 쇳덩이보다도 무거웠다고 긍정한다. 필경 그들은 나보다 믿음이 더 컸고, 그래서 기적이 나보다 그들한테 더 잘 보였나 보다.」 

  여기서 ‘기적’이라는 단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수녀들이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것이라면 시체처럼 경직된 사지는 초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데카르트가 등장하고 인간 본성에 관해 더 ‘과학적인’ 이론이 웬만큼 퍼졌다 해도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적었다. 외려 몇몇 측면에서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비현실적인 관점을 견지하게 됐다. 악마를 그 누구도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악마의 힘으로 치부하던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적어도 이전의 엑소시스트들은 트랜스나 강경증, 다중인격, 초감각적 지각 같은 사실을 반박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 기이한 현상을 데카르트 이후에 등장한 심리학자들은 난센스며 허구로 여기거나, 그게 아니라면 ‘상상의 작업’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을 보였다. 과학자들에게 ‘상상’이란 ‘환상’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 현상들은 (메스머[각주:4]가 자기장 최면으로 효과를 본 치료 같은 것은) 무시하는 게 더 안전하고 적절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념을 데카르트가 기하학적 범주에 집어넣고자 강력히 시도한 끝에 뭔가 경탄할 정도로 ‘명료한 생각들’이 형성됐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명료한 생각들은 거대한 의미를 지니는 어떤 사실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이 사실들에 데카르트 이전 철학자들은 진지하게 대했지만, 당시 지배적인 몇몇 심리 이론의 영향으로 그 사실들을 그저 초자연적인 원인 탓으로 돌려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이해되지 않는 사실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악마를 들먹이지 않고도 이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스피릿’이나 ‘순수 에고’나 ‘아트만’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인간 마인드를 데카르트 철학의 영혼이며 데카르트 이전 시대의 영혼과는 완연히 다른 뭔가로 납득할 수 있다. 

  예전 철학자들은 영혼이 단일하며 나뉘지 않고 불멸이라는 도그마를 굳게 믿었다. 한데 우리가 보기에 영혼은 명백히 복합적 요소들의 혼합이며, 요소들 덩어리인 영혼은 분해되고, 육신이 죽은 뒤에도 뭔가 다른 형태를 띠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 

 

  불멸은 사이키[각주:5]가 아니라 스피릿에 속하며, 이때 사이키가 선택한다면 스피릿과 합치될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성의 근간에는 의식이 있다. 이성과 의식은 제 육체와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존재의 육체나 다른 이성이며 의식과는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인간 육신을 자율 규제하는 오토마톤으로 간주했고, 그래서 다른 부차적 영혼들이 존재할 필요성을 못 봤다. 한데 이제 우리는 의식적인 ‘나’와 ‘생리적 무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사이에 잠재의식의 폭넓은 활동 범주가 있다고 짐작한다. 

 

  게다가 만약 초감각적 작용과 사이코키네시스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무의식 수준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 의식이며 물적 대상들에 직접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데카르트와 그 후계자들이 무시하기로 하고 또 그의 전배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악마의 틈입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던, 그 기괴한 해프닝들을 오늘날 우리는 인간 심리의 자연스러운 가능성으로 돌린다. 또 이 심리의 영역이며 힘과 약점은 오늘날 과학적 관념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 당시 사람들은 루덩에서 발생한 일들을 협잡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순전히 심리적 측면에서는 마법과 악마의 간계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수녀들 행동을 순전히 심리적 측면이 아니라 생리적 원인으로 돌리려 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잔느 수녀가 내보인 것 같은 현상을 생리 기능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며, 물리적 대응 수단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 이론을 굳게 믿는 이들은 회초리라는, 오래 된 수단을 써 보라고 제시했다

 

  탈망[각주:6]의 기록을 보면, 쿠드레-몽팡시에 후작은 귀신들렸다 하여 엑소시스트들 손에 맡겼던 딸 둘을 집으로 데려간 뒤 ‘잘 먹이고 호되게 회초리질을 했다. 그러자 악마가 즉각 달아났다.’ 루덩에서도 마귀 들림의 나중 단계에서는 채찍질이 아주 많이 처방됐다. 수렝의 기록을 보면, 교회 의식을 비웃기만 하던 악마들이 회초리를 보자 부리나케 달아난 경우가 왕왕 생겼다. 

