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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장. 동일시의 수준과 유형  

 

자신을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하는 상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살펴봤다. 

자신의 직업이나 젠더, 위치, 생각과의 동일시가 우리의 건강과 안녕을 좌우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의 생각이 비판받으면 우리는 풀이 죽고, 칭찬받으면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누군가가 칭찬하거나 헐뜯어도 우리는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를 두고 엄마 구실을 잘한다고 칭송하거나 못한다고 지적하면, 이건 다른 엄마들에 관해 말하는 것과 달리 내 신경을 건드릴 것이다. 내 몸의 어떤 특성을 좋게 보면 난 기분이 좋고 깎아내리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신체를 두고서는 어떻게 떠들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동일시의 수준과 유형. 바닷가에 홀로 선 사람

 

즉, 뭔가가 실제로 우리와 관련되면 우리는 거기에 안팎으로 반응한다. 또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있게 된다. 또 무엇이 우리의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뭔가에 누군가나 무엇인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내 아이, 내 전화기, 내 아파트, 내 친구, 내 소파, 내 나라 등이 그렇다. 누군가가 남의 아이를 윽박지른다면 난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아이한테 그렇게 한다면 난 아주 기분 상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남의 집에 불이 나면 내 집에 불났을 때처럼 죽을 듯이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다. 내 개가 애견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아주 좋아.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개가 그러면 나랑 상관없다. 

 

참고: 내 것이나 내 편이라 여기는 뭔가도 역시 나와 연관된다. 사실상 이건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의 연장이다. 따라서 동일시 수준을 이렇게 나눌 수 있다. 1) 나 2) 내 것, 나와 관련된 것 3) 나와 무관한 것. 시각적으로는 이렇게 보일 수 있다.

 

나, 나의, 나와 무관한...

 

‘나’ 범주에 관련된 것은 죄다 내가 자신을 이런저런 유형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목수야, 나는 엄마야, 난 사장이야, 난 중학생이야, 나는 내 몸이야, 난 남자야 등등. 

 ‘나의 ...’ 영역에는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게 다 들어간다. 내 집, 내 나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사업 등.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게 반드시 내 소유물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예를 들어, 내 사업, 내 아파트, 내 전화기는 내 것이지만, 내 나라나 내 친구, 내 도시는 나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라는 개념은 내 소유에만 적용되기보다는 외려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나의 것이라 여기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이건 동일시의 유형이다. 더 정확히 하자면, 동일시의 수준이다. 

 

1) 우리가 자신을 직접 동일시하는 유형과 동일시가 가장 강하게 일어난다. 나는 엄마야, 난 남편이야, 난 사람이야. 이건 우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나’ 수준이다. 

 

2) 다음에 ‘나의’라는 수준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게 나 자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과 어떻게든 관련되며, ‘나의’라는 접두사를 써서 연관성을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개는 내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개야, 남의 개가 아니라. 

 

3) 끝으로 ‘나와 무관한’ 수준. 나에게 해당하지 않으며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이 여기에 들어간다. 사실, 여기선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제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해안에 태풍이 닥쳐서 아무개네 전복 양식장이 망가졌다고 해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내 양식장이 아니고 내 가족도 아니야. 혹은, 시리아에서 전쟁이 계속되어도 난 크게 개의치 않아. 내 나라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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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시 수준 간의 경계는 사실 아주 희미하다. 예를 들어, “나는 교수야” 하고 말할 수 있고, “나는 교수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 하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떻게 말하는지는 그 사람이 자기 직업에 얼마나 동일시됐느냐에 달렸다. 자기 몸을 가리키면서 “이 몸이 바로 나야” 하고 말할 수 있고 “나에겐 이 몸이 있어” 하고 말할 수도 있다. “난 여자야” 혹은 “나의 젠더는 여성이야” 혹은 “난 여자 역할을 해”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몸이나 역할, 이미지 등 특정한 유형과 동일시하는 정도에 달렸다

 

이건 ‘나’와 ‘나의’ 수준 간의 경계가 어떻게 희미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의’와 ‘나와 무관한’ 수준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사례로는 미인대회에서 내 친구 딸이 입상한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친구 딸이 상을 받는데 나도 기뻐, ‘나의’ 친구의 딸이 아닌가. 혹은, 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나에게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래도 걱정돼, 왜냐면 간접적으로 나와 연관되니까. 그 상황이 내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나’와 ‘나의’와 ‘나와 무관한 것’ 등 동일시의 수준을 살펴봤다.

이건 다 내가 그 무엇과 동일시되는 유형이었다. 이와 다른 동일시 유형이 있는데, 이건 자신을 다른 사람이나 사람 그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라는 단어를 이용하면서, ‘나’가 ‘우리’가 된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회적 그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는 이 그룹이 되어서 별도의 개인보다는 그 일부로 행동한다. 이런 일은 집회나 축구 경기, 가족 등에서 종종 일어난다.

