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어린애한테도 가르칠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축에 들어갈 것이다.
내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감시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기본 원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을 체감함으로써 확실히 깨닫는다면… 가장 강력한 변환 도구를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아무런 내적 저항 없이 아픔을 술술 털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감정적 아픔덩어리와 바짝 동일시하면서 살아왔고 자아감의 전부나 상당 부분이 아픔덩어리에 들어 있다면, 내적 저항이 특히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건… 아픔덩어리에서 불행한 자신을 만들어 냈으며 마인드가 만들어 낸 허구를 ‘나 자신’이라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무자각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든 분리에 (즉, 동일시하기를 멈춤에) 강한 저항이 생길 것이다. 달리 말해, 잘 모르는 것에 뛰어들어서, 불행하지만 친숙한 ‘나’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겪는 게, 아픔덩어리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저항을 관찰하라.
아픔에 집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라. 경계 태세를 아주 높이라. 불행한 상태에서 맛보는 기묘한 만족감을 관찰하라. 그것에 관해 얘기하거나 생각하려는 강박 충동을 관찰하라. 저항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면, 그 저항이 멈출 것이다. 그때 아픔덩어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증인으로 머물러 아픔덩어리의 변형을 주도할 수 있다.
이건 오로지 각자가 개인적으로만 할 수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이미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갖춘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현존 상태에서 연결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하게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각자의 빛이 빠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막 불붙기 시작한 통나무를 이미 훨훨 타고 있는 것 곁에 잠시 두었다가 떼어 놓으면, 첫 번째 통나무는 훨씬 더 강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결국, 그건 같은 불길이야.
그런 불꽃이 되는 것이 영적 마스터의 기능들 중 하나이다. 일부 치유 전문가들도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단, 이미 마인드 수준을 넘어섰고 누군가와 작업하는 동안 강렬한 의식적 존재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우리가 겪는 감정적인 아픔은 모조리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아픔의 잔재 뒤로 숨어든다.
그건 이미 거기에 있던 과거의 아픔과 합쳐져서 우리네 마인드와 몸에 기식하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태어난 세상의 무지와 무자각 때문에 어린 시절에 겪어야 한 아픔도 물론 들어간다.
이 퇴적된 아픔이 우리 몸과 마인드를 점령하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장이다. 이것을 만약 보이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움직이는 실체로 볼 수 있다면, 진실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아픔덩어리이다. (혹은, 고통의 몸체이다.)
이 아픔덩어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휴면 상태와 활동 상태.
아픔덩어리는 대체로 전체 시간의 9할 정도는 졸고 있지만, 심히 불행한 사람의 경우엔 100% 시간 내내 꿈틀거릴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아픔덩어리를 통해 사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특정 상황에서만 겪을 수 있다. 이를테면, 아주 무간한 사이에서, 혹은 과거의 상실이나 절망, 배신 또는 신체나 감정의 상처 등과 연결된 상황에서 그렇다.
이 졸고 있는 고통의 몸체를 무엇이든 꿈틀거리게 할 수 있다. 특히 당사자의 과거 아픔 패턴과 공명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조는 상태에서 깨어날 채비가 돼 있을 때, 그건 가까운 누군가의 악의 없는 말이나 생각으로도 활성화될 수 있다.
어떤 고통의 몸체는 계속 징징대는 아이처럼 밉살스럽고 불쾌하지만 비교적 해롭지 않다.
또 어떤 아픔덩어리는 사악하고 파괴적인 괴물이요 진짜 악마이다. 개중에 어떤 것은 물리적 폭력도 꺼리지 않으며, 더 많은 것은 감정적인 폭력을 삼가지 않는다.
어떤 고통의 몸체는 그 주인의 주변 사람이나 지인들을 공격하는 반면에, 또 어떤 것은 직접 주인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아주 부정적이고 자멸적인 성격을 띤다. 질병이며 불행한 일이 그렇게 해서 종종 발생한다. 제 주인을 자살로 몰아넣는 아픔덩어리도 있다.
잘 안다고 여겨 오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고 혐오스러운 괴물이 되어 내 앞에 마주할 때, 우리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아픔덩어리를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 안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한테 불행의 징후가 되는 것을 죄다 주시해야 하니… 그것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고통의 몸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짜증이나 성급함, 울적한 기분, 괜히 어깃장 놓으려는 태도, 노여움, 분노 발작, 우울증, 또 대인관계에서 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욕구 등의 형태를 띨 수 있다.
이 고통의 몸체가 졸다가 잠깨려는 순간을 포착하라.
다른 모든 현존하는 실체와 마찬가지로 고통의 몸체도 생존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할 때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때 그건 벌떡 일어나서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자신이 되고’ 우리를 통해 살 수 있다. 그건 ‘먹이’를 섭취하기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건 그 자체 에너지에 공명하는 우리네 체감에서 에너지를 얻으며 노여움이나 증오, 비탄, 감정 폭발, 파괴적 성향, 폭력, 심지어 질병 같이 아픔을 더 키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이로 삼는다. 그리하여 고통의 몸체가 우리를 장악했을 때, 그건 자체 에너지 주파수를 되쏘는 상황을 우리 삶에서 만들어 그 에너지를 먹고 산다.
