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중요한가 갈등/충돌의 원인 갈등 해소의 비생산적인 방법 2가지: 일방의 승리 건설적인 갈등 해소 방법: 양쪽이 다 승리 단계 1–5 부모들의 질문
기펜레이터 여사는 언젠가 한 심리학 서적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놀랐다고 전한다.
“가정에서 갈등과 충돌은 아무리 좋은 관계일 때도 피할 수 없고, 갈등을 피하거나 외면하려 들 게 아니라 제대로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나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거의 모든 단계와 국면에서 갈등 상황에 부닥친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인 언쟁으로 끝나고, 어떤 경우에는 무언의 숨겨진 분노로 끝나며, 또 때론 진짜 ‘전투’로 끝날 때도 있다. 오늘날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이제 우리도 이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은 어떻게 왜 생기는지 먼저 살펴보자.
전형적인 사례. 가족이 저녁에 티브이 앞에 둘러앉았지만 채널 선택을 두고 다툰다. (당신에게도 익숙한가?) 예를 들어, 아들은 열렬한 팬이어서 축구 중계를 보려 하고 엄마는 외화 시리즈에 ‘필’이 꽂혀 있다. 언쟁이 벌어진다. 엄마는 온종일 기다렸다면서 드라마를 고집한다. 한데 아들 역시 어제부터 기다렸다면서 양보하지 않는다.
다른 사례.
엄마가 손님 맞이할 준비를 마치려고 서두른다. 뜻밖에도 집안에 식빵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딸한테 빵집에 좀 다녀오라고 한다. 그러나 딸은 클럽의 운동 시간이 곧 시작되는데 늦지 않기를 원한다. 엄마가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부탁하는데, 딸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은 강청하고 다른 쪽 역시 한사코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 서로의 감정이 달아오른다.
이 사연에서 공통점은?
무엇 때문에 갈등 상황이 벌어지고 서로의 감정이 달아오르게 됐나?
문제는 엄마와 딸의 관심사가 서로 맞서고 충돌한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한쪽의 바람이나 욕구의 만족은 다른 쪽의 이해관계가 축소된다는 뜻이며, 그러면서 짜증이나 마음의 상처, 분개같이 강한 부정적 체험을 야기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를 이용하여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즉각 쌍방에, 자녀와 부모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부모들이 해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부모들은 “그런 걸 갖고 충돌까지 갈 필요는 없지!” 하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의도야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바람과 욕구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충돌까지 안 간다는 보장은 아쉽게도 확실치 않다. 부모와 자녀들의 (심지어 부부간에도) 이해관계가 늘 일치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
자녀와 대립이 시작될 때...
1) 어떤 부모들은 각자 자기 길을 고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전혀 알지 못한다.
2) 또 어떤 부모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차라리 내가 양보하고 말겠어’ 하는 자세를 취한다.
갈등 해소의 두 가지 비건설적 방법이 그렇게 나타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통칭 ‘일방의 승리’라 불린다.
이것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자.
* * *
갈등 해소의 첫 번째 비건설적인 방법은... 부모가 이기는 것.
예를 들어, 티브이 채널을 두고 충돌하는 경우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축구가 밥 먹여 주냐, 잠시 뒤에 보면 되잖아. 채널을 또 돌리면 혼날 줄 알아!
식빵의 경우 엄마의 ‘일방적 승리’는 이런 말로 휘갑칠 수 있겠다.
– 그래도 가서 식빵을 사 와라! 스포츠 동아리가 어디로 사라지겠냐. 엄마가 부탁하는데!“
여기에 자녀들은 어떻게 대답하나?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감정적으로 충전돼 있는데 엄마의 말에는 지시와 비난, 위협이 담겨 있음을 떠올리자. 이 때문에 자녀의 ‘감정 컵’의 수준은 분명히 더 올라갈 것이다.
– 엄마 드라마가 허접한 거지!
– 아니, 안 갈래! 그만! 엄마가 나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어!
첫 번째 방법을 주로 이용하는 부모들은 아이를 이기고 아이의 저항을 부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여긴다. '아이가 자기 의지대로 하도록 허용하면 나중엔 수염까지 잡아당길 거야.'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즉, 그런 부모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필요나 갈망은 고려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을 늘 얻으라‘는 식의 행동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
한데 아이들은 부모의 언행에 아주 민감하고 일찍부터 부모를 흉내 내지 않는가. 그래서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을 애용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그렇게 하기를 빨리 배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받고 배운 모습과 교훈을 고대로 어른들에게 돌려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이때 의견이나 이해관계, 갈망, 욕구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여 충돌하는 것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두 마리 염소처럼.
