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1960년 9월 케네디와 닉슨의 티브이 토론 이후 최고로 관심 끄는 이벤트요, '공부벌레' 여성 후보자와 '부동산 갑부' 떠벌이 남자의 첫 대결이며, 여론조사 업체들의 조사 결과 현재 지지율이 박빙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라이브 중계 예상 시청자가 1억 명이 될 것이라 하던 티브이 토론… 흥미로웠습니다.
저로서는, 내용도 그렇지만 (내용은 차치하고) 그 형식에 관심이 컸어요.
달리 표현해, '무엇을 말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말하느냐'라는 것이지요.
선입견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긴 쉽지 않겠지만, 힐러리가 돋보이는 한 판이더군요.
트럼프는...
낭랑함이 부족해서 심지어 쉰 듯한 목소리를 들고 나왔어요. 그렇다고 듣기에 많이 거슬리는 것은 아니지만... 감기에 걸렸나요? 아니면 본래 호흡기에 좀 문제가 있나요? 말하면서 코로 거칠게 숨 들이쉬는 소리가 듣는 사람의 주의를 흩뜨려 놓더군요. 심지어 (예민한 사람에겐) 일말의 혐오감마저 들 정도로.
셀프컨트롤이 부족해요.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불필요하게 언성을 높이는 대목이 더러더러 나오더군요. 그게 전략이라면 잘못된 전략이고, 기질이 그렇다면 (큰일을 하겠다는 사람으로서는) 일정 부분 바꿔야 하겠지요. (좋게 말해) 열정이 지나치다 보니까, 후반에 가서는 입가에 '게거품'도 생겨요. 불결해 보입니다.
왼쪽 어깨가 계속 내려가 있어서 뭔가 불안해 보여요. 뭔가 균형이 안 잡힌 사람 같이... 오른손을 시종일관 흔들어대는데, 이것 역시 마이너스 요소에요. 발언과 마찬가지로 제스처도 간결해야 합니다. 과유불급.
물론, 표정도 중요하겠지요? 상대가 적수라 해도 그런 무대에서는 존중하는 빛을 보이는 게 좋습니다. 적어도 인간적으로는 말이지요. 단지, 세상 보는 눈과 견해가 다를 뿐이며, 그 차이를 두고 토론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청자들의, 관객들의 무의식에 좋은 인상이 저절로 생깁니다. 후한 점수를 받게 되는 거지요.
무례한 측면도 있어요. 상대방이 발언하는데 함부로 끼어드는 것 말이죠. 반박할 필요가 있다 싶으면, 상대방 얘기가 끝난 뒤 하나씩 간결하게 응수하면 되는 것을. (혹시 어떤 대목을 잊을까 염려된다면, 메모해 둬야겠지요? 마크 트웨인처럼 손톱에라도 적든지 말입니다.^^)
물론, 토론 기법이나 논쟁술에 '자기한테 불리한 대목은 못 들은 체 넘어가며 딴청 피우기'도 있긴 해요. 그래서 논적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모든 결과는 청자들 판단에 달렸습니다. 한마디로, '네거티브 전략'은 당장에 먹힐지 모르지만 크게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힐러리는...
흠, 내용은 놔두고 말하기 형식에서 보자면, 거의 완벽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도 잘 다듬고 유지하고, '또박또박' 발음이 얼마나 명료한가요! 그렇게 딕션이 잘 갖춰진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예요. 억양이 (스타카토가 아니라 레가토로) 매끈하게 이어져서 마치 좋은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표정도 좋잖아요? 잔잔한 미소는 보는 사람들 마음도 편하게 해줘요. 물론, 진지한 대목에서는 심각한 표정도 나오고 말이죠. 자연스럽게. 언어적 수단(말)과 비언어적 수단(신체언어)가 일치해야, 그 말에 설득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이란 결국 뇌에 담긴 생각과 심장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제스처며 몸 움직임도 정제돼 있어요. 쓸데없이 흔들어 대서 듣고 보는 이들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더군요.
'이메일' 건과 관련해서,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합니다.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에요. 우리네 사람들이란 다 언제든 실수할 수 있어요. 그것을 감추고 덮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법.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합니다.