 

그런 동일시 유형의 뚜렷한 사례로 어린애를 둔 엄마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신과 자기 아이를 가리켜 종종 ‘우리’라고 일컫는다. 예를 들면, “우린 병이 났어”, “우리 응가하러 간단다.” 실제론 어린애가 아프고 응가를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말한다. 마치 아기와 하나가 된 듯이 말이다.

또 다른 좋은 예로는 사랑에 빠진 연인 커플이 있다. 함께 있을 때 두 사람은 각자의 경계를 벗어나 상대와 결합한 듯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가 ‘우리’로 확장된다. 

 

이런 유형의 동일시에도 몇몇 수준이 있다. 1) 우리 2) 우리의 3) 우리가 아닌 것.

 

우리, 우리의, 우리가 아닌 것.

 

1) 여기서 ‘우리’의 동일시 수준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군인이야”, “우린 호남인이야”, “우린 어느 학교 동창이야”, “우린 아무개 광팬이야”, “우린 한국인이야” 등등. ‘나’의 경우에 그렇듯이, 그룹 전체가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당신이 자신을 어떤 그룹과 동일시하고 있는지 더 명확히 알고 싶다면, 이런 물음에 대답해 보라. 

당신은 살면서 어떤 그룹들과 동일시돼 있나? 여기엔 이를테면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들, 동호회, 독서 클럽, 정당, 대학생 그룹 등이 들어갈 수 있다. 

당신 그룹은 무엇과 동일시돼 있나? 예를 들어, “우린 상류층이야”, “우린 대학생이야”, “우린 진보 그룹이야” 등. 

 

2) ‘우리의 ...’라는 수준에서 동일시는 ‘나의 ...’라는 수준에서 하는 동일시와 비슷하지만, 나보다는 그룹을 더 많이 드러낸다. 예를 들어, 우리 아파트, 우리 자동차, 우리 집안, 우리 영역, 우리 별장 등.

 

3) ‘우리가 아닌 것’ 수준에서는 동일시가 없다. 여기에는 우리 그룹과 아무 관련 없는 것이 다 들어간다. 

 

지금까지 동일시의 유형과 수준을 알아본 까닭은 우리에게 어디서 동일시가 생기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일상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가족과 강하게 동일시됐다면, 가족의 행복이 당신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리라. 즉, 당신 가족과 관련된 것은 전부 당신과도 바로 관련된다.

만약 당신 가족이 가풍 든든한 집안이라고 자부하는데 누군가가 당신 가족을 뼈대도 없는 집안이라 불렀다면, 당신은 당연히 기분이 상한다. 당신 개인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당신 가족을 그렇게 일컬은 것이지만, 당신이 자신을 가족과 동일시하는 까닭에 당신의 감정 상태가 크게 바뀐다. 

 

어떤 축구팀의 팬클럽과 당신이 강하게 동일시됐다면, 그 그룹이 공격받을 때 당신은 화가 나서 동료들을 옹호하러 나설 것이다. 자기가 속한 그룹과 동일시가 약할 때는, 그룹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애국자들은 종종 자신을 나라와 강하게 동일시한다. 나라가 위협에 처할 때 그들은 나라를 지키러 과감하게 나설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족이나 자신을 더 지킬 것이다. 이건 다 그 사람이 자신을 무엇과 더 크게 동일시하는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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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7. 동일시(Identification)의 영향 (1)  

 

실제로 우리가 아닌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본 유형을 앞에서 몇 가지 살펴봤다

“나는 걷고 있어”, “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난 생각해” 하고 말할 때,

<나>라는 느낌이 (자아감이) 추상적인 이미지나 느낌, 역할, 생각, 감정 등 이런저런 유형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다. 

 

the influence of identification

 

이 자아감이 어떤 유형과 동일시되지 않을 때, 그건 <나>라는 순수한 자아감으로 남는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유형과 동일시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이름과 동일시는 아마도 자기 이름이나 가문을 자랑스레 여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동일시의 영향은 잠시 놔두자. 다른 더 중요한 유형과의 동일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직업과 동일시를 먼저 본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경찰서장으로 일한다면, 자신의 비교적 높은 지위와 그 위치가 주는 측면을 크게 평가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경찰서장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경찰서장으로 일해” 하고 말하는 것과 
“나는 이 지역의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하는 것은 
차이가 상당히 크다.

 

전자의 경우 당신은 경찰서장이 단지 당신의 직업일 뿐이며 당신이 수행하는 일로 간주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의 직위와 동일시한다. 