이 첫 번째 방법의 다른 버전이 있다. 부모가 자신의 뜻이나 갈망을 아이가 수행하도록 부드럽지만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 여기엔 설명이나 해명이 종종 수반되며, 그런 얘기를 듣고 아이는 결국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늘 이런 심적 압박 전략을 구사한다면, 아이에겐 이런 생각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즉, '내 부모에게 나의 개인적인 소망이나 욕구의 실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어떡하든 자신들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하게 될 거야.‘
어떤 가정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몇 해씩 계속되면서 자녀들이 늘 물러서거나 양보하거나 진다. 그런 아이들은 대체로 공격적이거나 지나치게 수동적인 성향을 띠기 쉽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두 경우 다 그들에게는 적대감과 분노가 쌓이고, 부모와 관계가 친근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 * *
갈등 해소의 두 번째 비건설적 방법은... 아이가 늘 이기는 것.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이와 충돌을 겁내거나 혹은 이른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늘 희생할 준비가 돼 있거나 혹은 이 두 가지에 다 해당하는 부모들이 이 두 번째 길을 간다.
이런 경우 이 아이는 조직이나 사회의 질서에 익숙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에고이스트로 자랄 것이다.
그런 성향이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대체로 너그러이 양보하면서 그리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르지만, 집 대문을 넘어서는 즉시 이 아이는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그 어느 모임에서도 누가 그의 부모처럼 양보하고 너그러이 대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에고이스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요구가 크며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종종 비웃음을 사거나 심지어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 가정의 부모들에겐 자기 아이와 자기 운명에 대한 불만이 희미하기 쌓여 간다. 그렇게 ‘자녀한테 늘 양보하는’ 어른들이 노년에는 종종 고독해지고 버림받게 된다. 그때 가서 비로소 무엇이 잘못 됐는지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를 지나치게 받자하고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해 온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자녀와의 갈등이나 충돌을 잘못 해결하는 경우 그 여파나 후과는 크든 작든 반드시 축적되기 마련이다. 또 이에 따라 아이의 성격이 형성되며, 이 특성이 나중에 아이와 부모의 운명을 좌우한다. 따라서 당신과 자녀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마다 매번 주의 깊게 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사랑보다 증오와 분노에서 즉각적인 만족을 더 크게 얻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선천적으로 공격적인 그들은 물리적으로 자극된 호르몬에서 나오는 분노를 위하여 가장 추악한 열정에 일부러 탐닉하면서 금방 아드레날린 중독자가 된다. 그들은 하나의 자기주장이 언제나 또 다른 적대적인 자기주장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잘 알면서, 자신들의 흉맹함을 부지런히 갈고 닦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주 빨리 걸쭉한 싸움으로 들어선다.
싸움이란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 왜냐하면 싸우면서 피가 끓을 때 본연의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니까. “기분 좋아!” 하면서 당연히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아드레날린 중독을 의분 표출이라 합리화하고, 결국엔 예언자 요나처럼 그럴 만하니까 분개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거의 루덩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랑디에가 볼품 사납긴 해도 그의 관점에서는 아주 신나는 싸움에 두루 말려들었다. 한 젠틀맨은 주임신부에게 실제로 칼을 빼들었다. 지역 경찰을 대표하는 다른 인물과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설로 난타전을 벌였고, 그건 곧 물리적 폭력 사태로 번졌다. 수효에서 압도된 주임신부와 그의 복사들이 예배당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버텨야 했다.
다음날 그랑디에가 교회법정에 호소했고, 경찰 수뇌는 추문을 일으켰다 하여 징계를 받았다. 그건 주임신부의 승리였다. 하지만 대가가 따르는 법. 그를 막연히 꺼림칙하게 여기던 사람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 이제 그에게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적으로 변해 복수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게 됐다.
기독교적 온유함 못지않게 기본적인 조심성 문제로 말하자면, 주임신부는 자신을 둘러싼 적의를 누그러뜨리는 데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회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 정신을 그리 많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르마냑과 다른 친구들이 하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감정이 개입된 경우에는 진중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오랜 종교적 훈련이 그의 자기애를 제거하거나 심지어 완화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에고에 신학적 ‘알리바이’를 제공했을 뿐이다.
속이 차지 못한 에고이스트는 제가 원하는 것만 원할 뿐이다. 그런 사람한테 종교 교육을 시키면, 그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명분이 진정한 교회의 명분으로 간주되는 것이요, 그 어떤 화합도 근본악을 위무하는 것일 뿐이다.
“너를 고소한 사람과 법정에 가는 길에 화해하라.” 예수의 조언이 그랑디에 같은 사람들한테는 바알세불과 협정을 맺으라는 불경한 촉구처럼 보인다.
