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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8. 일시의 작동 원리 (메커니즘)  

 

동일시의 메커니즘과 여러 유형를 살펴보자
앞장에서 규명했듯이, 동일시는 우리에게 엄청난 역할을 한다. 

동일시는 우리의 감정 상태와 신체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면, 동일시가 뭔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동일시의 메커니즘과 유형

 

우리는 자신과 자기 존재에 대한 어떤 느낌이나 촉(?)이 있음을 알아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미하면서 ‘나, 나, 나…’라고 말할 때 그걸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 생기는 느낌을 우리는 자아감이나 자아의식, 자기인식, 자기 감각 등으로 불렀다. 

 

자아감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뭔가를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때, 우리는 그걸 다 우리가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난 먹고 싶어”, “난 내일 뭘 할까 생각해”, “난 기분이 안 좋아” 등등을 말할 때, 이 언급에서 우리가 뜻하는 ‘나’를 우리는 자아감이라 부르는 것이다. 

자아감은 우리 몸 어디에 있나? 흔히들 말하기를…

“나는 내 눈 뒤 머릿속이나 가슴 어딘가에 있어. 거기서 모든 것을 지켜봐.” 

 

‘나’라는 느낌이 내 눈 뒤쪽 어딘가에 있다고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수야. 나는 엄마야. 난 한국인이야 등등. 그리고 ‘교수라는 것’은 일이나 직업이지 ‘나’라는 느낌이, 자아감이, 절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내가 정말로 교수라면 난… “교수는 먹고 싶어 해”, “교수가 숲을 거닐고 있어”, “교수가 자녀들을 키워” 같은 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이건 정말 우스꽝스러운 발상이요 말법이 아니겠는가. 자녀 양육은 교수가 아니라 아버지가 한다. 즉, 교수란 일이나 직업일 뿐이다. 

 

따라서 “난 교수로 일하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고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서는 많은 사람이 “난 교수야” 하고 말하는데, 이건 모든 걸 뿌리째 바꾼다. 왜냐면 ‘나’라는 느낌이 ‘교수’라는 이미지와 동일시되니까

 

여기서 ‘교수’ 대신에 다른 여느 직업을 넣어도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에 다 해당한다. <직업과 동일시>라는 현상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 동일시를 예를 들어 “나는 목수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 목수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목수이고 어떤 순간 그 일을 한다면, 그 순간에는 자신을 바로 목수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직무상 다른 사람들을 접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행동하는 투를 관찰하면 완벽하게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트의 계산원이나 판매원은 당신을 대할 때 바로 계산원이나 판매원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그들은 자기 직업과 자신을 확실하게 동일시하니까 그렇다. 

만약 계산원이 업무 현장에서 갑자기 당신에게 자기네 살림살이가 요즘 힘들다거나 어제 시장에서 아는 누구를 보았다거나 최근에 아이들이 엄마인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는 둥 늘어놓는다면, 이건 계산원 역할과 분리되고 거기서 벗어나 당신의 친구 같은 역할로 들어선 것이다. 다행히 실제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테면 직업과 같이 자기 역할들 가운데 하나와 동일시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는 순수한 ‘나’ 느낌으로서의 자신을 잊고 액면 그대로 자기 역할이 되어 버린다.

이건 자기 망각이요, 자아 상실이다.

혹은, 자기 역할에 지나치게 빠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어떤 역할이나 일에 그렇게 몰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요리에 하도 몰두하는 바람에 자신을 시야에서 놓친 것처럼 감지하기를 잊는다. 그리고 몰아(沒我) 상태에서 이 시간에 우리가 의식한 것은 요리 과정뿐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요리 과정이 되고 만 것이다.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의식적으로 ‘나’ 느낌에 주의를 일부 기울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역할을 진행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기억한다면, 자기 역할을 바깥에서 보듯이 지켜보게 된다. 그때 당신이 곧 그 역할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목수 김 씨가 일터에서 작업하면서 그 일을 하는 자신을 의식한다면, 그는 이미 목수 역할과 동일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 일을 계속 수행하면서도 바깥에서 보듯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자아감과 작업 과정을 별개로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을 목수라는 직업과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상태가 바로 분리(disidentification)라고 불린다. 실제에서 분리는 역할 수행뿐 아니라 몸이며 젠더, 추상적 이미지 등 모든 형태와 자아감이 동일시되는 것과도 연관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어떤 역할과 분리 상태를 알려면,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지금 순간에 현존하기만 하면 된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치자.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을 승객 역할과 동일시한다. 이 역할에는 어떤 행동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승차권 구입,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내밀한 영역에 들어서도 반발하지 않기 등. 