전자의 경우, 어떤 사유로든 직위에서 물러나거나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대한다 해도, 당신은 크게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직업이 주는 지위와 권력과 경제적 이점 등과 동일시했다면, 그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사람들이 썩 존중하지 않는다 싶을 때 당신은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와 동일시된다면, 이 ‘무엇’에 해를 끼치거나 위협이 되는 것에 강한 두려움을 품고 저항한다는 점이다.

이건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타고난 반사 작용이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시 살펴보자.

당신은 자신을 경찰서장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나는 경찰서장이야” 하고 말한다. 이제 당신이 경찰서장 직위에서 밀려난다. 이건 본질적으로 당신 직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요 나아가 수십 년 경찰 생활의 파멸을 뜻할 수도 있다. 

한데 당신이 그 직무와 또 거기서 나오는 지위며 권력이며 보수 등과 동일시된 만큼, 이 위협을 당신은 자신을 겨냥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당신이 자신과 동일시한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당신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당신의 마인드와 몸은 바로 그렇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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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 당신은 한 지역의 경찰서장이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을 중요하고 존중받고 물질적으로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젠 그걸 다 잃었다. 당연히 자신이 파멸된다고 느낄 것이다. 한데 사람이 파멸될 때, 그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고 거기에 최대한 저항한다. 자신의 직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그걸 잃은 사람은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경찰서장이 아니라 단지 그 직무를 맡고 있는 것임을 아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런 사람은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한 게 없으며 이 직무가 단지 한시적이라는 것도 잘 이해한다. 
이런 경우, 앞에서 말했듯이,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으며,
직위 해제나 면직 따위를 좀 곤혹스럽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사실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신의 제법 높은 지위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상당히 깊게 발달해야 하며, 동일시가 무엇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자기 몸과 동일시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자. 

 

자기 몸과의 동일시. 거울 들여다보면서 뚱뚱하다고 여기는 여인

 

당신이 자기 몸을 자신이라고 간주할 때, 몸과 관련돼 일어나는 일이며 변화가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화, 부상, 아름다움의 상실, 비만이나 비쩍 마름, 신체의 불균형 등이 전부 아주 부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 아름다운 외모와 균형 있는 신체, 매끈한 몸매, 젊음 등이 우리의 자부심이 되며, 그런 것과 동일시되기가 아주 쉽다.

 

당신이 자신의 미모나 젊음과 동일시된다면,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사라질 때 당신에겐 극도의 불쾌한 상태가 야기되며 심한 경우 우울증까지 나타날 것이다. 그 이유는 똑같다. 신체 노화를 당신 마인드가 당신 자체의 점진적인 파괴와 같은 것으로 보겠기에 그렇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자기 몸이라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직시하자. 

당신의 자아감이나 자기인식이 당신 몸의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든 달라졌나?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자기인식은 자기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느낌을 뜻한다. 

당신의 <나> 느낌은 당신 몸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다.
질병 상태조차도 그 느낌을 건드리지 못한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느끼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유년기에도 노년기에도 우리는 우리 본연의 자신 그대로이다.
이 때문에 노인들이 젊었을 때와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지, 몸이 이젠 닳고 노화됐을 뿐이지. 

 

성별과 (gender와) 동일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당신이 자신을 진짜 사나이라고 여기는 데 익숙하다면, 당신한테서 그런 이미지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전부 강한 두려움과 분노를 야기할 것이다. 남자라고 여기는 기준에는 성적인 특징뿐 아니라 일정한 행동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남자들 무리에서 당신이 사나이라면 술 마실 줄 알고 싸움질도 사양하지 않고 여자도 자빠뜨릴 줄 알아야 한다는 관념이 있다. 그런 면을 다 갖추고 있다면, 비로소 사나이가 된다. 

하지만 어쩌다가 위궤양이 생겨서 예전처럼 호탕하게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이제 남자라는 이미지가 좀 흔들린다. 당신은 아직 남자이긴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이미지의 사나이는 못 된다. 그러고 나서 결혼하게 됐다. 이제 당신이 무슨 남자란 말인가? 아내 엉덩이에 깔린 신세가 됐는데! 그건 이미 사나이가 아니다. 이제 자신이 남자라는 느낌이 크게 공격을 받는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 진짜 남자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있고 그것과 동일시됐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 이미지와의 동일시뿐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 존중받음이나 의리나 젊은 여성한테 사랑받음 것처럼 동일시에서 얻는 이점과도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자라는 이미지에 그렇게 집착한다면, 당신을 조종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이제 당신에게 뭔가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 넌 남자잖아. 사나이가 뭐 그래.” 

혹은 여성은 당신을 이렇게 조종할 수 있다. 

