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대화를 통제하기가 상당히 힘든 일이긴 해도,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일주일 동안 추적해 보라.
그리고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없음과) 관련된 생각을 다 기록하라.
자문하라.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지?’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정적인 생각 대부분에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긴장이나 불안을 일으키는 다른 이유도 헤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당신의 성격과 성취의 긍정적인 특성 목록을 작성해 보라. 그리고 부정적인 것이 생각 흐름에 스며들 때 그 목록을 읽는다.
3. 자신감이 사라지는 때를 알아두라.
앞 항목에서 언급한 대로 목록을 작성한다면, 회의하거나 의구심 품는 일도 동시에 한다는 걸 곧 알아차릴 것이다.
이를테면, 하루를 멋지게 보냈지만, 아무것도 된 게 없고 모든 게 별로라는 멍청한 생각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머릿속에서 맴돌게 되는 식.
그런 생각의 출현을 그저 자신의 심리 특성이라 치부하고, 밤중에 습관적으로 찾아드는 ‘자기 회의 (self-doubt)’를 자동적인 일로 받아들이면서 그냥 무시하라.
영혼의 짝은 완벽한 관계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함께 겪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영혼의 짝은 당신한테 그냥 어울리거나 걸맞은 사람이 아니다.
깊은 수준에서 당신이 연결된 사람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영혼의 짝’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거기에 몰두하다가 좋은 잠재적 파트너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그런 진짜 반쪽은 (the better half) 아예 없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영혼의 짝은 반드시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단지, 이는 첫눈에 심장 오그라드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진정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간 흐르면서 영혼의 짝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
두 가지 다른 견해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
소울메이트란 존재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아아, 아직은 그 누구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나 징표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해!
1. 말이 없어도 서로 뜻이 통할 수 있다.
무슨 심령술사가 되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색한 침묵을 뭔가로 채우려고 쉴 새 없이 재잘댈 필요를 못 느낀다. 왜냐면 이 사람과 있을 때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외려 놀라울 정도로 따스하고 편안하니까.
또 대화할 때 마치 서로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편하게 말을 맺을 수 있음을 아주 종종 깨닫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실제로 그렇다.
두 사람의 영혼은 강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 보통사람들한테는 그림의 떡.
2. 당신이 그냥 느낀다.
이 사람이 당신한테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마음속 깊이 느낀다.
내면의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인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사람의 (특히, 여자의) 가장 큰 힘은 직관에 있는 만큼,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3. 눈을 마주볼 때, 두 사람한테서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아주 활발하고 매혹적인 화학 반응의 두 요소 같다.
둘이 만날 때 서로를 사로잡는 감정은 믿기 어려운 힘과 충만함으로 두드러진다.
당신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물론 특별한 감정을 맛봤어.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성적 에너지 역시 뜨겁게 달아오른다 해도 침대에서 아주 좋다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도 열정과 애정이 두 사람을 꽉 채운다.
4.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좋게 만든다.
서로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일깨워 그것이 무르익도록 주제넘지 않고 긍정적으로 조금씩 자극한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당신이 인생에서 최고의 팀에 들어있다고 느낀다. 상대의 관심사를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느낌을 서로 주는 법이 없다.
당신도 당신의 반쪽도 개인적으로 발전하면서 상대의 발전을 응원하기 원한다. 진정한 영혼의 짝은 그냥 아주 친밀한 사람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 아주 소중한 파트너이다.
5. 당신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낀다.
파트너가 치명적으로 마음 상할 뭔가를 실수로 말하게 될까 겁내지 않는다.
당신의 행동을 파트너가 이상하게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까 겁내지 않는다. 샤워하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해도 말이다.
당신은 그런 걸 전혀 겁내지 않는데, 왜냐면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아주 편하고 아늑해지니까.
당신은 어떤 주제로도 대화할 수 있다고 느낀다. 둘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하다.
6. 양쪽에 단점과 결점이 있고, 그걸 서로 알면서도 여전히 함께한다.
