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13. 수수께끼 여인
지중해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백사장으로 몰려들었다. 가벼운 해풍에 흰색 요트들과 어선들이 저마다 돛을 살짝살짝 흔들었다. 머리 위 짙푸른 창공에서는 니스와 망통을 오가며 흥겨운 레이스를 펼치는 수상비행기들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망통/Menton - 니스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에 위치한 프랑스 휴양지이자 항구)
흰색 테니스 복 차림의 젊은이가 대나무로 엮은 안락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의자 곁에는 테니스 라켓과 영국의 과학 저널 몇 부가 든 가방이 놓였다. 그 젊은이 옆, 커다란 흰색 파라솔 밑에 놓인 캔버스 앞에서는 그의 친구인 아르망이 부지런히 붓을 놀렸다.
고인이 된 도웰 교수의 아들, 아르투아 도웰과 아르망은 막역지우였다. 이 우정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속담이 틀리지 않음을 그 무엇보다도 잘 입증했다.
아르투아 도웰은 말수가 적은 편에다 냉철한 타입이었다. 정돈을 좋아하고 끈기 있게 체계적으로 작업할 줄 알았다. 졸업을 한 해 남기고 벌써 대학에서 생물학부에 자리를 받았다. 아르망은 진짜 남부 프랑스인답게 늘 어수선하며 뭔가에 쉽게 몰두하는 기질이었다. 한두 주일은 붓과 물감을 내팽개치다가 또 다시 작업에 들어서면, 그때는 그 어떤 힘도 그를 화가(畵架)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한 가지 점에서만 두 친구는 서로 비슷했다. 즉, 둘 다 재능이 있고 한 번 설정한 목표를 비록 목표에 이르는 길은 다르지만 달성할 줄 알았다. 한 사람은 차근차근 밟아서 나아가고, 다른 한 사람은 사이를 두었다가 성큼성큼 도약했다.
아르투아 도웰의 생물학 연구는 중진 학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에게는 학계에서 눈부신 성장이 보장돼 있었다. 아르망의 그림들은 여러 전시회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으며, 개중 몇 점은 벌써 몇몇 나라의 유명한 갤러리들에 팔렸다.
아르투아 도웰이 신문을 모래바닥에 내던지고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기울인 채 눈을 감고 말했다.
“안젤리카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어.”
아르망이 한없는 비탄에 잠겨 고개를 흔들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 건가?”
그 물음에 아르망이 자기 쪽으로 팩 몸을 돌리는 걸 보고 아르투아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르망은 이미 열렬한 화가가 아니라 왼손에 팔레트 방패와 팔 받침 창을 들고 오른손은 붓 칼로 무장한 기사였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모욕을 가한 자를 무찌를 준비가 된 기사처럼 보였다.
그가 무기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안젤리카를 잊다니! 그런 여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스르르 소리를 내며 갑자기 몰려든 파도가 그의 무릎까지 덮었고, 그가 우수에 찬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안젤리카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노래들이 사라진 뒤로 세상은 더 따분해졌어…”
안젤리카의 죽음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아르망은 <런던 안개 심포니>를 그리기 위해 갔던 런던에서 처음 접했다. 그는 안젤리카라는 가수의 재능에 심취한 팬일 뿐 아니라 또한 그녀의 친구요 흑기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부 프로방스에서, 중세 성들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 그의 기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젤리카에게 생긴 불행을 알고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창작의 최고 절정에서 난생 처음 ‘그림의 폭음’을 그만두었다. 캠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온 아르투아가 친구의 기분을 돌리려고 함께 지중해 해안으로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르망은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백사장에서 호텔로 돌아와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기차에 몸을 싣고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으로, 몬테카를로 도박장으로 향했다. 머릿속을 다 비우고 싶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육중한 건물 주변에는 벌써 사람들이 들끓었다. 아르망이 첫 번째 홀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서 한 판 노시지요, 손님!”