토론과 대화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매너를 잘 보여줬습니다. 정작 필요하다 싶은 순간에도 함부로 끼어들기를 자제하고, 상대방의 '인신 공격성 발언'에도 발끈하지 않으며 재치 있고 여유 있게 넘깁니다. "스태미너가 부족해" 운운하는 말에, 저 같으면 "넌 코나 좀 풀고 말해" 하고 응수하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ㅎㅎ 힐러리는 그렇게 하지 않더군요. 멋있습니다.
194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칠순인데, 우아~~ 그 나이에도 그런 목소리와 음색과 표정과 논리와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심적 부담이, 스트레스가 상당한 자리에서도 90분 동안 (후반에는 목소리에 약간 피로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우아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티브이 토론은 (적어도 겉으로 뵈기엔) 거칠고 천박하고 욕심 많은 '무대뽀' 부동산 졸부 출신과 (적어도 겉으로 뵈기엔) 따스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을 겸비한데다 경륜까지 갖춘 인텔리 정치인의 대결,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CNN에서 티브이토론 이후 조사한 여론은, 응답자 27%가 트럼프에게, 62%가 힐러리에게 점수를 주었다네요.
대화나 토론, 연설 등을 어떻게 하는지, 말하는 것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을 거의 다 알 수 있습니다. 성품, 경륜, 기질, 교육수준, 인성, 식견, 삶의 방향, 심신 건강 상태, 심지어 성장 과정 등등을.
이제 상상해 보시지요. 화창한 날, 여러분이 기차에 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샌들을 신고 의젓한 모습입니다. 객차에 오르는데, 샌들 한 짝이 벗겨져 철로 위에 떨어집니다. (스피커가 샌들 한 짝을 벗어 연단 아래로 떨어뜨린다.) 여러분은 그걸 주우려 하지요. 한데, 너무 늦었어요. 기차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라면, 재수 없다고 툴툴거리고 떨어뜨린 샌들 때문에 뚜껑이 열릴 겁니다.
심사위원장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미스터 G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한 인물의 전기를 언젠가 읽었는데, 그이에게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더군요. 미스터 G는 떨어뜨린 샌들을 되찾기 어렵다고 깨닫자마자, 재빨리 다른 짝을 벗어서 철로 위로 내던졌지요. (스피커가 다른 짝을 벗어 연단 아래로 던진다.) 왜 그랬냐고 주변에서 묻자 미스터 G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 첫 번째 샌들을 발견한 가난한 이가 두 번째 짝을 발견하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소…"
"아아, 참으로 멋져!"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이 스토리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너그러움에 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스터 G가, 미스터 간디가, 그렇게 위대한 리더가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간디는 어려운 이들한테 마음 쓰는 용기를 낸 겁니다.
"에그, 겨우 샌들 한 켤레 가지고 뭘 그래?"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음에 출근할 때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신발을 신지 않고 성큼 성큼 사무실로 들어가 봐요. (스피커가 맨발을 들어서 청중에게 보인다.)
"어이, 신발은 어디 있어?" 하고 누군가가 묻습니다.
"아, 오다가 노숙자한테 건네줬지."
"아아, 참으로 멋져!" 그들이 그렇게 말할까요?
천만에! 당신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볼 겁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마음 쓰자고 용기를 내는 일이 때론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 쓸 때, 여러분은 미스터 G와 같은 사람인 겁니다. 제가 한번은 미스터 G가 되어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한 그룹을 위해 디제이 노릇을 한 것인데, 그들은 다 청각 장애를 겪는 이들이었어요. 청각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음악을 틀어 주다니, 먹혀들 리가 없었지요!
아주 요란한 음악으로, 그들이 움직여 춤을 추게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선 채… 그저 수다만 떨었어요. (스피커가 대화를 묘사하려고 수화를 몇 가지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요. 그들 세계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하나 번뜩였는데, 그게 실패한다면 나는 백 명 앞에서 멍청이로 보였을 거예요.
어떤 사람한테 수화를 몇 가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요란하게 울리는 스피커 위로 뛰어 올랐어요. 아니, 사실은 기어올라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스피커가 두 팔을 허공에서 흔든다.) 자, 이게 수화로 고함을 치는 거예요! 누군가가 마주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 손을 흔든 겁니다! 백 명의 미소가 손을 흔들어 답례한 것이지요.
