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피치는 읽는 거야, 말하는 거야?
음… 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당신에겐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는지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어린 시절에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이 떠오르나요?
미국과 세계의 문학에 큰 기여를 한 작품으로 흔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꼽습니다.
자전적 이야기 모음인 <미시시피 생활>, 또 만년에 들어 인간 기질을 섬세한 아이러니로 관찰한 기록 <사람이란 무엇인가> 같은 글도 읽어 볼 필요가 있어요.
트웨인은 과학과 기술 문제에 관심이 커서,
자신이 ‘번개에게 명령하는 사람’이라 부른 발명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대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아더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소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크 트웨인!” 하면 우리한테는 무엇보다도 신선하게 번뜩이는 유머와 풍자, 해학이 떠올라요.
글뿐 아니라 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이는 사실 아주 매력적이고 잘 나가는 연설가요 강연자이기도 해서, 여기저기서 초빙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까닭에 소통과 스피치를 연구하는 이들의 눈길을 끕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인간 탐구를 비롯해 사회와 정치 문제, 문명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동시에 만년 들어 대단히 비관적인) 고찰 등이 그의 내면세계를 지배한 주제들이었어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비판하면서 행한 반전 연설들은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지요.
미국의 필리핀 병합에 저항한 반제국주의 연맹에서 선두 역할을 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침략적인 대외정책을 신랄하게 파헤쳤고, 그런 정책을 고수하려면 성조기를 바꿔야 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비꼬았어요.
“지금 깃발을 그대로 둬도 되겠으나,
단지 흰 띠들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별들 대신에 해골과 뼈다귀들을 그려 넣도록 합시다!”
그이의 공개 연설과 강연 자료 중 많은 것이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글에서 트웨인은 이렇게 썼더군요.
언젠가 스피치를 끝내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한 지인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와서 물었다.
“당신 손톱에 무슨 문제라도 있소? 발언하는 중에 왜 손톱을 하나씩 들여다본 게요?”
그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건… 당신한테만 귀띔하는데, 스피치 개요를 잊지 않기 위해 손톱마다 키워드 머리글자를 하나씩 적어 두었기 때문이라오.”
그리고 둘이서 은밀한 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잘 먹히지 않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말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어떤 손톱까지 봤는지, 그러니까 다음 차례가 어떤 것인지 헷갈릴 때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또 고민했다. 써먹은 손톱의 글자를 지워야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침을 발라서?
그래, 그것도 방법이야. 하지만 손톱에 침을 바를 때마다 청자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게 여기겠지. 내가 스피치보다는 손톱 단장에 더 신경을 쓴다고 여길지도 몰라.
그이의 이런 고백이 실은 상상의 소산이요, 웃자는 얘기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심할 정도로 ‘원고 읽어 내리는 스피치’를 꺼렸다는 점입니다.
왜?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각종 형태의 말하기에서 (시종일관 혹은 부분적으로) 원고 읽기에 치중하다 보면, 이런 부정적 현상이 발생하게 되니까요.
*눈길이 원고에 쏠리기 때문에 청중과 시선 연결이 끊길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청중의 피드백을 정확히 알기가 힘들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목청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한다.
*단어들에 묶이기 때문에 대화체를 구사하기가 어렵게 된다.
*단어나 줄을 건너뛰거나 빠뜨릴 위험이 있고, 그러면 당신 얘기가 멍청하게 들릴 수 있다.
*단어들의 울림에 신경 쓰는 대신 단어들을 끄집어내기에 급급한 만큼, 목소리를 다양하게 구사하기가 (즉, 감정이입이) 어렵다.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요?
토가를 걸치고 작은 광장에서 일방적으로 사자후를 토하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에는 연설이든 강연이든 발표든 쌍방향의 대화 형식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질의응답 기술이 필요하고, 그래서 수사적 질문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화를 어떻게 하지요?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매 순간 감정에 잘 어울리도록 어조를 자연스레 바꿔 가며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점을 마크 트웨인은 (대다수 노련한 화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말할 때도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원고라는 족쇄에서 최대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준비된 원고를 그저 읽어 내려가는 것은 스피치에서 권장하지 않는 형식입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에 코를 처박고 읽기만 하는 (거친 표현을 용서하시길!) 화자의 말은 단조롭고 따분하고 지루하며, 그 당사자는 비전문적이고 불성실하고 자칫 어수룩해 보이기 십상입니다.
최소한의 핵심 단어들만 커닝(?)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호소와 주장을 기억하여 말할 때…
스피치에 더 큰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커집니다.
청자들에게 더 확실히 파고들게 됩니다.
언젠가 티브이 뉴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외상 일행과 마주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장관이 인사말을 하는데, 고개를 떨어뜨리고 탁자에 놓인 종이쪽에만 계속 눈길을 던진 채 말을 하지 뭡니까.
좀 의아했어요. 왜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예민한 외교적 발언이야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해도, 인사말조차 원고에 의존해서 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아니야, 혹시 보도하는 이가 어쩌다 그렇게 편집한 건지 몰라. (티브이 뉴스 제작에서는 먼저 ‘오디오’를 깔고 그 위에 ‘비디오’를 입힙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말과 입놀림이 일치한 것으로 보면, 인사말 위에 다른 화면을 덮은 것이 아닌데…
좀 속상했어요. 우리나라의 큰 위치에 있는 이가 다른 나라의 큰 손님 일행을 환영하여 인사를 하는데, 저렇게 할 수밖에 없나?!
좀 답답했어요. 누군가와 만나 악수하고 인사 나눌 때 우리는 한눈을 팔지 않잖아요? 그렇게 한다면, 그건 결례일 뿐 아니라, 상대방이 이쪽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들어요.
말을 해야 하는 자리와 상황에서 말은 하지 않고 글을 읽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도합니다.
국회 국정감사 현장을 티브이 중계로 보면서 답답하게 여기는 국민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각 기관의, 특히 정당의 대변인들 중에도 직책의 본래 소명에 어울리지 않게 말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어요.
이런 경우 앞에서 열거한 부정적 현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뷰어로서 길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매번 종이에 적은 것을 읽어야 한다면, 보고 듣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행사의 진행자로서 대본에만 자꾸 눈길을 돌린다면, 전체 분위기를 솜씨 좋게 이끌기란 기대 난망입니다.
-그렇다면, 뭐야, 스피치 원고는 절대 읽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런 의문이나, 혹은 반박마저 들리는 듯싶군요.
이 세상에 ‘절대’라는 단어로 못 박을 만한 일은 많지 않아요.
즉, 원고를 읽기만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법은 없어요. 오히려 원고에 더 충실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얘기 나누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고 호소력 있게 말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발언 텍스트를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좋아요. 물론 이때도 원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외운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스피치에서 암기하여 좋은 부분은
오프닝과 도입부, 본론 중에 인용구, 결어 정도로 족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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