돈을 긁어모으는 데 쓰는 작은 부삽을 흔들면서 지배인이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아르망이 발길을 멈추지 않고 다음 홀로 갔다. 벽마다 수렵과 질주, 펜싱을 하는 반라의 여자들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건 다 한마디로 도박 심리를 충동하는 것이었다. 그 그림들에서는 치열한 싸움과 흥분과 탐욕이 긴장감 있게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도박판 주변에 모인,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더 많이, 더 날카롭게 그려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의 뚱뚱한 상인이 붉은 솜털로 덮이고 퉁퉁한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돈을 끌어당겼다. 천식 환자처럼 힘겹게 숨을 쉬었다. 그의 두 눈이 돌아가는 구슬을 긴장하여 지켜본다. 뚱보는 벌써 거액을 잃고 지금은 복구하려는 기대로 마지막 돈을 거는 것이리라. 아르망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만약 마지막 판돈마저 날린다면, 살이 쪄서 흐느적거리는 이 사람은 자살자들의 거리로 가서, 거기서 인생과 마지막 정산을 할지도 모르지…
뚱보 뒤에는 옷차림 꾀죄죄한 노인이 백발을 흩뜨린 채 핏줄 불거진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손에는 수첩과 연필을 들고 이기는 숫자들을 적으면서 뭔가 계산을 하는데…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룰렛의 노예가 되었다. 카지노 측에서 그에게 매달 많지 않은 용돈을 쥐어주고 있을 것이다. 생활도 하고 도박도 하라고. 그건 일종의 광고였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확률 이론’을 세우고, 행운의 여신이 얼마나 변덕을 부리는지 연구하고 있다. 자신의 추측이 틀릴 때면 화가 나서 연필로 수첩을 콕콕 찍고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계산에 빠진다. 짐작이 맞아 떨어지면 얼굴이 환해져서 고개를 옆 사람들에게 돌린다, “봐요, 드디어 나는 확률 법칙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어.” 하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종업원 둘이서 검은 비단 드레스 차림의 노부인을 부축하여 안락의자에 앉힌다. 주름이 많은 목에 보석 목걸이가 걸려 있다. 노부인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비탄과 환희를 갈라놓는 비밀스러운 구슬을 보자 노부인의 움푹 들어간 두 눈에서 탐욕의 불꽃이 타오르고 반지를 줄줄이 낀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떨기 시작한다.
젊고 예쁘고 몸매 좋은 여성이 우아한 암녹색 의상을 입고 테이블 곁을 지나치다가 천 프랑 티켓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잃은 것을 확인한 뒤 태평하게 냉소를 짓고 다음 방으로 간다.
아르망이 레드에 백 프랑을 걸어 이겼다.
‘난 오늘 이겨야 돼.’
그렇게 마음먹으면서 천 프랑을 걸었지만 잃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엔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도박 욕구에 사로잡혔다.
룰렛 테이블로 세 명이 다가왔다. 남자는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아주 얼굴이 창백하고, 두 여자 중 하나는 빨강머리, 다른 하나는 잿빛 원피스 차림… 아르망이 마지막 여자를 흘낏 쳐다봤다. 뭔가 불안감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안한지 알지 못하면서 화가는 잿빛 옷차림의 여성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그녀가 취한 오른손 제스처 하나에 깜짝 놀랐다.
‘뭔가 눈에 익어! 아, 그래, 안젤리카가 저런 제스처를 취하곤 했어!’
그런 생각에 어찌나 놀랐던지 그는 더 이상 룰렛에 낄 수도 없었다. 미지의 세 인물이 웃으면서 테이블을 떠나자, 아르망이 딴 돈을 테이블에서 거두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들 뒤를 따라 나갔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새벽 네 시, 아르투아 도웰의 객실 문을 마구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도웰이 화를 내며 실내복을 걸치고는 문을 열었다.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선 사람은 아르망이었다. 그가 피곤에 지쳐서 안락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고는 말했다.
“미칠 것만 같네.”
“무슨 일이야, 친구?”
도웰이 놀라서 물었다.