나는 그들이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볼륨을 마구 높였어요. (화자가 볼륨 스위치 돌리는 흉내를 내고, 리듬을 표시하기 위해 오른쪽 발을 굴러 소리를 낸다.) 그러고는 "나하고 춤을 춥시다!" 하는 사인을 보냈어요. 그리고 우리는 춤을 추었습니다. (허공에서 팔을 저으며 한 바퀴를 빙 돈다.)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어요. 우리의 기쁨은 천 개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습니다. 내 안에서 단어들이 마구 튀어나왔습니다. 더 이상 가슴에 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크게 소리 쳤고… (발 구르기를 멈춘다.) 그들도 다 함께 응대하여 외쳤습니다. "우리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요, 난 알아요. "아아, 참으로 멋져!" 가슴의 소리를 들을 때, 여러분께서는 누군가에게 마음 쓸 용기를 냅니다. 미스터 G 한 분이 12년 전 내 가슴의 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나는 토스트 마스터즈의 새내기였구요. 그건 내 두 번째 스피치였어요.
아아,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 심장이 쿵쿵 뛰었지요. 많은 분들 앞에서 한껏 흥분됐어요.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몇 마디 꺼내자마자, 내 뇌가 폭염 속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땀이 얼굴에서 흘러 뱃구레를 거치고는 구두에 가득 고였습니다. 당황한 상태에서 떠듬떠듬 몇 마디를 이어갔어요.
"죄송합니다. 스피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과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비척대며 자리로 돌아온 거예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이 그룹에 다시는 안 나오겠다고 마음먹었지요. 'TM'은 Toastmasters가 아니에요, 이건 끔찍한 마조히스트들인 거예요! (*토스트마스터즈는 세계적인 스피치 클럽. 해마다 각국에서 2만여 명이 참여하는 스피치 경연을 벌임. 여기서, Terrible Masochists를 넣어, 일종의 언어유희. 청중 웃음을 자아낸다.)
그때 따스한 손길이 어깨에 와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아봤어요. 미세스 G가 미소 띤 얼굴로 나직이 말하더군요.
"용기 내신 걸 축하해요. 당신이 금방 실행한 일을 대다수는 엄두도 못 낼 거예요."
그때 다른 쪽에서 미스터 G가 내 손을 덥썩 잡더군요.
"좋은 스피치요. 다음엔 더 좋아질 거라오."
그 순간, 내가 그 가난한 사람임을 알게 됐습니다. 기차역에서 샌들 두 짝을 발견한 사람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당신이 고맙고 (몇 사람을 응시한다.) 당신도… 또 당신도…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나처럼 여러분 너그러움에 감동 받은 이들을 두루 대신하여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샌들을 떨어뜨릴 때, 여러분은 바로 미스터 G가 된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손을 뻗을 때… 그건 희망의 샌들이고, 여러분께서 가슴의 소리를 들을 때… 그건 기쁨의 샌들, 누군가에게 마음 쓰려 들 때… 그건 격려의 샌들입니다.
인생의 열차에서, 세상은 바로 여러분 같은, 미스터 G와 미세스 G가 더 많아지기를 갈구합니다. (화자가 호각을 분다.)
다들 승차하십시오!
* 이 스피치에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연구하고 본받을 요소들이 제법 많습니다. 텍스트 구성과 수사 장치, 기발한 오프닝과 마무리, 소도구 활용, (무엇보다도) 제스처와 신체언어, 무대 동작 등등. 그런 점을 내일 함께 알아봅니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This is the start in my lif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Because belei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오늘 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한 대학을 마치고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과 함께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이 내가 대학 졸업식을 가장 가까이서 접해 보는 경우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내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리드 대학을 한 학기 다니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 동안 청강생으로 드나들다가 아예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내가 왜 대학을 포기했을까요?
이 얘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돼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예정됐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서 자기네는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한밤중에 입양 대기자 명단에 있는 다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부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생모는 나중에야 내 어머니(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내 아버지(양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가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17년 뒤 나는 정말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순진하게도 나는 여기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였던 내 부모(양부모)는 저축한 돈을 다 내 대학 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렇게 돈 쓸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부모는 평생 모든 돈을 내 학비를 위해 쓰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는 모든 게 잘 되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 중에서 가장 잘한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내게 흥미가 없던 필수 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고, 흥미롭게 보이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 멋있는 것만은 아니었지요.
나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 먹기 위해 5센트를 주는 콜라병을 모았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주일 밤마다 7마일을 걸어다니곤 했습니다.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가다가 부딪힌 것들 중 많은 것은 나중에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지요.