 

  많은 경우 예전 회초리질은 아마도 현대의 충격 요법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즉, 무의식이 육체적 고통을 아주 겁내어, 그런 고통을 또 겪느니 차라리 미친 듯 행동하기를 그만 두는 식.[각주:7] 19세기 초까지도 광기가 확실하다 싶은 경우에는 채찍질을 동원한 충격 요법이 어김없이 적용됐다. 

 

베들람의 아늑한 방에서 

스물 하나 될 때까지 나는 

단단한 수갑 차고 달콤한 채찍 맞으며 

기도와 절식도 원 없이 했구나. 

이제 난 노래하니, “아무 음식이든, 

먹을거리든 마시고 입을 거리가 좀 있어요? 

아주머니, 혹은 하녀여, 날 겁내지 말아요. 

불쌍한 톰은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각주:8]

 

  불쌍한 톰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신민이었다. 그러나 2백 년이 지나 광기 어린 조지 3세 치하에서도 잉글랜드 의회 양원은 궁정 의사들한테 미친 왕을 채찍질하도록 위임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평범한 노이로제나 히스테리에 회초리질이 효과를 본다고 간주됐지만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다. 이런 질환은 당시 의학 이론에 따르면 흑담즙이 잘못된 부위에 지나치게 누적돼 생겼다. 로버트 버튼은 이렇게 말한다. 

  「갈레노스는 이런 질환을 모두 검은 냉기 탓으로 돌리면서, 이 질병 탓에 스피릿이 검어지며 뇌 물질이 흐리고 어두워진다고 생각한다. 또 그 결과 주변 대상이 다 끔찍하게 보이며, 마인드 자체는 검은 체액에서 나오는 이 어둡고 칙칙하고 짙은 기운 때문에 늘 어둠과 공포와 비탄에 잠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갈레노스의 이런 판단을 두고 아베로에스[각주:9]가 비웃고 작센의 헤라클레스도 빈정댄다. 그러나 엘레니우스 몬탈투스, 로도비쿠스 메르카투스, 알토마루스, 기네리우스, 브라이트, 라우렌티우스 발레시우스 등은 갈레노스의 관점에 적극 동조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흑담즙이 생성되고, 침울함은 스피릿을 흐리게 하고, 흐려진 스피릿이 공포와 비탄을 야기한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이다. 라우렌티우스는 검은 기운이 특히 횡격막을 공격하고 이어서 정신을 공격한다고 추정하는데, 그건 태양이 구름에 가려 흐려지는 것과 같다. 

  갈레노스의 견해에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거의 모든 저자를 비롯해 라틴계 저자들도 다 동의한다.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겁을 내듯이, 흑담즙질 성향인 사람들은 내면에 늘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검은 기운이 (예수회 신부 토마스 라이트가 애착에 관한 소론에서 주장하듯이) 심장 부근의 검은 피에서 나오든지 혹은 위장이나 비장, 횡격막, 혹은 뭔가 잘못된 부위들 전부에서 나오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검은 기운이 정신을 집요한 감옥에 잡아두고 끝없는 공포와 불안, 슬픔 따위 힘든 감정으로 괴롭힌다는 점.」 

 

  그런 식으로, 생리적 관점에서 정신질환은 건강하지 못한 혈액이나 병든 내장에서 발생하는 연기나 안개 같은 것으로 여겼으며, 이 ‘검은 기운’이 뇌나 정신을 직접 흐리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고 활기차고 생명력 있는 스피릿들이 흘러야 하는 여러 튜브를 막는 것이라 했다. (당시에는 신경 조직을 속이 빈 관처럼 여겼으니까) 