“뭐냐면… 자네한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어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카지노에 있었네. 처음엔 따다가 돈이 나갔지. 그런데 문득 어떤 여인을 본 거야. 그녀의 제스처 하나에 얼마나 놀랐든지 게임을 그만두고 그 뒤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갔어. 탁자에 자리 잡고 진한 블랙커피를 한 잔 시켰지. 신경이 너무 예민해질 때 커피를 마시면 난 늘 좀 안정이 되거든…
그 모르는 여인은 옆 탁자에 앉아 있었네. 그녀 일행으로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남자는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었지만 썩 신뢰가 가는 타입은 아니고, 여자는 빨강머리인데 아주 천박해 보여. 그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즐겁게 수다를 떨었지. 잿빛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샹송을 부르기 시작했어. 들어 보니 목소리가 아주 불쾌한 음색에다 빽빽거리는 거야. 그러나 문득 그녀가 다소 낮은 저음을 가슴에서 내자…”
아르망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르투아! 그건 바로 안젤리카의 목소리였단 말이네. 수천 개의 목소리 중에서도 난 그걸 알아들을 수 있어.”
‘가엾은 친구! 이렇게까지 상하다니.’
도웰이 그런 생각 끝에 상대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얹고 말했다.
“그건 자네한테 그렇게 들린 것이야, 아르망. 정신 차리게. 어쩌다가 비슷한 목소리를 들은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정말이네.” 아르망이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노래하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네. 프로필이 또렷하고 사랑스러운 두 눈 하며 상당히 예뻐. 그러나 몸매가, 몸이 말이야! 아르투아, 만약 그 여자의 몸매가 안젤리카와 물방울 두 개처럼 닮지 않았다면, 난 악마한테 물려가도 좋아.”
“그래, 그렇다 치고, 아르망, 브롬을 좀 마시게.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눕게나. 내일, 아니 벌써 오늘이지, 자네가 눈을 뜰 때면…”
아르망이 힐난하는 눈길로 도웰을 응시했다.
“자네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아직 그렇게 단정 짓지 말게나.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아직 다 말하지 않았네. 그 여자가 노래를 부를 때 바로 이런 제스처를 손으로 취했어. 이건 안젤리카가 즐겨 취하는 제스처야, 이건 그녀한테 독특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제스처란 말일세.”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 낯선 여자가 안젤리카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네… 이것 때문에 내가 정말 미칠지도 몰라…” 아르망이 이마를 훔쳤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보게. 그 여자의 목에 정교한 목걸이가 걸려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목걸이도 아니야, 작은 진주가 박히고 넓이가 사 센티미터쯤 되는 고정 칼라야. 한데 가슴은 깊이 파여서, 그 사이로 어깨의 작은 반점이 보이는데, 그건 바로 안젤리카의 반점이란 말이야.
목걸이는 마치 붕대처럼 보인다네. 목걸이 위로는 내가 모르는 여인의 머리통이, 아래로는 나에게 친숙하고, 그 선이며 형태 하나하나 내가 연구한 안젤리카의 몸이 있다는 것일세. 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아르투아. 나는 인체의 독특한 선들과 개인적 특성을 잘 기억한다네… 안젤리카를 모델로 스케치와 습작을 내가 얼마나 많이 그렸나, 초상화를 얼마나 많이 그렸나. 그러니 실수란 있을 수 없네.”
“아니야, 자네가 말하는 건 불가능해!” 도웰이 외쳤다. “안젤리카는 정말이지...”
“죽었다고? 정말 죽었는지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네. 그녀는, 혹은 그녀의 시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리고 이제…”
“자네가 안젤리카의 되살아난 시신을 만났다고?”
“오-오!..” 아르망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바로 그렇게 생각한 거네.”
도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바장였다. 이제 더 이상 잠을 청하기는 글렀다.
“우리 냉철하게 판단해 보세. 자네 말로는, 그 여자가 마치 두 가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는 거지? 하나는 자기 목소리, 그저 평범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젤리카의 목소리라는 건가?”
“낮은 음역은 바로 안젤리카의 독특한 콘트랄토야.”