아픔은 아픔만 먹고 살 수 있다. 아픔은 기쁨을 먹고 살 수 없다. 소화해내지 못하니까. 고통의 몸체에 한번 정복당하면, 우리는 아픔을 더 많이 원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된다. 직접 고통을 겪거나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하고 싶어진다. 혹은 둘 다를 동시에 원한다. 전자와 후자는 실제로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난 아픔을 전혀 원치 않아!” 하고 맹렬히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네 생각과 행동은 자신과 다른 이들한테 계속 아픔을 주게끔 설계돼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점을 우리가 진정 의식한다면… 그 패턴은 녹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아픔을 더 많이 바라겠으며, 의식적으로 미치광이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픔덩어리는 에고가 드리운 그림자로서, 실제로 우리네 의식의 빛을 겁낸다. 그건 발각될까봐 겁낸다. 그것의 생존 여부는… 그걸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느냐, 또 내면에 도사린 아픔 직시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만약 이 아픔덩어리를 직시하지 않고 우리 의식의 빛을 거기에 비추지 않는다면… 그건 계속 발톱을 드러낼 것이다.
고통의 몸체가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위험한 괴물로 보일 수 있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이건 한낱 실체 없는 환영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 현존의 힘에 대항할 수도 없다.
몇몇 영적 가르침은 모든 고통이 궁극적으로 환상이라고 언명하는데, 이건 진실이다.
한데 “당신도 진실이라고 여기나?” 하는 점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저 언명을 진실로 만들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으면서도 계속 이건 환상이라고 말만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인가?
그렇게 한들 과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까?
이제 우리는 각자의 생생한 체감을 통해 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통의 몸체는 우리의 관찰을 받아 정체가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내면에서 그 에너지장을 느끼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그것과의 동일시가 깨진다.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열린다. 난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아픔덩어리의 목격자나 감시인이다. 이건… 아픔덩어리가 우리를 참칭하면서 우리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고, 우리한테서 더 이상 에너지를 빨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신의 심원한 힘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순간의 힘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픔덩어리와의 동일시를 깰 만큼 충분히 의식하게 될 때… 그건 어떻게 되나?
고통의 몸체를 만드는 것은 무자각인데, 의식이 그것을 의식(자각)적인 것으로 변질시킨다. 이 보편적 원리를 바울 사도가 잘 표현했다. “모든 것은 빛을 받으면 보이게 되고, 빛에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 빛이 된다.” (에베소서 5:13)
우리는 어둠과 싸울 수 없듯이 고통의 몸체와도 싸울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내적 갈등이 생겨 고통이 더 많아질 것이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주시한다는 것은 그걸 그 순간에 실재하는 것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픔덩어리는 갇힌 생명 에너지로 이뤄진다. 이 에너지는 우리의 전체 에너지장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며 마인드와 동일시라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의 결과 한동안 독자성을 띤다. 이건 불시에 스스로 돌변하여 자기 꼬랑지를 삼키려고 하는 짐승처럼 반생명적인 것이 된다.
우리네 문명이 어째서 생명 파괴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힘마저도 여전히 생명 에너지이다.
우리가 마인드와 떨어져서 감시자가 될 때도, 고통의 몸체는 한동안 여전히 꿈틀대면서 우리를 자기와 자꾸 동일시하게 만들려고 꾀를 낼 것이다. 우리가 동일시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에너지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더라도 아픔덩어리는 타성 때문에 스스로 돌아가는 물레바퀴처럼 한동안은 꿈틀거린다. 이 단계에서 그것이 신체 여러 부위에 괴로움과 아픔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게 오래 가지는 않는다.
현재에 계속 머물면서 예리하게 의식하라.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 공간을 지키라. 이 아픔덩어리를 직접 관찰하고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실재해야 한다. 그러면 그건 우리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네 생각이 아픔덩어리의 에너지장과 동조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우리의 생각으로 다시 그걸 먹여 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노여움이 아픔덩어리의 주된 에너지 진동이고 우리가 화를 내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한 짓이나 그자를 한번 손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우리는 무자각 상태가 되며 아픔덩어리가 곧 ‘나 자신’이 된다. 분노가 있는 곳에는 그 밑에 늘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어두운 분위기가 찾아들고 갖가지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내 삶이 참으로 하찮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몇몇 생각의 벡터가 고통의 몸체와 같은 방향을 달리게 되어 우리는 무자각에 빠지고 아픔덩어리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여기서 ‘무의식이나 무자각’은 어떤 정신적 패턴이나 감정적 패턴과 동일시된다는 뜻이다. 이건 감시자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도 포함한다.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계속 주의를 기울이면… 아픔덩어리와 우리네 생각 과정의 연결이 차단되어 아픔덩어리가 변질하게 된다. 고통이 우리 의식의 불꽃에 연료가 되고, 그 결과 의식의 불길이 더 환히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쇠를 귀금속으로 변형하는 고대 연금술의 밀교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깨어난 의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의식의 계층화가 멈추고 내면의 분열이 치유됨으로써 우리는 다시 온전해진다. 그때 우리의 책임은 아픔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해 보자.
자기 내면의 감정에 주의를 집중하라. 그것이 바로 아픔덩어리라는 것을 알아두라.
그것이 내면에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라.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즉, 감정이 생각으로 바뀌지 않게 하라. 그것을 판단도 분석도 하지 말라.
아픔덩어리의 특질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지 말라. 계속 현재에 머물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속 관찰하라. 감정적인 아픔뿐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관찰자’요 말없는 감시인이 있다는 점도 인식하라.
이것이 바로 <지금> 순간의 힘이요, 우리네 본연의 의식적인 현존의 힘이다.
그렇게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
많은 여성들 경우, 아픔덩어리가 특히 생리를 앞두고 눈뜬다. 그것이 잠깨는 이유 등에 관해서는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지금은 이런 점만 말하고 싶다. 즉…
그 순간에 방심하지 않고 늘 조심하며 내면에서 느끼는 것에 지배되는 대신 그걸 죄다 지켜볼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 기회를 얻게 되며, 그때 과거의 모든 아픔을 빠르게 변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