버스에 올라타는 즉시, 승객의 역할이 시작된다. 이때 의식을 계속 가동한 상태로, 버스에서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 보라. 그러면서 자아감을 일부나마 시야에 두고 있으라. 이 과정과 자신의 행동이며 생각이며 감정을 관찰하는 동안, 당신은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승객이라는 역할과 분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칫 당신이 동일시될 수 있는 다른 여느 형태하고도 그렇게 하면 분리가 가능하다. 자신의 젠더와 동일시되지 않으려면, 당신이 남자나 여자로서 행동할 때 당신의 젠더와 상관없이 자신을 그냥 관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여자라면, 남자들이나 다른 여자 친구들과 대화하는 동안 당신의 행동과 생각, 감정에 당신의 여성 이미지나 여성관이 들어섬을 알아차리라. 당신은 남자들에게 애교를 피우거나 화장을 하고 다른 여자들과 수다를 떨 수 있다. 당신의 행동에 나타나는 요소가 전부 대개는 당신이 여자라는 이미지에 포함된다. 

당신이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동안, 당신은 그 역할과 분리된다. 하지만 관찰을 멈추는 즉시, 당신은 자신을 그 역할과 자동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유형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당신은 자신을 그 형태와 자동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즉, 엄마로 행동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엄마이며 그 역할과 동일시될 것이다. 승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승객일 것이다. 당신이 자기 몸과 동일시됐음을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은 당신 몸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나 승객이나 몸 등 동일시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즉시, 이것은 내가 동일시하는 또 다른 형태일 뿐이며, 진짜 ‘나’는 여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는 ‘나’라는 느낌이요, 자아감이다. 
이때 ‘나’가 있고, 또 역할이나 몸이나 생각 등의 동일시 형태가 따로 있다. 
이것이 동일시에서 벗어난 상태, 분리된 상태이다. 

 

그런데, 많은 생각과 분리되기 위해서, 즉, 잡념을 떨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가 필요하다. 여러 생각을 당신 마인드에 있는 이미지처럼 관찰만 하라.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나?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난 글을 읽고 있어” 하고 말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사실이야. 그리고 이건 당신 생각이며 이 생각이 당신한테서 나온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렇게 해 보라. “난 글을 읽고 있어” 하고 다시 말하되, 이번엔 이것이 그냥 말이며 당신 마인드에 있는 생각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라. 이 생각이 있고, 그걸 인식하는 당신이 있다. 이 경우, 같은 생각이 이번엔 당신한테서 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생각과 분리된 것이다

 

자기 생각과의 분리가 언제 어디서 유익할 수 있는지 아나? 사람들과 대화에서, 특히 논쟁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태백산 밑에 ‘미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는지를 두고 당신이 친구와 갑론을박한다고 치자. 당신은 태백산에 갔다가 그 카페에 들렀기 때문에 그게 있다고 말한다. 한데 친구는 자기가 그 지역에 있는 카페를 다 다녀 봤지만 그런 간판은 못 봤기 때문에 그런 카페는 없다고 말한다. 

당신이 그 카페가 거기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자기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이 생각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당신이 틀렸으며 당신은 그 지역을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 당신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당신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당신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당신이 그 생각과 동일시됐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하지만 그건 당신 마인드에 있는 하나의 생각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그 생각과 분리된다.

더욱이, 생각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것과 분리된다.

 

당신의 어떤 생각이 있고, 또 자아감으로서의 당신이 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하는 친구의 말이 이젠 당신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 건드릴 것이다. 그러면 당신도 친구 말에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이건 누군가가 당신 코트를 칼로 찢은 것과 비슷하다. 이때 당신이 상처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칼이 당신 피부를 자른다면, 아프겠지.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걸친 외투 같은 것이라고 상상하라.

당신 자체는 아니다.

그렇게 여기면, 아픔도 없을 것이다

 

당신의 어떤 생각이 검증된 게 아니며 불쾌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궁리한 것일 때, 그런 생각과 분리는 아주 유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 여자 친구가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 어디선가 놀고 있다고 치자. 게다가 그녀가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누군가 알려줬다. 당신 상상은 그녀가 배신하는 장면을 금방 그려낸다. 그래서 “지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고 있는 게 분명해!” 하고 혼자 말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믿으면서 그 생각과 동일시된다면, 강한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불쾌해짐을 인식한다면, 당신은 이것이 한낱 생각일 뿐이며 여자 친구가 배신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분리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믿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리라. 전화를 걸어 어떤 일인지 알아내리라. 알고 보니, 당신 여자 친구와 함께 있던 젊은 남자는 그녀의 오빠였더라. 

 

이 정보와 새로운 생각이 당신 감정 상태를 순식간에 바꿔 놓음에 주목하라.

그 이전에는 화가 잔뜩 났었는데, 그다음에 화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것이 생각의 진정한 힘이다! 특히 당신이 동일시된 생각의 힘이 그러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당신에게 가능한 상태가 두 가지 있다. 

동일시와 분리. 