그래, 당신에게 결점이 있어, 파트너에게도 그렇고. 그걸 당신이 잘 아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당신은 외모에서 행동까지 이상적인 누군가를 찾거나 늘 웃음 짓고 옳은 일만 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게 전혀 아니니까. 그런 사람은 영혼의 짝이 아니야, 이건 결점만 없는 게 아니라 생명도 없는, 윤기 나는 인형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점과 단점을 보고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서로를 받아들인다.
소울메이트는
당신에게 완벽한 관계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함께 겪을 수 있는 사람이다.
7. 둘이 함께 있으면 좋고 편안하다.
파트너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이 계속 스트레스를 겪어선 안 된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야 한다. 주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된다.
함께 있는 동안 계속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면…
흠, 그 사람이 누구이든, 당신 영혼의 짝은 못 된다.
8. 둘 사이에 이견이 있곤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에서는 뜻이 맞는다.
좋아,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면도한 뒤 세면대를 늘 지저분하게 놔두고 변기 시트를 위로 올린 상태로 두어서 당신을 열 받게 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또 당신이 식사 때 쩝쩝거리고 욕실을 몇 시간씩 차지하는 습관에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래, 그런 것에 짜증이 나고 심지어 화도 날 수 있어…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둘에게 정말 중요한 것에서 뜻이 맞지 않는가.
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에 동의한다.
파트너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도 소중히 여기고, 같은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9. 그 사람한테는 솔직하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며 실제로 느끼는 것을 파트너에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만약 운 좋게 영혼의 짝을 찾았다면, 당신은 원한다면 자기 생각을 죄다 파트너에게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어떤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파트너가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당신을 비난한다고 느낀다면…
그 파트너가 당신 영혼의 짝은 분명히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의 짝은 당신의 어떤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하는 얘기를 비난과 편견 없이 듣는다.
10. 영혼의 짝을 만났다 해서 관계가 반드시 낭만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당신 영혼의 짝이 알고 보니 낭만적인 파트너가 아닐 수도 있다.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항목이 다 성적인 측면과 무관하다는 점을 보면, 이 부분이 이해될 것이다.
당신은 둘 사이에 깊은 정신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지만, 성적 측면에서 서로에게 끌리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11. 둘이 첫눈에 반하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영혼의 동반자가 반드시 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파티에서 막 만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하철이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같은 층에 살며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내는 이웃일 수 있어, 혹은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아, 그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된 무엇이야,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이 목소리가 우리한테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더 좋은지 확실히 알고 있어.’ (이런 경우도 물론 있긴 하다. 직관이나 통찰.)
한데, 그 내면의 목소리가 뭔가 부정적인 것을 말할 때, 궁극적으로 옳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어떡하지?
내면의 목소리 뭔가를 말할 때, 우린 그걸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 머릿속에 있는 목소리
딱히 특별한 사유도 없이 진급에 자꾸 누락된 당신이 직장 상사에게 승진을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치자.
고심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당신은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거기에 준비도 거의 다 한 상태야.
하지만 갑자기 머릿속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괜히 중뿔나게 나서지 말고 그냥 잠자코 있어, 안 그러면 아예 쫓겨날지도 몰라.”
혹은 예를 들어, 목소리나 소통 훈련, 스피치 공부를 위해 <나나나 커뮤니티> 웹 세미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치자.
‘이 작업은 흔히 말하는 자기계발의 근본이잖아, 사람들을 많이 접하는 나한테는 특히 필요한 거야’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가 또 이렇게 속삭인다.
‘그런 거 안 하고도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 한데 이제 와서 이 나이에 애들처럼 공부는 무슨 공부야?’
그리고 이 내면의 목소리 하나 때문에 당신의 열정은 비눗방울처럼 꺼지고 만다.
저런 상황들이 익숙하지 않은가? 저 비슷한 일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 어렸을 적에, 혼자 뭔가를 계속 중얼대며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하면서 동네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들은 자꾸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또 별개의 곁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있는 비판자로서 효율적인 제어시스템 같이 작동한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 그런 내면의 목소리가 하는 일은 열정을 식히고 자신감을 파괴하고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 이럴 때, 내면 목소리는 또 궁리가 아주 멀쩡해서, 새로운 뭔가를 하지 않게 하는 핑계를 잔뜩 들이대며 합리화에 나선다.