“당신이 진짜 남자라면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줄 텐데.” 

그리고 당신은 남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들 말대로 끌리게 된다. 

이건 다 당신이 자신을 남자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여성들 경우에도 비슷하다.

젊은 여자가 ‘여자다운’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이미지가 공격받을 때 괴로움이 클 것이다. 

“아직도 사귀는 남자가 없어?!”, 

“넌 이 원피스를 사흘째 입고 다니는구나!”, 

“얘, 넌 뚱뚱해졌어!” 등등 여자 친구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에 심하게 상처받기 쉽다. 

그건 다 자신을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이는 반응, 진짜 남자나 진짜 여자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당신 본연의 모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당신을 계속 칭찬하거나, 혹은 그들 보기에 당신이 그리 남자답지 못하거나 여자답지 못하다면 계속 흠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대한 당신 반응은 남자나 여자에 대한 이미지에 당신이 얼마나 동일시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에 당신은 전혀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당신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남녀 이미지에 당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데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 자기 생각이나 감정과 동일시하면 어떻게 되나?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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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4부. 나는 누구인가? > ... )

  16.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3)  

 

(계속)

우리가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몸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몇 가지 실험에서 보고 알 수 있다. 

 

첫 번째 실험은 한 사람에게 세 번째 손이 있다는 환상이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피험자를 탁자 앞에 앉혔다. 이때 그의 두 손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오른손 곁에 그 손과 빛깔이며 형태, 크기가 아주 흡사한 모형 손을 놓았다. 그다음에 실험자가 이 사람 손의 한 부위와 모형 손의 같은 부위를 동시에 브러시로 건드렸다. 몇 번을 그렇게 했다. 

 

사람에게 세 번째 손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실험

(연구자들은 이 환상을 아주 실제처럼 만들었다. 

실험에 참여한 남자와 여자들 모두 그들의 모형 손에 브러시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 대자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걸 지켜보면서 피험자에게서는 자기 오른손을 점점 더 잘못 인식하게 됐다.

결국엔 두 개의 손 가운데 어떤 것이 자기 것인지 더이상 분간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자기한테 오른손이 두 개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즉, 자기한테 손이 3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 

이런 느낌은 뇌가 보는 정보를 느끼는 정보와 어떻게든 일치시키기 위해 뇌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실험은 인체 크기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느낌의 유발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피험자 머리에 3차원 가상현실 헬멧을 씌워서, 마네킹 맞은편에 둔 카메라가 잡은 것을 피험자가 3차원 형태로 보게 했다. 카메라는 고개 숙여 자기 몸을 볼 때 보이는 마네킹 몸체를 보여주게끔 설치했다. 처음엔 피험자 몸 크기의 마네킹을 취하고 다음엔 더 작은 것, 그다음엔 더 큰 마네킹을 이용했다.

 

여러 크기의 마네킹을 이용하여 사람의 환상을 실험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이 실험 성공에 아주 중요하다. 

피험자의 눈으로 본 상황은 아래 제시했다) 

 

이때 실험자가 피험자와 마네킹의 발에서 같은 부위를 두 개의 막대기로 동시에 건드렸다.

피험자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 몸을 보는 듯한 상태에서 카메라가 보여준 것을 관찰했다.

카메라에 나타난 장면은 이것이었다.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중요해

(시각적 트릭과 촉각적 트릭의 결합이 이 실험 성공에 아주 중요해.

 

그 결과 그의 몸이 다른 몸이 된 듯한 느낌이 생겼다.

피험자는 마네킹을 자기 몸처럼 느꼈다.

이 효과는, 위의 그림에서 보인 대로, 실험자가 인체와 마네킹의 같은 부위를 막대기로 건드림으로써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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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의 크기가 피험자의 몸 크기와 같을 때, 그 사람에겐 자기가 새로운 몸으로, 마네킹의 몸으로, 옮겨 간 듯한 느낌이 생겼다. 즉, 그는 점차 자신을 이 마네킹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것은 몸이 대체된 환상이 커졌을 때 마네킹에 칼을 찌름으로써 확인됐다. 즉, 피험자가 이제 마네킹을 자기 몸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는 마네킹에 칼이 닿을 때 몸을 떨었다

 

마네킹에 칼자국을 내다

 

인체의 크기보다 더 크거나 작은 마네킹을 이용했을 때, 피험자는 자신을 실제 몸보다 더 크거나 작게 느꼈다.

엄밀히 말해, 어떤 크기의 마네킹을 실험에 이용했느냐에 따라 피험자에겐 실내와 사물들이 평소보다 더 크거나 작게 보였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겪은 것처럼 자기 몸이 커지거나 작아진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여러 크기의 마네킹 4개를 실험에 이용했다.