적대자들을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주임신부는 자신의 힘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적의를 한층 더 키우려 들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파워는 거의 천재적이었다.
동화에서는 갖가지 선물을 들고 선한 요정이 아기 요람을 찾아든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선물이 도리어 불행을 안기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어 그랑디에한테 선한 요정은 다른 확실한 재능들과 더불어 가장 눈부시면서도 가장 위험한 선물을 주었다. 바로, 달변.
뛰어난 설교자며 성공적인 변호사와 정치인은 죄다 비범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 입에서 나온 말은 청자들한테 거의 마법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데 이 효력은 필히 비이성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녔다 해도 뛰어난 연설자는 그 말로써 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 뛰어난 연설자는 풍부한 어휘와 좋은 목소리라는 마법을 동원해 나쁜 주장이 옳은 것이라고 청중을 설득할 수 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달변 기법에 속하는 재주나 트릭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는 법이다.
본질적으로 근거가 잘못된 신념을 옳은 것이라 주입하기 위해 웅변술 장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인간 본성에 있는 최소한의 신뢰 요소를 우려먹는 죄를 짓는 셈이다. 그들은 재앙적인 입담 재주를 발휘함으로써 일상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빠져 있는 일종의 최면 상태를 더 깊게 만든다. 반면에 진정한 철학과 진정한 종교의 목표와 과제는 그런 최면의 안개와 구름을 걷어내는 데 있다.
게다가 지나친 단순화 없이 효과적인 웅변술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면 사실들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법. 심지어 진실을 말하고자 최선을 다할 때조차 노련한 연설자는 그 자체로 이미 거짓말쟁이다. 또 가장 노련한 연설자는, 덧붙일 필요가 거의 없지만, 진실을 말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진실과 거리가 멀어서 동지들에게 공조하고 적대자들을 몰아붙이는 것이니.
오호라, 그랑디에가 바로 그런 부류의 달변가였구나. 성 베드로 교회 설교단에서 주일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데모스테테스를, 사보나롤라[각주:2]를 열심히 흉내 내고 때로는 라블레까지 모방했다. 왜냐하면 그는 의분 터뜨리는 것 못지않게 사람들을 조롱하는 데도 능하고 우레 같은 계시를 내뿜는 것 못지않게 빈정거림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한다.[각주:3]우리네 마음도 그렇다. 오늘날 권태라는 골치 아픈 공간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연속극 따위로 채워진다. 이런 면에서 선조들은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다.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더 좋았을지도.)
그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교구 성직자의 주간 퍼포먼스에 주로 의존하고 간간이 방문하는 카푸친회 수사들이나 순례하는 예수회 수사들의 강연으로 보충했다. 강론이란 하나의 아트이고, 다른 모든 아트 분야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변변치 못한 아티스트들이 좋은 아티스트들보다 훨씬 더 수두룩하다.
성 베드로 교회 신도들은 그 시장에서 그랑디에 목자라는 최고의 명인을 두고 있음에 자축할 수 있었다. 그는 가장 숭고한 기독교 미스터리에서부터 가장 민감한 풍문과 가장 미묘하고 가장 외설적인 교구 이슈들까지 어떤 주제든 눈부시게 즉흥적으로 소화해 냈다. 제 적대자들을 얼마나 거침없이 몰아쳤으며 고위직 인사들까지 얼마나 겁 없이 비판했던가!
만성적 권태에 빠져 있던 대다수가 환호했다. 그들의 박수갈채는 거꾸로 주임신부 웅변의 제물이 된 사람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이 제물들 가운데는 위그노파와 가톨릭교회 간에 노골적인 적의가 멈춘 뒤 왕년의 프로테스탄트 도시에 세워진 여러 교파의 수도사들이 있었다. 그랑디에가 수도사들을 싫어한 주원인은 그 자신이 세속(교구) 성직자이며 제가 속한 카스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실한 병사가 자기 부대에, 충실한 졸업생이 모교에, 충실한 코뮤니스트나 나치가 자기 당에 충성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A라는 조직에 충성하려면 B, C, D 등 여타 다른 조직을 어느 정도 불신하고 경멸하고 철저히 혐오할 필요가 있는 법.
이는 더 큰 상위 조직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자와 불신자들에 대한 전반적이고 공식적인 증오에서부터 교단 간의, 학파 간의, 교구 간의, 신학자들 간의 특수한 증오에 이르기까지 증오의 계급구조가 여실히 드러난다.
살레의 성 프랑수아가 1612년에 이렇게 썼다.