아르망이 단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네. 자네는 사람이 고음을 성대 위쪽 끝으로, 낮은 음을 성대 아랫부분을 움직여 목구멍에서 뽑아낸다고 가정하는 건 아닌가? 소리 높이는 성대의 크기나 작은 긴장에 좌우되네. 그건 현악기 줄과 비슷해서, 더 팽팽하게 당겨질수록 현은 더 많은 진동과 더 큰 고음을 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만약 그런 수술을 한다면, 성대는 더 짧아졌을 테고, 그러니까 목소리가 아주 높아질 거라는 얘기지.
그런데 사람은 그런 수술을 받은 뒤에 노래를 거의 할 수 없을 거야. 절단면이 성대의 올바른 진동을 방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목소리는 아무리 좋게 나온다 해도 아주 쉰 소리일 테고… 아니야, 이건 확실히 불가능해. 끝으로, 안젤리카의 몸을 ‘되살리려면’ 머리가 있어야 하네, 누군가의 몸통 없는 머리가...”
도웰이 문득 말을 멈췄다. 아르망의 가정을 어느 정도 입증하는 뭔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르투아 도웰은 아버지의 몇몇 실험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다. 도웰 교수는 죽은 개의 맥관(脈管)에 섭씨 37도까지 데운 자양분 액체를 아드레날린을 섞어 주입했다.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자극하여 위축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이 용액이 어떤 압력 하에서 심장에 들어가자, 심장이 다시 뛰면서 혈액을 혈관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혈액이 조금씩 순환하면서 동물이 살아났었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히 말했다.
기관이 죽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기관들에 혈액과 혈액에 담긴 산소 공급이 끊기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사람도 이런 식으로 살릴 수 있다는 뜻인가요?
아르투아의 물음에 아버지가 흔쾌히 답했다.
그렇지. 나는 소생술을 완성하려고 해, 언젠가 이 ’기적‘을 만들어낼 거야. 그래서 많은 실험을 하고 있단다.
아버지 말대로라면 시신을 소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몸통은 이 사람 것이고 머리는 저 사람 것인 시체를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런 수술이 과연 가능할까? 그 점에서 아르투아는 확신이 없었다. 사실 그는 아버지가 조직과 피부를 이식하는 아주 과감하고 성공적인 수술들을 한 것을 직접 보았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아버지가 척척 해낸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안젤리카의 몸에 다른 머리가 있을 수 있다는, 아르망의 가정이 틀리지 않을지도 몰라. 아버지만이 그런 복잡하고 비범한 수술을 해내실 수 있었지. 그 실험을 조수들이 계속한 건 아닌가?’
도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머리나 시신 전부를 되살리는 것과 한 사람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몸통에 붙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도웰이 생각을 멈추고 물었다.
“잿빛 원피스의 여인을 찾아내서 안면을 튼 뒤 비밀을 파헤치고 싶네. 자네가 도와줄 텐가?”
“당연하네.”
아르망이 도웰의 손을 굳게 쥐었다.
그들이 향후 행동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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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흥겨운 뱃놀이
며칠 지나 아르망이 브리케와 그녀의 여자 친구, 장 등과 이미 알게 되었다. 그가 그들에게 요트를 타고 바다 유람을 하자고 제의했고, 제의는 쾌히 수락됐다.
장과 빨강머리 마르타가 갑판에서 도웰과 얘기 나누는 동안, 아르망은 브리케에게 밑으로 내려가 선실을 구경하라고 권했다. 그리 넓지 않은 선실이 두 칸인데, 그 중 하나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오, 여기에도 악기가 있다니!”
브리케가 반갑게 소리쳤다.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폭스트로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요트가 파도 위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렸다. 아르망이 피아노 곁에 서서 브리케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어떻게 조사를 시작할지 궁리했다.
“아무 거나 한 곡 불러 봐요.”
브리케가 선선히 응했다. 아르망에게 교태 어린 눈길을 던지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당신 목소리는... 좀 이상하군요.”
아르망이 그녀의 얼굴을 예리하게 응시하면서 말했다.