(실험에 마네킹 4개를 이용했다.) 

 

사람이 자기 몸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 (유체 이탈을 경험한 듯한) 실험도 진행됐다. (자세한 것은 따로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뇌의 작업 결과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뇌는 우리가 자기 몸 안에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보다시피, 뇌는 우리가 다른 몸 안에 있다는 느낌뿐 아니라 아예 몸에서 벗어난다는 환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몸 안에서 자신을 느낌은 (자아감은) 그런 환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의 실재라는 환상에 관한 장에서, 당신 뇌를 다른 몸이 느끼는 것에 연결한 결과 당신이 그 다른 몸으로 옮겨 갔다는 느낌이 생긴 사례를 우리가 살펴봤다. 이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이 사례 또한 우리가 몸에 애착하는 것이 뇌가 만든 습관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이 물질적인 몸체로 느끼는 것은 뇌가 만드는 동일시이다. 
그리고… 이 동일시가 환상이나 착각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이 몸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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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힘, 묵언 수행 (오디오)

조하리 윈도 (2)

(6) 고통의 몸체 녹여 없애기

'거짓된 나'가 아픔과 고통을 낳아 5

<지금> 순간의 힘 52가지 실습 (전자책)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7-2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무자각 상태에서 벗어나기 12

부정적 감정 에너지 녹이기 28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외로운 사람의 징표 7가지

우리를 매트릭스에 묶어두는 환상 6가지

The Piraha Tribe 피라하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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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나는 누구인가?  > ...)

 

  16.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기나? (1)  

 

 

이제 우리가 자신을 흔히 ‘누구’ 혹은 ‘무엇’으로 여기는지 살펴본다. 

차례로 보자. 

 

나는 누구인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기

 

1

 

당신 이름이 ‘철수’라고 한다면, “난 철수야” 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부모가 처음에 다른 이름을, 예를 들어 영호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당신은 철수가 아닐 것이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 쓰는 단어일 뿐이다.

당신을 영호라 부른다 해서 당신의 자기인식이나 자아감이 과연 바뀔까?

아니다.

혹시 당신을 ‘항아리’라 부른다 해도 당신의 자아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있던 그대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음미해 보면, 당신 이름이 곧 당신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당신 이름을 부르면, 당신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느낀다. 누군가가 당신을 향하면서 실수로 다른 이름으로 당신을 불렀다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겠지’ 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면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자아감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린 자신을 종종 이 단어와 혼동한다.

자신을 다른 무엇과 혼동하는 것을 동일시(identification)라 부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름과 동일시된 것이다. 

 

2

 

본연의 자신을 잃는 다음 방법은 살면서 자신을 어떤 역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난 엄마야”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행하는 엄마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출산 전까지는 엄마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자아감이 출산을 전후하여 달라진 게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자아감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드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저 출산 후 엄마라는 새 역할이 생겼을 뿐인데, 그녀가 자신을 그 역할과 동일시한 것이다. 

 

전형적인 (사회적) 역할로는 우리네 각자의 직업을 꼽을 수 있다.

만약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난 의사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도 엄마의 역할 경우와 같은 도식이 작용한다. 즉, 그는 그저 의사 역할을 해왔을 뿐이며, 어린 시절엔 의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나 유년기에나 그의 자아감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직업에 크게 회의를 느끼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거나 ‘나에겐 의사 노릇이 어울리지 않나 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자기 직업과의 동일시가 잘못된 것임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패배자야” 혹은 “나는 쿨해” 같은 형태의 동일시도 있다.

자신이 패배자라는 느낌은 사람이 해 온 역할의 하나이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과 합쳐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그것이 그의 거짓된 자아감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 패배자야” 혹은 “난 쿨해”, 둘 다 역할이다. 이건 다 실제 자아감에 해당하지 않는다. 

 

역할의 예를 더 들어보자.

“나는 사업가야”, “난 2급 정비사야”, “난 사장이야”, “난 아들이야”, “난 노숙자야”, “난 제주도민이야” 등이 다 역할의 일종이다. 

한데, 이런 생각이나 진술 역시 본연의 자신을 어떤 역할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동일시에서 사람을 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예를 들어, ‘쿨한’ 사람에게

“넌 전혀 쿨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약점을 숨기기 위한 마스크일 뿐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려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일시에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가 쿨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를 멋지게 보고 존중한다. 근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럼 그는 누구인가? 시시껄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어?

 

3

 

다음에, 사람들은 의식의 어떤 발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이야” 등이 그렇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게 마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요, 이 생각은 내 생각인 것 같다. 머릿속 목소리와 강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걸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즉, 대화하면서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말하는 생각과 단어들이 있고 또 그걸 다 알아차리는 당신이 있음을 당신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간단한 실험 하나. 