 

전자의 경우, 당신은 어떤 생각이나 역할, 물질적 형태와 동일시됐음을 깨닫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고 인식한다. 혹은, 당신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고 안다. 혹은, 자신의 다른 어떤 발현을 인식한다. 이때 자신의 현존 의식과 자아감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또 동일시 상태에서는 자신의 발현을 통제할 수 없으며 분리 상태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따라서 많은 영적 멘토들은 의식 상태에 현존하는 것이…
즉, 자신의 어떤 발현을 관찰하고 그것과 별개의 현상으로 자아감을 관찰하면서 분리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만 제대로 해도 숱한 불필요한 불쾌한 일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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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7. 동일시(Identification)의 영향 (1)  

 

실제로 우리가 아닌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본 유형을 앞에서 몇 가지 살펴봤다

“나는 걷고 있어”, “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난 생각해” 하고 말할 때,

<나>라는 느낌이 (자아감이) 추상적인 이미지나 느낌, 역할, 생각, 감정 등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다. 

 

the influence of identification

 

이 자아감이 어떤 유형과 동일시되지 않을 때, 그건 <나>라는 순수한 자아감으로 남는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유형과 동일시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이름과 동일시는 아마도 자기 이름이나 가문을 자랑스레 여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동일시의 영향은 잠시 놔두자. 다른 더 중요한 유형과의 동일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직업과 동일시를 먼저 본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경찰서장으로 일한다면, 자신의 비교적 높은 지위와 그 위치가 주는 측면을 크게 평가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경찰서장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경찰서장으로 일해” 하고 말하는 것과 
“나는 이 지역의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하는 것은 
차이가 상당히 크다.

 

전자의 경우 당신은 경찰서장이 단지 당신의 직업일 뿐이며 당신이 수행하는 일로 간주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의 직위와 동일시한다. 

전자의 경우, 어떤 사유로든 직위에서 물러나거나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대한다 해도, 당신은 크게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직업이 주는 지위와 권력과 경제적 이점 등과 동일시했다면, 그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사람들이 썩 존중하지 않는다 싶을 때 당신은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와 동일시된다면, 이 ‘무엇’에 해를 끼치거나 위협이 되는 것에 강한 두려움을 품고 저항한다는 점이다.

이건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타고난 반사 작용이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시 살펴보자.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나는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한다. 이제 당신이 경찰서장 직위에서 밀려난다. 이건 본질적으로 당신 직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요 나아가 수십 년 경찰 생활의 파멸을 뜻할 수도 있다. 

한데 당신이 그 직무와 또 거기서 나오는 지위며 권력이며 보수 등과 동일시된 만큼, 이 위협을 당신은 자신을 겨냥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당신이 자신과 동일시한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당신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당신의 마인드와 몸은 바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 이전까지 당신은 한 지역의 경찰서장이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을 중요하고 존중받고 물질적으로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젠 그걸 다 잃었다. 당연히 자신이 파멸된다고 느낄 것이다. 한데 사람이 파멸될 때, 그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고 거기에 최대한 저항한다. 자신의 직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그걸 잃은 사람은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경찰서장이 아니라 단지 그 직무를 맡고 있는 것임을 아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런 사람은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한 게 없으며 이 직무가 단지 한시적이라는 것도 잘 이해한다. 
이런 경우, 앞에서 말했듯이,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으며,
직위 해제나 면직 따위를 좀 곤혹스럽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사실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신의 제법 높은 지위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상당히 깊게 발달해야 하며, 동일시가 무엇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자기 몸과 동일시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자. 

 

자기 몸과의 동일시. 거울 들여다보면서 뚱뚱하다고 여기는 여인

 

당신이 자기 몸을 자신이라고 간주할 때, 몸과 관련돼 일어나는 일이며 변화가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화, 부상, 아름다움의 상실, 비만이나 비쩍 마름, 신체의 불균형 등이 전부 아주 부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 아름다운 외모와 균형 있는 신체, 매끈한 몸매, 젊음 등이 우리의 자부심이 되며, 그런 것과 동일시되기가 아주 쉽다.

 

당신이 자신의 미모나 젊음과 동일시된다면,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사라질 때 당신에겐 극도의 불쾌한 상태가 야기되며 심한 경우 우울증까지 나타날 것이다. 그 이유는 똑같다. 신체 노화를 당신 마인드가 당신 자체의 점진적인 파괴와 같은 것으로 보겠기에 그렇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자기 몸이라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직시하자. 

당신의 자아감이나 자기인식이 당신 몸의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든 달라졌나?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자기인식은 자기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느낌을 뜻한다. 

당신의 <나> 느낌은 당신 몸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다.
질병 상태조차도 그 느낌을 건드리지 못한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느끼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유년기에도 노년기에도 우리는 우리 본연의 자신 그대로이다.
이 때문에 노인들이 젊었을 때와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지, 몸이 이젠 닳고 노화됐을 뿐이지. 

 

성별과 (gender와) 동일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당신이 자신을 진짜 사나이라고 여기는 데 익숙하다면, 당신한테서 그런 이미지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전부 강한 두려움과 분노를 야기할 것이다. 남자라고 여기는 기준에는 성적인 특징뿐 아니라 일정한 행동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남자들 무리에서 당신이 사나이라면 술 마실 줄 알고 싸움질도 사양하지 않고 여자도 자빠뜨릴 줄 알아야 한다는 관념이 있다. 그런 면을 다 갖추고 있다면, 비로소 사나이가 된다. 