「독실하고 신중한 고위 성직자들이 개입하여 소르본과 예수회 수사들 간에 결속과 상호 이해를 이끌어내면 좋았을 텐데. 만약 프랑스에서 주교들과 소르본 학자들과 수도회들이 철저하게 결속됐다면 십년 이내에 이단이 다 척결됐겠지.」
이단이 척결될 수 있었을 근거를 성인이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단을 전혀 비방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이단에 반대되는 설교를 하는 셈이다.」[각주:4]
뼛속 깊은 증오로 갈라진 교회는 사랑을 체계적으로 실천할 수 없으며 설교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건 명백한 위선일 뿐. 그리하여 결속 대신 끊임없는 불화가 있었고, 사랑 대신 신학자들 간의 완고한 반감과 또 카스트며 학파며 교파의 공격적 애국주의가 있었다. 예수회와 소르본 간의 반목에 이어 얀센파와 또 예수회며 살레시오 동맹 간에 반목이 생겼다. 그 뒤로 정적주의[각주:5]와 ‘사심 없는 사랑’ 지지자들을 둘러싸고 기나긴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프랑스 가톨릭교회 안팎의 불화는 사랑이나 설득이 아니라 권위적인 포고령으로 조정됐다. 이단자들 문제는 용기병[각주:6]의 위그노 박해와 끝에 가서 낭트칙령[각주:7] 폐지로 해결되고, 티격태격하는 성직자들 수습에는 교황의 대칙서들과 파문 위협이 동원됐다. 질서가 복원됐지만, 그건 가장 명예롭지 못한 길에서 전혀 영적이지 못하고 종교와 휴머니티와도 거리가 먼 방법으로 이뤄졌다.
당파에 대한 충성은 사회적으로는 피해가 막심하지만 개개인에게는 적잖은 보상을, 하다못해 공명심이나 탐욕보다도 여러 모로 더 많은 보상을 안길 수 있다. 뚜쟁이들이며 고리대금업자들은 저들 일에 자부심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당파 투쟁은 거기에 빠지는 사람들이 사욕을 취하면서도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게 하는 복합적 열정이다.
정당하며 심지어 성스럽다고 정의되는 그룹을 위해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 자신을 훌륭하다 여기고 이웃들을 몹시 싫어할 수 있으며 권력과 돈을 추구하고 공격성과 잔혹함의 쾌감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 자부하기도 한다. 제가 속한 그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다 보면 이런 유쾌한 악덕을 행하면서도 영웅처럼 행동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조직이나 당파의 구성원들은 자신을 죄인이나 범죄자가 아니라 이타주의자며 이상주의자로 인식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한데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이타주의란 실상은 훅 불면 꺼질 이기주의일 뿐이며, 많은 경우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는 이상주의란 실상은 끽해야 당리당략과 파벌적 열성의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탈이 생긴다.
루덩 지역 수도사들을 비난할 때 그랑디에는 정의로운 열정으로 하나님 사업을 수행한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속 사제단과 그의 좋은 친구들인 예수회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카르멜회와 카푸친회 수사들은 수도원 담장 안에 있으면 충분하잖아. 아니면 인적 드문 마을들에서 미션 활동을 벌이면 되지. 도시 부르주아의 행사와 일에 어찌 감히 코를 들이민단 말인가! 하나님은 부유하고 존중 받는 이들을 세속의 성직자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정하셨어. 필요하다면, 선량한 예수회 수사들 도움을 좀 받아서 말이야.
새 주임신부가 처음에 취한 조치 하나를 설교단에서 공표했다. 앞으로 모든 신자는 외부 성직자가 아니라 교구 신부한테만 고해해야 합니다.
남자들보다 더 자주 고해하러 다니는 여성들이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됐다. 이제 우리 성직자는 단정하고 잘 생긴 젊은 학자인데다 신사 매너까지 지녔어. 카푸친회나 카르멜회 감독 누구라도 그 정도는 못 되잖아!
거의 하룻밤 사이에 수도사들이 자기네한테 와야 할 참회자들을, 나아가 도시에서 영향력을, 거의 다 잃을 지경이 됐다.
St. Francis de Sales (1567-1622) - 스위스의 반종교개혁 지도자, 제네바 주교, 방문동정회 설립. 가톨릭 성인, 교부. [본문으로]
quietism - 17세기 후반 에스파냐의 몰리나 등이 주창한 가톨릭 신비주의 경향. 몰리니즘. [본문으로]
dragonades - 위그노 가정마다 머물던 용기병들. 프랑스 정부가 위그노들을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기 위해 시행. [본문으로]
Edict of Nantes -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 위그노들에게 광범위한 종교 자유를 부여하고 완전한 시민권을 허용. 그러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낭트 칙령의 정치적 조항들을 1629년 알레 칙령으로 무효화했고, 1685년 루이 14세가 완전히 철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