“당신 목구멍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브리케가 일순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아, 그래요!..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어떤 음악 선생은 내 목소리가 콘트랄토라 하고, 다른 선생은 메조소프라노라고 했지요. 누구나 목소리를 나름대로 평가했고, 그렇게… 근데 난 얼마 전에 감기에 걸렸어요…”
그런 말을 듣자 아르망의 궁금증이 더 커졌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지? 내 짐작이 맞는다. 여기엔 뭔가 비밀이 있어.’
아르망이 우울하게 입을 뗐다.
“당신이 저음으로 노래할 때는... 내가 잘 아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요. 그녀는 유명한 가수였지요. 가엾게도 기차 전복 사고로 죽었어요. 놀랍게도 그녀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녀 몸매는 당신 몸매와 너무나도 똑 닮았어요. 두 개의 물방울처럼… 당신 몸이 그녀의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상대를 쳐다보는 브리케의 눈빛에는 이미 두려움이 감춰지지 않았다. 이런 대화를 아르망이 괜히 꺼내는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응수했다.
“서로 빼닮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래요. 그렇지만 그렇게 닮은 사람들을 난 여태껏 못 봤어요. 그뿐 아니라… 당신 제스처… 바로 손을 쓰는 제스처가… 또 있어요… 지금 당신은 흐트러진 머릿결을 다듬으려는 것처럼 손으로 머리를 쥐었지요. 그런 머리채가 안젤리카에게도 있었고, 그녀도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머리를 그런 식으로 쓸어 올리곤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기다란 머리대신 최신 유행으로 짧게 잘랐군요.”
“예전에는 나도 머리를 길렀어요.”
브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얼굴이 창백하고, 손가락 끝이 유난히 떨렸다.
“여긴 갑갑해요... 위로 올라가지요...”
아르망이 역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녀를 세웠다.
“잠깐만이요. 당신하고 얘기를 꼭 나눠야 합니다.”
그가 두꺼운 유리창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그녀를 억지로 앉혔다.
“속이 안 좋아요… 난 뱃놀이에 익숙하지 못해요!”
브리케가 일어나려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짧은 옥신각신 중에 아르망의 손이 우연히 그녀의 목을 건드리면서 목걸이가 약간 벗겨졌다. 그러자 장밋빛 절단면이 훤히 드러났다.
브리케가 비틀거렸다. 아르망이 그녀를 간신히 부축했다. 그녀가 기절한 것이다.
화가가 어찌할 줄 몰라서 호리병에 있는 물을 그녀 얼굴에 끼얹었다. 그녀가 곧 정신을 차렸다. 두 눈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서렸다. 제법 오랫동안 둘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브리케는 자신에게 징벌의 시간이 닥친 것 같았다. 남의 몸을 자기 것처럼 걸치고 다닌 대가를 지불할 무서운 시간이 말이다.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겨우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나를 망가뜨리지 말아요!.. 가엾게 봐 주세요…”
“진정해요. 난 당신을 망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이 비밀은 꼭 알아야겠어요.”
아르망이 브리케의 축 늘어진 팔을 들어 올려서 세게 눌렀다.
“말해요, 이건 당신의 몸이 아니지요? 이걸 어디서 났지요? 사실대로 고해요!”
“장!”
브리케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아르망이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을러댔다.
“한 번만 더 소리를 지르면, 이 선실에서 영원히 못 나갈 거요.”
그러고는 브리케에게서 떨어져 선실 문을 재빨리 잠그고 유리창을 꼭꼭 닫았다.
브리케가 어린애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망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울어도 소용없어요! 내 인내심이 고갈되기 전에 얼른 말해요!”