내가 다녔던 리드 대학은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체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곳곳에 걸린 포스터와 표지물들은 전부 손으로 그린, 아름다운 글씨체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정규 과목들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 보려고 서체 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익히고, 훌륭한 활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나에겐 이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실제로 응용될 것이란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뒤,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났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대학에서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는 맥 컴퓨터를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만일 정규과목을 그만두지 않고 서체과목에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처럼 놀라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 없습니다.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들에, 이를테면 자신의 내면과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에든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점들이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판단을 따르는데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로 인해 탄탄대로를 벗어나게 될 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이 변화할 것입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내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나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삶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찾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우즈 (*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 창업자)와 나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 뒤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맥킨토시 컴퓨터를 1년 빨리 시장에 출시했는데, 그 때 나는 나이 서른을 갓 넘겼습니다. 그리고 나는 해고를 당했지요.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내막은 이렇습니다.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회사를 운영할 어떤 사람을 고용했고 첫해에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서른 살이었던 나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성인으로서 내 삶의 초점이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는 참담한 신세가 됐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나는 정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기존의 기업가 세대는 물러나게 된다는 듯한 느낌, 지휘봉을 물려받았듯이 그렇게 내려놓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데이비드 팩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그들을 힘들게 한 점을 사과했습니다. 나는 아주 공식적인 실패자였습니다. 실리콘 밸리로부터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이 내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 애플과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 나는 거부당했지만, 여전히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가장 좋은 경우가 됐습니다. 모든 일에 뚜렷한 확신은 없었지만, 성공에 대한 부담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들어설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 뒤 5년 동안 나는 NeXT라는 회사, 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시작했고, 나중 아내가 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놀라운 반전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나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린과 나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들은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겁나는 시험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끌어간 유일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관계에서 그렇듯이,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결국 당신은 거의 올바른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구절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 뒤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라고 이어질 때, 나는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삶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 거의 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죽기 마련인 운명의 존재임을 늘 기억한다면, 우리는 잃는다는 생각의 함정을 가장 잘 피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벌거숭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거의 한 해 전,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서 종양이 발견된 겁니다. 그때 나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치료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남은 수명이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선고했습니다. 의사는 나한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곧, 죽음을 준비하라는 거지요. 가족과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온종일 그 진단만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고 조직 검사를 받았습니다. 몇 점의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검사한 끝에, 의사들은 놀랍게도 나의 경우 아주 드물지만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췌장암으로 드러났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게 됐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십년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유용하긴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던 때보다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조차 거기에 가려고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목적지 입니다. 누구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훌륭한 창조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 내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은 것을 청소하고 새로운 것에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새로움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그때, 여러분도 점차 낡은 것이 되고 청소될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이,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여러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도그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젊은 시절, 나한테 <전 세계 목록>이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그 책은 바이블 같은 것이었지요.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튜워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그는 시적인 면들을 가미해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인데,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데스크탑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개정했고, 결국 그 책의 역할을 다 했을 때 최종판을 내었습니다. 그게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내가 여러분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 표지에는, 여러분이 여행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기 위해 손을 드는 곳과 같은, 이른 아침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사진 밑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갈망하면서, 늘 우직하게 살라." (Stay Hungry. Stay Foolish)
그건 그들이 책을 더 이상 찍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남긴 작별의 메시지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나 자신, 그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 퇴치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의 본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현재 잘 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께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량의 차를 인도 사람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더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사회가 하는 식의 소비 행태를 세계 70억 사람이 다 할 수 있을 만큼 지구 자원이 충분할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언젠가 우리가 다른 논의를 해야만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문명은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명은 시장 경제와 경쟁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소비와 발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시장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가 자원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나다니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시스템에서 우리가 연대나 공존을 논의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 관계인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번 행사의 중요성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큰 위기는 환경 위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위기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가 만든 이 거대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같은 소비 사회에 통제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량 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귀중한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소비가 사회의 동력인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많이, 빨리 소비해야만 합니다. 소비가 멈추면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가 마비되면 불황이라는 괴물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대량 소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품 수명을 줄이고 최대한 많이 팔도록 해야 합니다. 즉, 10만 시간을 사용하는 전구를 만들 수 있어도 1000시간 쓸 수 있는 전구만 팔아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 사용할 수 있는 전구는 이런 사회에서는 좋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더 일하고 더 많이 팔 수 있게 하려고 ‘일회용 사회’를 지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순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정치 문제이고,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동굴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제 부족한 식견에,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먼 옛날의 현자들, 에피쿠로스, 세네카, 아이마라 민족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조금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욕심에 끝이 없어서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국가의 대표자로서 리우 회의에 이런 마음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제 연설 중에는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수자원 위기와 환경 위기가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 모델인 것입니다. 또, 반성해야 할 우리네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저는 환경자원이 풍부한 작은 나라의 대표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300만 명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1300만 마리의 소가 있습니다. 염소도 800만에서 1000만 마리 정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량과 유제품, 고기를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주 작은 나라임에도 토지의 90%가 비옥합니다.