“난 초밥을 좋아해” 하고 속으로 말하거나 중얼거려 보라.

어떤가, 당신한테 생각이 나타나서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때 생각이 있고, 또 그 생각을 보고 듣는 당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초밥을 정말 좋아하며 친구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이걸 바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유의하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전자의 경우 당신은 자기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았고, 후자에서는 동일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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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화난 상태에 있을 때, 이건 우리가 화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과 합쳐져서 자기 자신을 분노처럼 드러낸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안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곧 분노는 (분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을 (분노를) 당신은 당신의 여러 발현 가운데 하나로서 관찰하기만 할 뿐이다. 

 

실제로, 자각 상태를 가동할 때, 당신의 동일시가 그 자각 상태로 옮겨가고,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멀어진다.

‘자각 상태를 켠다/가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각이란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서 지금 당신과 당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상태, 감각 등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냥 망각 (혹은, 무자각) 상태에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감정에 압도될 때 이런 일이 특히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귀한 그릇을 떨어뜨려 깨졌을 때, 당신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이한테 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퍼뜩 깨닫고 정신이 들어서, 당신이 지금 화를 내고 아이한테 소리치고 있으며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당신을 금방 식게 한다. 

당신 자신의 분노와 (동일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다. 

 

4

 

그다음에 자주 나타나는 동일시하기는 자신을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 영혼이야”, “난 우주정신이야”, “난 사람이야”, “난 호모사피엔스야” 등이 그것이다. 

영혼을 보거나 느낀 사람이 있나?

영혼은 무엇인가?

다들 나름대로 해석한다. 어떻든 영혼은 추상적인 이미지다. 혹자가 “나는 영혼이야” 하고 말할 때, 그건 필경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영혼 soul’이란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우리한테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 개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지구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영혼이란 개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결국, 영혼이 무엇인지 알든 모르든 당신의 자아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혹자가 자기는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자기가 이 용어에 집어넣은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주정신이나 호모사피엔스하고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할 때의 동일시를 규명하기가 좀 어렵다.

우리가 사람인 건 당연해 보여. 왜냐면 당신과 나를 포함해 우리는 다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가 우리한테 가르친 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그러면, 사회는 ‘사람’이란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나?

대략 다음과 같이 보이고 옷을 입고 어떤 언어로 서로 얘기하는 생물을 사람이라 부른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그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들었다. 똑똑한 어른들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나. 생각도 않고 믿어 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우리 몸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고 우리가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여러 징조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 벌거벗은 모습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자아감으로 되돌아가자.

이 느낌에 인간과 관련된 뭔가가 과연 있나?

이 자아감은 ‘사람’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야. 이건 구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이다. 내 몸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감으로서의 ‘나’가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내 몸이 있으니까. 

 

‘사람’이 추상적이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임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옛날 옛적에 ‘사람’이란 단어를 궁리해 내고, 앞의 그림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전부 이 단어로 불렀다. 

한데 이 단어를 통용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던가. ‘여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고, ‘남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면 여성과 남성의 유기체와 심리 구조는 상당히 다르니까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람’이라 불렀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사람’이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종으로서 남자가 있고 또 별개로 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는 사람이야” 대신에 “나는 남자야, 여자야” 하고 말할 수 있었겠지. 

 

이건 다 ‘사람’이란 개념이 인위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상적 이미지이며,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일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데 ‘사람’이란 단어를 쓸 것이다. 편의상 그렇다. 우리 언어에서 이 단어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으니까. 

 

(이제 “나는 남자야”, “나는 여자야”라는 동일시를 분석해 보자.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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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구두가 나는 아니야!" 

 

 

- 멋진 자동차를 한 대 뽑았어요. 신나지요. 괜히 ''도 잡고 싶고... 그런데 어느 날 옆구리에 흠집이 난 걸 발견했어요. 속상해요, 안 해요? 화가 나요, 안 나요? 그래서 며칠 동안 우울하고 밥도 잘 안 넘어갔다구요? .

여러 벌의 구두가 있지만, 이 구두들이 나는 아니야

-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기 시간이나 생활도 팽개치고 직장에 '올인'해요. 몰지각한 상사가 가끔 눈꼴시게 굴어도 꾹 참아요. '에이, 요즘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데, 여기서 떨려나면 어떡해? 이게 내 밥줄이니까 견뎌야지 별 수 있겠어?' .

 

- 자기 일이나 취미 활동도 포기하고 아이들 키우는 데 헌신했어요. 가끔 속 썩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쁘게 잘 크는 걸 보니까 흐뭇했어요. 자신이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 크고 나니까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내 곁을 떠나서 잘 찾아오지 않아요. 전화도 별로 안 해요. '에그, 자식도 크면 남이야!' 절로 탄식이 나와요. 허전함과 상실감마저 든다구요? .