하지만 어쩌다가 위궤양이 생겨서 예전처럼 호탕하게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이제 남자라는 이미지가 좀 흔들린다. 당신은 아직 남자이긴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이미지의 사나이는 못 된다. 그러고 나서 결혼하게 됐다. 이제 당신이 무슨 남자란 말인가? 아내 엉덩이에 깔린 신세가 됐는데! 그건 이미 사나이가 아니다. 이제 자신이 남자라는 느낌이 크게 공격을 받는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 진짜 남자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있고 그것과 동일시됐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 이미지와의 동일시뿐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 존중받음이나 의리나 젊은 여성한테 사랑받음 것처럼 동일시에서 얻는 이점과도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자라는 이미지에 그렇게 집착한다면, 당신을 조종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이제 당신에게 뭔가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 넌 남자잖아. 사나이가 뭐 그래.” 

혹은 여성은 당신을 이렇게 조종할 수 있다. 

“당신이 진짜 남자라면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줄 텐데.” 

그리고 당신은 남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들 말대로 끌리게 된다. 

이건 다 당신이 자신을 남자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여성들 경우에도 비슷하다.

젊은 여자가 ‘여자다운’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이미지가 공격받을 때 괴로움이 클 것이다. 

“아직도 사귀는 남자가 없어?!”, 

“넌 이 원피스를 사흘째 입고 다니는구나!”, 

“얘, 넌 뚱뚱해졌어!” 등등 여자 친구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에 심하게 상처받기 쉽다. 

그건 다 자신을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이는 반응, 진짜 남자나 진짜 여자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당신 본연의 모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당신을 계속 칭찬하거나, 혹은 그들 보기에 당신이 그리 남자답지 못하거나 여자답지 못하다면 계속 흠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대한 당신 반응은 남자나 여자에 대한 이미지에 당신이 얼마나 동일시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전혀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당신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남녀 이미지에 당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데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 자기 생각이나 감정과 동일시하면 어떻게 되나?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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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나는 누구인가?  > ...)

 

  16.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1)  

 

 

이제 우리가 자신을 흔히 ‘누구’ 혹은 ‘무엇’으로 여기는지 살펴본다. 

차례로 보자. 

 

나는 누구인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기

 

1

 

당신 이름이 ‘철수’라고 한다면, “난 철수야” 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부모가 처음에 다른 이름을, 예를 들어 영호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당신은 철수가 아닐 것이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 쓰는 단어일 뿐이다.

당신을 영호라 부른다 해서 당신의 자기인식이나 자아감이 과연 바뀔까?

아니다.

혹시 당신을 ‘항아리’라 부른다 해도 당신의 자아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있던 그대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음미해 보면, 당신 이름이 곧 당신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당신 이름을 부르면, 당신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느낀다. 누군가가 당신을 향하면서 실수로 다른 이름으로 당신을 불렀다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겠지’ 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면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자아감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린 자신을 종종 이 단어와 혼동한다.

자신을 다른 무엇과 혼동하는 것을 동일시(identification)라 부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름과 동일시된 것이다. 

 

2

 

본연의 자신을 잃는 다음 방법은 살면서 자신을 어떤 역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난 엄마야”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행하는 엄마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출산 전까지는 엄마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자아감이 출산을 전후하여 달라진 게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자아감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드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저 출산 후 엄마라는 새 역할이 생겼을 뿐인데, 그녀가 자신을 그 역할과 동일시한 것이다. 

 

전형적인 (사회적) 역할로는 우리네 각자의 직업을 꼽을 수 있다.

만약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난 의사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도 엄마의 역할 경우와 같은 도식이 작용한다. 즉, 그는 그저 의사 역할을 해왔을 뿐이며, 어린 시절엔 의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나 유년기에나 그의 자아감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직업에 크게 회의를 느끼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거나 ‘나에겐 의사 노릇이 어울리지 않나 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자기 직업과의 동일시가 잘못된 것임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패배자야” 혹은 “나는 쿨해” 같은 형태의 동일시도 있다.

자신이 패배자라는 느낌은 사람이 해 온 역할의 하나이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과 합쳐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그것이 그의 거짓된 자아감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 패배자야” 혹은 “난 쿨해”, 둘 다 역할이다. 이건 다 실제 자아감에 해당하지 않는다. 

 

역할의 예를 더 들어보자.

“나는 사업가야”, “난 2급 정비사야”, “난 사장이야”, “난 아들이야”, “난 노숙자야”, “난 제주도민이야” 등이 다 역할의 일종이다. 

한데, 이런 생각이나 진술 역시 본연의 자신을 어떤 역할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동일시에서 사람을 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예를 들어, ‘쿨한’ 사람에게

“넌 전혀 쿨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약점을 숨기기 위한 마스크일 뿐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려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일시에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가 쿨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를 멋지게 보고 존중한다. 근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럼 그는 누구인가? 시시껄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어?