제 동지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간 노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하는 바람에, 결국 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토바이나 자동차 따위를 구입하면서 할부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다 갚을 즈음엔 그들도 저처럼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는 노인이 되어 있고,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우리네 인간의 운명이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과 지구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가장 핵심 가치가 바로 인류의 행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은 재임 중 대통령 봉급의 90%를 자선단체나 NGO에 기부. 대통령 관저는 노숙자들의 쉼터로 내주고 1300만 원쯤 되는 월급 가운데 1/10 정도를 가지고 부인의 소박한 농장에서 생활했다. 우루과이 국민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 2012년 브라질 리우 정상회의가 끝난 뒤에도 브라질 대통령의 전용기로 귀국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흑인 인권 운동 지도자. 조지아주 출생. 모어하우스大 졸업. 흑인 인권 옹호를 위한 非폭력 운동 전개. 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68년 멤피스에서 암살 당함.
[연설 배경]
1963년 8월 28일 노예 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행진에 참가했던 마틴 루터 킹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사에 길이 남을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구절로 유명한 이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인종 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 인권 운동의 발전을 앞당기는 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는 평을 받는다.
마틴 루터 킹은 청중에 따라 연설 내용을 조정하고, 청중 반응에 기민하게 부응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타고난 연설가였다. 이날의 연설 역시 특유의 호소력과 설득력이 가장 잘 나타난 명연설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자유를 위한 가장 훌륭한 시위가 있던 날로 기록될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령에 서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그 중대한 선언은 不義의 불길에 시들어가고 있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횃불로 다가왔습니다. 그 선언은 오랜 노예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즐겁고 새로운 날들의 시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흑인들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 차별이라는 속박과 굴레에서 비참하고 불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이 거대한 물질적 풍요의 바다 한가운데 빈곤의 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끔찍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국가로부터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야 할 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메리카합중국을 세운 사람들은 헌법과 독립선언문에 훌륭한 표현들을 써 넣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상속하게 되어 있는 약속어음에 서명했습니다. 그 약속어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삶과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피부색에 관한 한, 오늘날 미국이 이 약속어음이 보장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국은 이 신성한 의무를 존중하지 않고 흑인들에게 부도수표를 주었습니다. 이 부도수표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있는 기회의 금고에 자본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야 할 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수표는 우리가 요구하는 바대로 충분한 자유와 정의에 의한 보호를 우리에게 부여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의 긴박성을 미국인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선 냉정을 되찾으라는 사치스러운 말을 들을 여유도, 점진주의라는 이름의 진정제를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어둡고 외진 인종 차별의 계곡에서 벗어나 햇살 환히 비치는, 인종 간의 正義의 길로 들어설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神의 모든 자손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인종 간의 不義라는 모래 위에서 형제애라는 단단한 반석 위로 올라서야 할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긴박성을 간과하고 흑인들의 결의를 과소 평가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이 표출 되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만일 이 나라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면, 흑인들이 좀 진정하고 自足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친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흑인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기 전에는 합중국에 휴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날들이 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폭동의 소용돌이가 계속될 것입니다.
正義의 궁전으로 이르는 출발점에 선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위치를 찾을 때까지는 나쁜 행동을 하여 죄인이 돼서는 안 되겠다는 점입니다.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키면서 자유의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맙시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 다시, 우리의 힘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흑인 사회를 휩쓸고 있는 저 새롭고도 훌륭한 투쟁 정신이 백인들의 불신을 받는 데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백인들이 증명하듯이, 우리의 많은 백인 동지들은 그들 운명이 우리 운명과 이어져 있으며, 그들 자유가 우리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혼자서만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전진해야 한다는 맹세를 해야 합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권 운동가들에게 "언제가 되면 만족하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흑인들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의 공포에 희생되고 있는 한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습니다. 흑인들이 여행하다가 피곤에 지쳤을 때 고속도로 근처의 여관이나 시내 호텔에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이주한다고 해야 고작 작은 흑인 거주지에서 더 큰 흑인 거주지로 가는 것이 전부일 때,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뉴욕의 흑인들이 마땅히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 습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정당성이 힘찬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다가 여기 오게 되었다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다가 도리어 기소되어 두들겨 맞거나 경찰의 야만적인 폭력에 고통 받는 지역에서 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갖가지 고통을 겪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런 고생이 명예 회복이라는 신념으로 계속 일하십시오.
