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 인상파 대가들과 같은 반열에 놓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1864-1901)의 기구한 운명과 작품
삶과 창작과 사랑의 비극
저명하고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앙리 로트렉은 운명에 의해 정상적인 삶에서 바닥으로 던져졌다. 이건 그의 구원이기도 하고 파멸과 성공과 수치이기도 했다. 극적인 운명, 단순한 상업광고를 높은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화가로서의 재능, 굳은 의지와 삶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인물.
키 작은 천재의 인생 비극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1864년 태어났다. 가문의 혈통을 중시한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고, 유전적으로 열등한 자식을 낳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나이 열셋에 앙리는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1년 뒤 같은 상황에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뼈를 다 맞추었지만, 그 뒤로 성장이 멈추어 키가 150센티미터에 그쳤다. 이건 Piknodizostoz라는 희귀한 난치병일 가능성이 높다.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가 이 건강 문제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백작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은 집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그의 머리와 두 손은 지나치게 큰데 두 다리는 짧고 두 발은 작았다. 지나치게 큰 두개골을 항상 검은 모자로 숨기고 묵직한 턱은 무성한 수염으로 가렸다. 그의 옷장을 헐렁한 바지와 긴 코트 등속이 차지했다. 또 변함없는 특징은 구부러진 대나무 지팡이를 항상 짚고 다니는 것.
운명은 그에게 가혹했다, 그는 매일 자신이 남들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더 못난 것이 하나 없으며, 외려 많은 면에서 더 낫다는 것을. 또한 그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그리고 술독에 빠지고 ‘파리 보헤미안 생활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사랑까지도. 그런 생활이 입맛에 딱 맞았다.
나이 열아홉에 그는 몽마르트와 매춘 업소의 단골이 되었고, 파리의 밤 생활 관찰과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했다. 그는 본성적으로 재미와 즐거움, 축제를 찾아다녔다. 달리 말하자면, 가족한테 얻지 못한 것을 편견이 없고 반짝이는 재미가 있는 세계에서, 기형적으로 작은 사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세계에서 찾아냈다. 그 세계에서 그는 사실상 죽는 날까지 지낸다.
앙리 로트렉의 사랑과 고통
성장이 멈추어 키가 아주 작았지만, 그의 ‘물건’은 지나치게 컸다. 그 스스로 자신을 ‘주둥이가 아주 커다란 주전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 그림의 모델들과 분방한 성생활을 벌였는데, 특히 젊은 마리 샤를의 입에서 그의 비상한 성적 능력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몽마르트의 거주자들한테서 그는 인기가 매우 좋았다. 왜냐면 그들과 허물없이 친절하게 배려하며 지냈으니까. 그는 매음굴의 여성들을 거리낌없이 극장에 초대하고 그들과 파리의 밤거리를 누비고 선물을 주곤 했다. 심지어 댄서며 창녀, (매춘을 부업으로 하는) 세탁부들한테 열정적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런 여성 탐닉으로 인해 ‘등이 굽은 돈 후안’이라는 별명마저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랑을 꿈꾸지 않았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정말 사랑할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평생 꿈꾸었다.
그리고 한번은 그에게 운명의 여신이 미소 지은 듯했다. 같은 계층의 여성과 만나게 됐다. 순수한 영혼과 천사의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이름은 알리나였다. 로트렉은 술을 끊고 요란한 파티도 더 이상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아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충격받은 부모가 딸 알리나를 얼마 전까지 머물던 수녀원으로 돌려보낸 것. 로트렉은 자신이 평온한 가정을 꾸릴 팔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앙리 로트렉은 몽마르트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가벼움과 젊음, 힘, 아름다움 등에 계속 빠졌다. 고삐 풀린 재미, 단순하고 저속한 유흥이 그의 기질에 맞았다. 또, 자신을 향한 비뚤어진 시선과 동정, 경멸에 무심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세 살 때 (돌이 지나 죽은) 아우의 세례식에서 그림 솜씨로 이미 가족을 놀라게 했으며, 화가로 대성할 것이라고 짐작들 했다. 아우가 죽은 뒤 부모가 이혼했고, 한동안 어린 앙리는 유모와 살았다. 여덟 살이 되어서야 모친의 시골 영지로 돌아갔다.
동물을 주로 그리는 화가 르네 Princeteau의 스튜디오에서 첫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의 지인이며 청각장애가 있는 화가였다.
18세 되는 1882년 파리로 나와 대학 입시를 치렀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 스물하나 되는 1885년 앙리는 마침내 몽마르트로 거처를 옮겨, 작은 작업실에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에만 몰두했다. 에드가 드가의 대담하고 거친 듯한 선과 색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일본 판화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독창적이고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나아갔다.
당시 몽마르트는 사실상 파리 예술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앙리는 자기 창작의 소재를 발견하곤 했다. 파리 보헤미안의 사는 방식, 카바레와 댄스 룸과 댄서들 또 여배우와 매춘부 등의 삶.
로트렉이 다른 화가 앙리 드 그로에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그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1890년 초 브뤼셀의 전시회에 반 고흐가 자기 작품 여섯 점을 내놓았는데, 대중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정적인 평가 드 그로가 앞장섰다. 이를 두고 로트렉이 격분한 나머지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드 그로가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반 고흐가 죽기 전 그의 초상화를 로트렉이 파스텔로 그렸다. 두 화가가 나이트클럽에 있던 어느 날 밤, 혼자 생각에 잠긴 옆 모습. 매부리코와 듬성듬성한 눈썹이 잘 포착돼 있다.