 

3

 

다음에, 사람들은 의식의 어떤 발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이야” 등이 그렇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게 마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요, 이 생각은 내 생각인 것 같다. 머릿속 목소리와 강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걸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즉, 대화하면서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말하는 생각과 단어들이 있고 또 그걸 다 알아차리는 당신이 있음을 당신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간단한 실험 하나. 

“난 초밥을 좋아해” 하고 속으로 말하거나 중얼거려 보라.

어떤가, 당신한테 생각이 나타나서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때 생각이 있고, 또 그 생각을 보고 듣는 당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초밥을 정말 좋아하며 친구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이걸 바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유의하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전자의 경우 당신은 자기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았고, 후자에서는 동일시됐다. 

 

감정의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화난 상태에 있을 때, 이건 우리가 화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과 합쳐져서 자기 자신을 분노처럼 드러낸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안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곧 분노는 (분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을 (분노를) 당신은 당신의 여러 발현 가운데 하나로서 관찰하기만 할 뿐이다. 

 

실제로, 자각 상태를 가동할 때, 당신의 동일시가 그 자각 상태로 옮겨가고,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멀어진다.

‘자각 상태를 켠다/가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각이란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서 지금 당신과 당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상태, 감각 등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냥 망각 (혹은, 무자각) 상태에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감정에 압도될 때 이런 일이 특히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귀한 그릇을 떨어뜨려 깨졌을 때, 당신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이한테 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퍼뜩 깨닫고 정신이 들어서, 당신이 지금 화를 내고 아이한테 소리치고 있으며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당신을 금방 식게 한다. 

당신 자신의 분노와 (동일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다. 

 

4

 

그다음에 자주 나타나는 동일시하기는 자신을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 영혼이야”, “난 우주정신이야”, “난 사람이야”, “난 호모사피엔스야” 등이 그것이다. 

영혼을 보거나 느낀 사람이 있나?

영혼은 무엇인가?

다들 나름대로 해석한다. 어떻든 영혼은 추상적인 이미지다. 혹자가 “나는 영혼이야” 하고 말할 때, 그건 필경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영혼 soul’이란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우리한테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 개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지구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영혼이란 개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결국, 영혼이 무엇인지 알든 모르든 당신의 자아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혹자가 자기는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자기가 이 용어에 집어넣은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주정신이나 호모사피엔스하고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할 때의 동일시를 규명하기가 좀 어렵다.

우리가 사람인 건 당연해 보여. 왜냐면 당신과 나를 포함해 우리는 다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가 우리한테 가르친 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그러면, 사회는 ‘사람’이란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나?

대략 다음과 같이 보이고 옷을 입고 어떤 언어로 서로 얘기하는 생물을 사람이라 부른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그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들었다. 똑똑한 어른들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나. 생각도 않고 믿어 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우리 몸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고 우리가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여러 징조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 벌거벗은 모습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자아감으로 되돌아가자.

이 느낌에 인간과 관련된 뭔가가 과연 있나?

이 자아감은 ‘사람’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야. 이건 구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이다. 내 몸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감으로서의 ‘나’가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내 몸이 있으니까. 

 

‘사람’이 추상적이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임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옛날 옛적에 ‘사람’이란 단어를 궁리해 내고, 앞의 그림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전부 이 단어로 불렀다. 

한데 이 단어를 통용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던가. ‘여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고, ‘남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면 여성과 남성의 유기체와 심리 구조는 상당히 다르니까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람’이라 불렀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사람’이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종으로서 남자가 있고 또 별개로 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는 사람이야” 대신에 “나는 남자야, 여자야” 하고 말할 수 있었겠지. 

 

이건 다 ‘사람’이란 개념이 인위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상적 이미지이며,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일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데 ‘사람’이란 단어를 쓸 것이다. 편의상 그렇다. 우리 언어에서 이 단어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으니까. 

 

(이제 “나는 남자야”, “나는 여자야”라는 동일시를 분석해 보자.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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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과. 우리의 감정 항아리, 계속)

 

<참고 도표> 

감정 항아리. 고통스러운 감정, 욕구, 기본 갈망,

*  *  *

자아감의 운명은 역동적이며 때론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린애가 태어난 직후부터 자신의 ‘태양’을 위해 투쟁한다 해도, 아기의 힘은 제한돼 있고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파워에 더 의존한다. 

 

한 번 더 강조하자. 

아이한테 보내는 말과 몸짓, 억양, 제스처, 찌푸린 눈썹, 심지어 침묵까지...
그것으로써 어른은/부모는 아이에게
자기 자신의 상태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 대한 태도 같은 것도 늘 전달하는 셈이다.

 

격려와 인정, 애정, 용인 등의 신호나 징표를 반복해서 보낼 때

아이에겐 “난 다 괜찮아”, “난 좋은 애야” 같은 느낌이 쌓이는 반면에, 

꾸지람과 비난, 불만, 지적 등의 신호를 자꾸 보낼 때

아이에겐 “나한테 문제가 있나 봐”, “난 나쁜 사람이야” 같은 느낌이 쌓여 간다. 