미시시피로 돌아가십시오. 앨라배마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조지아로, 루이지애나로 돌아가십시오. 우리의 현대적 도시인 빈민가로, 흑인 거주지로 돌아가십시오. 상황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명심하고 계십시오.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는 맙시다.
나의 친구인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저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지사가 늘 연방 정부의 조처에 반대할 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 부한다느니 하는 말만 하는 앨라배마주가 변하여,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 자매처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남부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는 신념입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개척하여 희망의 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나라의 이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을 형제애 가득 찬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념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며,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神의 모든 자식들이 새로운 의미로 노래 부를 수 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은 자유의 땅, 나의 부모가 살다 죽은 땅, 개척자들의 자부심이 있는 땅, 모든 산에서 자유가 노래하게 하라."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이것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가 뉴햄프셔의 거대한 언덕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의 큰 산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이니아의 앨러게니 산맥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콜로라도의 눈 덮인 로키 산맥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캘리포니아의 굽이진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스톤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테네시의 룩아웃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미시시피의 모든 언덕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모든 산에서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울려 퍼지게 될 때, 모든 마을과 모든 부락, 모든 주와 도시에서 자유가 울려 퍼지게 될 때, 우리는 더 빨리 그 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모든 자손들,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교도들,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들이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날이 말입니다.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전지전능한 신이여,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오후 남부로 돌아가지만, 절망에 빠진 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남부로 돌아가지만, 우리가 탈출구가 전혀 없는 컴컴한 지하감옥에 갇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새로운 날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아에서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 이르기까지 옛날 노예의 아들들이 옛날 노예 주인의 아들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백인 어린이가 흑인 어린이와 형제자매처럼 손을 잡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단순히 자유를 얻기 위해서 집이나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이 없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이마티오가 당해야 했던, 매그루더가 당해야 했던 잔학행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나의 네 아이가 내가 겪어야 했던 젊은 시절과 같은 것을 겪지 않고, 또 그들이 피부 색깔대신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평가 받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곳 워싱턴市의 흑인들이 돈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지 집을 사거나 세를 들고 집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땅에서 아모스의 예언이 실현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며, 진리가 거대한 분류처럼 흐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받았다는 제퍼슨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산골짜기가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주저앉으며, 거친 곳이 평탄해지고, 굽어진 곳이 곧게 펴지며, 주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인간이 함께 그것을 볼 수 있는 날이 오는 꿈 입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형제가 되는 꿈입니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나서서 절망의 산에다 희망의 터널을 뚫겠습니다 .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서서 어둠의 어제를 광명의 내일로 바꾸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날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아이들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태인이건 非유태인이건,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손을 잡고, 이렇게 흑인 영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 세션에서 함께 감상하고, 분석하고, 흉내도 낼 겁니다. 진정한 speech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접하게 됩니다. 우선, 내용을 좀 숙지할 필요가 있어요. 참고들 하시기 바랍니다. (*길다고 겁먹기 없기!! :-) 번역본도 이어서 올립니다.
<I Have a Dream>
I am happy to join with you today in what will go down in history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for freedom in the history of our nation.
Five score years ago,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today,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This momentous decree came as a great beacon light of hope to millions of Negro slaves who had been seared in the flames of withering injustice.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to end the long night of their captivity.
But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still is not free.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 of segregation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lives on a lonely island of poverty in the midst of a vast ocean of material prosperity.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is still languished in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and finds himself an exile in his own land. And so we've come here today to dramatize a shameful condition.
In a sense we've come to our nation's capital to cash a check. When the architects of our republic wrote the magnificent words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y were signing a promissory note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This note was a promise that all men, yes, black men as well as white men, would be guaranteed the "u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It is obvious today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this promissory note,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a bad check, a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Bu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y of this nation. And so, we've come to cash this check,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cy of Now. This is no time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Now is the time to make real the promises of democracy.