내면의 목소리가 신통치 못한 소리를 지껄이고 우리가 그 목소리에 지배된다면, 인생은 무채색이 되며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시도해 보지 못하겠지, 왜냐면 두려움과 의혹에 사로잡히니까.
그런 내면 목소리의 99%는 우리를 제 자리에 붙잡아둔다. 복지부동하게 만든다.
한데, 전진하지 않는 자는 퇴보하는 것 아니던가?
내면의 목소리는 직관인가?
우리는 내면에서 벌어지는 독백이나 (자신과의) 대화를 대체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왜?
왜냐하면, 그 목소리가 진정한 ‘나’이며 잠재의식의 시그널이거나 직관이라고 여길 때가 많으니까.
사실, 목소리 형태로만 (혼자 중얼거려야) 직관이 번뜩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그들은 자기 머릿속에서 뭔가를 분명히 듣는다고 말한다. 이런 <우주의 조력>과 <내적인 제동>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나?
이건 사실 아주 간단해.
진짜 번뜩이는 직관에는 비판도 논쟁도 설명도 없다.
직관과 통찰의 본질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단순할 것이다.
이를테면, ‘저쪽 어디로는 가지 마’, ‘다른 길로 가라’, ‘집에 전화해 봐’ 등등.
이때 '뭔가에 대처하지 못하거나 길을 잃을 테니까 그쪽으로 가지 마' 같은 말을 머릿속에서 듣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거기로 가지 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한데 대부분의 <내면 목소리>에는 하나의 목표만 있어.
즉, 우리를 심리적으로 약하게 만들어 자신의 제물로 삼으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거나 최소한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두 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어떻게 막아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목소리가 마구 일어나는 경우에 부닥친다. 그렇다 하여 ‘내가 미친 건가?’ 하는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고 내면의 독백 때문에 우울해할 까닭도 없다. 단지 하나, 이런 현상이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다는 사실 때문에 어떡하든 잘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
그런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 행위를 통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통째로 달라질 것이다.
1. 극복을 위한 첫걸음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기, 국외자 입장에서 관찰하기, 또 관점을 바꾸기.
우리는 우주나 세상의 손아귀에 붙들린 볼모가 아니며 장난감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이 우리 행위의 주역이요 주인공 아니던가. 그럼, 내면의 목소리가 뭔가 안 좋은 쪽으로 또 속삭일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소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자문하라.
"이건 내 내면의 목소리이지 본연의 ’나‘가 아니야" 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다독이라. 그리고 정말 그렇게 믿어야 한다.
2. 두 번째 스텝
자신의 약점이나 단점, 결점 따위를 다 허용하는 거야.
뭔가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잘못 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해.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을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세상에 더 이상 감추려 들지 않게 되니까.
누구한테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천사와 악마가, 영웅과 악한이 다 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 하는 점.
‘애써 봤자 아무 것도 안 될 거야,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나’
같은 목소리가 내면에서 꿈틀대며 일어날 때,
“스톱!”
하고 외치면서 그 목소리를 단호하게 차단하라.
그런 생각이며 마인드의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잡념의) 장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떡하든 더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즐겁게 할 일이다. 바로 여기서 <긍정적 자기암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목소리>는 나름대로 설득력과 창의력이 강하다.
평소에 별반 생각도 않고 그 누구에게 말도 않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다. 즉,
우리 머릿속에서 종종 울리는, 생각 흐름의 속삭임.
이 내면의 목소리가 가끔은 우리를 고무하여 마지막 몇 미터를 달리게 하기도 한다. “그래, 조금만 더 달려! 결승선에 거의 다 왔어!” 혹은 ‘결국 다 잘 될 거야’ 하면서 사람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아주 무례하고 불친절할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억압하고 징벌하고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퇴행하게 만들기 일쑤다. 이런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의 원숙함과 최고의 개인적 특질을 반영하지 않아. 이건 우리네 ‘가장 좋은 나’가 내는 목소리와 거리가 아주 멀다.
많은 사람들이 “넌 하찮은 놈이야, 결코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할 거야” 혹은 “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루저야” 같은 말을, 저주 같은 주문을, 별 생각 없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내던진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결코 원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을 제 손으로 만든다.