 

일상에서 어린애의 움직임에 우리 관심을 확대해 보자. 이를 위해 한 아동 심리학자의 상담 사례를 소개한다. 

 

돌 지난 아들의 아빠가 심리 상담하러 오다.

 

돌 지난 아이의 아빠가 상담하러 와서 이런 경우를 털어놓았다. 

"11개월 된 아들이 아기 침대에 혼자 있게 됐어요. 침대 곁에는 탁자가 있는데, 아기가 침대 난간을 타고 어찌어찌 그 탁자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그 순간 방에 들어선 내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기는 두 팔과 두 다리로 기우뚱거리며 환하게 웃었는데, 그 불안한 모습에 난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기에게 달려가서 얼른 끌어안아 침대에 다시 앉히고는 집게손가락을 치켜들어 엄하게 주의를 주었지요. 아빠의 엄한 얼굴에 아기가 슬프게 울더니 오랫동안 진정하지 못하더군요.」"

 

나는 그 아빠한테 이렇게 제시했다. 

"이제 당신이 그 11개월 된 아들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아기인 당신이 영웅적인 노력을 다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싫증난 침대를 벗어나 새로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선 겁니다. 그때 느낌이 어떨까요?

그 아빠는 “기쁘고 자랑스럽고 통쾌하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젠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인 아빠가 나타나서 당신은 기쁨을 전하려고 그를 부릅니다. 손짓이든 몸짓이든 표정으로든 말입니다. 한데 그 사람은 함께 기뻐하는 대신 화를 내며 당신을 나무라는군요. 당신이 왜 부르는지 전혀 이해도 못하고!"

젊은 아빠가 머리를 감싸 쥐고 탄식했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엾은 아기!” 

 

돌이 채 안 된 아기가 침대 곁에 있는 탁자로 기어오르다.
탁자에 올라간 아이를 보고 아빠가 깜짝 놀라다.

 

이 사례가 아기가 탁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아이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지금 아이한테 보내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대개 징벌을 “넌 나쁜 애야!”로, 실수 비판을 “넌 할 줄 몰라!”로, 무시를 “난 너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 혹은 “넌 사랑받지 못해” 같은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아주 많다. 

 

아이의 정신적 저금통은 끊임없이 작동하는데, 더 어릴수록 부모가 거기에 집어넣는 것의 영향이 더 크게 새겨진다. 다행히도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들이 더 다정하고 주의 깊게 대한다. 비록 바로 앞의 경우처럼 사소한 부주의와 실수가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러나 아이가 더 자라면서 키우고 가르치는 강도가 더 커지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아이의 자존감이라는 ‘보물창고’에 무엇이 쌓이는지 헤아리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즉, 아이의 정신적 저금통에 부모따스함과 용인과 격려 같은 선물이 쌓이는지, 아니면 책망과 지적과 처벌의 무거운 돌들이 쌓이는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아이의 정신적 저금통에 부모가 무엇을 집어넣는가.
"난 기쁘구나." "고맙다, 얘야." "네 그림이 마음에 든다."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란다." etc.

 

어릴 적에 부모에게 인정받는 경우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그 아이의 삶이 (또 나중에 어른이 된 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다음 두 가지 사례가 잘 보여준다. 

 

첫 번째 사례는 한 놀라운 여인과 접촉한 내 경험이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와 나는 운 좋게도 몇 달을 함께 보내게 됐다. 정말 선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자기한테 있는 것을 다 기꺼이 나누고, 선물할 계기를 세심하게 찾아냈으며, 사람들을 물질로든 일로든 적극 돕곤 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아주 특별한 관대함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우울해하거나 비탄에 잠겨 있는 순간에 그녀는 늘 친절한 말이나 미소를 건네고, 긴장이나 대립의 순간에는 지혜로운 탈출구를 마련하곤 했다. 그녀가 있으면, 어떤 문제든 더 단순해지고 분위기가 더 인간적인 면을 띠곤 했다. 그런 재능 덕분에 그녀와 접촉한 사람은 다 그녀에게 매료됐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 딸, 곁에 아빠가 있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아주 사랑한다는 걸 난 늘 잘 알고 있었어요."

 

한번은 내가 대놓고 물었다. 

"당신의 그런 선함과 너그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아주 간단해요. 엄마가 나를 아주 사랑하며 내가 건강하게 나오기만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걸 엄마 뱃속에서부터 난 확실하게 알았거든요. 그리고 태어나서 며칠 지난 이후 엄마와 아빠가 나를 아주 사랑하며 내가 그분들께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고요. 그렇게 부모한테서 받은 것을 이제 난 세상에 돌려주고 있을 뿐이에요."

당시 이미 할머니가 된, 그녀 모친에게 배어 있는 배려심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다른 사례 역시 안타깝지만 실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15세 된 소녀는 엄마와 관계가 거의 끊겼다. 많은 날을 거의 바깥에서 보내는데,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이 소녀가 네댓 살 때 벽에 다가가서 자기 머리를 세게 부딪는 경우가 자주 반복됐다. “왜 그러니? 그만해!” 하고 엄마가 말려도 “아니, 할 거야! 난 나를 벌하고 있어, 왜냐면 난 나쁜 애니까” 하는 답변만 돌아오기 일쑤였다. 