 

  (근세 과학 문헌을 읽다 보면 가장 거친 초자연주의와 가장 거칠고 나이브한 유물주의 같은 것이 이상하게 뒤섞여 있음에 놀라게 된다. 한데 이 덜 다듬어진 유물주의는...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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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audius Galenus (129-201경) - 고대 로마의 의사, 자연과학자. 고대 의술의 대가. [본문으로]
  2. Killigrew (1612–1683) - 잉글랜드의 극작가, 연출가, 극장 운영. 국왕 찰스 1세의 시동으로 출발해 찰스 2세의 침실 시종관. 위트에 능한 대화 상대, 자유분방한 인물. [본문으로]
  3. Church Militant - 싸우는 교회, 현세에서 악과 싸우는 교회. *기독교 신학에서, 그리스도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나뉜다. 1) 전투 교회 - 지상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포함 (에베소서 6:12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2) 승리의 교회 - 현세에서 악과 싸워 이겨 승천한 천국의 영혼들을 포함 3) 참회의 교회 - 지금 연옥에 있는 이들을 포함. [본문으로]
  4. Friedrich Mesmer (1734-1815) - 유대계 오스트리아 의사. 1775년 ‘동물 자기론(磁氣論)’ 발표. 뉴턴 역학 초기의 가설인 '에테르'란 개념을 환자 치료에 이용했다. [본문으로]
  5. psyche - 전통적으로, 영혼은 살아있는 것에만 고유한 것으로 인식돼 왔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 영혼을 사이키라 불렀다. [본문으로]
  6. Gédéon Tallemant (1619-1692) - 프랑스의 시인. 여러 인물에 관해 간결한 이야기 모음집 덕분에 후세에 기억된다. 루이 14세 시대 파리의 유명한 문학 살롱 주인인 마담 랑부이에가 앙리 4세와 루이 13세 치세의 상세한 자료를 많이 제공. 당대 문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이 저술에 파스칼과 라퐁텐도 들어 있다. [본문으로]
  7. 정신병 치료 방법과 결과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그 문건들을 연구하고 나한테 들려준 바로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정신질환 치유 비율은 2백 년에 걸쳐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들을 쓰고 있음에도 그렇다고 한다. 현대 정신 분석가들의 치료율은 1800년도 정신병 의사들의 치료율보다 더 높지 않다. 1600년도 정신병 의사들도 비슷했을까? 정확한 답을 우린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17세기에는 정신질환자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많은 경우 병을 악화시켰을 텐데, 이 주제를 우리는 저 뒷장에 가서 다시 다룰 것이다. - 저자 주. [본문으로]
  8. - 1600년도쯤 잉글랜드에서 널리 퍼진 발라드. 작자 미상. 베들람은 정신병원. '베들람의 톰'은 미치광이라는 뜻으로, 근세 이후 영국에서 미쳤거나 미친 체한 거지와 부랑자를 일컬을 때 쓴다. 그들은 베들람의 환자였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추정된다. 이 장시는 이후 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수많은 시와 글과 소설과 노래 앨범 등에 영감을 주거나 인용됐다. 예,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존 캔티가 에드워드 왕자에게 “베들람의 톰처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고 말한다. [본문으로]
  9. Averroes (1126-1198) - 아랍의 종교철학자. 본명은 이븐 루슈드. 코르도바에서 이슬람 종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모로코에서 죽다. 자연과학, 의학, 수학, 신학, 철학 등 당대 모든 학문을 섭렵. 독자적 저술도 적잖이 있으나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로 명성을 떨쳤다. "자연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해석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베로에스가 처음 해석했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비기독교 세계의 현자 대열에 두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유대 세계의 최고 철학자인 마이모니드에게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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