당신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가 절대 아니야. 그저 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네 내면의 목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라 부르는 것은 사실 외부에서 우리한테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조를 그대로 흡수한다. 즉, 짜증나거나 화난 부모의, 우리를 억누르려고 을러대는 형이나 선배의, 학교 불량배나 학생에게 만족하지 못한 교사의 (주로 부정적인) 말들을.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주변에서 우리에게 퍼붓는 목소리들을 자꾸 들으면서, 그런 말을 조금씩 자기 안으로 들이게 되고, 결국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슴에 영원히 붙박아 둔다.
어른이며 교사며 권위자들이 하도 자주 끈질기게 지적해 대는 바람에, 그런 지적이 어느 순간 우리 의식에 단단히 뿌리 내려서 우리 자신의 생각 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숙하고 온전하고 행복한 개체가 되는 길은...
<내면의 목소리>를 자신에게 유익하고 힘이 되고 건설적인 목소리로 바꾸는 것.
그런 목소리는 진정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선량한 멘토의 목소리처럼 우리 내면에서 울려야 한다. 이 새로운 목소리가 우리에게 새롭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생각 틀로 굳어질 때까지 우리 안에서 자주 오랫동안 울려야 한다.
우리의 삶과 행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과 비슷해진다.
우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이 되는 것이다.
아주 차분하고 따스하며 느긋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내면의 목소리.
그리하여, 오랜 세월 힘든 삶을 보냈지만
그러면서도 세상과 사람들에게 한을 품지 않고
마음이 강퍅해지지도 않은 사람한테서
연민의 포옹을 받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오만하고 우리를 비웃는 목소리가 종종 우리네 머릿속에 들어온다. 그런 목소리는,
업무를 탁월하게 처리하고 경력을 쌓아야만 애정 어린 관심이며 존중, 친절을 누릴 수 있다고 자꾸 속삭인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운전을 빨리 배우지 못하고, 최고 세일즈맨이 못 됐다 하여, 우리한테 애정 어린 관심과 좋은 평가를 돌리지 않는다.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업적이나 성취와
애정 어린 관심을
구분할 줄 아는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더 키워야 할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못 했다 해도 우리에겐 애정 어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 우리 개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며 그 일부일 뿐임을 일깨워주는 목소리 말이다.
이런 <내면의 목소리>는, 달리 말하자면, 바로 어머니 목소리이다. 하지만 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이거나 우리가 좋아하는 시인의 목소리, 혹은 일터에서 피곤하게 돌아온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로하는 아홉 살 아이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이건, 당신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잘 났는지 따위와 상관없이,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아침에 일어나야 할 때, 내면의 목소리가 "눈 뜨고 노래를 흥얼거려!" 하고 말한다. 그때 난 그 녀석한테 이렇게 대꾸하지. "입 닥치고, 눈이나 더 붙여라!"
자신의 뇌와 의식 상태를 의식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익혀서, 꿈이 더 빨리 이뤄지게 하라!
우리네 많은 이들은 신경 예민한 사람들 속에서 자랐다.
도로에서 앞차가 좀 늦게 간다고 욕하고 빵빵거리고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소리치는 사람들 속에서.
또 자기 편하자고 남들을, 이웃을 불편하게 만들기를 예사로 아는, 몰염치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시험을 치를 때도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초조하게 군다. 그런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 안달하며 주변 사람들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다른 이들의 일이 좀 잘 되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때로는 뒤에서 수군덕거리며 중상모략에 모함까지 일삼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목소리들이 이제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서,
우리 잠재력을 온전히 평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여 우리 안에 (자기도 모르게) 심어 놓는 목소리는,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틈만 나면 슬몃슬몃 기어나오는 것은,
사실은 근거 없이 두려움 품게 하고 자신을 연약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그런 목소리들은 억눌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대신 터무니없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우며 우리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목소리를 자꾸 키워야 할 것이다.
우리네 머리란 우리가 한때 알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죄다 저장돼 있는 커다란 동굴 같은 공간. 무익한 소리들은 죽이고, 삶의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도록 이끄는 목소리들에 집중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