 

네댓 살 때부터 스스로 벽에 머리를 찧는 소녀

 

이 사연은 정말 충격적이다.

다섯 살 될 무렵에 이 소녀는 자신이 좋은 애가 아니라고 여겼다. 부모가 따스하게 대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좋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가족의 상황이 아주 나빴다.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가계는 쪼들리고 둘째 아이도 태어나고… 삶에 지친 엄마가 힘들고 괴로운 상태를 딸한테 폭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소녀는 ‘좋은’ 아이가 되고픈 마음에서 스스로 ‘교정’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자기 징벌이라는 방법만 알고 있었을 뿐이며, 그 방법이 도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처벌은, 그것도 아이의 자기 징벌은, 자신이 불행하고 평온치 못하다는 느낌을 심화시키기만 한다. 결국 아이는 “내가 못된 애라고? 그래, 그러면 그렇게 되지, 뭐!” 하는 결론에 이른다. 이건 괴로운 절망감을 은닉한 도전이다. 

이 절망과 자포자기 상태를 우리는 늘 듣는가?

사실상 결코 그렇지 못하다. 일이 잘 안 풀려서 애태우는 아이를 계속 벌하고 나무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집에서는 내놓은 자식으로, 학교에선 포기한 학생으로 만든다. 

 

“저리 꺼져, 이 멍청한 놈아!”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이미 ‘좋은/똑똑한’ 아이나 ‘나쁜/멍청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이것이 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심리학자가 모스크바의 평범한 초등학교 한두 학급의 수업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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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a lullaby)

목소리와 여성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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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계

  마인드의 위험한 술책 파헤치기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만들면서 고통도 만들어 낸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당신이 지금 진정으로 행동에 나설 의도나 가능성도 없이 그 상황에 눌러앉아 
그 문제를 자기도 모르게 자아감의 일부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마인드는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들에서 당신의 정체성 같은 것을 보거나 얻기 때문이다. 

 

마인드는 우리를 어떻게 미혹된 현실로 끌어들이나

 

마인드의 술책, 많은 티브이 화면 앞에 앉아 있는 아이

 

마인드는 늘 우리를 현재 순간에서, 즉, 진정한 삶에서 떼어놓으려 듭니다. 

현재 순간에 있는 우리를 자꾸 몰아내려고 해요. 

이를 위해 다양한 술책을 펼치는데, 그건 또 우리한테 아주 익숙한 것들이에요. 

그런데 마인드가 이런 술책을 동원하여 

어떻게 우리를 삶에서 떼어놓고 미혹에 빠뜨리는지, 

우리는 인식조차 못합니다. 

 

<존재>의 진정한 현실로 돌아가려면 이 술책을 알아둬야 합니다. 

그걸 낱낱이 파헤쳐서 더 이상 말려들지 않아야 해요. 

이런 것이 있습니다. 

• 마인드는 우리를 무자각 상태에 빠뜨린다.  
• 마인드는 심리적 시간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 마인드는 우리를 두려움에 가둬 둔다. 
• 마인드는 우리가 늘 불만을 품게 한다. 
• 마인드는 우리로 하여금 뭔가 기대하게 만든다. 

 

이런 술책을 안다면… 그걸 간파하기가 더 쉬우며,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말려드는지 알아내기도 더 쉬워요. 

마인드의 이런 작용을 관찰할 수 있다면

이 작용의 정체를 드러내고 거부하기가 더 쉬워요. 

 

이 다섯 가지 술책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물론 실전 연습도 곁들여야 하구요.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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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고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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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의 심원한 의미   현존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 기다림에 비교할 수 있다. 예수는 기다림의 비유를 자주 이용했다. 이 기다림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현재를 부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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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기쁨  

 

심리적 시간에 사로잡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간단한 기준을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자문하라. 

“내가 지금 하는 것에 기쁨과 편안함과 경쾌함이 있나?” 

만약 아니라면 시간이 현재 순간을 뒤덮고 있다는 뜻이며, 삶은 멍에나 투쟁처럼 보인다. 

 

존재의 기쁨

 

지금 하는 일에 기쁨이나 편안함, 경쾌함이 혹시 없다 해도, 그 일을 꼭 바꿔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를 바꾸기만 해도 충분할 수 있다.

‘어떻게’가 늘 ‘무엇을’보다 더 중요하다.

 

그 일을 통해 성취하려는 결과보다 일 자체에 주의와 관심을 훨씬 더 많이 기울일 수 있는지 살펴보라. 이 순간이 선사하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돌리라. 이건 또 지금 있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뭔가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현재 순간을 존중하는 즉시… 모든 불행과 투쟁이 사라지고 삶이 기쁘고 평온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현재 순간을 의식하면서 행동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심지어 아주 단순한 행동조차, 보살핌과 애정과 양질의 느낌으로 가득 찬다.