 

이런 말이 (진리가) 하나 있더군요.

우리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에 지배당하지만, 자신과 분리하는 것들은 지배하고 컨트롤한다.

(이 말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 대신 '집착' 같은 단어를, 분리 대신 '초연(하게 대하다)' 같은 단어를 써도 무방하겠네요.)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나 시기에 가장 소중해 (때론, 절실해) 보이는 것을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커요. , 살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이 주로 수행하는 역할, 혹은 자신의 주된 정신 방향이나 기능을 자신과 동일시해요.

 

자동차며 직장이며 자녀를, 성공이나 출세나 직위를, 아름다운 외모나 옷이나 액세서리를, 근사한 집이나 돈이나 하다못해 구두까지도... '나한테 중요한 것'이라 여길 수는 있는데, 그게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할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어떤 문제가 생기냐구요?

'나에게 아주 좋고 소중하고 절실한' 것들에 얽매여,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소중한 <>를 홀대하면서 그 <>가 한껏 펼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 되니까요. 게다가 <>가 없는 바에야 자동차며 자녀들이며 출세며 돈이며 예쁜 얼굴이며 정의를 위한 투쟁이며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 등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나오지 않았겠어요? (이 대목에서 자칫 곡해를 살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 길어지니까 일단 넘어가기로 하지요. ^^)

 

자기 안팎의 어떤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한동안 즐겁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여기엔 심각한 단점이 있어요. <>에게 위험하기까지 해요.

 

먼저, 외적인 요소를 들어볼까요. 결론적으로...

직장을 잃는다고 해서 <>가 죽나요? (당장엔 힘들 수 있지만, 다른 직장을 찾으면 돼요.)

실패했다고 해서 <>가 사라지나요? (칠전팔기는 <>를 잘 간수할 때 가능하잖아요?)

자동차가 긁혔다고 해서 <>까지도 긁어야 (속상해하고 화내야) 하나요?

자식들이 '코빼기도 잘 안 비친다' 해서 원망할 필요가 있나요? 그들에겐 그들 삶이 있는 걸요. 새도 키워 놓으면 나가서 따로 둥지 틀잖아요? 그게 자연과 삶의 정상적인 흐름인 걸요. ', 그래. 어릴 때처럼 늘 곁에서 재롱 떨고 등 두드려 주기를 바랄 순 없어. 열심히 키워서 내보냈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이젠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자신의 주된 역할이나 기능을 계속 자신과 동일시하면...
결국엔 사는 게 힘들어질 수 있어요. 아니, 그러기가 십상이에요. 상실감이나 좌절감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위험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죠.

 

인형을 끌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어린 아이

나이 들면서 체력이 달리는 운동선수, 젊었을 때의 미모가 시들어 가는 여배우, 졸업 후에 새로운 책임감에 시달리는 대학생, 치열하게 일했지만 어쩌다 실패한 사업가, 근사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재산가... 등이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진다면, 그건 그들이 '전성기의 체력', '한창 때 미모', '학생 신분', '일이나 돈'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에요.

 

내적인 요소로 보자면, 자신의 머리나 (지력이나) 자기감정이나 몸 같이 자신의 특정한 일부와 동일시하는 경우에 일이 더 안 풀리고 삶이 더 힘들어질 수 있어요. 왜냐구요? 왜냐하면... 흔히 하는 이런 말들이 반증이 될 수 있겠네요.

"머리만 믿고 까불다가 낭패를 봤어.'

"자기감정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어."

자신의 특정한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 자신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네 <진짜 나>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셈이에요. (지금 우리 얘기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한 토막이에요.)

그 결과, '어디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 늘 기껍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것밖에 안 되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야?'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면 우울해지지 않겠어요? 자칫 열등감에 시달릴 수도 있어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Assagioli

이건 다 <> 자체는 지극히 다양하고 심오하고 힘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의 일부만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진면목을 스스로 다 드러내지 않기 (혹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점을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Assagioli가 알아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분석과 명상을 결합하여 <psychosynthesis, 정신종합요법>을 만들어 냈어요. '동일시''분리'라는 용어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론과 실습이 좀 많은데, 여기서는 '개인의 신체며 감정이며 지력과 분리하는' 실습을 하나 간략히 소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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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에 홀로 편하게 앉아서 긴장을 푸세요. (이완 실습을 미리 해도 좋아요.) 

숨을 깊고 느리게 몇 번 들이쉬고 내쉬세요. (이완과 호흡 실습은 우리 블로그에 많아요.) 