Now is the time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of segregation to the sunlit path of racial justice.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
Now is the time to make justice a reality for all of God's children.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This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will not pass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but a beginning. And those who hope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and will now be content will have a rude awakening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as usual.
And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of our nation until the bright day of justice emerges.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we must not be guilty of wrongful deeds.
Let us not seek to satisfy our thirst for freedom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of dignity and discipline.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Again and again,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of meeting physical force with soul force.
The marvelous new militancy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must not lead us to a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And the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 bound to our freedom.
We cannot walk alone.
And as we walk, we must make the pledge that we shall always march ahead.
We cannot turn back.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When will you be satisfied?"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 is the victim of the unspeakable horrors of police brutality.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bodies, heavy with the fatigue of travel,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children are stripped of their self-hood and robbed of their dignity by a sign stating: "For Whites Only."*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a Negro in Mississippi cannot vote and a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
No, no, we are not satisfied,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¹
I am not unmindful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s. Some of you have come fresh from narrow jail cells. And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where your quest -- quest for freedom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s redemptive.
Go back to Mississippi, go back to Alabama, go back to South Carolina, go back to Georgia, go back to Louisiana, go back to the slums and ghettos of our northern cities,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I say to you today, my friends.
And so even though we face the difficulties of today and tomorrow, I still have a dream. It is a dream deeply rooted in the American dream.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down in Alabama, with its vicious racists, with its governor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 and "nullification" -- one day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s sisters and brothers.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²
This is our hope,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to pray together, to struggle together, to go to jail together,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knowing that we will be free one day.
And this will be the day -- this will be the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My country 'tis of thee, sweet land of liberty, of thee I sing.
Land where my fathers died, land of the Pilgrim's pride,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And if America is to be a great nation, this must become true.
And so let freedom ring from the prodigious hilltops of New Hampshire.
Let freedom ring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Let freedom ring from the heightening Alleghenies of Pennsylvania.
Let freedom ring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Let freedom ring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But not only that:
Let freedom ring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Let freedom ring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and molehill of Mississippi.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And when this happens, when we allow freedom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고대 그리스의 중견 정치가로서 조국 위해 평생을 바치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평가를 받지만, 우리한테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웅변가로 다가옵니다.
그의 스피치를 들을 수는 없지만, 문헌의 기록으로 보자면 허풍은 아닌 듯싶고, 외려 감동을 안기는 뭔가가 있어요.
기원 전 384년 아테네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무기 생산 공장을 운영한 재산가였어요. 한데 데모스테네스가 일곱 살 때 부친이 죽으면서, 아들과 5세 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교육을 모친과 후견인들이 맡았는데, 후견을 맡은 외삼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가정교사들에게 보수를 주지 않고 두 조카의 양육과 교육에 무심했습니다. 사내애는 신체 발달이 더뎌 허약하게 자랐어요.
데모스테네스가 성인이 되자 후견인들은 그에게 노예들 딸린 저택만 내주고 재산 대부분을 빼돌려 차지했어요. 청년이 처음엔 유산을 돌려 달라고 후견인들 양심에 호소하고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자 강탈 당한 유산을 돌려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었습니다.(당대 관습대로) 법정에서 직접 성공적으로 싸우려면 아테네의 관습과 법률을 기본적으로 알 필요가 있는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게 잘 말하는 재주였습니다.
젊은 그가 후견인들과 법정에서 다툼을 시작했어요. 재판은 5년이나 걸렸습니다. 후견인들은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책임을 피하려 들었어요. 심지어 데모스테네스 부친의 유언장과 다른 중요한 서류들마저 파기했어요. 그럼에도 결국 데모스테네스가 이기긴 했지만, 유산을 다 돌려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 해에 걸쳐 치른, 이 고된 싸움 덕분에 장차 위대한 웅변가로서 바탕과 의지가 단련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대중 앞에 서기를 꿈꿨어요.
어린 시절에 당대 유명한 웅변가의 변론을 듣기 위해 법정에 데려가 달라고 가정교사한테 부탁할 정도였어요. 소년은 법정에 모인 군중이 웅변가에게 박수 보내는 것을 보았고, 군중을 사로잡은 달변의 힘에 놀랐습니다. 그 뒤 다른 학업이며 동무들과 어울리기를 다 그만두고 웅변술 연마에 매진하게 됐습니다. 웅변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한 겁니다.