브리케가 흐느끼면서 입을 떼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난 유탄을 맞고 죽었는데... 하지만 그 뒤 다시 살아났어요... 머리 하나만 유리판 위에 놓였지요… 그건 아주 무서웠어요!.. 톰의 머리도 거기 놓여 있었고… 그런 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코른 교수,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살려냈어요… 나에게 몸통을 붙여달라고 부탁했지요. 그가 약속을 했고… 그러더니 어디선가 바로 이 몸을 가져온 거예요…”
그녀가 자신의 어깨와 두 팔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나 죽은 몸을 보고서는 거부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게 싫어서 내 머리를 시체에 붙이지 말라고 애원했지요… 이런 사실은 로랑이 증명할 수 있어요. 그녀가 우리를 돌보았으니까. 그러나 코른은 나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나를 마취시켰고, 깨어 보니 이런 모습이었어요. 난 코른의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파리로 달아났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지요… 코른이 나를 추적할 것임을 알았어요… 제발 나를 죽이지 말아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이제 나는 몸통 없이 남기를 원치 않아요, 이건 나의 일부가 되었어요... 이렇게 경쾌한 움직임을 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어요. 단지 발이 아픈데...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겠지요… 코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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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횡설수설을 들으면서 아르망이 생각했다.
‘이 여인한테는 정말 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코른이란 자는… 어떻게 안젤리카의 시신을 빼내서 이런 끔찍한 실험에 쓸 수가 있었단 말인가? 코른! 그래, 그 이름을 아르투아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코른은 아르투아 아버지의 조수였던 것 같아. 이 비밀을 반드시 밝혀내고 말리라.’
아르망이 엄격한 투로 말했다.
“울음을 멈추고 내 얘기를 잘 들어요. 내가 당신을 돕겠어요. 하지만 이 순간까지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여기로 올 사람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이오. 여기로 올 사람은 바로 아르투아 도웰이오. 당신도 그를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내 말을 따라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어깃장을 놓는다면, 그 즉시 지독한 형벌을 받게 될 거요.
당신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어요. 당신의 머리와 당신이 입수한 남의 몸을 그 어디에도 숨기지 못할 것이오. 기요틴 집행자들이 당신을 찾아낼 거요. 내 말을 똑똑히 들어요. 첫째, 진정하시고, 둘째, 피아노 앞에 앉아서 노래를 불러요. 위에서도 들을 수 있게끔 최대한 크게 불러요. 당신은 아주 즐거워서 갑판으로 올라갈 마음이 없는 겁니다.”
브리케가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앉고는 겨우 말을 듣는 손가락들을 놀려 반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더 크게, 더 명랑하게.”
아르망이 유리창과 선실 문을 열면서 지시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노래였다. 씩씩하고 유쾌한 장조 풍으로 옮겨진, 절망과 공포의 비명이었으니 말이다.
“건반을 더 힘차게 두드려요! 그래, 그렇게! 연주하면서 기다려요. 당신은 우리와 함께 파리로 갈 거요. 달아날 생각일랑 접으시오. 파리에서 당신은 안전할 거요. 우리가 당신을 보호할 수 있어요.”
아르망이 명랑한 얼굴을 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요트는 오른편으로 기운 채 작은 파도를 따라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축축한 바닷바람이 상큼했다. 아르망이 아르투아 도웰에게 다가가서 다른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한 옆으로 데리고 와 말했다.
“밑에 선실로 가 보게나. 그녀가 나한테 한 얘기를 다시 그대로 말하도록 시키게. 그 동안 손님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
“어때요, 요트가 마음에 들어요, 마담?”
아르망이 빨강머리 마르타에게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장은 장의자에 널브러져서 경찰과 수사관들을 피해 멀리 도망 온 기쁨을 만끽했다. 더 이상 조바심 떨고 싶지 않았으며, 늘 긴장하는 생활을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작은 상자에서 고급 코냑을 느긋하게 꺼내 들면서 꿈만 같고 명상적인 상태에 한층 더 빠져들었다. 그건 다 아르망 덕분이었다.
빨강머리 마르타도 아주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선실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노래를 들으면서 경쾌한 가락들 사이사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섞었다.
한 판의 연주와 노래에 진정된 것인가, 아니면 아르투아가 덜 위험한 상대로 보였기 때문인가, 어쨌든 브리케가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과 소생에 관한 사연을 좀 더 조리 있고 알아듣게 읊었다.