다음에 아래 텍스트를 의미 새겨 가면서 자신에게 천천히 말해 주세요.

1.

나에게 몸이 있지만, 몸이 나는 아니다. 내 몸은 건강하거나 아플 수 있고, 피곤하거나 가뿐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상태가 나에게, <참된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 몸이 내가 세상 살면서 인식하고 활동하는 데 소중한 도구임은 분명해. 하지만, 도구보다 더 큰 무엇은 아니야. 나는 늘 건강하도록 몸가축에 소홀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몸은 아니야. 나에게 몸이 있지만, 이 몸이 곧 는 아니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1~2분 동안 뜻을 음미하면서 몇 번 더 비슷하게라도 되풀이하세요. 마지막 어구가 핵심이에요. 이건 요 다음 2번과 3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2.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내 감정은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다. 내 감정은 사랑에서 증오로, 평온에서 분노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뀔 수 있어. 하지만 내 본성과 내 진짜 천질은 바뀌지 않는다. <>는 언제나 그대로 나야. 이를테면, 분노의 파도에 휩쓸릴 때가 더러 있지만, 시간 지나면 그게 사라진다는 걸 난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노가 아니다. 더 나아가, 내 감정이 <>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 내 감정을 내가 지켜보고 이해하면서 다스리고 활용하고 조화롭게 통합하는 법도 점차 배울 수 있어. 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이 곧 나는 아니다.

3.

나에게 마인드가 (마음이, 지력이) 있지만, 마인드가 나는 아니야. 내 마인드는 뭔가를 탐구하고 나를 표현하는 데 소중한 도구야. 하지만 그것이 내 본질은 아니다. 사상이며 지식이며 경험을 새로 얻을 때마다 내 마인드의 내용은 늘 달라진다. 가끔은 내 말을 안 듣기도 해.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인드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어. 마인드는 내 안팎의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기관인 것이지 가 아니야. 나에게 마인드가 있지만, 이 마인드가 곧 나는 아니다.

 

이건... 우리한테 중요하긴 하지만 정작 <> 자신보다는 덜 중요한 것을 떼어내는 (분리하는) 단계에요. 물론, 그 다음에 동일시 단계가 이어지겠지요. 그건 별도로 다루겠어요.

 

결국 <분리> 작업이란 가장, 정말, 진짜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과 그 아래로 중요한 것들을 구별하는 일이에요. 구분하고 판별할 줄 알면, 일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삶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마음에 너무 담아두지 마."

"뭐 사소한 일에 목숨 걸 일 있나!"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런 말들도 분리의 중요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기다

 

저 실습을 상황에 맞게 더 확장하고 변형할 수 있어요.

(지금 나에게 소중하고 절실한) 이 자동차가, 이 직장이, 직업이, 출세가, 성공이, 자녀들이, 부모가, 학업이, 발표가, 면접이, 돈이, 집이, 예쁜 얼굴이, 근육질 몸이, 옷이, 하다못해 이 구두까지도... <>인 것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여기서 두 가지만 덧붙여야겠네요.

1.

노파심에서 먼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해서 일이나 자녀나 학업 등등에 소홀히 대해도 된다는 것은 정말로 절대 아니에요. 저렇게 한다면, 오히려 저 모든 것이 더 잘 될 거예요. 그 이유는... 저렇게 할 때 우리가 더 자유롭고 편해지며 크고 넓게 보게 되니까요.

"잡으려면 먼저 놓아주라" 하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겠어요.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서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서고 승복하고 용인하고 받아들이기 같은 개념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듯한데, 이 역시 우리가 따로 다룰 대목이에요.)

2.

'그렇다면, 그놈의 <>는 도대체 뭔데 돈이나 출세나 권력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드나요? ... 이건 제법 긴 얘기가 되겠어요. 이때의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만 안기는) '거짓된 나'<에고>가 아니라, 진정 <참된 나>를 가리킨다는 것만 우리가 일단 알아두지요. 그리고 그 안에 (우리 내면에!) 보물이 들어 있어요. (<낡은 궤짝의 비밀> 포스팅을 보면 좋겠어요.)

 

한창 때 미모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 나이 들어 그 미모가 사라지면서 인기도 사라지자, 실망하고 좌절하던 끝에 아예 세상을 등진 여배우들이 나라 안팎으로 제법 있어요. 그들이 만약 '한창 때 미모'를 곧 자기 자신이라 여기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닦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외려 더 꽃 파웠을 거예요. 예를 들어, 아프리카 아이들 돌보는 오드리 햅번...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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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단계. 고통의 몸체 다스리기 32

내면의 몸체 20

<지금> 순간의 힘 52가지 실습

루덩의 악마들 11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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