 

 

그러니 행동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행동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면 그에 맞추어 결실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이건 강력한 영적 실천이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영적 가르침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매력적인 <Bhagavad Gita>에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실에 집착하지 않음을 ‘카르마 요가’라 부른다. 또 ‘봉헌된 행동’의 길로 묘사한다. 

 

<지금> 순간부터 강박적인 노력이 멈출 때 <존재>의 기쁨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흘러든다. 
<지금> 순간에 있는 것에 주의를 돌리는 즉시, 우리는 실재와 고요와 평화를 느낀다. 

성취와 만족 때문에 더 이상 미래에 매달리지 않으며, 미래를 구원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실패나 성공이 우리 내면의 <존재> 상태를 바꾸지 못한다. 
이건 곧 자신의 여러 생활 상황에서 삶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심리적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자아감은 개개인의 과거가 아니라 <존재>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미 있는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뭔가가 될 심리적 필요성이 사라진다. 세상 살면서 자신의 인생 상황에 따라 우리는 실제로 부자가 되고 지식이 풍부하고 성공하고 이런저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하지만, <존재>라는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제 완전하고 온전하다. 

 

 

- 이 온전한 상태에서 우리는 바깥의 뭔가를 여전히 추구할 수 있거나 추구하려 들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미래의 어떤 것이나 누군가가 우리를 구하거나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망상적인 기대는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우리네 삶의 상황에 관해 말하자면, 거기엔 달성하거나 획득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이건 형태들의 세계요 득실의 세계이다. 

하지만 더 깊은 수준에서 우리는 이미 완전한 상태이며, 이걸 깨달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이면에는 신나고 즐거운 에너지가 있다. 

 

심리적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제 두려움이나 분노, 불만, 혹은 뭔가가 될 욕구 등에 쫓겨서 비장한 각오로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실패가 <에고>에겐 곧 자신의 상실을 뜻하는데, 우리는 에고를 떨쳐냈기 때문에 실패할까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깊은 자아감이 <존재>에서 나올 때, ‘뭔가가 되겠다’는 심리적 욕구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의 행복이나 자아감은 결과와 무관하게 되며, 따라서 두려움이란 걸 모르게 된다.

 

형태들의 세계, 얻고 잃는 세계, 태어나고 죽는 세계처럼 영속성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걸 찾으려 들지 않는다. 상황이나 조건, 자리, 사람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고통을 겪는 따위가 우리에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존중 받지만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형태들은 태어나고 죽지만 그 형태들 아래, 이면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감지한다. 

“참된 것은 그 무엇도 위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상태인 바에야 어떻게 성공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우린 이미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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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고>는 

 어떻게 완전함을 추구하나? 

 

에고 마인드의 본질적 부분인 감정적 아픔의 또 다른 측면은… 

뭔가가 부족하거나 불완전하다는 느낌, 온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아주 뿌리 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을… 의식하는 이들도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에고

 

의식하는 경우 이 측면은 ‘난 썩 잘나지 못했어, 별로 가치가 없어’ 같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심란하게 나타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바깥의 뭔가를 몹시 갈망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느낌으로 에둘러서 나타난다. 

둘 가운데 어떤 경우든, 자기 내면에서 느끼는 헛헛한 구멍을 채우기 위해 자기가 동일시하는 것들과 에고의 만족을 종종 강박적으로 쫓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재산이나 돈, 성공, 파워, 사회적 인정, 특별한 관계 등을 얻으려고 애쓰는데… 이건 사실 더 좋은 자아감을 느끼고 자신이 더 온전하다고 느끼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얻었다 해도… 헛헛한 구멍은 그대로 있으며 이 구멍에는 바닥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때 그들은 자신을 더 이상 오도하고 현혹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 곤경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을 계속 할 수 있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점점 더 힘들어진다. 

 

에고 마인드에 지배당하는 한 진정으로 안도할 수 없다. 

원하던 것을 얻고 갈망이 막 충족된 짧은 기간 이외에는 성취감이나 평온을 누릴 수 없다. 

<에고>가 자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바깥의 사물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끊임없이 보호 받으려 하고 계속 자양분을 얻으려 한다. 

 

에고가 가장 흔히 동일시하는 것은… 소유물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와 인정, 지식과 교육, 외모, 특별한 능력, 각별한 연줄, 개인과 가족의 내력, 신념 체계 등이며, 또 민족, 인종, 종교 등에서 집단적 일체감도 종종 해당된다

이 가운데 그 무엇도… <참된 나>가 아니다.

 

이런 사실이 놀랍고 무서운가? 

아니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나? 

이 모든 걸 우리는 조만간 내려놓게 될 것이야. 어쩌면 이런 사실을 믿기가 아직은 아주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 어디에서도 우리 각자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믿으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임을…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을 거야. 
죽음은 <참된 나>가 아닌 것을 죄다 벗겨낸다. 
삶의 신비는 “죽기 전에 죽는” 데 있으며… 죽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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