“그게 전부예요. 내가 과연 죄를 저질렀나요?”
그녀가 이젠 웃음기마저 띠면서 묻고는 <내가 잘못인가요?>라는 제목의 짧은 샹송을 부르기까지 했다. 그 노래를 갑판에 있는 마르타가 따라 불렀다.
아르투아 도웰이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코른 교수 집에서 본 세 번째 머리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요.”
“톰이요?”
“아니요, 코른 교수가 어떤 머리에게 당신을 보여줬다면서! 그렇지만…”
도웰이 바지 주머니에서 서둘러 지갑을 꺼내 뒤지더니 사진을 빼서 브리케에게 보였다.
“말해 봐요, 여기 이 남자분이 당신이 코른 집에서 본, 나의... 아는 머리와 닮았나요?”
“네, 아주 똑같아요!”
브리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건반을 두드리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정말 놀랍군요! 어깨가 있네요. 몸이 달린 머리로군요. 이 사람에게 벌써 몸을 달아주었단 말이에요? 아니, 왜 그러세요?”
그녀가 놀라움과 정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투아가 비틀거렸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간신히 자신을 추슬러서 몇 발짝을 떼고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왜 그러세요?”
브리케가 재차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쌍한 아버지.”
그러나 브리케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르투아 도웰이 아주 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은 거의 차분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놀라게 한 것 같군요. 이따금 가벼운 심장 발작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제 다 지나갔어요.”
“근데 그 사람은 누구지요? 당신과 닮은 듯한데... 형인가요?”
브리케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당신은 그 머리를 찾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갑시다. 우리가 은신처를 만들어 주겠어요. 그 누구도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언제 떠날 수 있겠어요?”
“오늘이라도. 한데 당신은... 내 몸뚱이를 떼어내지는 않을 건가요?”
도웰이 언뜻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요… 당신이 우리 얘기를 잘 듣고 협조만 한다면. 갑판으로 올라갑시다.”
“아, 뱃놀이가 어떤가요?”
갑판으로 올라와서 도웰이 명랑하게 물었다. 그리고 노련한 뱃사람처럼 수평선을 응시하고는 걱정스럽게 고개를 저으면서 덧붙였다.
”바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저기 수평선 위에 어둑어둑한 띠가 보이지요?.. 제 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오, 얼른 돌아가요! 난 바다에 빠져 죽고 싶지 않아요.”
브리케가 농 반 진 반으로 외쳤다.
돌풍의 기미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빨리 해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웰이 바다에 생소한 손님들을 그저 놀라게 한 것일 뿐이었다.
아르망이 점심식사 뒤에 ‘돌풍이 불지 않으면’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기로 브리케와 약속했다.
호텔로 돌아오자 도웰이 말했다.
“이보게, 아르망, 우리가 커다란 비밀의 흔적을 우연히 접하게 됐어. 코른이 누구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지 아나? 바로 내 부친, 도웰 교수의 머리야!”
벌써 의자에 앉았던 아르망이 용수철처럼 발딱 일어났다.
“머리라고? 자네 부친의 살아있는 머리라고?! 하지만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이게 다 코른의 짓이야! 그자는… 내가 그자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겠어! 이제 한 시라도 빨리 자네 부친의 머리를 찾아야 하네.”
아르투아가 비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있는 상태로 찾아내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야. 부친은 몸에서 떼어낸 머리들의 소생 가능성을 몸소 입증하셨지. 하지만 그 머리들은 두 시간도 채 못 살고 죽었다네. 왜냐하면 혈액이 엉겨 붙었고, 인공영양 액체로는 생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아르투아 도웰은 부친이 숨지기 얼마 전에 <도웰 217>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코른이 <코른 271>로 개명한 약제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약제는 혈관에 주입되어 혈액의 응고를 완벽하게 막아주고, 그래서 머리가 더 오래 생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살아 있든 죽었든 아버지 머리를 찾아내야 해. 얼른 파리로 떠나세!”
아르망이 짐을 꾸리려고 자기 객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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