그러나 군중 앞에 나서기 전에 다른 소송인들을 위해 법정 연설문 (변론) 쓰기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 작업에 아테네에서는 후하게 대가를 지불했는데, 청년은 모친과 누이를 부양할 뿐 아니라 돈을 좀 모을 정도로 열심히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변론문 작성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지요. 그는 바탕이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사회활동에 적극 나서기를 꿈꾸었거든요.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처음에 데모스테네스한테는 결함이 많았습니다.
빈약한 목소리와 짧은 호흡 때문에 웅변술을 연마하다가 도중에 자주 포기했고, 그때마다 방황하다가 또 새로이 시작하곤 했어요. 어려서부터 그의 말에는…
혀짤배기소리 같은 게 있어서 <르> 소리가 제대로 나지 못했고, diction이 깔끔하지 않으며 단어 강세도 잘못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신체에 좀 불균형한 면이 있는 탓에 한쪽 어깨를 자주 흔들었어요.
그런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니…
혀를 기민하고 유연하게 굴리기 위해 입안에 잔돌을 몇 개씩 넣은 채 명료하고 우렁차게 말하는 연습을 수없이 시도했고, 목소리와 호흡을 강화하기 위해 언덕을 빨리 걷거나 뛰어오르며 시구를 읊곤 했으며, 목소리 힘을 키우기 위해 바닷가 거닐면서 파도소리 능가하는 목청을 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집에 지하실을 만들어 며칠씩, 때론 몇 달이나 혼자 스피치 훈련에 전념하면서 바깥에 나가고 싶은 유혹을 떨치려고 머리 절반을 삭발하기도 했어요. 한쪽 어깨를 쓸데없이 떨고 흔드는 버릇을 고치려고 찔릴 위험마저 감수하며 지하실 천장에 날카로운 칼을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갈망하던 꿈을 이뤘습니다. 아테네 최고의 웅변가가 된 겁니다. 하지만원고를 미리 준비하지 않고는 스피치에 절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원고를 거의 다 외우곤 했어요. 원고 읽는 스피치에 능한 것이지요.)
밤마다 등불 곁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히 궁리해 원고를 작성하며 스피치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 위대한 웅변가의 적수들이 나중에 그에게는 영감과 천부적 자질이 없다고 비난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한 적대자는 이런 질책까지 퍼부었어요.
“당신 웅변에서는 기름 냄새가 나오.”
즉, “넌 밤마다 원고 다듬느라고 기름 램프 곁에 앉아 있구나” 하는 뜻이었어요. 그러나 결국에는 적대자들도 그의 달변의 힘과 솜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웅변가가 가장 본질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늘
“무엇보다 발음이고, 둘째는 또 발음이고, 셋째도 역시 발음”이라 대답하곤 했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딕션이겠지요?)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 노예제민주주의의 수호자였습니다. 아테네의 주요 적인 마케도니아 왕 필립에 반대해 저항하고 분노하여 30년 동안 줄기차게 연설하면서, 시민들 간에 반목을 다 거두고 마케도니아에 맞서 결속하자고 촉구하곤 했습니다. 그의 연설에 청중은 감동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화답하곤 했어요.
일설에 의하면, 필립 왕이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문을 입수해 읽어보고는, “이 연설을 직접 들었다면, 나한테 맞서 싸우자는 호소에 나도 지지를 보냈겠군”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스피치뿐 아니라 일반 대화에서도목소리 억양은 각별히 중요한 요소인데, 플루타르크는 데모스테네스 전기에서 특징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한번은 누군가가 데모스테네스를 찾아와 부당하게 고소당했다고 하소하면서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니야, 당신한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소.” 데모스테네스가 무뚝뚝하게 응대하자, 상대가 발끈하여 목청을 돋우었어요. “뭐, 나한테 그런 일이 없었다니, 도대체 뭔 소리요?” 그러자 데모스테네스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아, 그래, 이제야 억울하게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리는군.”
그는 정치적 열기가 달아오르고 분위기가 한껏 긴장될 때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태연자약했어요. 자신이 행하는 스피치에 사회가 더 많이 주목케 하고 청자들을 창의적인 생각으로 이끌기 위해 수사적 질문을 자주 던졌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이런 말을 왜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구요? 그건 바로…”
청중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는 듯한 경우마저 있을 만큼 수사적 질문을 즐겨 이용했습니다. 청중이 답변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더 나아가서는 사실상 대화 형식을 동원하고 기술하는 사건들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스피치를 극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