앙리가 가장 좋아하던 카바레 가수의 이미지에 놀랐다. 선명한 빨강 머리, 얇은 입술,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깡마르고 큰 키, 기다란 검은 장갑. 그녀의 이미지를 담은 화집을 냈는데, 이것이 그녀의 가족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고소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쥘베르 자신도 로트렉의 그림을 처음 보고서 "내가 그렇게 흉칙하는 않아!" 소리쳤다. 하지만 그 화집이 가수에게 진정한 명성을 안겼고, 스캔들은 눈 녹듯이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모습을 두고 자연도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델들을 종종 그로테스크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비꼬아 묘사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수했다. 그가 비록 모든 모임에서 언제나 관심을 끌었지만, 그건 그에게 외려 불쾌하기만 했다. 그런 명성을 꿈꾼 게 아닌데.
그의 작품들로는 파리 매춘 업소와 그 종사자들의 삶을 다룬 연작이 유명한데, 그 가운데 한 여성이 애정에 굶주린 화가에게 매독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상업 포스터 장르에서 도약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은 상업 포스터 제작에 진지하게 관여했으며, 광고 포스터를 높은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889년 파리에 최초의 카바레 '물랭 루주'가 문을 열었다. 처음에 영업이 신통치 않자 물랭 루주의 소유주가 카바레 광고 포스터 제작을 앙리에게 부탁했다. 이 일이 이후 그의 모든 작업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얼마 뒤 앙리의 작품을 보고는 의뢰자가 그 파격성에 질겁했다. 하지만, 12월 하룻 저녁 3천 매가 파리 전역에 붙었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본 사람들이 카바레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물랭 루주의 인기가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았다. 그 뒤 앙리는 물랭 루주를 무상을 출입할 권리를 얻었다.
이 포스터를 다른 화가들은 “회화 장르를 망치려는 악마의 손장난”이라고 불렀다. 하룻밤 사이에 로트렉이 인기와 명성을 얻었고, 유명 인사와 스타들이 그런 광고를 하고 싶어 줄지어 그를 찾아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여러 분야에서 그를 찾았다. 각종 인쇄물에 들어갈 삽화 주문이 쇄도했고, 그는 만화를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다. 한번은 콘페티와 자전거 광고 포스터 제작 의뢰를 받고 런던으로 갔는데, 거기서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 친구가 되고,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대다수 예술사가들은 만약 앙리 로트렉이 없었다면 현대의 광고 예술가 앤디 워홀(Warhol)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앙리가 평범한 광고를 문화적 현상의 표식으로 만들었고, 그리하여 팝 아트 시대를 연 것이다.
*팝 아트 - 현대 미술에 나타난 양식의 하나. 1950년대 중후반 주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 전통적 예술 개념의 타파를 시도하는 전위적인 미술 운동으로 광고 디자인, 만화, 사진, 텔레비전 영상 따위를 그대로 그림의 주제로 삼는 것이 특징. 주요 예술가로는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 R.), 올덴버그(Oldenburg, E.), 워홀(Warhol, A.) 등
또 다른 시련
운명이 마침내 그에게 ‘사람들한테서 진정으로 인정받는’ 작은 선물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런 성공에 고무된 앙리가 1893년 파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 회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대중의 판결은 가혹했다. ‘예술과는 전혀 동떨어진, 음탕한 난쟁이의 지저분한 작품들’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상업 포스터로 얻은 인기와 즐거움에 이미 익숙해졌는데 말이다. 편견과 규칙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세상은 용서하지 않은 듯했다. 그의 항변. “내 그림들은 지저분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야. 사실, 추한 것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런 앙리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부모와 일가친척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그가 저명한 귀족 가문을 더럽혔다고 보았다. 언젠가 그의 모친에게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묻자. 백작 부인은 ‘내 아들만 아니라면 다 좋다’고 대답했다. 모친은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예술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기야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더 무슨 말을 하랴. 그의 숙부는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조카의 그림 여덟 점을 불태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하찮은 쓰레기가 우리 가문에 더 이상 수치를 안기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이 숙부는 앙리가 대여섯 살 때부터 그림 공부를 지지하고 지원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물감을 선물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사람의 패러디야.” 이 고백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엿보인다. 그는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았으며, 갈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누구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게 됐다.
인생 후반에 그는 너무 자유로워서 방종하다 싶게 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항상 가지고 다니기 위해 지팡이에 구멍을 뚫었다. 모친이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미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원을 나왔으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 보기에 외모가 기이한 이 천재의 운명은 다른 재능 특출한 사람들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다. 요절. 서른일곱 해의 인생 여정. 1901년 모친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가족은 가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앙리의 각종 작품을 수집하여 영지에 있는 성에 숨겨 두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앙리가 멸시받던 광고를 고도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그림들은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팔리고 있다.
앙리 툴루즈-로트렉이 1886-1887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 <세탁부>는 200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익명의 구매자에게 2240만 달러에 팔렸다.
20년에 불과한 활동 기간에 유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 363점, 소묘/데생 5084점을 남겼다.
이후 그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영화 <물랭 루주>가 그것인데, 여기서 그의 역할을 배우 José Ferrer가 연기했다.
* 앙리 로트렉의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요? 어떤 그림을 꼽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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